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고노쓰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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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이고노쓰보네는 이름이 아닌 칭호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측실이 된 고위 여성에게 붙여졌다. 본명은 마사코로 추정되며, 오아이(於愛)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1562년 도토미국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외가에서 자랐다. 이후 결혼과 사별을 겪고, 사촌과 재혼했으나 남편을 잃은 뒤 이에야스의 눈에 띄어 그의 측실이 되었다. 사이고노쓰보네는 이에야스의 신임을 얻어 아들들을 낳았으며, 1589년 사망했다. 그녀의 출신과 가계에 대한 논란이 있으며, 자선 활동과 대중문화 속 묘사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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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고노쓰보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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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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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도쓰카 마사코 (戸塚昌子) |
다른 이름 | 사이고노쓰보네 (西郷の局) |
출생 | 1552년 |
출생지 | 미카와 니시카와 성 |
사망 | 1589년 7월 1일 |
사망지 | 스루가 슨푸 성 |
묻힌 곳 | 시즈오카 시 호다이인 |
배우자 | 도쿠가와 이에야스 |
자녀 | 4명 (도쿠가와 히데타다, 마쓰다이라 다다요시 포함) |
아버지 | 도쓰카 다다하루 |
친척 | 사이고 씨 도쿠가와 씨 |
작위 | 종일위 |
생애 | |
활동 시기 | 센고쿠 시대 |
기타 | |
존칭 | 사이고노쓰보네 (西郷局), 오아이노카타 (お愛の方) |
2. 명칭
'사이고노쓰보네'는 이름이 아닌 칭호이다. 성인이 되어 사이고 가문에 입양되면서 '사이고'라는 성씨를 사용하게 되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측실이 되면서 '쓰보네'(tsu|bo|ne일본어)라는 칭호가 붙었다. '쓰보네'는 고위 여성에게 붙이는 접미사 칭호 중 하나로, 개인 거처를 부여받은 고위 첩에게 사용되었다.[2][4] 이 칭호는 헤이안 시대부터 메이지 시대까지(8세기부터 20세기 초) 첩에게 사용되었으며, 영어로는 "Lady"로 번역된다.[4][5][6]
1562년 도토미국의 도쓰카 다다하루(戸塚忠春)의 딸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사이고 마사카쓰(西郷正勝)의 딸이다. 외가인 사이고씨는 규슈 지방의 명문가인 기쿠치씨(菊池氏)의 분가로, 이후 미카와국으로 이주하여 도쿠가와씨를 모셨다. 그러나 마사카쓰 대에 이르러 도쿠가와 가문은 몰락하여 영지를 잃고 이마가와 요시모토 휘하에서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다. 사이고노쓰보네는 이 때 이마가와 씨의 명령으로 모친이 도토미로 시집을 가면서 태어났다.
본명은 '마사코'(昌子일본어)였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한 증거는 없으며, 일반적으로 '오아이'(お愛일본어 또는 於愛일본어, "사랑"을 의미)라는 별명으로 불렸다.[7][8][9][10][11] 친한 친구와 가족들은 평생 그녀를 오아이라고 불렀으며, 현대 대중문화에서도 이 이름이 가장 자주 사용된다. 사후에는 '호다이인'(宝台院일본어)이라는 법명이 주어졌다.[7][8]
『이에타다 일기』 덴쇼 17년 5월 21일 조항에는 그녀가 "사이고노쓰보네"로 기록되어 있다. "도노(殿)"라는 호칭은 공식적인 아내에게 사용되는 호칭이며, 측실에게는 "쓰보네(局)"라는 호칭을 사용하기 때문에,[71] 그녀가 이에야스의 아내로 대우받았다는 설도 있다. 이 설에 따르면, 이에야스의 첫 번째 정실(정처)인 쓰키야마도노가 덴쇼 7년에 사망했기 때문에, 그 이후에는 유일한 아내였던 그녀가 정실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후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여동생인 아사히히메를 정실로 맞이했지만, 당시 무가에서는 일처일부제가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정실과 동격으로 여겨지는 "차처"로서 대우받았을 가능성이 높고, 사망 시의 "도노(殿)" 호칭으로 이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무가제법도 성립 이후, 무가에서의 일처일부제 원칙이 확립되면서, 정실 이외의 아내는 법적으로 비공식적인 관계인 "측실"로 간주되게 되었다고 한다. 정실설에서는 "사이고노''쓰보네''"라는 호칭은 에도 시대 이후의 사료에서만 등장한다고 지적한다.
『막부조윤전』에는 '오아이' 혹은 '오테이', 『도쿠가와 막부 가계』에는 '오토', 『류에이 부녀전계』와 『이소키덴』에는 '오아이'라고 쓰여 있기 때문에 통설에서는 '아이(愛)'가 실명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토우(桐)'를 '아이(相)'의 오기, '아이(愛)'는 '아이(相)'와 동음이의 표기라는 생각에서 '아이(相)'가 올바른 실명이고 '아이(愛)'는 그 별표기라는 설도 있다.
3. 생애
성장하여 첫 남편과 결혼했으나 남편이 사망하여 과부가 되었다. 이후 사촌 오빠인 사이고 요시카쓰(西郷義勝)와 재혼하여 1남 1녀를 두었다. 일각에서는 요시카쓰가 첫 남편이라는 설도 있다. 다케다씨와의 전투에서 아키야마 노부토모(秋山信友)의 남하를 저지하던 중 요시카쓰가 전사하면서 다시 과부가 되었다. 이후 외숙부인 사이고 기요카즈(西郷清員)의 양녀 신분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측실이 되었다.
1579년 4월에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1580년 9월에 마쓰다이라 다다요시를 낳았다.[1]
1589년 5월 19일, 슨푸에서 사망했다.[1] 28세(일설에 30세)였다.[1] 료센지에 묻혔고, 법명은 료센인덴으로 했다.[1]
『이에타다 일기』의 1589년 5월 21일 기사에는 "슨가와 와카키미 님 어머님 사이고노 쓰보네, 그저께 19일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노다 스게누마 스케헤에와 싸움으로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라고 적혀 있다.[67] 이 때문에 사이고노 쓰보네가 노다 스게누마 스케헤에 (스게누마 사다토요의 사촌이자 그의 가신)와의 문제로 목숨을 잃은 것이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한편, 이에야스의 후계자의 생모가 싸움에 휘말리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고, 다른 사료에 같은 기술이 없는 것으로 보아 병사했다는 견해도 있다.[68] 향토사학자 나카야마 마사키요는 사이고노 쓰보네 사망 소식과 노다 스게누마 스케헤에가 싸움으로 살해당했다는 다른 것이 같은 날짜에 기록되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69] 또, 『류에이 부녀전계』에는 "마츠다이라 주덴노스케 이에타다의 가신, 이나 요시베에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라고 적혀 있고, 이에타다의 가신이 살해했다고 쓰여 있다.[67][70]
1628년 5월 9일, 종일위가 추증되었고, 5월 19일에는 법명도 호다이인덴 잇핀 다이부인 쇼요 사다키 다이젠정니로 하는 선명이 내려졌고, 료센지는 호다이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66] 당시의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는 손자, 다음 해 즉위한 메이쇼 천황은 증손에 해당한다.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2대 쇼군으로 즉위하면서 사이고노쓰보네가 사이고 요시카쓰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고산케 중 하나인 기슈 도쿠가와가의 당주 도쿠가와 요리노부와 통혼하는 등 사이고씨의 인척들은 큰 특혜를 입었다. 그러나 히데타다가 이에야스만큼 장수하지 못하면서 이들의 특권은 오래가지 못했다. 사이고노쓰보네의 외숙부이자 양부인 사이고 기요카즈의 가계가 아와국 도조의 다이묘를 지낸 이후 사이고씨는 점차 몰락하여 도쿠가와 쓰나요시 시대에 이르면 5천석의 하타모토 가문으로 전락하였다.
3. 1. 출신 배경 및 초기 생애
1552년 도토미국의 도쓰카 다다하루(戸塚忠春)의 딸로 태어났다.[17][9][13] 어머니는 사이고 마사카쓰(西郷正勝)의 딸이다.[16] 외가인 사이고씨는 규슈 지방의 명문가인 기쿠치씨(菊池氏)의 분가로, 이후 미카와국으로 이주하여 도쿠가와씨를 모셨다. 사이고노쓰보네는 이때 이마가와씨의 명령으로 모친이 도토미로 시집을 가면서 태어났다.
성장하여 첫 남편과 결혼했으나 남편이 죽으면서 과부가 되었다. 이후 사촌 오빠인 사이고 요시카쓰(西郷義勝)와 재혼하여 1남 1녀를 두었다.[20][21][22] 일각에서는 요시카쓰가 첫 남편이라는 설도 있다.[7][20]
1571년, 다케다 신겐과의 전투에서 아키야마 노부토모(秋山信友)의 남하를 저지하던 중 남편 요시카쓰가 전사하면서 또다시 과부가 되었다.[25] 이후 외숙부인 사이고 기요카즈(西郷清員)의 양녀 신분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측실이 되었다.
3. 2.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만남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570년대에 사이고 가문을 방문했을 때 사이고노쓰보네를 처음 만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이고노쓰보네는 이에야스에게 차를 대접했는데,[26] 당시 그녀는 기혼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 두 사람 사이에는 우정과 진정한 애정이 싹텄다고 여겨진다.[10]
이에야스는 쓰키야마 부인과의 결혼 생활이 원만하지 않았는데, 쓰키야마 부인의 질투심, 격정적인 기분, 괴팍한 습관 때문이었다.[30][31] 미카타가하라 전투(1573) 무렵부터 이에야스는 사이고노쓰보네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여러 문제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 시작했다. 사이고노쓰보네는 나가시노 전투(1575)와 고마키·나가쿠테 전투(1584) 등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이에야스에게 조언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32][7]
1578년 봄, 사이고노쓰보네는 하마마쓰성으로 이사하여 주방 관리를 맡았다. 그녀는 고향 출신 병사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었는데, 그녀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미카와 출신 여성의 부드럽고 훌륭한 본보기로 여겨졌기 때문이다.[7]
3. 3. 이에야스의 측실로서
사이고 기요카즈(西郷清員)의 양녀 신분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측실이 되었다.[1] 1579년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1580년 마쓰다이라 다다요시를 낳았다.[1]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정실 쓰키야마도노가 1579년 오다 노부나가의 의심을 받아 처형되면서, 사이고노쓰보네는 사실상 이에야스의 정실과 같은 위치에 올랐다.[1]
3. 4. 자선 활동
사이고노쓰보네는 정토종 불교 신자로, 슨푸 성에 머무는 동안 류센지(龍泉寺)에서 예배를 드렸다.[28] 그녀는 경건함과 자선으로 유명했다.[28] 심한 근시를 앓았던 그녀는 시각 장애 여성들에게 깊은 동정심을 느껴 돈, 의류, 음식 및 기타 생필품을 자주 기부했다.[49]
사이고노쓰보네는 류센지 근처에 빈곤한 시각 장애 여성들이 샤미센 연주법을 배우고 일자리를 찾도록 돕는 기숙 시설을 갖춘 협동 학교를 설립했다.[40][41] 이 여성들은 고제로 알려졌으며, 에도 시대 일본의 여행 음악가와 유사했다.[40][41] 이들은 길드와 같은 조직의 회원 자격을 얻어 견습생을 둔 음악가들은 다양한 곳으로 파견되었다. 이들은 허가된 레퍼토리의 곡을 연주했으며, 좋은 평판을 유지하기 위해 행동 및 허용 가능한 상거래에 대한 엄격한 규칙에 따라 운영되었다.[40][41] 사이고노쓰보네는 임종 직전에 이 조직의 지속적인 유지를 간청하는 편지를 썼다.[42]
3. 5. 사망과 사후
1589년 7월 1일에 37세(다른 기록에는 2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8] 사인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당시 살해 의혹이 제기되었지만 범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죽은 아내인 쓰키야마 부인을 섬기던 시녀가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았다.[43]
이에타다 일기의 1589년 5월 21일 기사에는 "슨가와 와카키미 님 어머님 사이고노 쓰보네, 그저께 19일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노다 스게누마 스케헤에와 싸움으로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라고 적혀 있다.[67] 이 때문에 사이고노 쓰보네가 노다 스게누마 스케헤에 (스게누마 사다토요의 사촌이자 그의 가신)와의 문제로 목숨을 잃은 것이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한편, 이에야스의 후계자의 생모가 싸움에 휘말리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고, 다른 사료에 같은 기술이 없는 것으로 보아 병사했다는 견해도 있다.[68] 향토사학자 나카야마 마사키요는 사이고노 쓰보네 사망 소식과 노다 스게누마 스케헤에가 싸움으로 살해당했다는 다른 것이 같은 날짜에 기록되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69] 또, 류에이 부녀전계에는 "마쓰다이라 주덴노스케 이에타다의 가신, 이나 요시베에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라고 적혀 있고, 이에타다의 가신이 살해했다고 쓰여 있다.[67][70]
그녀가 죽을 무렵, 사이고노쓰보네는 말로는 아니었지만 사실상 이에야스의 아내로 대우받았다.[44] 유해는 시즈오카의 류센지(龍泉寺)에 안치되었으며,[7] 사망 당시 많은 맹인 여성들이 사찰 앞에 모여 기도했다고 한다.[45]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어머니 사후 이름을 호다이인(宝台院)으로 바꾸고, 류센지를 호다이인으로 개칭하여 사찰의 수호신으로 모셨다.[7] 1628년에는 고미즈노 천황이 사이고 부인에게 미나모토 마사코(源 晶子|미나모토 마사코일본어)라는 이름을 하사하여 사실상 황족의 방계 가문인 미나모토 씨에 사후 입적시켰다.[50] 이후 궁정의 종1위로 추대되었으며,[7][49] 나중에 정1위로 승격되었는데, 이는 당시나 현재나 일본 역사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황족 외의 몇몇 인물에게 천황이 수여하는 최고 및 가장 두드러진 상이다.[51]
1938년, 호다이인에는 사이고 부인의 무덤 위에 5층 석탑이 있었고, 영혼을 숭배하는 성소가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 지정은 1940년 1월 15일 시즈오카 대화재로 사찰 전체가 파괴된 후 취소되었다.[50] 석탑은 남아 있지만, 쓰러졌을 때 입은 피해의 흔적이 뚜렷하게 보인다. 사찰의 많은 보물, 사이고 부인의 초상화, 160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기증한 칼과 초상화를 포함하여, 승려들이 불타는 사찰에서 탈출하기 전에 창문과 출입구 밖으로 던져 구출했다. 1970년에 철근 콘크리트로 재건되었으며, 1940년 화재에서 구출된 역사적 유물들은 시즈오카시의 새로운 호다이인 사찰에서 전시되고 있다.[7]
4. 논란과 의혹
사이고노쓰보네는 2대 에도 시대 쇼군인 도쿠가와 히데타다부터 7대 도쿠가와 이에쓰구까지 쇼군 가문의 조상이며,[52] 도쿠가와 마사코를 통해 황실과도 연결되었다.[53][54] 마사코는 고미즈노 천황과 결혼하여 황후가 되었고, 이후 궁중을 유지하고 예술을 지원하며 다음 세 명의 군주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55][56] 마사코의 딸이자 사이고노쓰보네의 증손녀인 메이쇼 천황은 15년 동안 일본의 109대 군주이자, 일본 역사상 단 8명뿐인 여제 중 7번째 여제로서 통치했다.[57][58][59][60][61]
4. 1. 출신과 가계에 대한 의문
에도 시대 후기에 성립된 『간세이 중수 제가보』·『이기소전』에 따르면, 사이고노쓰보네의 아버지는 도쓰카 다다하루이고, 어머니는 미나모토 씨도키씨류미카와 사이고씨로 사이고 마사카쓰의 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들은 사이고노쓰보네의 출생 및 가계에 대한 여러 의문을 제기한다.우선, 에도 시대 전기에 성립된 『간에이 제호 계도전』, 하야시 라잔의 『고강부령 조정대부 친위교위 석곡옹 행상』, 『번한보』에서는 도쓰카 씨와의 연척 관계는 언급되어 있지만, 미카와 사이고 씨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또한, 도쓰카 씨는 가미사이고 촌(현재의 시즈오카현가케가와시)의 사이고 씨 (에도 시대에는 이시가야 씨를 칭함)에 속하는 지사무라이였던 반면, 사이고노쓰보네의 생모 가문으로 여겨지는 미카와 사이고 씨는 도요하시시 사이고 지구 부근에 세력을 가진 호족이었다. 『가케가와시사』는 두 가문의 격이 맞지 않아, 사이고 씨가 도쓰카 씨와 혼인 관계를 맺을 필연성이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게다가 1589년 사이고노쓰보네가 28세로 사망했다는 기록은 다른 기록들과 모순된다. 『이기소전』에 따르면 도쓰카 다다하루는 1554년에 사망했는데, 이는 사이고노쓰보네가 태어나기 8년 전이다. 또한 남편 사이고 요시카쓰가 사망한 1571년에는 사이고노쓰보네는 만 10세에 불과하여 1남 1녀를 두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기소전』은 사이고노쓰보네의 사망 연령을 38세로 기록하고 있지만, 다른 기록들에서는 28세로 되어 있다.
이러한 모순점들 때문에 향토사학자 나카야마 마사키요는 도쿠가와 쓰나요시에게 불만을 사서 다이묘에서 하타모토로 몰락한 미카와 사이고 씨의 적류가 장군가와의 연결을 강조하기 위해 사이고노쓰보네와의 혈연 관계를 조작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4. 2. 정실 논란
사이고노쓰보네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정실로 대우받았다는 주장이 있다. 그녀가 사망했을 때의 기록인 『이에타다 일기』 덴쇼 17년 5월 21일 조항에는 그녀를 "사이고노쓰보네"라고 칭하며 "도노"(殿)라는 존칭을 사용했는데,[71] 이는 정실에게만 사용되는 호칭이기 때문이다.[71] 측실에게는 局|쓰보네일본어라는 호칭을 사용한다.[71]만약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이에야스의 첫 번째 정실이었던 쓰키야마도노가 덴쇼 7년에 사망했으므로, 그 이후에는 사이고노쓰보네가 이에야스의 유일한 정실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히데타다를 낳은 그녀가 정실로 격상되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후,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여동생인 아사히히메를 정실로 맞이했지만, 당시 무가에서는 일처일부제가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이고노쓰보네는 계속해서 정실과 동격으로 여겨지는 "차처"로서 대우받았을 가능성이 높고, 사망 시의 "도노" 호칭으로 이어진 것으로 추측된다.[71]
무가제법도 성립 이후, 무가에서의 일처일부제 원칙이 확립되면서, 정실 이외의 아내는 법적으로 비공식적인 관계인 "측실"로 간주되었다.[71] 정실설에서는 "사이고노''쓰보네''"라는 호칭이 에도 시대 이후의 사료에서만 등장한다고 지적한다.
5. 평가
사이고노쓰보네는 아름다운 외모와 온화하고 성실한 성품으로 이에야스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며, 주변의 가신과 시녀들에게도 사랑받았다.[1] 심한 근시를 앓았던 것으로 보이며, 특히 시각 장애를 가진 여성들에게 동정심을 느껴 항상 의복과 음식을 제공하며 생활을 보호했다.[1] 그 때문에 사이고노쓰보네가 사망하자, 많은 시각 장애 여성들이 연일 절 앞에서 그녀를 위해 후세를 기원했다고 한다.[1]
이에야스의 측실들 중에서도 특히 총애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주위의 가신들과 시녀들에게도 좋은 평판을 유지하였다.[1] 그녀는 시각장애인 여성들에게 숙식과 의복을 제공하여 생계를 유지하도록 돕는 자선 활동을 자주 펼쳤다.[1]
사이고노쓰보네의 사촌이 기록한 '오쿠니 문서'라고 불리는 문서가 시즈오카현 가케가와시에 남아 있으며, 사이고노쓰보네가 이에야스로부터 하사받은 저택이 가미사이고 마을에 존재했다고 한다.
6. 대중문화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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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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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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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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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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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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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河『家康』お愛の方 早逝に謎 喧嘩による死か?病死か? 識者が語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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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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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에이로쿠 4년(1561년) 설도 있다.
[73]
서적
사이고우씨 흥망전사
역사 조사 연구소, 도쿄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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