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소련의 종교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소련의 종교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무신론을 바탕으로 종교를 억압하는 정책을 펼쳤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교회 재산 몰수, 종교 단체 탄압이 시작되었고, 스탈린 시대에는 더욱 강화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종교 정책이 완화되기도 했으나, 흐루쇼프 시대에 반종교 캠페인이 다시 강화되었다. 브레즈네프 시대에는 종교 통제가 이루어졌고,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으로 종교 정책이 점진적으로 변화했다. 러시아 정교회가 가장 큰 탄압을 받았으며, 가톨릭, 개신교, 이슬람교, 유대교 등 다른 종교들도 차별과 제약을 받았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소련의 종교
개요
국가소련
존속 기간1922년 ~ 1991년
이념무신론, 국가 무신론
종교 정책
목표종교 말살 및 무신론 확산
방법종교 단체 탄압 및 해체
종교 시설 파괴 및 용도 변경
반종교 선전 및 교육 강화
종교 활동 제한 및 감시
강제 개종 시도
주요 종교
동방 정교회가장 큰 종교였으나 탄압의 대상이 됨
이슬람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영향력이 컸음
불교일부 지역에서 신앙 유지
유대교탄압과 차별 속에서 신앙 유지
개신교소수 신자 존재
종교 단체 통제
기관KGB
역할종교 단체 감시 및 통제
종교 지도자 포섭 및 협력 강요
반체제 인사 색출 및 처벌
반종교 캠페인
슬로건"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카를 마르크스)
내용무신론 교육 강화
종교의 허구성을 선전
종교적 미신 타파 운동 전개
결과
신자 수 감소공식적인 종교 활동 위축
지하 종교 활동 증가비밀스러운 신앙 유지
종교적 반체제 운동 발생종교 자유를 위한 저항
관련 인물
블라디미르 레닌종교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 표명
이오시프 스탈린종교 탄압 정책 강화
참고 자료
서적Religious Policy in the Soviet Union
Religion, State and Politics in the Soviet Union and Successor States
The Party of Unbelief
웹사이트Revelations from the Russian Archives: ANTI-RELIGIOUS CAMPAIGNS

2.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종교

소련의 국가 창시자인 블라디미르 레닌은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고 칭하며, 마르크스의 이 말이 종교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전체 이념의 초석이라고 하였다.[16][17] 그는 모든 현대 종교와 교회, 모든 종류의 종교 단체는 마르크스주의에 의해 항상 부르주아 반동의 기관으로 간주되며, 노동계급의 착취와 마비를 보호하는 데 사용된다고 주장했다.[16][17]

마르크스-레닌주의 무신론은 일관되게 종교의 통제, 억압, 제거를 옹호해 왔다. 혁명이 일어난 지 약 1년 만에, 국가는 교회 자체를 포함한 모든 교회 재산을 수용했고, 1922년부터 1926년까지 28명의 러시아 정교회 주교와 1,200명 이상의 사제가 살해되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박해를 받았다.[18]

소련의 종교 정책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념에 기반을 두었으며, 이는 무신론을 공산당의 공식 교리로 만들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종교적 믿음을 "비과학적"이고 "미신적"으로 간주하여 억압하고 궁극적으로는 사라지도록 옹호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투사적 무신론자 동맹과 같은 조직이 반종교 선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무신론은 학교, 젊은 개척자 조직과 같은 공산주의 조직, 언론에서 규범이었다.

3. 기간별 역사

볼셰비키 혁명 직후, 소련에서는 종교에 대한 탄압과 통제가 복잡하게 변화하며 진행되었다.

1917년 10월 27일(율리우스력), '토지에 관한 법령'으로 교회 소유 토지가 국유화되었고,[45] 11월 2일 '러시아 인민의 권리 선언'으로 모든 국가 및 종교적 특권과 제한이 폐지되었다.[46] 12월에는 결혼 관련 법령이 바뀌어 종교 규율 준수 여부가 법적 관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게 되었다.[47][48][49]

1919년부터 소련 공산당은 '종교적 편견의 소멸'을 공식 임무로 선언했고,[50] 1918년 '교회와 정부, 교회와 학교의 분리에 관한 법령'으로 교회는 법인격과 소유권을 잃고 종교는 개인의 사적인 문제로 규정되었다.[51][52] 이 법령은 1929년 '종교단체에 관한 결의'로 이어져 1990년까지 소련 종교단체의 법적 지위를 규정했다.

1918년부터 1920년까지 러시아 정교회 성자 유골 개봉 사업이 진행되어 사로프의 세라핌, 라도네즈의 세르게이 등 주요 성자들의 유골이 든 성합 65개가 개봉되었고, 이는 선동에 활용되었다.[53][54] 1922년 교회 재산 몰수에 관한 법령이 시행되었는데,[55] 당시 사제들은 부와 부패의 상징으로 여겨져 대중의 저항은 크지 않았다.[56]

소련 정부는 혁신교회 같은 분파를 지원하여 정교회를 약화시키려 했으나,[57] 초기에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1923년 종교 협회 등록 절차에 관한 지침이 발표되어 '협회' 형태의 종교 단체 설립이 허가되었고, 이오시프 스탈린은 성당 폐쇄와 종교인 체포를 금지하는 지령을 내렸다.[58] 1923년부터 1929년까지는 이슬람교유대교에 대해 상대적으로 관대한 '종교적 신경제정책'이 시행되었고,[59] 개신교 단체도 일부 권리를 누렸다. 1925년 에밀리안 야로슬랍스키를 대표로 '무신론자 투쟁 동맹'이 창설되어 반종교 선전을 주도했다. 1928년 역사, 문화적 기념 시설에 관한 규범에 따라 많은 성당이 파괴되었다.[60]

1929년 '반종교 활동 강화에 관한 대책' 지령으로 종교와의 전쟁은 계급-정치적인 문제와 동일시되었다.[62] 같은 해 '종교단체에 관한 결의'가 통과되어[63] 종교 단체의 활동이 제한되었고, 헌법 개정으로 신자와 비신자 간 불평등한 관계가 성립되었다. 1930년 '종교단체의 지도부 내 반혁명 요소와의 투쟁에 관한 정부 결의'가 통과되었고,[68] 신자들과 성직자들은 저항했다. 스탈린의 사설 게재 이후,[69]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콜호즈 운동 노선의 왜곡과의 투쟁에 관한 결의'를 통해 행정적인 절차 내에서의 교회 폐쇄 조치를 중단하도록 했다.

1930-1931년 종교단체와 성직자의 과세 기준이 강화되었고,[70] 조세 미납 시 자산 압수 및 강제 이주 조치가 취해졌다.[71] 제7차 당대회에서는 2차 5개년 계획을 통해 기독교적인 요소와 계급을 완전히 소탕하고 모든 근로자들을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자로 만들겠다는 목표가 설정되었다.[62] 1932년 종교단체 감시 업무가 НКВД에서 ВЦИК 상무회 산하 종교중앙위원회로 이관되었으나,[72] 1938년 위원회 해산 후 НКВД가 독점적인 권한을 갖게 되었다.[74]

1937년까지 종교 건물 수는 혁명 이전보다 58% 감소했지만, 1937년 조사에 따르면 인구의 상당수가 여전히 신자였다. 1936년 새로운 헌법은 모든 인민의 동등함을 선언했지만, '종교 의식을 치를 자유와 반종교 선전활동의 자유'만 인정되었다.[76] 1920-1930년대 종교 건축물 폐쇄와 종교 물품 몰수가 이루어졌고, 일부는 박물관으로 옮겨지거나 토르그신에 판매되기도 했다.[77]

1941-1945년 대조국전쟁 중 종교 부활 정책이 실시되었다.[78] 1943년 러시아정교회 관련업무 담당평의회(СДРПЦ)가, 1944년 종교예식업무 담당평의회(СДРК)가 설립되었다.[78] 새 종교기관 개설 절차는 복잡했지만,[79] 독일 점령지에서 운영되던 시설은 '실질적 운영' 상태로 등록되었다.[80] 1946년 종교시설 전기요금이 인하되었고,[81] 1947년 종교 교육기관 학생과 교사에게 식료품이 제공되었다.[82] 그러나 1948년부터 반종교 정책이 다시 강화되었다.

니키타 흐루쇼프 집권 후 반종교 캠페인이 강화되어 1958년 비밀 지령이 내려졌고,[35][36] 1960년대 초 교회 폐쇄와 종교 활동 제약이 강화되었다. 1965년 종교업무 담당 평의회가 설립되어 종교 단체를 통제했고, 1970년대 종교 관련법 위반 처벌이 강화되었다. 1977년 소련 헌법은 무신론 선전의 자유는 인정했지만, 신앙의 자유는 제한적으로 인정했다. 1980년대 후반 미하일 고르바초프페레스트로이카 정책으로 종교의 자유가 확대되었고, 1990년 '사상의 자유와 종교 조직에 관한 법' 통과로 정부의 종교 통제가 완화되었다.[33]

3. 1. 1917-1929: 혁명 초기와 종교 탄압

볼셰비키 혁명 직후인 1917년 10월 27일(율리우스력), '토지에 관한 법령'이 통과되어 교회 소유 토지가 국유화되었다.[45] 1917년 11월 2일에는 '러시아 인민의 권리 선언'이 선포되어 모든 국가 및 종교적 특권과 제한이 폐지되었다.[46] 1917년 12월에는 결혼이 개인적인 행위로 간주되도록 법령이 바뀌면서, 종교 규율 준수 여부는 법적 관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게 되었다.[47][48][49]

소련 공산당은 1919년부터 '종교적 편견의 소멸'을 공식적인 임무로 선언했다.[50] 1918년 1월 20일(율리우스력)에는 '교회와 정부, 교회와 학교의 분리에 관한 법령'이 결정되고 1월 23일(율리우스력) 공식 선언되어[52] 교회는 법인격과 소유권을 잃고 종교는 개인의 사적인 문제로 규정되었다.[51] 이 법령은 1929년 '종교단체에 관한 결의'로 이어져 1990년까지 소련 종교단체의 법적 지위를 규정했다.

혁명기의 프로파간다 사례. 드미트리 무어의 캐리커처 "우리의 농촌 근처"로, 소녀들 주변에 취한 사제들과 수도사들이 춤을 추고 있다. 1917년 작품.


1918년부터 1920년까지는 러시아 정교회 성자 유골 개봉 사업이 진행되었다.[53][54] 사로프의 세라핌, 라도네즈의 세르게이 등 주요 성자들의 유골이 든 성합 65개가 개봉되었고, 이 과정은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되어 선동에 활용되었다.

1922년 2월 23일에는 교회 재산 몰수에 관한 법령이 시행되었다.[55] 당시 사제들은 부와 부패의 상징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대중의 저항은 크지 않았다.[56]

붉은 군대 무신론 안내서.(справочник - красноармейца безбожника)


소련 정부는 혁신교회 같은 분파를 지원하여 정교회를 약화시키려 했다.[57] 그러나 초기 몇 년간 반종교 정책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1921-1922년에는 종교 단체가 부분적으로 부활하기도 했다.

1923년, 종교 협회 등록 절차에 관한 지침이 발표되어 '협회' 형태의 종교 단체 설립이 허가되었다. 이는 '드바짜트카'보다 더 많은 권리를 가지는 형태였다. 1923년 4월, 이오시프 스탈린은 성당 폐쇄와 종교인 체포를 금지하는 지령을 내렸다.[58]

1923년부터 1929년까지는 이슬람교유대교에 대해 상대적으로 관대한 정책, 이른바 '종교적 신경제정책'이 시행되었다.[59] 개신교 단체도 정교회와 달리 출판, 교육기관 운영, 청년 동맹 조직 등의 권리를 누렸다.

1925년에는 에밀리안 야로슬랍스키를 대표로 하여 '무신론자 투쟁 동맹'이 창설되어 반종교 선전을 주도했다.

1928년, 역사, 문화적 기념 시설에 관한 규범이 결정되어 오래된 건물일수록 보존 가치가 높다고 판단했다. 이 규범에 따라 많은 성당이 파괴되었다.[60]

3. 2. 1929-1941: 스탈린 시대의 종교 탄압 강화

1929년 초, '반종교 활동 강화에 관한 대책'이라는 극비 지령이 내려지면서 종교와의 전쟁은 계급-정치적인 문제와 동일시되었고, 종교계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62]

'분파주의자와 침례교도를 깨끗이 청소하자'라는 슬로건을 들고 시위를 하고 있는 어린이들. 벨라루스, 1932년경.


1929년 4월 8일, 1918년 1월 20일 '교회와 정부, 교회와 학교의 분리에 관한 법령'에 근거하여 '종교단체에 관한 결의'가 통과되었다.[63] 이 결의는 1975년 6월 23일부터[64] 1990년 10월 25일까지 유지되었다. 이 시기에는 소련의 종교협회(공동체)가 가지는 지위를 규정하는 제도적, 법률적 근거로서 기능했다. 결의는 종교 단체의 자선 사업, 성지 순례 조직 등을 금지했고, 종교계 종사자들의 사업은 그들이 고용한 지역 거주민의 영역으로 제한되었다. 성직자의 사업은 병자와 망자를 돌보는 것으로 제한되었고, 이 외의 일들을 진행하려면 지역 소비에트의 특별 허가가 필요했다.

1929년 5월, 제9차 전러시아 소비에트대회에서 РСФСР 4차 헌법의 개헌이 통과되었다. 기존 '종교와 반종교 선전의 자유'가 '신앙의 자유와 반종교 선전의 자유'로 바뀌면서, 법적으로 신자들과 비신자들 간에 불평등한 관계가 성립되었다.

1929년 10월 1일 제정된 НКВД '종교단체의 권리와 의무에 관한 강령'에 따르면, 종교 종사자는 리셰니찌로 분류되었다.[67]

1930년 2월 15일 통과된 '종교단체의 지도부 내 반혁명 요소와의 투쟁에 관한 정부 결의'는 지역 기관이 종교공동체의 지도부에 관한 통제를 강화하고, '소비에트 시스템에 적개심을 품은' 열성분자로부터 떼어놓을 것을 명령했다. 종교중앙위원회는 '종교조직 내에서 반혁명 열성분자들의 통합'을 언급하며 1929년 4월 8일 결의를 '단순화의 방향으로 예배당 폐쇄 과정을 재검토하여야 한다'는 것을 허가하였다.[68]

반종교 선전을 위한 '교황'(поп) 인형


신자들과 성직자들은 반종교 정책에 대해 현저한 저항을 보였다. 저항은 이따금 집단화에 대한 저항과 통합되기도 하였다. 1930년 한 해 동안 소련에서 1487건의 종교적 대중연설이 기록되었다.

1930년 3월 2일자 <프라우다> 지에 스탈린의 사설 '성공으로 인한 두통'이 게재된 이후,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콜호즈 운동 노선의 왜곡과의 투쟁에 관한 결의'를 내었는데, 이는 특히 당 조직에게 ' 행정적인 절차 내에서의 교회의 폐쇄 조치 중단'하도록 했다.[69]

재구성한 1931년의 소련 달력표. 5일의 공식 휴일 가운데 정교회 명절이 없다. 이 외에, 일요일이 더 이상 휴일이 아닌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30-1931년에는 종교단체와 성직자의 과세기준 정립과 자리를 잃은 사람들의 일자리에 관한 비밀지령과 결의가 내려졌다.[70] 종교 종사자에게 부과하는 조세는 증가했다. 조세를 납부하지 않을 경우 이들은 자산을 압수당하고 소련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야 했다.[71]

제7차 당대회에서는 2차 5개년 계획의 구성을 다루는 지령이 통과되었다. 당대회에서는 2차 5개년 계획에 있어 주요한 정치적인 목표가 설정되었는데, 최종적으로 기독교적인 요소와 계급을 완전히 소탕하고, 국가 내의 모든 근로자들을 무계급 사회주의 사회의 의식있고 열성적인 건설자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반종교 활동은 강화되었다. 무신론자 투쟁 동맹에는 1931년 11월까지 5백만명 이상이 가입했고, 반종교 출판물들의 발행부수가 급격히 증가했다. 반종교위원회의 무신론자들은 소련에서 1937년까지 종교를 완전히 제거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62]

1932년 РСФСР ВЦИК과 СНК의 결의에 의해 종교단체의 활동과 등록, 집회 허가증의 교부 등을 감시하는 업무가 НКВД에서 1930년 6월 1일 신설된 ВЦИК 상무회 산하 종교중앙위원회와 지역 집행위원회 산하 종교위원회로 이관되었다. 단, 종교 종사자는 여전히 НКВД에 등록해야 했다.[72] 1934년부터 위원회는 소련 중앙집행위원회(ЦИК СССР) 상무회 산하로 편입되었으며, 종교시설의 폐쇄로 밀려드는 수많은 민원에 응답하고, 지역에서 '종교에 관한 소비에트 법률의 수많은 위반 사례'의 증가를 기록했다.[73] 1938년 4월 위원회는 해산되었으며, 종교 문제에 관해서는 НКВД가 독점적인 권한을 갖게 되었다.[74]

1937년까지 종교 건물의 숫자는 혁명 이전과 비교해 58% 감소하였다. 그러나, 소련 인구의 대부분은 아직 신자들이었다. 1937년 조사에 의하면 소비에트 연방의 16세 이상 주민 9840만 명 중 5530만 명이 자신이 신자라고 응답했다. (이 중 4160만 명이 정교회 신자라고 응답)

소련 중앙통계청장 블라디미르 스타롭스키의 기록에 따르면, 1955년 12월 20일 자신이 신자라고 응답한 소련의 인구 5530만 명은 교파별로 다음과 같이 분포했다. (16세 이상의 소련 주민에 대한 조사임)[75]

교파인구비율
정교회4160만42.3%
이슬람830만15.0%
가톨릭500만0.5%
개신교500만0.5%
기타 교파 기독교400만-
유대교300만-
불교와 라마교100만0.1%
기타 또는 불명확한 종교3500만3.6%



1937년의 인구조사는 소련에서 교육을 받은 젊은 세대들도 상당수가 종교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16-19세의 인구 중 34%가 자신이 신자라고 응답했다.[75] 16-19세 고학력 인구 중에서는 남성의 24%, 여성의 38%가 자신이 신자라고 응답했다.[75]

신자의 비율은 나이든 세대(특히 저학력자 및 여성)에서는 더 높았다. 40-49세의 인구 중 고학력 남성의 45%, 저학력 남성의 78%, 고학력 여성의 62%, 저학력 여성의 85%가 신자였다.[75]

절대적인 수치로 보면, 소련의 신자 가운데는 젊은 남성과 젊은 여성이 우세를 차지했다. 자신이 신자라고 응답한 5,530만명 가운데 2,870만명이 16세부터 39세까지의 인구였다.[75]

1936년 12월 5일 제8차 임시 전연방소비에트회의에서 통과된 소련의 새로운 헌법은 모든 인민이 서로 동등함을 선언했으며, 이 가운데는 '종교 종사자'도 있었다. 그러나 인민들에게는 이전처럼 '종교 의식을 치를 자유와 반종교 선전활동의 자유'가 인정되었다.[76]

1920년 말부터 1930년대에 다수의 종교 건축물이 폐쇄되면서, 많은 종교 물품들이 몰수되었다. 이러한 물품 중에는 값비싼 금속으로 제조한 것도 있었다. 상당수는 박물관으로 옮겨져 보관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값비싼 금속으로 만들어진 물품을 토르그신(외국인과의 거래)에 판매하려고 하기도 했다. 역사학자 옐레나 오소키나에 따르면 토르그신이 교회 귀중품들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없었는데, 법적으로 이는 국가의 소유물로 간주되었으며 몰수 처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소키나는 이러한 원칙이 토르그신의 직원들에 의해 위반되어 교회 귀중품들을 받고 돈을 내어주었던 몇 가지 사례를 들기도 한다.)[77]

한편 1920-1930년대는 정부가 '적색' 장례 의식에 대한 흥미를 잃고, '성직자적인' 장례의식의 '폭로' 열풍이 잦아든 시기이기도 했다. 심지어, '적색 장례식'에는 종교적인 요소가 들어가기도 했다. 돈 화장장이 지어질 당시 1층의 일부 공간은 종교 종사자를 위해, 즉 종교적인(정교회, 가톨릭, 루터교, 유대교) 의식을 위해 할당되었다. 매장식 장례도 있었으나, 많지 않았다. 1930년에는 4건의 '교회 매장식'이 진행됐으나, 1931년에는 1건도 없었다.

종교 묘지는 1930년대에는 폐쇄되었으며, 묘비는 부숴졌다. 1930년 10월 16일 ВЦИК 상무회 산하 종교상설위원회의 지침 '묘지의 건설, 폐쇄 및 소탕과 묘비의 파괴 방침에 관하여'가 발간되었다. 지침서는 종교단체에 의해 세워진 묘비와 담장을 종교 시설로 간주했다. 이렇게 부순 묘비들은 정부 자산에 속하는 것으로 취급되었다.

세속화는 장례 의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1929년의 규정은 고인의 시체를 반드시 관에 넣어 옮길 것을 요구했고, 1940년의 카잔시 스탈린구 타타르 묘지 관리사무소에서는 적지 않은 관을 판매했다. 1920년-1930년대에는 묘비의 형태에도 변화를 주었는데, 십자가형 묘비는 더욱 중립적인 형태인 직사각형, 석비, 오벨리스크형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1930년대에도 묘지는 심지어 도시 지역에서도 종교적인 장례 의식을 치르는 곳으로 남아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은 이러한 경향을 더 강화했다. 아래는 1942년 12월 10일 모스크바의 바간스키 묘지와 아르캰스키 묘지의 상태에 관한 데류긴의 설명이다.

> (관리자의 발표와 개인적인 관찰에 의하면) 95%의 장례식은 성당식으로 치러진다. 장례식이 끝나고 모든 조문객이 밖으로 나오면, (조사하는 날에는 약 30개의 관이 있었다) 묘지 업무에 있어 가장 어려운 상황이 만들어진다. 묘지가 혼잡스러워지는 것이다. 모든 관에는 못이 박히고, 사방에서 통곡이 들리고, 유족들은 사제와 묘지지기들을 붙잡는다.

1930년대의 묘지는 또한 종교적인 장례용품을 제작하는 장소로 남아있기도 했다. 십자가를 만드는 곳들은 1920-1930년대에 완전히 공식적으로 설립된 바 있으며, 이들은 묘지의 안내문서에 언급되어 있다.

3. 3. 1941-1953: 제2차 세계 대전과 종교 정책 완화

1941-1945년 대조국전쟁 중, 소련 정권은 종교와 교회를 신속히 제거한다는 계획을 철회하고, 엄격한 정부 통제 하에 부분적으로 종교를 부활시키는 정책을 실시했다.[78]

1942년 4월 4일 밤, 모스크바에서 부활절 하루 동안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되었다. 예배는 등화관제 상황에서 진행되었고, НКВД의 추산에 따르면 85,000명이 참석했다.

1943년 9월 14일 소련 СНК 산하에 러시아정교회 관련업무 담당평의회(СДРПЦ)가, 1944년 5월 19일에는 종교예식업무 담당평의회(СДРК)가 설립되었다.[78] 이 회의들은 정부와 모스크바 총대주교좌, 그리고 이슬람교, 유대교, 불교 교단,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고의식파, 그리스 가톨릭교회, 가톨릭, 루터교 교회 및 여러 종파 단체의 종교 조직 간의 업무를 담당했다. 두 회의는 법률과 정부 결의에 따른 사업들을 수행하고, 종교 관련 법률의 이행을 감독해야 했다. 각 공화국, 주와 변경주에 두 회의의 전권대표가 있었다.

1943년 11월 28일 제정된 '교회의 개소 절차에 관한 조례'와 1944년 11월 19일 제정된 '종교적 예배시설의 개소 절차에 관한 조례'[79]에 따르면, 새로운 종교기관을 개설하는 절차는 다단계적이고 길었다. 그러나 독일에게 점령당했던 영토 내에서 개방되어 운영 중이던 종교 시설들은 소비에트 정권이 해당 영토를 수복한 후 '실질적으로 운영' 상태로 등록되었고, 법률에 따라 폐쇄되지 않았다. 1946년 소련 영토 내에는 10,547개소의 성당, 사원, 예배당이 있었으며, 그 중 РСФСР 영토에는 2,816개소가 있었다.[80]

1946년 1월 1일 모든 종교시설에 대한 전기요금이 kWh당 5.5루블에서 1.65루블로 대폭 하향되었다.[81]

1947년 2월 24일 소련 각료평의회 명령 제1637호는 소련 무역부가 식료품을 모든 종파의 종교적 교육기관에 속한 학생과 교사에게 제공하며, 공립 세속 교육기관과 동일하게 제공하도록 하였다.[82]

1948년 초부터 반종교 정책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이는 처음에는 정교회 외의 종교조직에게 영향을 주었다. 1948년 4월 종교예식업무 담당평의회는 각지의 전권대사에게 지침을 내려 종교예식업무 담당평의회가 '절대적으로 모든 종교단체의 등록을 중지할 것을 제안한다'고 알렸다.

전후 시대에는 장례 의식이 국가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1953년, 공공기관들의 보고에 따르면 소련 전역에서 시체의 운구와 묘지의 조성은 인민들 스스로, 또는 기업의 도움을 받아 수행되었다. 심지어 전후 시대에도 십자가, 십자가형 비석, 초승달, 다윗의 별 등의 형상을 가진 종교적인 비석이 세속적인 표식과 함께 계속 생산되었다.

3. 4. 1953-1964: 흐루쇼프 시대의 반종교 캠페인

니키타 흐루쇼프 집권 이후, 소련에서는 다시 반종교 캠페인이 강화되었다. 1958년 '종교적 잔재'를 향한 프로파간다 의무를 강조하는 비밀 지령이 내려졌다.[35][36] 1960년대 초에는 교회 폐쇄가 다시 시작되었고 종교 활동에 대한 제약이 강화되었다.

흐루쇼프 시대에는 다음과 같은 조치들이 취해졌다.

  • '성지' 순례 중단
  • 교회 개방 및 폐쇄 권한 강화
  • 종교 종사자의 종교 공동체 운영 및 재정 관리 간섭 금지


이러한 조치들을 통해 흐루쇼프 시대에는 종교 조직을 수직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3. 5. 1964-1991: 브레즈네프 시대의 종교 정책과 페레스트로이카

1965년 종교업무 담당 평의회가 설립되어 종교 단체를 통제했다. 1970년대에는 종교 관련법 위반에 대한 처벌이 강화되었다. 1977년 소련 헌법은 무신론 선전의 자유는 인정했지만, 신앙의 자유는 제한적으로 인정했다. 1980년대 후반 고르바초프페레스트로이카 정책으로 종교의 자유가 점차 확대되었다. 1990년 '사상의 자유와 종교 조직에 관한 법'이 통과되면서 정부의 종교 통제가 완화되었다.[33]

4. 종교별 정책

소련의 종교 정책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념에 기반을 두었으며, 무신론을 공산당의 공식 교리로 삼았다. 그러나 1920년대 대부분 소련 법률과 행정은 종교에 어느 정도 관용을 보였고, 각 소련 헌법은 신앙의 자유를 보장했다.[33]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종교적 믿음을 "비과학적", "미신적"으로 간주하여 억압하고 궁극적으로 사라지도록 옹호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투사적 무신론자 동맹 같은 조직이 반종교 선전에 적극 참여했다. 무신론은 학교, 젊은 개척자 조직 등 공산주의 조직, 언론에서 규범이었다.

그러나 소련 내 종교 근절 노력은 종교별로, 그리고 시간에 따라 달랐다. 1923년, 뉴욕 타임스 특파원은 모스크바에서 기독교인들이 평화롭게 부활절을 지키는 것을 보도하기도 했다.[34] 1929년, 소련 문화 혁명과 함께 교회 대규모 폐쇄와 사제 체포를 선호하는 "강경 노선"이 우위를 점했고, 스탈린의 승인을 얻었다.[35][36] 그러나 반종교 운동이 농촌과 서방 교회의 분노를 불러일으키자, 국가는 공개 지지하지 않았던 정책에서 물러섰다.[35][36]

소련 정부는 국적과 종교 문제를 밀접하게 관련시켰다. 따라서 종교에 대한 태도는 종교별로 다양했다.


  • '''정교회''': 소련에서 가장 많은 신자를 가진 종교였다. 러시아 정교회, 조지아 정교회는 국가로부터 공인받아 활동했지만, 우크라이나 자율 정교회는 탄압받았다. 소련 당국은 러시아 정교회를 통제하려 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같은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는 이를 이용하기도 했다.
  • '''가톨릭''': 제2 폴란드 공화국 영토와 발트 공화국 병합으로 신자 수가 증가했다. 라틴 교회는 용인되었지만,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교회는 1946년에 금지되었다. 특히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교회는 우크라이나 반군과의 연관성 때문에 심한 박해를 받았다.
  • '''개신교''': 루터교를 비롯한 다양한 개신교 종파가 존재했다. 소련 초기에는 러시아 정교회에 비해 덜 적대적이었지만, 1930년대부터 탄압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러시아 정교회처럼 프로테스탄트 공동체도 혜택을 받았다. 1944년 전 소련 복음주의 기독교인-침례교 협의회가 결성되었지만, 이후에도 박해는 계속되었다.
  • '''기타 기독교 단체''': 여호와의 증인과 러시아 메노나이트는 심한 박해를 받았다. 특히 여호와의 증인은 북쪽 작전에 따라 시베리아로 추방되기도 했다.[30]
  • '''이슬람교''': 혁명 이후 한동안 러시아 정교회보다 나은 대우를 받았다.[31] 대조국 전쟁 동안 종교 제약이 완화되었고, 중앙아시아 및 카자흐스탄 무슬림 종교 관리부가 설립되었다. 1980년대 후반 소련에서 두 번째로 많은 신자를 보유했지만, 운영 모스크 수는 매우 적었다.
  • '''유대교''': 레닌은 반유대주의를 비난했지만, 소련 정부는 유대교에 적대적이었다.[41] 유대인 공동체 협의회는 폐지되었고, 당의 유대인 분과가 만들어졌다. 유대 자치주가 설립되었지만, 유대인 지도자들은 체포, 처형되었고, 이디시어 학교는 폐쇄되었다.

4. 1. 정교회

소련에서 가장 많은 신자를 가진 종교는 정교회였다. 1980년대 후반 기준으로 러시아 정교회, 조지아 정교회, 우크라이나 자율 정교회가 주요 정교회 분파였다. 이들은 동방 정교회 연합의 일원이었다. 러시아 정교회와 조지아 정교회는 국가로부터 공인받아 활동했지만, 우크라이나 자율 정교회는 그렇지 못했다.[19] 벨라루스 자율 정교회는 소련의 해체 이후에야 다시 나타났지만, 러시아 정교회의 벨라루스 엑자르하트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다.[19]

1980년대 후반, 러시아 정교회는 5천만 명 이상의 신자와 약 7,000개의 교회를 보유했다. 이 중 4,000개 이상의 교회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있었으며,[20] 수도원과 수녀원도 불균형하게 분포했다. 조지아 정교회는 약 250만 명의 신도를 보유했다.[21] 우크라이나 자치 정교회는 1919년 러시아 정교회에서 분리되었으나, 1930년대에 소련 당국에 의해 탄압받았다.[21]

소련 당국은 러시아 정교회를 통제하려 했지만,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는 이를 이용하기도 했다. 소련 초기에는 많은 성직자가 처형되거나 투옥되었고, 교회 재산이 몰수되었다. 1941년에는 500개의 교회만 남아있었다.[38]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종교 활동이 부활했지만, 스탈린 통치 말기와 흐루쇼프 시대에 다시 탄압받았다.[38][39] 1975년에는 활성 교회가 7,000개로 감소했다.

우크라이나 자율 정교회와 벨라루스 자율 정교회는 민족주의적 성향 때문에 탄압받았다. 두 교회의 지도부는 궤멸되었고, 많은 사제가 처형되거나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조지아 정교회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자율성을 얻었지만, 전쟁 후 통제가 강화되었다. 1980년대에는 200개의 교회만 운영되었고, 조지아 공화국 밖에서는 예배가 금지되었다.

4. 2. 가톨릭

가톨릭은 소련에서 상당한 규모의 종교적 지지 기반을 형성했다. 1939년 제2 폴란드 공화국 영토와 1940년 발트 공화국 병합으로 가톨릭 신자 수가 급격히 증가했다. 소련의 가톨릭 신자들은 소련 정부가 인정한 라틴 교회 소속과 1946년에 금지된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교회 소속으로 나뉘었다.

소련 내 라틴 가톨릭 신자 550만 명 대다수는 리투아니아, 벨라루스, 라트비아 공화국에 거주했으며, 몰도바, 우크라이나, 러시아 공화국에도 소수가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에서 가장 활발한 라틴 가톨릭 공동체는 리투아니아 공화국에 있었으며, 그곳 인구 대다수가 가톨릭 신자였다. 라틴 교회는 리투아니아의 국익과 가치를 옹호하고 육성하는 기관으로 여겨졌다. 1972년부터 가톨릭 지하 출판물인 ''리투아니아 가톨릭 교회의 연대기(The Chronicle of the Catholic Church in Lithuania)''는 리투아니아인의 종교적 권리뿐만 아니라 민족적 권리도 지지했다.

우크라이나 기독교사도 참조

대부분 갈리시아 지역을 포함하는 서부 우크라이나는 1939년 소련의 일부가 되었다. 이들은 우크라이나인이었지만, 러시아 제국의 일부였던 적이 없었고, 동방 가톨릭 교회 소속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교회는 이 지역의 민족주의적 열망과 밀접하게 관련되었고, 우크라이나 반군과 싸우고 있던 소련 정부의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 1945년, 소련 당국은 교회의 대주교인 요시프 슬리피와 주교 9명, 성직자 수백 명, 주요 평신도 활동가들을 체포하여 시베리아 등지의 강제 노동 수용소로 추방했다.[22] 주교 9명과 많은 성직자들이 감옥, 강제 수용소, 내부 유배지에서 사망하거나, 스탈린 사후 해빙기에 석방된 직후 사망했지만,[22] 18년 동안의 투옥과 박해 이후, 교황 요한 23세가 그를 위해 개입했을 때 슬리피 대주교는 석방되었다. 슬리피는 로마로 가서 리비우 대주교 칭호를 받았고, 1965년 추기경이 되었다.[22]

1946년, 리비우에서 시노드가 소집되었는데, 가톨릭과 정교회 모두에서 비정상적임에도 불구하고, 브레스트 연합은 무효화되었고,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교회는 공식적으로 러시아 정교회에 합병되었다. 리비우의 성 게오르기 성당은 러시아 정교회 마카리 대주교의 좌소가 되었다.[22]

러시아 정교회에 가입한 성직자들에게 소련 당국은 다른 곳에서 볼 수 있는 대규모 박해를 자제했다. 리비우에서는 교회 한 곳만 폐쇄되었다. 실제로, 리비우-테르노필 및 이바노-프란키우스크의 서부 교구는 소련에서 가장 컸다. 또한 교회법도 완화되어 성직자들이 수염을 깎고 (정교회에서는 흔치 않은 관행) 슬라브어가 아닌 우크라이나어로 전례를 수행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1989년,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교회는 40년이 넘는 지하 교회 시대를 거쳐 공식적으로 재건되었다.[22] 그 후 교회 건물 소유권을 놓고 정교회 신자와 가톨릭 신자 간의 갈등이 일어났고, 이는 우크라이나 독립 이후 1990년대까지 이어졌다.

소련 정부의 가톨릭 교회 정책은 소련 가톨릭 신자들이 교회의 수장으로 외부 권위(교황)를 인정하는 것에 큰 영향을 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 결과로 가톨릭 신자(그리스-가톨릭 신자 포함) 수백만 명이 소련 시민이 되었고 새로운 탄압을 받았다. 또한 가톨릭 신자 대다수가 살았던 리투아니아 SSR, 벨로루시 SSR, 우크라이나 SSR에서는 가톨릭과 민족주의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리투아니아에서 용인되었지만, 성직자 다수가 투옥되었고, 신학교 பல 곳이 폐쇄되었으며, 경찰 요원이 나머지 신학교에 침투했다. 리투아니아에서 가톨릭에 대한 반대 캠페인은 스탈린 사후에 잦아들었지만, 교회에 대한 가혹한 조치는 1957년에 재개되어 브레즈네프 시대까지 이어졌다.

소련의 정책은 특히 우크라이나 그리스-가톨릭 교회에 가혹했다. 우크라이나 그리스-가톨릭 신자들은 1939년, 서우크라이나가 나치-소련 불가침 조약의 일부로 소련에 편입되면서 소련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교회가 활동하도록 허용되었지만, 거의 즉시 심각한 박해를 받았다. 1941년 독일군에 밀려 퇴각하면서 소련 당국은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사제 다수를 체포하여 살해하거나 시베리아로 추방했다.[22] 1944년 붉은 군대가 서우크라이나를 재점령한 후, 소련 정부는 우크라이나 그리스-가톨릭 교회의 대주교, 모든 주교, 성직자 수백 명, 더 적극적인 교회 신자를 체포하여 일부는 살해하고 나머지는 노동 수용소로 보내면서 우크라이나 그리스-가톨릭 교회를 해체했다. 동시에 소련 당국은 남은 성직자에게 로마와의 연합을 폐지하고 러시아 정교회에 복종하도록 강요했다.

4. 3. 개신교

개신교(특히 루터교)는 16세기와 17세기에 서유럽 출신의 해외 거주민들과 관련하여 러시아 제국에 처음 등장했다. 18세기 예카테리나 2세(대제) 치하에서 많은 수의 독일인 정착민이 메노나이트, 루터교, 개혁교회, 가톨릭 신자를 포함하여 러시아 제국으로 초청되었다.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몰로칸, 두호보르, 클리스티 등 다양한 종교 운동이 러시아 정교회에서 등장했고, 19세기 톨스토이주의 농촌 공동체는 개신교 확산의 기반을 마련했다.[23] 침례교 공동체는 1860년대와 1870년대에 러시아 제국의 세 지역(트란스카우카시아, 우크라이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서로 관련 없이 생겨났고, 20세기 초에는 오순절 그룹도 형성되었다.[23] 소련 초기에는 볼셰비키가 러시아 정교회에 반종교적 노력을 집중했고, '분파주의자'에게는 덜 적대적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30년대부터 개신교도들은 다른 종교 단체처럼 소련의 탄압을 받았다.[23] 교회는 문을 닫았고, 종교 지도자들은 체포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종종 반소련 활동 혐의를 받았다. 오순절 운동의 지도자 이반 보로나예프는 1937년에 사형을 선고받았다.[23]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성 베드로 및 바울 루터교회는 1958년 이후 수영장으로 사용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은 소련 내에서 교회와 국가의 관계가 완화되었고, 러시아 정교회와 마찬가지로 프로테스탄트 공동체도 혜택을 받았다. 1944년에는 소련 프로테스탄트 내의 두 주요 흐름을 통합하는 전 소련 복음주의 기독교인-침례교 협의회가 결성되었고, 이후 2년 동안 소련 내 주요 오순절파 지도자들도 합류했다. 종전 직후에는 침례교와 오순절 교회가 성장했고, 종교 부흥이 일어났다.[23] 등록된 교회의 지도자 통계에 따르면, 1946년에는 25만 명의 침례교 신자가 있었고, 1958년에는 54만 명으로 증가했다.[23] 하지만 실제 프로테스탄트교의 영향력은 이보다 컸다. 미등록 침례교 및 오순절 그룹 외에도, 세례를 받지 않고 예배에 참석하는 수천 명이 있었다. 많은 침례교와 오순절 교회는 우크라이나에 있었다. 목회자는 남성이었지만, 교회에서는 여성이 남성보다 훨씬 많았다.[24] 1991년까지 우크라이나는 미국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침례교 공동체를 보유하게 되었다.[25]

소련 정부는 1944년에 전 소련 복음주의 기독교인-침례교 협의회를 설립하고, 교회가 등록하도록 장려했지만, 이것이 기독교인 박해의 종말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다양한 프로테스탄트 공동체의 많은 지도자와 일반 신자들이 굴라그 투옥을 포함하여 공산주의 정부의 박해를 받았다. 특히 1948년부터 1953년까지, 그리고 1960년대 초에 박해가 극심했다.[23]

소련 정부는 단일하고 통일된 교회 운동을 만들려고 시도했지만, 복음주의 교회 내부에는 많은 분열이 있었다. 1960년대 초, 한 분리주의 그룹은 영적 각성과 소련 정부로부터의 더 큰 독립을 요구하는 새로운 운동을 결성했다. 이 그룹의 지도자들(결국 복음주의 기독교인-침례교회 협의회로 알려짐)은 특별한 박해에 직면했다. 오순절 교도들 역시 자체적인 지하 조직을 결성했으며, 그 결과 국가의 표적이 되었다.[23]

루터교는 두 번째로 큰 개신교 집단으로, 대부분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 공화국에 거주했다. 1990년대에 이들 공화국에 있는 루터교 교회는 마침내 두 공화국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26] 루터교에 대한 국가의 태도는 일반적으로 호의적이었다.[27] 소련 시대에 이 나라의 다양한 지역에 있는 루터교는 박해를 받았고, 교회의 재산은 몰수되었다.[28] 많은 신도와 목사가 탄압을 받았고, 일부는 이민을 강요받았다.[29]

그 외에도 안식교, 개혁교회를 포함한 여러 개신교 종파가 존재했다.[23]

4. 4. 기타 기독교 단체

여호와의 증인과 러시아 메노나이트는 소련에서 종교 활동 금지, 추방, 투옥 등 심한 박해를 받았다.[30] 1951년에는 북쪽 작전에 따라 약 9,000명의 여호와의 증인이 시베리아로 추방되었고,[30] 8천 명 이상의 구성원과 그 가족들(미성년 자녀 포함)은 1965년까지 시베리아에서 강제 노역 및 마르크스주의 재교육 프로그램에 동원되었다. 이들의 개인 재산은 몰수되었다.[30]

러시아 메노나이트는 종교의 자유 제한, 폭력, 차별적인 공동 농지 할당 등으로 인해 소련을 떠나 독일, 영국, 미국, 남미 등으로 이주했다. 볼셰비키 시대 초기, 러시아 메노나이트 공동체는 살해, 투옥, 강간 등의 피해를 입었다. 아나코 공산주의자 네스토르 마흐노는 이러한 유혈 사태에 책임이 있었으며, 이는 평화주의를 추구하던 메노나이트가 방어를 위해 무기를 드는 계기가 되었다. 소련 정부는 메노나이트를 쿨락으로 규정하고, 그들의 농장을 공동 농업 정책에 따라 집단화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독일군을 해방자로 여기는 메노나이트도 있었으며, 일부는 ''Volksdeutsche''로 독일 이주가 허용되었다. 그러나 전쟁 후, 소련에 남은 메노나이트는 나치 협력자로 낙인찍혀 카자흐스탄과 시베리아로 추방되어 강제 노역에 동원되기도 했다.

4. 5. 이슬람교

1979년 소련 내 무슬림 인구 분포 (행정 구역별 비율)


볼셰비키 혁명 이후 이슬람교는 한동안(1929년까지) 볼셰비키가 "반동"의 중심이라고 여겼던 러시아 정교회와 다른 종교들보다 나은 대우를 받았다.[31] 1917년 11월 발표된 "러시아와 동방의 모든 노동하는 무슬림에게"라는 문서에서 볼셰비키 정부는 "차르와 러시아 압제자들에 의해 신념과 관습이 억압받았던" 무슬림들의 종교와 관습을 행사할 자유를 선언했다.[31]

대조국 전쟁 동안 종교에 대한 제약은 다소 완화되었다. 1943년에는 중앙아시아 및 카자흐스탄 무슬림 종교 관리부가 설립되었다. 1949년에는 소련에서 415개의 등록된 모스크가 운영되었다.[32]

1980년대 후반, 이슬람교는 소련에서 두 번째로 많은 신자를 보유했다. 4,500만에서 5,000만 명이 스스로를 무슬림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소련에는 약 500개의 운영 모스크만이 있었는데, 이는 혁명 전 러시아의 모스크 수에 비해 매우 적은 숫자였으며, 소련 법은 운영 모스크와 이슬람 학교 밖에서의 이슬람교 종교 활동을 금지했다.

모든 운영 모스크, 종교 학교, 이슬람 출판물은 정부 통제를 위해 소련 당국이 설립한 4개의 "종교 관리부"의 감독을 받았다. 중앙아시아 및 카자흐스탄 종교 관리부, 유럽 소련 및 시베리아 종교 관리부, 북캅카스 및 다게스탄 종교 관리부는 수니파 무슬림의 종교 생활을 감독했다. 자캅카스 종교 관리부는 수니파 무슬림과 시아파 무슬림을 모두 다루었다. 압도적인 다수의 무슬림은 수니파였다.

1964년 사마르칸트의 셰르-도르 마드라사에 모인 사람들


소련 무슬림들은 언어적, 문화적으로 서로 달랐으며, 약 15개의 튀르크어, 10개의 이란어, 30개의 캅카스어를 사용했다. 따라서 서로 다른 무슬림 집단 간의 의사 소통은 어려웠다. 1989년에는 러시아어가 일부 교육받은 무슬림들 사이에서 공통 언어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문화적으로 일부 무슬림 집단은 고도로 발달된 도시 전통을 가지고 있었지만, 다른 집단은 비교적 최근에 유목민이 되었다. 일부는 산업화된 환경에서 살았고, 다른 일부는 고립된 산악 지역에서 살았다. 요약하자면, 무슬림들은 비록 같은 종교와 같은 국가를 공유했지만, 공통된 국가 정체성과 유산을 가진 동질적인 집단은 아니었다.

1980년대 후반에는 공식적으로 승인된 모스크보다 차관실과 개인 주택에서 자체 물라들과 함께 모이는 비공식 무슬림 회중이 훨씬 더 많았다. 비공식 물라는 독학했거나 다른 물라들에게 비공식적으로 훈련을 받았다. 1980년대 후반에는 비공식 이슬람이 수피즘을 강조하는 근본주의 회중과 그룹으로 분열된 것으로 보였다.

4. 6. 유대교

소련의 유대인 역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레닌은 공개적으로 반유대주의를 비난했지만, 소련 정부는 처음부터 유대교에 적대적이었다.[41] 1919년, 소련 당국은 회당 관리 책임을 맡았던 유대인 공동체 협의회를 폐지하고, 유대교 성직자와 종교에 대한 선전을 담당하는 특별 당의 유대인 분과를 만들었다. 유대인의 민족적, 종교적 열망을 억누르고, 러시아 제국의 사회주의 운동에서 유대 민족 운동의 역할을 반영하기 위해 (예를 들어, 트로츠키는 처음에는 러시아 사회 민주 노동당이 아닌 유대인 분트의 회원이었다), 이스라엘의 대안으로 1934년 유대 자치주가 설립되었다.

1928년 스탈린에 의해 창설된 유대 자치주는 러시아 극동비로비잔을 행정 중심지로 삼아 "소비에트 시온"이 되도록 했다. "반동적" 히브리어 대신 이디시어가 국어가 되었고,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문학과 예술이 유대교를 대체했다. 대규모 국내외 국가 선전 캠페인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인구는 30%에 도달하지 못했다(2003년 현재 약 1.2%에 불과했다). 이 실험은 스탈린의 첫 번째 숙청 캠페인 동안 1930년대 중반에 끝났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이디시어 학교는 폐쇄되었다. 추가적인 박해와 숙청이 뒤따랐다.[42]

랍비 훈련은 1940년대 초까지 불가능해졌고, 1980년대 후반까지는 단 하나의 이디시어 정기간행물만 출판되었다. 시오니즘과의 동일시 때문에 히브리어는 외교관 학교에서만 가르쳤다. 볼셰비키 혁명 이전에 운영되던 5,000개의 회당 중 대부분은 스탈린 치하에서, 나머지는 흐루쇼프 치하에서 폐쇄되었다. 유대교 실천은 매우 어려워졌고, 이는 유대인들이 소련을 떠나려는 열망을 더욱 강화했다.[42]

참조

[1] 웹사이트 Forced Secularization in Soviet Russia: Why an Atheistic Monopoly Failed https://www.jstor.or[...]
[2] 웹사이트 Revelations from the Russian Archives: ANTI-RELIGIOUS CAMPAIGNS https://www.loc.gov/[...] US Government 2016-05-02
[3] 논문 Protest for Religious Rights in the USSR: Characteristics and Consequences 1980-10-01
[4] 서적 Religious Policy in the Soviet Union https://archive.org/[...] Cambridge University Press
[5] 서적 The Socialist Way of Life in Siberia: Transformation in Buryatia Central European University Press
[6] 서적 The Party of Unbelief Studia Historica 48 1994
[7] 서적 Religion, State and Politics in the Soviet Union and Successor States https://archive.org/[...] Cambridge University Press
[8] 뉴스 Why Stalin Tried to Stamp Out Religion in the Soviet Union https://www.history.[...]
[9] 뉴스 How churches in the Soviet Union were desecrated and repurposed https://www.dw.com/e[...]
[10] 뉴스 How did the Soviets use captured churches? https://www.rbth.com[...]
[11] 뉴스 10 beautiful Moscow churches destroyed in Soviet times https://www.rbth.com[...]
[12] 서적 Religion and the State in Russia and China: Suppression, Survival, and Revival Continuum International Publishing Group
[13] 서적 Inside Central Asia: A Political and Cultural History Penguin
[14] 서적 Religion and the Cultural Crisis in India and the West https://books.google[...] Intercultural Publications 2016-07-14
[15] 서적 A Short History of Christianity Viking
[16] 웹사이트 About the attitude of the working party toward the religion. http://www.psylib.uk[...] 2006-09-09
[17] 웹사이트 Lenin: The Attitude of the Workers' Party to Religion https://www.marxists[...] 2023-07-02
[18] 웹사이트 Russia-The Russian Orthodox Church http://countrystudie[...] U.S. Library of Congress 2008-04-03
[19] 서적 Religion In Soviet Russia 1917-1942 https://archive.org/[...]
[20] 서적 Soviet Union: A Country Study https://books.google[...] The Division 1991
[21] 서적 Religion and Nation in Modern Ukraine https://books.google[...] Canadian Institute of Ukrainian Studies Press 2003
[22] 웹사이트 The Ukrainian Greek Catholics: A Historical Survey https://web.archive.[...] Religious Information Service of Ukraine 2012-04-02
[23] 아카이브 State Archive of the Russian Federation (GARF), f. 6991, op. 4, d. 6 and d. 94.
[24] 논문 Protestant women in the late Soviet era: gender, authority, and dissent http://eprints.white[...]
[25] 논문 EVANGELICALISM AND THE RESURGENCE OF RELIGION IN UKRAINE http://www.ucis.pitt[...]
[26] 웹사이트 Lutherans enjoy a revival in Baltics – DW – 10/30/2017 https://www.dw.com/e[...] 2024-08-30
[27] 웹사이트 Religion in the Baltic States: Past and Present Challenges – Estonia https://faithineurop[...] 2024-08-30
[28] 문서 Lutheran Churches Religious Information Service of Ukraine 2011-11-01
[29] 문서 Keston Institute and the Defence of Persecuted Christians in the USSR 2011-11-01
[30] 아카이브 ГАРФ. Ф. 6991. Оп. 2. Д. 306. Л. 11–12.
[31] 웹사이트 Ко всем трудящимся мусульманам России и Востока http://xx-vek-istori[...]
[32] 서적 Искусство и религия: Современное исламское искусство народов России
[33] 서적 Everyday Stalinism Oxford University Press
[34] 뉴스 Moscow Keeps Easter; No Riots Expected; A Faithful Few Still Go to Church and Are Unmolested https://www.nytimes.[...] The New York Times 1923-04-06
[35] 서적 On the drive against religion in 1929–30 Stalin's Peasants
[36] 서적 Everyday Stalinism New-York 1999
[37] 서적 Stalin : from theology to the philosophy of socialism in power https://www.worldcat[...] Springer 2017
[38] 서적 Religion in the Soviet Union : an archival reader http://worldcat.org/[...] Macmillan 1999
[39] 서적 Church and State in Soviet Russia: Russian Orthodoxy from World War II to the Khrushchev Years http://dx.doi.org/10[...] 2015-02-12
[40] 서적 Central Asia: One Hundred Thirty Years of Russian Dominance, A Historical Overview Duke University Press 1994
[41] 웹사이트 Anti-religious Campaigns https://web.archive.[...]
[42] 서적 Stalin: The Court of the Red Tsar 2007
[43] 서적 Об отношении рабочей партии к религии. Полное собрание сочинений. Издательство политической литературы, 1964—1981 1909-05-13
[44] 웹인용 Церковь и КГБ http://www.religare.[...] 2021-01-12
[45] 웹인용 Декрет о земле https://ru.wikisourc[...] 2021-01-12
[46] 웹인용 Декларация прав народов России https://ru.wikisourc[...] 2021-01-12
[47] 웹인용 Декрет о расторжении брака, 16 (29) декабря 1917 г. http://www.1000dokum[...] 2021-01-12
[48] 뉴스인용 (제목 미상) Газета Временнаго Рабочаго и Крестьянскаго Правительства 1918-01-02
[49] 웹인용 Декрет ВЦИК и СНК о гражданском браке, о детях и о ведении книг актов состояния http://www.hist.msu.[...] 2021-01-12
[50] 서적 РЕШЕНИЯ КПСС И СОВЕТСКОГО ГОСУДАРСТВА О РЕЛИГИИ И ЦЕРКВИ http://istrorijaross[...] 2021-01-12
[51] 웹인용 Декрет Совета Народных Комиссаров "Об отделении церкви от государства и школы от церкви" http://constitution.[...] 2021-01-14
[52] 문서 신앙의 자유와 기독교, 종교 사회에 관하여 / 신앙의 자유와 기독교, 종교 사회에 관한 법령 이즈베스티야 / 노동자농민정부신문 1918-01-21 / 1918-02-05
[53] 문서 러시아 정교회와 러시아 제국 국교
[54] 잡지 Декрет об отделении https://www.kommersa[...] 2021-01-15
[55] 웹인용 Декрет ВЦИК об изъятии церковных ценностей: от поисков компромисса к конфронтации http://history.macha[...] 2009-03-29
[56] 저널 ЛУБЯНКА ВО ВРЕМЕНА НЭПА: Из биографии Феликса Дзержинского https://novpol.org/p[...]
[57] 웹인용 Евген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Тучков - разрушитель Русской православной церкви http://www.solovki.c[...] 2021-01-27
[58] 웹인용 В.С. Никитин: Секрет сталинских побед https://kprf.ru/rus_[...] 2021-01-30
[59] 저널 Отношение советской власти к протестантским организациям в 1919—1925 гг. https://web.archive.[...] Издательство Омского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го технического университета 2021-01-31
[60] 서적 Москвоведение. История столицы.
[61] 서적 Маргиналы в социуме. Маргиналы как социум. Сибирь (1920-е — 1930-е годы). Политическая энциклопедия 2017
[62] 뉴스인용 Была ли безбожная пятилетка? https://nvo.ng.ru/hi[...] 2021-01-28
[63] 웹인용 ПОСТАНОВЛЕНИЕ ВЦИК, СНК РСФСР от 08.04.1929 https://www.lawmix.r[...] 2021-01-29
[64] 웹인용 Указ о внесении изменений и дополнений в постановление ВЦИК и СНК РСФСР от 8 апреля 1929 года «О религиозных объединениях» http://docs.cntd.ru/[...] 2021-01-29
[65] 웹인용 Постановление ВС РСФСР от 25.10.1990 N 268-1 http://pravo.levonev[...] 2021-01-29
[66] 웹인용 Закон РСФСР «О свободе вероисповеданий» http://docs.cntd.ru/[...] 2021-01-29
[67] 간행물 Бюллетень НКВД 1929
[68] 기록물 ГАРФ. Ф.Р-5263. Оп. 1. Д. 22. Л. 4; Д. 1. Л. 4.
[69] 서적 КПСС в резолюциях и документах 1984
[70] 기록물 ГАРФ. Ф. Р-5263. Оп. 1. Д. 1. Л. 13; Д. 6. Л. 9, 14, 17; Д. 1. Л. 13.
[71] 서적 История России ТК Велби, Изд-во Проспект
[72] 기록보관소 ГАРФ. Ф. Р-5263. Оп. 1. Д. 32. Л. 16.
[73] 기록보관소 ГАРФ. Ф. Р-5263. Оп. 1. Д. 5. Л.1; Д.11. Л. 42-47; Д. 32. Л. 12.
[74] 서적 Русская православная церковь в XX веке
[75] 웹사이트 Старовский В. Н. О численности верующих в СССР и их распределении по религиям по переписи 1937 года http://istmat.info/f[...]
[76] 웹사이트 Конституция СССР 1936 г. wikisource:ru:Консти[...]
[77] 서적 Алхимия советской индустриализации: время Торгсина Новое литературное обозрение
[78] 기록보관소 ГАРФ. Ф. 6991. Оп. 2. Д. 1. Л. 2-12, 38, 41.
[79] 기록보관소 ГАРФ. Ф. 6991. Оп. 2. Д. 1. Л. 26-30, 58-59.
[80] 간행물 Динамика роста количества православных храмов и молитвенных домов Сибири и Приморья в середине 40-х гг. XX в.
[81] 웹사이트 Финансово-хозяйственная деятельность Русской православной церкви на Среднем Урале в 1944—1988 гг. http://www.ihist.ura[...]
[82] 간행물 Особенности советской двухуровневой подготовки исламских кадров: опыт и уроки
[83] 서적 КПСС в резолюциях и решениях съездов, конференций и пленумов ЦК М.
[84] 웹사이트 Записка Отдела пропаганды и агитации ЦК КПСС по союзным республикам «О недостатках научно-атеистической пропаганды» http://www.rusoir.ru[...]
[85] 서적 КПСС в резолюциях и решениях съездов, конференций и пленумов ЦК М.
[86] 간행물 Политика властных структур по отношению к православной и буддийской конфессиям в Бурятии (1943—1961 гг.)
[87] 간행물 Неофициальные религиозные объединения мусульман Татарстана в 1940—1960-е гг. Институт истории Академии наук Республики Татарстан
[88] 서적 Русская Православная Церковь и право Бек
[89] 웹사이트 Записка заместителя председателя Совета по делам РПЦ П. Г. Чередняка в ЦК КПСС о мерах по реализации постановления ЦК КПСС от 4 октября 1958 года. 18 ноября 1958 г. http://www.rusoir.ru[...] 2018-11-09
[90] 간행물 Экономический аспект антицерковной политики Советского государства 1958—1964 гг.
[91] 간행물 Суфийские братства, „бродячие муллы“ и „святые места“ Среднего Поволжья в 1950—1960-е годы как проявления „неофициального ислама“
[92] 서적 Деятельность советского государства и духовных управлений мусульман по организации паломничества (1944—1965 гг.): анализ исторического опыта и значение для современности Исламская книга
[93] 웹사이트 Последний „Штурм неба“. Антицерковная политика в годы Хрущёва /1958-1964/ http://vestnik.yspu.[...]
[94] 간행물 Оteчественные архивы
[95] 기록보관소 ГАРФ. Ф. 6991. Оп. 2. Д. 302. Л. 2-2 об.
[96] 기록보관소 ГАРФ. Ф. 6991. Оп. 2. Д. 306. Л. 4.
[97] 기록보관소 ГАРФ. Ф. 6991. Оп. 2. Д. 306. Л. 11-12.
[98] 간행물 Роль и место исполкомов районных и городских советов депутатов трудящихся в реализации политики советского государства в отношении религии (по материалам Татарской АССР за 1940—1980-е годы)
[99] 간행물 Роль и место исполкомов районных и городских советов депутатов трудящихся в реализации политики советского государства в отношении религии (по материалам Татарской АССР за 1940—1980-е годы)
[100] 웹사이트 Сергей Мироненко: перед Церковью спасовал даже Хрущёв http://www.radiomaya[...] Маяк 2007-05-15
[101] 웹사이트 Хрущёвский» удар по православию. Об антицерковной кампании 1958—1964 гг. http://www.sfi.ru/st[...]
[102] 서적 Политика Советского государства по вопросам религии и церкви Знание
[103] 기록보관소 ГАРФ. Ф. Р-6991. Оп. 6. Д. 714. Л. 1-9.
[104] 서적 Советская культурная дипломатия в условиях Холодной войны. 1945—1989 Политическая энциклопедия
[105] 웹사이트 Тегеран-43: были и небыли. Миф о покушении на «Большую тройку» https://www.sovsekre[...]
[106] 논문 Трансформация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конфессиональных отношений в 1985—1997 гг. (на материалах Челябинской области) http://www.susu.ru/r[...] Челябинск 2014
[107] 논문 Трансформация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конфессиональных отношений в 1985—1997 гг. (на материалах Челябинской области) http://www.susu.ru/r[...] Челябинск 2014
[108] 논문 Трансформация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конфессиональных отношений в 1985—1997 гг. (на материалах Челябинской области) http://www.susu.ru/r[...] Челябинск 2014
[109] 논문 Трансформация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конфессиональных отношений в 1985—1997 гг. (на материалах Челябинской области) http://www.susu.ru/r[...] Челябинск 2014
[110] 논문 Трансформация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конфессиональных отношений в 1985—1997 гг. (на материалах Челябинской области) http://www.susu.ru/r[...] Челябинск 2014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