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이 다다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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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카이 다다히사는 센고쿠 시대의 무장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신 사카이 타다쓰구의 일족이다. 그는 마쓰다이라 히로타다를 섬겼으나 오다 씨, 이마가와 씨와의 관계 속에서 배반과 귀순을 반복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다. 156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대항하여 거병했으나 이듬해 몰락했고, 1565년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후손들은 도쿠가와 씨를 다시 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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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다 노부시게는 센고쿠 시대 말기부터 에도 시대 초기에 활약한 무장으로, 도요토미 가문의 인질, 세키가하라 전투 참전, 오사카 전투에서 용맹을 떨치는 등 '일본 제일의 병사'로 불리며 에도 시대 이후 영웅으로 널리 알려졌다.
사카이 다다히사 | |
---|---|
기본 정보 | |
씨족 | 사카이 씨 |
이름 | 사카이 다다히사 |
이명 | 쇼겐 |
계명 | 조교 도존 거사 |
묘소 | 다이주지 |
생애 | |
시대 | 전국 시대 후기 |
출생 | 불명 |
사망 | 에이로쿠 8년 9월 3일 (1565년10월 6일)。}} |
개명 | 다다히사, 다다가 |
관직 | |
주군 | 마쓰다이라히로타다, 이에야스 |
가족 관계 | |
부모 | 부: 사카이 다다요시? |
자녀 | 나오마사, 시게모토 양자: 마쓰다이라 가케타다의 아내。}} |
2. 가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로를 지낸 사카이 타다쓰구의 일족(사카이 사에몬노조이가)이라는 점은 여러 책에서 일치하지만, 그 계보에는 여러 설이 있다. 에도 시대 전기에 에도 막부가 편찬한 『간에이 제씨 가계도전』에 따르면, 다다히사는 '''사에몬노조 입도 죠켄'''의 아들로 되어 있으며, 에도 후기 편찬의 『간세이 중수 제씨보』에서도 이 기술이 답습되고 있다. 아라이 하쿠세키가 편찬한 『반한보』도 다다히사는 죠켄의 아들로 하고 있다.
다다히사와 사카이 타다쓰구와의 관계에 대해, 『간세이 중수 제씨보』는 다다쓰구가 숙부(죠켄의 동생), 다다히사가 조카라고 한다. 반면 『반한보』는 다다히사가 형, 다다쓰구가 동생(모두 죠켄의 아들)이라는 계보를 소개하면서, 다다히사가 숙부, 다다쓰구가 조카라는 설도 싣고 있으며, 다다쓰구는 죠켄의 손자에 해당한다고 고증한다. 막말에 편찬된 『계도찬요』와 『미카와시』에서는 다다히사가 숙부, 다다쓰구가 조카(죠켄의 손자)라고 한다.
2. 1. 『간에이 제씨 가계도전』의 기록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로를 지낸 사카이 타다쓰구의 일족 (사카이사에몬노조이 가)이라는 점은 여러 책에서 일치하지만, 그 계보에는 여러 설이 있다. 에도 시대 전기에 에도 막부가 편찬한 『간에이 제씨 가계도전』에 따르면, 다다히사는 '''사에몬노조 입도 죠켄'''의 아들로 되어 있으며, 에도 후기 편찬의 『간세이 중수 제씨보』에서도 이 기술이 답습되고 있다. 아라이 하쿠세키가 편찬한 『반한보』도 다다히사는 죠켄의 아들로 하고 있다.다다히사와 사카이 타다쓰구와의 관계에 대해, 『간세이 중수 제씨보』는 다다쓰구가 숙부(죠켄의 동생), 다다히사가 조카라고 하고 있다. 한편 『반한보』는 다다히사가 형, 다다쓰구가 동생(모두 죠켄의 아들)이라는 계보를 소개하면서, 다다히사가 숙부, 다다쓰구가 조카에 해당한다는 설도 싣고 있으며, 다다쓰구는 죠켄의 손자에 해당한다고 고증하고 있다.
2. 2. 『반한보』의 기록
아라이 하쿠세키가 편찬한 『반한보』는 다다히사를 죠켄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다. 『반한보』는 다다히사가 형, 다다쓰구가 동생(모두 죠켄의 아들)이라는 계보를 소개하면서, 다다히사가 숙부, 다다쓰구가 조카라는 설도 함께 싣고 있으며, 다다쓰구는 죠켄의 손자에 해당한다고 고증한다.2. 3. 『계도찬요』, 『미카와시』의 기록
에도 시대 전기에 에도 막부가 편찬한 『간에이 제씨 가계도전』에 따르면, 다다히사는 '''사에몬노조 입도 죠켄'''의 아들로 되어 있으며, 에도 후기 편찬의 『간세이 중수 제씨보』에서도 이 기술이 답습되고 있다. 아라이 하쿠세키가 편찬한 『반한보』도 다다히사는 죠켄의 아들로 하고 있다.다다히사와 사카이 다다쓰구와의 관계에 대해, 『간세이 중수 제씨보』는 다다쓰구가 숙부(죠켄의 동생), 다다히사가 조카라고 한다. 반면 『반한보』는 다다히사가 형, 다다쓰구가 동생(모두 죠켄의 아들)이라는 계보를 소개하면서, 다다히사가 숙부, 다다쓰구가 조카라는 설도 싣고 있으며, 다다쓰구는 죠켄의 손자에 해당한다고 고증한다. 막말에 편찬된 『계도찬요』와 『미카와시』에서는 다다히사가 숙부, 다다쓰구가 조카(죠켄의 손자)라고 한다.
3. 생애
마쓰다이라 히로타다를 섬긴 오카자키성의 성주 마쓰다이라 씨의 중신 가문이었다. 1540년 오와리국의 오다 노부히데가 미카와에 침공하여 야하기가와 이서를 제압하자 오다 씨 편에 섰고, 히로타다는 우에노성을 공격했다. 1543년 마쓰다이라 노부타카가 오다 씨와 내통하자 이에 호응하여 1546년에 우에노성을 공격받아 다시 귀순했다. 1549년 히로타다 사후, 세 번째로 배반했으나 이마가와 씨의 중신 다이겐 셋사이에게 진압되었다.
이후 히로타다의 후계자 마쓰다이라 모토야스를 섬기며 중신으로서 마쓰다이라 씨의 문서에 서명했지만, 이마가와 요시모토로부터는 모토야스(오카자키)와 개별 취급(우에노)을 받을 정도로 독자적인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1556년과 1561년에 기라 씨에게 공격받았지만, 후카고 마쓰다이라 씨의 원조를 받아 격퇴했다.
3. 1. 오다 가문과의 관계
마쓰다이라 히로타다를 섬긴 가문 출신으로 오카자키성의 중신이었다. 1540년 오다 노부히데가 미카와를 침공하여 야하기가와 이서를 제압하자 오다 씨 편에 섰고, 히로타다에게 우에노성을 공격받았다. 1543년 마쓰다이라 노부타카가 오다 씨와 내통하자 우에노성을 공격받아 다시 마쓰다이라 가문에 귀순했다. 1549년 다시 배반했으나, 다이겐 셋사이에게 진압되었다. 이후 마쓰다이라 모토야스를 섬겼으나, 이마가와 요시모토에게는 모토야스와 별개 세력으로 취급받을 만큼 자립성이 있었다. 1556년과 1561년에 기라 씨의 공격을 받았으나 격퇴했다.1563년 모토야스에 대항하여 거병, 우에노성에 농성하며 저항했다. 미카와 잇코잇키에 가담했다는 설도 있지만, 봉기 시점과 정황상 연관성은 낮다. 1564년 모토야스와 잇코잇키의 화의 후에도 저항을 계속하다 9월 6일 몰락했다.
3. 2. 이마가와 가문과의 관계
마쓰다이라 히로타다를 섬긴 오카자키성의 성주 마쓰다이라 씨의 중신이었다. 그러나 덴분 9년(1540년) 오와리국의 오다 노부히데가 미카와를 침공하여 야하기가와 이서를 제압하자 오다 씨 편에 섰고, 히로타다는 우에노성을 공격했다. 덴분 12년(1543년) 마쓰다이라 노부타카가 오다 씨와 내통하자 호응하여 덴분 15년(1546년)에 우에노성을 공격받고 다시 귀순했다. 히로타다 사후 덴분 18년(1549년)에 세 번째로 배반했으나, 마쓰다이라 씨를 산하에 둔 이마가와 씨의 중신 다이겐 셋사이에게 진압되었다. 이후 히로타다의 후계자 마쓰다이라 모토야스(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기며 중신으로서 마쓰다이라 씨의 문서에 서명했지만, 이마가와 요시모토로부터는 모토야스(오카자키)와 개별 취급(우에노)을 받을 정도로 세력이 강했고 자립성도 있었다.고지 2년(1556년) 기라 씨에게 공격받았지만, 후카고 마쓰다이라 씨의 원조를 받았다. 에이로쿠 4년(1561년) 다시 기라 씨에게 공격받았다.3. 3. 마쓰다이라 가문(도쿠가와 가문)과의 대립
마쓰다이라 히로타다를 섬긴 오카자키성의 성주 마쓰다이라 가문의 중신이었다. 그러나 1540년 오와리국의 오다 노부히데가 미카와를 침공하여 야하기가와 이서를 제압하자 오다 씨 편에 섰고, 히로타다는 우에노 성을 공격했다. 1543년 마쓰다이라 노부타카가 오다 씨와 내통하자, 이에 호응하여 1546년 우에노 성을 공격받아 다시 마쓰다이라 가문에 귀순했다. 히로타다 사후인 1549년 세 번째로 배반했으나, 마쓰다이라 가문을 산하에 둔 이마가와 씨의 중신 다이겐 셋사이에게 진압되었다. 이후 히로타다의 후계자인 마쓰다이라 모토야스를 섬기며 중신으로서 마쓰다이라 가문의 문서에 서명했지만, 이마가와 요시모토로부터는 모토야스(오카자키)와 개별 취급(우에노)을 받을 정도로 독자적인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1556년 기라 씨의 공격을 받았지만, 후카고 마쓰다이라 가문의 원조를 받았다. 1561년 다시 기라 씨에게 공격받았다.1563년 모토야스에 대항하여 거병, 6월 우에노 성에 농성하며 모토야스에 대항했다. 당초 우지마사에게 원군을 요청하려 했으나, 미카와 잇코잇키에 가담했다는 주장은 다다나오의 거병 시점이 잇코잇키 봉기보다 빠르고, 잇키 측과 연락이나 연계를 꾀한 흔적이 없어 인정되지 않는다. 이듬해 봄 모토야스와 잇코잇키가 화의한 후에도 다다나오는 우에노 성에서 저항을 계속했으며, 『마쓰다이라기』에 따르면 같은 해 9월 6일 몰락했다고 한다. 우에노 성에서 도망친 다다나오는 스루가로 도망쳤다는 설과 사루토비 산에 숨었다는 설이 있으며, 다이주지 과거장에는 1565년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다.
『간세이 중수 제가보』에 따르면, 다다나오의 아들 나오마사는 아버지의 몰락 후 가이국에서 아나야마 씨를 섬겼으며, 그 아들 요시츠구 대에 도쿠가와 가문에 다시 섬겼다고 한다. 기슈 번사 사카이 요사부로 마사사다가 간세이 연간에 번에 제출한 유서에는, 다다나오 사후 적자 요사부로 시게모토는 후호조 씨를 섬겼으나 병으로 낭인이 되었고, 뒤를 이은 적자 시게오키가 만지 연간에 기슈 번에 등용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3. 4. 몰락과 최후
1563년 모토야스에 대항하여 거병, 6월에는 우에노성에 농성하여 모토야스에 대항했다。당초 우지마사에게 원군을 받으려 했으나, 미카와 잇코잇키에 가담했다는 주장은 타다나오의 거병 시기가 잇코잇키의 봉기보다 빠르고, 잇키 측과 연락하거나 연계를 획책한 흔적이 없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이듬해 봄, 모토야스와 잇코잇키가 화의를 맺은 후에도 타다나오는 우에노성에서 저항을 계속했으며, 『마쓰다이라기』에 따르면 9월 6일 몰락했다고 한다。우에노성에서 도망친 타다나오는 스루가로 도망쳤다는 설과 사루토비 산에 숨었다는 설이 있으며, 다이주지의 과거장에 따르면 1565년에 사망했다고 한다。
『간세이 중수 제가보』에 따르면, 타다나오의 아들 나오마사는 아버지의 몰락 후 가이국에서 아나야마 씨를 섬겼으며, 그 아들 요시츠구 대에 도쿠가와 씨를 다시 섬겼다고 한다。기슈 번사 사카이 요사부로 마사사다가 간세이 연간에 번에 제출한 유서에는, 타다나오 사후 적자 요사부로 시게모토는 후호조 씨를 섬겼지만 병으로 낭인이 되었고, 뒤를 이은 적자 시게오키가 만지 연간에 기슈 번에 등용되었다고 한다。
4. 후손
사카이 다다나오의 아들 사카이 나오마사는 아버지의 몰락 후 가이국에서 아나야마 씨를 섬겼으며, 그 아들 사카이 요시츠구 대에 도쿠가와 가문에 다시 섬겼다. 기슈 번사 사카이 요사부로 마사사다가 간세이 연간에 번에 제출한 유서에 따르면, 사카이 다다나오의 사망 후 적자 요사부로 시게모토는 후호조 씨를 섬겼지만, 후에 병으로 낭인이 되었고, 뒤를 이은 적자 사카이 시게오키가 만지 연간에 기슈 번에 등용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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