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리(Sari)는 이란 북부에 위치한 도시로, 카스피해와 인접해 있으며 마잔다란주의 행정 중심지이다. 선사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했으며, 고대에는 자드라카르타(Zadrakarta)로 불리며 히르카니아의 주요 도시였다. 7세기에 재건되었으며, 다부이 왕조 시대에는 타바리스탄의 수도였다. 몽골, 티무르, 투르크멘 등의 침략으로 쇠퇴했지만, 사파비 왕조 이후 카자르 왕조 시대에 도시가 발전했으며, 레자 샤 팔라비 시대에 도시의 모습이 크게 바뀌었다. 현재는 쌀, 유제품, 감귤류 생산이 활발하며, 마잔다란 목재 및 제지 산업 단지가 위치해 있다. 다슈트 나즈 국제공항, 철도, 도로, 항만을 통해 교통이 편리하며, 콜바디 하우스, 레세케 타워 등 역사적 건축물과 호스로 시나이, 압돌호세인 목타바드 등 예술가들을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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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잔다란주의 도시 - 람사르 이란 북부 카스피해 연안 도시 람사르는 습윤 아열대 기후와 높은 방사능 수치를 특징으로 하며 람사르 협약이 체결된 곳이자 온천과 숲, 람사르 궁전 등으로 유명한 관광지이다.
마잔다란주의 도시 - 아몰 아몰은 이란 마잔다란주에 위치한 고대 도시로, 이란 북부의 중심지로서 여러 왕조의 수도였으며, 압바스 왕조 시대에는 이란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였고, 현대에는 쌀 생산과 다양한 산업이 발달했으며 다마반드 산과 역사 유적지를 보유하고 있다.
이란의 옛 수도 - 사마르칸트 사마르칸트는 우즈베키스탄 남동부에 위치한 고대 도시로, 다양한 왕조의 지배를 거치며 이슬람 문화의 중심지로 성장했고, 티무르 제국의 수도로서 건축과 문화가 번성했으며, 현재는 역사적인 건축물과 다양한 종교 시설을 보유한 우즈베키스탄의 주요 도시이다.
이란의 옛 수도 - 이스파한 이스파한은 이란 중부에 위치한 오랜 역사의 도시로, 사파비 왕조 시대에 수도로 지정되어 번성했으며, 현재는 이란의 주요 산업, 문화, 관광 중심지 역할을 한다.
이란의 유적 - 발흐 발흐는 아프가니스탄 북부의 고대 도시로, 인도-이란 민족이 건설한 최초의 도시 중 하나이며, 조로아스터교 중심지이자 실크로드 요충지로서 다양한 문화와 종교의 영향을 받은 역사적인 도시이다.
이란의 유적 - 페르세폴리스 페르세폴리스는 고대 아케메네스 제국의 수도로, 다리우스 1세에 의해 건설되어 왕권 강화, 축제 거행 등에 사용되었으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침공으로 파괴되었으나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지정되어 이란의 관광 명소로 남아있다.
사리 시는 선사 시대부터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후토 동굴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기원전 7만 년경부터 사리 주변에 사람이 살았음을 보여준다.[4]
함돌라 모스토피는 피쉬다디 왕조의 타흐무레스 디브반드 왕이 사리를 건설했다고 기록했다. 페르도우시는 샤나메에서 마누체르가 살름과 투르에게 승리한 후 마잔다란의 페레이둔 수도인 '''타미셰'''로 돌아온다고 언급하며 사리의 이름을 언급한다. 기원전 658년부터 서기 225년까지 이 도시는 '''자드라카르타'''로 불렸다.
샤나메와 기타 자료에 따르면, 사리 원주민들은 대장장이 카베가 자하크의 폭정에 반란을 일으켰을 때 도시가 인구로 채워졌다고 믿는다. 피쉬다디의 페레이둔은 카베에게 빚을 졌다고 느껴 그가 죽을 때까지 함께 살기 위해 이 도시를 선택했다. 투라지와 살람이 이라지를 살해했을 때 그를 이곳에 묻은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에스파보드 투스-에 노자르는 가족 기념비로 남기기 위해 이 도시를 체계적으로 건설했다.[6]
사리는 기원전 6세기 (아케메네스 왕조)부터 고대 그리스 자료에서 언급된 도시 자드라카르타와 동일할 수 있다.[7] 그러나 다른 자료에서는 현대 고르간이 자드라카르타의 부지 또는 그 근처에 있다고 주장한다. 아리아노스에 따르면, 자드라카르타는 히르카니아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노란 도시"라는 뜻은 도시 외곽에 오렌지, 레몬 등 과일 나무가 많아서 붙여졌다. 자드라카르타와 사루는 안티오코스 3세가 아르사케스 2세에게서 빼앗은 폴리비우스의 시린기스와 동일할 가능성이 있다.
사리에서 발견된 고대 접시
1734년 사루를 방문한 한 웨이는 직경 약 9.14m, 높이 약 약 36.58m의 원형 홀 형태로 지어진 고대 마기 사원 4곳을 언급했다. 그러나 1811년에 그곳을 여행했던 윌리엄 오슬리 경은 이것들이 무슬림 시대의 벽돌 조적 덩어리라고 추측했다. 지진으로 인해 4개 중 하나만 남았다. 페레이둔, 살름, 투르 등 신화적 인물들의 이름을 가진 유사한 건물의 잔해도 있다. 아바스는 키루스 2세의 유해를 담고 있다고 여겨지는 카우스의 무덤이라고 불렸으나, 윌리엄 오슬리 경은 히즈라 4세기 동안 마잔다란을 통치했던 와쉬마킨의 아들 카부스 또는 카우스의 무덤이라고 생각했다.
젊은 영웅 소라브의 유해는 아버지 루스툼에 의해 사루에 안치되었다. 사루는 봄과 여름철에 향기로운 정원으로 유명하다. 동양 속담에는 "천국의 문은 사리의 공기에서 달콤함을 얻고 에덴의 꽃은 그 토양에서 향기를 얻는다"고 적혀 있다. 이 도시는 사산 왕조 시대에 다시 지역 수도였다.[8]
7세기에 다부이 왕조의 파루칸 대제가 도시를 재건했고, 아들의 이름이 "사루예"였기 때문에 도시를 이 이름으로 불렀다. 사리는 이 세기에 다시 타바리스탄의 수도가 되었다. (이전에는 아몰이 수도였다). 몽골 제국의 후예들, 우즈베크의 티무르, 오구즈 튀르크계의 투르크멘족, 타타르족의 침략 이후, 도시는 지위가 하락하여 주기적으로 불탔다.
사파비 왕조 샤 아바스 1세의 어머니 카이르 알-니사 베굼이 베흐샤르(아슈라프)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는 파라하바드를 페르시아의 북쪽, 즉 이 도시의 대체 수도로 세웠고 아슈라프에 정원을 조성했다.[9]사파비 왕조 아바스 통치 기간 동안, 인접한 길란과 함께 대규모의 조지아인, 체르케스인, 아르메니아인 및 기타 코카서스 민족이 마잔다란에 정착했으며, 그 후손들은 여전히 마잔다란 전역에 살고 있다.[9][10][11] 여전히 마잔다란의 많은 마을, 촌락 및 지역에는 "고르지"(조지아)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대부분의 조지아인들은 이미 주류 마잔다라니족에게 동화되었다.
사파비 왕조가 몰락한 후 아가 모하마드 칸이 권력을 잡기 전까지 사리에서는 주목할 만한 사건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카자르 왕조 이후에는 주요 발전이 있었다. 레자 샤 팔라비 통치 기간 동안 도시의 모습이 크게 바뀌었는데, 사리 기차역과 대부분의 거리 및 정부 건물은 그 시대에 건설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소련군이 도시를 점령했지만, 전쟁 후 철수했다.
2. 1. 선사 시대
후토 동굴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기원전 7만 년경 사리 주변에 인간 정착지가 존재했음을 보여준다.[4] 무슬림 역사가 함돌라 모스토피는 피쉬다디 왕조의 타흐무레스 디브반드 왕이 사리를 건설했다고 기록했다. 페르도우시는 샤나메에서 마누체르가 살름과 투르에게 승리한 후 마잔다란의 페레이둔 수도인 '''타미셰'''로 돌아온다고 언급하며 사리의 이름을 언급한다.
기원전 658년부터 서기 225년까지 이 도시는 '''자드라카르타'''로 불렸다.
샤나메와 기타 자료에 따르면, 사리 원주민들은 대장장이 카베가 자하크의 폭정에 반란을 일으켰을 때 도시가 인구로 채워졌다고 믿는다. 피쉬다디의 페레이둔은 카베에게 빚을 졌다고 느껴 그가 죽을 때까지 함께 살기 위해 이 도시를 선택했다. 투라지와 살람이 이라지 (페레이둔의 아들)를 살해했을 때 그를 이곳에 묻은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에스파보드 투스-에 노자르 (페레이둔의 증손자)는 가족 기념비로 남기기 위해 이 도시를 체계적으로 건설했다.[6] 사리는 기원전 6세기 (아케메네스 왕조)부터 고대 그리스 자료에서 언급된 도시 자드라카르타와 동일할 수 있다.[7] 그러나 다른 자료에서는 현대 고르간이 자드라카르타의 부지 또는 그 근처에 있다고 주장한다.
아리아노스에 따르면, 자드라카르타는 히르카니아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노란 도시"라는 뜻을 가진 이 이름은 도시 외곽에 오렌지, 레몬 등 과일 나무가 많아서 붙여졌다. 피에트로 델라 발레는 그의 "여행기"에서 "노란 도시"를 사루라고 언급했다.
자드라카르타와 사루는 안티오코스 3세가 아르사케스 2세에게서 빼앗은 폴리비우스의 시린기스와 동일할 가능성이 있다. 1734년 사루를 방문한 한 웨이는 직경 30피트, 높이 약 120피트의 원형 홀 형태로 지어진 고대 마기 사원 4곳을 언급했다.
그러나 1811년에 그곳을 여행했던 윌리엄 오슬리 경은 이것들이 무슬림 시대의 벽돌 조적 덩어리라고 추측했다. 지진으로 인해 4개 중 하나만 남고 나머지는 뒤집혔다. 페레이둔, 살름, 투르 등 신화적 인물들의 이름을 가진 유사한 건물의 잔해도 있다. 아바스는 키루스 2세의 유해를 담고 있다고 여겨지는 카우스의 무덤이라고 불렸으나, 윌리엄 오슬리 경은 히즈라 4세기 동안 마잔다란을 통치했던 와쉬마킨의 아들 카부스 또는 카우스의 무덤이라고 생각했다.
젊은 영웅 소라브의 유해는 아버지 루스툼에 의해 사루에 안치되었다. 사루는 봄과 여름철에 향기로운 정원으로 유명하다. 동양 속담에는 "천국의 문은 사리의 공기에서 달콤함을 얻고 에덴의 꽃은 그 토양에서 향기를 얻는다"고 적혀 있다. 이 도시는 사산 왕조 시대에 다시 지역 수도였다.[8]
2. 2. 고대
사리 주변 후토 및 카마르반드 동굴에서 이루어진 발굴을 통해 기원전 7만 년경부터 이 지역에 사람이 살았다는 증거가 발견되었다.[4] 무슬림 역사가 함돌라 모스토피는 피쉬다디 왕조의 타흐무레스 디브반드 왕이 사리를 건설했다고 기록했다. 페르도우시는 샤나메에서 마누체르가 살름과 투르를 상대로 승리한 후 마잔다란의 페레이둔 수도인 '''타미셰'''로 돌아온다고 언급하며 사리의 이름을 언급했다.[5]
기원전 658년부터 서기 225년까지 이 도시는 '''자드라카르타'''였다.
샤나메와 기타 자료에 따르면, 사리 원주민들은 대장장이 카베가 자하크의 폭정에 반란을 일으켰을 때 도시가 인구로 채워졌다고 믿는다. 피쉬다디의 페레이둔은 카베에게 빚을 졌다고 느껴 그가 죽을 때까지 함께 살기 위해 이 도시를 선택했다. 투라지와 살람이 이라지를 살해했을 때 그를 이곳에 묻은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에스파보드 투스-에 노자르는 가족 기념비로 남기기 위해 이 도시를 체계적으로 건설했다.[6] 사리는 기원전 6세기 (아케메네스 왕조)부터 고대 그리스 자료에 언급된 도시 자드라카르타와 동일한 도시일 수 있다.[7] 그러나 다른 자료에서는 현대 고르간이 자드라카르타의 위치 또는 그 근처에 있다고 주장한다.
아리아노스에 따르면, 자드라카르타는 히르카니아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노란 도시"라는 뜻을 가진 이 이름은 도시 외곽에 많이 자라던 오렌지, 레몬 등의 과일 나무 때문에 붙여졌다. 자드라카르타와 사루는 안티오코스 3세가 아르사케스 2세로부터 빼앗은 폴리비우스의 시린기스와 동일할 가능성이 있다. 1734년 사루를 방문한 한 웨이는 당시에도 서 있던 4개의 고대 마기 사원을 언급했는데, 이 사원들은 각각 직경 약 9.14m, 높이 약 약 36.58m의 원형 홀 형태로 지어졌다.
그러나 1811년에 이곳을 여행했던 윌리엄 오슬리 경은 이것들이 무슬림 시대의 벽돌 조적 덩어리라고 추측했다. 4개 중 하나는 지진으로 인해 나머지가 무너진 후에도 여전히 서 있다. 이와 유사한 건물의 다른 잔해들은 페레이둔, 살름, 투르 및 그들의 건립 2000년 전에 명성이 확립된 다른 신화적 인물들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들 중 하나인 아바스는 키루스 2세의 유해를 담고 있다고 여겨지는 카우스의 무덤이라고 불렸다. 윌리엄 오슬리 경은 그것이 히즈라 4세기 동안 마잔다란을 통치했던 와쉬마킨의 아들 카부스 또는 카우스의 무덤이라고 생각한다.
젊은 영웅 소라브의 유해는 그가 우연히 소라브를 맨손으로 죽인 후 아버지 루스툼에 의해 사루에 안치되었다. 사루는 봄과 여름철에 기분 좋은 향기를 내는 정원이 풍부하기로 유명하다. 동양 속담에는 "천국의 문은 사리의 공기에서 달콤함을 얻고 에덴의 꽃은 그 토양에서 향기를 얻는다"고 적혀 있다. 이 도시는 사산 왕조 시대에 다시 지역 수도였다.[8]
7세기에 다부이 왕조의 파루칸 대제가 도시를 재건했고, 아들의 이름이 "사루예"였기 때문에 도시를 이 이름으로 불렀다. 사리는 이 세기에 다시 타바리스탄의 수도가 되었다. (이전에는 아몰이 수도였다).
2. 3. 중세
샤나메와 기타 유사한 증거에 따르면, 사리 원주민들은 대장장이 카베(이 도시 출신)가 자하크의 폭정에 반란을 일으켰을 때 도시가 인구로 채워졌다는 민속을 가지고 있다.[6] 그 성공 이후, 피쉬다디의 페레이둔(타미샨 출신)은 카베에게 빚을 졌다고 느껴 그가 죽을 때까지 그와 함께 살기 위해 이 도시를 선택했다. 이러한 이유로 투라지와 살람이 이라지(페레이둔의 아들)를 살해했을 때 그들은 그를 이곳에 묻었다. 에스파보드 투스-에 노자르(페레이둔의 증손자)는 가족 기념비로 남기기 위해 체계적으로 이 도시를 세웠다.[6]
사리는 기원전 6세기(아케메네스 왕조)부터 고대 그리스 자료에서 언급된 도시 자드라카르타와 동일할 수 있다.[7] 그러나 다른 자료에서는 현대 고르간이 자드라카르타의 부지 또는 그 근처에 위치해 있다고 한다. 아리아노스에 따르면, 이곳은 히르카니아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이 용어는 "노란 도시"를 의미하며, 도시 외곽에서 자란 오렌지, 레몬 및 기타 과일 나무가 많아서 붙여졌다.
자드라카르타와 사루는 히르카니아와 파르티아의 반란 지역을 시리아 왕실에 재결합하려는 헛된 시도로 안티오코스 3세에 의해 아르사케스 2세로부터 빼앗긴 폴리비우스의 시린기스와 동일할 가능성이 있다. 1734년 사루를 방문한 한 웨이는 당시 여전히 서 있던 4개의 고대 마기 사원을 언급하는데, 각각 직경 약 9.14m, 높이 약 약 36.58m의 여러 원형 홀 형태로 지어졌다.
그러나 1811년에 그곳을 여행했던 윌리엄 오슬리 경은 이것들이 무슬림 시대의 벽돌 조적 덩어리라고 추측했다. 4개 중 하나는 지진으로 인해 나머지가 뒤집힌 이후에도 여전히 서 있다. 이것과 유사한 건물의 다른 잔해들은 페레이둔, 살름, 투르 및 그들의 건립 2000년 전에 명성이 확립된 다른 신화적 인물들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들 중 하나인 아바스는 키루스 2세의 유해를 담고 있다고 여겨지는 카우스의 무덤이라고 불렸다. 윌리엄 오슬리 경은 그것이 히즈라 4세기 동안 마잔다란을 통치했던 와쉬마킨의 아들 카부스 또는 카우스의 무덤이라고 생각한다.
젊은 영웅 소라브의 유해는 그가 우연히 소라브를 맨손으로 죽인 후 아버지 루스툼에 의해 사루에 안치되었다. 사루는 봄과 여름철에 기분 좋은 향기를 내는 정원이 풍부하기로 유명하다. 동양 속담에는 "천국의 문은 사리의 공기에서 달콤함을 얻고 에덴의 꽃은 그 토양에서 향기를 얻는다"고 적혀 있다. 이 도시는 다시 사산 왕조 시대에 지역 수도였다.[8]
7세기에 다부이 왕조의 파루칸 대제가 도시를 재건했고, 아들의 이름이 "사루예"였기 때문에 도시를 이 이름으로 불렀다. 사리는 이 세기에 다시 타바리스탄의 수도가 되었다. (이전에는 아몰이 수도였다).
몽골의 후예들, 우즈베크의 티무르, 오구즈 튀르크계의 투르크멘족, 타타르족의 침략 이후, 도시는 지위가 하락하여 주기적으로 불탔다.
2. 4. 근현대
샤 아바스 1세의 어머니 카이르 알-니사 베굼이 베흐샤르(아슈라프)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는 파라하바드를 페르시아의 북쪽, 즉 이 도시의 대체 수도로 세웠고 아슈라프에 정원을 조성했다.[9]사파비 왕조 아바스 통치 기간 동안, 인접한 길란과 함께 대규모의 조지아인, 체르케스인, 아르메니아인 및 기타 코카서스 민족이 마잔다란에 정착했으며, 그 후손들은 여전히 마잔다란 전역에 살고 있다.[9][10][11] 여전히 마잔다란의 많은 마을, 촌락 및 지역에는 "고르지"(조지아)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대부분의 조지아인들은 이미 주류 마잔다라니족에게 동화되었다.
사파비 왕조가 몰락한 후 아가 모하마드 칸이 권력을 잡기 전까지 사리에서는 주목할 만한 사건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카자르 왕조 이후에는 주요 발전이 있었다. 레자 샤 팔라비 통치 기간 동안 도시의 모습이 크게 바뀌었는데, 사리 기차역과 대부분의 거리 및 정부 건물은 그 시대에 건설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소련군이 도시를 점령했지만, 전쟁 후 철수했다.
3. 지리
사리 북쪽 해안은 마잔다란 해와 접해 있으며, 북동쪽에는 네카가 있다. 남서쪽에는 가엠샤르(구 샤히), 북서쪽에는 주이바르, 남쪽에는 키아사르, 담간, 셈난이 있다.[12]
사리는 습윤 아열대 기후(쾨펜 기후 구분 ''Cfa'', 트레와르타 기후 구분 ''Cf'')를 보이며 지중해성 기후(''Csa'')와 경계를 이룬다.[13] 겨울은 춥고 비가 많이 오며, 여름은 덥고 습하다. 2005~2006년 사리의 기상 통계 정보는 다른 마잔다란주 도시와 비교했을 때, 사리가 평균적인 기후를 보이지만, 햇볕이 더 많이 들고 봄에 비가 더 많이 온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최근 사리의 강수량은 감소했다.
마흐다슈트 기상 관측소의 극한 기온은 다음과 같다.
최고 기온 기록: 44°C 1980년 6월 4일[14]
최저 기온 기록: -5°C 1993년 2월 17일[14]
마흐다슈트, 사리 (1967-2003년 평균 및 극한 기온)[14]
월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연간
최고 기온 기록 (°C)
30.2°C
31.2°C
35°C
37°C
39°C
44°C
39°C
40.5°C
39°C
38°C
34°C
30°C
44°C
평균 최고 기온 (°C)
11.9°C
11.9°C
14°C
20.9°C
25.2°C
29.2°C
31.2°C
31.2°C
28.5°C
24.1°C
19°C
14.4°C
21.8°C
평균 최저 기온 (°C)
3.3°C
3.4°C
5°C
9.4°C
13.8°C
17.8°C
20.7°C
21.2°C
18.6°C
13.8°C
9.3°C
5.2°C
11.8°C
최저 기온 기록 (°C)
-2.5°C
-5°C
-3.5°C
1°C
2°C
4°C
8.5°C
10°C
2.5°C
0°C
-2°C
-5°C
-5°C
강수량 (mm)
105.2mm
91.5mm
100.6mm
60.5mm
53.2mm
36.2mm
35.5mm
58.8mm
88.9mm
98.1mm
104.4mm
114.4mm
평균 강수일수
8
8
10
7
6
4
5
6
7
7
7
8
평균 상대 습도 (%)
77
76
76
72
69
66
66
70
73
75
76
76
평균 이슬점 (°C)
3.4°C
3.2°C
5.5°C
10.2°C
14°C
17.2°C
19.2°C
20.2°C
18.3°C
14.1°C
9.6°C
5.7°C
2005년 강수량 통계[14]
월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강수량 (mm)
70.2mm
38.7mm
64.3mm
62.6mm
49.9mm
41.9mm
33.9mm
34.8mm
62.2mm
68.8mm
126.8mm
121.9mm
2005년부터 2006년까지의 기상 정보 통계치는 대체로 마잔다란주의 평균값에 가깝다. 일조 시간은 비교적 길고, 춘계 강수량은 많은 편이었다.
4. 인구
1950년 이전에는 도시 인구가 계절에 따라 변동하여, 여름보다 겨울에 더 많았다. 이는 통계 정보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이므로 주의해야 한다. 특히 여름에 실시된 조사는 정확성이 떨어질 수 있다. 2006년 전국 인구 조사 당시, 도시 인구는 71,522가구에 259,084명이었다.[17] 2011년의 다음 인구 조사에서는 90,798가구에 296,417명이 집계되었다.[18] 2016년 인구 조사에서는 도시 인구가 101,932가구에 309,820명으로 측정되었다.[19] ''미르자-자마니'', ''페이반디'', ''상'' 등 일부 지역의 인구 밀도는 1km2당 2만 명을 넘는다.
사리의 경제는 쌀, 유제품, 통조림 고기, 쿠키와 같은 식량 생산에 기반을 두고 있다. 특히 오렌지, 귤, 레몬 생산이 활발한 주요 감귤류 생산지이다. 콩, 포도와 같은 유지 작물은 식물성 기름과 식용유 생산을 위해 마을 주변의 광대한 토지에서 재배된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MM 회사의 공장은 도시에서 가장 큰 산업 단지였으며, 국가 최대의 식물성 기름 생산 공장 중 하나였다.[16]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국유화되었지만 파산하여 문을 닫았다. 종이, 목재, 직물, 건축 자재 등도 주요 산업이다. 중동 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의 Mazandaran Wood and Paper Industries(마잔다란 목재 및 제지 산업)는 세므난 로드(Semnan Road)에 위치한 2,000 에이커 부지에 자리 잡고 있으며, 국가 종이 수요의 20% 이상을 생산하는 주 전체의 주요 경제 주체이다. MWPI의 주요 자회사는 합판 및 파티클 보드를 제조하는 NEKA CHOUB Co.(네카 추브)이다.
이 도시는 Refah Chain Stores Co.(레파 체인 스토어), Iran Hyper Star(이란 하이퍼 스타), Isfahan City Center(이스파한 시티 센터), Ofoq Kourosh 체인 스토어(오포그 쿠로쉬 체인 스토어)에 의해 운영된다.
사리는 케이크, 정미, 요구르트, 유제품, 통조림 고기, 유지 종자 등의 식량 생산과 오렌지, 레몬 등의 과일 수출을 기반으로 하는 경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목재업, 제지업을 영위하는 ''Sanaie Choub Kaqaz''사와 ''Pishraneh Electronics''사는 서아시아에서 유명하다.
사리의 부동산 가격은 지역에 따라 1제곱미터당 220USD부터 11000USD까지 큰 폭으로 차이가 난다. 대부분의 사람이 집을 소유할 수 있지만, 쾌적한 기후로 인해 부동산 가격이 매우 비싼 편이다.
6. 문화
사리 주민 대부분은 마잔다라니어(타바리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지만, 페르시아어가 이란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언어이자 공용어이다.
Miansheh Lake
10세기에 사리에서 인도로 피난한 조로아스터교도들은 그곳에 "나부 사리"(Navu Sari, "새로운 사리")라는 도시를 세웠으며, 이 이름은 현재 나브사리로 줄여졌다. 이 도시는 여전히 인도의 조로아스터교 파르시 공동체의 중심지이다.
이 지역의 명소는 다음과 같다.
파라 아바드 해안
고하르 바란 해안
데흐카데 아라메쉬 관광 마을
타잔 강 공원
멜랄 공원 (타잔 강 서쪽에 위치, 자전거 트랙과 인공 섬 존재)[22]
자레 숲 공원
살라다레 숲 공원
다슈트-에-나즈 국립 공원
폴-에-가르단 하이킹 코스
네마슌 호수
라크-다슈트 호수
솔레이만-탕게 호수 (사리에서 남서쪽으로 45km 떨어진 댐 호수)[15]
밤-에-샤르 언덕 (도시의 훌륭한 파노라마 전망 제공)
고르-마라즈 (천연 온천, 네카)
자말로딘 콜라 (다마네 코헤 샤데즈)
6. 1. 문화 유적
사리의 아브 안바르
파젤리 하우스
벨라야트 공원
사리는 이란 북부에서 가장 중요한 문화적 장소 중 하나였지만, 지진 및 기타 요인으로 인해 문화 유산과 고대 기념물의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리는 사파 시티("궁궐의 도시")로 묘사되어 왔다.[23]
호스로 시나이는 1941년 1월 19일 사리에서 태어난 이란의 영화 감독으로, 이란 혁명 이후 국제적인 상을 처음으로 수상한 이란 영화 감독이다.[1] 그는 이란의 학자로도 알려져 있으며, 폴란드 공화국 공로 훈장의 기사 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1]
세예드 압돌호세인 목타바드는 1966년 사리에서 태어난 이란의 작곡가이자 페르시아 고전 음악 가수이다.[1] 그는 유명하고 전설적인 거장들의 지도 아래 성악 훈련을 받았으며, 1991년 데뷔 이후 이란과 해외, 특히 유럽 국가, 동남아시아, 북아메리카(캐나다, 미국) 등지에서 수많은 콘서트를 열었고 20개 이상의 음악 앨범을 제작했다.[1]
사리는 많은 작가와 시인을 배출했다. 미나 아사디는 아마도 가장 유명한 인물일 것이다. 그녀는 사리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저널리즘을 공부하고 카이한과 같은 신문사에서 저널리스트로 일하기 위해 테헤란으로 이주했다. 오늘날 미나 아사디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다.[1]
모흐센 에마디는 1976년 10월 29일 사리에서 태어난 페르시아 시인이자 번역가이다.[1]
6. 3. 종교
사리에는 조로아스터교도들이 이슬람교 이전에 건설한 자메 모스크가 있으며, 샤나메에 등장하는 이라지, 투르, 살름, 페레이둔, 소흐라브 등 많은 페르시아의 중요한 왕과 영웅들이 이 근처에 묻혀 있다고 전해진다.[12]
10세기에는 사리의 조로아스터교도들이 인도로 피난하여 "나부 사리"(새로운 사리)라는 도시를 세웠는데, 이 도시는 현재 나브사리로 불리며 인도 파르시 공동체의 중심지로 남아있다.
사리 시내에는 다음과 같은 종교 관련 유적들이 있다.
임맘자데 야흐야 (이맘 무사 이븐 자파르의 아들)[12]
임맘자데 아바스 묘, 사리 시 동쪽에 위치, 마잔다란주. 임맘자데 아바스 (이맘 무사 이븐 자파르의 아들)[12]
임맘자데 압돌라, 쿨라[12]
임맘 사자드 모스크 (이전에는 샤-가지라고 불렸으며, 원래는 마르카드-'알라-아돌레 학교라고 불렸으나, 로스탐 샤 가지가 1169년에 재건하여 가즈나비 시대에 샤-가지로 이름을 변경했다.)[12]
하아지 모스타파 칸 모스크 (소르테치)[12]
레자 칸 모스크 (호제 엘미예)[12]
몰라-마지드-아딘 장소[12]
샤자데-호세인 장소[12]
파네-칼라 장소[12]
7. 교통
사리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택시를 이용할 수 있다. 리무진, 무선 라디오 택시, 공항 또는 기차역 택시, 전화 택시 등이 있다. 시내 버스는 사리 교외 지역과 시내 중심부를 연결하며, 저렴하고 편리한 교통 수단이다. 사리는 밤에도 비교적 안전한 도시로 알려져 있지만, 주의는 필요하다.
7. 1. 항공
사리 국제공항
7. 2. 철도
사리는 고르간과 테헤란을 연결하는 셔말 철도 노선에 의해 연결된다. 이 노선은 이란 철도의 주요 지선이다.[20]
7. 3. 도로
이란-이라크 전쟁 이후 지역 고속도로가 잘 발달되었다. 22번 도로는 사리를 가엠샤르, 네카, 바볼과 같은 여러 도시와 연결하며, 고르간, 마슈하드와 같은 주 외부의 주요 도시와도 연결한다.[21]
사리에는 5개의 버스 터미널이 있지만, 그중 터미널-에 도울라트가 가장 많이 사용된다. 다른 터미널들은 사리에서 150km 이내에 있는 도시들, 즉 고르간, 노샤르, 찰루스, 키야사르를 운행한다.
시의 배치는 가끔 택시를 이용하게 만든다. 리무진, 무선 라디오 택시, 공항 또는 기차역 택시, 전화 택시 등 다양한 택시 시스템을 선택할 수 있다. 시내 버스도 흔하며, 사리의 교외 지역과 시내 중심부를 연결하여 해당 지역 주민들에게 저렴하고 편리한 교통 수단을 제공한다.
7. 4. 해상
아미르아바드 항은 카스피 해 남쪽 해안에 위치해 있다.
8. 스포츠
사리에는 다음과 같은 스포츠 시설이 있다.
자한-파흘라반 타흐티 스포츠 단지(Jahan-Pahlavan Takhti Sports Complex)는 파르항 거리에 있다.
하셰미-나사브 스포츠 단지(Hashemi-Nassab Sports Complex)는 자동차 고속도로 철도변에 있다.
몬타제리 스포츠 단지(Montazeri Sports complex)는 샤반드 지역에 있다.
사리의 모타기 축구 경기장은 이란에서 가장 오래된 스포츠 경기장 중 하나이지만, 요즘에는 주요 축구 경기에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사리는 여러 레슬러와 운동선수의 고향이다. 사리 출신의 주목할 만한 레슬러로는 아스가리 모하마디안, 마지드 토르칸, 모라드 모하마디가 있다. 이 도시는 2006년 레슬링 월드컵 대회의 개최지이자 현장이었다.
9. 교육
역사적으로 사리는 이란 역사상 가장 문화적인 도시 중 하나였다. 사리 출신 학자들의 과학적 지식은 역사 전반에 걸쳐 주목받았으며, 피에트로 델라 발레를 비롯한 방문객들에 의해 기록되었다.[1] 오늘날 사리의 대학교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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