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비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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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슈비츠주는 스위스 중부에 위치한 주로, 스위스 연방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선사 시대부터 인류가 거주했으며, 1291년 영원 동맹을 통해 스위스 연방의 기원이 되었다. 중세 시대에는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갈등을 겪었으며, 구 스위스 연방의 확장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798년 프랑스 침공 이후 헬베티아 공화국에 편입되었다가 중재법 이후 독립을 되찾았고, 1848년 란츠게마인데를 폐지하고 현대적인 국가 체제를 갖추었다. 현재 6개의 구와 30개의 기초 자치 단체로 구성되어 있으며, 농업과 관광업이 주요 산업이다. 스위스 아미 나이프가 생산되는 빅토리녹스도 슈비츠주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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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비츠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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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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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칸톤 슈비츠 |
로마자 표기 | Kanton Schwyz |
다른 언어 표기 | 독일어: Kanton Schwyz 로망슈어: Chantun Sviz 프랑스어: Canton de Schwytz 이탈리아어: Canton Svitto |
유형 | 주 |
위치 | 스위스 |
주도 | 슈비츠 |
최대 도시 | 프라이엔바흐 |
하위 구역 | 30개 자치체 6개 구 |
면적 | 907.89 km² |
인구 | 162,157명 (2020년) |
인구 밀도 | 자동 |
GDP (총액) | 98억 7,600만 CHF (2020년) |
GDP (1인당) | 61,223 CHF (2020년) |
ISO 코드 | CH-SZ |
최고점 | 뵈스 풀렌 (2802m) |
최저점 | 취리히 호 (406m) |
스위스 가입 | 1291년 |
공용어 | 독일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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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 |
행정부 | 정부위원회 (7인) |
입법부 | 칸톤스라트 (100인) |
공식 웹사이트 | 슈비츠 주 공식 웹사이트 |
기타 | |
슈비츠어 | Kanton Schwyz |
2. 역사
== 역사 ==
슈비츠주의 역사는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이어지는데, 스위스 연방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561년 알레만니 공국의 일부가 된 슈비츠는 8세기 중반까지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상태를 유지했다. 680년경 알레만니족이 정착하기 시작했지만, 알레만니어와 로망슈어를 사용하는 주민들이 수세기 동안 공존했고, 로망슈어는 10세기까지 아인지델른의 주요 언어로 남아 있었다. 취리히가우 백작들의 지배를 받던 슈비츠는 취리히 호 주변 저지대에 중세 내내 정착이 이루어졌고, 무오타탈 지역은 계절적 목축업자들이 이용했다. 퀴스나흐트는 9세기에 처음 기록되었지만, 그 이전에도 정착지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인지델른 주변 숲은 인구 밀도가 낮았다. "갈루스 전기"에는 611년 아일랜드 수도승 갈루스와 콜룸바누스의 방문이 언급되어 있으나, 그들의 선교 활동은 성공적이지 못했고, 기독교는 7세기 후반부터 확산되기 시작했다. 948년 아인지델른 수도원이 봉헌되었고, 슈비츠 계곡은 972년 "수이테스"라는 이름으로 처음 언급되었다. 미텐 산기슭에는 자유민 공동체가 정착하여 공동 토지를 소유하고 취리히가우 백작에게만 예속되었다. 고트하르트 고개를 통과하는 교통으로 경제적 이익을 얻었지만, 이는 합스부르크 등 다른 세력들을 끌어들였다.
1173년 렌츠부르크 백작의 계보가 단절되면서 슈비츠 내륙 또는 산악 지역은 키부르크 가문, 프로부르크 성, 라퍼스빌 영주,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받았다. 10세기 동안 아인지델른 수도원은 점점 강력해졌고, 슈비츠 마을은 종종 수도원이 주장하는 토지를 침범했다. 12세기 초, 렌츠부르크 백작은 수도원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지만 실패했고, 슈비츠 농민들은 수도원이 주장하는 토지로 계속 진출했다. 슈비츠는 주변 지역의 많은 토지를 장악했지만, 주 외곽이나 호숫가 지역은 생갈렌 수도원, 페퍼스 수도원, 뤼티 수도원, 셰니스 수도원, 합스부르크 영주, 토겐부르크 백작, 라퍼스빌 영주와 함께 통제되었다. 페퍼피콘 성과 알트 라퍼스빌 성은 이 지주들이 토지 소유를 통제하기 위해 건설되었다. 스위스 고원과 달리 슈비츠에는 지역 귀족이 거의 없었고, 많은 농지나 목초지는 공유지였다. 토지를 관리하기 위해 지역 집단이 발전하여 계곡의 농촌 마을 전체에 통합감을 조성하고 독립의 전통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다.
13세기 후반 키부르크 가문의 멸망과 라퍼스빌 영주의 쇠퇴와 함께 합스부르크 가문은 중부 스위스에 대한 주권을 주장하려 했다. 그들은 슈비츠, 슈타이넨, 무오타탈, 모르샤흐 교구를 획득했고, 1283년에는 아인지델른 수도원에 대한 수호권을 획득했다. 1240년 프리드리히 2세 황제는 슈비츠 계곡에 제국 직할을 부여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확장과 알프스 계곡 농민들과 수도원들 사이의 변화하는 관계는 슈비츠와 아인지델른 수도원 사이의 "마르헨슈트라이트"와 같은 갈등을 초래했다. "마르헨슈트라이트"는 미텐 산 주변의 방목권을 둘러싸고 1100년경에 시작되어 소송과 폭력적인 습격과 함께 약 1350년까지 이어졌다. 자세한 내용은 슈비츠주#중세 초기 및 슈비츠주#영원 동맹 항목을 참고하라. 슈비츠는 구 스위스 연방의 확장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고, 14세기부터 주변 지역의 권리와 토지를 획득하기 시작했다. 자세한 내용은 슈비츠주#구 스위스 연방 항목을 참고하라. 1798년 프랑스의 스위스 침공 이후 슈비츠는 헬베티아 공화국에 편입되었으나, 1803년 중재법 이후 독립을 되찾았다. 이후 슈비츠는 1848년 란츠게마인데를 폐지하고 현대적인 국가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슈비츠주#헬베티아 공화국에서 연방 국가로 및 슈비츠주#현대의 슈비츠 항목을 참고하라.
2. 1. 선사 시대와 로마 시대
슈비츠주의 최초 인류 흔적은 기원전 약 12,500년경 후기 구석기 시대와 초기 중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무오타 강 계곡의 카르스트 동굴 발굴 조사에서 여러 유적이 발견되었고, 일부는 젊은 드리아스기(기원전 약 10,000년경)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보드메렌, 트베레넨, 질베렌의 고산 초원은 당시 수렵 채집인들의 야영지였으며, 아이벡스와 붉은사슴 뼈와 함께 발견된 숯은 동물을 해체하고 요리했음을 보여준다. 2009년에는 슈비츠 주에서 최초의 석기 시대 도구인 석제 드릴이 발견되었다.[26]후기 신석기 시대와 초기 청동기 시대에는 주 전체의 호수 주변에 고상식 주거와 다른 유형의 정착지가 발달했다. 프라이엔바흐의 후르덴에 있는 두 개의 정착지는 알프스 주변의 선사시대 고상식 주거라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일부이다.[2] 후르덴 유적지는 서쪽 코르타이요 문화(기원전 4500~3500년경)와 관련이 있고, 뤼첼라우 섬과 프라이엔바흐 해안 지역의 유적지는 동쪽 프파인 문화(기원전 4000~3300년경)와 끈문양 토기 문화(기원전 2750~2450년경)에 속한다. 청동기 시대에는 라퍼스빌의 엔딩엔 곶과 산갈렌 주의 후르덴 정착지 사이에 여러 다리가 건설되었으며, 20만 개가 넘는 말뚝과 7개의 다리, 여러 정착지와 의례 장소가 발견되었다. 호수의 슈비츠 쪽에서는 기원전 4300년~2700년 사이의 10개의 서로 다른 정착지가 발견되었다.[26]
그러나 기원전 1200년 이후로는 청동기 시대 정착지 증거가 매우 적다. 기원전 8세기부터 1세기까지 발견된 철기 시대 유적지는 단 8곳에 불과하다. 로마 시대에는 라퍼스빌의 켐프라텐에 로마의 비쿠스가 세워졌는데, 이는 슈비츠로 통하는 제방(Seedamm)에 있는 거대한 다리(청동기 시대 다리 근처) 주변에 있었다. 기원후 200년경에는 우페나우 섬에 갈로-로마 사원이 건립되었고, 이 유적지는 현재의 성 베드로와 성 바울 예배당으로 재개발되었다. 퀴스나흐트와 리켄바흐 바이 슈비츠에서 몇몇 로마 주화가 발견되었으며, 퀴스나흐트는 로마 영지가 있었던 곳일 가능성이 있다.[26]
2. 2. 중세 초기
561년, 슈비츠는 알레만니 공국의 일부가 되어 8세기 중반까지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상태를 유지했습니다. 680년경 알레만니족이 정착하기 시작했지만, 게르만어를 사용하는 알레만니족과 로망슈어를 사용하는 갈로-로마인들이 수세기 동안 공존했습니다. 로망슈어는 10세기까지 아인지델른의 주요 언어로 남아 있었습니다. 8세기와 9세기에는 취리히가우 백작들의 지배를 받았고, 취리히 호 주변 저지대는 중세 내내 정착이 이루어졌습니다. 무오타탈 지역은 알프스의 유목을 하는 계절적 목축업자들이 이용했지만, 상주 정착지는 거의 없었습니다. 퀴스나흐트는 9세기 문서에 처음 언급되었지만, 그 이전에도 정착지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인지델른 주변 숲은 인구 밀도가 낮았습니다."갈루스 전기"에는 611년 아일랜드 수도승 갈루스와 콜룸바누스의 방문이 언급되어 있지만, 그들의 선교 활동은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7세기 후반부터 기독교가 확산되기 시작하여, 투겐의 교회는 680/700년경, 슈비츠의 단일 신랑 교회는 700년 이후에 지어졌습니다. 이후 젝킹겐 수도원, 생갈 수도원, 라이헨나우 섬의 수도원들이 신앙 전파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948년, 생 메인라드가 살해된 자리에 아인지델른 수도원이 봉헌되었고, 많은 농장, 마을, 교회들이 부여되어 높은 계곡으로 기독교 전파에 기여했습니다.[26]
슈비츠 계곡은 972년 "수이테스"라는 이름으로 처음 언급되었습니다. 미텐 산기슭에 자유민 공동체가 정착하여 공동 토지를 소유하고, 취리히가우 백작에게만 예속되었습니다.[27] 고트하르트 고개를 통과하는 교통으로 경제적 이익을 얻었지만, 이는 합스부르크 등 다른 세력들을 끌어들였습니다.
슈비츠의 내륙 또는 산악 지역은 1173년 렌츠부르크 백작의 계보가 단절될 때까지 그들의 통제를 받았습니다. 렌츠부르크의 영토는 키부르크 가문과 프로부르크 성, 라퍼스빌 영주,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상속되었습니다.
10세기 동안 아인지델른 수도원은 점점 더 강력해졌습니다. 확장되던 슈비츠 마을은 종종 수도원이 주장하는 토지를 침범했습니다. 12세기 초, 렌츠부르크 백작은 슈비츠를 대신하여 수도원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슈비츠 농민들은 수도원이 주장하는 토지로 계속 진출했습니다.[3] 곧 주변 지역의 많은 토지를 장악했는데, 그중 상당수는 현재 슈비츠 주를 덮고 있는 지역 밖에 있었습니다. 주의 외곽이나 호숫가 지역은 생갈렌 수도원, 페퍼스 수도원, 뤼티 수도원, 셰니스 수도원, 합스부르크 영주, 토겐부르크 백작, 라퍼스빌 영주와 함께 통제되었습니다. 페퍼피콘 성과 알트 라퍼스빌 성은 이 지주들이 토지 소유를 통제하기 위해 건설되었습니다. 스위스 고원과 달리 슈비츠에는 지역 귀족이 거의 없었습니다. 슈비츠 내륙의 많은 농지나 목초지는 사유지가 아니었고 공유지였습니다. 토지를 관리하기 위해 지역 집단이 발전하여 계곡의 농촌 마을 전체에 통합감을 조성하고 독립의 전통을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26]
13세기 후반 키부르크 가문의 멸망과 라퍼스빌 영주의 쇠퇴와 함께 합스부르크 가문은 중부 스위스의 키부르크와 라퍼스빌 영토에 대한 주권을 주장하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들은 슈비츠, 슈타이넨, 무오타탈, 모르샤흐 교구를 획득했고, 1283년에는 아인지델른 수도원에 대한 수호권을 획득했습니다. 1240년, 프리드리히 2세 황제는 슈비츠 계곡에 제국 직할을 부여했습니다.
계곡의 농촌 마을들이 서로 가까워지는 동안, 합스부르크 가문의 확장과 알프스 계곡 농민들과 수도원들 사이의 변화하는 관계는 슈비츠와 아인지델른 수도원 사이의 "마르헨슈트라이트"와 같은 갈등을 초래했습니다. "마르헨슈트라이트"는 미텐 산 주변의 방목권을 둘러싸고 1100년경에 시작되어 소송과 폭력적인 습격과 함께 약 1350년까지 이어졌습니다.[4]
2. 3. 영원 동맹
1291년 8월 1일경, 슈비츠, 우리, 운터발덴 세 지역이 맺은 영원 동맹은 스위스 연방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1291년 연방 헌장은 아마도 1291년 7월 15일 합스부르크가 루돌프 1세의 죽음으로 촉발되어, 방어 동맹을 목적으로 맺어졌습니다. 1308년경에는 삼림 주들 사이에 ''뤼틀리 서약''(Rütlischwur)이 맺어져 주들 간의 결속을 더욱 강화했습니다. 초기 연방에서 슈비츠는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고, 1320년대 초부터는 슈비츠의 이름이 연방 전체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슈바이츠''(Schweiz)라는 이름이 스위스의 공식 명칭이 된 것은 1803년이 되어서였습니다. 스위스의 국기는 슈비츠 주의 깃발에서 유래했습니다.영원 동맹을 통해 세 주는 정치적 독립을 유지하면서 회원국 간 분쟁 해결을 위한 중앙 의회를 두고 군사적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삼림 주 확장 야욕에 맞서 사실상 독립을 쟁취한 것입니다. 슈비츠와 아인지델른 수도원 간의 오랜 분쟁인 ''마르헨슈트라이트''(Marchenstreit)가 1314년 슈비츠의 수도원 공격으로 이어지면서, 수도원의 수호자인 합스부르크 가문은 슈비츠에 대한 군사적 개입의 명분을 얻게 되었습니다.
1315년 11월 15일,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는 반란을 일으킨 연합군을 진압하기 위해 대규모 기사 군대를 이끌고 아에게리 호와 모르가르텐 고개를 통해 남쪽에서 기습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요하네스 폰 빈터투어의 기록은 오스트리아 군대를 2만 명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과장된 것으로 보입니다.[5] 다른 기록은 9,000명[6], 델브뤼크는 2,000~3,000명으로 추정하지만 대부분 기사들이었다고 주장합니다.[7]
슈비츠 연합군은 – 우리 주 연합군의 지원을 받았지만 운터발덴 주 연합군의 지원은 받지 못했습니다 – 아르트 마을 근처 서쪽에서 오스트리아 군대의 진입을 예상하고 요새를 구축했습니다. 연합군 규모 또한 논란이 있는데, 1,500명[7] 또는 3,000~4,000명[7] 등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훈련받지 않은 민병대가 정규군인 기사들을 상대로 싸워야 했습니다.
연합군은 아에게리 호와 모르가르텐 고개 사이 좁은 길의 가파른 경사면과 늪지대를 이용해 도로를 차단하고 매복했습니다. 오스트리아 군대가 매복에 걸리자, 연합군은 위에서 바위와 통나무, 장창으로 공격했습니다. 기사들은 방어할 공간이 없어 압도적인 패배를 당했고, 후방의 보병들은 추크 시로 도망쳤습니다. 약 1,500명의 합스부르크 병사가 전사했습니다.[8]
모르가르텐 전투 승리 후, 삼림 주들은 1315년 12월 9일 브루넨에서 만나 상호 군사 지원을 갱신하는 브루넨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이 조약은 실용적인 방어 동맹을 완전한 연방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이후 40년 동안 루체른(1332년), 취리히(1351년), 글라루스와 추크(1352년), 베른(1353년) 등 인근 5개 도시가 가입하며 구 스위스 연방의 성장이 시작되었습니다.[9][10][11]
2. 4. 구 스위스 연방
슈비츠는 구 스위스 연방의 확장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영토를 넓혀갔다. 공격적인 대외 정책으로 인해 연방 자체를 "Schwyzer" 또는 "Schweizer"라고 부르게 되었을 정도였다.[26] 14세기부터 슈비츠는 주변 지역의 권리와 토지를 획득하기 시작했다. 1386년 아인지델른을 점령했고, 1424년까지 수도원은 슈비츠의 통제하에 있었지만 일정 부분의 자치권은 유지했다. 1386년부터 1436년까지 마르히 지구 전체를 직접 통제했고, 이는 슈비츠주의 일부가 되었다. 1424년에는 퀴스나흐트가, 1440년에는 볼레라우와 프페피콘을 포함한 취리히 호수 주변 마을과 토지, 그리고 후르덴과 우페나우 섬 등이 슈비츠주의 영토가 되었다. 1415년 지기스문트 황제는 합스부르크의 프리드리히 4세에 대한 군사 지원에 대한 보상으로 슈비츠, 아인지델른, 퀴스나흐트, 마르히에 대한 고등 사법권을 슈비츠에 부여했다.[26] 슈비츠의 확장은 각 마을이 서로 다른 협정에 따라 주에 편입되었기에 모든 지역이 동일한 자치권을 누린 것은 아니었다. 게르사우 마을은 1359년 연방의 보호령이자 반독립 국가가 되어 1817년까지 독립을 유지했다.[26]1386년 젬파흐 전투에서 슈비츠는 루체른, 우리, 운터발덴과 함께 합스부르크군과 맞섰다. 초기에는 합스부르크 기사들이 우세했으나, 스위스군이 역전하여 레오폴트를 사살하고 승리했다. 이 전투는 연방을 더욱 통합하는 데 기여했지만, 슈비츠는 영토 확장의 직접적인 이익을 얻지는 못했다.[12] 1402/3년에는 아펜첼과 동맹을 맺어 합스부르크와 성 갈 수도원에 맞섰다. 아펜첼 전쟁에서 슈비츠는 아펜첼을 지원했으나, 1408년 합스부르크와의 전투에서 패배했다. 슈비츠는 공격을 피하기 위해 합스부르크에 돈을 지불했고, 아펜첼은 어느 정도의 독립성을 유지하며 연방의 준회원이 되었다.[13] [14]
1440년에서 1446년의 구 취리히 전쟁에서 슈비츠는 다른 6개 주와 함께 취리히와 합스부르크에 맞섰다. 전쟁 후 볼레라우와 프페피콘을 획득하고, 글라루스와 우츠나흐, 가스터를 공동 통제하게 되었다. 이 전쟁은 연방이 더욱 긴밀한 정치 동맹으로 발전했음을 보여준다.[15] 15세기에는 우리와 니드발덴과 함께 고트하르트 패스 남쪽으로 확장하여 무역 이익을 얻으려 했다. 16세기까지 리비에라 계곡, 블레니오 계곡, 마지아 계곡, 그리고 벨린초나, 루가노, 멘드리시오, 로카르노 마을을 통제했다.[26]
1531년 종교 개혁 이후의 긴장 속에서 슈비츠는 가톨릭 신앙을 굳게 지켰다. 가톨릭 주들은 그라우뷔덴의 세 연맹이 밀라노 공국과의 무소 전쟁에서 돕는 것을 거부했고, 취리히는 이를 계약 위반으로 간주하여 베른과 함께 5개의 알프스 가톨릭 주에 대한 금수 조치를 선포했다.[16] 1531년 10월 11일 슈비츠, 우리, 추크는 츠빙글리가 이끄는 취리히 군대를 결정적으로 패배시켰고, 츠빙글리 자신도 사망했다.[26] 1655년 슈비츠는 남아있던 프로테스탄트 가족들을 기소했고, 이는 제1차 빌머겐 전투로 이어졌다. 전투 후 빌머겐 조약으로 적대 행위 이전 상태가 재확립되었지만, 종교적 긴장은 계속되었다.[17][18][19]
구 스위스 연방 시대 슈비츠의 란츠게마인데는 주요 정치 제도였다. 일반적으로 4월 마지막 일요일에 열려 시장과 정부 관리들이 선출되고 법률이 논의되고 투표되었다. 란츠게마인데는 이바흐에서 주로 열렸으나 다른 장소도 있었다. 16세기까지는 엘리트 계급이 란츠게마인데를 지배하는 경향이 있었고, 종종 정치적 혼란이 발생했다. 슈비츠는 굳건한 가톨릭 신앙과 란츠게마인데의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종종 ''enfant terrible''로 불리기도 했다.[26]

2. 5. 헬베티아 공화국에서 연방 국가로
1798년 프랑스의 스위스 침공 직전 몇 년 동안, 슈비츠 주의 종교 지도자들은 프랑스 혁명의 반가톨릭적 측면에 대해 자주 설교했다. 1798년 봄 란츠게마인데에서 지도자들은 프랑스에 대한 강력한 반대와 새로 설립된 헬베티아 공화국 및 공화국 내 제한된 종교의 자유에 대한 단호한 입장을 국민에게 촉구했다. 이에 우리, 슈비츠, 니트발덴 주는 알로이스 폰 레딩이 이끄는 약 1만 명의 군대를 조직하여 프랑스군과 싸웠다. 이 군대는 납프에서 라퍼스빌까지의 방어선에 배치되었고, 레딩은 프랑스가 점령한 루체른을 포위 공격하고 브뤼니크 고개를 넘어 베른 오버란트로 진격하여 베른의 군대를 지원했다. 동시에 프랑스 장군 발타사르 알렉시스 앙리 앙투안 폰 샤우엔부르크는 점령된 취리히에서 출발하여 추크, 루체른, 사텔 고개를 공격했다. 레딩의 군대는 1798년 5월 2일 로텐투름 전투와 모르가르텐에서 승리했지만, 샤우엔부르크가 사텔 근처에서 승리하면서 슈비츠 마을을 위협할 수 있었다. 1798년 5월 4일, 슈비츠 시의회는 항복했고, 레딩은 5월 13일에 프랑스군에 항복했다.[20]내륙 주들의 정치적 권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레벤티나를 제외하고 우르세렌을 포함한 우리, 마르흐와 회페를 제외한 슈비츠, 두 개의 반주인 운터발덴, 추크 주, 게르자우 공화국, 그리고 엔겔베르크 수도원이 발트슈테텐 주로 합병되었다. 새로운 주는 침공 전 회원들이 가지고 있던 16석 대신 타크자퉁에서 4석만을 차지했다. 초기 프랑스군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슈비츠 주의 옛 중심부는 점령되었고 아인지델 수도원이 약탈당했다. 그러나 1798년 가을 니트발덴에서 실패한 봉기 이후, 슈비츠는 모든 무기를 넘겨주고 프랑스군에게 물자와 주택을 제공해야 했다. 프랑스 점령군의 과도한 요구는 1799년 4월 "히르템리 전쟁"으로 알려진 봉기를 초래했고, 프랑스가 이 봉기를 진압한 후 발트슈테텐 주의 수도를 추크로 이전했다.[26]
1799년 여름과 가을 제2차 대연합 전쟁의 발발로 슈비츠에 다시 전투가 벌어졌다. 8월 중순 프랑스 장군 앙드레 마세나는 오스트리아-러시아 군대를 슈비츠 계곡에서 몰아냈고, 9월 말까지 그들은 마르흐 계곡에서 싸우고 있었다. 동시에 러시아 장군 알렉산더 수보로프는 그의 군대와 함께 킨지그 고개를 넘어 무오타 계곡에서 프랑스군과 싸우기 시작했으나, 주에서 빠져나갈 수 없었고 결국 프라겔 고개를 넘어 글라루스로 몰렸다. 양측 군대의 파괴와 약탈로 주는 식량이 부족해졌고 농경지가 황폐해져 그 이듬해 겨울 슈비츠 사람들에게 고난과 죽음을 가져왔다. 요제프 토마스 파스빈드는 이 시기 주의 역사를 편찬하여 1830년대에 출판했다.
1803년 중재법 이후, 슈비츠는 독립을 되찾았고 나폴레옹이 도입한 대부분의 변화가 되돌려졌다. 옛 속주들은 완전하고 동등한 구역으로 전환되었고, 이전에 독립적이었던 게르자우와 라이헨부르크 마을은 새로운 슈비츠 주에 합류했다. 슈비츠 옛 중심부의 권력 상실은 주 내 불만과 긴장으로 이어졌다. 1814년 2월 중재법 폐지 후, 옛 중심부는 주의 지도적 역할을 빼앗고 옛 속주들의 정치 참여권을 박탈하려 했으나, 옛 속주들은 이에 저항했고, 옛 중심부는 모든 시민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한 1814년 헌법에 동의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의석의 3분의 2가 슈비츠의 옛 중심부에서 나오도록 조항을 포함할 수 있었다. 게다가 최고 주 당국은 옛 중심부 출신이었다. 새로운 헌법은 시민과 거주자 간의 법적 차이를 없앴지만, 거주자들은 뷔르거게마인데가 소유한 광대한 토지를 사용할 수 없었다. 긴장은 1829년 란츠게마인데에서 옛 속주 출신 거주자들이 집회에서 쫓겨날 때까지 계속 고조되었다. 옛 속주들은 이것을 그들의 평등에 대한 명백한 위협으로 보고, 1830년 7월 혁명에 고무되어 마르흐 지구, 아인지델, 프페피콘, 퀴스나흐트의 네 개의 외곽 지구는 무엇보다도 비례 대표제를 보장하는 새로운 헌법에 서명했다. 옛 중심부의 지도자들은 이것을 그들의 권위에 대한 위협으로 보고 새로운 헌법을 거부했다. 1831년 3월 9일, 외곽 지구들은 슈비츠에서 분리되어 아인지델을 수도로 하는 외슈비츠 주를 형성했고, 1832년 그들은 새로운 헌법, 정부, 법원을 설립했다. 1833년 봄 스위스 타크자퉁은 새로운 주를 인정했지만, 재통합을 위해 노력할 것을 주장했다.
분리 독립을 찬성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 사이의 퀴스나흐트의 언쟁은 내슈비츠에게 군사 행동으로 위기를 해결할 기회를 제공했다. 그들은 1833년 7월 31일 퀴스나흐트를 침략하여 점령했다. 외슈비츠와 루체른은 스위스 연방에 호소했고, 연방은 8월에 내슈비츠를 침공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두 개의 반주는 모든 거주자에게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는 헌법에 따라 재통합되었다. 1833년 10월 13일 란츠게마인데에서 주의 유권자들은 두 명의 자유주의적 사고방식의 지도자를 선택했지만, 그 후 곧 보수파가 다시 권력을 잡았다.
보수 정부 하에서 이 주는 1845년 주의 자치권과 가톨릭교를 보호하기 위해 Sonderbund(독일어로 별도의 동맹)에 가입했다. 타크자퉁이 1847년 10월 21일 Sonderbund 해체를 시도하자 가톨릭 주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1847년 11월 23일 연방군은 기슬리콘 전투에서 Sonderbund를 패퇴시키고 마이어스카펠 전투에서 슈비츠 군대를 격퇴했다. 4일 후 Sonderbund는 항복했다.
슈비츠의 보수 정부는 해산되었고 새로운 임시 정부와 헌법이 수립되었다. 슈비츠 지구를 두 개로 나누고 주 수도를 슈비츠에서 옮기는 헌법 초안은 1848년 1월 27일 간신히 부결되었다. 언급된 내용을 제거하고 이전의 볼레라우와 프페피콘 지구를 마르흐 지구에 합병한 두 번째 헌법은 1848년 2월 27일 유권자들에 의해 승인되었다.
1848년 새로운 헌법은 주 정부를 개혁했다. 아마도 가장 큰 변화는 이전에 최고 권위였던 란츠게마인데를 폐지한 것이다. 정부를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 세 부분으로 나누고 지방 자치단체, 지구, 주의 3단계 구조를 만들었다. 비례 대표제를 만들고 인구가 법률과 헌법 개정에 투표할 수 있도록 했다.[26]
2. 6. 현대의 슈비츠
1848년 란츠게마인데 폐지 이후 슈비츠주는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큰 변화를 겪었다. 12월 3일 실시된 주 선거에서 보수파가 다수 의석을 차지했지만, 주 의회는 자유주의적 보수주의 정부와 자유주의 정부를 연이어 선출했다. 새 정부는 주의 연방 재통합이라는 어려운 과제에 직면했는데, 슈비츠 주민의 75%가 새로운 연방 정부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852년 연방 정부의 Sonderbund 전쟁 채무 탕감, 1856년 연방 장교 축제, 1867년 연방 사격 축제 개최 등을 통해 주의 재통합은 어느 정도 진전을 보였다.1854년 보수파의 란츠게마인데 재건 및 구역 폐지 시도와 1866년 자유주의파의 개인 권리 확대 시도는 모두 주민투표에서 실패했다. 1870년대 초 보수파가 주 정부를 장악했고, 1874년 스위스 연방 헌법 전면 개정으로 슈비츠 주 헌법과의 갈등이 발생했다. 1876년 개정된 주 헌법은 유권자의 73% 찬성으로 통과되었으며, 주 법의 범위를 제한하고 의무적 주민투표 요건을 확대하는 내용을 담았다.
1890년대 중반, 자유주의파는 헌법 개정을 다시 추진했으나, 정부에 수도원과 그 자산에 대한 권한을 부여하는 내용을 포함하여 보수파의 반발을 샀다. 결국 정부는 종교 관련 조항을 제외한 수정안을 제출했고, 4년마다 선거를 실시하고, 의회 의원을 직접 선출하며, 주 의회에 비례 대표제를 적용하고, 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새로운 헌법이 1898년 10월 23일 승인되었다. 이 헌법은 2011년까지 시행되었다.
1833년부터 1950년까지 슈비츠주의 인구는 38,351명에서 71,082명으로 두 배 증가했지만, 전국 평균보다는 느린 성장세였다. 퀴스나흐트까지의 철도 건설(1870~1914년)은 이 지역 인구 증가에 큰 영향을 미쳤다. 같은 시기에 유럽(주로 이탈리아)에서 이주민 유입이 있었고, 반대로 많은 슈비츠 주민들은 미국으로 이주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는 내부 이주로 인구 구성이 변화하여, 1860년에는 거주민의 80%가 출생지 마을에 거주했지만, 1950년에는 50%로 감소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은 슈비츠주에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주 당국은 전시 폭리 행위 방지에 소극적이었고, 식량과 생필품 가격 급등으로 기아와 빈곤이 심각해졌다. 관광과 섬유 가내 수공업이 주요 산업이었는데, 두 산업 모두 붕괴되어 주에 큰 타격을 입혔다. 1918년 슈비츠 주 병사들이 파업 진압에 투입되었고, 군대 캠프에서 스페인 독감이 발생하여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로 인한 빈곤과 사망은 정치적 양극화를 심화시켰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슈비츠는 국가 요새의 일부로 리기 산, 사텔 고개, 에첼, 린트 평야에 요새가 건설되어 전쟁의 직접적인 영향은 적었다. 하지만 1941년 연방 창설 650주년 기념식과 1942년 암시장 운영 사건으로 두 차례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1950년부터 2010년까지 슈비츠주의 인구는 다시 두 배로 증가하여 146,730명에 달했는데, 이는 스위스 주들 중 가장 높은 성장률이었다. 특히 슈비츠 외곽 지역의 성장이 두드러졌다. 2004년에는 프라이엔바흐가 슈비츠를 제치고 주에서 가장 큰 지방 자치 단체가 되었다. 1995년 주 행정부가 도입한 로고는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주민 투표를 통해 슈비츠의 문장만을 사용하기로 결정되었다. 이 로고는 1997년 주민투표 부결 후 1998년부터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 [26] [21]
3. 지리
슈비츠주의 면적은 908.2k㎡이다. 이 중 41.0%는 농업용지, 33.7%는 산림, 5.4%는 주거지(건물 또는 도로), 20.0%는 불모지로 이용된다.[36] [23] 슈비츠주는 스위스 중부, 약간 북동쪽에 위치하며, 지흘강과 무오타강이 주를 횡단한다. 취리히 호수와 루체른 호수의 일부가 슈비츠주에 포함되며, 추크 호수는 일부만 포함된다. 라우에르츠 호수(Lauerzersee)와 지흘호는 슈비츠주에 완전히 포함된다. 슈비츠주의 최고봉은 해발 2,802m의 뵈스 풀렌이다. 하지만 리기 산맥의 리기쿨름(1,798m)과 리기 샤이덱(1,665m)이 주에서 가장 유명한 산으로 알려져 있다.
3. 1. 인접 주
슈비츠주는 북동쪽으로는 상트갈렌주와, 남쪽으로는 우리주와, 동쪽으로는 글라루스주와 인접해 있다. 서쪽으로는 추크주와 루체른주가 위치하며, 북쪽으로는 취리히주와 취리히호가 자리하고 있다. 각 주와의 관계는 지리적 근접성에 기반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4. 행정 구역
슈비츠주는 6개의 구(Bezirk)와 30개의 기초 자치 단체(Gemeinde)로 이루어져 있다. 아인지델른, 퀴스나흐트, 거자우는 각각 같은 이름의 구와 기초 자치 단체를 구성한다. 가장 큰 도시는 퀴스나흐트와 프페피콘이다. 다음은 각 구별 기초 자치 단체 목록이다.
구 | 기초 자치 단체 |
---|---|
슈비츠구 | 슈비츠, 아르트, 잉엔볼, 무오타탈, 슈타이넨, 사텔, 로텐투름, 오베리베르크, 운테리베르크, 라우어츠, 슈타이너베르크, 모르샤흐, 알프탈, 일가우, 리멘슈탈덴 |
아인지델른구 | 아인지델른 |
거자우구 | 거자우 |
회페구 | 볼레라우, 프라이엔바흐, 포이지스베르크 |
퀴스나흐트구 | 퀴스나흐트 |
마히구 | 라헨, 알텐도르프, 갈게넨, 포더탈, 인네르탈, 슈벨바흐, 투겐, 방겐, 라이헨부르크 |
아래 표는 슈비츠주의 각 구의 인구와 면적, 중심 도시, 기초 자치 단체 수를 보여준다. (2015년 12월 기준)[34]
행정구 (Bezirk) | 인구 (2015년 12월) | 면적 (km²) | 중심 도시 (Hauptort) | 기초자치단체 수 |
---|---|---|---|---|
아인지델른 (Einsiedeln) | 15,077 | 110.40 | 아인지델른 (Einsiedeln) | 1 |
거자우 (Gersau) | 2,240 | 23.70 | 거자우 (Gersau) | 1 |
회페 (Höfe) | 28,231 | 44.40 | 볼레라우(Wollerau) / 프페피콘(Pfäffikon SZ) | 3 |
퀴스나흐트 (Küssnacht) | 12,423 | 36.20 | 퀴스나흐트 (Küssnacht SZ) | 1 |
마르히 (March) | 42,104 | 191.40 | 라헨(Lachen SZ) | 9 |
슈비츠구 (슈비츠군) | 54,018 | 506.40 | 슈비츠 (Schwyz) | 15 |
합계 (6) | 154,093 | 912.50 | 슈비츠 (Schwyz) | 30 |
과거 인구 통계 및 종교 현황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을 참고하라.
5. 인구 통계
슈비츠주의 인구는 (|lc=on}}) 명이다. 2020년 12월 기준으로 162,157명이었으며, 2008년 기준 외국인 비율은 15.6%였다. 2000년부터 2010년까지 10년 동안 인구는 12.8% 증가했는데, 이는 이주(10%)와 출생 및 사망(3.9%)의 영향으로 분석된다.[36][23]
2000년 기준 모국어는 독일어가 115,688명(89.9%)으로 압도적으로 많았고, 세르비아-크로아티아어(2,667명, 2.1%), 알바니아어(2,477명, 1.9%)가 그 뒤를 이었다.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로만슈어 사용자는 각각 502명, 2,447명, 234명이었다.[37][24] 성별 구성은 2008년 기준 남성 49.9%, 여성 50.1%였다. 스위스 국적 남성은 5,824명(42.2%), 비스위스 국적 남성은 1,058명(7.7%), 스위스 국적 여성은 5,932명(43.0%), 비스위스 국적 여성은 988명(7.2%)이었다. 2000년 기준 슈비츠 출생 주민은 50,778명(39.5%), 슈비츠 주 내 타 지역 출생 주민은 19,319명(15.0%), 스위스 타 지역 출생 주민은 35,617명(27.7%), 스위스 외국 출생 주민은 19,622명(15.2%)이었다.[37][24]
연령별 분포는 2000년 기준 아동·청소년(0~19세) 25.6%, 성인(20~64세) 61.4%, 노인(64세 이상) 12.9%였다.[36][23] 결혼 상태는 2000년 기준 미혼 57,353명, 기혼 59,385명, 미망인 6,201명, 이혼 5,765명이었다.[37][24] 가구는 2000년 기준 50,089가구였고, 가구당 평균 인구는 2.5명이었다. 1인 가구는 15,043가구, 5인 이상 가구는 4,801가구였다. 2009년 신규 주택 건설률은 인구 1,000명당 7.8세대였다.[36][23]
2003년 슈비츠 마을의 평균 아파트 임대료는 월 1185.58 스위스 프랑(CHF)이었다(당시 환율 기준 미화 950달러, 영국 파운드 530파운드, 유로 760유로). 원룸 아파트는 543.08 CHF, 투룸 아파트는 약 904.87 CHF, 쓰리룸 아파트는 약 1068.78 CHF, 6룸 이상 아파트는 평균 1461.34 CHF였다. 슈비츠의 평균 아파트 가격은 전국 평균보다 6.2% 높았다.[38][25] 2010년 공실률은 0.97%였다.[36][23]
5. 1. 과거 인구 자료
연도 ! 총인구 ! 독일어 사용 인구 ! 이탈리아어 사용 인구 ! 가톨릭 신자 ! 개신교 신자 ! 기타 ! 유대교 신자 ! 이슬람교 신자 ! 무종교 ! 스위스 국민 ! 스위스 비국민 |
---|
1850 ! 44,168 ! ! ! ! 44,013 ! 155 ! ! ! ! 43,970 ! 198 |
1880 ! 51,109 ! 49,631 ! 1,377 ! 50,266 ! 954 ! 15 ! 7 ! ! ! 48,585 ! 2,524 |
1900 ! 55,385 ! 53,834 ! 1,108 ! 53,537 ! 1,836 ! 12 ! 9 ! ! ! 52,422 ! 2,963 |
1950 ! 71,082 ! 69,231 ! 1,191 ! 66,297 ! 4,642 ! 64 ! 15 ! ! ! 68,416 ! 2,666 |
1970 ! 92,072 ! 82,957 ! 6,663 ! 84,087 ! 7,271 ! 671 ! 19 ! 202 ! 238 ! 81,301 ! 10,771 |
2000 ! 128,704 ! 115,688 ! 2,447 ! 92,868 ! 16,401 ! 19,389 ! 51 ! 5,598 ! 6,331 ! 108,381 ! 20,323 |
5. 2. 종교
2000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슈비츠 주민의 종교 분포는 다음과 같다. 로마 가톨릭교회 신자는 92,868명(72.2%)으로 가장 많았으며, 스위스 개혁 교회 신자는 15,140명(11.8%)이었다. 정교회 신자는 2,758명(약 2.14%), 스위스 기독교 가톨릭 교회 신자는 46명(약 0.04%), 기타 기독교 신자는 2,658명(약 2.07%)이었다. 이슬람교 신자는 5,598명(약 4.35%)으로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고, 유대교 신자는 51명(약 0.04%)이었다. 불교 신자는 272명, 힌두교 신자는 429명, 기타 종교 신자는 62명이었다. 무교, 불가지론 또는 무신론자는 6,331명(약 4.92%)이었고, 3,752명(약 2.92%)은 종교 질문에 응답하지 않았다.[37][24]6. 정치
슈비츠주의 정치 체제는 2011년 개정된 헌법을 기반으로 한다. 이전에는 1876년 헌법(1898년 개정)을 따랐다. 입법부인 칸톤스라트(Kantonsrat)는 4년 임기의 의원들로 구성되며, 2012년 기준 인구가 가장 적은 13개 시정촌은 각각 1명의 의원을, 나머지 87석은 인구 비례로 17개 시정촌에 배분된다.[28] 행정부인 레기어룽스라트(Regierungsrat)는 인구에 의해 선출된 7명의 4년 임기 의원으로 구성된다. 연방참사원(Standerat) 의원 2명과 연방국민의회(Nationalrat) 의원 4명(2003년까지는 3명)도 인구에 따라 선출된다. 모든 법률과 중요 재정 조치는 의무적 국민투표를 거쳐야 하며, 2,000명 이상의 시민은 국민투표를 요구하거나 헌법 개정 또는 법안 발의를 할 수 있다.[27]
연방 선거 결과를 보면, 1971년부터 2015년까지 스위스 국민당(SVP/UDC)의 급부상이 두드러진다. 1971년 미미했던 득표율은 2015년 42.6%까지 상승하며 최대 정당이 되었다. 반대로 스위스 기독교민주당(CVP/PDC/PPD/PCD)은 1975년 46.4%의 정점을 찍은 후 지지율이 꾸준히 하락하여 2015년에는 19.5%에 그쳤다. 스위스 사회민주당(SP/PS) 또한 1970년대 후반 이후 하락세를 보이며 2015년 13.1%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자유민주당(FDP.Die Liberalen)은 2000년대 초반 15%대의 낮은 득표율을 보였지만, 2015년에는 20.6%로 다소 회복했다. 스위스 녹색당(GPS/PES)은 2015년 1.4%의 낮은 지지율을 보였다. 투표율은 40~50%대를 오갔다.[31]
주의회 선거 결과는 연방 선거와 유사한 경향을 보인다.[26] 특히 스위스 인민당(SVP)의 약진이 눈에 띄는데, 1976년 이후 꾸준히 의석 수를 늘려 2008년에는 압도적인 의석을 차지했다. 반면 천주교 민중당(CVP)은 꾸준히 의석 수가 감소했고, 자유민주당(FDP)도 1980년대 이후 점진적으로 의석 수가 줄었다. 사회당(SP)은 의석을 유지하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영향력은 약하다. 녹색당(GR)은 1988년 이후 등장하여 일정 수준의 의석을 확보하고 있으나, 주요 정당들에 비해 영향력은 미미하다. 자세한 연도별 정당별 의석 수 변화는 관련 시계열 그래프를 참고하면 된다.[26]
6. 1. 연방 선거
2011년 슈비츠주 연방 선거에서 스위스 국민당(SVP)이 38.0%의 득표율로 1위를 차지했다. 이는 2007년 선거의 45.0%에 비해 7.0%p 하락한 수치이지만 여전히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음을 보여준다. 2위는 기독교민주당(CVP)으로 20.6%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2007년(20.1%)과 비슷한 수준을 유지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사회민주당(SP/PS)의 약진이다. 2007년 선거에서 4위 이하에 머물렀던 사회민주당은 15.7%의 득표율로 3위에 올라섰다. 자유민주당(FDP)은 15.5%를 얻어 4위를 기록했는데, 이는 2007년과 비슷한 순위이다.[29][30] 전반적으로 2011년 슈비츠주 선거는 SVP의 여전한 강세와 SP의 약진이라는 두 가지 흐름을 보여주는 결과를 나타냈다.6. 1. 1. 연방 선거 결과
슈비츠주의 연방 선거 결과는 1971년부터 2015년까지 스위스 국민당(SVP/UDC)의 급부상을 보여준다. 1971년에는 득표율이 미미했으나, 2015년에는 42.6%를 기록하며 가장 큰 정당으로 자리매김했다. 반면 스위스 기독교민주당(CVP/PDC/PPD/PCD)은 1975년 46.4%의 최고치를 기록한 후 꾸준히 지지율이 하락하여 2015년에는 19.5%에 그쳤다. 스위스 사회민주당(SP/PS) 역시 1970년대 후반 이후 꾸준한 하락세를 보이며 2015년에는 13.1%의 득표율에 머물렀다. 자유민주당(FDP.Die Liberalen)은 2000년대 초반 15%대의 낮은 득표율을 기록했지만, 2015년에는 20.6%로 다소 회복하는 모습을 보였다. 기타 정당들은 낮은 득표율을 기록했으며, 특히 스위스 녹색당(GPS/PES)은 2015년 1.4%로 지지율이 저조했다. 투표율은 40%대에서 50%대를 오가며 변동을 보였다. [31]6. 2. 주의회 선거
슈비츠 주의회 선거 결과는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정당 지지율을 보여준다.[26] 특히, 스위스 인민당(SVP)의 약진이 두드러지는데, 1976년 이후 꾸준히 의석수를 늘려 2008년에는 압도적인 의석을 차지하게 된다. 반면, 천주교 민중당(CVP)는 꾸준히 의석수가 감소하는 추세를 보인다. 자유민주당(FDP) 또한 1980년대 이후 점진적으로 의석수가 감소하고 있다. 사회당(SP)은 꾸준히 의석을 유지하고 있으나, 다른 정당들에 비해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편이다. 녹색당(GR)은 1988년 이후 등장하여 일정 수준의 의석을 확보하고 있으나, 주요 정당들에 비해 영향력은 미미하다. 각 연도별 주의회 내 정당별 의석 수 변화는 위의 시계열 그래프를 참고하면 더욱 자세히 알 수 있다.[26]7. 경제
슈비츠주는 농업에 크게 의존하며, 지역 특산품인 브라운비 소가 유명하다. 과거 섬유 산업이 중요했으나 현재는 거의 사라졌고, 슈비츠 주도 주변에 일부 업체만 남아 있다. 같은 지역에는 고급 가구 생산업체들이 다수 위치해 있다. 또한, 몇몇 대규모 수력 발전소가 운영되고 있다.
관광업 또한 중요한 산업이며, 특히 순례지로 유명한 아인지델른이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아인지델른은 겨울 스포츠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리기 산악 철도는 전국적으로 인지도가 높다. 주 북부의 프라이엔바흐는 스위스에서 가장 낮은 세금으로 유명하여 부유층을 끌어들이고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슈비츠주의 제품으로는 이바흐에 있는 빅토리녹스에서 생산하는 스위스 아미 나이프가 있다.
2010년 기준 슈비츠주의 실업률은 2.3%였다. 2008년 기준으로 1차 산업 부문에는 4,723명이 고용되었고, 관련 사업체는 약 1,789개였다. 2차 산업 부문에는 18,661명이 고용되었으며, 사업체는 1,937개였다. 3차 산업 부문에는 41,198명이 고용되었고, 사업체는 6,207개였다.[23]
2008년 기준 총 상근 일자리 수는 53,451개였다. 1차 산업 부문 일자리는 2,939개였으며, 이 중 농업 2,795개, 임업 및 목재 생산 130개, 어업 14개였다. 2차 산업 부문 일자리는 17,505개였고, 제조업 10,048개(57.4%), 광업 88개(0.5%), 건설업 6,959개(39.8%)였다. 3차 산업 부문 일자리는 33,007개였으며, 자동차 판매 및 수리 8,708개(26.4%), 상품 이동 및 보관 2,193개(6.6%), 호텔 및 레스토랑 3,376개(10.2%), 정보 산업 1,382개(4.2%), 보험 및 금융 산업 2,294개(7.0%), 기술 전문가 및 과학자 4,126개(12.5%), 교육 1,922개(5.8%), 의료 4,504개(13.6%)였다.[32]
근로 인구의 15.9%는 대중교통을, 56%는 자가용을 이용하여 출퇴근했다.[23]
8. 교육
슈비츠주 인구의 약 46,694명(36.3%)이 의무 교육 이상의 고등교육을 이수했고, 13,848명(10.8%)이 대학교 또는 전문대학과 같은 추가적인 고등 교육을 이수했다. [24] 고등 교육을 이수한 13,848명 중 66.3%는 스위스 남성, 19.4%는 스위스 여성, 9.1%는 스위스가 아닌 남성, 5.2%는 스위스가 아닌 여성이었다. [24]
슈비츠주에는 김나지움이자 직업 또는 기술 대학인 칸톤슐레 콜레기움 슈비츠(Kantonsschule Kollegium Schwyz, KKS)가 있다. KKS는 150년 이상 운영되어 왔지만 여러 오래된 학교를 기반으로 한다. 슈비츠의 첫 번째 라틴어 학교는 1627년 성 요셉 임 루(St. Josef im Loo)의 전 카푸친 수도원에 문을 열었다. 이 학교는 1798년 프랑스 침공까지 운영되었다. 1841년 7월 25일, 예수회는 현대 콜레기움 부지에 예수회 대학이 될 건물의 기초석을 놓았다. 학교는 1844년에 문을 열었지만 3년 동안만 예수회의 통제하에 있었다. 1847년, 연방군은 가톨릭 존더분트 전쟁을 진압하기 위해 슈비츠에 진군하여 예수회를 탈출하게 만들었다. 1855년 카푸친 신부 테오도시우스 플로렌티니(Theodosius Florentini)에 의해 재개교되었고, 그 이듬해부터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 학교는 1970년대까지 종교 및 세속 교사 모두를 사용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1972년, 하위 중등 학생들은 프페피콘으로 이전했고, 학교는 상위 중등 칸톤스슐레가 되었다. [33]
9. 출신 인물
Category:슈비츠주 출신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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