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 (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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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리(胥吏)는 고려와 조선 시대에 지방 행정 실무를 담당했던 하급 관리이다. 고려 시대에는 호족 출신이 임명되어 지방의 실권을 쥐었으나, 중앙 집권화가 강화되면서 지위가 낮아졌다. 조선 시대에는 세습 천민으로 분류되어 특수한 복장을 강요받았으며, 봉록이 지급되지 않아 부정부패가 만연하여 백성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중국의 서리는 남북조 시대에 등장하여 수, 당나라를 거쳐 청나라까지 존속했으며, 봉록이 없어 백성에게 수수료를 징수하는 등 뇌물 수수와 같은 부정이 만연하여 중국 구체제의 해악을 상징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남북조 시대 후반 양나라 때 '서리(胥吏)'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하였다. 수나라 때 널리 임용되었고, 당나라 때는 '''유외관'''으로도 불렸다. 송나라 때 과거 제도가 확립되면서 서리는 법제상 명문화되었고, 청나라까지 존속했다.
서리(胥吏)는 그 기원이 정확히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매우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초기에는 신라 말 호족 세력이 지방 지배자로 임명되었고, 이들 중 일부는 중앙 정부에 흡수, 나머지는 향리(鄕吏)가 되어 지방 행정 실무를 담당하며 지방관을 보좌했다. 기인제도를 통해 향리 자제들이 중앙에서 지방 사정을 자문하기도 했다.
남북조 시대 후반 양나라 때 '서리(胥吏)'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다. 수나라 때 널리 임용되었고, 당나라 때는 '유외관'으로도 불렸다. 송나라 때 과거 제도가 확립되면서 서리도 법제화되어 청나라까지 이어졌다.
[1]
서적
朝鮮を知る事典
平凡社
1986
2. 어원
3. 한국의 서리
고려 시대 향리는 지방의 실권을 쥐고 있었으나, 중앙 집권화와 관료제 발달로 점차 지위가 낮아졌다. 조선 시대에는 세종 때부터 서리에 대한 압박이 심해져 사회적 지위가 완전히 상실되었고, 특수 복장을 착용해야 했다. 그러나 이들은 여전히 행정 실무를 담당하며 백성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했고, 이로 인한 폐단도 많았다.
서리의 횡포는 상피제도(相避制度)[3]와 관련이 깊다. 지방관이 연고지에 부임할 수 없어 지방 사정에 어두웠기 때문에 서리에게 의존하게 되었고, 이는 서리의 부정부패로 이어졌다. 조선 중기 이후 조식, 조헌, 정약용 등은 서리의 폐단을 지적하고 개혁을 주장했다. 특히 조식은 "우리나라는 이서(吏胥) 때문에 망한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임진왜란 이후 서리들은 관료와 결탁하여 백성을 수탈했고, 이는 삼정(三政)[4]의 문란을 심화시켜 민란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서리는 리속(吏屬) 또는 아전(衙前)이라고도 불렸다.[2]
3. 1. 고려 시대
고려 초기에는 신라 말기에 대두한 각지의 호족(豪族)들을 각각 그 지방의 지배자로 삼았는데, 국가체제가 정비됨에 따라 그 일부는 흡수되고 나머지 대부분은 향리(鄕吏)에 임명되었다. 향리는 지방의 권력자로서 국가에서 호장(戶長), 부호장, 창정(倉正), 병정(兵正), 호정(戶正) 기타의 직책과 대상(大相), 원윤(元尹), 좌윤(左尹) 등의 작(爵)을 받았으며, 지방관의 관할 밑에서 각 지방의 행정실무를 맡았다. 또 향리의 자제들이 교대로 상경하여 지방사정의 자문(諮問)에 응하도록 한 기인제도도 있었다.
지방제도가 완전히 갖추어져 있지 못한 고려 사회에서 향리는 지방의 실권을 잡고 있었으므로 국가에서는 이들을 통제하는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국가의 제도가 일단 정비되고 관료제도가 발전됨에 따라 향리는 관료에 사역(使役)되는 낮은 지위로 떨어졌다.
고려에서는 지방의 호족이 임명되었으나, 중앙 집권제와 양반에 의한 지배가 확립되면서 서리의 지위는 낮아졌다.[1] 리속(吏屬), 아전(衙前)이라고도 한다.[2]
3. 2. 조선 시대
조선 시대에는 세종 때부터 서리에 대한 압력이 가해져 그 사회적 지위가 완전히 상실되었다. 서리들은 특수한 복장을 입도록 강요받았으나, 여전히 관료 밑에서 모든 실무를 담당하며 일반 백성에게는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여 민폐를 끼쳤다.
서리들이 이렇게 횡포를 부리게 된 원인 중 하나는 상피제도(相避制度)[3]였다. 즉, 관원을 본적지의 수령으로 임명하는 것을 막았기 때문에 지방관은 임지(任地)의 사정에 어두울 수밖에 없었고, 자연스럽게 그 지방 사정에 밝은 서리에게 행정 사무를 맡기게 되었다. 이들은 지방관을 속이고 사리사욕을 채웠다.
이에 조식(曹植), 조헌(趙憲), 정약용(丁若鏞) 등 조선 중기 이후의 학자들은 서리의 폐단을 지적하고 그 시정을 촉구하였다. 특히 조식은 "우리나라는 이서(吏胥) 때문에 망한다."라고 분개하며 서리 문제의 심각성을 강조했다. 임진왜란 이후 관료들은 적은 봉록(俸祿)으로 생활이 어려워졌고, 서리들은 그나마 정부에서 주던 급료마저 없어지자 관료층과 결탁하여 갖은 수단으로 백성들을 괴롭혔다. 서리의 횡포는 삼정(三政)[4]의 문란을 더욱 심화시켰으며, 이는 조선 말기 각종 민란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고려에서는 지방의 호족이 서리로 임명되었으나, 중앙 집권제와 양반 중심의 지배 체제가 확립되면서 서리의 지위는 낮아졌다. 조선에서는 서리가 세습 천민으로 분류되어 특수한 복장을 강요받았고, 봉록이 지급되지 않아 부정과 수탈이 만연했다.[1] 서리는 리속(吏屬), 아전(衙前)이라고도 불렸다.[2]
4. 중국의 서리
중앙 정부 부서나 지방 관청의 관리가 민간에서 지원자를 모집하는 방식으로 서리를 임용했다. 서리는 서민 신분으로, 요역에 징용되는 것과 같은 취급을 받았다. 그래서 서리에게는 봉록이 없었고, 필요 경비 명목으로 약간의 지급만 있었다.
서리에게도 직무 체계가 있어서, '서리두'가 도제 제도를 통해 부하를 양성했다. 그러나 요역에서 유래한 서리에게는 봉급이 없었기 때문에, 직무상 관계를 맺는 서민에게 수수료를 징수하여 생활했다. 이를 '규례' 또는 '루규'라고 불렀는데, 사실상 뇌물과 구분이 되지 않아 서민을 착취하는 결과를 낳았다. 왕안석의 신법처럼 서리에게 봉록을 주고 루규를 금지하는 개혁도 시도되었지만 실패했다.
서리두는 임기가 정해져 있었고, 임기가 끝나면 직을 떠나야 했다. 하급 관인으로 임용되는 제도도 있었지만, 서리두까지 했던 사람들은 그 이득을 잊지 못하고 이름을 바꿔 사실상 재임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그 권리를 주식처럼 사유화하여 권리금을 받고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는 방식으로 더 많은 이익을 얻었다.
서리는 토착 세력 출신이 징용되었고, 임기가 끝나도 사실상 재임했으며, 도제 제도로 계승되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동족이나 지연 집단이 과점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처럼 이익을 탐하는 체질과 이로 인해 백성이 고통받는 행정 제도상의 심각한 문제 때문에, 서리는 중국 구체제의 부정적인 면을 상징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참조
[2]
웹사이트
胥吏
https://kotobank.jp/[...]
世界大百科事典
[3]
문서
자기 고장의 수령으로 임명되는 것을 피하는 제도
[4]
문서
전정·군정·환정을 아울러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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