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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쿠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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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샤쿠샤인은 1669년 마쓰마에 번에 대항하여 봉기를 일으킨 아이누의 소을명(지도자)이다. 그는 시베차리(현재 신히다카정)를 거점으로, 마쓰마에 번과의 불공정한 교역에 반발하여 에조 지방의 아이누들을 규합해 봉기를 주도했다. 이 봉기는 '샤쿠샤인의 전투'로 불리며, 그는 쿠누이까지 진격했으나, 에도 막부와 도호쿠 지방 번들의 지원을 받은 마쓰마에 번에게 패배하여 살해되었다. 샤쿠샤인과 관련된 기념물로는 동상과 흔적비 등이 있으며, 그의 봉기를 기리는 축제도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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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쿠샤인
기본 정보
샤쿠샤인 상 (초대)
씨명샤쿠샤인
로마자 표기Shakushain
한자 표기沙牟奢允
아이누어 표기saksaynu, Samkusaynu
출생일1606년 (경장 11년)?
출생지홋카이도히다카 지방
사망일1669년 11월 16일 (간분 9년 10월 23일)
사망지피포크 마쓰마에 번 진영 (현, 홋카이도 니이카푸 정)
사인암살
기념비동상 (신히다카 정)
민족아이누 민족
직업惣乙名 (소우오토나)
기타아이누의 남성 인명에 '~아이누'를 붙이는 경우가 있으며, 샤쿠샤인, 코샤마인 등이 그러한 예이다.
참고 자료

2. 경력

샤쿠샤인은 메나시쿨(メナシクル)의 소을명(惣乙名)으로, 1669년 샤쿠샤인의 전투(シャクシャインの戦い)를 이끌었다. 그는 슈무쿨(シュムクル)의 소을명인 오니비시(オニビシ)(인물)를 살해하고, 마쓰마에번(松前藩)에 대항하여 봉기했다. 봉기는 각지에서 발생하여 와진을 공격했고, 샤쿠샤인 군은 야마고에군(山越郡) 나가만베정(長万部町)의 쿠누이(クンヌイ)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마쓰마에번은 도쿠가와 막부와 도호쿠 지방 여러 번의 지원을 받아 전투에서 우위를 점했고, 결국 샤쿠샤인은 현재의 신코난정에 해당하는 피포쿠의 마쓰마에번 진영에서 살해되었다.[4]

2. 1. 초기 생애

샤쿠샤인은 시베차리(현재의 신히다카정) 이남의 히다카 지방 및 그 동쪽에 있는 집단인 메나시쿨(メナシクル)의 소을명(惣乙名)이었다. 메나시쿨은 현재의 신코난정(新冠町)에서 하쿠쇼정(白老町)에 이르는 집단인 슈무쿨(シュムクル)과 시베차리강(시베차리가와, 静内川) 유역의 영역을 두고 최소한 1648년부터 대립하고 있었다. 메나시쿨의 전대 소을명인 카모쿠타인(カモクタイン)은 슈무쿨의 소을명인 오니비시(オニビシ)(인물)와의 1653년 항쟁으로 살해되었고, 소사(小使)였던 샤쿠샤인이 소을명이 되었다.

샤쿠샤인은 시베차리강 하류 동쪽 기슭, 시베차리(シベチャリ)의 차시(チャシ)(요새)를 거점으로 삼고 있었다(현・신히다카정 시즈나이 지구). 오니비시는 시베차리강 상류 서쪽 기슭의 하에의 차시를 거점으로 삼고 있었다(현 히다카정(日高町)(홋카이도) 몬베츠 지구).[3] 양자는 대립하고 있었지만, 마쓰마에번(松前藩)의 중재로 일단 강화했다.[4] 그러나, 관문(寛文) 연간(1661~1673년)에는 양자의 대립이 재발하여, 1668년 4월, 샤쿠샤인이 오니비시를 살해했다.[4]

2. 2. 부족 간 갈등

샤쿠샤인은 시베차리(현재의 신히다카정) 이남의 히다카 지방 및 그 동쪽에 있는 집단인 메나시쿨(メナシクル)의 소을명(惣乙名)이었다. 메나시쿨은 현재의 신코난정(新冠町)에서 하쿠쇼정(白老町)에 이르는 집단인 슈무쿨(シュムクル)과 시베차리강(시베차리가와, 静内川) 유역의 영역을 두고 최소한 1648년부터 대립하고 있었다. 1653년에는 메나시쿨의 전대 소을명인 카모쿠타인(カモクタイン)이 슈무쿨의 소을명인 오니비시(オニビシ)(인물)와의 항쟁으로 살해되었고, 소사(小使)였던 샤쿠샤인이 소을명이 되었다.

샤쿠샤인은 시베차리강 하류 동쪽 기슭, 시베차리(シベチャリ)의 차시(チャシ)(요새)를 거점으로 삼고 있었다(현・신히다카정 시즈나이 지구). 오니비시는 시베차리강 상류 서쪽 기슭의 하에의 차시를 거점으로 삼고 있었다(현 히다카정(日高町)(홋카이도) 몬베츠 지구).[3] 양자는 대립하고 있었지만, 마쓰마에번(松前藩)의 중재로 일단 강화했다.[4] 그러나, 관문(寛文) 연간(1661~1673년)에는 양자의 대립이 재발하여, 1668년 4월, 샤쿠샤인이 오니비시를 살해했다.[4] 보복을 위해 하에는 마쓰마에번에 무기 지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4] 하에의 사자가 귀로에 천연두(天然痘)로 급사하자, 사자가 마쓰마에에서 독살당했다는 풍설이 퍼지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대립하고 있던 시베차리와 하에는 하나로 뭉치게 되었다.[4]

2. 3. 마쓰마에 번과의 관계

샤쿠샤인은 시베차리(현재의 신히다카정) 이남의 히다카 지방 및 그 동쪽에 있는 집단인 메나시쿨(メナシクル)의 소을명(惣乙名)이었다. 메나시쿨은 현재의 신코난정(新冠町)에서 하쿠쇼정(白老町)에 이르는 집단인 슈무쿨(シュムクル)과 시베차리강(시베차리가와, 静内川) 유역의 영역을 두고 최소한 1648년부터 대립하고 있었다. 메나시쿨의 전대 소을명인 카모쿠타인(カモクタイン)은 슈무쿨의 소을명인 오니비시(オニビシ)(인물)와의 1653년 항쟁으로 살해되었고, 소사(小使)였던 샤쿠샤인이 소을명이 되었다.

샤쿠샤인은 시베차리강 하류 동쪽 기슭, 시베차리(シベチャリ)의 차시(チャシ)(요새)를 거점으로 삼고 있었다. 오니비시는 시베차리강 상류 서쪽 기슭의 하에의 차시를 거점으로 삼고 있었다.[3] 양자는 대립하고 있었지만, 마쓰마에번(松前藩)의 중재로 일단 강화했다.[4] 그러나, 관문(寛文) 연간(1661~1673년)에는 양자의 대립이 재발하여, 1668년 4월, 샤쿠샤인이 오니비시를 살해했다.[4] 보복을 위해, 하에는 마쓰마에번에 무기의 지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4] 하에의 사자가 귀로에 천연두(天然痘)로 급사하자, 사자는 마쓰마에에서 독살당했다는 풍설이 퍼지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대립하고 있던 시베차리와 하에는 하나로 뭉치게 되었다.[4]

1669년 시점에서, 마쓰마에번과 아이누의 교역은 마쓰마에번 측에 압도적으로 유리했고, 아이누에게 있어서 상업 교역은 궁지에 몰린 상태였다.[4] 샤쿠샤인은 에조 지방 전역의 아이누에게 마쓰마에번에 대한 전쟁을 호소했다.[4] 1669년 6월, 샤쿠샤인이 지휘하는 아이누 군은 마쓰마에번에 대한 봉기를 일으켰다.[4] 이것이 샤쿠샤인의 전투(シャクシャインの戦い)이다.[4]

쿠누이에서의 전투는 8월 상순까지 계속되지만, 샤쿠샤인 세력이 와진 측의 방해로 오시마 반도(渡島半島)의 아이누와 연계할 수 없었던 반면, 마쓰마에번은 막부와 도호쿠 여러 번의 지원을 받아 다수의 철포를 장비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전투는 샤쿠샤인 측의 열세가 되고, 샤쿠샤인 군은 쿠누이에서의 패퇴를 피할 수 없었다.[4] 샤쿠샤인은 10월 23일(11월 16일) 현재의 신코난정에 해당하는 피포쿠의 마쓰마에번 진영에서 살해되었다.[4]

3. 샤쿠샤인의 전투 (1669년)

1669년 6월, 샤쿠샤인이 지휘하는 아이누 군은 마쓰마에 번에 봉기했다.[4] 이것이 샤쿠샤인의 전투(シャクシャインの戦い)이다.[4] 봉기는 각지에서 발생하여 사금 채취나 교역을 위해 온 선박(船)이나 독수리 사냥꾼을 공격하고, 와진을 살해했다.[4] 샤쿠샤인은 마쓰마에를 향해 진군하여, 7월 말에는 현재의 야마고에군(山越郡)나가만베정(長万部町)의 쿠누이(クンヌイ)까지 진격했다.[4] 도쿠가와 막부는 마쓰마에번의 급보를 받고 도호쿠(東北) 여러 번(藩)에 마쓰마에번 지원, 철포, 군량 제공을 명령했다.[4]

쿠누이 전투는 8월 상순까지 계속되었지만, 샤쿠샤인 세력은 와진 측의 방해로 오시마 반도(渡島半島)의 아이누와 연계할 수 없었다. 반면 마쓰마에번은 막부와 도호쿠 여러 번의 지원을 받아 다수의 철포를 장비하여 샤쿠샤인 군은 패퇴했다.[4] 샤쿠샤인은 10월 23일(11월 16일) 현재의 신코난 정 피포쿠의 마쓰마에번 진영에서 살해되었다.[4] 약 3년간 전쟁이 계속되었지만, 지도자를 잃은 봉기자들은 마쓰마에군에 항복했다.[4]

3. 1. 봉기의 배경

샤쿠샤인은 시베차리(현재의 신히다카정) 이남의 히다카 지방 및 그 동쪽에 있던 집단인 메나시쿨(メナシクル)의 소을명(惣乙名)이었다. 메나시쿨은 현재의 신코난정(新冠町)에서 하쿠쇼정(白老町)에 이르는 집단인 슈무쿨(シュムクル)과 시베차리강(시베차리가와, 静内川) 유역의 영역을 두고 최소한 1648년부터 대립하고 있었다. 메나시쿨의 전대 소을명인 카모쿠타인(カモクタイン)은 슈무쿨의 소을명인 오니비시(オニビシ)(인물)와의 1653년 항쟁으로 살해되었고, 소사(小使)였던 샤쿠샤인이 소을명이 되었다.

샤쿠샤인은 시베차리강 하류 동쪽 기슭, 시베차리(シベチャリ)의 차시(チャシ)(요새)를 거점으로 삼고 있었다(현・신히다카정 시즈나이 지구). 오니비시는 시베차리강 상류 서쪽 기슭의 하에의 차시를 거점으로 삼고 있었다(현 히다카정(日高町)(홋카이도) 몬베츠 지구).[3] 양자는 대립하고 있었지만, 마쓰마에번(松前藩)의 중재로 일단 강화했다.[4] 그러나, 관문(寛文) 연간(1661~1673년)에는 양자의 대립이 재발하여, 1668년 4월, 샤쿠샤인이 오니비시를 살해했다.[4] 보복을 위해 하에는 마쓰마에번에 무기 지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4] 하에의 사자가 귀로에 천연두(天然痘)로 급사하자, 사자는 마쓰마에에서 독살당했다는 풍설이 퍼지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대립하고 있던 시베차리와 하에는 하나로 뭉치게 되었다.[4]

1669년 시점에서, 마쓰마에번과 아이누의 교역은 마쓰마에번 측에 압도적으로 유리했고, 아이누에게 있어서 상업 교역은 궁지에 몰린 상태였다.[4] 샤쿠샤인은 에조 지방 전역의 아이누에게 마쓰마에번에 대한 전쟁을 호소했다.[4]

3. 2. 봉기의 전개

샤쿠샤인은 시베차리(현재의 신히다카정) 이남의 히다카 지방 및 그 동쪽에 있는 집단인 메나시쿨(メナシクル)의 소을명(惣乙名)이었다. 메나시쿨은 현재의 신코난정(新冠町)에서 하쿠쇼정(白老町)에 이르는 집단인 슈무쿨(シュムクル)과 시베차리강(시베차리가와, 静内川) 유역의 영역을 두고 최소한 1648년부터 대립하고 있었다. 1653년 메나시쿨의 전대 소을명인 카모쿠타인(カモクタイン)은 슈무쿨의 소을명인 오니비시(オニビシ)(인물)와의 항쟁으로 살해되었고, 소사(小使)였던 샤쿠샤인이 소을명이 되었다.

샤쿠샤인은 시베차리강 하류 동쪽 기슭, 시베차리(シベチャリ)의 차시(チャシ)(요새)를 거점으로 삼고 있었다(현・신히다카정 시즈나이 지구). 오니비시는 시베차리강 상류 서쪽 기슭의 하에의 차시를 거점으로 삼고 있었다(현 히다카정(日高町)(홋카이도) 몬베츠 지구).[3] 양자는 대립하고 있었지만, 마쓰마에번(松前藩)의 중재로 일단 강화했다.[4] 그러나, 관문(寛文) 연간(1661~1673년)에는 양자의 대립이 재발하여, 1668년 4월, 샤쿠샤인이 오니비시를 살해했다.[4] 보복을 위해 하에는 마쓰마에번에 무기 지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4] 하에의 사자가 귀로에 천연두(天然痘)로 급사하자, 사자는 마쓰마에에서 독살당했다는 풍설이 퍼지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대립하고 있던 시베차리와 하에는 하나로 뭉치게 되었다.[4]

1669년 시점에서, 마쓰마에번과 아이누의 교역은 마쓰마에번 측에 압도적으로 유리했고, 아이누에게 있어서 상업 교역은 궁지에 몰린 상태였다.[4] 샤쿠샤인은 에조 지방 전역의 아이누에게 마쓰마에번에 대한 전쟁을 호소했다.[4] 1669년 6월, 샤쿠샤인이 지휘하는 아이누 군은 마쓰마에번에 대한 봉기를 일으켰다.[4] 이것이 샤쿠샤인의 전투(シャクシャインの戦い)이다.[4] 봉기는 각지에서 발생하여 사금 채취나 교역을 위해 온 선박(船)이나 독수리 사냥꾼을 공격하고, 와진을 살해했다.[4] 샤쿠샤인은 마쓰마에를 향해 진군하여, 7월 말에는 현재의 야마고에군(山越郡)나가만베정(長万部町)의 쿠누이(クンヌイ)까지 진격했다.[4] 마쓰마에번으로부터 급보를 받은 도쿠가와 막부는 도호쿠(東北) 여러 번(藩)에 마쓰마에번에 대한 원군과 철포, 군량 제공을 명령하고 실행했다.[4]

쿠누이에서의 전투는 8월 상순까지 계속되지만, 샤쿠샤인 세력이 와진 측의 방해로 오시마 반도(渡島半島)의 아이누와 연계할 수 없었던 반면, 마쓰마에번은 막부와 도호쿠 여러 번의 지원을 받아 다수의 철포를 장비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전투는 샤쿠샤인 측의 열세가 되고, 샤쿠샤인 군은 쿠누이에서 패퇴했다.[4] 샤쿠샤인은 10월 23일(11월 16일) 현재의 신코난정에 해당하는 피포쿠의 마쓰마에번 진영에서 살해되었다.[4] 전쟁은 약 3년간 계속되었지만, 지도자를 잃은 봉기자들은 최종적으로 마쓰마에군에 항복했다.[4]

3. 3. 마쓰마에 번의 대응과 전투의 결과

1668년 4월, 샤쿠샤인은 오니비시를 살해했다.[4] 하에는 보복을 위해 마쓰마에 번에 무기 지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4] 하에의 사자가 돌아가는 길에 천연두로 급사하자, 마쓰마에 번에서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져 대립하던 시베차리와 하에는 하나로 뭉치게 되었다.[4]

1669년 당시 마쓰마에 번과 아이누의 교역은 마쓰마에 번 측에 압도적으로 유리했고, 아이누는 궁지에 몰린 상태였다.[4] 샤쿠샤인은 에조 지방 전역의 아이누에게 마쓰마에 번에 대한 봉기를 호소했다.[4] 같은 해 6월, 샤쿠샤인이 지휘하는 아이누 군은 봉기를 일으켜 각지에서 사금 채취나 교역을 위해 온 선박이나 독수리 사냥꾼을 공격하고 와진을 살해했다.[4] 샤쿠샤인은 마쓰마에를 향해 진군하여, 7월 말에는 현재의 야마고에 군 나가만베 정의 쿠누이까지 진격했다.[4] 마쓰마에 번으로부터 급보를 받은 도쿠가와 막부도호쿠 지방 여러 에 마쓰마에 번에 대한 원군과 철포, 군량 제공을 명령했다.[4]

쿠누이 전투는 8월 상순까지 계속되었지만, 샤쿠샤인 세력은 와진 측의 방해로 오시마 반도의 아이누와 연계할 수 없었다. 반면 마쓰마에 번은 막부와 도호쿠 여러 번의 지원을 받아 다수의 철포를 장비하여 샤쿠샤인 군은 패퇴했다.[4] 샤쿠샤인은 10월 23일(11월 16일) 현재의 신코난 정에 해당하는 피포쿠의 마쓰마에 번 진영에서 살해되었다.[4] 전쟁은 약 3년간 계속되었지만, 지도자를 잃은 봉기자들은 최종적으로 마쓰마에 군에 항복했다.[4]

4. 샤쿠샤인의 협력자

샤쿠샤인은 메나시쿨(メナシクル)의 소을명(惣乙名)이었다. 메나시쿨은 현재의 신코난정(新冠町)에서 하쿠쇼정(白老町)에 이르는 집단인 슈무쿨(シュムクル)과 대립하고 있었다. 샤쿠샤인은 시베차리강 하류 동쪽 기슭의 차시(チャシ)(요새)를 거점으로 삼고 있었다.

샤쿠샤인의 참모장은 그의 딸의 사위이자 아키타번센보쿠군무사토촌 출신인 탓토우인(龍頭允) 쇼타유였다.[20] 야마자키 토쿠마사의 『덕정야화』에 따르면, 샤쿠샤인의 봉기는 무사토촌의 쇼타유라는 자가 에조지(아이누 지역)로 건너가 아이누의 사위가 되어 꾸민 일이라고 한다.[19] 쇼타유(아이누 이름 리우토우인)의 신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자료명쇼타유에 대한 설명
마츠미야 칸잔의 『에조기』(1710년)에치고 쇼타유, 쇼나이 사쿠자에몬, 오와리 이치자에몬, 모가미 스케노죠 네 사람이 에조지에 수년간 머물며 매사냥을 했는데, 샤쿠샤인의 거처에 머물며 상담했기 때문에 세 사람은 버리고 한 사람만 생포하여 불로 태웠다고 한다.
『에조상매문서』오슈 이와키의 자 쇼타유와 금을 캐는 소마의 자 스케노죠라는 두 사람이 샤쿠샤인의 사위가 되어 에조인들에게 반란을 부추겼다고 한다.
마츠우라 다케시로의 『동에조일기』우슈 센보쿠군의 쇼타유는 아키타 세이노스케의 가신이었으나, 멸망할 때 떠돌아다니다 언젠가는 그의 집안을 일으키려고 꾀하고 괴로워하며, 이 족장의 집에 와서 마침내 그의 딸 리카세와 통정하여 한 명의 아들을 낳아 류오우토우라고 이름짓고, 스스로 지혜와 계략이 있음을 믿고 여러 가지 악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이시이 세이지(石井清治)쇼타유 광부설을 지지한다.[21]


5. 샤쿠샤인 관련 기념물

신히다카정에는 샤쿠샤인을 기리는 동상이 여러 차례 세워졌으며, 장만부정(長万部町)에는 샤쿠샤인 고전장 흔적비가 설치되었다.[1] 신히다카 정의 동상은 건립 배경과 의미에 따라 여러 차례 교체되었으며, 철거 과정에서 논란이 있었다. 장만부 정의 비석은 받침대부터 높이 2m, 너비 3m, 깊이 1m 크기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샤쿠샤인 전투의 흔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5. 1. 샤쿠샤인 상

신히다카정에는 샤쿠샤인을 기리는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이 동상은 여러 차례 교체되었다. 각 동상마다 건립 배경과 의미가 있었고, 철거 과정에서는 논란이 있었다.

  • 초대 샤쿠샤인 상(1970년 건립)은 시민들의 기부로 만들어졌으며, 강화 플라스틱 재질이었다. 샤쿠샤인이 망토를 두르고 산 지팡이를 든 채 신의 기도를 듣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1972년 동상 받침대에 새겨진 당시 도지사 이름이 훼손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후 노후화로 철거되었고, 청동상으로 재건되어 현재는 화원지구에 설치되어 있다.
  • 2대 샤쿠샤인 상(2015년 건립)은 신히다카 아이누협회가 주도하여 건립한 인청동 재질의 동상이다. 온화한 표정으로 경례하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일각에서는 이 동상이 '샤쿠샤인의 싸움'이라는 역사를 왜곡했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 3대 샤쿠샤인 상(초대 동상 청동 복원)은 여러 단체의 모금 활동을 통해 재건되었다. 현재는 시베차리 강 건너편 산 정상에 임시 설치되어 있다.

5. 1. 1. 초대 샤쿠샤인 상

1970년 9월 15일, 샤쿠샤인의 차시(擦文時代의 요새)가 유적지로 남아있는 신히다카정 진가공원에, 임의단체 “샤쿠샤인 현창회(顕彰会)”가 시민들의 기부를 받아 강화 플라스틱 재질의 입상을 건립했고, 1976년 시즈나이정에 기증했다.[7][5] 이 샤쿠샤인상은 조각가 타케나카 토시히로(竹中敏洋)가 디자인한 것으로,[6] 높이 3.5m, 지팡이 끝까지의 길이는 4.2m이다.[7] “바람을 가른 캇코로(망토)를 등에 지고, 에킴네쿠와(산 지팡이)를 오른손에 들고 신의 기도를 듣는 샤쿠샤인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마쓰마에번(松前藩) 방향으로 분노를 표하는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 1972년 9월 30일 발행된 아동도서 「明日に向かって アイヌの人びとは訴える(내일을 향하여 아이누 사람들은 호소한다)」에 기록되어 있다.[8] 매년 9월에는, 상 앞에서 홋카이도 전역에서 아이누 사람들을 모아 법요제를 거행하고 있다.[5]

1972년 9월 20일, 유키 쇼지(結城庄司) 등 5명이 샤쿠샤인상의 대좌에 새겨져 있던 무라마치 킨고(町村金五) 당시 도지사의 이름을 깎아내는 사건이 있었다. 경찰은 신좌익 오오타 류(太田竜)가 범행에 가담한 것으로 보고 1972년 삿포로 올림픽을 앞둔 시기를 노린 과격파의 사건으로 판단, 전국 지명수배 끝에 1974년 유키 등을 체포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유죄가 된 것은 오오타 뿐이었고, 유키와 아다치 마사오(足立正生)·신타니 유키(新谷行) 등 다른 4명은 기소유예 처분되었다.

이후 노후화로 2대째 샤쿠샤인상(후술) 건립 계획이 발표되자, 샤쿠샤인 현창회는 아이누와 와진(和人)의 기부만으로 설립된 일본 최초의 화합의 증거라는 역사에 무게를 두고, 아이들의 미래를 향한 상의 해체에 반발했다. 신히다카정은 신상 완성 후 구상 철거 방침이었으나 현창회의 제안을 받아들여 보류하고, 정·아이누협회·현창회의 3자 회담을 가졌으나,[5] 협의는 평행선을 달렸다. 일단 구상을 남긴 채 신상도 세우는 방침으로 하였으나,[9] 결국 9월 20일 신히다카정은 “노후화가 진행되어 붕괴의 위험이 있다”며 구상을 일방적으로 철거했다.[18] 2021년 11월에는 남아있던 초대 유칼의 탑과 초대 샤쿠샤인상의 대좌(홋카이도 전역에서 아이누 사람들이 소중히 가져온 흑요석과 아이들이 강에서 주워온 돌이 박혀 있었다)와 샤쿠샤인회의 설명이 새겨진 비석 등 모든 것이 철거되어 빈 땅이 되었다.[10]

2018년 10월, 샤쿠샤인 현창회는 신히다카정의 구상 철거에 대해 “대응이 무례하여 납득할 수 없다”며 구상의 틀을 이용한 독자적인 재건 계획을 검토했고,[11] 약 1700만의 기부금을 모아 청동을 사용하여 구상을 재건, 2020년 10월에 공개하여 신히다카정 내 창고에 보관했다.[12] 2022년 봄, 진가산의 요새가 있던 곳에서 신히다카정의 거리 풍경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곳에 코탄(部落)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화원지구에 청동으로 재생된 샤쿠샤인상이 설치되었다.

5. 1. 2. 2대 샤쿠샤인 상

2015년, 신히다카 아이누협회는 샤쿠샤인 상의 노후화를 이유로 협회를 NPO 법인화하고 기부금을 모아 상을 재건하기로 결정했다.[7] 정부의 아이누 신법 검토를 바탕으로 온화한 표정으로 디자인된 새로운 상을 주문했고,[5] 손바닥을 위로 향해 온카미(拝礼, 경례)하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높이 약 4미터의 인청동으로 만들어진 2대 샤쿠샤인 상은 2018년 9월 23일 법요제에서 공개되었다.[13][14] 이 상에 대해서는 「샤쿠샤인의 싸움」이라는 역사를 날조한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18]

5. 1. 3. 3대 샤쿠샤인 상 (초대 동상의 청동화)

1970년 9월 15일, 샤쿠샤인의 차시(擦文時代의 요새)가 유적지로 남아있는 신히다카정 진가공원에, 임의단체 “샤쿠샤인 顕彰会(현창회)”에 의해 강화 플라스틱 재질의 입상이 시민들의 기부로 건립되었고, 1976년 시즈나이정에 기증되었다.[7][5] 이 샤쿠샤인상은 조각가 타케나카 토시히로(竹中敏洋)가 디자인한 것으로,[6] 높이 3.5m, 지팡이 끝까지의 길이는 4.2m이다.[7] “바람을 가른 캇코로(망토)를 등에 지고, 에킴네쿠와(산 지팡이)를 오른손에 들고 신의 기도를 듣는 샤쿠샤인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8]

이후 노후화로 2대째 동상 건립 계획이 발표되자, 샤쿠샤인 현창회는 아이누와 와진(和人)의 기부만으로 설립된 일본 최초의 화합의 증거라는 역사에 무게를 두고, 아이들의 미래를 향한 상의 해체에 반발했다. 신히다카정은 신상 완성 후 구상 철거 방침이었으나 현창회의 제안을 받아들여 보류하고, 정·아이누협회·현창회의 3자 회담을 가졌으나,[5] 협의는 평행선을 달렸다.

2018년 10월, 샤쿠샤인 현창회는 정의 구상 철거를 “대응이 무례하여 납득할 수 없다”며 구상의 틀을 이용한 독자적인 재건 계획을 검토했고,[11] 약 1700만의 기부금을 모아 청동을 사용하여 구상을 재건, 2020년 10월에 공개되었고 신히다카정 내 창고에 보관되었다.[12] 2022년 봄, 진가산의 요새가 있던 곳에서 신히다카정의 거리 풍경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곳에 코탄(部落)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화원지구에 청동으로 재생된 샤쿠샤인상이 설치되었다.

2대째 샤쿠샤인상을 둘러싸고는, 오랫동안 작가와 그 가족, 샤쿠샤인 현창회 등으로부터 “수지가 아닌 청동상으로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신히다카정에 계속해왔으나, 협의가 평행선을 달리는 가운데, 신히다카 아이누협회와 신히다카정이 2대째 상의 신설을 결정하고 설치했다. 박물관 건립 계획이 제기되자 그 안에 3대째(초대 샤쿠샤인상의 청동화)를 두는 안이 제시되었으나, 조형작가 타케나카 토시히로 씨는 생전에 진가산의 언덕 위에서 자라는 나무들 속에 두는 것을 염두에 두고 디자인한 것이며, 하늘 아래에 놓이는 것을 목적으로 설계되었다고 말했다. 때문에 샤쿠샤인 현창회는 진가산 야외에 설치하는 것을 고집하며 협상을 계속했다. 그러나 2021년 가을 신히다카정은 새로운 개발을 이유로 대좌 등 모든 것을 철거하고 빈 땅으로 만들었다.

2020년 10월 18일, 시즈나이 아이누협회·미이시키 아이누협회·샤쿠샤인 현창회는 설립 당시의 의지를 잇는 형태로 모금을 하고 재건했다. 초대 샤쿠샤인상은 작가의 아틀리에에 건립 당시의 형틀이 남아 있어, 그 형틀을 바탕으로 새롭게 청동화하여 도야마현에서 차로 운반하여 이날 아침 진가산에 도착, 아직 대좌와 유칼의 탑이 남아있는 진가산에서 공개회를 개최했다. 각지에서 아이누의 에카시(長老)를 비롯한 시민들이 모였고 많은 의원들도 참석했다.[15][16]

초대 샤쿠샤인상은 미래의 아이들을 위한 차별 없는 평화 교육의 일환으로 설립되었고, 진가산 야외에 놓이는 상으로 설계된 예술 작품이다.[17] 또한 평화 교육 교재로 초등학생의 소풍 등으로 진가산에 올라 샤쿠샤인상에 닿는 기회를 아이들에게 제공했던 시대도 있다. 현재는 시베차리 강을 사이에 둔 맞은편 산 정상에 임시 설치되어 있다. 사유지이기 때문에 출입은 할 수 없지만 멀리서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여기는 아이누 코탄(部落)의 생활의 장소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싸움터인 차시 유적 진가산에서 평화롭게 사는 생활의 장소로 옮겨 샤쿠샤인상 설립 당시에 담긴 평화에 대한 소망을 생각하여 임시 설치가 이루어지고 있다.

5. 2. 샤쿠샤인 고전장 흔적비

2016년 10월 28일, 장만부정(長万部町)은 국봉천(国縫川) 변의 옛 국봉(旧国縫) 소학교 부지에 "샤쿠샤인 고전장 흔적비"를 설치하고 제막식을 거행했다.[1] 이 비석은 받침대부터 높이 2m, 너비 3m, 깊이 1m 크기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1]

6. 샤쿠샤인 축제

1970년 9월, 아이누 민족과 와진(和人, 일본인) 사이에 샤쿠샤인 현창회를 중심으로 샤쿠샤인 동상 건립 사업이 진행되었다. 이는 아이누 차별을 없애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18]

와진을 포함한 지역 주민들의 모금과 아이누 민족에게 귀중한 흑요석을 모아 받침대에 박는 등, 아이누 차별 이후 일본에서 처음으로 아이누 민족과 와진이 협력하는 작업이었다.[18]

차별 없는 미래는 교육에서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초대 샤쿠샤인 동상 공개회에는 아이들을 초대하였다.[18]

이후 매년 9월 23일에는 마가야마에서 샤쿠샤인 법요제가 열리고, 도 전역의 아이누들이 모여 전통 문화를 선보였다.[18]

"초대 샤쿠샤인 동상은 전투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는 잘못된 인식이 퍼지면서 동상이 철거되고, 유지들의 모금으로 새로운 청동상이 제작되었지만, 신히다카정은 원래 장소에 설치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유칼의 탑과 기념비까지 철거되었고, 마가야마에는 공원의 다른 장소에 세워진 새로운 동상만 남게 되었다.[18]

샤쿠샤인 법요제는 분열의 축제로 변해갔다. 메나시쿨과 슈무쿨의 깊은 대립이 남아있는 듯 두 개의 샤쿠샤인 동상이 마주하고 있다.[18]

2022년 9월 23일, 신히다카 아이누 협회가 설립한 새로운 샤쿠샤인 동상 앞에서 신히다카 아이누 협회 주최 법요제가 거행되었다.[18]

같은 해 10월 23일, 미이시키 아이누 협회 주최로 아이누 음악제가 열렸다.[18]

7. 참고 서적

고미 후미히코|五味文彦일본어 씀, 한은미 옮김, 《2천년 일본사를 만든 일본인 이야기》(2003년), 이손사

참조

[1] 뉴스 「犠牲者に鎮魂の誠を」 シャクシャイン古戦場跡碑除幕式 長万部 http://dd.hokkaido-n[...] 株式会社北海道新聞社 2016-10-29
[2] 문서 平山(2018)p.74
[3] 문서 平山(2018)pp.96-97
[4] 문서 平山(2018)pp.109-111
[5] 뉴스 新造か修繕か 新ひだかシャクシャイン像老朽化 「穏やかな姿に」「勇ましい像残したい」・・・結論出ず 北海道新聞 2018-07-25
[6] 뉴스 竹中敏洋氏死去/造形作家 https://www.shikoku-[...] 四国新聞社 2002-01-09
[7] 뉴스 シャクシャイン像建て替えへ 新ひだかアイヌ協 デザイン変更も https://web.archive.[...] 北海道新聞 2015-12-15
[8] 서적 明日に向かって : アイヌの人びとは訴える https://iss.ndl.go.j[...] 牧書店 1972
[9] 뉴스 シャクシャイン像、新旧並立へ 議論平行線で9月 新ひだか・真歌公園 https://www.hokkaido[...] 北海道新聞 2018-08-22
[10] 뉴스 シャクシャイン像 新ひだか町が撤去 老朽化で危険と判断 https://www.hokkaido[...] 北海道新聞 2018-09-21
[11] 뉴스 旧シャクシャイン像の再建、有志が計画 先月撤去 新ひだか町に土地使用打診 https://www.hokkaido[...] 北海道新聞 2018-10-12
[12] 뉴스 復刻シャクシャイン像【新ひだか】 https://web.archive.[...] 日高報知新聞 2020-10-20
[13] 뉴스 新シャクシャイン像お披露目 新ひだか https://www.hokkaido[...] 北海道新聞 2018-09-23
[14] 뉴스 北海道)シャクシャイン像、祈る姿に アイヌ民族の英雄 https://www.hokkaido[...] 朝日新聞 2018-09-24
[15] Youtube 英傑シャクシャインの旧像復刻 法要祭でお披露目 新ひだか https://www.youtube.[...] 2023-04-14
[16] 웹사이트 英傑シャクシャインの旧像復刻 法要祭でお披露目 新ひだか(動画):北海道新聞デジタル https://www.hokkaido[...] 2023-04-14
[17] 서적 明日に向かって : アイヌの人びとは訴える https://iss.ndl.go.j[...] 牧書店 1972
[18] 문서 平山(2018)p.204
[19] 서적 徳政夜話 大曲図書館 2004
[20] 서적 秋田農民一揆史 {{NDLDC|10263771/27}[...] 秋田縣農業會 1947
[21] 간행물 シベチヤリ叛乱と蝦夷切支丹 https://dl.ndl.go.jp[...] 1965
[22] 문서 고미, 248쪽
[23] 문서 고미, 2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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