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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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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슈테판 하임은 독일의 반파시즘 성향 작가로, 1913년 독일에서 태어나 유대인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미국에서 활동하며 나치즘을 비판하고 제2차 세계 대전 중 심리전 임무를 수행했으며, 종전 후 동독으로 이주하여 동독 사회의 문제점을 비판했다. 그는 동독 작가 연맹에서 제명되고 서독에서 작품을 발표하며 동독 시민권 운동을 지지했다. 독일 재통일 후에는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며 동독인 차별에 반대했고, 2001년 이스라엘에서 사망했다. 그의 작품은 개인의 경험과 역사적 사건을 연결하여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며, 《인질들》, 《십자군 전사》, 《6월의 닷새 간》 등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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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하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82년의 슈테판 하임
1982년의 하임
본명헬무트 플리크 (Helmut Flieg)
다른 이름슈테판 하임, 멜히오르 더글러스 (Melchior Douglas), 그레고르 홀름 (Gregor Holm)
출생1913년 4월 10일
출생지켐니츠, 독일 제국
사망2001년 12월 16일
사망지에인 보케크, 이스라엘
국적독일, 미국
직업작가
모교시카고 대학교
활동 기간1938년–2003년
수상
수상 내역하인리히 만 상 (1953년)
동독 국가상 2등급 (1959년)
예루살렘 상 (1993년)

2. 생애

슈테판 하임은 1913년 4월 10일 독일 작센 주 켐니츠에서 유대인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1] 어린 시절부터 반파시즘 성향을 보였으며, 1931년 반군국주의적인 시를 신문에 게재했다가 김나지움에서 퇴학당하고 나치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다.[1] 1933년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 이후 체코슬로바키아로 피신하여 언론인으로 활동했다.[1]

1935년 미국으로 망명하여 시카고 대학교에서 하인리히 하이네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고, 반파시즘 운동에 참여했다.[2]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미군 장교로 참전하여 노르망디 상륙 작전 등에서 활약했고, 종전 후에는 미국에서 작가로 활동했다.[4] 1950년대매카시즘 광풍 속에서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로 감시와 탄압을 받자, 1952년 한국 전쟁에 반대하며 훈장을 반납하고 1953년 동독으로 귀향했다.[6][7]

동독에서 하임은 스탈린주의 잔재와 문화 정책에 실망하며 비판적인 기사와 작품을 발표했다.[18] 1965년에는 1953년 6월 17일 동독 봉기를 다룬 소설을 발표하여 서방 세계에 사건을 알렸다. 1971년 에리히 호네커의 "금기 없음(Keine Tabus)" 연설[13] 이후에도 검열로 인해 작품 활동에 어려움을 겪었으며, 1976년 볼프 비어만 시민권 박탈에 항의하는 공개 서한에 서명하고, 1979년 서독에서 작품을 발표하여 동독 작가 연맹에서 제명되었다. 1980년대에는 동독 시민권 운동을 지지하고 독일 재통일을 주장했으며, 1989년 동베를린 시위에서 연설하는 등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

1989년 11월 4일 시위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통일 후 1994년 독일 연방 의회 하원 의원에 당선되었으나, 기민당 의원들의 냉대와 정치 현실에 환멸을 느껴 1년 만에 사퇴했다.[15] 1997년에는 'red-green alliance'를 지지하는 'Erfurt Declaration'에 서명하며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좌파 성향을 드러냈다. 2001년 하인리히 하이네 회의 후 사해 연안 호텔에서 심장 마비로 사망했다.[16]

2. 1. 젊은 시절

1913년 4월 10일, 독일 작센 주 켐니츠에서 유대인 상인의 가정에서 태어났다.[1] 어린 시절부터 반파시즘 성향을 보였으며, 1931년 반군국주의적인 시 '수출업자(Exportgeschäft)'[10]를 사회민주주의 성향의 신문에 게재했다가 김나지움에서 퇴학당하고 나치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다.[1] 그 후 베를린의 훔볼트 대학교에 진학하여 철학, 독일문학, 신문학을 전공하였다.

1933년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이 일어나자, 하임은 체코슬로바키아로 피신했다. 당시 중부 유럽에서 유일하게 남은 민주주의 국가였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그는 프라거 타크블라트와 Bohemia|보헤미아 (신문)de와 같은 프라하에서 발행된 독일 신문에서 일했으며, 체코 신문에 번역된 기사를 게재하기도 했다.[1] 이 기간 동안 그는 멜키오르 더글러스, 그레고르 홀름, 슈테판 하임 등 여러 필명으로 기사에 서명했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 시작되자, 유대인이었던 그의 가정은 비극을 맞게된다. 하임의 부친을 인질삼아 나치는 하임을 협박하였고, 머지않아 부친은 자살하였다. 뒤이어 그의 일가는 유대인 수용소에서 몰살당했다. 1935년, 하임은 프라하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였다.[1] 1935년에 유대인 학생 조합의 장학금을 받아 미국시카고 대학교에 유학, 1936년하인리히 하이네서사시에 대한 석사 논문을 쓰고 졸업했다.

2. 2. 미국 망명기

미국 망명 초기, 하임은 나치 집권이 곧 몰락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생각을 하였다.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시간이 지날수록 나치의 세력은 점점 더 확고해지고 몰락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1936년, 현실을 깨달은 하임은 시카고 대학교에서 하인리히 하이네에 대한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은 후, 사회주의자로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유럽인들에 비해 미국인들의 나치즘(파시즘)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문학과 언론을 통해 나치즘에 대한 비판을 하며 의식을 일깨우려 노력하였다. 그 활동으로 반파시즘 정신에 기반한 미국인과 독일인의 반파시즘 연합 노선(Volksfront) 형성을 목표로 한 주간지 「독일 민중의 메아리」의 편집장을 맡기도 하였다. 사회주의자로서 시민운동에 참여하며 노동자, 여성, 아동, 소수 민족 등 소외 계층의 인권 향상을 위해 활동하였다.[2]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그는 리치 보이즈(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미군 군사 훈련 기관)에 장교로 입대하였다. 그는 언론 () 심리전에 투입되었고 1944년에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겪은 후 승전국의 장교로서 조국 독일에 입성하였고 이 시기의 경험이 《십자군 전사》의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그는 독일에서 대표적인 미국 점령군의 신문들인 의 편집자로 활동하기도 하였다.[4]

종전 후에 하임은 독일에 남지 않고 미국으로 돌아가 프리랜서 작가 활동을 하였다. 1950년대 초반, 미국에서 매카시즘이 팽배하게 되고 미국의 자본주의 체제 속 모순들을 비판해 온 하임의 소설들과 사회주의자로서의 활동 때문에 감시와 탄압을 받았다. 1952년 하임은 한국 전쟁에 반대하며 훈장을 반납하였고 프라하로 떠났다.[6] 그 다음 해,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분단 후 사회주의 국가의 노선을 밟고 있었던 동독으로 20년 만에 귀향하였다.[7]

2. 3. 동독 시절

1953년, 슈테판 하임은 약 20년 만에 동독으로 돌아왔지만, 스탈린주의의 잔재와 독단적인 문화 정책에 실망했다. 동독에 정착한 후 3년간 일간지 에서 근무하며 동독을 비판하는 기사를 썼고, 이후 프리랜서 작가로 전향했다.[18] 그는 동독의 현실을 비판하는 기사와 작품을 발표하며 정부와 갈등을 겪었다. 1964년 12월 <사회주의권 작가들의 국제 콜로키움>에서 동독 사회의 위선과 숨김 문화, 사적 언어와 공적 언어가 다른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두려움 없는 토론, 금기 없는 토론, 당연한 것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인정되는 환경을 해결책으로 제시했다.

이러한 성향으로 인해 동독 정부의 미움을 받아 그의 소설 대부분은 발간되지 못했다. 1965년에는 1953년에 발생한 노동자들과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를 묘사한 《6월의 닷새 간》을 발표했고, 이 책은 1974년에 서독에서 출판되어 서방진영에 사건을 널리 알렸다. 1953년 6월 17일 동독 봉기에 관한 책인 ''6월의 5일''의 출판이 거부되면서 동독 당국과의 갈등은 더욱 심해졌다. 에리히 호네커가 SED 당 회의에서 하임을 공격한 1965년 이후 긴장이 고조되었다.

1971년 5월에 호네커 신정권이 탄생한 후, 그는 연설 가운데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가진 경직된 독단적인 문학관을 완화할 것을 암시했다. SED 중앙위원회의 고위 간부들을 앞에 둔 이 스피치는, "금기 없음(Keine Tabus)"이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알려져 있다.[13]

1976년 11월 Wolf Biermannde의 시민권 박탈에 대한 공개 서한에 서명하고, 1979년 동독 당국의 검열을 거부한 채 서독에서 《콜린》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동독 작가 연맹에서 제명되었다. 1980년대에는 동독의 시민권 운동을 지지하며 1989년 가을 동베를린 시위에 여러 연설을 했다. 1982년부터 독일 재통일을 지지했으며, 1989년에는 동독의 민주화 운동을 지지하며 베를린 장벽 붕괴 직전의 시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89년 11월 4일 시위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독일 재통일 후, 하임은 1989년 11월에 다시 동독 작가 연맹에 가입했고, 1990년에는 법적인 복권(명예 회복)도 이루었다.

2. 4. 통일 이후

통일 이후 하임은 동독인들에 대한 독일 연방의 차별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다. 1994년 독일 연방 의회 하원 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무소속이었지만 사회주의자들과 뜻을 함께 하였고, 민사당의 지지를 받았다. 당선자 중 최고령자에게 개원 연설 자격을 주는 의회 관례에 따라 하임은 개원 연설을 하였는데, 당시 집권당이었던 기민당 의원들은 연설이 끝난 뒤 박수를 치지 않았다.[15] 이는 동독의 대표적인 반체제 작가였던 하임이 동독 비밀경찰인 슈타지의 첩자라는 의심을 하였기 때문이다.

의회에 무시당하며 현실 정치에 환멸을 느끼던 그는 국회의원들의 교제비를 늘리는 헌법 개정에 반대하며 당선 1년만인 1995년 의원직을 사퇴한다. 1997년 'red-green alliance'를 찬성하는 선언인 'Erfurt Declaration'에 서명하였는데, 이 동맹은 자본주의가 노동 계급에 끼치는 영향에 주목하는 사회적, 민주적 성향의 'red'와 환경친화적 성향의 'green' 정치 세력들의 연합을 의미하며 자본주의에 반하는 좌파 성향을 띈다.

1993년 사회 속 인간의 자유를 주제로 다루는 작가에게 수여하는 'the Jerusalem Prize'를 수상하였고, 2000년 12월 8일에는 국제 핵무기 반대기구인 IPPNW에서 평화훈장을 수여했다. 2001년 12월 16일, 하인리히 하이네 회의를 마치고 사해 연안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다 심장 마비로 작고하였다.[16]

3. 작가 활동

슈테판 하임은 초기부터 나치에 저항하는 작품을 썼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경험과 동독 이주 후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작품을 발표했다. 그의 작품은 개인의 경험과 역사적 사건을 결합하여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특징이다.

《'''인질들'''》(Hostages, 1942)은 그의 첫 소설로, 가족이 겪은 박해와 고통을 바탕으로 체코에서의 반 나치 지하운동을 묘사했다.[19] 《'''십자군 전사'''》(The Crusaders, 1948)는 전쟁 체험을 저널리스트적 시각으로 담아낸 역작으로 평가받았다.

동독으로 돌아온 후, 하임은 동베를린 노동자 봉기를 목격하고, 이를 소설화한 《'''6월의 닷새 간'''》(5 Tage im Juni, 1965년)을 발표했으나 동독에서는 인쇄되지 못하고 1974년에 서독에서 출간되었다.[21] 그는 동독 당국의 검열을 거부하고 서독에서 《'''콜린'''》(Collin, 1979년)을 발표하여 동독 작가 동맹에서 추방되기도 했다.

하임은 표현의 자유를 위해 검열을 피하는 방법으로 《라살( Lassalle, 1969),《'''다윗 왕에 관한 보고'''》(Der König David. Bericht, 1972),《'''유랑의 유대인'''》(Ahasver, 1981) 등의 소설에서처럼 현실을 역사와 성서의 소재 속으로 이식하는 수법을 쓰기도 했다. 동독 붕괴 이후, 하임은 레닌과 트로츠키의 동료들을 다룬 《'''라덱'''》(Radek, 1995)이라는 소설에서 "혁명의 잘못된 탄생"에 대해 회고했다.

3. 1. 주요 작품

제목영어 제목출판 연도비고
인질들Hostages1942첫 작품, 체코에서의 반 나치 지하운동 묘사[19]
십자군 전사The Crusaders1948전쟁 체험을 담은 역작, 서독에서는 《고통의 월계관》으로 출간
식인종들Die Kannibalen1953미국 군수산업체의 속성을 비판한 단편[19]
렘 킴블Lem Kimble1953전쟁의 맹목성과 소외 계층의 공동체 의식을 강조한 단편[20]
6월의 닷새 간5 Tage im Juni19651953년 동베를린 노동자 봉기를 다룬 소설, 서독에서 1974년 출판[21]
콜린Collin1979동독의 과거와 정치적 과오를 폭로하는 회고록 형식의 소설[22]
라살레Lassalle1969검열을 피해 현실을 역사적 소재로 이식[23]
다윗 왕에 관한 보고Der König David. Bericht1972검열을 피해 현실을 성서의 소재로 이식[23]
유랑의 유대인Ahasver1981검열을 피해 현실을 성서의 소재로 이식[23]
라덱Radek1995레닌과 트로츠키의 동료들을 다룬 소설, "혁명의 잘못된 탄생" 회고[23]
불만의 겨울Der Winter unsers Missvergnügens1996[23]
파르크 프리터Pargfrider1998자전적 소설[23]
나치, 미국에서Nazis in the U.S.A.1938
미소 짓는 평화에 관하여Of Smiling Peace1944
이성의 눈The Eyes of Reason1951
골즈보로Goldsborough1953
식인종과 다른 이야기들The Cannibals and Other Stories1958
소련 과학 방문기A visit to Soviet science1959
우주 시대The Cosmic Age1959
그림자와 빛Shadows and Lights1963
렌츠의 보고서The Lenz Papers19641848년 독일 혁명, 바덴 혁명 관련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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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린Collin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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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 위에 지어진1990단편 소설
스탈린, 방을 떠나다1990정치 저작
간섭1990
펠츠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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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은 항상 떠나고, 다른 지혜들1997
항상 남자들이 잘못했다2002
자신의 일에 대한 솔직한 말2003


3. 2. 문학적 특징

슈테판 하임의 작품은 개인적인 경험과 역사적 사건을 긴밀하게 연결하여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의 초기 작품인 《인질들》(1942)은 자신의 가족이 겪은 박해와 고통을 바탕으로 체코에서의 반 나치 지하운동을 묘사했다.[19] 《십자군 전사》(1948)는 전쟁 체험을 저널리스트적 시각으로 담아낸 작품으로 호평을 받았다.

하임은 전쟁, 불평등, 소외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며,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옹호했다. 단편 《식인종들》(1953)에서는 한국 전쟁을 배경으로 전쟁의 비참함과 미국 군수산업체의 속성을 비판했다.[19] 또 다른 단편 《렘 킴블》(1953)에서는 전쟁의 맹목성과 소외 계층의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며, 인종차별을 당하는 흑인이 전쟁터에서 비극적으로 처형당한 한국인에게 연민을 느끼는 장면을 묘사했다.[20]

동독으로 이주한 후, 하임은 사회주의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활동했지만, 동베를린 노동자 봉기를 겪으며 혼란에 빠졌다. 이 사건을 소설화한 《6월의 닷새 간》(1974)은 서독에서 출간되었다.[21] 동독 당국의 검열을 거부하고 서독에서 발표한 《콜린》(1979)은 스탈린 시대 동독의 정치적 과오를 폭로하고, 관료주의에 맞서 진실을 쓰려는 예술가의 고뇌를 담아냈다.[22]

하임은 검열을 피하기 위해 역사와 성서를 소재로 현실을 비판하는 방식을 사용하기도 했다. 《다윗 왕에 관한 보고》(1972), 《유랑의 유대인》(1981) 등이 대표적이다. 동독 붕괴 이후에는 《라덱》(1995)을 통해 "혁명의 잘못된 탄생"을 회고했다.[23]

하임은 역사 소설, 르포르타주, 자전적 소설 등 다양한 장르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냈다. 그는 표현의 자유를 위해 끊임없이 당국과 투쟁했으며, 여든이 넘는 나이에도 《파르크 프리터》(1998) 등을 발표하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쳤다.[23]

4. 정치 활동

슈테판 하임은 1931년 반군국주의적인 시 '수출업자(Exportgeschäft)'[10]를 써서 사회민주주의계 신문 에 게재했다. 하지만 나치스의 압력으로 김나지움에서 추방당했다.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 이후에는 체코슬로바키아로 피신했다가, 1935년에는 미국 시카고 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1980년대에는 동독의 시민권 운동을 지지하며 1989년 가을 동베를린 시위에 여러 연설을 했다.

통일 이후 하임은 동독인들에 대한 독일 연방의 차별에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15] 1994년 독일 연방의회 하원 의원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민주사회당의 지지를 받아 당선되었다. 당선자 중 최고령 의원으로서 개원 연설을 했으나, 당시 집권당이었던 기민당 의원들은 하임이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의 첩자라는 의심 때문에 연설이 끝난 뒤 박수를 치지 않았다.[16]

1995년 국회의원 교제비를 늘리는 헌법 개정에 반대하며 의원직을 사퇴했고,[17] 1997년에는 'red-green alliance'를 찬성하는 선언인 'Erfurt Declaration'에 서명했다.

4. 1. 동독 시절

동독 건립 후 5년째인 1953년, 약 20년 만에 귀향한 하임의 기대와 달리 동독 정권은 스탈린주의 여파가 남아있었고 독단적인 문화 정책을 펴고 있었다. 그로 인해 동독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했던 지식인들은 자유로운 창작을 하는 데 많은 압력을 받았다.[18] 그는 동독에 정착한 후 3년간 일간지인 에서 근무하였는데 주로 동독에 대한 비판적 기사를 실었고 이후 프리랜서 작가로 전향하였다. 그는 동독의 1세대 반나치즘 작가였으며 동독 사회 전반부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창작활동 외에 동독 뿐 아니라 서독이나 미국의 <뉴욕 타임스New York Times영어>와 같은 언론에 인터뷰를 하며 동독 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드러내는 데 힘썼다. 그는 독일인들에게 내면화되어있는 파시즘, 과거 독일의 나치즘 청산 문제, 자본주의 비판, 반핵 평화 운동 등 정치, 사회를 비롯한 여러 분야들의 주제들을 망라하였다. 일례로 그는 1964년 12월 <사회주의권 작가들의 국제 콜로키움>에서 동독의 위선과 숨김 문화, 사적 언어와 공적 언어가 다른 동독 사회의 내부 문제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며 '두려움 없는 토론, 금기 없는 토론, 당연한 것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인정되는 환경만이 그 해결책이라 주장하였다.

이러한 성향 탓에 동독 정부의 미움을 산 그의 소설 대부분은 발간되지 못하였고 그는 자신의 소설이 동독 뿐 아니라 서독에서도 발간되길 원하였다.[18] 1953년 6월 17일 봉기를 다룬 책인 ''6월의 5일''은 1965년에 서독에서 출판되며 서방진영에 사건을 널리 알리게 된다.[http://www.redian.org/archive/13626] 1976년 11월 볼프 비어만Wolf Biermannde의 시민권 박탈에 대한 공개 서한에 서명했고, 1979년 동독 당국의 검열을 거부한 채 서독에서 《콜린》을 발표한 일을 빌미로 결국 동독작가연맹에서 제명된다.

1980년대에는 동독의 시민권 운동을 지지하며 1989년 가을 동베를린 시위에 여러 연설을 했다.

독일 재통일 후, 하임은 1989년 11월에 다시 동독 작가 연맹에 가입했고, 1990년에는 법적인 복권(명예 회복)도 이루었다.

4. 2. 통일 이후

통일 이후 하임은 동독인들에 대한 독일 연방의 차별에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15] 1994년 독일 연방 의회 하원 의원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는데, 민주사회당의 지지를 받았다. 당선자 중 최고령 의원으로서 개원 연설을 했으나, 당시 집권당이었던 기민당 의원들은 하임이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의 첩자라는 의심 때문에 연설이 끝난 뒤 박수를 치지 않았다.[16]

국회의원 교제비를 늘리는 헌법 개정에 반대하며 1995년 의원직을 사퇴했다.[17] 1997년에는 'red-green alliance'를 찬성하는 선언인 'Erfurt Declaration'에 서명했는데, 이 동맹은 자본주의가 노동 계급에 끼치는 영향에 주목하는 사회적, 민주적 성향의 'red'와 환경친화적 성향의 'green' 정치 세력들의 연합을 의미하며 자본주의에 반하는 좌파적 성향을 띤다.

5. 한국과의 관계

슈테판 하임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군 장교로 한국 전쟁에 참전해 심리전 임무를 수행했다.[4] 단편 《렘 킴블》은 한국 전쟁을 배경으로 한다. 1952년, 하임은 한국 전쟁에 반대하며 모든 미국 군사 표창을 반납했다.[7]

5. 1. 한국 전쟁 참전

슈테판 하임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군 장교로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심리전 임무를 수행했다.[4] 그는 독일 국방군 군인들에게 영향을 주기 위해 전단, 라디오, 확성기를 통해 배포될 텍스트를 작성하는 임무를 맡았다.[4]

하임의 단편 《렘 킴블》은 한국 전쟁을 배경으로, 전쟁의 맹목성과 소외된 흑인 병사의 연민을 그리고 있다. 1952년, 하임은 한국 전쟁에 반대하며 모든 미국 군사 표창을 반납했다.[7]

5. 2. 한국에 대한 인식

슈테판 하임은 한국 전쟁을 통해 전쟁의 비극성과 분단의 아픔을 직접 경험했다. 1952년, 그는 한국 전쟁에 반대하며 미국 군사 훈장을 반납하고 프라하로 떠났으며,[7] 이듬해 동독으로 이주했다.[7] 그의 작품에는 한국 전쟁의 경험이 반영되어 있으며, 전쟁으로 인한 인간성 상실과 고통을 보여준다. 특히, 단편 《식인종》에서는 한국 전쟁으로 인한 미국의 군수산업체 특수를 비판적으로 그리고 있다.

6. 수상 내역

참조

[1] 서적 Stefan Heym: the perpetual dissident
[2] 웹사이트 1937 - Zefys https://zefys.staats[...]
[3] 서적 The Democratic Dream: Stefan Heym in America
[4] 서적 Reden an den Feind Bertelsmann
[5] 문서 Nachruf
[6] 뉴스 The New York Times 2001-12-18
[7] 웹사이트 Stefan Heym https://richardzipse[...] 2020-03-12
[8] 서적 The Crusaders Little, Brown and Company 1948
[9] 웹사이트 Danny Yee's Book Reviews http://dannyreviews.[...] 2010-09-20
[10] 웹사이트 Virtuelles Zentrum der verfolgten Künste zur Förderung demokratischer Kultur http://www.exilarchi[...]
[11] 문서 Brief von George an Jacob vom 5. Januar 1949; DLA Marbach a.N.
[12] 서적 Nachruf Fischer Verlag Frankfurt am Main
[13] 간행물 '"Die Rache des kleinen Mannes". Zur kulturpolitischen Situation in der DDR im ersten Halbjahr 1979' Deutschland-Archiv
[14] 웹사이트 Als habe einer die Fenster aufgestoßen: Rede von Stefan Heym, Schriftsteller, "Nestor der Bewegung" http://www.die-linke[...]
[15] 웹사이트 Eröffnungsrede zum 13. Deutschen Bundestag http://dipbt.bundest[...]
[16] 뉴스 GERMAN NEWS Deutsche Ausgabe So, 6. November 1994 http://www.germnews.[...]
[17] 웹사이트 World Socialist Web Site http://www.wsws.org/[...]
[18] 서적 Stefan Heym: the perpetual dissident Cambridge
[19] 서적 독일문학 속의 한국상과 한국문학 속의 독일상 부산대학교 출판부
[20] 서적 독일문학 속의 한국상과 한국문학 속의 독일상 부산대학교 출판부
[21] 서적 독일문학의 깊이와 아름다움 민음사
[22] 서적 독일문학의 깊이와 아름다움 민음사
[23] 서적 교과서도 위인전도 알려 주지 않는 세계의 사회주의자들 펜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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