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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투를룽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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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투를룽 시대는 13세기 아이슬란드 자유국 시대의 권력 투쟁 시기이다. 이 시대는 고디(지역 족장)들의 세력 다툼으로 시작되었으며, 스투를룽 가문의 부상과 함께 내전으로 격화되었다. 노르웨이 국왕 호콘 4세가 아이슬란드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 하면서 스노리 스투를루손 등 족장들은 그의 가신이 되었으나, 국왕의 뜻을 완전히 따르지는 않았다. 스투를룽 가문은 외를리크스타디르 전투에서 패배하고, 스노리 스투를루손이 암살당하는 등 몰락의 길을 걸었다. 결국, 내전과 노르웨이의 압력 속에 1264년 구 조약이 체결되면서 아이슬란드 자유국은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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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투를룽 시대
스투를룽 시대
기본 정보
1200년 아이슬란드
1200년 아이슬란드
기간1180년경 ~ 1262년 또는 1264년
이전 시대아이슬란드 자유국
다음 시대아이슬란드 속주 시대
원인아이슬란드 자유국의 정치적 불안정 심화
결과아이슬란드가 노르웨이의 지배를 받게 됨
주요 사건
주요 가문 간의 분쟁스투를룽 가문, 아르네스 가문, 오다 가문, 비르딩 가문 등 유력 가문 간의 권력 투쟁 심화
주요 인물스노리 스투를루손
사에문드 오라프손
시그바트 스투를루손
사회
사회적 특징법률 및 질서 유지의 붕괴
폭력 및 사적 복수의 만연
지역 기반의 권력 구조 강화
문화
문화적 특징사가 문학의 발전
복잡한 가문 간의 관계 및 갈등 반영
아이슬란드 문학의 황금기
정치
정치적 특징중앙 권력의 부재
가문 간의 끊임없는 권력 투쟁
알팅의 기능 약화
기타
관련 서적스투를룽가 사가

2. 배경: 고디(Goðar)와 아이슬란드 자유국

아이슬란드 자유국 시대의 권력은 대부분 goðar(지역 족장)의 손에 있었다. 아이슬란드는 사실상 4분기로 나뉘었다. 각 4분기 내에는 9개의 "고디" 영토("Goðorð")가 있었고, 북부 4분기는 규모가 커서 3개의 영토가 더 있었다. 총 39개의 "Goðorð"가 있었다.

"고디" 족장들은 자신의 영토 내 농부들을 보호하고 추종자들의 권리가 침해될 경우 보상이나 복수를 했다. 그 대가로 농부들은 "고디"에게 지지를 맹세했는데, 이는 Alþingi 의회에서 그에게 찬성표를 던지는 것과 (필요한 경우) 그의 적에 맞서 무기를 드는 것을 모두 포함했다. 그러나 "고디" 족장들의 권력은 영구적이지도, 세습되지도 않았다. 이러한 지위는 존경, 명예, 영향력, 부의 결합으로 얻어졌다. 족장들은 추종자들에게 선물을 주거나 큰 연회를 여는 방식으로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입증해야 했다. 족장이 어떤 면에서든 실패하는 것으로 보이면 추종자들은 단순히 더 자격 있는 다른 "고디"를 선택하여 지지할 수 있었다.

12세기와 13세기의 가장 위대한 족장들은 막대한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고, 덜 중요한 영토를 흡수했다. 국내 권력은 몇몇 가문에게 집중되었다.


  • 하우크달리르, 아르네스핑
  • 오다베르야르, Rangárvellir|랑가르베틀리르is
  • 아스비르닝가르, 스카가피외르두르
  • 바트스피르딩가르, 이사피외르두르
  • 스빈펠링가르, 동부 지역
  • 스투를룽가르, 달라르의 흐밤무르


이 시기에 노르웨이의 호콘 구세는 아이슬란드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했다. 많은 아이슬란드 족장들이 그의 봉신이 되었고 그의 명령을 따라야 했다. 그 대가로 그들은 선물, 추종자, 존경의 지위를 받았다. 결과적으로 가장 위대한 아이슬란드 족장들은 곧 노르웨이 국왕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었다.

3. 스투를룽 시대의 전개

스노리 스투를루손노르웨이호콘 4세의 가신이 된 1220년, 스투를룬가 씨족의 족장이자 아이슬란드 사가 작가로서 스투를룽 시대가 시작되었다.[1] 호콘 4세는 스노리에게 아이슬란드를 노르웨이의 주권 아래 두는 것을 돕도록 요구했다. 스노리는 아이슬란드로 돌아왔고, 곧 국내에서 가장 강력한 족장이 되었지만, 왕의 뜻을 강하게 실행하는 데는 소극적이었다. 한 역사가에 따르면, "우리는 [스노리의] 무활동이 의지의 부족 때문인지, 아니면 그 일이 절망적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인지 알 수 없다"라고 한다.[2]

1235년, 스노리의 조카 스투를라 시그바트손 역시 왕의 가신이 되었다. 스투를라는 더욱 공격적이어서 삼촌 스노리를 노르웨이로 돌려보내고 왕의 요구를 거부하는 족장들과 전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스투를라와 그의 아버지 시그바투르는 외를리크스타디르 전투에서 하우크달리르의 족장 기수르 토르발드손과 아스비르닝가르의 족장 젊은 콜베인에게 패배했다. 외를리크스타디르 전투는 아이슬란드 역사상 가장 큰 무력 충돌이었으며, 50명 이상이 사망했다. 이 승리로 기수르와 콜베인은 아이슬란드에서 가장 강력한 족장이 되었다.

노르웨이 국왕 호콘과 스쿨레 보르손의 삽화, 플라테이아르보크에서


스노리 스투를루손은 쿠데타를 시도한 얼 스쿨리를 지지한 탓에 왕의 신임을 잃고 아이슬란드로 돌아왔다. 노르웨이 왕의 가신이기도 했던 기수르 토르발드손은 스노리를 암살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1241년, 기수르는 많은 부하들을 이끌고 스노리의 집으로 쳐들어가 그를 살해했다. 스노리의 마지막 말은 "''Eigi skal höggva!''"(치지 마라!영어)였다고 전해진다.

1236년, 스노리의 형제인 토르두르 카칼리 시그바트손(별명 ''카칼리''는 "말더듬이"를 의미)이 해외에서 아이슬란드로 돌아왔다. 그의 형제와 아버지가 외를리크스타디르 전투에서 죽었기 때문에 복수하고자 하였다. 그는 뛰어난 전술가이자 지도자였으며, 4년 후 아스비르닝가르의 지배는 토르두르와의 격렬한 전투 끝에 사실상 종말을 고했다. 걸프 해전(1244년, 아이슬란드 역사상 양측 모두 아이슬란드인으로 구성된 유일한 해전)과 호그스네스 전투(1246년, 아이슬란드 역사상 약 110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가장 유혈이 낭자한 전투)가 이 기간에 일어났다.

토르두르 카칼리와 기수르 토르발드손은 서로 싸우지 않았다. 둘 다 노르웨이 왕의 가신이었고, 분쟁 중재를 위해 왕에게 호소했다. 왕은 토르두르의 편을 들었고, 1247년부터 1250년까지 토르두르는 아이슬란드를 거의 단독으로 통치했다. 그는 1256년 노르웨이에서 사망했다.

3. 1. 스투를룽 가문의 부상

스노리 스투를루손노르웨이호콘 4세의 가신이 된 1220년, 스투를룬가 씨족의 족장이자 위대한 아이슬란드 사가 작가 중 한 명으로서 스투를룽 시대가 시작되었다.[1] 국왕은 스노리에게 아이슬란드를 노르웨이의 주권 아래 두도록 돕기를 요구했다. 스노리는 고국으로 돌아와 곧 국내에서 가장 강력한 족장이 되었지만, 국왕의 뜻을 강하게 실행하는 데는 소극적이었다.[2]

1235년, 스노리의 조카 스투를라 시그바트손 역시 국왕의 가신이 되었다. 스투를라는 더욱 공격적이어서 삼촌을 노르웨이로 돌려보내고 국왕의 요구를 거부하는 족장들과 전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스투를라와 그의 아버지 시그바투르는 외를리크스타디르 전투에서 하우크달리르의 족장인 기수르 토르발드손과 아스비르닝가르의 족장인 젊은 콜베인에게 패배했다. 이 전투는 아이슬란드 역사상 가장 큰 무력 충돌이었으며, 스투를라는 1,000명, 기수르와 젊은 콜베인은 1,200명의 무장 병력을 거느렸고 50명 이상이 사망했다. 이 승리로 기수르와 콜베인은 국내에서 가장 강력한 족장이 되었다.

thumb의 삽화, 플라테이아르보크에서]]

스노리 스투를루손은 쿠데타를 시도한 얼 스쿨리를 지지하여 국왕의 호의를 잃고 아이슬란드로 돌아왔다. 노르웨이 국왕의 가신이었던 기수르 토르발드손은 스노리를 암살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1241년, 기수르는 많은 부하들을 이끌고 스노리의 집으로 쳐들어가 그를 살해했다. 스노리의 마지막 말은 "''Eigi skal höggva!''"(치지 마라!영어)였다고 전해진다.

1236년, 스노리의 형제인 토르두르 카칼리 시그바트손이 해외에서 아이슬란드로 돌아왔다. 그는 형제와 아버지가 외를리크스타디르 전투에서 죽었기 때문에 복수할 이유가 있었다. 그는 곧 뛰어난 전술가이자 지도자임을 입증하였다. 4년 후, 아스비르닝가르의 지배는 토르두르와의 격렬한 전투 끝에 사실상 종말을 고했다. 걸프 해전(1244년)과 호그스네스 전투(1246년) 모두 이 기간에 일어났다.

그러나 토르두르 카칼리와 기수르 토르발드손은 서로 싸우지 않았다. 둘 다 노르웨이 국왕의 가신이었고, 분쟁 중재를 위해 그에게 호소했다. 국왕은 토르두르의 편을 들었고, 1247년부터 1250년까지 토르두르는 아이슬란드를 거의 단독으로 통치했다. 그는 1256년 노르웨이에서 사망했다.

3. 2. 내전의 격화

1220년, 스노리 스투를루손이 노르웨이의 호콘 4세의 가신이 되면서 스투를룬가 씨족의 족장이자 위대한 아이슬란드 사가 작가 중 한 명이 되었다.[1] 국왕은 스노리에게 아이슬란드를 노르웨이의 주권 아래 두는 것을 돕도록 요구했다. 스노리는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국왕의 뜻을 적극적으로 실행하지는 않았다.[2]

1235년, 스노리의 조카 스투를라 시그바트손도 국왕의 가신이 되었다. 그는 삼촌보다 더 적극적으로, 노르웨이로 돌려보내고 국왕의 요구를 거부하는 족장들과 전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외를리크스타디르 전투에서 하우크달리르의 족장 기수르 토르발드손과 아스비르닝가르의 족장 젊은 콜베인에게 크게 패했다. 이 전투는 아이슬란드 역사상 가장 큰 전투로, 스투를라는 1,000명, 기수르와 콜베인은 1,200명의 병력을 이끌었고, 50명 이상이 사망했다. 이 승리로 기수르와 콜베인은 가장 강력한 족장이 되었다.

스노리는 쿠데타를 시도한 얼 스쿨리를 지지하여 국왕의 신임을 잃고 아이슬란드로 돌아왔다. 노르웨이 국왕의 가신이었던 기수르는 스노리를 암살하라는 지시를 받고, 1241년 부하들을 이끌고 스노리의 집을 공격하여 그를 살해했다.

1236년, 스노리의 형제 토르두르 카칼리 시그바트손이 아이슬란드로 돌아와 복수를 다짐했다. 그는 뛰어난 전술가이자 지도자로, 4년 후 아스비르닝가르의 지배는 토르두르와의 격렬한 전투 끝에 사실상 종말을 고했다. 이 기간 동안 걸프 해전(1244년, 아이슬란드 역사상 유일한 해전)과 호그스네스 전투(1246년, 약 110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가장 큰 전투)가 일어났다.

토르두르와 기수르는 둘 다 노르웨이 국왕의 가신이었기에 분쟁 중재를 위해 국왕에게 호소했다. 국왕은 토르두르의 편을 들었고, 1247년부터 1250년까지 토르두르는 아이슬란드를 거의 단독으로 통치하다 1256년 노르웨이에서 사망했다.

1252년, 노르웨이 국왕은 기수르를 아이슬란드로 보냈지만, 토르두르의 추종자들은 스카가피외르뒤르에 있는 그의 거주지에 불을 질러 그를 죽이려 했다. 기수르는 범인을 찾지 못하고 1254년 노르웨이로 돌아가 국왕의 책망을 받았다.

아이슬란드 전역에서 갈등이 계속되는 가운데, 기수르는 야를 칭호를 받고 다시 아이슬란드로 보내졌다. 국왕의 특별 사절이 온 후에야 아이슬란드인들은 노르웨이 왕의 통치를 받아들였다. 1264년 ''감리 사트말리''(구 조약) 체결로 아이슬란드 자유국은 멸망했다.

3. 3. 아이슬란드 자유국의 종말

1252년, 노르웨이 국왕은 기쉬르를 아이슬란드로 보냈다. 토르뒤르 카칼리의 추종자들은 이에 불만을 품고, 스카가피외르뒤르에 있는 그의 거주지에 불을 질러 그를 죽이려 했다.[1] 기쉬르는 막강한 영향력과 권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방화범의 우두머리를 찾지 못했고, 1254년 노르웨이로 돌아가 국왕의 책망을 받아야 했다. 국왕은 그가 아이슬란드를 노르웨이 왕실의 통치 아래 두는 데 실패한 것에 불만을 품었다.[1]

아이슬란드 전역에서 사소한 갈등이 계속되었다.[1] 한편 기쉬르는 야를 칭호를 받고 협상을 위해 다시 아이슬란드로 보내졌다.[1] 국왕이 특별 사절인 할바르뒤르 굴스코르("황금신발")를 보낸 후에야 아이슬란드인들은 노르웨이 왕에 대한 통치를 받아들였다.[1] 1264년 ''감리 사트말리''(구 조약) 조약이 체결되면서 아이슬란드 자유국은 멸망했다.[1]

4. 주요 인물


  • '''스노리 스투를루손''': 스투를룬가 씨족의 족장이자 아이슬란드 사가 작가 중 한 명이다. 1220년 노르웨이호콘 4세의 가신이 되어 아이슬란드를 노르웨이 주권 아래 두도록 요구받았다.[1] 1241년 기수르 토르발드손에게 암살당했다.[2]
  • '''스투를라 시그바트손''': 스노리 스투를루손의 조카로, 1235년 노르웨이 국왕의 가신이 되었다. 삼촌보다 더 공격적으로 국왕의 요구를 따르려 했으나, 외를리크스타디르 전투에서 기수르 토르발드손과 젊은 콜베인에게 패배했다.[2]
  • '''기수르 토르발드손''': 하우크달리르의 족장으로, 외를리크스타디르 전투에서 젊은 콜베인과 함께 스투를라 시그바트손을 격파하여 아이슬란드에서 가장 강력한 족장이 되었다. 1241년 스노리 스투를루손을 암살했다.[2]
  • '''젊은 콜베인''': 아스비르닝가르의 족장으로, 외를리크스타디르 전투에서 기수르 토르발드손과 함께 스투를라 시그바트손을 무찔렀다. 이 승리로 기수르와 함께 아이슬란드에서 가장 강력한 족장이 되었다.[2]
  • '''토르두르 카칼리 시그바트손''': 스노리 스투를루손의 형제로, 1236년 아이슬란드로 돌아와 뛰어난 전술가이자 지도자로 활약했다. 걸프 해전과 호그스네스 전투에서 활약했다. 1247년부터 1250년까지 아이슬란드를 거의 단독으로 통치했다.[2]

5. 주요 전투 및 사건

1220년, 스노리 스투를루손노르웨이호콘 4세의 가신이 되면서 스투를룬가 씨족의 족장이자 위대한 아이슬란드 사가 작가 중 한 명이 되었다.[1] 국왕은 스노리에게 아이슬란드를 노르웨이의 주권 아래 두는 것을 돕도록 요구했다. 스노리는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국왕의 뜻을 실행하는 데는 소극적이었다.[2]

1235년, 스노리의 조카 스투를라 시그바트손 역시 국왕의 가신이 되었다. 그는 삼촌을 노르웨이로 돌려보내고 국왕의 요구를 거부하는 족장들과 전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외를리크스타디르 전투에서 하우크달리르의 족장인 기수르 토르발드손과 아스비르닝가르의 족장인 젊은 콜베인에게 패배했다. 이 전투는 아이슬란드 역사상 가장 큰 무력 충돌로, 스투를라는 1,000명, 기수르와 젊은 콜베인은 1,200명의 병력을 거느렸고 50명 이상이 사망했다.[2]

스노리 스투를루손은 국왕의 호의를 잃고 아이슬란드로 돌아왔다. 노르웨이 국왕의 가신이기도 했던 기수르 토르발드손은 스노리를 암살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1241년, 기수르는 스노리의 집으로 쳐들어가 그를 살해했다.

1236년, 스노리의 형제인 토르두르 카칼리 시그바트손이 아이슬란드로 돌아왔다. 그는 외를리크스타디르 전투에서 형제와 아버지가 죽었기 때문에 복수하려 했다. 4년 후, 아스비르닝가르의 지배는 토르두르와의 격렬한 전투 끝에 사실상 종말을 고했다. 이 기간에 걸프 해전(1244년)과 호그스네스 전투(1246년)이 일어났다. 걸프 해전은 아이슬란드 역사상 양측 모두 아이슬란드인으로 구성된 유일한 해전이고, 호그스네스 전투는 약 110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가장 유혈이 낭자한 전투였다.

토르두르 카칼리와 기수르 토르발드손은 서로 싸우지 않고, 노르웨이 국왕에게 분쟁 중재를 호소했다. 국왕은 토르두르의 편을 들었고, 1247년부터 1250년까지 토르두르는 아이슬란드를 거의 단독으로 통치했다.

1252년, 노르웨이 국왕은 기수르를 아이슬란드로 보냈다. 토르두르 카칼리의 추종자들은 스카가피외르뒤르에 있는 그의 거주지에 불을 질러 그를 죽이려 했다. 기수르는 1254년 노르웨이로 돌아가 국왕의 책망을 받았다.

아이슬란드 전역에서 사소한 갈등이 계속되었다. 기수르는 야를 칭호를 받고 협상을 위해 다시 아이슬란드로 보내졌다. 국왕이 특별 사절을 보낸 후에야 아이슬란드인들은 노르웨이 왕에 대한 통치를 받아들였다. 1264년 감리 사트말리("구 조약") 조약이 체결되면서 아이슬란드 자유국은 멸망했다.

6. 정치 및 사회 구조

아이슬란드 자유국 시대의 권력은 대부분 goðar(지역 족장)의 손에 있었다. 아이슬란드는 사실상 4분기로 나뉘었고, 각 4분기 내에는 9개의 "고디" 영토("Goðorð")가 있었다. 북부 4분기는 규모가 커서 3개의 영토가 더 있어 총 39개의 "Goðorð"가 존재했다.

"고디" 족장들은 자신의 영토 내 농부들을 보호하고 추종자들의 권리가 침해될 경우 보상이나 복수를 했다. 그 대가로 농부들은 "고디"에게 지지를 맹세했는데, 이는 Alþingi 의회에서 그에게 찬성표를 던지는 것과 (필요한 경우) 그의 적에 맞서 무기를 드는 것을 모두 포함했다. 그러나 "고디" 족장들의 권력은 영구적이지도, 세습되지도 않았다. 이러한 지위는 존경, 명예, 영향력, 부의 결합으로 얻어졌다. 족장들은 추종자들에게 선물을 주거나 큰 연회를 여는 방식으로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입증해야 했다. 족장이 어떤 면에서든 실패하는 것으로 보이면 추종자들은 단순히 더 자격 있는 다른 "고디"를 선택하여 지지할 수 있었다.

12세기와 13세기의 가장 위대한 족장들은 막대한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고, 덜 중요한 영토를 흡수했다. 국내 권력은 몇몇 가문에게 집중되었는데, 이들은 다음과 같다.


  • 하우크달리르, 아르네스핑
  • 오다베르야르, Rangárvellir|랑가르베틀리르is
  • 아스비르닝가르, 스카가피외르두르
  • 바트스피르딩가르, 이사피외르두르
  • 스빈펠링가르, 동부 지역
  • 스투를룽가르, 달라르의 흐밤무르


이 시기에 노르웨이의 호콘 구세는 아이슬란드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했다. 많은 아이슬란드 족장들이 그의 봉신이 되었고 그의 명령을 따라야 했다. 그 대가로 그들은 선물, 추종자, 존경의 지위를 받았다. 결과적으로 가장 위대한 아이슬란드 족장들은 곧 노르웨이 국왕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었다.

참조

[1] 서적 Auðnaróðal
[2] 서적 The History of Iceland https://archiv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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