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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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상지신은 강희제 시대의 인물로, 삼번의 난 당시 아버지 상가희가 청에 투항한 후 청군과 함께 오삼계를 공격했다. 이후 군권을 약화당하고 반역 혐의로 체포되어 처형되었거나 자결했다는 설이 있다. 상가희의 차남으로 태어나 용감하고 호탕한 성격이었으며, 순치제로부터 공과 같은 작위를 받기도 했다. 삼번의 난 발발 후, 청에 투항하여 평남친왕 작위를 세습했으나, 강희제의 의심을 받아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그의 사후, 상씨 번은 철폐되었으며, 상지신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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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지신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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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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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상지신(尙之信) |
한자 | 尚之信 |
자 | 덕부(德符) |
호 | 백암(白岩) |
직책 | |
직위 | 대청평남친왕(大淸平南親王), 분무대장군(奮武大將軍) |
소속 국가 | 대청(大淸) |
섬긴 군주 | 순치제(順治帝)→강희제(康熙帝)→오주태조(吳周太祖)→강희제(再次) |
최고 직무 | 알 수 없음 |
전임 | 상지효(尙之孝) |
후임 | 작위 박탈 |
관직 | 시위(侍衛)→토구장군(討寇將軍)→초토대장군(招討大將軍)(오주)→분무대장군(奮武大將軍) |
작위 | 평남왕세자(平南王世子)→보덕공(輔德公)(오주)→보덕친왕(輔德親王)(오주)→평남친왕(平南親王) |
봉지 | 광동(廣東) |
기적 | 양람기 |
생애 | |
출생일 | 1636년 8월 2일 |
사망일 | 1680년 10월 9일 |
사망 장소 | 광동 광주(廣州) |
묘지 | 알 수 없음 |
사당 | 알 수 없음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상가희(尙可喜) |
어머니 | 서씨(舒氏) |
배우자 | 경씨(耿氏) |
자녀 | 아들 상숭일(尙崇溢) 등 3명, 딸 5명 |
형제자매 | 상지효(尙之孝), 어푸(額駙) 상지륭(尙之隆) 등 29명, 손위아래 누이 32명 |
기타 정보 | |
출신 | 알 수 없음 |
공명 | 알 수 없음 |
경력 | 알 수 없음 |
저서 | 알 수 없음 |
2. 생애
강희제 12년(1673년), 아버지 상가희는 고향인 요동으로 돌아가기 위해 평남왕 작위와 광동 지역 통치권을 아들 상지신에게 물려주고자 청나라 조정에 요청하였다. 그러나 청 조정은 삼번을 폐지하려는 조서를 내렸고, 이에 오삼계와 의형제인 경정충이 군사를 일으키자 상지신도 이에 호응하였다.
강희제 15년(1676년), 상지신은 반란에 반대했던 아버지 상가희를 가택 연금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가희가 사망하자, 상지신은 청나라에 투항하여 청군과 함께 오삼계를 공격했다.
강희제 18년(1679년), 강희제는 삼번을 평정하고 상지신의 군사력을 약화시켰다. 강희제 19년(1680년) 8월, 강희제는 상지신이 반역할 마음을 품고 있다고 의심하여 그해 윤8월에 상지신과 그의 아들 상숭밀(尚崇謐)을 체포하여 베이징으로 압송하였다. 이후 상지신은 처형되었다는 설과 자살을 명령받았다는 설(사사(賜死))이 있으며, 당시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2. 1. 초기 생애
상지신은 청나라 숭덕 원년(1636) 7월 2일 술시(戌時)에 평남왕(平南王) 상가희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호씨(胡氏)이다. 상가희의 장남이자 상지신의 큰형 상지충(尙之忠)은 백부 상가진(尙可進)의 양자로 갔기 때문에 상지신이 사실상 장남 역할을 하였다.[1] 상지신은 어려서 용감하였고 술을 좋아했으며 작은 것에 얽매이지 않는 성격이었다. 어려서는 아버지를 따라 진소(鎭所)에 머물렀다. 순치제 연간, 상지신은 입궁하여 시위(侍衛) 직을 맡았고, 순치제는 상가희가 공이 많다는 이유로 상지신에게 공(公)과 같은 작위를 내리면서 '안달(安達, anda|안다mnc의 음역어로 '의형제', '절친한 친구', '어렸을 적 친구'를 뜻함)'이라고 칭하였다. 이로 인하여 상지신은 엄답공(俺答公, 俺答은 anda|안다mnc의 음역어)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강희 10년(1671), 상가희는 연로한 것을 이유로 상지신을 광동으로 돌려보내어 번의 군무를 맡게 할 것을 요청하였고, 강희제는 이를 윤허하였다. 상지신은 광동으로 돌아간 이후 사택을 짓고 대권을 장악하였으며, 이로 인해 상가희와 자주 부딪혔다. 상가희의 막료(幕僚) 김광(金光)은 상지신이 하는 일마다 반감을 가졌고 항상 상가희에게 상지신을 음해할 계책을 건의하였다. 강희 12년(1673), 상가희는 김광의 건의를 들은 후, 자신은 좌령(佐領) 2명을 데리고 고향 요동(遼東) 동해성(東海城)으로 돌아가며 상지효(尙之孝)에게 평남왕 작위를 세습하게 할 것을 요청하였다. 강희제는 이를 계기로 번의 철폐를 선포하였고, 그 결과 오삼계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삼번의 난이 발생, 조정에서는 긴급히 상씨의 번을 철폐하는 것을 중지하는 명령을 내리고 상가희에게 광동에 남을 것을 명령하였다.2. 2. 삼번의 난
삼번의 난이 발생하자, 상가희는 청나라에 계속 충성을 보였으나, 조주총병(潮州總兵) 유진충(劉進忠)은 반란에 가담하였다. 상가희는 차남 상지효를 파견하여 유진충을 토벌하도록 지시하였다. 상가희는 상지신이 술에 취하면 사람을 죽이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상지효에게 평남왕 작위를 세습하게 할 것을 요청하였다. 강희제는 상가희의 충성을 가상하게 여겨 그 청을 윤허하였고, 상지효는 평남대장군(平南大將軍)에, 상지신은 토구장군(討寇將軍)에 봉하였다. 이로 인해 상지신은 불만을 품고 집안 사람들을 모아 계략을 짰고, 상지효는 평남친왕의 작위를 사양한다는 상주를 하였다.강희제 15년(1676) 봄, 상가희가 중병에 걸리자 총병 조택청(祖澤淸)과 손해종(孫楷宗), 수사부장(水師副將) 조천원(趙天元)이 잇달아 반란을 일으켰으며, 손연령, 경정충, 정경 세력이 광동을 침략하는 등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갔다. 상지신은 기회를 틈타 평남왕부(平南王府)를 병사로 포위하고 김광을 죽였으며 상지효의 병권을 빼앗고 오삼계에게 투항하였다. 상가희는 자살을 시도했으나 미수에 그쳤고 얼마 후 실의에 빠져 우울 속에 생을 마감하였다. 오삼계는 상지신에게 초토대장군보덕공(招討大將軍·輔德公)을 수여하였고, 얼마 후 보덕친왕(輔德親王)으로 승진시켰다.
오삼계는 동중민(董重民)도 양광총독(兩廣總督)으로 임명하여 조경(肇慶)에 주둔시키고, 사궐부(謝厥扶)를 장군(將軍)으로 임명하여, 수륙 양방향으로 호응하게 하였으며, 상지신에게도 출병을 여러 차례 재촉하였다. 상지신은 금 량을 뇌물로 주자 재촉이 멈추었다. 상지신은 오삼계가 광동 업무에 간섭하는 것이 불만이었기에 다시 청에 투항할 계책을 몰래 짰다. 상지신은 대장군(大將軍) 라부(喇布)를 전방에 파견하여 대죄입공(戴罪立功, 죄를 지은 신하가 공을 세우겠다는 의미)의 뜻을 밝혔고, 강희제는 상지신을 안무하였다. 강희 16년(1677) 상지신은 동중민을 체포하였고 사궐부의 군대는 패배하여 바다로 도주하자, 상지신은 도통(都統) 상지영(尙之瑛)을 파견하여 청군을 맞이하게 하였다. 강희제는 상가희가 청에 보인 공훈이 크기에 상지신을 용서하고 그에게 평남친왕 작위를 세습하게 하였고, 반란군은 모두 옛 직함을 회복시켰으며, 상지신은 마침내 사신을 보내어 입공(入貢)하였다.
강희제 12년(1673년), 아버지 상가희는 고향 땅(요동)으로 돌아가기 위해 평남왕의 작위와 광동의 땅을 아들 상지신에게 잇게 하고자 청 조정에 요청하였다. 그러나 청 조정은 상지신 등 삼번을 폐지하려는 조서를 내렸다. 오삼계와 의형제인 경정충은 군대를 일으켰고, 상지신은 이에 호응하였다. 강희 15년(1676년), 반란에 반대했던 아버지 상가희를 가택연금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죽자, 청에 투항하여 청군과 함께 오삼계를 공격했다. 강희 18년(1679년), 강희제는 삼번을 평정하고, 상지신의 군권을 빼앗아 약화시켰다. 강희 19년(1680년) 8월, 강희제는 상지신이 반역의 마음을 품었다고 의심하여 윤8월에 상지신과 그의 아들 상숭밀(尚崇謐)을 체포하여 베이징으로 압송하여 처형했다는 설과 자살을 명령했다는 설(사사(賜死))이 있다. 향년 45세였다.
2. 3. 청나라 투항 이후
강희제 16년(1677년) 가을, 부굉렬은 광주에서 오세종과 작전을 펼쳤으며, 상지신은 총병 상종지(尙從志) 등 3천 명을 지원군으로 보냈다. 강희제는 상지신에게 소주에서 출병하여 의장, 침주, 영주를 함락하도록 지시하였으나, 상지신은 광동 토적이 많다는 이유로 주저하였다. 망이투가 소주를 공격하자, 강희제는 상지신에게 오주로 병력을 이동시킬 것을 지시하였으나, 상지신은 따르지 않았다. 망이투가 이끄는 부대가 광서로 깊이 들어가자, 강희제는 상지신에게 대응할 것을 지시했지만, 상지신은 광동 세 군(郡)이 이제 막 평정되었다는 것을 이유로 대충 둘러댔고, 이후 강희제의 강력한 명령에 의하여 상지신은 부장 왕국동(王國棟)을 파견하여 의장으로 보내었다.강희 17년(1678년) 오삼계가 병사하였고, 상지신은 광서로 진격할 것을 자청하였다. 강희제는 상지신에게 분무대장군 직을 내렸고 나머지 대군과 함께 진격하도록 하였다. 강희 18년(1679년), 조천원이 청에 투항하자 상지신은 조천원을 처형할 것을 상주하였다. 대군이 횡주(橫州)에 이르자 상지신은 병을 핑계로 돌아갔으며, 총병 시응운(時應運)을 망이투에게 보내었다. 오주(吳周) 부대가 무선(武宣)을 점령하자, 강희제는 상지신의 출병을 반복하여 재촉했다. 강희 19년(1680년) 봄, 상지신은 대군을 직접 이끌고 무선을 공격하였다.
강희 18년(1679년), 강희제는 삼번을 평정하고, 상지신의 군권을 빼앗아 약화시켰다. 강희 19년(1680년) 8월, 강희제는 상지신이 반역을 꾀한다고 의심하여 윤8월에 상지신과 그의 아들 상숭밀(尚崇謐)을 체포하여 베이징으로 압송, 처형했다는 설과 자살을 명령했다는 설(사사(賜死))이 있다. 향년 45세였다.
3. 가족
尙崇溢|상숭일중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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