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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스타시오 부스타만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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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나스타시오 부스타만테는 1780년 멕시코에서 태어나 군 경력을 시작하여 멕시코 독립 전쟁에 참전했다. 1820년대에 멕시코 제1제국 붕괴 이후 연방주의를 지지하며 정치 활동을 시작했으며, 세 차례(1830-1832, 1837-1839, 1839-1841) 멕시코 대통령을 역임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텍사스 독립 전쟁, 프랑스와의 과자 전쟁 등 국내외적 어려움을 겪었으며, 여러 반란에 직면했다. 1841년 퇴임 후 유럽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가 귀국하여 의회 의장으로 활동했으며, 미국-멕시코 전쟁에도 관여했다. 그는 1853년 사망했으며, 멕시코 정치와 군사 분야에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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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스타시오 부스타만테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부스타만테 초상화, 1830-32
이름트리니다드 아나스타시오 데 살레스 루이스 부스타만테 이 오세게라
출생일1780년 7월 27일
출생지히킬판, 누에바에스파냐
사망일1853년 2월 6일
사망지산미겔데아옌데, 멕시코
정당멕시코 보수당
직책
제4대 멕시코 대통령재임 기간 1: 1830년 1월 1일 ~ 1832년 8월 13일
부통령 1: 자신
전임자 1: 호세 마리아 보카네그라
후임자 1: 멜초르 무스키스
멕시코 대통령재임 기간 2: 1837년 4월 19일 ~ 1839년 3월 20일
전임자 2: 호세 후스토 코로
후임자 2: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
멕시코 대통령재임 기간 3: 1839년 7월 19일 ~ 1841년 9월 22일
전임자 3: 니콜라스 브라보
후임자 3: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에체베리아
제2대 멕시코 부통령재임 기간 4: 1829년 6월 11일 ~ 1832년 12월 23일
대통령 4: 비센테 게레로, 호세 마리아 보카네그라, 페드로 벨레스, 루카스 알라만, 루이스 킨타나르, 자신, 멜초르 무스키스
전임자 4: 니콜라스 브라보
후임자 4: 발렌틴 고메스 파리아스

2. 초기 생애 및 군 경력

아나스타시오 부스타만테는 1780년 7월 27일 히킬판 데 후아레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콜리마 화산에서 과달라하라까지 눈을 운반하는 일을 했지만, 부스타만테에게 좋은 교육을 제공할 수 있었다. 그는 멕시코 시티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산 루이스 포토시의 산 후안 데 디오스 병원 원장이 되었다.

1808년, 부스타만테는 국왕군에 기병 장교로 입대하여 펠릭스 마리아 카예하의 지휘를 받았다. 1810년 미겔 이달고의 반란이 일어나자 왕당파로 참전하여 대령으로 승진했다.

1821년 3월 19일,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과나후아토주 판토하에서 멕시코 독립 선언을 했을 때 부스타만테도 이에 협력했다. 멕시코 제국이 붕괴되자 연방파에 속했지만, 아카풀코에서 투옥되었다가 과달루페 빅토리아 대통령에 의해 석방되었다.

2. 1. 출생 및 교육

아나스타시오 부스타만테는 1780년 7월 27일 미초아칸 주 지킬판에서 호세 루이스 부스타만테와 프란시스카 오세게라의 아들로 태어났다.[1] 그의 가족은 부유하지 않았지만, 그의 아버지는 과달라하라로 눈을 운반하는 일을 하여 어린 아나스타시오에게 좋은 교육을 제공할 수 있었다.[1] 15세에 그는 툭스팜 마을의 사제 마르셀리노 피게로아의 후원으로 과달라하라 신학교에 입학했다.[1] 그 후 멕시코 시티로 가서 광산 대학의 화학 교수인 리그너 박사에게 의학을 공부했다.[1] 졸업 후 그는 산루이스포토시에서 일하라는 제안을 받아들여 산 후안 데 디오스 병원의 원장이 되었다.[1]

2. 2. 멕시코 독립 전쟁 참전

1812년, 부스타만테는 대위로 진급하여 쿠아우틀라 포위전에 참전, 펠릭스 마리아 카예하의 지시를 받아 포위를 돌파했다. 이후 아팜 계곡에서 전투를 벌이다 부상을 입었다. 그는 파스쿠알 리냔es의 연대에 모집되어 하비에르 미나가 갤버스턴에서 시작한 침략을 격퇴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부스타만테는 레메디오스 요새를 점령하여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포대를 탈취하고 기병대를 이끌고 도주하는 반군을 추격했다. 그는 과나후아토 지방 전체를 평정하는 데 기여했으며, 구아니마로 농장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토레스와 미국의 사략선 그레고리오 울프의 군대를 격파하면서 절정에 달했다.[1]

전쟁 말기, 부스타만테는 산티아고 계곡에서 작전을 지휘하며 판토하 농장에 있었다. 이때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를 대신한 킨타닐라 대위가 그를 이구알라 계획에 참여하도록 설득했고, 부스타만테는 이에 동의했다.[1]

총독은 안토니오 리나레스 지방 사령관에게 부스타만테를 그의 지휘에서 해임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부스타만테는 이 메시지를 가로채고 1821년 3월 19일에 독립을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셀라야로 가서 리나레스에게 지휘권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했고, 저항 없이 과나후아토에 입성하여 전쟁 초기에 독립을 위해 싸우다 처형된 반군의 시신을 알혼디가에서 꺼내 산 세바스티안 묘지로 옮겼다.[1]

이투르비데는 부스타만테를 혁명의 부사령관으로 임명했고, 그는 산 안토니오 농장에서 크루스 장군과의 회담에 동행했다. 부스타만테는 이후 모든 기병대의 수장으로 선포되었고, 케레타로를 구원하기 위해 진군하는 브라초와 산 훌리안의 군대를 격파했다.[1]

한편 이투르비데는 푸에블라로 갔고, 부스타만테는 아로야자르코를 거쳐 수도 외곽으로 진격하여 포위를 준비하고 아스카포찰코에서 전투를 벌였다. 멕시코 시티를 점령하기 전에 그는 이투르비데에 의해 정부 위원회에 임명되었고, 멕시코 제1제국의 영토가 5개의 군사 지구로 분할되면서 섭정 원수이자 서부 및 동부 내부 지방의 사령관이 되었다.[1]

우치에서 그는 스페인 원정군인 오르데네스 연대를 격파했고, 이 공로로 섭정의 일원이 되도록 추천되었다. 수도에서 그는 국내 내부 지방과 관련된 긴급한 문제들을 처리했다.[1]

3. 멕시코 제1제국 붕괴와 제1공화국

멕시코 제1제국이 붕괴된 후, 부스타만테는 루이스 데 킨타나르와 함께 과달라하라에서 연방 정부를 지지하는 혁명을 선포했다. 그러나 봉기는 진압되었고 부스타만테는 체포될 위기에 처했으나, 당시 과달루페 빅토리아 대통령에 의해 석방되었다.

제1공화국 초기에 멕시코의 정치는 자유주의적 연방주의 정당인 요르키노와 보수적 중앙주의 정당인 에스코세스 사이의 갈등으로 번졌고, 부스타만테는 요르키노에 가담했다. 빅토리아 대통령은 부스타만테에게 내륙 지방 지휘를 명령했고, 그는 사단장 계급으로 임무를 시작했다.

4. 대통령 재임 (1830-1832, 1837-1839, 1839-1841)

1828년 비센테 게레로 대통령 아래에서 부통령으로 선출된 부스타만테는 1829년 할라파 사건을 통해 게레로를 몰아내고 대통령에 취임했다.[4] 그는 보수파의 지원을 받으며 정적을 탄압하고 언론을 통제했으며, 게레로 전 대통령을 처형하는 등[5] 강압적인 통치를 펼쳤다. 이로 인해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1832년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가 반란을 일으켜 1833년 부스타만테는 프랑스로 망명하게 되었다.[6]

1836년 텍사스 독립 전쟁이 발발하자 부스타만테는 귀국하여 1837년 다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5] 그러나 전쟁으로 인한 재정난과 계속되는 반란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838년에는 프랑스가 멕시코에 손해 배상을 요구하며 과자 전쟁을 일으켰고, 베라크루스를 점령당하기도 했다. 이 문제는 영국의 중재로 해결되었지만, 1839년 호세 데 우레아가 타마울리파스 주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등 국내 정세는 계속 불안했다. 부스타만테는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대통령직을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에게 맡기기도 했다.

1839년 7월, 부스타만테는 다시 대통령직에 복귀했지만,[3] 유카탄의 독립 선언과 1840년 호세 데 우레아의 대통령궁 습격 등 혼란이 계속되었다.[7] 결국 1841년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를 비롯한 군 사령관들의 반란으로 부스타만테는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에체베리아에게 정권을 넘기고 물러났다.

4. 1. 제1차 대통령 임기 (1830-1832)

1828년 선거에서 부스타만테는 비센테 게레로의 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할라파의 예비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4] 게레로 대통령은 1829년 스페인 침공으로 인해 비상 권한을 부여받았지만, 야당과의 갈등으로 사임하지 않았다. 대통령에 대항하는 음모가 시작되었고, 부스타만테는 게레로의 강력한 반대자 호세 안토니오 파시오와 대통령에게 실망한 일부 요르키노의 영향을 받았다. 1829년 12월 4일, 부스타만테는 대통령의 독재적 경향에 맞서 헌법 질서를 회복한다는 명분으로 정부에 대항하는 ''할라파 계획''을 선포했다. 게레로는 군대를 소집하여 반군에 맞서기 위해 수도를 떠났지만, 반란은 수도에서 자체적으로 발생했고, 정부는 12월 22일 항복하는 동안 게레로는 국가 남부로 탈출했다.

루카스 알라만, 부스타만테 초대 대통령의 주요 각료


부스타만테는 1830년 1월 1일 공식적으로 대통령직을 시작했다. 그는 내무 및 외무 장관에 루카스 알라만, 재무 장관에 , 육해군 장관에 호세 안토니오 파시오, 법무 장관에 호세 이그나시오 에스피노사를 임명했다. 의회는 할라파 계획을 비준했지만, 1828년 선거 결과를 무효화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게레로가 통치하기에 부적합하다고 선언했고, 그 결과 부통령 부스타만테가 대통령이 되었다.

새 정부, 특히 알라만과 파시오는 이전 행정부에서 시행된 스페인인 추방을 유감스럽게 생각했지만, 대중의 반 스페인 감정 때문에 그러한 조치를 되돌리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한편, 게레로는 여전히 멕시코 남부에 은신해 있었고, 이전에는 모두 스페인에 맞서 싸웠던 지휘관들은 이제 내전의 상반된 입장에 놓였다. 게레로 측에는 후안 알바레스, 프란시스코 몽고이, , 그리고 이시도로 몬테스 데 오카가 있었다. 부스타만테 측에는 니콜라스 브라보, 마누엘 데 미에르 이 테란, 그리고 멜초르 무스퀴스가 있었다. 분쟁은 멕시코의 다른 지역에서도 발생했지만 진압되었다. 전직 대통령 과달루페 빅토리아의 형제는 정부에 대항하여 무기를 들었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다.

부스타만테는 테란 장군을 텍사스 주로 보내 당시 미국 이민자들이 많이 정착해 있던 지역을 확보하도록 했다.
1830년 4월 6일, 정부는 코아우일라 이 테하스 주에서 진행되고 있는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스페인 통치 말기부터 이 지역에는 미국 이민자들이 점차 증가하여 정착했는데, 이들 이민자들의 수가 멕시코가 이 지역을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을 위협할 정도에 이르렀다. 알라만 장관은 멕시코와 인접한 국가 출신의 외국인들의 텍사스 식민화를 추가로 금지하고, 국경 지역의 세관 단속을 강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테란 장군은 텍사스 국경을 따라 일련의 요새를 건설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때까지 사실상 독립적으로, 멕시코에서는 불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노예를 공개적으로 소유하며 살아가던 식민주의자들은 이 법을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

멕시코 역사상 처음으로, 독립 기념일 공식 행사가 1831년 9월 16일 외에도 9월 27일에도 열려,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의 삼보병 군대가 멕시코 시티에 입성한 것을 기념하고, 돌로레스의 외침을 기념하는 행사가 더해졌다. 1831년 1월 1일, 니콜라스 브라보 장군은 비센테 게레로 잔존 세력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했다. 게레로는 아카풀코 항구를 떠나는 콜롬보호에 탑승하여 도주하려 했으나, 피칼루가 선장은 대신 우아툴코에 정박하여 게레로를 당국에 넘겼다. 게레로는 군사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2월 14일 총살형에 처해졌다.[5] 독립 영웅 중 한 명의 처형은 7년 전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의 죽음을 연상케 했으며, 국민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고 정부가 피칼루가에게 돈을 지불했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게레로의 남부 투쟁이 끝난 후, 전국적으로 상대적인 평화가 찾아왔다. 세금과 관세가 증가하고, 국가의 신용도가 개선되기 시작했다. 1832년 1월 1일 의회 개회에서 부스타만테는 모든 주가 상당한 잉여 자금을 보유하고 있으며, 재무부에는 대외 부채에 대한 6개월 치 이자를 지불할 자금이 충분하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증가하는 번영의 이면에는 정부의 점점 더 독재적인 조치에 대한 불안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언론의 자유가 폐지되었고, 입법부와 사법부는 행정부에 점점 더 복종하게 되었다.

산타 안나는 1832년 베라크루스 계획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이 계획은 결국 그를 처음으로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1832년 1월 2일, 베라크루스 수비대는 정부에 반기를 들고 장관들이 독재적으로 행동했다고 비난하며 그들의 해임을 요구했다. 산타 안나는 이 시점에서 자유주의자로 명성이 높았는데, 황제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가 점점 더 독재적으로 변해갈 때 공화국을 선포했고, 비센테 게레로의 지지자였다. 반대 세력은 그를 중심으로 모여 부스타만테를 전복하는 운동을 이끌어주기를 희망했다. 산타 안나는 이 운동에 참여하기로 동의했고, 1월 4일, 반군과 대통령 사이의 유혈 사태를 막기 위해 중재를 제안하며 부스타만테 대통령에게 연설했다.

정부는 산타 안나를 격파하지 못했고, 혁명은 타마울리파스로 확산되어 반군은 탐피코에서 마누엘 데 미에르 이 테란의 군대를 격파했다. 미에르 이 테란은 그 여파로 자살했다. 이제 더 많은 주가 혁명에 참여했고, 장관들의 해임뿐만 아니라 부스타만테 대신 1828년 선거에서 승리했지만 비센테 게레로의 반란으로 인해 망명했던 마누엘 고메스 페드라사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한편, 산루이스포토시, 미초아칸, 치와와, 멕시코, 푸에블라, 타바스코 주는 부스타만테에게 충성했지만, 혁명은 계속해서 진전되었다.

충성스러웠던 산루이스포토시가 8월 6일 호세 에스테반 모테수마 장군에게 점령되었다는 소식에 정부는 흔들렸고, 부스타만테 대통령은 그에 대항하는 원정을 이끌기 위해 친히 군대를 지휘했다. 부스타만테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났고, 대의원들은 8월 14일 멜초르 무스키즈 장군을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부스타만테는 9월 18일 모테수마의 군대를 격파했고, 9월 30일 도시를 점령했다. 불행히도 정부에게는 가브리엘 발렌시아 장군이 멕시코 주에서 혁명을 지지한다고 선언하면서 수도를 위협할 수 있는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부스타만테는 멕시코시티로 다시 진격하여 페논 블랑코에 도착하여 가르시아 주지사로부터 정부를 지지하겠다는 약속을 받았지만, 이 약속은 나중에 깨졌다. 한편, 베라크루스에서는 6개월간의 교착 상태 끝에 산타 안나가 파시오가 이끄는 정부군을 격파하여 군대가 베라크루스를 떠나 수도로 진격하여 10월 6일 타쿠바야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산타 안나는 11월 6일 다시 방향을 돌려 푸에블라 시에서 접근하는 부스타만테의 군대와 맞서 11월 16일 결국 그를 격파했다. 이 시점에서 정부는 사실상 나머지 국가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고, 오아하카와 치와와에만 충성을 유지했다. 부스타만테는 군사적 투쟁을 포기하고 협상을 시작하여 의회가 당사자 간의 평화 조약을 승인할 때까지 휴전에 합의했다. 의회는 항복을 거부했지만, 부스타만테는 더 이상의 유혈 사태를 막기 위해 그들의 뜻을 거스르고 1832년 12월 23일 자발레타 조약을 통해 비준된 평화를 협상했다. 조약에 따라 대통령직은 이제 마누엘 고메스 페드라사에게 넘어갔다.[6] 부스타만테는 2년 후인 1833년 유럽으로 추방되었다.

아나스타시오 부스타만테의 제1차 내각 각료 명단은 다음과 같다.

직책이름임기
외무 및 내무 관계마누엘 오르티스 데 라 토레1830년 1월 1일 – 1830년 1월 11일
루카스 알라만1830년 1월 12일 – 1832년 5월 20일
호세 마리아 오르티스-모나스테리오1832년 5월 21일 – 1832년 8월 14일
사법 및 종교 관련호아킨 데 이투르비데1830년 1월 1일 – 1830년 1월 7일
호세 이그나시오 에스피노사1830년 1월 8일 – 1830년 8월 17일
호아킨 데 이투르비데1832년 5월 18일 – 1832년 8월 14일
재무일데폰소 마니아우1830년 1월 1일 – 1830년 1월 7일
1830년 1월 8일 – 1832년 8월 14일
전쟁 및 해군1830년 1월 1일 – 1830년 1월 13일
1830년 1월 14일 – 1830년 1월 19일
호세 카초1832년 1월 20일 – 1832년 8월 14일


4. 2. 제2차 대통령 임기 (1837-1839)

과자 전쟁 중 베라크루스에서 싸우는 프랑스 군대


1828년 비센테 게레로 대통령 아래에서 부통령으로 추대되었던 부스타만테는 1829년 할라파 사건으로 게레로를 몰아내고 대통령에 취임했다.[4] 그러나 보수파의 지원 아래 정적 탄압, 언론 탄압, 게레로 전 대통령 처형[5] 등 폭정을 펼쳐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결국 1832년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의 반란으로 1833년 프랑스로 망명했다.[6]

1836년 텍사스 독립 전쟁 발발 이후 귀국한 부스타만테는 보수파가 다수인 국회에서 1836년 헌법에 따라 1837년 4월 17일 다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5] 그는 재무 장관으로 호아킨 레브리하, 육군 장관으로 호세 마리아노 미첼레나, 내무 장관으로 마누엘 데 라 페냐 이 페냐, 외무 장관으로 루이스 곤자가 큐에바스를 임명했다. 취임 직후, 스페인 정부가 1836년 12월 28일 멕시코 전권 대사 미겔 산타 마리아와 마드리드에서 체결한 조약으로 멕시코의 독립을 인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1837년 5월 멕시코 의회에서 비준되었다.

그러나 전쟁으로 재정은 궁핍했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등 어려운 상황이었다. 산 루이스 포토시에서 정부에 대한 소규모 반란이 일어났지만 진압되었고, 부스타만테의 첫 번째 전복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에스테반 모크테수마는 정부의 보복 과정에서 살해되었다.

1838년에는 프랑스인 제과 기술자 등의 소송으로 인해, 잦은 내전으로 피해를 입은 프랑스인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며 프랑스 함대가 선전포고를 하고, 산 후안 데 울루아를 포격하여 베라크루스를 점령했다. 이 전쟁은 피해를 입은 제과 기술자의 가게가 약탈당한 것에서 비롯되었기에 과자 전쟁이라고 불린다.[7] 프랑스는 오랫동안 멕시코의 분쟁 동안 프랑스 시민들이 겪은 피해에 대한 해결을 협상하려 노력해왔고, 멕시코 시티에 기반을 둔 프랑스 빵집 주인의 주장이 이후 분쟁에 그 이름을 부여하게 되었다.

이 문제에 대한 외교 회담은 1838년 1월에 결렬되었고, 프랑스 군함이 3월에 베라크루스에 도착했다. 프랑스 최후통첩이 거부되었고 프랑스는 멕시코 항구를 봉쇄하겠다고 선언했다. 또 한 차례의 협상이 결렬되었고, 프랑스는 11월 27일에 베라크루스를 포격하기 시작했다. 산 후안 데 울루아 요새는 프랑스 포병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다음 날 항복했으며, 멕시코 정부는 전쟁을 선포함으로써 대응했다. 텍사스 독립을 인정한 후 불명예를 안았던 산타 안나는 만가 데 클라보에서 사생활을 정리하고 프랑스군에 맞서 군대를 이끌기 위해 등장했으며, 멕시코 정부로부터 지휘권을 받았다.

12월 5일, 3개 프랑스 사단이 베라크루스에 상륙하여 산티아고, 콘셉시온 요새를 점령하고 산타 안나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요새는 점령되었지만, 산타 안나를 찾기 위해 파견된 부대는 라 메르세드 병영에서 격퇴되었다. 산타 안나는 이 전투에서 다리를 잃었고, 텍사스에서 패배한 것에 대한 불명예를 겪은 후 대중의 많은 동정을 얻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베라크루스를 효과적으로 장악했으며, 지금까지의 전쟁 결과로 부스타만테 내각은 사임했다.

멕시코에 이해 관계가 있었던 영국은 프랑스 봉쇄의 영향을 느끼고 있었고, 무력 시위로 베라크루스에 13척의 선박을 정박했다. 영국과의 분쟁에 휘말리거나 멕시코를 더 침공하고 싶지 않았던 프랑스는 다시 협상에 들어갔다. 1838년 4월에 합의가 이루어졌고, 그 결과 프랑스는 철수하고 멕시코는 프랑스에 손해 배상을 지불하기로 합의했다.

호세 데 우레아


1838년 10월, 탐피코에서 호세 데 우레아 장군의 지휘하에 또 다른 반란이 발발했다. 이 반란은 산루이스포토시 주와 누에보레온 주로 확산되었고, 정부는 파스트리 전쟁을 위해 징집된 병력을 이끌고 발렌틴 카날리소를 파견했다. 카날리소는 격퇴되었지만, 반란의 최초 선동자 몬테네그로를 살해하기 전에 그렇게 하지 못했다. 가레이와 레무스의 지휘하에 정부 지원군이 파견되었지만, 이들은 결국 반란군 편으로 돌아서서 마타모로스 포위에 가담했다. 이제 반란군은 몬테레이와 누에보레온 주의 주지사를 전복시키는 데 성공했고, 1839년 3월에는 코스 장군 휘하의 정부 지원군이 메히아에게 패배했다.

1839년 3월, 부스타만테는 타마울리파스 주에서 호세 데 우레아가 일으킨 반란에 대처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그동안 대통령직은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가 맡았다. 우레아와 메히아 휘하의 반란군은 이제 푸에블라로 침공했고, 산타 안나는 그들을 만나기 위해 수도에서 출발했다. 발렌시아 장군 휘하의 정부군은 1839년 5월 3일 아카헤테 전투에서 반란군을 격파하고 메히아 장군을 생포하여 즉결 처형했다. 그러나 우레아는 탈출하여 탐피코로 후퇴했고, 6월 11일 정부군에 의해 함락되었으며 우레아는 망명했다.

나머지 반란군은 북동부에 집중되어 있었고, 텍사스에서 지원을 받아 북부 멕시코 지방을 독립 공화국으로 분리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반란군은 1839년 11월 1일 마리아노 아리스타의 손에 연달아 패배한 후 마침내 정부에 항복했다.

4. 3. 제3차 대통령 임기 (1839-1841)

1839년 7월 9일, 부스타만테는 세 번째로 대통령직에 복귀했다.[3] 이 시기 유카탄에서 반란이 발발하여 멕시코가 연방 체제를 복원할 때까지 독립을 선언했다. 1840년 7월 15일, 호세 데 우레아는 감옥에서 탈출하여 대통령궁을 급습, 부스타만테를 체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부스타만테는 저항했지만, 탈출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정권을 포기하지 않았다.[7] 1841년,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베라크루스할리스코 주의 군 사령관들은 부스타만테에 대한 새로운 반란을 시작했다. 부스타만테는 1841년 9월 2일,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에체베리아에게 정권을 넘겨주고 퇴진했다.

5. 퇴임 이후 및 사망

부스타만테는 유럽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여러 국가를 여행했고, 군사 시설을 시찰했다. 파리에서는 천문학자 프랑수아 아라고의 강연을 듣는 등 아테네움 강좌를 들었다. 의사 출신이었던 그는 몽펠리에와 비엔나의 해부학 컬렉션도 방문했다. 그는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했지만 억양이 심했고, 멕시코 전 대통령이라는 지위 덕분에 저명한 인물들을 만날 수 있었다.[1]

1836년 샌 재신토 전투에서 멕시코가 텍사스를 잃었다는 소식에 큰 영향을 받은 그는, 정부의 초청으로 다시 조국으로 돌아와 텍사스와의 전쟁에 헌신하겠다고 제안했다.[2] 1844년 산타 안나가 실각하자, 그는 미국과의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다시 국가에 헌신하기 위해 돌아왔다.[3]

마리아노 파레데스 대통령 재임 시절, 부스타만테는 1846년 6월에 열릴 국가 헌법 의회의 상원 의원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헌법 개정을 경계했지만, 의회가 열렸을 때 의회 의장이 되었다.[4]

그는 미국-멕시코 전쟁 동안 캘리포니아 지원 원정에 파견되었지만, 예산 문제와 마사틀란 봉기 진압을 위한 우회로 인해 결국 도착하지 못했다. 휴전 후, 그는 파레데스에 의해 수행된 또 다른 반란을 진압하는 임무를 맡았고, 과나후아토, 아구아스칼리엔테스, 시에라 고르다를 평정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국가 영토의 절반을 잃게 한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에 반대했지만, 최종 비준이 다가오자 정부의 결정을 따르겠다고 대답했다.[5]

전쟁 후 부스타만테는 정치에서 은퇴하여 산 미겔 데 아옌데에서 거주했다. 그는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며 자신의 파란만장했던 정치 경력이나 여행 중에 그를 사로잡았던 일들을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는 1853년 2월 6일, 7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산 미겔 데 아옌데 교구에 묻혔고, 그의 심장은 국립 대성당의 이투르비데 유해 옆에 묻혔다.[6]

6. 평가 및 유산

아나스타시오 부스타만테는 멕시코 독립 전쟁과 초기 멕시코 정치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러나 잦은 정권 교체와 보수적인 통치 방식은 멕시코 사회에 혼란과 갈등을 야기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비센테 게레로 처형은 그의 정치 경력에 오점으로 남아있다.[5] 부스타만테의 통치 기간 동안 멕시코는 텍사스 독립 전쟁, 유카탄 반란, 과자 전쟁 등 여러 위기를 겪었으며, 이는 멕시코의 정치적 불안정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참조

[1] 서적 Memoria de hacienda y credito publico https://books.google[...] Mexican Government 1870
[2] 서적 Frances Calderon de la Barca XLibris 2016
[3] 서적 Memoria de hacienda y credito publico https://books.google[...] Mexican Government 1870
[4] 서적 メキシコ史 白水社 1999-05-31
[5] 서적 メキシコ史 白水社 1999-05-31
[6] 서적 物語メキシコの歴史 中央公論新社 2008-02-25
[7] 서적 メキシコ史 白水社 1999-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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