비라라젠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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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비라라젠드라는 11세기 촐라 제국의 왕으로, 형제인 라자디라자 촐라와 라젠드라 촐라 2세 치세 동안 스리랑카와 우라이유르의 총독으로 봉사했다. 그는 서찰루키아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스리랑카의 반란을 진압했으며, 카다람을 정복하는 등 군사적 업적을 남겼다. 비라라젠드라는 딸을 서찰루키아의 왕 비크라마디티야 6세와 결혼시켜 동맹을 맺으려 했으며, 그의 딸 라자순다리는 동 갠가 왕조의 왕자와 결혼하여 아난타바르만 초다가강가 데바를 낳았다. 비라라젠드라는 1070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뒤를 아들 아티라젠드라 촐라가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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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라라젠드라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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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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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라자케사리바르만, 카리칼라 촐라, 마하라자디라자, 판디아 쿨란타카, 코네린마이콘단, 스리메디니발라바, 아하발라마 쿨라 칼란, 사칼라부바나스라야 |
통치 기간 | 1065년–1070년 |
전임자 | 라젠드라 2세 |
후임자 | 아티라젠드라 |
배우자 | 아룰몰리낭가이 |
배우자 유형 | 황후 |
자녀 | 아티라젠드라, 강가이 콘단, 라자순다리 |
아버지 | 라젠드라 1세 |
어머니 | 무코킬란 아디갈 |
출생일 | 1002년 |
출생지 | 촐라 제국 탄자부르 (현재의 인도 타밀나두 주 탄자부르) |
사망일 | 1070년 (68세) |
사망지 | 촐라 제국 강가이콘다 촐라푸람 (현재의 인도 타밀나두 주 자얀콘담) |
종교 | 힌두교 |
왕조 | 촐라 |
카드람의 왕 | |
통치 기간 | 1067년–1070년 |
지위 확립 | 신설 |
후임자 | 아티라젠드라 |
2. 초기 생애
비라라젠드라는 형 라자디라자 촐라 통치 초기에 스리랑카의 촐라 총독으로 임명되었고[5][6], 이후 다른 형 라젠드라 촐라 2세 통치 기간에는 우라이유르의 영주로 봉사했다.[11]
2. 1. 촐라 왕족
비라라젠드라는 형인 라자디라자 촐라의 통치 초기에 스리랑카의 촐라 총독으로 임명되었다.[5][6] 이후, 다른 형인 라젠드라 촐라 2세의 통치 기간 동안, 그는 우라이유르의 영주로 봉사했다.[11]3. 군사적 업적
비라라젠드라는 서찰루키아 제국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다. 주요 갈등 원인은 촐라가 벵기 찰루키아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비사이야바다이(현재 비자야와다) 인근에서 서찰루키아와 전투를 벌여 크리슈나강 둑에서 서찰루키아 군대를 격파하고 동찰루키아 영토에 대한 촐라의 권위를 재확립했다. 또한 싱할라 나두(스리랑카)를 침략하여 싱할라 왕들이 촐라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진압했다.
3. 1. 서찰루키아와의 전쟁
비라라젠드라의 통치 기간은 서찰루키아 제국과의 끊임없는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벵기 지역에 대한 촐라의 영향력을 둘러싸고 갈등이 발생했다. 비라라젠드라는 비사이야바다이(현재 비자야와다) 인근에서 서찰루키아 군대를 격파하고 크리슈나강둑에서 서찰루키아를 격파하여 동찰루키아 영토에 대한 촐라의 권위를 다시 확립했다.[4]소메슈바라 1세는 촐라에 대한 복수를 위해 여러 차례 침략을 감행했다. 비라라젠드라는 소메슈바라 1세의 아들들인 비크라마디티야 6세와 소메슈바라 2세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비라라젠드라는 카루르와 틴디바남의 비문에서 비크라마디티야 6세(비칼란이라고 불림)와 자야심하 3세(싱하나난이라고 불림)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한 채 전장을 도망쳤다고 자랑스럽게 주장한다.[2] 비라라젠드라는 또한 소메슈바라 1세의 군대를 다섯 번 이상 격파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전투는 쿠달 상가맘, 강가이콘다 촐라푸람, 카루르, 캄필리, 벵기에서 벌어졌다. 매번 소메슈바라 1세의 장군들(예: 참문다라자)은 참수당했다. 마두바나와 비크라마디티야 6세는 자야심하 3세, 안날라와 함께 전장을 도망쳤고, 마침내 아하바말라 소메슈바라 1세도 전투에서 도망쳤다.[7]
소메슈바라 1세는 쿠달 상가맘 전투를 제안했지만, 결국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촐라 군대는 한 달 넘게 기다렸지만 소메슈바라 1세는 나타나지 않았고, 결국 소메슈바라 1세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3. 1. 1. 쿠달 상가맘 전투의 불확실성
소메슈바라 1세가 쿠달 상가맘에 나타나지 않은 이유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몇 가지 추측이 존재한다. 소메슈바라 1세의 건강 문제, 왕위 계승 분쟁, 비크라마디티야 6세의 배신 등이 원인으로 제기된다.[8]소메슈바라 1세의 첫째 아들이자 후계자인 소메슈바라 2세와 비크라마디티야 6세 사이에 왕위 계승 분쟁이 있었고, 비크라마디티야 6세는 아버지와 싸우고 싶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칸나다에서 소메슈바라 2세가 추방된 후, 페룸베르에 있는 비라라젠드라의 비문에는 비크라마디티야 6세가 비라라젠드라와 동맹을 맺었다는 내용이 있다. 비라라젠드라는 즉시 비크라마디티야 6세를 찰루키아 왕위 계승자로 지명하고, 그의 딸과 비크라마디티야 6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다음 찰루키아 왕으로 삼겠다는 약속을 받고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소메슈바라 1세는 1068년 3월 자살하여 익사했는데,[8] 비라라젠드라의 기록에 따르면 소메슈바라 1세는 서쪽 바다에 몸을 숨기려 했다고 한다. 이는 소메슈바라 1세가 촐라 군대에서 도망가다 아라비아해에서 익사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3. 2. 스리랑카 반란 진압
비라라젠드라는 싱할라 왕들이 촐라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진압하기 위해 싱할라 나두(실론, 현재 스리랑카)를 침략했다.
싱할라의 왕 비자야바후는 로하나 지역을 중심으로 섬 남부를 통치하며 세력을 확장하고 촐라 점령군을 몰아내려 했다.[1] 마하밤사의 기록에 따르면, 비라라젠드라는 섬에 주둔한 촐라군을 로하나 지역으로 보내 공격하게 했다.[1] 비자야바후는 버마 왕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버마는 비자야바후를 돕기 위해 선박과 군인을 파견했다.[1] 이 도움으로 비자야바후는 랑카 북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1] 섬의 촐라군과 본토에서 파견된 지원군이 이 반란을 진압했지만, 비자야바후는 이후 몇 년 동안 촐라 점령 지역 내에서 계속해서 반란과 소요를 일으켰다.[1]
3. 3. 카다람 원정
비라라젠드라는 도움과 보호를 요청한 왕을 대신하여 카다람을 정복하고 그에게 넘겨주었다.[1] 이 사건은 1068년에 일어난 것으로 추정된다.[1] 이후 촐라 제국은 20년 동안 현재의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전역에서 일련의 침략과 정복을 계속했다.[1] 이는 촐라 왕국의 극동 지역 지배력을 재확인하고, 자바-말라야 반도의 일부 왕국이 스리랑카의 촐라 왕조 예하 지역을 포함한 촐라 영토 상인들에게 가했던 장벽을 제거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1] 스리비자야, 케디리, 참파 등이 이후 독립했음에도 불구하고, 비라라젠드라 시대부터 촐라 왕국의 거의 마지막 날까지(적어도 1215년까지) 타밀라캄과 극동 간의 무역 관계는 방해 없이 지속되었다.[1]4. 내치
비라라젠드라는 "비라메이-투나이가감"으로 시작하는 비문을 통해 자신의 업적을 널리 알렸으며, "라자케사리"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첸갈파투 지역의 사원에서 발견된 그의 비문에는 그의 탄생 별자리가 아슬레샤라고 기록되어 있다.[9] 라마나타푸람 지역 티루파투르의 티루탈리슈바라 사원 비문에는 그의 아버지가 푸르바데삼, 갠지스, 키다람을 정복한 인물로 언급되어 있다.[16]
오타쿠타르의 "비크라마 촐란 울라"는 비라라젠드라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வீர ராசேந்திர சோழன் கூடல சங்கமத்து நகரிலே, வாரணம் பல சுவறி, வாளமர் வேட்டருளியபின், பாரணி நிகழப் பரணி பாடிய சீர் அணி புலவர்க்குத் திகழ் பொன் ஈந்தனன்.|비라라젠드라 촐라 왕은 쿠달라 상가맘 도시에서 수많은 빛나는 발정기 코끼리를 죽였고, 위대한 파라니 시에서 시인들의 찬사를 받았다.ta 그는 비크라마 촐라의 혈통을 이었다.[10]
5. 동맹 및 정략결혼
소메슈바라 1세가 죽자 그의 아들 소메슈바라 2세가 1068년 4월 찰루키아 왕위에 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와 그의 동생 비크라마디티야 6세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여 서찰루키아에서 내전이 일어났다.[8] 비크라마디티야 6세는 비라라젠드라의 초라 궁정으로 도망쳤고, 그곳에서 왕의 환대를 받았다. 비라라젠드라는 비크라마디티야 6세를 서찰루키아의 왕으로 인정했다.[8] 비라라젠드라는 자신의 딸을 비크라마디티야 6세와 결혼시키고 그와 동맹을 맺어 두 제국 간의 오랜 반목을 중단시켰다.
비라라젠드라 촐라의 딸 라자순다리는 동 갠가 왕조의 왕자와 결혼했고, 그녀의 아들 아난타바르만 초다가강가 데바는 동 갠가 왕조의 시조가 되었다.
6. 죽음과 계승
비라라젠드라 촐라는 1070년 초에 사망했다. 그는 아마도 그의 형 라젠드라 2세 또는 라자디라자 촐라보다 그리 젊지 않았으며, 왕위에 올랐을 때는 아마도 중년에 접어들었을 것이다. 비라라젠드라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아티라젠드라 촐라가 왕위에 올랐다.[1]
쿨로퉁가 1세의 탄자부르 비문에는 비라라젠드라의 왕비 이름이 아루모리 난가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비라라젠드라는 알라반단이라는 형이 있었고, 그에게 'Rajaraja' 또는 Rajadhiraja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그는 치세 초기에 아들 마두란타카를 촐렌드라라는 칭호로 톤다이만달람의 부왕으로 임명했다. 역사학자 세투라만은 이 마두란타칸이 라자디라자 촐라 1세의 아들이라고 주장한다. 또 다른 아들 강가이콘다촐라는 판디아 영토의 부왕이 되었다. 이 두 아들 중 누가 아티라젠드라였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비라라젠드라는 그의 형 라자디라자처럼 자신의 아버지를 푸르바데삼, 강가이 및 카다람을 정복한 자로 언급했다. 그의 통치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매우 많은 수의 기부와 칙령을 발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치담바람의 틸라이(시반) 주님의 발치에 헌신했으며, 고품질 루비로 구성된 목걸이를 바쳤다. 그러나 그의 모든 선임자와 마찬가지로, 비슈누 신을 포함한 모든 종교의 사원을 후원하고 돌보았다.[1]
7. 평가
비라라젠드라는 뛰어난 군사적 역량을 바탕으로 촐라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왕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그의 사후 촐라 제국은 급격히 쇠퇴하여 그의 업적이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참조
[1]
서적
South Indian Shrines: Illustrated
[2]
서적
History of Ancient India
[3]
간행물
1935
[4]
웹사이트
Virarajendra Chola and the continuing struggles
https://historyunrav[...]
2023-11-17
[5]
문서
Mysore gazetteer, Volume 2, Issue 2
[6]
문서
The Cholas: mathematics reconstructs the chronology
[7]
서적
A military history of medieval India
[8]
서적
The Cambridge Shorter History of India
[9]
서적
South Indian Shrines: Illustrated
Asian Educational Services, 1982 - Hindu shrines - 638 pages
[10]
문서
[11]
문서
South Indian Inscriptions: Miscellaneous inscriptions in Tamil (4 pts. in 2)
[12]
문서
South Indian inscriptions, Volume 2, Parts 1-2
[13]
서적
Historical
Government Press, 1930 - Mysore (India : State)
[14]
서적
Ancient period
S. Chand, 1979 - India, South
[15]
서적
The Cholas: Mathematics Reconstructs the Chronology
Sethuraman, 1977
[16]
서적
Temples of Tamil Nadu, Works of Art
Fast Print. Service, 01-Jan-1996 - Hindu temples - 242 pages
[17]
간행물
A History of South India - From Prehistoric Times to the Fall of Vijayanagar (Reprinted 2003).
1955
[18]
서적
South Indian Shrines: Illustrated
[19]
서적
History of Ancient India
[20]
간행물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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