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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잉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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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잉카국은 1537년부터 1572년까지 존재했던 잉카 제국의 후신으로, 스페인의 침략에 저항하며 빌카밤바를 중심으로 존속했다. 망코 잉카 유팡키는 쿠스코 탈환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빌카밤바로 후퇴하여 게릴라전을 펼쳤다. 이후 그의 아들들과 후계자들이 스페인과의 공존을 모색했으나, 결국 스페인의 공격으로 멸망했다. 신잉카국은 스페인과의 전투에서 노획한 무기를 활용하고 서양식 전술을 습득하며 저항했으나, 기술 격차를 극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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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잉카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공식 명칭Realm of the Four Parts (네오 잉카 국가)
일반 명칭네오 잉카 국가
시대근세
상태빌카밤바의 독립 국가
정부 형태군주제
잉카 제국의 깃발
잉카 제국 깃발
수도윌카팜파
공용어케추아어
종교잉카 종교, 로마 가톨릭교
페루 쿠스코
현대 쿠스코 지방, 네오 잉카 국가의 불분명한 경계
통치자
직책사파 잉카
망코 잉카 유팡키1537–1544년
사이리 투팍1545–1560년
티투 쿠시 유팡키1563–1571년
투팍 아마루 1세1571–1572년
역사
사건 시작망코 잉카 유팡키가 빌카밤바에 네오 잉카 국가를 세움
조약아코밤바 조약 (1566년)
사건 종료프란시스코 데 톨레도가 이끄는 스페인의 정복
이전
이후
현재 국가

2. 역사

빌카밤바의 역사는 크게 잉카 제국의 후퇴와 스페인과의 공존 및 정복 전쟁으로 나눌 수 있다.

1535년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동생 곤살로 피사로 등에게 모욕을 당하던 망코 잉카 유팡키는 탈출하여 잉카 전사들을 모아 1536년 쿠스코를 포위했다.[3] 10개월간의 공방전 끝에 망코 잉카는 쿠스코 인근 오얀타이탐보 요새로 후퇴, 오얀타이탐보 전투에서 스페인 군대의 공격을 막아냈다.[4] 망코 잉카는 휘하 장군 키소 유판키를 시켜 리마를 포위하고 피사로가 보낸 원정대를 급습하여 500여 명의 스페인 군을 죽이는 성과를 올렸으나, 스페인 지원군이 도착하고 상황이 불리해지자 빌카밤바로 후퇴하여 신잉카국을 세웠다.[2]

망꼬 잉까 유빵끼가 빌카밤바로 이동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운 뒤에는 게릴라 전술로 스페인과 협력한 부족들과 소규모 스페인 원정대들을 공격했으나, 피해가 더 컸다. 프란시스코 피사로디에고 데 알마그로 사이의 내분에서 패배한 알마그로의 패잔병들이 빌카밤바로 도망쳐 왔고, 망꼬 잉까는 이들을 받아들였으나, 이들은 사이리 투팍과 그의 형제들이 보는 앞에서 망꼬 잉까를 암살했다.[1] 암살자들은 곧바로 호위병들에게 살해당했다.[1]

이후, 사이리 투팍이 5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섭정들의 도움을 받아 10년간 통치했다.[1] 이 시기 신잉카국은 스페인 정복자들과 평화롭게 지냈다.[1] 1561년 사이리 투팍이 사망하고, 그의 이복형제 티투 쿠시 유팡키가 왕위를 계승하여 스페인과의 협상을 지속했다.[1] 1568년 협상이 타결된 후, 티투 쿠시는 로마 가톨릭 교회로 개종하여 '디에고 데 카스트로'라는 이름을 얻었다.[1] 1571년 티투 쿠시가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투팍 아마루가 왕위에 올랐다.[1]

1572년 4월, 스페인은 신잉카국에 전쟁을 선포했다. 빌카밤바 계곡에서 벌어진 첫 교전에서 잉카 군대가 먼저 기습 공격을 시도했으나 스페인 군대의 압도적인 화력과 전술 부족으로 밀려났다.[1] 6월 1일, 빌카밤바 계곡 전투에서 잉카군은 열악한 장비에도 불구하고 용감히 싸웠으나, 스페인군과 원주민 동맹군의 포위 공격에 밀려 후퇴해야 했다.[2] 6월 23일, 와이나 푸카라 요새는 스페인 포병의 공격에 항복했다.[2] 잉카군은 마지막 도시를 버리고 정글로 가서 재정비하기로 결정했다.[2]

스페인군에게 체포된 후의 투팍 아마루


6월 24일, 스페인 군대는 신잉카국의 수도 빌카밤바에 입성했지만, 그곳은 텅 비어 있었다.[1] 스페인 군인들은 빌카밤바를 완전히 파괴했고, 이로 인해 신잉카국은 공식적으로 멸망했다.[1] 투팍 아마루는 나중에 스페인군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2]

2. 1. 잉카 제국의 후퇴 (1536-1537)

1535년,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동생 곤살로 피사로 등에게 모욕을 당하던 망코 잉카 유팡키는 탈출하여 잉카 전사들을 모아 1536년 쿠스코를 포위했다.[3] 10개월간의 공방전 끝에 망코 잉카는 쿠스코 인근 오얀타이탐보 요새로 후퇴, 오얀타이탐보 전투에서 스페인 군대의 공격을 막아냈다.[4] 망코 잉카는 휘하 장군 키소 유판키를 시켜 리마를 포위하고 피사로가 보낸 원정대를 급습하여 500여 명의 스페인 군을 죽이는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스페인 지원군이 도착하고 상황이 불리해지자, 망코 잉카는 오얀타이탐보를 버리고 빌카밤바로 후퇴하여 신잉카국을 세웠다.[2]

2. 2. 스페인과의 공존 (1537-1571)

망꼬 잉까 유빵끼가 빌카밤바로 이동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운 뒤, 게릴라 전술로 스페인과 협력한 부족들과 소규모 스페인 원정대들을 공격했다. 어느 정도 성과는 있었으나, 피해가 더 컸다. 프란시스코 피사로디에고 데 알마그로 사이의 내분에서 패배한 알마그로의 패잔병들이 빌카밤바로 도망쳐 왔고, 망꼬 잉까는 이들을 받아들였으나, 이들은 사이리 투팍과 그의 형제들이 보는 앞에서 망꼬 잉까를 암살했다.[1] 암살자들은 곧바로 호위병들에게 살해당했다.[1]

망꼬 잉까의 아들 사이리 투팍은 5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섭정들의 도움을 받아 10년간 통치했다.[1] 이 시기 신잉카국은 스페인 정복자들과 평화롭게 지냈다.[1] 스페인 총독은 사이리 투팍에게 투항하면 쿠스코에 호화로운 저택을 주겠다고 제안했다.[1] 사이리 투팍은 제안을 수락하려 했으나, 파울루 잉카의 급사로 인해 제안을 거부했다.[1]

1561년 사이리 투팍이 사망하고, 그의 이복형제 티투 쿠시 유팡키가 왕위를 계승하여 스페인과의 협상을 지속했다.[1] 협상의 주 내용은 그가 빌카밤바에서 내려오고 왕위를 내려놓는 것이었다.[1] 1568년 협상이 타결된 후, 티투 쿠시는 로마 가톨릭 교회로 개종하여 '디에고 데 카스트로'라는 이름을 얻었다.[1]

1571년 티투 쿠시가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투팍 아마루가 왕위에 올랐다.[1] 스페인 관리들은 티투 쿠시와 협상을 계속하기 위해 2명의 대사를 보냈으나, 이들은 국경에서 살해당했다.[1] 당시 스페인 총독 프란시스코 데 톨레도, 오로페사 백작은 신잉카국이 국제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군대를 파견하여 신잉카국을 정복하려 했다.[1]

2. 3. 정복 전쟁 (1572)

1572년 4월, 스페인은 신잉카국에 전쟁을 선포했다. 첫 교전은 빌카밤바 계곡에서 벌어졌는데, 가벼운 무장을 한 잉카 군대가 먼저 기습 공격을 시도했으나 스페인 군대의 압도적인 화력과 전술 부족으로 밀려났다.[1] 6월 1일, 빌카밤바 계곡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잉카군은 열악한 장비에도 불구하고 용감히 싸웠으나, 스페인군과 원주민 동맹군의 포위 공격에 밀려 후퇴해야 했다.[2] 6월 23일, 와이나 푸카라 요새는 스페인 포병의 공격에 항복했다.[2] 잉카군은 마지막 도시를 버리고 정글로 가서 재정비하기로 결정했다.[2]

6월 24일, 스페인 군대는 신잉카국의 수도 빌카밤바에 입성했지만, 그곳은 텅 비어 있었다.[1] 스페인 군인들은 빌카밤바를 완전히 파괴했고, 이로 인해 신잉카국은 공식적으로 멸망했다.[1] 투팍 아마루는 나중에 스페인군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2]

3. 서양 무기의 도입

잉카인들은 스페인과의 전투에서 노획한 무기를 빠르게 습득하고 활용했다. 잉카인들이 서양의 무기 기술을 도입하여 그들과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의 경험을 쌓기 위해서는 거의 20년에 가까운 세월이 필요했다. 1537년 초, 망코 잉카가 스페인 군대를 몰아내고 전리품으로 얻은 무기를 통해 처음으로 잉카 군대가 서양의 무기들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1538년에는 잉카 군인들이 말을 탈 수 있을 정도로 전투에 능숙해졌다.[5] 참고로 유럽인들이 건너오기 전까지 남아메리카에는 말이라는 동물이 없었으며, 잉카인들은 말을 타고 다니는 스페인 군대를 보고 경악했다.

1538년, 망코 잉카는 말을 타고 전투에 참여할 정도로 숙련된 것으로 기록되었으며, 이때 그는 세 명의 귀족과 함께 30명의 스페인 보병 부대를 파괴하는 기병 돌격을 수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부 현대 무기를 사용하는 잉카인의 기술은 아직 이 시점에서는 부족했고, 연대기 작가 페드로 피사로는 잉카 아르케부스 사수가 종종 오발했다고 보고했다. 1536년에서 1538년 사이에 잉카인과 스페인인 사이의 전투에서 노획된 무기는 지속적인 차이를 만들지 못했다.[5]

3. 1. 초기 습득 (1537-1540)

1537년, 망코 잉카는 필코수니 전투에서 승리하며 아르케부스, 대포, 석궁 등 스페인 무기를 노획했다.[5] 쿠스코 포위전에서 잉카 전사들은 노획한 총기와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망코 잉카는 포로로 잡은 유럽인들에게 자신의 군대를 위해 화약을 정제하도록 강요하기도 했다.[5]

3. 2. 기술 발전 (1540-1572)

1540년대 초, 신잉카국으로 이주한 여러 스페인 이민자들이 잉카 전사들에게 스페인 무기를 최대한 활용하는 방법을 가르쳤다.[6] 잉카 군대는 유럽 무기를 빠르게 채택했다. 많은 전사들이 유럽인과의 초기 충돌 과정에서 헬멧, 방패, 칼을 노획하여 이를 사용하는 방법을 신속하게 익혔다. 아즈텍을 포함한 다른 일부 북미 문화와는 대조적으로, 잉카인들은 자신들에게 완전히 생소한 무기를 숙달하는 데에도 열심이었다.

잉카인들은 또한 일부 유럽식 전투 전술을 채택하려 했다. 적어도 한 번의 경우, 잉카 전사들은 포로로 잡힌 스페인인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전투에서 빽빽한 부대를 형성하여 활, 슬링, 다트를 사용하여 더 빠른 사격을 달성했다. 1560년대에는 많은 잉카인들이 아르케부스를 사용하고 말을 타는 데 상당한 기술을 개발한 것으로 기록되었다.[6]

참조

[1] 서적 Relation of the Discovery and Conquest of the Kingdoms of Peru New York: Cortes Society, RareBooksClub.com 1571
[2] 서적 Royal Commentaries of the Incas and General History of Peru Indianapolis: Hackett Publishing Company, Inc. 2006
[3] 서적 Relation of the Discovery and Conquest of the Kingdoms of Peru New York: Cortes Society, RareBooksClub.com
[4] 서적 Royal Commentaries of the Incas and General History of Peru Hackett Publishing Company, Inc 2006
[5] 서적 Hemming 1970
[6] 서적 Lynch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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