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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 사이드 미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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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부 사이드 미르자는 티무르 왕조의 일원으로, 티무르의 증손자이자 울루그 베그의 조카였다. 그는 울루그 베그의 궁정에서 관직을 맡았으나, 샤 루흐 사후 울루그 베그에게 반기를 들었다. 1451년 우즈베크족의 도움을 받아 사마르칸트를 점령하고 트란스옥시아나의 지배자가 되었다. 이후 호라산과 헤라트를 정복하며 티무르 제국을 재통일했으나, 1469년 백양조와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포로로 잡혀 처형당했다. 아부 사이드는 생애 대부분을 전쟁으로 보냈지만, 통치 기간 동안 학문과 문화를 장려했으며, 그의 손자 바부르는 무굴 제국을 건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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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 사이드 미르자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술탄 아부 사이드 미르자의 무굴 삽화
칭호미르자
통치 기간사마르칸트: 1451년–1469년 2월 8일
헤라트: 1459년–1469년 2월 8일
계승티무르 제국의 통치자
배우자아래 참조
자녀술탄 아흐마드 미르자
술탄 마흐무드 미르자
우마르 샤이크 미르자 2세
울루그 베그 미르자 2세
기타 많은 자녀
왕조티무르 왕조
아버지무함마드 미르자
어머니샤 이슬람 아가
출생일기원후 1424년경
출생지헤라트, 티무르 제국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사망일1469년 2월 8일
매장지카이로, 이집트 (머리만)
캠페인 박스
제목Second Timurid Succession Crisis
목록 클래스hlist
전투"1차 발흐"
*타르나브 전투
"1차 헤라트 공성전"
*호라산 침공
*아무다리야 반란
"사마르칸트 공성전"
*디미슈크 전투

2. 어린 시절

아부 사이드 미르자는 1424년 티무르 왕조의 왕자로 태어났다.[1] 그는 티무르의 증손자이자 미란 샤의 손자로, 아버지는 무함마드 미르자였다.[54][1] 어머니 샤 이슬람은 쿠르드계 유력 가문 출신이었다.[1][2] 이러한 가계 배경으로 인해 그는 젊은 시절부터 티무르 제국의 패권을 두고 다른 티무르 후손들과 경쟁하게 된다.[54]

그의 아버지는 트란스옥시아나의 총독이었던 사촌 울루그 베그와 가까웠으며, 임종 시 아들 아부 사이드를 울루그 베그에게 맡겼다.[56][57][58][3] 이에 따라 아부 사이드는 울루그 베그의 궁정에서 자라며 그의 후원을 받았고, 울루그 베그의 딸과 결혼하기도 했다.[59]

그러나 1447년 샤 루흐가 사망하고 울루그 베그가 티무르 제국의 최고 통치자가 되자, 아부 사이드는 권력을 향한 야심을 드러내며 복잡한 권력 투쟁에 뛰어들었다.[59]

2. 1. 가계와 초기 생애

아부 사이드 미르자(Abu Sa'id Mirza)는 1424년 티무르 왕조의 왕자 무함마드 미르자(Muhammad Mirza)와 그의 아내 샤 이슬람(Shah Islam) 사이에서 태어난 차남이었다.[1] 그의 아버지는 티무르의 셋째 아들인 미란 샤(Miran Shah)의 아들이었고,[1] 따라서 아부 사이드는 티무르의 증손자였다.[54] 그의 어머니 샤 이슬람은 수흐랍 쿠르드(Suhrab Kurd)의 딸이자, 티무르의 옛 적대자였던 하카리 에미르(Emirate of Hakkâri) 출신의 이즈 알-딘 시르(Izz al-Din Shir)의 친척이었다.[1][2] 이러한 가계 배경으로 인해 그는 젊은 시절부터 티무르 제국의 패권을 두고 다른 티무르 후손들과 경쟁하게 된다.[54]

아버지 무함마드 미르자는 정치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56][57][3] 트란스옥시아나(Transoxiana)의 총독이자 당시 티무르 제국의 실권자 샤 루흐(Shah Rukh)의 아들이었던 사촌 울루그 베그(Ulugh Beg)와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56][4][5] 무함마드 미르자는 임종 시 울루그 베그에게 아들 아부 사이드를 부탁하며 그의 보호 아래 두었다.[58][3]

아부 사이드는 울루그 베그의 궁정에서 관직을 얻고 그의 딸과 결혼하며 세력을 키웠다.[59] 그러나 샤 루흐가 사망(1447년)하고 울루그 베그가 제국의 최고 통치자가 되자, 아부 사이드는 은인이었던 울루그 베그를 배신하고 권력 다툼에 뛰어들었다.[59]

1449년, 울루그 베그의 아들 압둘 라티프(Abd al-Latif Mirza)가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키면서 티무르 제국은 다시 내전에 휩싸였다.[59] 울루그 베그가 반란 진압을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북부 국경 수비를 맡고 있던 아부 사이드는 이 기회를 이용해 아르군 부족을 동원하여 수도 사마르칸트를 공격했다.[59] 하지만 울루그 베그의 다른 아들 압둘 아지즈(Abd al-Aziz)가 성채에서 농성하며 시간을 벌었고, 울루그 베그가 군대를 이끌고 돌아오자 아부 사이드는 결국 철수해야 했다.[60] 이후 울루그 베그와 압둘 아지즈는 압둘 라티프에게 패배하여 항복했고,[60][61] 같은 해 메카 순례길에서 압둘 라티프의 명령으로 암살당했다.[61] 아부 사이드는 압둘 라티프에게 맞서 싸웠으나, 그 역시 패배하여 포로로 잡혀 사마르칸트에 투옥되었다.[62] (일부 기록에서는 샤 루흐 사후 1448년에 울루그 베그에게 반란을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부하라에서 독립을 시도하다 투옥되었다고도 한다.)

2. 2. 울루그 베그와의 관계

아부 사이드는 티무르의 증손자이자 미란 샤의 손자였으며, 울루그 베그의 조카로서 티무르 왕가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이었다.[54] 그의 아버지 무함마드 미르자는 트란스옥시아나의 통치자였던 사촌 울루그 베그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으나, 정치적인 문제에는 깊이 관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56][57] 무함마드 미르자는 임종 시 울루그 베그에게 자신의 아들 아부 사이드를 보살펴 줄 것을 부탁했다.[58]

이후 아부 사이드는 울루그 베그의 궁정에서 관직을 얻고 그의 딸과 결혼하는 등 후원을 받으며 성장했다.[59] 그러나 샤 루흐가 사망하고 1448년 울루그 베그가 티무르 제국의 술탄으로 즉위하자[59], 아부 사이드는 은혜를 잊고 울루그 베그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는 제위를 차지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이후 부하라에서 독립을 시도하다가 다시 실패하여 결국 사마르칸트에 투옥되었다.

1449년, 울루그 베그의 아들 압둘 라티프가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키면서 내전이 다시 시작되었다. 울루그 베그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북부 국경을 지키던 아부 사이드는 기회를 틈타 아르군 부족을 동원하여 수도 사마르칸트를 공격했다. 하지만 울루그 베그의 다른 아들 압둘 아지즈가 성을 지키며 버텼고, 울루그 베그가 군대를 이끌고 돌아오자 아부 사이드는 결국 물러났다.[60][61] 얼마 지나지 않아 압둘 라티프가 사마르칸트를 점령했고, 울루그 베그와 압둘 아지즈는 메카로 순례를 떠나던 중 압둘 라티프에 의해 암살당했다.[60][61] 울루그 베그 사후, 아부 사이드는 압둘 라티프에 맞서 군대를 일으켰지만 패배하여 포로로 잡히기도 했다.[62]

3. 즉위와 권력 투쟁

울루그 베그 사후 티무르 제국이 혼란에 빠지자, 아부 사이드 미르자는 제위 계승 경쟁에 뛰어들었다. 초기에는 울루그 베그의 아들 압달라티프 미르자에게 패배하여 투옥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으나,[6] 1450년 감옥에서 탈출하여 재기를 노렸다.[63][9]

부하라에서 세력을 모은 그는 우즈베크족의 지도자 아불 하이르 칸의 군사적 지원을 받아[65][11] 1451년 사마르칸트를 점령하고 경쟁자 압둘라 미르자를 제거하며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의 지배권을 확립했다.[65][11] 이후 호라산 지역으로 눈을 돌려, 1457년 바부르 이븐 바이순쿠르가 사망한 틈을 타 헤라트를 점령함으로써 티무르 제국의 양대 중심지를 모두 장악하였다.

1458년에는 흑양조의 자한 샤가 호라산을 침공했으나, 아부 사이드는 이를 격퇴하고 협상을 통해 영토 분쟁을 마무리 지었다.[66] 또한 1459년 사라흐 전투에서 자신에게 대항하는 다른 티무르 왕족들의 연합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하고 경쟁자들을 제거하였다.[67] 이러한 과정을 통해 아부 사이드는 분열되었던 티무르 제국의 상당 부분을 재통합하고 마잔다란, 시스탄, 바다흐샨 등으로 영토를 확장하며 당대 티무르 왕족 중 가장 강력한 군주로 자리매김했다.[67]

3. 1. 초기 권력 투쟁

아부 사이드는 울루그 베그의 궁정에서 성장하며 그의 딸과 결혼하는 등 신임을 얻었다.[6] 그러나 1447년 샤 루크가 사망하고 울루그 베그가 티무르 제국의 왕위에 오르자, 아부 사이드는 1448년 그에게 반기를 들었으나 실패하였다.[6] 이듬해인 1449년, 울루그 베그가 아들 압달라티프 미르자의 반란을 진압하러 간 사이, 아부 사이드는 사마르칸트를 공격했지만 이 역시 실패했다. 울루그 베그는 결국 아들 압달라티프에게 패배하고 암살당했으며,[7][8] 아부 사이드 또한 압달라티프에게 패배하여 포로가 되었다.[6]

1450년, 아부 사이드는 사마르칸트 감옥에서 탈출하여 부하라로 도망쳤다. 그곳에서 지지 기반이 약해 투옥되기도 했으나, 마침 압달라티프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처형을 면했다.[63][9] 부하라의 귀족들은 그를 석방하고 충성을 맹세했으며,[63][9] 아부 사이드는 곧바로 사마르칸트의 새로운 통치자인 압둘라 미르자를 상대로 군사를 일으켰다. 첫 공격은 실패했지만 국경 도시인 야시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64][10]

압둘라 미르자가 반격을 준비하자, 아부 사이드는 우즈베크족의 지도자 아불 하이르 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아불 하이르 칸의 지원을 받은 아부 사이드는 1451년 6월, 압둘라 미르자를 격파하고 전투 중 그를 사살하였다.[65][11] 이 승리로 아부 사이드는 저항 없이 사마르칸트에 입성하여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의 지배권을 확립했다.[65] 그는 티무르 왕조의 왕위를 주장하며, 감사의 표시로 아불 하이르 칸에게 막대한 선물과 함께 울루그 베그의 딸을 아내로 주었다.[12]

트란스옥시아나를 장악한 아부 사이드는 1454년부터 호라산 지역을 두고 바부르 이븐 바이순쿠르와 경쟁하였다. 전쟁은 한동안 결판이 나지 않았으나, 1457년 바부르가 사망하자 아부 사이드는 호라산을 점령하고 헤라트에 입성했다. 이로써 그는 티무르 제국의 양대 중심지인 사마르칸트헤라트를 모두 차지하며 당시 티무르 왕족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군주로 부상했다.

1458년에는 흑양조의 자한 샤가 호라산을 침공하여 헤라트를 점령하는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아부 사이드는 발흐로 잠시 물러났다가 반격에 나서 자한 샤의 아들 피르 부다크를 격파하고 호라산을 되찾았다. 이후 자한 샤와 협상을 벌여 삼난 지역을 경계로 영토를 나누기로 합의하며 갈등을 일단락지었다.[66]

1459년 3월, 아부 사이드는 자신에게 대항하여 결성된 술탄 산자르, 이브라힘 미르자, 알라 앗 다울라 등 티무르 왕족들의 동맹군을 사라흐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격파했다. 술탄 산자르는 전투 직후 처형되었고, 이브라힘 미르자와 알라 앗 다울라는 망명 생활 중 사망했다. 바부르 이븐 바이순쿠르의 아들 마흐무드 역시 비슷한 시기에 사망하면서 경쟁자들이 대부분 제거되었다. 이러한 군사적 성공과 경쟁자들의 소멸에 힘입어 아부 사이드는 마잔다란과 시스탄까지 영토를 확장했으며, 과거 티무르가 명목상의 종주권만 행사했던 바다흐샨 지역까지 완전히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67]

3. 2. 사마르칸트 점령과 트란스옥시아나 지배

1450년 무렵, 사마르칸트에 잡혀 있던 아부 사이드는 탈출하여 부하라로 도망쳤다.[63] 그러나 그곳에서는 지지 세력을 거의 얻지 못했고, 오히려 감옥에 갇혀 처형될 위기에 처했다. 마침 그해 5월, 압달라티프 미르자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목숨을 건졌다.[63][9] 부하라의 귀족들은 아부 사이드를 풀어주고 충성을 맹세했다.

이후 그는 당시 사마르칸트를 다스리던 티무르 왕족 압둘라 미르자에게 맞서 군사를 일으켰다. 첫 번째 사마르칸트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국경 도시인 야시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64][10] 압둘라 미르자가 군대를 보내 반격해오자, 아부 사이드는 우즈베크족의 지도자 아불 하이르 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10] 아불 하이르 칸은 이를 수락했고, 1451년 6월, 아부 사이드는 우즈베크족의 지원을 받아 압둘라 미르자를 격파했다.[65][11] 전투 중 압둘라 미르자가 사망하면서[11] 아부 사이드는 별다른 저항 없이 사마르칸트에 입성하여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의 지배권을 확립했다.[65] 아부 사이드는 도움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아불 하이르 칸에게 귀한 선물을 보냈고, 울루그 베그의 딸을 그의 아내로 주었다.[12]

4. 티무르 제국 재통합

샤 루흐 사후의 혼란과 울루그 베그 암살 이후, 아부 사이드 미르자는 샤이바니 왕조의 아불-카이르 칸의 지원을 받아 마와라안나흐르를 장악하고 사마르칸트를 수도로 삼아 티무르 제국 동부의 지배자로 부상했다. 그는 이후 서부의 헤라트를 중심으로 한 경쟁 세력들과 맞서며 분열된 제국의 재통합을 목표로 삼았다.

아부 사이드는 헤라트의 아불 카심 바부르 미르자와 대립했으며, 그의 사후 발생한 혼란을 이용하여 호라산 지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했다. 이 과정에서 카라 코윤루(흑양조)의 자한 샤흐가 일시적으로 헤라트를 점령하기도 했으나, 내부 사정으로 철수하자 아부 사이드는 헤라트를 장악하고 이곳을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16][17] 그는 한때 경쟁자였던 자한 샤와 우호적인 관계를 수립하고 페르시아 지역을 잠정적으로 분할 통치하는 데 합의했다. 또한 사라크스 전투 등을 통해 여러 경쟁 티무르 왕자들을 제거하고,[16] 마잔다란, 시스탄, 그리고 티무르 시대에도 명목상의 지배에 그쳤던 바다흐샨까지 영토를 확장하며[18] 제국의 상당 부분을 다시 통합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아부 사이드는 세제 개혁과 관개 사업 등을 통해 내전으로 피폐해진 제국의 안정을 꾀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재통합 노력은 지속적인 도전에 직면했다. 우와이스 미르자, 술탄 후세인 바이카라, 무함마드 주키 등 다른 티무르 왕족들의 반란이 끊이지 않아 통치 기반을 위협했으며,[19] 이를 진압하기 위해 많은 자원을 소모해야 했다. 결정적으로 1467년, 동맹 관계였던 자한 샤가 아크 코윤루(백양조)의 우준 하산에게 패배하여 사망하자, 아부 사이드는 자한 샤의 아들들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성급하게 우준 하산과의 전쟁에 나섰다.[20] 하지만 제대로 된 준비와 보급 없이 시작된 이 원정은 1469년 카라바흐 전투에서 참패로 끝났고, 아부 사이드는 포로로 잡히는 신세가 되었다.[21] 결국 그는 오랜 정적이었던 야드가르 무함마드에게 넘겨져 처형당하면서, 티무르 제국을 다시 하나로 만들려던 그의 야심은 미완으로 막을 내렸다.

4. 1. 호라산 정복과 헤라트 입성

사마르칸트를 장악한 아부 사이드 미르자는 서부 지역으로 세력 확장을 시도했다. 1454년, 아부 사이드가 발흐를 병합하자, 헤라트를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티무르 왕조의 아불 카심 바부르 미르자가 군대를 이끌고 사마르칸트를 포위했다. 그러나 양측은 직접적인 충돌 대신 아무다리야 강을 국경으로 삼는 휴전 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이 협정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1457년 아불 카심 바부르가 사망하고 그의 어린 아들 미르자 샤 마흐무드가 뒤를 이었으나, 곧 울루그 베그의 증손자인 이브라힘 미르자에게 헤라트에서 쫓겨났다. 헤라트와 그 주변의 호라산 지역을 장악할 기회를 엿보던 아부 사이드는 이브라힘을 공격하여 축출했다.[13] 하지만 그는 1456년까지 도시를 점령하지 못했다.[14] 이듬해인 1457년, 아부 사이드는 샤 루흐의 미망인이자 영향력 있는 황후였던 가우하르 샤드를 이브라힘 미르자와 내통했다는 혐의로 처형하며 권력을 공고히 했다.[15]

티무르 왕족 간의 분열은 외부 세력에게 개입의 빌미를 주었다. 카라 코윤루의 통치자 자한 샤흐는 이러한 혼란을 이용하여 1458년 군대를 이끌고 헤라트를 점령했다. 이미 티무르 제국의 서부 영토 상당 부분을 장악했던 자한 샤흐였지만, 아들 하산 알리의 반란으로 인해 점령지를 포기하고 철수해야 했다. 자한 샤흐가 철수하자 아부 사이드는 호라산을 재병합하고 헤라트를 자신의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16][17] 이후 아부 사이드와 자한 샤흐는 우호적인 관계를 수립하고 1460년대 내내 사절단을 교환했다. 아부 사이드는 세제를 개혁하고 관개 사업을 통해 농지를 회복시키는 등 내전으로 피폐해진 제국을 안정시키려 노력했다.

헤라트 입성 후 아부 사이드는 경쟁 세력을 제거하며 지배력을 강화했다. 1459년 사라크스 전투에서 술탄 산자르, 이브라힘 미르자, 알라 알-다울라 미르자 등 세 명의 티무르 왕족 연합군을 격파했다. 산자르는 전투 후 처형되었고, 나머지 두 명은 망명 생활 중 사망했다. 아불 카심 바부르의 아들 미르자 샤 마흐무드 역시 이 무렵 사망했다. 주요 경쟁자들이 제거되자 아부 사이드는 마잔다란과 시스탄까지 영토를 확장했으며,[16] 티무르조차 명목상의 종주권만 확보했던 바다흐샨 지역까지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18] 이로써 그는 울루그 베그 사후 분열되었던 티무르 제국의 동부(사마르칸트)와 서부(헤라트)를 사실상 재통일했다.

그러나 아부 사이드의 통치 기간 내내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티무르의 장남 우마르 샤이크 미르자 1세의 후손인 우와이스 미르자는 과거 아부 사이드의 동맹이었던 아불-카이르 칸의 지원을 받아 1454년 반란을 일으켜 아부 사이드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술탄 후세인 바이카라 역시 지속적인 위협이 되었다. 그는 자한 샤흐가 철수한 후 고르간을 점령하고 처음에는 아부 사이드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나, 1460년 반란에 가담하여 마잔다란을 점령하고 이듬해에는 헤라트를 포위하기도 했다. 비록 헤라트 점령에는 실패했지만, 후세인 바이카라는 이후에도 아부 사이드의 영토를 침범했다. 1461년에는 압달-라티프 미르자의 아들 무함마드 주키가 반란을 일으켜 트란스옥시아나를 약탈하고 샤흐루키야를 점령하자, 아부 사이드는 1462년 11월부터 1463년 9월까지 장기간의 샤흐루키야 포위전을 벌여야 했다.[19] 이처럼 아부 사이드는 호라산을 정복하고 헤라트에 입성하여 제국의 상당 부분을 재통일했지만, 지속적인 내분에 시달렸다.

4. 2. 흑양조와의 관계 및 경쟁자 제거

1454년 아부 사이드가 발흐를 병합하자, 헤라트를 거점으로 한 티무르 왕조의 아불 카심 바부르 미르자가 이에 반발하여 군대를 이끌고 사마르칸트를 포위 공격했다. 그러나 양측은 결국 휴전에 합의하고 아무다리야 강을 국경으로 삼았다. 이 조약은 1457년 아불 카심 바부르가 사망하고 그의 어린 아들 마흐무드 미르자 샤 마흐무드가 울루그 베그의 증손자인 이브라힘 미르자에게 헤라트에서 쫓겨날 때까지 유지되었다. 아부 사이드는 헤라트와 그 주변의 호라산 지역을 정복하기 위해 이브라힘을 공격하여 몰아냈다.[13] 그러나 1456년까지 헤라트를 완전히 점령하지는 못했다.[14] 이듬해인 1457년, 아부 사이드는 샤 루흐의 미망인이자 영향력 있는 황후였던 가우하르 샤드를 이브라힘 미르자와 공모했다는 혐의로 처형했다.[15]

티무르 왕조 왕자들 사이의 분쟁을 지켜보던 카라 코윤루(흑양조)의 통치자 자한 샤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1458년 군대를 이끌고 헤라트를 점령했다. 자한 샤는 이미 티무르 왕조의 서부 영토 대부분을 정복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의 아들 하산 알리의 반란으로 인해 점령지를 포기해야 했고, 이를 틈타 아부 사이드는 호라산을 다시 병합하고 헤라트를 자신의 수도로 삼았다.[16][17] 이후 아부 사이드와 자한 샤 사이에는 우호적인 관계가 수립되어 1460년대 내내 사절단이 오갔다.

이 기간 동안 아부 사이드는 권력을 더욱 공고히 했다. 1459년 사라크스 전투에서 술탄 산자르, 이브라힘 미르자, 알라 알-다울라 미르자 세 티무르 왕자의 연합군을 격파했다. 술탄 산자르는 전투 후 사로잡혀 처형되었고, 이브라힘 미르자와 알라 알-다울라 미르자는 망명 생활 중 몇 년 안에 사망했다. 아불 카심 바부르의 아들 마흐무드 미르자 샤 마흐무드 역시 이 무렵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여러 경쟁자들이 제거되면서 아부 사이드는 마잔다란과 시스탄까지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다.[16] 또한 티무르조차 명목상의 종주권만 확보했던 바다흐샨 지역을 완전히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18]

그러나 그의 통치에 대한 도전은 계속되었다. 1454년에는 티무르의 장남 우마르 샤이크 미르자 1세의 후손인 우와이스 미르자가 아부 사이드의 이전 동맹이었던 우즈베크 칸국의 아불-카이르 칸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켜 아부 사이드에게 심각한 패배를 안겼다. 또한 우마르 샤이크의 또 다른 후손인 술탄 후세인 바이카라도 위협적인 존재였다. 후세인 바이카라는 자한 샤가 철수한 후 고르간을 점령했으며, 처음에는 아부 사이드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나 1460년 반란에 연루되자 마잔다란을 점령하고 이듬해에는 헤라트를 포위 공격하기도 했다. 비록 헤라트에서 쫓겨났지만, 그는 이후에도 아부 사이드의 영토를 계속 침략했다. 1461년에는 압둘 라티프 미르자의 아들 무함마드 주키가 반란을 일으켜 트란스옥시아나를 약탈하고 샤흐루키야 시를 점령했다. 이에 아부 사이드는 1462년 11월부터 1463년 9월까지 샤흐루키야 포위전을 벌여야 했다.[19]

1467년, 오랜 동맹이자 경쟁자였던 흑양조의 자한 샤가 아크 코윤루(백양조)의 우준 하산에게 패배하자, 아부 사이드는 자한 샤의 아들들을 지원하며 우준 하산과 적대 관계가 되었다. 결국 1469년, 아부 사이드는 카라바흐 전투에서 우준 하산에게 패배하여 포로로 잡혔고, 그의 오랜 정적이었던 야드가르 무함마드에게 넘겨져 처형당했다.

5. 백양조 원정과 사망

1467년 말, 흑양조의 자한 샤가 백양조의 우준 하산에게 패배하고 사망하자, 아부 사이드는 이를 기회로 삼아 과거 흑양조에게 빼앗겼던 서부 영토를 회복하고자 했다.[20][68] 자한 샤의 아들 하산 알리의 지원 요청을 명분으로 1468년, 백양조에 대한 원정을 시작했다.[20][68]

그러나 이 원정은 충분한 준비 없이 충동적으로 이루어졌으며,[21][69] 초기 일부 영토를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21][70] 곧이어 아제르바이잔의 혹독한 겨울과 우준 하산의 효과적인 차단 작전으로 인해 심각한 보급난에 직면했다.[21][71] 식량과 물자 부족, 계속되는 기습 공격, 동맹의 이탈 등으로 티무르 군대의 사기는 크게 저하되었다.[21][71]

결국 퇴각을 결정했으나, 1469년 2월 카라바흐 전투에서 우준 하산의 군대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하고 아부 사이드는 포로로 잡혔다.[22][66] 우준 하산은 그를 야드가르 무함마드 미르자에게 넘겼고,[22][72] 야드가르 무함마드는 과거 아부 사이드가 자신의 증조모 가우하르 샤드를 처형한 것에 대한 복수로 그를 처형했다.[22][73][74] 아부 사이드의 죽음으로 티무르 제국호라산 서쪽 영토를 완전히 상실했으며,[22] 남은 영토는 그의 아들들에게 분할되어 제국의 분열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25]

5. 1. 백양조와의 갈등

아부 사이드 미르자


1467년 말, 아부 사이드는 백양조(아크 코윤루)의 통치자 우준 하산이 흑양조(카라 코윤루)의 자한 샤를 죽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비록 자한 샤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지만, 아부 사이드는 과거 흑양조가 정복했던 서부 영토를 되찾으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이제 이 영토들이 백양조에게 넘어가는 것을 보면서, 그는 우준 하산의 성장을 견제하지 않으면 영토 회복이 불가능해질 것이라고 판단했다. 마침 자한 샤의 아들인 하산 알리가 지원을 요청하자, 아부 사이드는 이를 명분 삼아 1468년 2월 백양조에 대한 원정을 시작했다.[20][68]

그러나 이 원정은 충분한 사전 계획 없이 충동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아부 사이드는 모든 군대가 집결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진격을 시작했으며, 이로 인해 충분한 예비 병력을 확보하지 못했다. 그는 이라크-이 아잠과 파르스에서 백양조 총독들을 몰아내고 길란과 같은 지역에서 자신의 권위를 인정받았지만, 진격로 상의 내륙 질서를 확립하는 데는 소홀했다. 레이와 같은 중요 거점들은 점령되지 않거나 아예 우회되었다. 또한 그는 우준 하산이 보낸 우호 관계 지속 및 평화 제의 서신에도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21][69][70]

초기에는 상황이 아부 사이드에게 유리해 보였다. 자한 샤 사후 그의 옛 아미르들 중 다수가 우준 하산에 맞서 아부 사이드를 지지하려 했다. 티무르 군대가 미야나에 도착했을 때, 이들 아미르들과 5만 명의 투르크멘 병력이 합류했다. 자한 샤의 아들들인 유수프와 하산 알리, 그리고 하산 알리의 아들 아미르자다 알리도 지원에 나섰다. 군대가 아라크세스 강변에 이르자 파룩 야사르 역시 합류했다.[21]

하지만 이러한 군세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기도 전에 티무르 군대는 위험에 처했다. 아제르바이잔의 혹독한 겨울 추위 속에서 군대는 심각한 보급 문제에 직면하기 시작했다. 1,200마일(약 1931km)이 넘는 호라산으로의 보급로가 백양조 군대에 의해 위협받고 차단될 위험에 처했기 때문이다. 우준 하산은 보급 부대를 습격하고 쉬르반에서 오는 식량 수송선 접근을 막았다. 또한 지원군이 올 수 있는 모든 경로를 차단하고 레이에서 티무르 군의 통신선을 공격했다. 식량, 겨울옷, 말과 수송 동물의 부족, 그리고 백양조 군대의 끊임없는 기습 공격으로 티무르 군대의 사기는 계속 떨어졌다. 설상가상으로 우준 하산이 파룩 야사르를 설득하여 티무르 군대에서 이탈시키자 수많은 탈영병이 발생하며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결국 아부 사이드는 퇴각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21][71]

그러나 퇴각 중이던 1469년 2월 11일, 카라바흐 전투에서 우준 하산이 이끄는 백양조 군대는 티무르 군대를 격파하고 아부 사이드를 사로잡았다.[66] 우준 하산은 포로가 된 아부 사이드를 야드가르 무함마드에게 넘겼다.[72] 야드가르 무함마드는 12년 전 아부 사이드가 자신의 증조모인 가우하르 샤드를 처형한 것에 대한 원한을 품고 있었고, 결국 1469년 2월 17일에 아부 사이드를 처형했다.[73][74]

5. 2. 원정 실패와 죽음



1467년 말, 백양조의 통치자 우준 하산이 흑양조의 자한 샤를 죽이자, 아부 사이드는 이를 서부 영토 회복의 기회로 보았다. 비록 자한 샤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지만, 과거 흑양조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으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68][20] 그는 이 영토들이 이제 백양조에게 넘어가는 것을 보고, 우준 하산의 세력 확장을 막지 않으면 영토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68] 마침 자한 샤의 아들 하산 알리가 지원을 요청하자, 이를 명분 삼아 1468년 2월 백양조에 대한 원정을 시작했다.[20][68]

그러나 이 원정은 충분한 사전 계획 없이 충동적으로 이루어졌다.[21][69] 아부 사이드는 모든 군대와 보급품이 모이기를 기다리지 않고 진격을 시작하여 충분한 예비 병력을 확보하지 못했다.[21][69] 그는 이라크-이 아잠[69]과 파르스의 백양조 총독들을 몰아내고 길란 등지에서 자신의 권위를 인정받는 성과를 거두었으나,[21][70] 내륙의 질서를 확립하는 데는 소홀했다. 레이와 같은 일부 중요 거점은 점령되지 않거나 아예 우회되었다.[21][70] 또한 진군 중에 도착한 우준 하산의 우호 및 평화 제의 서신에도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21][70]

미야나에 도착하자, 흑양조의 아미르들과 5만 명의 투르크멘 병력이 아부 사이드 군대에 합류했다.[21][71] 자한 샤의 아들들인 유수프와 하산 알리, 그리고 하산 알리의 아들도 지원에 나섰다. 군대가 아라스 강 유역에 이르자 파루크 야사르 역시 합류했다.[21][71]

이러한 군세에도 불구하고, 티무르 군대는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기도 전에 위험에 처했다. 아제르바이잔의 혹독한 겨울 날씨 속에서 심각한 보급 문제에 직면한 것이다.[21][71] 호라산으로 이어지는 약 1931.21km (약 1931km)가 넘는 보급로가 백양조에게 차단될 위협에 놓였다.[21][71] 우준 하산은 보급 부대를 습격하고 쉬르반에서 오는 식량 수송선과 지원군이 도착할 수 있는 모든 경로를 막았다.[21][71] 식량, 방한복, 동물의 부족과 백양조 군대의 끊임없는 기습 공격으로 군대의 사기는 계속 떨어졌다. 설상가상으로 우준 하산이 파루크 야사르를 설득하여 티무르 군대에서 이탈시키면서 탈영병이 속출하는 등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21][71]

결국 사기가 꺾이고 병력이 줄어든 아부 사이드는 퇴각을 결심했다.[71] 그러나 1469년 2월 11일[66] (다른 자료에서는 2월 8일[22]), 카라바흐 평원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우준 하산이 이끄는 백양조 군대에게 참패하고 포로로 잡혔다.[22][66] 우준 하산은 아부 사이드를 티무르 왕족인 야드가르 무함마드 미르자에게 넘겼다.[22][72] 야드가르 무함마드는 12년 전 아부 사이드가 자신의 증조모인 가우하르 샤드를 처형한 것에 대한 복수로, 1469년 2월 17일[73][74] (다른 자료에서는 2월 8일[22]) 아부 사이드를 처형했다.[22][73] 우준 하산은 아부 사이드의 잘린 머리를 이집트의 맘루크 술탄 카이트베이에게 보냈고, 카이트베이는 이슬람식 장례를 치러주었다.[24]

아부 사이드의 죽음으로 호라산 서쪽의 모든 티무르 제국 영토는 최종적으로 상실되었다.[22] 남은 제국 영토는 여러 아들들에게 분할되었다. 장남 술탄 아흐마드 미르자는 사마르칸트를, 차남 술탄 마흐무드 미르자는 바다흐샨과 히사르를, 셋째 아들 울루그 베그 2세는 카불가즈니를, 넷째 아들 우마르 셰이크 미르자 2세는 페르가나 계곡을 상속받았다. 그러나 이 시기 가장 강력한 티무르 왕조 통치자는 아부 사이드의 아들들이 아니라, 그의 옛 봉신이었으며 헤라트에서 통치한 술탄 후세인 바이카라였다.[25]

6. 내치

아부 사이드는 샤 루흐 사후 계속되던 내전을 끝내고 분열되었던 티무르 제국을 재통일하여 제국 내부에 안정을 가져왔다.[41] 그는 사마르칸트헤라트를 모두 장악하고 아프가니스탄 대부분을 정복하여 울루그 베크 이후 분열되었던 제국을 하나로 합쳤다. 그러나 이러한 안정은 상당한 유혈 사태와 티무르 시대를 능가하는 잔혹한 처형을 동반하기도 했다.[15][76]

그는 자신의 주요 지지 기반이었던 튀르크계 아르군 부족을 중용하고[22][77], 수피즘 성직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이들의 지지를 확보했다.[17][78] 특히 낙쉬반디 교단의 셰이크 우바이둘라 알-아흐라르의 영향을 받아 사마르칸트부하라샤리아 법을 재도입하고 일부 세금을 폐지하는 등 종교적 정책을 펼쳤다.[78][22][31] 동시에 울루그 베크의 전통을 중시하는 다른 성직자의 의견도 수용하며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했다.[32][79]

또한 내전으로 피폐해진 제국을 재건하기 위해 농업과 농민 복지에 관심을 기울여 세제를 개혁하고 관개 시설을 개선하는 데 힘썼다.[33][80] 잦은 원정으로 대규모 건축 사업을 직접 추진하지는 못했지만[34][81], 헤라트의 왕궁 건설, 댐 보수, 모스크 증축 등 일부 공공 사업이 그의 치세에 이루어졌다.[35][82][36][83][37][84][38][39][85][40][86] 전반적으로 아부 사이드는 혼란을 수습하고 제국의 안정과 번영을 회복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한 군주였다.

6. 1. 안정 추구와 강경책

아부 사이드는 샤 루흐 사후 지속되던 내전을 종식시키고 제국 내부에 안정을 가져왔다.[41] 그러나 이는 상당한 유혈 사태 없이는 달성할 수 없었으며, 그의 권력 장악 과정은 티무르 시대조차 능가하는 잔혹한 살인과 처형을 수반했다.[15] 학자 흐완다미르에 따르면, 재상 쿠트브 알-딘 심나니를 포함한 여러 궁정 관리들이 자금 횡령 혐의로 파면되거나 살해되었다.[26] 1462년에는 뇌물 수수와 세금 갈취 혐의로 고발된 군 세금징수관 흐와자 무이즈 알-딘과 환전상 샤이크 아흐마드가 잔인하게 처형되었다.[15] 샤이크 아흐마드는 헤라트 성문 앞에서 산 채로 가죽이 벗겨졌고, 흐와자 무이즈 알-딘은 성채 기슭의 가마솥에서 삶아졌다.[15] 궁정 내 여성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샤 루흐의 아내이자 아부 사이드의 작은 할머니였던 가우하르 샤드 역시 그에 의해 처형되었는데, 이는 당대 역사가들에게 부정적으로 평가받았다.[27]

아부 사이드는 전형적인 튀르크멘 군사 지도자로 평가받으며, 그의 핵심 지지 기반은 아르군 부족이었다. 이 튀르크 부족은 일찍이 그를 지도자로 추대했으며, 아부 사이드는 정치 및 군사 활동에서 이들의 지지를 받았다.[22] 그는 보답으로 아르군 부족에게 큰 특혜를 주었으며, 그의 주요 왕비 중 한 명도 아르군 부족장의 딸이었다.[28][29] 또한 부족의 주요 인물들, 자신의 아들들, 그리고 세속 및 종교 고위층에게 후하게 봉토를 수여함으로써 권력을 공고히 했다.[22]

종교계 역시 아부 사이드의 통치를 지지하는 주요 세력이었다.[17] 특히 이슬람 수피 학자들은 몽골 관습 부활을 시도했던 울루그 베크보다 아부 사이드를 선호했는데, 그중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은 수피 낙시반디 교단의 셰이크 우바이둘라 알-아흐라르였다. 술탄은 그와 깊은 관계를 맺었다.[12][30] 아흐라르의 권유에 따라 아부 사이드는 사마르칸트부하라샤리아 법을 다시 도입하고, 교리에 맞지 않는 상업 세금을 폐지했다.[31] 또한 아흐라르의 조언은 결과적으로 제국에 재앙을 가져온 백양조 원정으로 이어지기도 했다.[22] 그러나 '셰이크 알-이슬람' 칭호를 가진 또 다른 강력한 수피 부르한 알-딘 또한 궁정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아흐라르와 달리 울루그 베크의 정책과 튀르크-몽골 관습을 보존하려 했다.[32] 아부 사이드는 상황에 따라 두 셰이크의 권위를 전략적으로 활용했다. 아흐라르는 군대와 민중 여론에 영향을 미쳤고, 부르한 알-딘은 민중 통제와 문화 증진에 더 효과적이어서 민중 봉기 진압에 유용하게 활용되었다.[32]

이러한 민중 봉기에 대한 대응책이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아부 사이드는 농업과 농민 복지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농업 친화적인 세금 제도를 도입하고 기존 관개 시설을 개선했다. 특히 재상 쿠트브 알-딘 심나니는 헤라트 북쪽의 주이 술타니 수로(Juy-i Sultani Canal) 건설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33]

6. 2. 지지 세력과 권력 강화

아부 사이드는 샤 루흐 사후 지속된 내전을 종식시키고 제국 내부에 안정을 가져왔으나[41], 이 과정은 티무르 시대를 능가하는 잔혹한 살인과 처형을 동반했다.[15][76] 학자 흐완다미르에 따르면, 재상 쿠트브 알-딘 심나니를 포함한 여러 궁정 관료들이 자금 횡령 혐의로 파면되거나 살해되었다.[26][76] 1462년에는 뇌물 수수와 세금 갈취 혐의로 기소된 군대 세금징수관 흐와자 무이즈 알-딘과 환전상 샤이크 아흐마드가 잔인하게 처형되었다. 흐와자 무이즈 알-딘은 헤라트 성채 앞에서 가마솥에 삶아졌고, 샤이크 아흐마드는 성문 앞에서 산 채로 가죽이 벗겨졌다.[15][76] 심지어 샤 루흐의 아내이자 아부 사이드의 작은 할머니였던 가우하르 샤드 역시 궁정 음모에 휘말려 처형되었는데, 이는 당대 역사가들에게 부정적으로 평가받았다.[27][76]

아부 사이드는 전형적인 투르크멘 군사 지도자로 평가받으며, 그의 주요 권력 기반은 튀르크계 아르군 부족이었다. 이 부족은 일찍이 그를 지도자로 선출했고, 그의 정치적, 군사적 활동을 지지했다.[22][77] 아부 사이드는 아르군 부족에게 큰 특혜를 주었으며, 그의 주요 부인 중 한 명도 아르군 부족장의 딸이었다.[28][29][77] 그는 아르군 부족의 주요 구성원들과 자신의 아들들, 그리고 다른 세속 및 종교 고위 인사들에게 후하게 봉토를 수여함으로써 권력을 공고히 했다.[22][77]

종교계 역시 아부 사이드의 중요한 지지 세력이었다.[17] 특히 이슬람 수피 학자들은 몽골 관습을 부활시키려 했던 그의 전임자 울루그 베그보다 아부 사이드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12][78]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은 수피 낙시반디 교단의 셰이크인 우바이둘라 알-아흐라르로, 아부 사이드는 그와 깊은 관계를 맺었다.[12][30][78] 아흐라르의 조언에 따라 아부 사이드는 사마르칸트부하라샤리아 법을 재정립하고, 이슬람 교리에 맞지 않는 상업 세금을 폐지했다.[78] 그러나 제국에 재앙적인 결과를 가져온 백양조(아크 코윤루) 원정 역시 아흐라르의 설득에 따른 것이었다.[22][78]

낙원에서 천사가 소개하는 예수와 무함마드. 티무르 시대, 1466년.


한편, "셰이크 올-이슬람"이라는 칭호를 가진 또 다른 강력한 수피 지도자 부르한 앗 딘 역시 궁정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아흐라르와 달리 그는 울루그 베그의 정책을 유지하고 몽골-튀르크 관습을 보존할 것을 주장했다.[32][79] 아부 사이드는 대부분 아흐라르의 견해를 따랐지만, 상황에 따라 두 셰이크의 권위를 적절히 활용했다. 아흐라르의 영향력은 군대와 민중 여론에 미쳤고, 부르한 앗 딘의 문화적 관심사와 정부와의 연관성은 민중 봉기 진압과 통제에 유용하게 작용했다.[32][79]

아부 사이드가 농업과 농민 복지에 특별한 관심을 보인 것은 이러한 민중 봉기에 대한 대응책이었을 가능성이 있다.[33][80] 그는 농업을 장려하는 방향으로 세제를 개혁하고 기존의 관개 시스템을 개선했다.[33] 특히 그의 대신이었던 쿠툽 앗딘 심나니는 헤라트 북쪽에 주이 술타니 수로(Juy-i Sultani Canal) 건설을 적극적으로 주도했다.[33][80]

잦은 군사 원정 때문인지 아부 사이드 자신이 대규모 건축 사업을 직접 벌이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34][81] 그러나 몇몇 건축 사업이 그의 치세에 이루어졌다. 대표적으로 헤라트 성벽 밖에 왕궁인 아크 사라이(백색 궁전/Aq Saray)를 건설하여 왕실 거주지를 옮긴 것이 있는데, 이는 "과거와의 의식적인 단절"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35][82] 또한 마슈하드 일대에 물을 공급하던 굴리스탄 댐의 보수[36][83], 헤라트의 모스크(예배당)와 무살라에 아이완(Iwan)을 증축한 것[37][84], 가리 카루크(Ghār-i Karukh)를 수리하고 비문을 남긴 것[38][39][85], 티무르 왕조의 여름 휴양지였던 오베(Obeh)에 목욕탕과 스파를 건설한 것[40][86] 등이 그의 치세에 이루어진 공공 사업으로 확인된다.

6. 3. 종교 정책과 농업 장려

아부 사이드의 통치는 성직자 계층, 특히 수피즘 학자들의 지지를 받았다.[17][78] 이들은 몽골 관습을 부활시키려 했던 전임자 울루그 베그보다 수피 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아부 사이드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78] 이들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낙쉬반디 교단의 셰이크인 우바이둘라 알-아흐라르로, 아부 사이드는 그와 깊은 관계를 맺었다.[12][30][78] 아흐라르의 조언에 따라 아부 사이드는 사마르칸트부하라샤리아 법을 다시 도입하고, 이슬람 교리에 맞지 않는 상업 관련 세금을 폐지했다.[78][22][31] 그러나 제국에 재앙적인 결과를 가져온 백양조에 대한 최후의 원정 역시 아흐라르의 설득에 따른 것이었다.[22][78]

한편, "셰이크 올-이슬람"이라는 칭호를 가진 또 다른 강력한 수피인 부르한 앗 딘 역시 궁정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79][32] 그는 아흐라르와 달리 울루그 베그의 정책을 유지하고 몽골-튀르크 관습을 보존할 것을 주장했다.[79][32] 아부 사이드는 대부분 아흐라르의 견해를 따랐지만, 상황에 따라 두 셰이크의 권위를 모두 활용했다. 아흐라르의 영향력은 군대와 일반 민중에게 효과적이었고, 부르한 앗딘의 문화적 관심과 정부와의 연관성은 민중 봉기를 통제하는 데 유용하게 작용했다.[79][32]

아부 사이드가 농업과 농민들의 복지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 것은 이러한 민중 봉기에 대한 대응책이었을 가능성이 있다.[80][33] 그는 농업을 장려하는 방향으로 세금 제도를 개혁하고 기존의 관개 시스템을 개선하는 정책을 추진했다.[80][33] 특히 그의 재상이었던 쿠툽 앗딘 심나니는 헤라트 북쪽에 주이 술타니 수로(Juy-i Sultani Canal)를 건설하는 사업을 적극적으로 이끌었다.[80][33] 또한 마슈하드 지역에 물을 공급하는 굴리스탄 댐을 보수하는 작업도 이루어졌다.[83][36]

7. 유산

아부 사이드는 헤라트사마르칸트를 아우르며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던 마지막 티무르 군주 중 한 명이었다. 비록 생애 대부분을 전쟁 속에서 보냈지만, 약 20년간 티무르 제국의 상당 부분을 안정적으로 통치하며[87][88][22][41] 학문과 예술을 후원하는 등[90][42] 번영을 이끌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티무르샤 루흐 시대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그의 야망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으며,[91][41] 제국 내 지속적인 평화를 확립하는 데도 실패했다. 그의 사후 제국은 급격히 분열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즈베크인의 침공으로 대부분의 영토를 상실하게 된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그의 손자인 바부르는 새로운 활로를 찾아 인도 아대륙으로 향했고, 이는 훗날 무굴 제국 건국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92][93][94][22][43][44]

7. 1. 제국 분열과 후손들의 활약

아부 사이드는 헤라트사마르칸트를 동시에 통치하고 아제르바이잔까지 진군했던 마지막 티무르 군주였다. 그의 죽음과 함께 티무르 제국호라산시스탄을 제외한 페르시아 영토 대부분을 상실하였다.[75]

아부 사이드의 사후, 제국의 남은 영토는 분열되었다. 그의 아들들은 다음과 같이 영토를 나누어 가졌다.

아들상속 영토
술탄 아흐마드 (장남)사마르칸트, 부하라, 티무르 왕조 지배자 칭호
술탄 마흐무드 (차남)바다흐샨, 핫론, 테르메즈, 쿤두즈, 히사르
울루그 베그 2세 (삼남)카불, 가즈니
우마르 셰이크 2세 (사남)페르가나



한편, 티무르의 손자 우마르 샤이흐의 증손자인 후세인 바이카라는 헤라트를 장악하고 호라산과 호라즘을 확보하여 헤라트 정권을 부활시켰다. 그는 당대 티무르 왕조 군주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로 평가받기도 한다.[75]

아부 사이드는 약 20년간 계속된 전쟁 속에서도 광대한 영토를 유지하며 제국의 번영을 이끌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22][41] 15세기 역사가 미르크반드(Mīr-Khvānd)는 그의 저서 ''로즈앗 아스사파(Rawżat aṣ-ṣafāʾ)''에서 아부 사이드를 "티무르 가문의 군주들 중에서 최고의 기업가 정신, 고귀한 지위, 완벽한 식견을 가진 자"라고 묘사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투르키스탄(Turkestan), 투란(Turan), 호라산(Greater Khorasan), 자불리สถาน(Zabulistan), 시스탄(Sistan), 마잔다란(Mazandaran) 지역은 번영의 절정에 달했다고 전해진다.[42]

그러나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아부 사이드는 티무르나 샤 루크 시대의 제국 영광을 회복하는 데는 실패했다.[41] 그는 영토 내에 지속적인 평화를 구축하지 못했으며, 그의 사후 40년 이내에 대부분의 영토는 외부 세력에게 넘어갔다. 이러한 제국의 분열과 영토 상실은 결과적으로 그의 손자인 바부르(Babur)가 새로운 기회를 찾아 인도 아대륙(Indian subcontinent)을 정복하고 무굴 제국(Mughal Empire)을 건국하는 배경이 되었다.[22][43][44] 바부르는 페르가나를 상속받은 우마르 셰이크 2세와 차가타이 칸국 왕가 출신인 쿠트룩 니갈 하눔 사이에서 태어났다.

7. 2. 무굴 제국 건국과 역사적 의의

아부 사이드는 생애 대부분을 전쟁 속에서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20년 동안 안정적인 지배권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87][88][22][41] 15세기 역사학자 미르 카반드는 그의 저서 《라우자트 앗-사파》에서 아부 사이드를 "티무르 왕조의 왕자들 중 가장 뛰어난 분별력과 출신, 진취성을 가진 군주"로 높이 평가하며, 그의 통치 아래 투르키스탄, 투란, 호라산, 자불리스탄, 시스탄, 마잔다란 등이 번영했다고 기록했다.[90][42] 그는 학자, 성직자, 문인들의 친구이자 후원자였다고도 전해진다.[90][42]

하지만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아부 사이드는 티무르샤 루흐 시대와 같은 대제국을 재건하려는 그의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다.[91][41] 또한 그의 영토 내에 지속적인 평화를 가져오는 데도 실패했다. 그가 사망한 지 40년이 채 지나지 않아 우즈베크인의 침공으로 인해 그의 제국은 대부분 사라졌다. 그의 사후 헤라트를 중심으로 한 호라산과 호라즘 지역은 후세인 바이카라가 차지했으며, 나머지 사마르칸드 중심의 영토는 그의 아들들에게 분할되었다. 장남 술탄 아흐마드는 사마르칸트와 부하라를, 넷째 아들인 우마르 샤이흐 2세는 페르가나 분지를 상속받는 등 영토가 나뉘었다.

그러나 이러한 티무르 제국의 해체는 역설적으로 그의 손자인 바부르가 새로운 기회를 찾아 인도 아대륙으로 눈을 돌리게 만들었다.[22][43][44] 우마르 샤이흐 2세의 아들인 바부르는 페르가나에서 기반을 잃은 후 남하하여 인도를 정복하고 무굴 제국을 세우게 되는데, 이는 아부 사이드의 통치가 남긴 가장 중요한 역사적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92][93][94]

8. 가족 관계

아부 사이드 미르자는 39명의 배우자를 두었으며[45], 알려진 자녀만 60명에 달했다.[53]

'''배우자 목록'''

이름관계 / 출신
칸자다 베굼아부 르카이르 칸의 딸
라비아 술탄 베굼그의 삼촌 무함마드 티무르 미르자와 칸드 술탄 베기의 딸
아카 베굼 (타가이 샤)울루그 베그의 딸
쿳룰그 술탄 카눔
말릭 술탄 베굼오르두 부가 타르칸 아르군의 딸
샤 술탄 베굼 무갈
샤자다 베굼바다흐샨의 샤 술탄 무함마드의 딸
칸자다 베굼칸자다 타즈 알-딘 티르미지의 딸
살리하 술탄 아가차케 바를라스의 딸
자말 베기 아가 바를라스
다울라트 바흐트 아가카잔 셰이크 무갈의 딸
카니작 베기 아가셰이크 유수프 일케의 딸
우미드 아가기야스 베그의 아들 술탄 아흐마드의 딸
쿳룰그 베기 아가후다이다드의 아들 무함마드의 딸, 이브라힘 미르자의 전처
루카이야 술탄 베굼알라 알-다울라 미르자의 딸
훌르시드 베기 아가차무라드 악타지의 딸
딜샤드 아가차아미르 바얀의 아들 아미르 부주르그의 딸
바이 말릭 아가차잔 다르비시의 딸
아파크 아가차 쿠칼타시이브라힘 미르자의 의붓자매
샤훔 아가차아미르 야햐 쿠시지의 딸
하니파 술탄 아가차아미르 아잡 무갈의 딸
다울라트 술탄 아가차루스타므 투타의 딸
불간 아가차
막둠 아가차기야스 베그의 아들 술탄 무함마드의 친척
사아다트 바흐트 아가차바그다드의 피르자다 알리 아라카의 딸
아파크 아가차
고하르 술탄 아가차크와자 라스티의 딸
굴샤 아가차
샤 술탄 아가차
수부르 술탄 아가차아브드 알-셰이크의 딸
카디자 베기 후르드마울라나 나스르 알-딘의 딸
누스라트 술탄 아가차샤 사크드 왈리 술도즈의 딸
비비 술탄 아가차파룩샤 카우친의 딸
굴룩 술탄 아가차함자의 아들 유수프의 딸
자이나브 베기 아가술탄 아흐마드 술도즈의 딸
카디자 베굼아미르 무함마드 카와자의 아들 아미르 무함마드 사릭의 딸
하비바 술탄 베굼아미르 자랄 알-딘 수흐랍의 딸



'''자녀 목록'''


  • '''칸자다 베굼 (아부 르 카이르 칸의 딸) 사이에서:'''
  • * 술탄 무함마드

  • '''아카 베굼 (타가이 샤) 사이에서:'''
  • * 술탄 바디 알-물크
  • * 가우하르 샤드 베굼 (1531년 이후 사망)[46]
  • * 칸자다 베굼

  • '''말릭 술탄 베굼 사이에서:'''[47][48]
  • * 술탄 아흐마드 (1451 – 1494)
  • * 술탄 마흐무드 (1453 – 1495)
  • * 카디자 술탄 베기 (1531년 이후 사망)[46]

  • '''샤 술탄 베굼 무갈 사이에서:'''[49]
  • * 우마르 샤이크 미르자 2세 (1456 – 1494)

  • '''샤자다 베굼 사이에서:'''
  • * 아부 바크르 (1479년 사망)

  • '''칸자다 베굼 (칸자다 타지 알-딘 티르미지의 딸) 사이에서:'''
  • * 샤 무함마드

  • '''살리하 술탄 아가 사이에서:'''
  • * 주바이다 술탄 베기

  • '''다울라트 바흐트 아가 사이에서:'''
  • * 무함마드 자항기르
  • * 술탄 자항기르
  • * 술탄 칼릴
  • * 사아다트 술탄 베기
  • * 사힙 술탄 베기
  • * 비비 베굼

  • '''카니자크 베기 아가 사이에서:'''
  • * 술탄 이브라힘
  • * 술탄 바흐트 베기 (1531년 이후 사망)[46]
  • * 자한 술탄 베기

  • '''우미드 아가 사이에서:'''
  • * 아만 술탄 베기

  • '''쿠틀루그 베기 아가 사이에서:'''
  • * 우마르 (1478년 이후 사망)

  • '''루카이야 술탄 베굼 사이에서:'''
  • * 샤 루크 (1459 – 1493/4)
  • * 바이숭구르 (1456년 출생)
  • * 우룬 술탄 카눔; 바디 알-자만 미르자와 결혼[50]

  • '''쿠르시드 베기 아가차 사이에서:'''
  • * 쿠틀루그 타르칸 아가

  • '''딜샤드 아가차 사이에서:'''
  • * 술탄 산자르
  • * 파얀다 술탄 베굼; 술탄 후세인 바이카라와 결혼
  • * 라비아 술탄 베기; 미란 샤의 후손인 무함마드 카심과 결혼
  • * 아이샤 술탄 베기

  • '''바이 말릭 아가차 사이에서:'''
  • * 압둘라
  • * 술탄 무라드 (1475년 이후 사망)
  • * 샤르바누 베기; 술탄 후세인 바이카라와 결혼
  • * 미흐르 누시 베기
  • * 미흐르 바누 베기

  • '''아팍 아가차 쿠칼타시 사이에서:'''
  • * 술탄 베기
  • * 바드르 자말 베기 (1531년 이후 사망)[46]

  • '''샤훔 아가차 사이에서:'''
  • * 투만 아가
  • * 시린 베그 아가

  • '''하니파 술탄 아가차 사이에서:'''
  • * 술탄 무함마드 (약 1494년 사망)

  • '''다울라트 술탄 아가차 사이에서:'''
  • * 이스칸다르

  • '''불간 아가차 사이에서:'''
  • * 샤 만수르
  • * 마리아 술탄 베기

  • '''막두움 아가차 사이에서:'''
  • * 쿠틀루그 술탄 베기

  • '''사아다트 바흐트 아가차 사이에서:'''
  • * 크반드 술탄 베기

  • '''고하르 술탄 아가차 사이에서:'''
  • * 미란 샤
  • * 파크르 자한 베기 (1531년 이후 사망)[46]; 테르메즈의 미르 알라 알-물크와 결혼[51]
  • * 비비 칸 베기

  • '''굴샤 아가차 사이에서:'''
  • * 루스타마
  • * 다울라트 술탄 베기

  • '''샤 술탄 아가차 사이에서:'''
  • * 자이나브 베기

  • '''수부르 술탄 아가차 사이에서:'''
  • * 술탄 우스만

  • '''누스라트 술탄 아가차 사이에서:'''
  • * 술탄 왈라드 (1469년 이후 사망)

  • '''비비 술탄 아가차 사이에서:'''
  • * 무자파르

  • '''굴룩 술탄 아가차 사이에서:'''
  • * 아이샤 술탄 베기

  • '''자이나브 베기 아가 사이에서:'''
  • * 쿠틀루그 술탄 베기

  • '''어머니가 알려지지 않은 자녀들:'''
  • * 울루그 베그 2세 (1501/2년 사망)
  • * 크반드 술탄 베기
  • * 카디자 술탄 베기
  • * 아크 베굼[52] (1531년 이후 사망)[4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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