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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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도가는 전한 시대의 인물로, 무관 출신으로 승상까지 오른 인물이다. 어려서부터 무예에 뛰어났으며, 고제를 따라 항우와의 싸움에 참여하고 영포의 난에도 참전했다. 혜제 때 회양태수를 지냈고, 문제 때 관내후에 봉해졌으며 어사대부를 거쳐 승상이 되었다.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황제의 총애를 받던 등통을 처벌하려 했으나 문제의 배려로 무사히 넘어가기도 했다. 경제가 즉위한 후 조조와 갈등을 겪다 조조를 주살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죽음을 맞이했으며, 시호는 절후이다.
신도가는 전한 초기의 인물로, 고제 때부터 경제 때까지 활약한 고위 관료였다.
2. 생애
궐장노를 다루는 무관인 재관궐장을 지내며 고제를 따라 항우와 싸웠고, 영포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도위가 되었다. 혜제 때에는 회양수를 지냈다. 문제 원년(기원전 179년)에는 고제를 따른 공로로 관내후에 봉해졌고, 문제 16년(기원전 164년)에는 어사대부가 되었다.[1]
장창이 승상에서 물러난 후, 문제는 두광국을 승상으로 삼고 싶어했지만, 여의치 않아 신도가를 승상으로 임명했다. 신도가는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사사로운 청탁을 받지 않았으며, 황제의 총애를 받던 등통이 조정에서 무례하게 굴자 그를 처벌하려 했다. 문제는 등통을 감쌌지만, 신도가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1]
경제 즉위 후, 신도가는 경제와 갈등을 겪었다. 경제는 조조를 총애하여 그의 의견을 따랐고, 신도가는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조조를 미워했다. 조조가 태상황 종묘의 담을 허물고 문을 내자, 신도가는 이를 빌미로 조조를 죽이려 했으나 경제의 반대로 실패했다. 신도가는 조조를 처단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피를 토하고 죽었다.[1]
2. 1. 초기 생애와 한나라 건국 기여
신도가는 어려서부터 힘이 컸다. 15세 때 항우와의 싸움에 참여하여 유방을 따라 발로 밟는 노를 사용하는 병사로 참전, 군대의 지휘관이 되었다. 영포의 난에서는 1대를 통솔해 종군했고, 도위로 승진했다.[1] 혜제 때에는 회양 군수가 되었다.[1]
문제 원년(기원전 179년) 고제를 따랐던 이천석 관료 전원에게 관내후를 수여한다는 명령이 내려졌고, 신도가도 식읍 500호를 받았다. 문제 16년(기원전 164년)에 어사대부로 승진했다.[1]
2. 2. 문제 시기 활동과 강직한 성품
고제를 따라 항우와 싸웠고, 영포의 난에서는 1대를 통솔해 종군하여 도위가 되었다. 혜제 치세에는 회양수를 지냈다.[1] 문제 원년(기원전 179)에 고제를 따른 신하들을 모두 관내후로 봉하면서 5백 호를 받았다. 문제 16년(기원전 164)에는 어사대부가 됐다.[1]
승상 장창이 문제와 갈등을 겪다가 관직에서 물러나자, 문제는 효문황후의 아우 두광국을 승상감으로 여겼으나 세상의 이목을 꺼려 승상으로 삼지 않고, 고제 시절의 대신 중에서 신도가를 승상으로 채용했다. 신도가는 청렴하고 강직해 문에서 사사로이 알현을 받는 것을 금했다.[1] 한번은 원앙과 마주쳤을 때 수레에서 내리지 않고 가볍게 인사만 하자, 원앙은 신도가를 찾아가 천하의 입을 막는 태도는 몸을 망칠 것이라고 설득했다. 신도가는 부끄러워하며 원앙에게 사과하고, 이후 원앙을 상객으로 대우했다.
당시 태중대부 등통이 황제의 총애를 받아 사사로이 화폐를 주조하는 등 지나치게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으며 조정에서 무례히 굴자, 신도가는 이를 죄목으로 삼아 불러들였고 참형을 명령했다. 등통은 계속 사죄했지만 신도가는 듣지 않았는데, 문제는 신도가가 등통을 충분히 꾸짖기를 기다리다 자신의 명령으로 불러들여 등통을 살려 주면서 신도가에게 사과했다.[1]
2. 3. 경제 시기 조조와의 갈등과 죽음
신도가는 경제 즉위 후 경제와 갈등을 겪었다. 경제 2년(기원전 155년), 경제는 내사 조조를 총애하여 조조는 많은 법을 바꿨으며, 특히 제후의 영토를 삭감하는 데 열중했다.[1] 신도가는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조조를 싫어했다.[1] 조조가 동문으로 드나드는 것이 불편하여 남쪽으로 문을 냈는데, 이 과정에서 태상황 종묘의 담을 허무는 사건이 일어났다.[1] 신도가는 이를 기회로 삼아 경제에게 조조를 주살할 것을 청했으나, 조회에서 경제는 조조의 행동이 죄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조회를 파했다.[1] 신도가는 조조를 먼저 죽이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피를 토하고 죽었고, 시호는 절후(節侯)라 했다.[1]
신도가 사후 1년 뒤, 조조의 정책에 반발한 7국의 제후왕들이 오초칠국의 난을 일으켰다.
2. 4. 가계
직계 | 이름 | 비고 |
---|---|---|
아들 | 신투멸 | |
손자 | 신투거병 | |
증손 | 신투유 | 구강 태수를 지냈으나 전임자로부터 선물을 받았다는 혐의로 죄를 얻어 영토가 몰수됨.[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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