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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의 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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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별초의 항쟁은 1270년 고려 원종이 삼별초 해산을 명하자, 배중손 등이 몽골 제국과 몽골에 예속된 고려 조정에 반발하여 일으킨 반란이다. 삼별초는 원래 최씨 무신정권의 사병 집단으로 시작되었으며, 몽골의 침략에 맞서 강화도로 천도한 이후에도 존속했다. 1270년 강화도에서 봉기한 삼별초는 진도,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겨가며 항쟁을 이어갔으나, 1273년 제주도에서 진압되었다. 삼별초의 항쟁은 고려 대몽 항쟁의 마지막 사건으로, 외세 침략에 대한 저항으로 평가받기도 하고, 무신 정권의 반란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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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의 항쟁
지도 정보
기본 정보
분쟁삼별초의 항쟁
날짜1270년 ~ 1273년
장소진도, 제주도
결과삼별초의 궤멸
이유고려 조정의 개경 환도 반대
교전 세력
교전국 1삼별초
교전국 2조정
원나라
지휘관
지휘관 1삼별초
왕온
왕환
배중손
김통정 자살
지휘관 2고려조정
고려 원종
원나라
홍다구
전투 정보
관련 전투몽골의 고려 침입 및 쿠빌라이 칸의 원정
교전 세력 1삼별초 군대
교전 세력 2원나라
고려
지휘관 1배중손
김통정
지휘관 2고려
원종
김방경
원나라
쿠빌라이 칸
흔도 (炘都)
병력 1700
병력 212,000
관련 정보
한국어 이름삼별초의 난
한자 표기
로마자 표기Sambyeolchoui nan
매큔-라이샤워 표기Sambyŏlch'oŭi nan
기타 정보
관련 항목몽골의 침략과 정복
몽골의 고려 침략
쿠빌라이 칸의 원정

2. 배경

1232년 최씨 무신정권이 몽골의 침략에 맞서 강화도로 천도하였으나, 잦은 반란으로 고려의 기반은 허약했다. 북부 지역의 반란 무리가 몽골로 이탈하면서 해당 영토는 몽골 제국에 병합되기도 하였다.[1] 최씨 무신정권 붕괴 후, 원종과 그에게 의존한 문신들은 몽골 제국에 항복하였다. 이후 원종은 무신정권으로부터 정치권력을 되찾고 1270년(원종 11년) 삼별초 해산 명령을 내렸으나,[2] 배중손이 이끄는 강화도의 삼별초는 몽골 제국 및 몽골에 예속된 고려 조정에 반기를 들고 봉기하였다.[1][2]

2. 1. 삼별초의 기원과 성격

삼별초는 봉기하기 전에는 고려 조정의 휘하에 있었다. 원래 삼별초는 최씨 무신정권의 사병 집단이었고 군부독재를 유지하는 역할을 했다.[1][2]

1231년부터 고려는 몽골의 침입을 받았다. 이 기간 동안 고려는 최씨 가문이 이끄는 무신 정권의 지배를 받았다. 1232년, 정부는 강화도로 피난하여 몽골의 침입에 저항하였다. 그러나 불안정한 기반으로 인해 고려는 잦은 반란에 직면했고, 1258년 반란으로 몽골에 의해 쌍성과 동녕부가 설치되었다.

이러한 반군들과 달리 삼별초는 무신 정권의 기관이었다. 삼별초는 최씨 가문에 의해 치안 유지를 위해 조직되었다. 그러나 최씨 가문의 사병과 달리 삼별초는 경찰과 전투 부대의 공적 기능을 수행하여 사실상 군사력의 육위를 대체하였다.

1258년, 최씨 가문의 네 번째 독재자 최의는 김준에 의해 몰락했다. 김준은 친몽골 정책을 취하고 왕자 원종을 몽골로 보냈다.

그러나 1268년, 김준은 임연의 명령을 받은 삼별초에 의해 멸망했다. 이듬해, 임연의 원종 대체 시도는 몽골군의 도움을 받은 왕자(충렬)에 의해 무산되었다. 1270년, 임연의 후계자 임유무는 친몽골 세력에 의해 삼별초를 이용하여 살해당했다. 이는 무신 정권의 종말을 의미한다.[1][2]

2. 2. 몽골의 침입과 무신정권의 몰락

몽골고려를 침략하자 최씨 무신정권은 1232년강화도로 천도하고 몽골의 침략에 맞섰다. 하지만 기반이 허약한 고려는 잦은 반란에 직면했고, 일부는 평정되었지만 북부 지역의 반란 무리는 몽골로 이탈하여 그 영토는 몽골 제국에 병합되었다.[1] 최씨 무신정권이 붕괴하고 원종과 원종에 기생한 일단의 문신을 비롯한 신료들은 몽골 제국에 항복하였다. 무신정권에게서 정치권력을 빼앗은 원종은 결국 1270년 (원종 11년) 삼별초를 해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2]

1231년부터 고려는 몽골 제국의 간헐적인 침입을 받았다. 이 기간 동안 고려는 최씨 가문이 이끄는 무신 정권의 지배를 받았다. 1232년, 명목상의 왕이 이끄는 정부는 몽골 기병이 상륙할 수 없는 강화도로 피난하여 몽골의 침입에 저항하였다. 그러나 불안정한 기반으로 인해 고려는 잦은 반란에 직면했고, 1258년 반란으로 몽골에 의해 쌍성동녕부가 설치되었다.

삼별초는 최씨 가문에 의해 치안 유지를 위해 조직되었다. 그러나 최씨 가문의 사병과 달리 삼별초는 경찰과 전투 부대의 공적 기능을 수행하여 사실상 군사력의 육위(Six Divisions)를 대체하였다.

1258년, 최씨 가문의 네 번째 독재자 최의는 김준(김인준으로도 알려짐)에 의해 몰락했다. 김준은 친몽골 정책을 취하고 왕자 왕정(원종)을 몽골 제국으로 보냈다. 동시에 고종과 왕자는 김준으로부터 권력을 회복하기 위해 몽골에 접근했다.

그러나 1268년, 김준은 임연의 명령을 받은 삼별초에 의해 멸망했다. 이듬해, 임연의 원종 대체 시도는 몽골군의 도움을 받은 왕자(충렬왕)에 의해 무산되었다. 1270년, 임연의 후계자 임유무는 친몽골 세력에 의해 삼별초를 이용하여 살해당했다. 이는 무신 정권의 종말을 의미한다.

2. 3. 삼별초의 봉기

몽골이 고려를 침략하자 최씨 무신정권은 1232년강화도로 천도하고 몽골의 침략에 맞섰다. 하지만 기반이 허약한 고려는 잦은 반란에 직면했고, 일부는 평정되었지만 북부 지역의 반란 무리는 몽골로 이탈하고 그 영토는 몽골 제국에 병합되었다.[1] 최씨 무신정권이 붕괴하고 원종과 원종에 기생한 일단의 문신을 비롯한 신료들은 몽골 제국에 항복하였다. 무신정권에게서 정치권력을 빼앗은 원종은 결국 1270년 (원종 11년) 삼별초를 해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배중손이 이끄는 강화도의 삼별초는 몽골 제국 및 몽골에 예속된 고려 원종의 조정에 반기를 들고 봉기하였다.[1][2]

몽골 조정의 명령에 따라 원종은 수도를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천도하였다. 몽골의 지원을 받아 군벌들로부터 권력을 되찾은 왕은 삼별초를 폐지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몽골과 맺은 화의 조건에 분개한 배중손이 이끄는 삼별초는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강화도와 육지 사이의 통로를 체계적으로 차단하고 주변 섬과 해안 지역을 지배하에 두었다. 왕족인 왕온을 해상 왕국(海上王國)의 왕으로 추대했다. 이들은 강화도를 버리고 남서쪽 진도로 도망쳤다.[1]

3. 경과

1271년 음력 5월 고려와 몽골 연합군은 세 방향(좌군·중군·우군)에서 진도를 침략하였다. 삼별초는 진도의 관문인 벽파진에서 중군을 막는 데 주력했지만, 좌군과 우군이 배후와 측면에서 기습하여 진도 정권은 9개월 만에 함락되었다.[1] 혼란에 빠진 삼별초는 순식간에 무너졌고 배중손진도 남도진성에서 전사하였다.

1271년 말, 김통정이 이끄는 삼별초 잔여 세력은 탐라로 거점을 옮겨 항쟁을 이어갔다. 이들은 처음 1년간 자체 조직을 정비하고 방어 시설을 구축하였고, 이후 약 반년간 전라도 연안에서 군사 활동을 전개하여 충청도경기도 연안까지 세력을 넓혔으며, 개경 근처까지 진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273년 원종 14년 음력 4월, 몽골 제국과 연합군의 침략으로 탐라에서 결사항전하던 삼별초는 결국 무너졌다.

이에 앞서 몽골 조정의 명령에 따라 원종은 수도를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옮겼다. 몽골의 지원을 받아 군벌들로부터 권력을 되찾은 왕은 삼별초를 폐지하기로 결정했지만, 몽골과의 강화 조건에 분개한 배중손이 이끄는 삼별초는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이들은 강화도와 육지 사이의 통로를 체계적으로 차단하고 주변 섬과 해안 지역을 지배하에 두었으며, 왕족인 왕온을 해상 왕국의 왕으로 추대했다. 이후 삼별초는 강화도를 버리고 남서쪽 진도로 이동하였다.

1271년 1월, 진도는 식량 부족에 직면하기 시작했고, 2월 쿠빌라이 칸원나라 조정은 삼별초에 항복을 요구했다. 배중손은 쿠빌라이 칸에게 이전의 반란군들처럼 전라도를 확보하여 직접 통치하도록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4월, 원 조정은 반란군 진압을 결정했다.

3. 1. 강화도 시기

고려 무신정권의 사병 집단이자 대몽 항쟁의 선봉이었던 삼별초는 고려와 몽골 사이의 강화와 굴복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개경 환도가 발표되자 삼별초 지유(指諭) 배중손과 야별초(夜別抄) 지유 노영희(盧永禧) 등은 즉각 반기를 들고 항쟁을 결의하였다. 이들은 배중손을 지도자로 추대하고 강화도와 육지 사이의 교통을 끊었으며, 왕족인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3]을 왕으로 추대하여 관부(官府)를 설치하고 관리를 임명하여 반몽정권(反蒙政權)을 수립했다.[1]

그러나 이탈자가 속출하여 경계가 어렵게 되자 함선 1000여 척을 징발하여 강화도의 재화와 백성을 모두 싣고 강화도를 떠났다. 이후 삼별초는 서해안 요지를 공략하면서 남하하여 진도로 근거지를 옮겼다.[2]

3. 2. 진도 시기

애초 고려 무신정권의 사병 집단이자 대몽 항쟁의 선봉이었던 삼별초는 고려와 몽골 사이의 강화와 굴복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개경 환도가 발표되자 즉각 반기를 들었다. 삼별초 지유 배중손과 야별초 지유 노영희 등은 항쟁을 결의하였다. 배중손을 지도자로 추대하고 강화도와 육지 사이의 교통을 끊었으며, 왕족인 승화후 왕온을 왕으로 추대하여 관부를 설치하고 관리를 임명하여 반몽정권을 수립했다.[1]

그러나 이탈자가 속출하여 경계가 어렵게 되자 함선 1000여 척을 징발하여 강화도의 재화와 백성을 모두 싣고 강화도를 떠났다. 이후 삼별초는 서해안 요지를 공략하면서 남하하여 진도에 이르렀다. 그곳에 불변하고 오래가는 근거지를 두고 용장사를 행궁으로 삼았다. 그 뒤 용장사 주변에 산성을 쌓고 관아도 세웠으며, 제법 도읍지의 면모를 갖추고 활발하게 움직였고 고려의 유일한 정통 조정이라고 주장했다.[2] 당시 진도와 인근 지역에는 과거 최씨 무신정권이 소유한 농장이 그때까지도 대규모로 존재했다. 또한 경상도전라도 지방의 세곡이 수도로 운송되는 길목에 진도가 있었기 때문에 세곡으로 운반되는 식량과 자금을 자체 군량으로 사용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1]

또한 남해안과 각 도서·나주·장흥에서 동으로는 부산·김해·마산 등까지, 북으로는 전주에까지 출병하여 진압군을 격파하고 위세를 떨쳤으며, 그해 음력 11월에 이르러 삼별초군은 제주도까지 점령하는 등[1] 1271년 초까지 진압군과의 전투에서 여러 차례 승리하면서 개경 조정을 위협하였다.

그러나 1271년 음력 5월 진압군이 세 방향(좌군·중군·우군)에서 진도를 침략한다. 삼별초는 진도의 관문인 벽파진에서 중군을 막는 데 주력했지만, 삼별초가 중군을 방어하는 동안 좌군과 우군이 배후와 측면에서 기습하였다.[1] 진도 정권이 수립된 지 9개월 만에 진도는 함락당하였다. 혼란에 빠진 삼별초는 순식간에 무너졌고 배중손은 진도 남도진성에서 전사하였다.

3. 3. 제주도 시기

1271년 말, 김통정이 이끄는 삼별초 잔군은 탐라로 거점을 옮겨 항쟁을 계속했다.[1] 이들은 처음 1년간 자체 조직을 정비하고 방어 시설을 구축했다. 이후 약 반년간 전라도 연안에서 군사 활동을 펼쳐 충청도경기도 연안까지 세력을 넓혔고, 개경 근처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몽골 제국과 진압군의 침략으로 1273년 원종 14년 음력 4월, 탐라에서 결사항전하던 삼별초는 결국 무너졌다.[1]

1270년 11월 삼별초는 제주도를 점령하고 탐라의 왕을 몰아냈다.[1] 1271년 말까지 힘을 비축하며 일본 가마쿠라 막부에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듬해 세력을 회복한 삼별초는 한국 해안을 반복적으로 약탈했다. 1272년 2월 고려-원 연합군의 공격이 시작되었고, 4월에 진압되었다. 그 후 원나라는 1294년까지 탐라를 직접 통치했다.

4. 결과

삼별초의 항쟁은 고려가 원나라의 간섭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원나라는 탐라총관부를 설치하여 탐라를 직접 통치하는 등 양측에 영향을 미쳤다.[1]

4. 1. 고려에 미친 영향

삼별초의 항쟁은 고려 대몽항전의 최후를 장식한 것으로서, 그 후 고려는 14세기 중반까지 원나라의 간섭에 시달렸다. 그러므로 당시 고려 백성 중에서 삼별초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1]

4. 2. 원나라에 미친 영향

삼별초 항쟁 이후, 몽골은 1273년부터 1290년까지 탐라총관부를 설치하여 탐라를 직접 다스리고 다루가치를 두었다. 1277년(충렬왕 3)에는 목마장을 설치하여 자신들의 말 수요를 충당했다.

5. 평가

오늘날 삼별초의 항쟁은 외세 침략에 완강히 대항한 영웅으로 보기도 하고, 고려 왕조에 대한 무인 사병 집단의 반란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1]

1978년 제주도에 삼별초의 항쟁을 기리는 기념물이 세워졌다.[1] 진도의 용장산성 같은 유적지는 관광지로 유지된다.[1]

5. 1. 긍정적 평가

오늘날 삼별초의 항쟁은 외세 침략에 완강히 대항한 영웅으로 보기도 하고, 고려 왕조에 대한 무인 사병 집단의 반란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1]

1978년 제주도에 삼별초의 항쟁을 기리는 기념물이 세워졌다.[1] 진도의 용장산성 같은 유적지는 관광지로 유지된다.[1]

5. 2. 부정적 평가

오늘날 삼별초의 항쟁은 외세 침략에 완강히 대항한 영웅으로 보기도 하고, 고려 왕조에 대한 무인 사병 집단의 반란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1]

1978년 제주도에 삼별초의 항쟁을 기리는 기념물이 세워졌다. 진도에 있는 용장산성 같은 유적지는 관광지로 유지된다.[1]

5. 3. 역사적 의의

삼별초의 항쟁은 외세 침략에 완강히 대항한 영웅적인 항쟁으로 보기도 하고, 고려 왕조에 대한 무인 사병 집단의 반란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1]

1978년 제주도에 삼별초 항쟁을 기리는 기념물이 세워졌다. 진도의 용장산성 같은 유적지는 관광지로 유지된다.[1]

참조

[1] 뉴스 호국항쟁의 화신이 되다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8-02-13
[2] 뉴스 [이철영의 전라도 기행 33] 진도 삼별초 항쟁 - 진도에서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4-09-14
[3] 문서 承化侯(?-1271) 왕온 관련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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