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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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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생구는 고대 문서에 등장하는 용어로, '살아있는 입'이라는 뜻으로, 포로를 의미하며 노예적 신분으로 여겨진다. 『후한서』, 『삼국지』, 광개토왕릉비 등에서 생구를 헌상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생구의 성격에 대해서는 노예, 기술자, 유학생 등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며, 노비와의 관계에 대한 논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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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구
생구
생구살아있는 입, 살아있는 사람, 산사람
생구의 의미사람의 목숨, 백성의 생명
현대적 의미국민, 시민
역사적 의미
고려 시대'고려시대에는 사람이 재산으로 간주되어 매매, 증여, 상속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를 생구라고 불렀다. # '
노비생구는 넓은 의미에서 노비와 유사한 개념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조선 시대조선 시대에는 생구의 개념이 점차 약화되었지만, 여전히 인신매매나 유괴 등의 범죄로 인해 사람이 재산으로 취급되는 경우가 있었다.
생구의 변화시대가 변화하면서 생구의 의미는 점차 변화하여, 현대에는 사람의 존엄성과 권리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2. 어원 및 용례

생구는 "살아있는 입"이라고 쓰며, 본래는 포로를 의미하는 단어이므로, 포로를 기원으로 하는 노예적 신분으로 여겨지고 있다. 시대적으로 헌상품이 풍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구를 보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다만 이견도 많아, 포로와 관계없는 노예로 보는 설, 굳이 중국에 헌상했다는 점에서 단순한 포로나 노예가 아니라 어부 등 어떤 기술을 가진 자로 보는 설도 있다. 더 나아가 중국 유학생으로 보는 설도 있었다. 위지왜인전의 기술로부터, 야요이 시대 후기에 노비라는 노예 계층이 있었음이 알려져 있다.[1]

생구가 노비와 완전히 다른 존재인지, 중복되는지는 논란이 있다. 모두 과거 중국에서 한반도를 기술한 것이기 때문이다.[1]


  • 107년(후한영초 원년), 당시 왜왕 수승 등이 후한의 안제에게 생구 160명을 헌상했다.[1]
  • 고구려 광개토왕비 (396년): 백제가 고구려에 대패하여 생구를 헌상했다.[1]
  • 고려사 (문영의 역, 1274년): 고려로 귀환한 김방경 등은 일본인의 자녀를 포로로 잡아, 고려왕과 비에게 생구로 헌상했다.[1]

3. 생구의 성격에 대한 논쟁

생구는 남조 송나라부터 당나라에 걸쳐 성립된 것으로 여겨지는 『후한서』, 『삼국지』 중 「위서」(『위지왜인전』), 현재 중국 지린성에 소재하는 광개토왕비 등에 보이는 용어이다.

생구는 본래 포로를 의미하는 단어이므로, 그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논쟁이 있다. 크게 '''노예설''', '''기술자 또는 유학생설''', '''노비와의 관계''' 등으로 나뉜다.

3. 1. 노예설

생구는 "살아있는 입"이라고 쓰며, 본래는 포로를 의미하는 단어이므로, 포로를 기원으로 하는 노예적 신분으로 여겨지고 있다. 시대적으로 헌상품이 풍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구를 보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다만 이견도 많아, 포로와 관계없는 노예로 보는 설, 굳이 중국에 헌상했다는 점에서 단순한 포로나 노예가 아니라 어부 등 어떤 기술을 가진 자로 보는 설도 있다. 더 나아가 중국 유학생으로 보는 설도 있었다. 위지왜인전의 기술로부터, 야요이 시대 후기에 노비라는 노예 계층이 있었음이 알려져 있다. 모두 과거 중국에서 한반도를 기술한 것이므로, 생구가 노비와 완전히 다른 존재인지, 중복되는지는 논란이 있다.[1]

하야시야 타츠사부로가 『후한서』의 기술을 근거로 "노예를 헌상했다"고 해석하는 것에 대해, 이시자와 토오루는 생구가 곧바로 노예라고 보기 어렵다고 하고, 백제가 박사나 고승을 문화 사절로 파견했을 때에도 "우리 조정에 헌상했다"고 표현되었기 때문에, "헌상했다"는 것으로 노예 헌상이라고만 생각할 수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2]

생구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 후한서』 - 107년(후한영초 원년)에 당시 왜왕 수승 등이 후한의 안제에게 생구 160명을 헌상했다.
  • 고구려 광개토왕비 - 396년 백제가 고구려에 대패하여 생구를 고구려에 헌상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 고려사 - 1274년(충렬왕 원년) 문영의 역에서 고려로 귀환한 김방경 등은 일본인의 자녀를 포로로 잡아 고려왕과 비에게 생구로 헌상했다. (시중 김방경 등이 군사를 돌려 돌아오고, 홀돈(신도)이 사로잡은 어린 남녀 200명을 왕과 공주에게 바쳤다.)
  • 『삼국지 위지 동이전』- 239년( 명제 경초 2년) 왜왕 히미코가 위 명제에게 남생구 4명, 여생구 6명을, 243년(위 소제 정시 4년) 위 소제에게 생구를 헌상하고, 그 후계자인 토요도 248년에 생구 30명을 위에 헌상하고 있다.

3. 2. 기술자 또는 유학생설

생구는 "살아있는 입"이라고 쓰며, 본래는 포로를 의미하는 단어이므로, 포로를 기원으로 하는 노예적 신분으로 여겨지고 있다. 시대적으로 헌상품이 풍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구를 보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다만 이견도 많아, 포로와 관계없는 노예로 보는 설, 굳이 중국에 헌상했다는 점에서 단순한 포로나 노예가 아니라 어부 등 어떤 기술을 가진 자로 보는 설도 있다. 더 나아가 중국 유학생으로 보는 설도 있었다.[1]

이시자와 토오루는 하야시야 타츠사부로가 『후한서』의 기술을 근거로 "노예를 헌상했다"고 해석하는 것에 대해, 생구가 곧바로 노예라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백제가 박사나 고승을 문화 사절로 파견했을 때에도 "우리 조정에 헌상했다"고 표현되었기 때문에, "헌상했다"는 것으로 노예 헌상이라고만 생각할 수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2]

3. 3. 노비와의 관계

생구는 "살아있는 입"이라고 쓰며, 본래는 포로를 의미하는 단어이므로, 포로를 기원으로 하는 노예적 신분으로 여겨지고 있다. 야요이 시대 후기에 노비라는 노예 계층이 있었음이 알려져 있다. 생구와 노비가 완전히 같은 존재인지, 아니면 다른 존재인지는 논란이 있다.[1]

하야시야 타츠사부로는 『후한서』의 기록을 근거로 "노예를 헌상했다"고 해석했지만, 이시자와 토오루는 생구가 곧바로 노예를 의미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백제가 박사나 고승을 문화 사절로 파견했을 때에도 "우리 조정에 헌상했다"고 표현했기 때문에, "헌상했다"는 표현만으로 노예를 헌상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2]

참조

[1] 간행물 生口
[2] 논문 古代日本の奴隷制説について批判し、私見を述ぶ : 諸家の近業をよみて https://hokkyodai.re[...] 北海道学芸大学 1958-12
[3] 웹인용 삼국사기 권제23 백제본기 제1 http://db.history.go[...]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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