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게이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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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티븐 게이틀리는 아일랜드 출신의 가수, 배우로, 보이 밴드 보이존의 멤버였다. 1993년 보이존으로 데뷔하여 활동하다가, 2000년 솔로 활동을 시작해 앨범 《New Beginning》을 발매했다. 1999년 커밍아웃했으며, 2006년 앤드루 카울스와 시민 결합을 맺었다. 2009년 스페인 마요르카 섬에서 폐부종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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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게이틀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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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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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스티븐 패트릭 데이비드 게이틀리 |
출생일 | 1976년 3월 17일 |
출생지 | 셰리프 스트리트, 더블린, 아일랜드 |
사망일 | 2009년 10월 10일(향년 33세) |
사망지 | 포트 당드라츠, 마요르카, 스페인 |
직업 | 가수, 작곡가 |
배우자 | 앤드루 카울스(2006년 결혼) |
활동 기간 | 1993년 - 2009년 |
장르 | 팝 |
관련 그룹 | 보이존 |
웹사이트 | stephengately.co.uk |
2. 생애
스티븐 게이틀리는 더블린의 노동자 계층 지역에서 성장했다.[7] 1999년 게이임을 커밍아웃했으며, 2006년 엘튼 존의 소개로 만난 앤드루 카울스와 시민 결합을 맺었다. 보이존 활동 외에도 솔로로 음반을 발매하고 텔레비전 드라마에 출연했으며, 2000년 보이존 활동 중단 이후에는 배우로도 활동했다. 2003년에는 Joseph and the Amazing Technicolor Dreamcoat에, 2005년에는 치티 치티 뱅 뱅 뮤지컬 리메이크판에 출연했다. 2009년 스페인 마요르카 섬에서 폐부종으로 사망했으며, 그의 유해는 아일랜드로 반환되었다. 장례식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대만에서도 팬들이 찾아왔다.[63][64][70]
2. 1. 어린 시절
스티븐 게이틀리는 더블린의 셰리프 스트리트라는 노동자 계층 지역에서 비교적 가난하게 성장했다.[7] 그는 5남매 중 넷째로, 아버지 마틴은 장식가였고 어머니 마가렛(1949년 출생)은 청소부였다.[11] 그의 형제자매는 미셸, 토니, 앨런, 마크이다.[8][9] 그는 평생 동안 누나 미셸과 특히 가까운 사이였다.[10] 2004년 9월, 게이틀리의 아버지는 사고를 당해 3개월간 입원해야 했고,[12] 이후 그의 어머니가 전담 간병인이 되었다.[12] 게이틀리는 세인트 로렌스 오툴 초등학교와 노스 스트랜드 기술대학에서 중등 교육을 받았다.[12] 십 대 시절, 그는 학교에서 ''주노와 공작새'' 등 다양한 뮤지컬과 연극 공연에 출연했다.[11] 그는 수년간 부모와 소원했으나, 2008년에 화해하고 그 해에 앤드루 카울스와 함께 부모님을 방문했다.[12]2. 2. 보이존 활동 (1993-2000, 2008-2009)
게이틀리는 1993년 보이존 결성에 참여했다. 이 그룹은 게이 번이 무시했지만, 나중에 "그들은 확실히 우리를 비웃었다"고 결론 내린, 더 레이트 레이트 쇼 출연으로 아일랜드에서 유명해졌다.[13] 보이존이 아일랜드 밖에서 처음 성공을 거둔 것은 1995년 "Love Me for a Reason"이 영국 싱글 차트에서 2위에 올랐을 때였다.[14] 이 그룹은 2000년 더블린의 포인트 극장에서 공연을 마치고 해체했다.[13] 보이존은 영국 싱글 차트에서 6번의 1위를 기록했으며, 1990년대 주요 팝 밴드로 테이크 댓과의 라이벌 관계를 맺었다.[14] 게이틀리는 로난 키팅과 함께 리드 보컬을 맡았다.
2008 미티어 어워드에서 재결성된 보이존은 2008년 투어를 진행했다.[15][16] 게이틀리가 사망한 후, 매니저 루이스 월시는 게이틀리를 "보이존의 접착제"라고 묘사했다.[17]
2008년, 게이틀리는 테이크 댓의 성공에 힘입어 보이존 재결합에 참여했다. 그는 재결합을 가장 열망했으며, 다른 멤버들을 설득했다. 그들은 영국에서 두 번의 투어를 매진시켰다.[19]
보이존은 2008년 10월 "Love You Anyway"를 발매하고, 새 컴필레이션 앨범을 발매했다. 2008년 12월에는 "Better"를 발매했다. 이 곡의 뮤직 비디오는 두 남자가 포옹하는 장면을 포함하여 논란을 일으켰는데, 이는 게이틀리의 성적 지향성을 포용하는 모습이었다. 그룹은 게이틀리가 남성 배우와 함께 연기하도록 만장일치로 동의했다.[20] 드롬 아일랜드 개혁 장로교회 목사는 이 뮤직 비디오를 비난했다.[21]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게이틀리를 "게이 인권 영웅"으로 꼽았다. "타임스 온라인"의 팀 티먼은 "게이틀리는 화려하지 않은 남자도 팝스타가 될 수 있고 게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썼다.[22]
게이틀리가 사망했을 당시 그룹은 2010년에 발매될 새 앨범을 준비 중이었다.[23]
게이틀리의 보컬은 보이존의 마지막 앨범에 "I Can Dream"이라는 곡으로 수록되었다. 이 곡의 뮤직 비디오는 2018년 6월 15일에 공개되었으며, 게이틀리와 보이존의 이미지가 담겨 있다. 앨범은 2018년 11월 16일에 발매되었다.[24][25]
2. 3. 솔로 활동 및 기타 활동 (2000-2009)
보이존의 성공 이후, 2000년에 밴드는 솔로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게이틀리는 2000년 5월 29일에 데뷔 솔로 싱글 "새로운 시작"을 발표했고, 이 싱글은 영국 차트에서 3위에 올랐다.[19] 2주 후에는 앨범 ''새로운 시작''이 발매되어 차트에 진입했다. 이 앨범에는 텔레비전 버전 ''워터쉽 다운'' 사운드트랙을 위해 녹음한 "밝은 눈" 버전을 포함한 12곡이 수록되었다. 그는 또한 이 시리즈에서 그의 모습을 본떠 만든 캐릭터 블랙아바 역으로 목소리 연기를 했다.2000년 10월 2일에는 앨범의 두 번째 싱글 "나는 믿어요"가 발매되었고, 영화 ''빌리 엘리어트'' 사운드트랙에도 수록되었다. 이 싱글은 영국 톱 10 진입에는 실패하여 11위에 머물렀다. 그는 에든버러 영화제와 엠파이어, 레스터 스퀘어에서 열린 영화 시사회에 줄리 월터스, 제이미 벨과 함께 참석했다. 2001년 5월, 게이틀리의 세 번째 싱글 "머물러 줘"가 발매되어 영국 차트 13위에 올랐고, 같은 달 그의 음반사 폴리도어는 그와 계약을 해지했다.[19]
2008년, 게이틀리는 테이크 댓의 부활 성공에 힘입어 보이존이 재결합하면서 옛 동료들과 다시 뭉쳤다. 게이틀리는 재결합을 가장 열망했으며, 다른 멤버들에게 다시 뭉치자고 설득했다. 그들은 영국에서 두 번의 추가 투어를 매진시켰다.[19] 보이존은 2008년 10월에 신곡 "Love You Anyway"를 발매했고, 이어서 새로운 컴필레이션 앨범을 발매했다. 2008년 12월에는 두 번째 신곡 "Better"가 발매되었다. 이 곡의 뮤직 비디오는 두 남자가 포옹하는 장면을 포함하여 논란을 일으켰는데, 이는 게이틀리의 성적 지향성을 포용하는 모습이었다. 그룹은 게이틀리가 남성 배우와 함께 연기하도록 만장일치로 동의했다.[20] 드롬 아일랜드 개혁 장로교회의 목사는 이 뮤직 비디오를 비난했다.[21]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이 사건을 게이틀리가 "게이 인권 영웅"인 이유 중 하나로 꼽았다. "타임스 온라인"의 팀 티먼은 게이틀리가 화려하지 않은 남자도 팝스타가 될 수 있고 게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썼다.[22]
게이틀리가 사망했을 당시 그룹은 2010년에 발매될 새 앨범에 수록할 30곡을 선정해 녹음할 예정이었고,[23] 이어서 투어를 할 예정이었다.[23] 게이틀리의 보컬은 보이존의 마지막 앨범에 "I Can Dream"이라는 곡으로 수록되었다. 이 곡의 뮤직 비디오는 2018년 6월 15일에 공개되었으며, 게이틀리와 보이존의 이미지가 담겨 있다. 이 앨범은 2018년 11월 16일에 발매되었다.[24][25]
2. 4. 개인적인 삶
게이틀리는 1999년, 지인이 자신의 성적 취향에 대한 정보를 언론에 팔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커밍아웃했다.[37] 2000년부터 2002년까지 게이틀리는 우울증과 처방약 중독으로 고통받았다.[11]게이틀리는 엘튼 존과 데이비드 퍼니쉬의 소개로 만난 인터넷 사업가 앤드루 콜스와 교제를 시작했다.[38] 게이틀리와 콜스는 2003년 라스베이거스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결혼식 예배당에서 약혼식을 올렸다. 2006년 3월 19일, 게이틀리는 런던에서 열린 결혼식에서 콜스와 시민 결합 관계를 맺었다.[39] 두 사람은 런던 북부의 하이게이트 마을에서 함께 살았다. 게이틀리는 이 마을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며 "세상에 어떤 일이 있어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이곳은 분위기가 좋고 사람들도 훌륭하다"고 말했다.[40] 2009년 7월, 그들의 집에 강도가 침입하여 게이틀리가 첫 급여로 구입했던 소중한 롤렉스 시계를 포함하여 80000GBP 상당의 물품을 훔쳐갔다.[40] 게이틀리는 생애의 나머지 기간을 런던에서 보냈다.[41]
그를 보이존 멤버로 선발했을 당시 그의 매니저인 루이스 월시는 게이틀리의 성적 취향을 알지 못했으며, 만약 알았다면 그를 선택하기 전에 두 번 생각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망 1년도 채 되지 않아 "당시에는 밴드에 게이 멤버가 있는 것은 쿨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42] 가수의 사망 후 월시는 게이틀리를 자신의 "가장, 가장 친한 친구"라고 묘사하며 "내가 함께 일했던 모든 사람들 중에서 스티븐만큼 나에게 고마워한 사람은 없는 것 같다. 그는 항상 나에게 '만약 내가 보이존에 없었다면 지금 어디에 있을지 모르겠다, 고마워요'라고 말하곤 했다"고 말했다.[43][44]
게이틀리의 우상은 마이클 잭슨이었으며, 그는 잭슨이 RDS 아레나에서 HIStory 월드 투어를 시작했을 때인 1997년에 잭슨을 만났다.[45] 잭슨은 게이틀리 사망 4개월 전에 사망했다.[46]
2. 5. 사망
게이틀리는 2009년 10월 10일 이른 아침, 스페인 포르트 다'안드라치 자택에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그날 늦은 아침에 발견되었다.[47] 사인은 진단되지 않은 심장 질환으로 인한 폐부종이었다.[48]게이틀리는 파트너 카울스와 함께 마요르카의 수도인 팔마의 블랙 캣 클럽에서 저녁 시간을 보냈다. 그들은 그날 밤 만난 불가리아 국적의 게오르기 도체프라는 남성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고, 도체프는 손님용 침실에서 묵었다.[49][50] 도체프에 따르면, 그는 떠나기 직전에 소파에 누워있는 게이틀리의 시신을 발견하고, 부부의 침실에서 혼자 자고 있던 카울스를 깨웠다.[47] 그러나 게이틀리의 변호사이자 가족 친구인 제럴드 킨은 카울스가 게이틀리의 시신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50] 스페인 경찰은 카울스가 게이틀리를 소생시키려 한 후 오후 1시 45분에 신고를 받았으며,[51] 게이틀리는 잠옷을 입은 채 소파에 불편한 자세로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경찰은 사망이 약물 남용과 관련이 있다는 증거는 없으며, 시신에서 유서나 폭력의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밝혔다.[51]
2009년 10월 11일, 게이틀리의 밴드 멤버들은 마요르카로 갔다.[52] 보이존의 남은 멤버들인 키스 더피, 마이클 그래함, 로난 키팅, 셰인 린치는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우리는 친구이자 형제인 스티븐의 죽음에 완전히 망연자실했습니다. 우리는 지난 몇 년 동안 정말 멋진 시간을 함께 보냈고,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낼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스티븐은 몸과 정신 모두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우리와 전 세계 많은 친구들의 삶을 밝혀주었습니다. 우리의 사랑과 위로는 앤드루와 스티븐의 가족에게 전해집니다. 우리는 당신을 사랑하고 영원히 그리워할 거예요, '스테오'.[53]10월 13일에 부검과 독성 검사가 실시되었고, 게이틀리는 자연사했다는 결과가 나왔다.[48] 그의 사망은 선천적인 심장 결함의 결과였다.[54]
10월 16일, 보이존의 남은 네 멤버와 함께,[55] 그의 시신은 마요르카에서 더블린으로 옮겨졌고, 다음날 세빌 플레이스에 있는 성 로렌스 오'툴 교회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56][57][58][59] 보이존의 네 멤버는 전날 밤 교회에서 밤샘 조문을 했다.[60][61] 수천 명의 팬, 유명인, 정치인이 장례식에 참석했으며,[62] 남아프리카, 그리고 대만에서부터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온 팬들도 있었다.[63][64][70] 그는 그날 오후 늦게 비공개 장례식에서 화장되었다.[65][66] 게이틀리의 관은 그의 밴드 멤버들에 의해 교회로 운반되었고,[67] 장례식 동안 로난 키팅은 몇 번이나 울음을 터뜨리며 회중에게 사과하며 추도사를 했다.[68][69] 키스 더피는 초창기를 회상하며 "그는 루이스 [월시]에게 키가 5피트 7인치 (170cm)라고 말했어요. 나중에 ''호빗'' 오디션을 볼 때, 그는 5피트 3인치 (160cm)라고 말했죠. 하지만 그는 진정한 거인이었어요."라고 말했다.[70] 마이클 그래함은 게이틀리가 불과 일주일 전에 카울스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자신에게 말했다고 덧붙였다. "그가 커밍아웃했을 때, 그는 마침내 자신이 되었어요."[70] 장례식은 버티 아헌의 조카의 결혼식과 겹쳤고, 그녀의 하객 중 몇몇은 대신 장례식에 참석했다.[71]
3. 사회적 영향
스티븐 게이틀리는 여러 자선 단체에서 활동했다.
3. 1. 자선 활동
게이틀리는 청소년들을 위한 가출 청소년 헬프라인 서비스를 지원하는 자선 단체인 실종자 지원센터(구, 전국 실종자 헬프라인)의 부후원자였다.[30] 그는 스토크에 있는 콜드웰 어린이 자선 단체의 홍보대사였으며, 한 번은 개인적인 크리스마스 공연을 열어 수천 파운드를 모금했다.[74] 게이틀리의 가족은 2009년 그의 사망 이후 조화 대신 자선 단체에 기부할 것을 요청했고, 이로 인해 수천 파운드가 더 모금되었다.[74] 그는 한 병원 방문에서 자신이 입고 있던 재킷을 맘에 들어하는 불치병 어린이와 만나 그 아이에게 재킷을 주었다.[31]4. 유산
팬들은 트위터와 페이스북에 애도의 메시지를 남겼고,[72][73] 게이틀리가 후원했던 스토크의 아동 자선 단체에 수천 파운드를 기부했다.[74] 보이존의 음반은 다시 음악 차트에서 인기를 얻었으며, 특히 게이틀리가 주요 보컬로 참여한 "노 매터 왓"은 라디오에서 많이 재생되었다.[23]
보이존의 전 매니저 루이스 월시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하며 게이틀리를 "훌륭한 사람"이라고 칭찬했다.[72][76] 보이존의 남은 네 멤버는 게이틀리의 시신을 고국으로 운구할 때 추모 문신을 새겼다.[78][79][80][81]
웨스트라이프는 보이존과 게이틀리가 자신들의 길을 열어주었다고 언급하며 애도를 표했고,[82] 전 아일랜드 총리 버티 아헌은 게이틀리의 죽음이 아일랜드 음악계에 큰 비극이라고 말했다.[83]
4. 1. 더블린 시의회 기념
주어진 원본 소스에 해당 섹션에 대한 내용이 없어 작성이 불가능합니다. 이전 답변에서 이미 이 점을 명시했으므로, 추가적인 수정 없이 동일한 답변을 유지합니다.4. 2. 미완성 소설 출간
게이틀리는 사망 전 3년 동안 《사계절의 나무》라는 어린이 판타지 소설을 집필했다. 2009년 4월 프레스 협회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거의 완성되었고 출판사의 관심을 받고 있으며 2009년 크리스마스에 출간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32] 보이존의 멤버 로난 키팅은 게이틀리의 장례식에서 "어떤 수를 써서라도" 책을 완성하겠다고 약속했다.[33]《사계절의 나무》는 준 콘사딘과 줄스 윌리엄스와 공동으로 집필되었다.[34] 게이틀리의 자필 메모를 바탕으로, 그는 사망 당일 결말을 막 완성했다.[35] 이 책은 2010년 5월 13일 호더 앤 스토튼에서 출판되어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발매되었다. 이 책에는 엘튼 존과 데이비드 퍼니쉬가 서문을 썼으며, 키스 윌슨이 삽화를 그렸다.[36] 《사계절의 나무》는 3주 연속 베스트셀러이자 10위 안에 드는 판매량을 기록했다. 페이퍼백 버전은 2011년 4월에 출시되었다.
5. 음반 목록
순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