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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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마옹은 조위의 충신 사마부의 손자이자 서진 무제의 사촌으로, 팔왕의 난 시기에 활약한 인물이다. 하간왕을 거쳐 평서장군으로 관중을 지켰으며,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인재를 중용하여 명성을 얻었다. 사마륜의 난 당시 처음에는 사마륜을 지원했으나, 사마경과 사마영에게 가담하여 사마륜을 축출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 사마경, 사마영, 사마예 등과의 연합과 대립을 거치며 세력을 확장했으나, 사마월과의 갈등 끝에 사마월의 회유를 받아들이고 낙양으로 향하던 중 암살당했다.
사마부의 손자이자 사마염의 재종형이며 사마충의 재당숙인 사마옹은 277년 8월 21일 하간왕이 되었으며, 299년 진서장군이 되어 관중을 지키게 되었다. 사마옹은 재물을 가볍게 보고 재주 있는 인사들을 아꼈으므로 조정에서는 그를 현명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사마옹은 재물을 가볍게 보고 재주 있는 사람들을 아꼈기에 조정에서는 그를 현명한 사람이라 평가했다.[1] 그러나 실제로는 권모술수에 능하고 잔인한 인물이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1]
[1]
서적
Book of Jin
2. 생애
301년 사마륜이 사마충을 몰아내고 황제 자리에 오르자, 사마옹은 처음에는 사마륜을 지원했다. 그러나 사마경과 사마영의 세력이 강해지자 이들에게 가담하여 301년 3월에 사마경, 사마영, 사마예 등과 연합해 사마륜을 축출하고 시중, 태위에 임명되었다.
302년, 사마옹은 이함의 건의에 따라 사마경을 토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사마영과 연합했다. 303년에는 사마영과 함께 사마예가 공로 처리에 불공평하고, 양현지와 황보상이 정치를 농단하며 충성스러운 사람들을 살해했다며 이들의 처벌과 사마예의 귀환을 요구하는 표문을 올렸다.
304년 1월, 장방이 낙양으로 들어가 사마예를 잡아 죽이자, 사마옹은 군사를 정(鄭)에 머물게 하면서 동쪽의 군사들을 격려했다. 3월에는 사마영을 태제로 삼으라는 표문을 올렸다. 305년 사마영의 장수 공사번이 군사를 일으키자 사마월 등에게 봉국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했지만, 사마월은 이를 거부했다.
306년, 사마월이 묘파와 묘윤 형제를 파견해 사마충을 장안에서 낙양으로 돌아오게 하자, 사마옹은 이들과 화해하려 했으나 장방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결국 사마옹은 장방을 죽이고 그의 머리를 사마월에게 보내 화해를 청했지만, 사마월은 이를 거절했다. 사마옹은 태백산으로 도망쳤다가, 12월에 사마월의 천거로 사도가 되었으나, 남양왕 사마모의 장수 양신에게 붙잡혀 목이 졸려 죽었다.[9]
2. 1. 초기 생애 및 관직
사마부의 손자이자 사마염의 재종형이며 사마충의 재당숙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청명한 명성을 얻었고, 재물에 집착하지 않고 사졸을 아꼈다. 여러 왕들과 함께 입조했을 때, 무제는 사마옹의 행동을 칭찬하며 여러 나라의 모범이라고 감탄했다고 한다.
274년 3월 12일 아버지 사마귀(司馬瑰)가 사망한 후 사마옹이 공국을 상속받았다. 태원왕이었다가 277년 8월 21일에 하간왕으로 개봉되었으며, 처음에 사마염이 석함이라는 제도를 만들 때 황제에게 아주 가까운 사람이 아니면 관중 지역을 진수할 수 없다고 했다.[1]
291년, 북중랑장으로 임명되어 업성을 다스렸다. 299년, 양왕사마융을 대신하여 평서장군으로 임명되어 장안으로 출진했다. 당시의 제도에서는, 황제와 가까운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만이 관중을 통치하는 것을 허락받았지만, 여러 왕들의 상소에 따라 특별히 허락받았다.[3] 사마옹은 재물을 가볍게 보고 재주 있는 인사들을 아꼈으므로 조정에서는 그를 현명한 사람이라 생각했으므로 그를 채용했다.[1]
2. 2. 팔왕의 난 참여

사마옹은 조위의 충신 사마부의 손자이자 사마염의 재종형이며 사마충의 재당숙이었다. 277년 8월 21일 하간왕이 되었으며, 299년 진서장군이 되어 관중을 지키게 되었다. 사마옹은 재물을 가볍게 보고 재주 있는 인사들을 아꼈으므로 조정에서는 그를 현명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사마옹은 팔왕의 난에서 처음에는 사마륜을 지원했으나, 사마경과 사마영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이들에게 가담했다. 302년에는 이함의 건의에 따라 사마경을 토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사마영과 연합했다. 303년에는 사마영과 함께 사마예가 공로 처리에 불공평하고, 양현지와 황보상이 정치를 농단하며 충성스러운 사람들을 살해했다며 이들의 처벌과 사마예의 귀환을 요구하는 표문을 올렸다.
304년 1월, 장방이 낙양으로 들어가 사마예를 잡아 죽이자, 사마옹은 군사를 정(鄭)에 머물게 하면서 동쪽의 군사들을 격려했다. 3월에는 사마영을 태제로 삼으라는 표문을 올렸다. 305년 사마영의 장수 공사번이 군사를 일으키자 사마월 등에게 봉국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했지만, 사마월은 이를 거부했다.
306년, 사마월이 묘파와 묘윤 형제를 파견해 사마충을 장안에서 낙양으로 돌아오게 하자, 사마옹은 이들과 화해하려 했으나 장방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결국 사마옹은 장방을 죽이고 그의 머리를 사마월에게 보내 화해를 청했지만, 사마월은 이를 거절했다. 사마옹은 태백산으로 도망쳤다가, 12월에 사마월의 천거로 사도가 되었다. 그러나 남양왕 사마모의 장수 양신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했다.[9]
2. 2. 1. 사마륜 토벌
301년 2월, 혜제가 사마륜에 의해 황제 자리를 빼앗기자, 혜제의 사촌인 사마경은 혜제를 다시 황제 자리에 앉히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처음에 사마옹은 자신의 장군 장방을 보내 사마륜을 도왔지만, 사마경과 그의 동맹인 혜제의 이복동생 사마영의 군사력이 강하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을 바꿔 반란군을 지지했다.[7] 사마경과 사마영이 사마륜을 물리치고 죽인 후, 사마경은 섭정이 되었고, 사마옹이 처음에는 사마륜을 도운 것에 화가 났지만 그에게 추가적인 영예와 구錫 중 세 가지를 하사했다.
조위의 신하였던 사마부의 손자이자 사마염의 재종형이며 사마충의 재당숙이였던 사마옹은 299년 진서장군이 되어 관중을 지키게 되었는데, 사마옹은 재물을 가볍게 보고 재주 있는 인사들을 아꼈으므로 조정에서는 그를 현명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301년 제왕 사마영이 여러 왕들에게 격문을 돌려 조왕 사마륜을 토벌하려고 할 때 처음에는 사마륜을 도우려고 해서 안서참군 하후석이 사마경에게 호응하려는 것을 알고 진무장군 장방을 파견해 하후석과 그 무리를 사로잡아 허리를 베었으며, 사마경의 격문이 도착하자 사신을 잡아 보내면서 장방에게 사마륜을 돕게 했다.
그러나 장방이 화음에 이를 때 사마옹은 사마경과 성도왕 사마영의 군사가 강하다는 소식을 듣고 장방을 불러 돌아오게 해 두 왕에게 가담했으며, 3월에 사마경, 사마영, 장사왕 사마예 등과 연합해 사마륜을 축출하고 사마륜이 죽게 되자 21일에 시중, 태위에 임명되었다.
301년 1월, 조왕 사마륜은 측근인 손수와 모의하여 제위를 찬탈하고 국정을 장악했다. 손수는 사마옹이 관중에서 강병을 옹호하고 있는 것을 깊이 우려하여, 보좌를 명목으로 신하를 파견하여 감시하게 했다.
그 후, 제왕 사마경이 사마륜 주살을 내걸고 거병하자, 전 안서참군 하후석은 시어사라고 자칭하고, 시평군에서 수천의 병사를 모아 사마경에 호응했다. 하후석은 사마옹에게도 협력하도록 사자를 파견했지만, 사마옹은 장사 이함과 모의하여, 사마륜에 가담하기로 결정하고, 주부 방양과 진무장군 장방을 파견하여 하후석을 토벌하게 했다. 하후석은 패배하여 붙잡혔고, 그의 동포 십여 명과 함께 장안의 저잣거리에서 요참에 처해졌다.
사마경으로부터의 사자가 격문을 가지고 사마옹에게 도착했지만, 사마옹은 그 사자를 붙잡아 사마륜에게 보냈다. 더 나아가 사마륜으로부터의 원군 요청에 응하여, 장방에게 관중의 제장들을 거느리고 사마륜을 원호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후에 사마옹은 사마경과 성도왕 사마영의 세력이 우세하다는 것을 알고 생각을 바꿔, 용양장군 이함·령독호 석위 등에게 장방군을 불러들이게 했다. 장방은 이 때 화음까지 진군해 있었지만, 이함 등은 따라잡아 그 행군을 중지시키고, 그대로 사마경 측으로 돌아섰다.
4월, 좌장군 왕여가 낙양성 안에서 정변을 일으키자, 손수를 주살함과 동시에 사마륜을 붙잡아 유폐하고 혜제를 복위시켰다. 이로 인해 사마륜의 세력은 와해되었고, 사마옹은 장안을 출발하여 낙양으로 입성했다.
2. 2. 2. 사마경, 사마예와의 대립
301년, 제왕 사마경이 여러 왕들에게 격문을 돌려 조왕 사마륜을 토벌하려고 할 때, 사마옹은 처음에는 사마륜을 도우려 했다. 그래서 안서참군 하후석이 사마경에게 호응하려는 것을 알고 진무장군 장방을 파견해 하후석과 그 무리를 사로잡아 허리를 베었다. 사마경의 격문이 도착하자 사신을 잡아 보내면서 장방에게 사마륜을 돕게 했다.[7]
그러나 장방이 화음에 이를 때 사마옹은 사마경과 성도왕 사마영의 군사가 강하다는 소식을 듣고 장방을 불러 돌아오게 해 두 왕에게 가담했으며, 3월에 사마경, 사마영, 장사왕 사마예 등과 연합해 사마륜을 축출하고 사마륜이 죽게 되자 시중, 태위에 임명되었다.[7]
302년, 장사 이함이 사마경을 토벌해야 한다고 하자 이를 따랐다. 사마경의 죄상과 함께 성도왕 사마영에게 사마경을 대신해 정치를 보필하기를 청하는 표문을 올리고 군사를 일으켜 사마영과 연합했다.[7]
이함은 낙양의 조정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지만, 사마경의 참군 황보상·우사마 조상 등과의 대립 등으로 인해 장안으로 도망쳐 돌아갔다. 이때 이함은 사마경 토벌의 밀조를 얻었다고 선언하고, 조서를 위조하여 사마옹에게 제시했다. 나아가 사마옹에게 "성도왕(사마영)은 폐하의 동생으로 큰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조정에 머무르지 않고 봉국으로 돌아갔으므로 민심을 얻고 있습니다. 제왕(사마경)은 성도왕을 제쳐두고 전횡을 일삼아 조정에서 미움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 장사왕(사마예)에게 제왕을 토벌하도록 명하면, 병력이 약한 장사왕은 반드시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장사왕 살해의 죄를 이유로 제왕을 공격하여 성도왕을 맞이하고, 사직을 안정시키면 큰 공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권하자, 사마옹은 이에 따랐다. 사마옹은 사마경의 죄상을 상소하고, 격문을 각지에 발포하여 "십만 군사를 모아 성도왕 영·신야왕 흠(사마흠)·범양왕 효(사마효)와 낙양에서 합류한다. 장사왕 사마예에게 명하여 제왕 경을 저택으로 돌려보내고, 성도왕 영에게 보정을 청한다"라고 선언하고, 이함을 도독으로 임명하여 장방 등과 함께 낙양을 향해 진격시켰다. 여러 군대는 음반을 지나 신안에 들어가 낙양에서 120리까지 육박했다.
동시에, 사마예는 낙양성 안에서 사마옹에게 호응하여, 사마경과 3일간에 걸친 싸움을 벌여 승리하고 사마경을 처단했다. 하지만, 사마옹은 사마예가 패배하기를 기대했기 때문에, 이에 불만을 품었다.
303년, 사마옹은 사마영과 함께 사마예는 공로를 처리하는 일이 불공평했다면서 우복양 양현지, 좌장군 황보상과 함께 정치를 농단해 충성스럽고 선량한 사람을 살해했다면서 두 사람의 목을 베고 사마예를 봉국으로 돌아가게 하라는 표문을 올렸다.[7]
7월, 사마예의 참군 황보상의 형인 황보중이 진주 자사가 되자, 이전부터 황보상과 대립하던 이함은 이를 매우 우려하여 몰래 암살을 꾀했다. 황보중은 이를 알아채고 사마예에게 진주 6군의 병사를 이끌고 이함을 토벌할 허가를 요청했지만, 사마예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황보중은 이에 따르지 않고 이함을 치려고 하자, 사마옹은 금성군 태수 유해·농서군 태수 한치에게 4군의 병사를 이끌고 기성의 황보중을 공격하게 했다. 또한, 사마옹은 몰래 시중 풍손·하남윤 이함·중서령 변수 등을 낙양에 파견하여 사마예를 습격하게 했지만, 황보상은 사마옹의 동향을 경계하도록 사마예에게 사전에 충고했기 때문에, 이함 등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그들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사마옹은 이함 등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이를 구실로 사마예 토벌의 병력을 일으켰다. 업에 있던 사마영도 또한 이에 호응했다.
8월, 사마옹은 사마영과 함께 상서하여 "사마예의 논공은 불공정하며, 우복야 양현지·좌장군 황보상과 함께 조정 정치를 전단하고, 충량한 신하(이함 등)를 살해했습니다. 양현지와 황보상을 주살하고, 사마예를 봉국으로 돌려보내야 합니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혜제는 조서를 내려 사마옹과 사마영을 역신이라고 탄핵하고, 사마예에게 토벌을 명했다. 사마예는 옹주 자사 유침에게도 참전을 명했고, 유침은 과거 사마옹에게 군사로 임명되었지만, 사마옹에 대한 은혜보다 혜제에 대한 충성을 우선하여 조정 군의 일원으로서 장안으로 진격했다. 사마예는 더욱이 황보중에게 사자로서 동생 황보상을 파견하여 유침을 돕도록 하려 했지만, 황보상을 원망하는 친족이 사마옹에게 밀고했기 때문에, 사마옹은 황보상을 체포하여 살해했다.
304년 1월, 장방이 낙양으로 들어가 사마예를 잡아 죽였다.[7]
2. 2. 3. 사마월과의 대립
301년, 제왕 사마경이 여러 왕들에게 격문을 돌려 조왕 사마륜을 토벌하려고 할 때 사마옹은 처음에는 사마륜을 도우려고 했다. 그러나 사마경과 성도왕 사마영의 군사가 강하다는 소식을 듣고 두 왕에게 가담했으며, 301년 3월에 사마경, 사마영, 장사왕 사마예 등과 연합해 사마륜을 축출했다.[7]
302년, 장사 이함이 사마경을 토벌해야 한다고 하자 이를 따르면서 사마경의 죄상과 함께 성도왕 사마영에게 사마경을 대신해 정치를 보필하기를 청하는 표문을 올리고 군사를 일으켜 사마영과 연합했다. 303년, 사마영과 함께 사마예는 공로를 처리하는 일이 불공평했다면서 양현지, 황보상과 함께 정치를 농단하고 충성스럽고 선량한 사람을 살해했다며 두 사람의 목을 베고 사마예를 봉국으로 돌아가게 하라는 표문을 올렸다.[7]
304년 1월, 장방이 낙양으로 들어가 사마예를 잡아 죽일 때 사마옹은 정에 군사를 머물게 하면서 동쪽의 군사들을 격려했다. 3월, 표문을 올려 승상 사마영을 태제로 삼으라고 요청했다.[7]
305년, 산동에서 사마영의 장수로 있던 공사번이 사마영을 위해 군사를 일으키자 조서를 발표해 동해왕 사마월 등에게 각자의 봉국으로 가게 했지만 사마월이 이를 거부했다. 306년, 사마월이 묘파, 묘윤 형제를 파견해 장안에서 낙양으로 사마충을 돌아오게 하면서 섬현을 기준으로 백작이 되자고 약속했으며, 사마옹은 평소에 묘파 형제를 중히 여겨 그 의견대로 하고자 했지만 장방이 다른 사람에게 통제를 받으려는 것이냐고 하자 중지했다.[8]
이후 사마옹은 군사 행동을 그만두고 황제를 끼고 있는 사마월과 화해하려고 했으나 장방이 따르지 않을까 걱정해 결정하지 못했다. 사마옹은 질보를 시켜 장방을 죽였다. 사마옹은 장방의 머리를 사마월에게 보내 화해를 청했지만 사마월은 허락하지 않았으며, 4월 13일에 장방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함곡관으로 들어오자 사마옹은 후회하면서 질보의 목을 베었다.[8]
이후 사마옹은 혼자서 도망가 태백산으로 들어갔다. 12월, 사마월이 천거하자 사도가 되었고 남양왕 사마모가 그의 장수 양신)을 파견해 신안에서 맞이하게 해 죽이도록 했는데, 사마옹은 수레에서 내렸다가 양신이 손으로 목을 조르자 이내 죽고 만다.[9]
2. 3. 최후
306년, 사마월이 묘파, 묘윤 형제를 파견해 장안에서 낙양으로 사마충을 돌아오게 하면서 섬현을 기준으로 백작이 되자고 약속했다. 사마옹은 평소에 묘파 형제를 중히 여겨 그 의견대로 하고자 했지만 장방이 다른 사람에게 통제를 받으려는 것이냐고 하자 중지했다.[8]
이후 유교가 패전하자 두려워서 군사 행동을 그만두고 황제를 끼고 있는 사마월과 화해하려고 했다. 그러나 장방이 따르지 않을까 걱정해 결정하지 못하다가 참군 필원이 장안에 사는 부자 질보가 장방의 꾀를 모두 알고 있다고 했다. 이에 사마옹은 필원을 시켜 질보를 불렀다.
필원은 장방에게 모욕당한 일이 있어서 질보에게 '''왕이 물어보면 무조건 그렇다라고 대답하시오.'''라고 했다. 사마옹이 질보가 온 것을 보고 장방이 반란을 할 것과 질보를 파견해 잡을 수 있냐고 질문하자 모두 그렇다고 대답했고, 이에 질보를 시켜 장방을 죽였다.
사마옹은 질보를 안정태수로 삼고 장방의 머리를 사마월에게 보내 화의할 것을 청했지만 사마월은 허락하지 않았다. 4월 13일에 장방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함곡관으로 들어오자 사마옹은 후회하면서 질보의 목을 베었다.[8]
이후 홍농태수 팽수, 북지태수 조묵 등에게 군사를 파견해 기홍 등을 호에서 막게 했다. 5월 7일에 기홍이 팽수, 조묵을 격파하고 이어서 마첨, 곽위 등을 패수에서 패퇴시키자 사마옹은 혼자서 도망가 태백산으로 들어갔다. 마첨이 장안에 들어가서 양유를 죽이자 마첨, 시평태수 양매에게 남산에서 영접받았다.[9]
그러나 홍농태수 배이, 진국의 내사 가감, 안정태수 가필 등이 군사를 일으켜 마첨, 양매 등을 죽였다. 사마월이 독호 미황을 정으로 파견하자 사마옹은 평북장군 견수를 풍익에 주둔하게 했다. 결국 장사 양등이 거짓으로 사마옹의 명령이라 해 견수의 군사 활동을 멈추게 했다가 그를 죽이니 관중 지역의 대부분은 사마월에게 귀부하면서 사마옹은 장안만 보존하게 되었다.[9]
12월, 사마월이 천거하자 사마옹은 사도가 되었고, 남양왕 사마모가 그의 장수 양신)을 파견해 신안에서 맞이하게 해 죽이도록 했다. 사마옹은 수레에서 내렸다가 양신이 손으로 목을 조르자 이내 죽고 만다. 그의 세 아들 또한 그와 함께 살해되었다.[9]
3. 평가
301년, 사마륜이 사마충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에 오르자, 처음에는 사마륜을 도왔으나 사마경, 사마영 등의 군사가 강성해지자 이들에게 가담하여 사마륜을 제거하는데 공을 세웠다.[1]
302년부터 306년까지 이어진 권력 투쟁 과정에서 사마옹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수시로 입장을 바꾸었으며,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암살과 모략을 서슴지 않았다.[1] 장방과 같은 유능한 장수를 이용하다가도, 필요에 따라 제거하는 냉혹함을 보였다.[1]
결국 306년, 사마월에게 패배하였고, 그의 장수에게 살해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1]
참조
[2]
서적
Book of Jin
[3]
문서
[4]
서적
Zizhi Tongjian
[5]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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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Book of Jin
[7]
문서
[8]
서적
Zizhi Tongjian
[9]
서적
Zizhi Tongj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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