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공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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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이공 조약은 1862년과 1874년에 체결된 두 개의 조약을 의미하며, 베트남과 프랑스 간의 관계를 규정했다. 제1차 사이공 조약은 프랑스가 베트남 남부를 점령한 후 체결되었으며, 3개 성 할양, 기독교 포교의 자유, 항구 개항, 배상금 지불 등을 주요 내용으로 했다. 제2차 사이공 조약은 프랑스가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하고, 대외 정책에 대한 프랑스의 영향력을 강화하며, 항구 개방과 프랑스 공사 파견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였다. 이 조약들은 프랑스의 베트남 식민 지배를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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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2년 베트남 - 코친차이나 원정
코친차이나 원정은 19세기 프랑스가 인도차이나에서 제국주의적 야망을 드러내며 베트남을 침략하여 사이공 조약을 통해 코친차이나를 식민지로 삼은 사건이다.
사이공 조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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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약 정보 | |
제목 | 사이공 조약 |
다른 이름 | 제1차 사이공 조약 임술조약 (壬戌條約) |
서명 | 1862년 6월 5일 |
서명 장소 | 사이공 |
당사국 | 阮朝 베트남국 프랑스 제2제국 |
조약 내용 | |
주요 내용 | 내용 (아래 참조) |
관련 조약 | (갑술조약) |
2. 제1차 사이공 조약 (1862년)
1862년 6월 5일, 프랑스와 에스파냐 연합군은 베트남 응우옌 왕조와 사이공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베트남은 남부 지역 영토를 할양하고, 프랑스에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는 등 주권이 크게 훼손되었다.[2]
이 조약으로 프랑스 해군이 점령하고 있던 베트남 남동부 3성은 코친차이나로서 사실상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추가로, 서부 3성(1874년) 할양, 하노이, 하이퐁을 포함한 6개 항구 개항, 영사관 설치, 주병권 획득, 전 지역에서의 기독교 포교 자유, 응우옌 왕조의 외교 규제 권리, 400만달러 배상, 메콩강 개방 등 12개 항목에 합의했다.[2]
2. 1. 배경
1847년에 즉위한 응우옌 왕조의 제4대 황제 뜨득제는 기독교 탄압을 강화했다. 1848년-1860년 사이에 베트남에 거주하는 유럽인 선교사 25명, 베트남인 선교사 300명, 신도 3만 명이 살해되었다.[2]1858년 프랑스와 스페인은 호세 마리아 디아스 산후르호와 멜초르 가르시아 삼페드로 2명의 스페인 선교사 처형을 이유로 다낭에 군대를 파견했다. 그 후, 후에 공략을 시도했지만 실패하여, 코친차이나의 사이공을 본격적으로 공격하게 되었다.
1861년 프랑스가 제시한 강화 조건을 응우옌 왕조가 거부했기 때문에, 비엔호아를 점령하는 등 군사 행동을 지속했으며, 군함을 후에로 향하게 하여, 1862년 3월까지 사이공에서 메콩강 하류 지역(비엔호아, 빈롱)을 점령했다.
이 결과, 판타인전과 Lâm Duy Hiệp|럼주이히엡영어을 중심으로 하는 사절단이 사이공에 파견되었고, 1862년 6월 5일에 사이공 조약이 체결되었다.
2. 2. 체결 및 내용
1862년 6월 5일, 베트남 사절단은 프랑스 대표 루이 아돌프 보나르(Louis Adolphe Bonard)와 에스파냐 대표 카를로스 팔란카(Carlos Palanca)와 제1차 사이공 조약을 체결했다.[2] 이 조약은 1863년 후에 조약에서 최종 확정되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862년 제1차 사이공 조약 체결 12년 후인 1874년 3월 15일, 레뚜언, 섭정 응우옌반뜨엉이 협상한 제2차 사이공 조약이 서명되면서 이전 조약이 실행되었다.[1] 베트남은 1867년 라 그랑디에르 제독이 함락시켰던 세 성에 대한 프랑스의 주권을 승인하였다.[1] 홍강은 하노이, 하이퐁항, 꾸이년항과 함께 무역을 위해 개방되었다.[1] 프랑스가 하노이를 반환했지만, 베트남 황제는 중국에 도움을 요청했고,[1] 이는 결과적으로 프랑스와 청나라 사이의 종주권 분쟁으로 이어졌다.[1] 1882년 3월, 코친차이나 초대 총독 레 미레 드 빌레르는 제2차 사이공 조약이 이행되지 않았다고 간주하여, 1882년 4월 27일 하노이를 점령했다.[1]
3. 제2차 사이공 조약 (1874년)
1874년 3월 15일, 프랑스 대표 폴루이펠릭스 필라스트르(Paul-Louis-Félix Philastre)와 베트남 대표 레뚜언, 섭정 응우옌반뜨엉이 제2차 사이공 조약을 체결했다.[1]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내용 프랑스와 베트남은 영구적으로 연맹하며, 베트남을 독립국으로 승인한다. 베트남의 대외정책은 프랑스의 대외정책과 부합하여야 한다. 베트남이 다른 나라와 교섭할 때 프랑스의 동의를 받도록 한다. 베트남에서 천주교는 자유롭게 포교할 수 있다. 프랑스에서 베트남군 군함 5척, 대포 100문, 소총 1000개를 제공한다. 하노이, 하이퐁, 꾸이년 등 3개의 항구를 개항하고, 영해에서 운남에 이르는 수로로 대외무역을 개방하여, 프랑스 영사는 치외법권을 누린다. 조약 체결 1년 만에 후에에 공사를 파견한다.
3. 1. 배경
1862년 제1차 사이공 조약 체결 12년 후인 1874년 3월 15일, 레뚜언, 섭정 응우옌반뜨엉이 협상한 제2차 사이공 조약이 서명되면서 이전 조약이 실행되었다.[1] 월남은 1867년 라 그랑디에르 제독이 함락시켰던 세 성에 대한 프랑스의 주권을 승인하였다.[1] 홍강은 하노이, 하이퐁항, 꾸이년항과 함께 무역을 위해 개방되었다.[1] 프랑스가 하노이를 반환했지만, 월남 황제는 중국에 도움을 요청했고,[1] 이는 결과적으로 프랑스와 청나라 사이의 종주권 분쟁으로 이어졌다.[1] 1882년 3월, 코친차이나 초대 총독 레 미레 드 빌레르는 제2차 사이공 조약이 이행되지 않았다고 간주하여, 1882년 4월 27일 하노이를 점령했다.[1]
3. 2. 체결 및 내용
1874년 3월 15일, 프랑스 대표 폴루이펠릭스 필라스트르(Paul-Louis-Félix Philastre)와 베트남 대표 레뚜언(黎濬), 섭정 응우옌반뜨엉(阮文祥)이 제2차 사이공 조약을 체결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1]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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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와 베트남은 영구적으로 연맹하며, 베트남을 독립국으로 승인한다. |
베트남의 대외정책은 프랑스의 대외정책과 부합하여야 한다. 베트남이 다른 나라와 교섭할 때 프랑스의 동의를 받도록 한다. |
베트남에서 천주교는 자유롭게 포교할 수 있다. |
프랑스에서 베트남군 군함 5척, 대포 100문, 소총 1000개를 제공한다. |
하노이, 하이퐁, 꾸이년 등 3개의 항구를 개항하고, 영해에서 운남에 이르는 수로로 대외무역을 개방하여, 프랑스 영사는 치외법권을 누린다. |
조약 체결 1년 만에 후에에 공사를 파견한다. |
참조
[1]
웹사이트
Treaty of Saigon 1862, the "first" unequal treaty between France and Vietnam
https://baotanglichs[...]
2023-05-15
[2]
웹사이트
コトバンク - サイゴン条約
https://kotobank.jp/[...]
2021-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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