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이든 비외르든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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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베이든 비외르든손은 아이슬란드의 법조인이자 정치인으로, 1941년부터 1943년까지 아이슬란드 섭정을 역임했으며, 1944년 아이슬란드 공화국 출범 이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코펜하겐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변호사 및 공공 검사로 활동했으며, 레이캬비크 시의회 의원과 알싱기 의원을 지냈다. 또한 덴마크 주재 공사를 역임했고, 프리메이슨으로 활동하며 아이슬란드 프리메이슨 기사단의 그랜드마스터를 지냈다. 대통령 재임 기간 중 미국 군대의 아이슬란드 주둔과 나토 가입, 덴마크와의 관계 등 외교적 문제에 관여했다. 스베이든은 1952년 임기 중 사망했으며, 그의 장남은 나치 독일의 무장 친위대에서 복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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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이든 비외르든손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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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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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이름 | Sveinn Björnsson (스베인 비외른손) |
국적 | 아이슬란드 |
출생 | 1881년 2월 27일, 덴마크, 코펜하겐 |
사망 | 1952년 1월 25일,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 |
배우자 | 조지아 비외른손 |
자녀 | 6명 (장남 비외른 스베인손 비외른손 포함) |
모교 | 코펜하겐 대학교 |
직업 | 변호사 |
정치 경력 | |
소속 정당 | 없음 |
이전 소속 정당 | 독립당 (1912–1915) 자치당 (제휴 비당원, 1918–1920) |
아이슬란드 섭정 | |
임기 시작 | 1941년 5월 15일 |
임기 종료 | 1944년 6월 17일 |
군주 | 크리스티안 10세 |
이전 직책 | 직책 신설 |
이후 직책 | 직책 폐지 (자신이 아이슬란드 대통령으로 취임) |
아이슬란드 대통령 | |
순서 | 초대 |
총리 | 비외른 토르다르손 올라퓌르 토르스 스테판 요한 스테판손 스테인그림 스테인토르손 |
임기 시작 | 1944년 6월 17일 |
임기 종료 | 1952년 1월 25일 |
이전 대통령 | 직책 신설. 크리스티안 10세 (국왕으로서) 자신 (섭정으로서) |
이후 대통령 | 아우스게이르 아우스게이르손 |
2. 초기 생애 및 교육
스베이든은 1907년 "상급 법원"에서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고, 1907년부터 1920년까지, 그리고 1924년부터 1926년까지 레이캬비크에서 공공 검사로 재직했다. 1919년 9월 29일부터 같은 해 12월 31일까지는 국가 상급 법원에서 검사로 근무했다.[1] 1920년에는 고등 법원에서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1]
그는 프리메이슨이었으며, 레이캬비크의 에다 프리메이슨 로지의 창립자 중 한 명이었다.[2] 아이슬란드 프리메이슨 기사단의 그랜드마스터를 역임했다.[3]
2. 1. 출생 및 가정 환경
스베이든 비외르든손은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비외른 요운손(편집자이자 후일 장관)과 엘리사베트 스베인스도티르의 아들로 태어났다. 1900년 레이캬비크 라틴 학교(Menntaskólinn í Reykjavík)를 졸업하고 1907년 코펜하겐 대학교에서 법학 학위를 받았다.[1] 1907년 "상급 법원"에서, 1920년에는 고등 법원에서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으며, 1907년부터 1920년까지, 그리고 1924년부터 1926년까지 레이캬비크에서 공공 검사로 재직했다. 1919년 9월 29일부터 같은 해 12월 31일까지는 국가 상급 법원에서 검사로 근무했다.[1]프리메이슨이었으며, 레이캬비크의 에다 프리메이슨 로지의 창립자 중 한 명이었다.[2] 아이슬란드 프리메이슨 기사단의 그랜드마스터를 역임했다.[3]
2. 2. 학업
스베이든은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비외른 요운손(편집자이자 후일 장관)과 엘리사베트 스베인스도티르의 아들로 태어났다. 1900년 레이캬비크 라틴 학교(Menntaskólinn í Reykjavík)를 졸업하고 1907년 코펜하겐 대학교에서 법학 학위를 받았다.[1] 같은 해 "상급 법원"에서, 1920년에는 고등 법원에서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1]3. 법조 경력
스베이든은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비외른 요운손(편집자이자 후일 장관)과 엘리사베트 스베인스도티르의 아들로 태어났다. 1907년 코펜하겐 대학교에서 법학 학위를 취득한 후 변호사 및 검사로 활동했다.[1] 프리메이슨으로도 활동했다.[2][3]
3. 1. 변호사 활동
스베이든은 1900년 레이캬비크 라틴 학교(Menntaskólinn í Reykjavík)를 졸업하고 1907년 코펜하겐 대학교에서 법학 학위를 받았다. 1907년 "상급 법원"에서, 1920년에는 고등 법원에서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1907년부터 1920년까지, 그리고 1924년부터 1926년까지 레이캬비크에서 공공 검사로 재직했으며, 1919년 9월 29일부터 같은 해 12월 31일까지는 국가 상급 법원에서 검사로 근무했다.[1]그는 프리메이슨으로, 레이캬비크의 에다 프리메이슨 로지의 창립자 중 한 명이었다.[2] 아이슬란드 프리메이슨 기사단의 그랜드마스터를 역임했다.[3]
3. 2. 검사 경력
스베이든은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편집자이자 훗날 장관이 되는 비외른 요운손과 엘리사베트 스베인스도티르의 아들로 태어났다. 1900년 레이캬비크 라틴 학교(Menntaskólinn í Reykjavík)를 졸업하고 1907년 코펜하겐 대학교에서 법학 학위를 받았다. 1907년 "상급 법원"에서, 1920년에는 고등 법원에서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으며, 1907년부터 1920년까지, 그리고 1924년부터 1926년까지 레이캬비크에서 공공 검사로 재직했다. 1919년 9월 29일부터 같은 해 12월 31일까지는 국가 상급 법원에서 검사로 근무했다.[1]3. 3. 프리메이슨 활동
스베이든은 프리메이슨이었으며, 레이캬비크의 에다 프리메이슨 로지의 창립자 중 한 명이었다.[2] 그는 아이슬란드 프리메이슨 기사단의 그랜드마스터를 역임했다.[3]4. 정치 및 외교 경력
스베이든 비외르든손은 레이캬비크 시의회 의원과 의장, 알싱 의원을 거쳐 덴마크 주재 아이슬란드 공화국 공사를 역임했다.[1] 그는 1918년 아이슬란드가 덴마크로부터 독립하는데 기여하였다.
4. 1. 레이캬비크 시의회 의원
스베이든은 1912년부터 1920년까지 레이캬비크 시의회 의원이었으며, 1918년부터 1920년까지는 의장을 역임했다.[1]4. 2. 알싱 의원
스베이든은 1914년부터 1915년까지, 그리고 1919년부터 1920년까지 레이캬비크 선거구에서 알싱 의원으로 선출되었다.[1]4. 3. 덴마크 주재 공사
1918년 아이슬란드가 덴마크로부터 독립한 후, 1920년부터 1924년까지, 1926년부터 1940년까지 덴마크 주재 공사를 역임했다.[1]5. 섭정 및 대통령
스베이든은 1944년 아이슬란드 공화국이 출범하면서 알싱(아이슬란드 의회)에 의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1945년과 1949년에 반대 없이 재선되었다.[5]
1949년 의회 선거 이후, 정당들이 4개월 안에 정부 구성을 합의하지 못하면 자신이 직접 정부를 구성하겠다고 말하며, 대통령에게 주어진 공식적인 권한 외의 새로운 선례를 만들었다.[6] 그는 이것이 아이슬란드 헌법에 따른 권한이라고 주장했지만, 역사가(이자 훗날 대통령이 된) 구드니 토르라시우스 요한네손은 이러한 권한이 헌법에 명시되어 있지 않다고 반박했다.[6]
스베이든은 1952년 1월 레이캬비크에서 세 번째 임기가 끝나기 1년여 전에 사망했다. 그는 2024년 현재까지 임기 중에 사망한 유일한 아이슬란드 대통령이다.[9]
5. 1. 아이슬란드 섭정
아이슬란드는 1918년 주권 국가가 되었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될 때까지 외교는 덴마크가 담당했다. 그러나 1940년 4월 독일의 덴마크 점령으로 인해 덴마크에 거주하던 아이슬란드 국왕 크리스티안 10세는 아이슬란드에 대한 헌법적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따라 스베이든은 1941년부터 1943년까지 세 차례 아이슬란드의 섭정으로 선출되어 왕이 가진 아이슬란드 내 모든 특권을 행사했다. 1941년 7월, 스베이든 정부의 초청으로 미국 군대가 아이슬란드를 점령했고, 전쟁 후에도 소규모로 주둔했다. 미군의 지속적인 주둔은 아이슬란드 전후 외교 정책의 주요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5. 2. 미군 주둔과 외교 정책
1940년 4월 독일의 덴마크 점령으로 덴마크에 거주하던 아이슬란드 국왕 크리스티안 10세는 아이슬란드에 대한 헌법적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고, 이에 따라 스베이든은 1941년에서 1943년 사이에 세 번 아이슬란드의 섭정으로 선출되어 왕이 가진 아이슬란드 내 모든 특권을 행사했다.[4] 1941년 7월, 스베이든 정부의 초청으로 미국의 군대가 아이슬란드를 점령했고, 전쟁 후에도 소규모로 주둔했다. 이들의 지속적인 주둔은 아이슬란드 전후 외교 정책의 주요 논란을 불러일으켰다.[4]1949년 아이슬란드 반나토 폭동 속에서 국내 논란과 폭동 끝에 아이슬란드는 1949년 3월 30일 공식적으로 나토 회원국이 되었다. 1951년 5월 5일, 미국과 방위 협정을 체결했다. 미군은 아이슬란드 방위군으로 아이슬란드에 돌아와 냉전 기간 동안 주둔했다. 미국은 2006년 9월 30일에 마지막 병력을 철수했다.[9]
5. 3. 아이슬란드 공화국 초대 대통령
스베이든은 1944년 아이슬란드 공화국이 출범하면서 알싱에 의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아이슬란드 국민이 1945년에 처음으로 대통령을 직접 선출해야 했기 때문에 그의 첫 임기는 1년밖에 되지 않았다. 공화국 창설 직후 스베이든은 국가 원수로서 올바른 관습을 따르기 위해 아이슬란드 대사관에 외교 의례에 관한 모든 책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4] 외교관들은 스베이든이 그들과의 소통에서 외교 의례를 얼마나 엄격하게 따르는지에 대해 자주 언급했으며, 아마도 지나치게 엄격했을 것이다.[4]
스베이든은 1945년과 1949년에 반대 없이 대통령으로 재선되었다.[5] 1949년 의회 선거 이후, 그는 정당들이 4개월 안에 정부 구성을 합의하지 못하면 자신이 정부를 구성하겠다고 말하며 대통령에게 주어진 공식적인 권한 외의 새로운 선례를 만들었다.[6] 그는 이것이 아이슬란드 헌법에 따른 권한이라고 주장했지만, 역사가(이자 나중에 대통령이 된) 구드니 토르라시우스 요한네손은 이러한 권한이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는 것을 거부했다.[6]
아이슬란드가 공화국이 된 후, 스베이든은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10세와 좋지 않은 관계를 유지했다. 국왕은 아이슬란드인들이 1940년에 나치 점령이 끝나면 아이슬란드와 덴마크의 관계가 정상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잘못된 약속을 했다고 주장했는데, 스베이든은 이를 부인했다.[7] 이러한 이유로 스베이든은 공화국 창설 후 덴마크를 공식 방문하지 않았다. 크리스티안 10세는 1947년에 사망했다. 그러나 건강이 좋지 않아 스베이든은 대통령 임기 마지막 부분에 덴마크를 방문할 수 없었다.[8]
아이슬란드는 1949년 아이슬란드 반나토 폭동 속에서 국내 논란과 폭동 끝에 1949년 3월 30일 공식적으로 나토 회원국이 되었다. 1951년 5월 5일, 미국과 방위 협정을 체결했다. 미군은 아이슬란드 방위군으로 아이슬란드로 돌아와 냉전 기간 동안 주둔했다. 미국은 2006년 9월 30일에 마지막 병력을 철수했다. 스베이든은 1952년 1월 레이캬비크에서 사망했는데, 그의 세 번째 임기가 만료되기 1년 이상 전이었다. 그는 2024년 현재까지 임기 중 사망한 유일한 아이슬란드 대통령이다. 스베이든은 1949년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다.[9]
5. 4. 대통령 권한 행사와 논란
1918년 아이슬란드는 주권 국가가 되었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될 때까지 외교는 덴마크가 담당했다. 그러나 1940년 4월 독일의 덴마크 점령으로 덴마크에 거주하던 아이슬란드 국왕 크리스티안 10세는 아이슬란드에 대한 헌법적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스베이든은 1941년부터 1943년까지 세 번 아이슬란드의 섭정으로 선출되어 왕이 가진 아이슬란드 내 모든 특권을 행사했다.[4] 1941년 7월, 스베이든 정부의 초청으로 미국의 군대가 아이슬란드를 점령했고, 전쟁 후에도 소규모로 주둔했다. 이들의 지속적인 주둔은 아이슬란드 전후 외교 정책의 주요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스베이든은 1944년 아이슬란드 공화국 출범과 함께 알싱에 의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첫 임기는 1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는 아이슬란드 국민이 1945년에 처음으로 대통령을 직접 선출해야 했기 때문이다. 공화국 창설 직후 스베이든은 국가 원수로서 올바른 관습을 따르기 위해 아이슬란드 대사관에 외교 의례에 관한 모든 책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4] 외교관들은 스베이든이 그들과의 소통에서 외교 의례를 (아마도 지나치게) 엄격하게 따랐다고 언급했다.[4]
스베이든은 1945년과 1949년에 반대 없이 대통령으로 재선되었다.[5] 1949년 의회 선거 이후, 그는 정당들이 4개월 안에 정부 구성을 합의하지 못하면 자신이 정부를 구성하겠다고 말하며 대통령에게 주어진 공식적인 권한 외의 새로운 선례를 만들었다.[6] 그는 이것이 아이슬란드 헌법에 따른 권한이라고 주장했지만, 역사가(이자 나중에 대통령이 된) 구드니 토르라시우스 요한네손은 이러한 권한이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는 것을 거부했다.[6]
아이슬란드가 공화국이 된 후 스베이든은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10세와 좋지 않은 관계를 유지했다. 국왕은 아이슬란드인들이 1940년에 나치 점령이 끝나면 아이슬란드와 덴마크의 관계가 정상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잘못된 약속을 했다고 주장했는데, 스베이든은 이를 부인했다.[7] 이러한 이유로 스베이든은 공화국 창설 후 덴마크를 공식 방문하지 않았다. 크리스티안 10세는 1947년에 사망했다. 그러나 건강이 좋지 않아 스베이든은 대통령 임기 마지막 부분에 덴마크를 방문할 수 없었다.[8]
아이슬란드는 1949년 아이슬란드 반나토 폭동 속에서 국내 논란과 폭동 끝에 1949년 3월 30일 공식적으로 나토 회원국이 되었다. 1951년 5월 5일, 미국과 방위 협정을 체결했다. 미군은 아이슬란드 방위군으로 아이슬란드로 돌아와 냉전 기간 동안 주둔했다. 미국은 2006년 9월 30일에 마지막 병력을 철수했다. 스베이든은 1952년 1월 레이캬비크에서 사망했는데, 그의 세 번째 임기가 만료되기 1년 이상 전이었다. 그는 2024년 현재까지 임기 중 사망한 유일한 아이슬란드 대통령이다. 스베이든은 1949년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다.[9]
5. 5. 덴마크와의 관계
아이슬란드는 1918년 주권 국가가 되었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될 때까지 외교는 덴마크가 담당했다. 그러나 1940년 4월 독일의 덴마크 점령으로 인해 덴마크에 거주하던 아이슬란드 국왕 크리스티안 10세는 아이슬란드에 대한 헌법적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따라 스베이든은 1941년에서 1943년 사이에 세 번 아이슬란드의 섭정으로 선출되어 왕이 가진 아이슬란드 내 모든 특권을 행사했다.[4]
1941년 7월, 스베이든 정부의 초청으로 미국의 군대가 아이슬란드를 점령했고, 전쟁 후에도 소규모로 주둔했다. 그들의 지속적인 주둔은 아이슬란드 전후 외교 정책의 주요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아이슬란드가 공화국이 된 후 스베이든은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10세와 좋지 않은 관계를 유지했다. 국왕은 아이슬란드인들이 1940년에 나치 점령이 끝나면 아이슬란드와 덴마크의 관계가 정상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잘못된 약속을 했다고 주장했는데, 스베이든은 이를 부인했다.[7] 이러한 이유로 스베이든은 공화국 창설 후 덴마크를 공식 방문하지 않았다. 크리스티안 10세는 1947년에 사망했다. 그러나 건강이 좋지 않아 스베이든은 대통령 임기 마지막 부분에 덴마크를 방문할 수 없었다.[8]
5. 6. 나토 가입
1949년 아이슬란드 반나토 폭동 속에서 국내 논란과 폭동 끝에 아이슬란드는 1949년 3월 30일 나토 회원국이 되었다.[9] 1951년 5월 5일, 미국과 방위 협정을 체결하여 냉전 기간 동안 아이슬란드 방위군으로 미군이 주둔했다. 미국은 2006년 9월 30일에 마지막 병력을 철수했다.[9]5. 7. 미국과의 방위 협정
1941년 7월, 스베이든 정부의 초청으로 미국의 군대가 아이슬란드를 점령했고, 전쟁 후에도 소규모로 주둔했다. 이들의 지속적인 주둔은 아이슬란드 전후 외교 정책의 주요 논란을 불러일으켰다.[4]1949년 아이슬란드 반나토 폭동 속에서 국내 논란과 폭동 끝에 아이슬란드는 1949년 3월 30일 공식적으로 나토 회원국이 되었고, 1951년 5월 5일 미국과 방위 협정을 체결했다. 미군은 아이슬란드 방위군으로 아이슬란드에 다시 주둔하여 냉전 기간 동안 머물렀다. 미국은 2006년 9월 30일에 마지막 병력을 철수했다.[9]
5. 8. 사망
스베이든 비외르든손은 1952년 1월 레이캬비크에서 세 번째 임기가 만료되기 1년 이상 전에 사망했다. 2024년 현재까지 임기 중 사망한 유일한 아이슬란드 대통령이다. 스베이든은 1949년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다.[9]6. 경제 활동
스베이든은 1914년 아이슬란드의 주요 해운 회사인 에임스키파펠라그 아이슬란즈(Eimskipafélag Íslands)의 창립 멤버로, 1914년부터 1920년까지, 그리고 1924년부터 1926년까지 회장직을 맡았다. 1916년에는 보험 회사인 브루나보타펠라그 아이슬란즈(Brunabótafélag Íslands)를 창립하여 1920년까지 이사로 재직했다. 1918년에는 쇼바트뤼그잉가펠라그 아이슬란즈(Sjóvátryggingafélag Íslands)(아이슬란드 해상 보험 회사)의 창립 멤버로 참여하여 1918년부터 1920년까지, 그리고 1924년부터 1926년까지 회장을 역임했다. 1924년 12월 10일에는 아이슬란드 적십자를 창립하고 1926년까지 초대 회장을 지냈다.
7. 가족
스베인 비외르든손은 한센 출신의 조르지아 비외르든손(1884년 1월 18일 ~ 1957년 9월 18일)과 1908년 9월 2일에 결혼하여 슬하에 여섯 자녀를 두었다.
7. 1. 후손
스베인 비외르든손은 1908년 9월 2일 한센(Hansen) 출신의 조르지아 비외르든손(Georgia Björnsson, 1884년 1월 18일 출생, 1957년 9월 18일 사망)과 결혼하여 슬하에 여섯 자녀를 두었다. 자녀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비외른 (1909년생)
- 안나 캐서린 아고트 (1911년생)
- 헨리크 (1914년생)
- 스베인 크리스텐 (1916년생)
- 올라프 (1919년생)
- 엘리사베트 (1922년생)

그의 장남인 비외른 스베인손 비외른손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군 무장 친위대에서 복무했다.[10] 종전 후 포로가 되었으나 나치 관련 혐의로 기소되지 않고 1946년에 석방되어 아이슬란드로 귀국했다.
그의 손녀 브린힐두르 게오르기아 비외른손은 할그림르 헬가손의 2011년 역사 소설 Konan við 1000°|천 도의 여인is의 주인공이다. 이 소설은 스베인과 다른 가족 구성원들을 광범위하게 언급한다. 그의 증손자는 슈게이저 록 밴드 싱가포르 슬링의 보컬이자 리드 기타리스트인 헨리크 비외른손이다.[11] 그의 증손녀는 아이슬란드 남자 농구 최고 리그에서 심판을 맡은 최초의 여성 심판인 게오르기아 올가 크리스티안센이다.[12]
참조
[1]
웹사이트
Sveinn Björnsson
https://www.althingi[...]
[2]
서적
"10,000 Famous Freemasons"
Missouri Lodge of Research
1957
[3]
서적
Networks of Financial Power in Iceland: The Labour Movement Paradox
2017
[4]
서적
Fyrstu forsetarnir
[5]
웹사이트
Sveinn Björnsson
https://www.althingi[...]
2020-01-04
[6]
서적
Fyrstu forsetarnir
[7]
서적
Fyrstu forsetarnir
[8]
서적
Fyrstu forsetarnir
[9]
서적
Fyrstu forsetarnir
[10]
Webarchive
Útsendingar Þjóðverja
http://servefir.ruv.[...]
2018-02-01
[11]
뉴스
Our Local Regent
https://issuu.com/rv[...]
2016-06-16
[12]
뉴스
Langömmubarn fyrstu forsetafrúar Íslands endurskrifaði íslenska körfuboltasögu í gær
http://www.visir.is/[...]
2017-10-13
[13]
웹사이트
Sveinn Björnsson (tók sér ættarnafnið Björnsson 1923)
http://www.althingi.[...]
2013-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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