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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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석경은 전한 경제 시대에 이천석의 관직을 지낸 석분의 막내아들이다. 효행으로 알려졌으며, 건원 2년 내사에 임명되었다. 이후 태복, 제나라 상, 패군 태수를 거쳐 원수 원년에 태자태부, 7년 후 어사대부가 되었고, 원정 5년 승상이 되어 목구후에 봉해졌다. 승상 재임 기간 동안 무제의 측근을 벌하려다 무고죄로 벌을 받기도 했다. 원봉 4년에는 유민 문제로 무제에게 질책을 받고 사직하려 했으나 실패했으며, 태초 2년에 사망하여 염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아들 석덕이 작위를 이었다.
석경은 만석군(万石君) 석분(石奮)의 막내아들로, 효행으로 알려졌다. 경제 시대에 이천석(二千石)의 관직에 있었다.[1]
석경은 내사 재임 시절, 술에 취해 귀가할 때 수레에서 내리지 않고 마을 문을 통과했다. 아버지 석분은 이를 몹시 꾸짖으며 "내사는 귀한 사람이니, 마을에 들어서면 노인들이 모두 길을 피해야 하는데, 수레 안에서 태연하게 앉아 있는 것이 당연한가!"라고 질책했다. 이 사건 이후, 석경과 그의 형제들은 마을에 들어올 때부터 잰걸음으로 집에 들어가게 되었다.
석경은 만석군(万石君) 석분(石奮)의 막내아들로, 경제 때 이천석(二千石) 관직에 있었다.
[1]
기록
건원 (전한)
기원전 138년-기원전 135년
2. 생애
무제 즉위 후 건원 2년(기원전 139년), 석경은 낭중령에 임명된 형 석건과 함께 내사에 임명되었다.[1]
원수 원년(기원전 122년), 무제가 황태자 유거를 책봉하고 신하들 중 태자의 스승이 될 만한 자를 찾자, 패군 태수였던 석경은 태자태부가 되었다. 원정 2년(기원전 115년) 장탕의 후임 어사대부로 승진하였다.
원정 5년(기원전 112년), 승상 조주가 주금(酎金) 사건으로 옥에 갇혀 사망하자, 석경이 뒤를 이어 승상이 되고 목구후(牧丘侯)에 봉해졌다.[2]
원봉 4년(기원전 107년), 관동(關東) 지방에 유민 200만 명이 발생하였고, 이들 중 호적이 없는 자가 40만 명이었다. 무제는 석경이 늙고 신중하여 이 일을 논의하기 어렵다고 판단, 휴가를 주고 어사대부 이하 관원들과 회의하였다. 석경은 사직을 청했으나 무제가 조서를 내려 꾸짖자, 부끄러워하며 다시 일을 보았다.[2]
태초 2년(기원전 103년)에 사망하니 시호를 염(恬)이라 하였고, 작위는 아들 석덕이 이었다.[2]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생활
건원 2년(무제 즉위년), 석분의 막내아들 석경은 낭중령 석건과 함께 내사에 임명되었다.[1]
어느 날, 석경이 술에 취해 귀가할 때 수레에서 내리지 않고 외문으로 들어갔다. 이를 들은 아버지 석분은 식사를 거부했고, 석경이 속옷을 벗고 사죄했음에도 용서하지 않았다. 형 석건과 일족 모두가 속옷을 벗고 사죄하자, 석분은 "내사는 귀한 사람이니, 마을에 들어가면 마을의 장로들도 모두 도망치는 법인데, 내사가 수레 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도 괜찮은가!"라고 질책했다. 이후 석경 등은 마을 문을 지나면 종종걸음으로 집까지 가게 되었다.
석경이 태복이 되어 무제의 수레를 몰았을 때, 무제가 수레 안에서 말의 수를 물었다. 석경은 채찍으로 말의 수를 하나하나 세어 가며 "여섯 마리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석경은 석씨 형제 중에서도 가장 꼼꼼하지 못한 성격이었지만, 이처럼 신중하게 행동했다.
이후 석경은 제나라의 상이 되었고, 제나라에서는 그의 집을 사모하여 벌을 가하지 않고도 제나라가 잘 다스려졌다. 그래서 석상사(石相祠)가 세워지기도 했다. 그 후, 패군 태수가 되었다.
원수 원년, 무제가 태자를 책봉하고 신하들 중 태자의 스승이 될 만한 자를 찾았을 때, 패군태수였던 석경은 태자태부가 되었다. 7년 후 어사대부로 승진하였다.[2] 원정 2년, 죄를 지어 자살한 장탕의 후임으로 어사대부가 되었다.
2. 2. 어사대부와 승상 시절
무제 즉위 후 건원 2년(기원전 139년), 석건이 낭중령에 임명될 때 석경은 내사에 임명되었다.[1]
원수 원년(기원전 122년), 무제는 황태자 유거를 책봉하고 신하들 중 태자의 스승이 될 만한 자를 찾았다. 이때 패군 태수였던 석경은 태자태부가 되었고, 원정 2년(기원전 115년) 장탕의 후임 어사대부로 승진하였다.[1][2]
원정 5년(기원전 112년) 가을, 승상 조주가 주금(酎金) 사건으로 옥에 갇혀 사망하자, 석경이 뒤를 이어 승상이 되고 목구후(牧丘侯)에 봉해졌다.[1][2]
당시 한나라는 남월, 민월, 조선 토벌, 흉노와의 전쟁, 대완 원정, 무제의 전국 순행, 봉선 등 많은 일로 극도로 업무가 많았다. 상홍양의 재정 정책, 왕온서 등의 엄격한 법률, 아관 등의 문학 등 구경이 번갈아 등용되었으며, 이러한 일들은 승상인 석경을 거치지 않고 결정되었다. 석경은 공손하게 대할 뿐, 그 상황을 바로잡을 수도 없었고, 무제의 측근 소충과 구경 감선을 처벌하도록 진언했지만, 오히려 자신이 그 죄를 받게 되었다.[2]
원봉 4년(기원전 107년), 관동(關東) 지방에 유민이 200만 명 발생하였고, 이들 중 호적이 없는 자가 40만 명이었다. 공경들은 상의 끝에 유민들을 변방에 귀양 보낼 것을 주청하였다. 무제는 석경이 늙은 데다가 지나치게 신중하므로 이 일을 함께 논의할 수 없다고 여겨, 석경에게 휴가를 주어 집으로 보내고 어사대부 이하의 관원들과 회의하였다. 석경은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고 생각된 것을 부끄러워하며 사직을 청하였으나, 무제가 조서를 내려 자신을 꾸짖으니 매우 부끄러워하고 다시 일을 보았다.[1][2]
태초 2년(기원전 103년)에 사망하니 시호를 염(恬)이라 하였고, 작위는 아들 석덕이 이었다.[1][2]
2. 3. 죽음과 평가
석경은 무제가 원수 원년(기원전 122년)에 태자를 책봉하고 신하들 중 태자의 스승이 될 만한 자를 찾았을 때 패군태수에서 태자태부가 되었고, 7년 후 어사대부로 승진하였다. 원정 5년(기원전 112년) 가을, 죄를 지어 파면된 승상 조주의 뒤를 이어 승상이 되고 목구후(牧丘侯)에 봉해졌다.[1]
석경은 승상을 지내는 동안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는 어떤 진언도 하지 않았다. 무제의 측근인 소충(所忠)과 감선을 벌하여야 한다고 상주하려 하였으나, 도리어 무고죄로 몰려 속죄금을 낸 적이 있었다.[1]
원봉 4년(기원전 107년), 관동(關東)에 2백만 명의 유민이 발생하였고 이들 중 호적이 없는 자가 40만 명이나 되었다. 공경들은 상의 끝에 유민들을 변방에 귀양 보낼 것을 주청하였다. 무제는 석경이 늙은 데다가 지나치게 신중하므로 이 일을 함께 논의할 수 없다고 여겨, 석경에게 휴가를 주어 집으로 보내고 어사대부 이하의 관원들과 회의하였다. 석경은 이를 부끄럽게 여겨 사직을 청하였으나, 무제가 조서를 내려 자신을 꾸짖으니 매우 부끄러워하고 다시 일을 보았다.[1]
태초 2년(기원전 103년)에 죽으니 시호를 염(恬)이라 하였고, 작위는 아들 석덕이 이었다.[1] 석덕은 태상이 되었을 때 죄가 있어 열후를 빼앗겼다. 석덕은 그 후 태자소부가 되었고, 황태자 유거(戾太子)가 황제를 저주했다는 혐의를 받았을 때(무고의 화), 유거에게 거병을 권했고, 유거와 함께 싸웠지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1]
3. 일화
태복으로 재임할 당시, 무제가 수레를 끄는 말의 수를 묻자, 석경은 채찍으로 말을 일일이 세어본 후에야 여섯 마리라고 대답했다.[1] 이는 석경이 형제들 중 가장 꼼꼼하지 못한 성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중하게 행동했음을 보여준다.
4. 가계
참조
[2]
기록
정(鄭) or 강(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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