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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성렬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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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선인성렬황후는 북송 영종의 황후이자 신종과 철종 대에 태황태후로서 수렴청정을 했던 인물이다. 그녀는 조씨 가문 출신으로, 인종의 황후였던 조씨의 조카였다. 영종 사후 신종이 즉위하자 태황태후가 되었으며, 신종의 개혁 정책에 반대하여 사마광을 지지했다. 철종이 즉위한 후에는 수렴청정을 통해 구법을 부활시키려 했으나, 철종과의 갈등으로 인해 신법파를 배척하며 대립했다. 그녀는 1093년에 사망했으며, 철종은 사후 그녀의 호를 추탈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선인성렬황후는 엄격한 성품으로 평가받았으며, 수렴청정 기간 동안 안정을 유지했다는 칭찬과 함께 반동적인 수동성이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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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성렬황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선인성렬황후
선인성렬황후
이름고황후
다른 이름선인성렬황후
출생1032년
사망1093년 (61세)
배우자영종
자녀신종
조호, 오영왕
조안, 윤왕
조군, 익단헌왕
화희공주
현희공주
현덕공주
덕안공주
아버지고준범, 춘왕
어머니조씨 부인
통치 정보
칭호황후
재위 기간1065년–1067년
전임황후
계승송나라 황후
칭호황태후
재위 기간1067년–1085년
전임황태후
계승송나라 황태후
칭호태황태후
재위 기간1085년–1093년
전임태황태후
계승송나라 태황태후

2. 생애

고씨는 호주 몽성 출신으로, 송 인종의 황후였던 조황후의 조카였다. 숙모인 조황후에 의해 황태자의 정실 부인으로 선택되었다. 1063년, 영종이 인종의 뒤를 이어 황위에 오르자 황후가 되었다. 1067년에는 남편 영종의 뒤를 이어 아들 송 신종이 즉위하여 황태후로 봉해졌다.[1] 아들 신종의 재위 기간 동안 왕안석의 개혁 정책에 반대하고 사마광을 지지했다.[1]

1085년 아들 신종이 사망하고 손자 송 철종이 즉위하자, 태황태후로 격상되었으며 손자가 미성년인 동안 섭정을 맡았다.[1] 고태후는 사마광 등 보수파를 재상으로 임명하여 왕안석이 시작한 신법을 중단시켰다.[1] 어린 황제와 함께 발 아래 스크린 뒤에서 조정을 열었고, 통치 황제와 동일한 의례적 특권을 사용했다. 그녀의 생일은 특별한 명칭으로 기념되었고 외교 사절은 황제가 아닌 그녀의 이름으로 파견되었다.[1]

자신의 친척들에게 엄격하여 재임 기간 동안 그들을 관직으로 승진시키는 것을 거부했다.[1][3] 관료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 지능과 훌륭한 판단력, 그리고 친척들의 영향력을 인정하지 않은 점 때문에 전통적으로 칭찬을 받았다.[1][3] 그녀의 통치는 안정을 회복하고 세상에 평화를 유지했다는 칭찬을 받았지만, 반동적인 수동성의 시기였다는 비판도 받았다.[1]

1092년, 손자의 황후로 맹후를 선택했다.[1][4] 고태후는 황제가 17세가 되어 성년이 되었을 때 물러나기를 꺼려했다. 손자 황제는 아버지 송 신종의 개혁파를 선호했고, 할머니의 보수주의와 지배적인 방식을 모두 싫어했다.[1][2] 1093년 죽을 때까지 섭정 지위를 유지했다.[3]

2. 1. 출생과 혼인

박주 출신으로, 성은 고씨(高氏)이고 아명은 도도(滔滔)이다. 아버지는 고준헌(高遵憲)이고 어머니는 북송의 개국공신인 조빈의 손녀이자 인종의 황후인 자성광헌황후의 언니 조씨(曺氏)이다. 이모인 자성광헌황후에 의해 입궁하여 태종의 증손자이자 인종의 양자로 입적된 조종실(영종)과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다. 인종은 어린 도도와 종실이 서로 애틋하게 잘 지내는 것을 보고 황후 조씨에게 "장래에 서로에게 배필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영종에게서 아들이 태어나자 종실과 함께 출궁하였으며 1047년 혼인하였다. 이후 1062년 남편 종실이 황태자로 책봉되고 휘를 서(曙)로 개명하였다.[9]

2. 2. 황후 시절

1063년 인종이 후사 없이 붕어하자, 남편 조서(趙曙)가 영종으로 즉위하였으며, 1065년 황후에 책봉되었다.[1] 고씨는 호주 멍청현 출신으로, 전임 황후인 송 인종의 황후 조황후의 조카였다. 숙모인 조황후에 의해 황태자의 정실 부인으로 선택되었다. 경력 7년(1047년) 단련사 조종실(후의 영종)에게 시집가 경광군군이 되었다. 부부 사이는 좋았고 조욱(후의 신종) 등 많은 아이를 낳았다.

가우 8년(1063년) 4월 1일, 인종이 붕어했다.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조황후가 종실 중에서 인종의 종형의 아들인 조종실을 황위에 오르게 했다. 4월 29일, 고씨는 황후로 책봉되었다.[1]

2. 3. 황태후 시절과 신법 논쟁

1067년 영종이 재위 4년 만에 붕어하고 아들 신종이 즉위하자 황태후로 추봉되었다. 서하와의 화의로 인한 국방비 증가와 세비 문제, 국가 재정과 민생 치안 문제, 소상공인, 농민, 대지주, 사대부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가운데 법제 개혁을 둘러싸고 구법파(舊法派)와 신법파(新法派)의 당쟁이 지속되었다. 아들 신종이 신법파인 왕안석을 등용하고 그가 제시한 개혁안을 받아들여 시행하자, 고씨는 신법파의 정책과 법제 개혁에 반대하여 구법파인 사마광을 지지하고 왕안석을 좌천시켰다.[1]

2. 4. 태황태후 시절과 수렴청정

1085년 신종이 붕어하고 손자인 철종이 즉위하였다. 철종이 10살의 나이로 즉위하였기 때문에 태황태후로서 수렴청정을 하였다.[1] 구법당을 지지한 선인성렬황후는 철종이 즉위하자 사마광재상으로 등용하고, 신종 시대에 실시한 왕안석의 신법을 모두 철폐하고 원래대로 구법을 시행하였다.[1] 20여년에 걸쳐 시행된 신법을 무효화 하자 사회혼란이 가속화되고 구법당과 신법파의 당쟁이 극심해졌다.

섭정으로서, 그녀는 어린 황제와 함께 발 아래 스크린 뒤에서 조정을 열었고, 통치 황제와 동일한 의례적 특권을 사용했다. 그녀의 생일은 특별한 명칭으로 기념되었고 외교 사절은 황제가 아닌 그녀의 이름으로 파견되었다.[1] 그녀는 자신의 친척들에게 엄격하기로 알려졌으며, 재임 기간 동안 그들을 관직으로 승진시키는 것을 거부했다.[1][3] 그녀는 관료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 그녀의 지능과 훌륭한 판단력, 그리고 친척들의 영향력을 인정하지 않은 점 때문에 전통적으로 칭찬을 받았다.[1][3] 그녀의 통치는 안정을 회복하고 세상에 평화를 유지했다는 칭찬을 받았지만, 또한 반동적인 수동성의 시기였다는 비판도 받았다.[1]

태황태후의 수렴청정은 그녀가 사망하는 1093년까지 8년 동안 지속되었는데, 철종은 할머니의 기나긴 수렴청정 기간에 점점 불만을 갖게 되었으며, 신법파를 지지하였기 때문에 서로간의 갈등과 대립이 심화되었고, 철종과의 관계는 최악에 달했다.[1][2] 1092년, 그녀는 손자의 황후로 맹후를 선택했다.[1][4] 고태후는 황제가 17세가 되어 성년이 되었을 때 물러나기를 꺼려했다. 그녀의 손자 황제는 아버지의 개혁파를 선호했고, 할머니의 보수주의와 지배적인 방식을 모두 싫어했다.[1]

1093년 9월, 62세로 사망하였고 영종과 영후릉에 합장되었다. 선인성렬황후 사후, 손자 철종이 소성으로 개원하면서 그녀가 수렴청정기간 동안 실시한 구법을 다시 철회, 신법을 실시하고 신법파를 등용하였다. 또한 분노가 극에 달해 할머니인 태황태후의 호를 추탈하고 폐위하려 하였으나 어머니인 주태비와 황태후가 반대하였으므로 철회하였다.

2. 5. 철종과의 갈등 및 죽음

1085년 신종이 붕어하고 손자인 철종이 10살의 나이로 즉위하자, 태황태후로서 수렴청정을 하였다. 선인성렬황후는 구법파를 지지하여 사마광을 등용하고, 왕안석의 신법을 모두 철폐하였다. 20여 년에 걸쳐 시행된 신법을 무효화하자 사회 혼란이 가속화되고 구법파와 신법파의 당쟁이 극심해졌다.[1]

철종은 할머니의 수렴청정 기간이 길어지자 점점 불만을 갖게 되었으며, 신법파를 지지하였기 때문에 갈등이 심화되어 관계가 최악에 달했다.[1] 1092년에는 손자의 황후로 맹후를 선택했다.[1][4]

1093년 9월, 62세로 사망하였고 영종과 영후릉(永厚陵)에 합장되었다. 선인성렬황후 사후, 손자 철종은 소성으로 개원하면서 할머니가 실시한 구법을 다시 철회하고 신법을 실시하였다. 또한 분노가 극에 달해 할머니의 호를 추탈하고 폐위하려 하였으나, 어머니인 주태비와 황태후가 반대하여 철회하였다.

3. 평가

송 철종이 즉위하면서 태황태후로 격상되어 수렴청정을 한 선인성렬황후는 본인에게 엄격했고, 아들 신종이 외가에 벼슬을 내리거나 국비를 사용해 지원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왕안석의 신법에 반대하였지만 집권 시기 근검절약하고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정국을 다스렸다.[10]

선인성렬황후의 수렴청정 시기인 원우 연간 8년은 사실상 송나라의 마지막 소강(小康)시대로, 이후 송나라는 극심한 정쟁과 요나라, 금나라의 압박, 농민반란으로 인해 쇠퇴한다. 이러한 그녀를 가리켜 ''''여중요순(女中堯舜)''''이라고 일컬었다.[10]

섭정으로서 사마광과 같은 보수파를 재상으로 임명하여 왕안석이 시작한 신법을 중단시켰다.[1] 어린 황제와 함께 발 아래 스크린 뒤에서 조정을 열었고, 통치 황제와 동일한 의례적 특권을 사용했다. 그녀의 생일은 특별한 명칭으로 기념되었고 외교 사절은 황제가 아닌 그녀의 이름으로 파견되었다.[1]

선인성렬황후는 자신의 친척들에게 엄격하기로 알려졌으며, 재임 기간 동안 그들을 관직으로 승진시키는 것을 거부했다.[1][3] 관료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 그녀의 지능과 훌륭한 판단력, 그리고 친척들의 영향력을 인정하지 않은 점 때문에 전통적으로 칭찬을 받았다.[1][3] 그녀의 통치는 안정을 회복하고 세상에 평화를 유지했다는 칭찬을 받았지만, 또한 반동적인 수동성의 시기였다는 비판도 받았다.[1] 1092년, 그녀는 손자의 황후로 맹후를 선택했다.[1][4]

선인성렬황후는 황제가 17세가 되어 성년이 되었을 때 물러나기를 꺼려했다. 그녀의 손자 황제는 아버지의 개혁파를 선호했고, 할머니의 보수주의와 지배적인 방식을 모두 싫어했다.[1][2] 선인성렬황후는 죽을 때까지 섭정 지위를 유지했다.[3] 그녀는 임종 직전에 관료들에게 은퇴할 것을 조언했다.[1]

4. 가계

관계이름
아버지고준헌(高遵憲)
어머니조씨(曺氏)
남편영종 (1032년 ~ 1067년)
장남조욱 (신종)
장녀진국장공주 (혜화제희)
차남조호 (오영왕)
3남조안 (윤왕)
차녀촉국장공주 (명혜제희)
3녀한국위국대장공주 (현덕의행제희)


5. 기타


  • 인종의 아들들이 모두 요절했기 때문에, 인종의 종질(사촌)인 조종실(후의 영종)은 어릴 때부터 궁중에서 양육되었으며, 그 당시 조황후의 조카이자 동갑내기인 고도도와 소꿉친구가 되었다. 그 후, 장씨가 인종의 총애를 독차지하여, 인종은 장씨에게 아들이 태어나기를 고대했고, 조종실을 본가로 돌려보냈다. 결국, 장씨는 훙거할 때까지 아들을 낳지 못했다.[1]
  • 조황후는 고씨를 한번은 인종에게 추천했지만, 인종은 "그대의 가까운 친척이 성장하기를 기다릴 수 없다. 종실이 성장하면, 그의 아내가 되는 것이 어울릴 것이다"라고 말하며 거절했다(고씨가 태어난 것은 조씨가 황후가 된 지 2년 전이며, 인종보다 22살 아래였다).[2]
  • 조태후는 고황후에게, 영종의 비빈이 적은 것을 나무랐다. 고황후는 화가 나서, "저는 단련사(團練使)에게 시집갔지, 황제에게 시집간 것이 아닙니다"라고 대답했다.[3]

참조

[1] 서적 Biographical Dictionary of Chinese Women, Volume II: Tang Through Ming 618 - 1644 https://books.google[...]
[2] 서적 Beyond Exemplar Tales https://books.google[...] Univ of California Press 2011-10-05
[3] 서적 Celestial Women: Imperial Wives and Concubines in China from Song to Qing https://books.google[...] Rowman & Littlefield 2016-04-21
[4] 서적 Women and the Family in Chinese History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03-09-02
[5] 서적 『宋史』巻13, 英宗紀 嘉祐八年四月庚子条による。
[6] 서적 『宋史』巻112, 志第六十五 禮十五
[7] 서적 《송사》(宋史) 권17〈본기〉(本紀) 제17 철종(哲宗) 1 - 곤성절(坤成節) 기사
[8] 서적 《송사》(宋史) 권17〈본기〉(本紀) 제17 철종(哲宗) 1 - 원우(元祐) 8년 9월 기사
[9] 서적 '''『'''[[송사]](宋史)'''』''' 卷243 列傳第一 后妃上
[10] 서적 '''『'''[[송사]](宋史)'''』''' 卷243 列傳第一 后妃上, “臨政九年,朝廷清明,華夏綏定。……力行故事,抑絕外家私恩。……人以為'''女中堯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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