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냐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아시냐는 프랑스 혁명 시기인 1789년부터 1796년까지 프랑스에서 발행된 지폐로, 처음에는 교회 재산을 담보로 발행되었으나, 이후 불태환지폐로 남발되면서 경제 혼란을 야기했다. 아시냐는 혁명 정부의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한 조치였지만, 과도한 발행으로 가치가 폭락하고 인플레이션을 심화시켰다. 경제 통제 정책과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아시냐는 10년 가까이 유통되었으나, 결국 폐지되고 프랑스는 금속 화폐 체제로 복귀했다. 아시냐의 실패는 재정 정책의 중요성과 화폐 발행의 신중함을 보여주는 사례로, 다른 국가의 유사 사례와 함께 역사적 교훈을 제공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지폐 - 교자 (지폐)
교자는 송나라 시대 쓰촨 지방에서 철전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처음 발행된 지폐로, 사영 기업에서 시작하여 정부가 관장하며 널리 사용되었으나, 과도한 발행으로 인플레이션이 발생해 다른 화폐로 대체되었다. - 지폐 - 폴리머 지폐
폴리머 지폐는 위조 방지 및 내구성을 위해 개발된 종이 외 소재 지폐로, 호주에서 처음 실용화되어 40개국 이상에서 사용되지만, 생산 비용이 높고 특정 조건에서 손상될 수 있으며,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높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 프랑스의 경제사 - 자유방임주의
자유방임주의는 정부의 경제 개입을 최소화하고 시장의 자율적인 기능을 중시하는 경제 이념으로, 자유 경쟁을 통한 효율성 증대를 강조하지만 시장 실패와 불평등 심화 가능성에 대한 비판도 존재하며, 좌파 자유방임주의(자유시장 무정부주의)라는 이론도 있다. - 프랑스의 경제사 - 프랑스 프랑
프랑스 프랑은 프랑스 혁명 이후 도입되어 1999년 유로화로 대체될 때까지 사용된 프랑스의 화폐로, 십진법에 기반하여 재정립되었고 금은복본위제와 금본위제를 거쳤으며, 경제적 변동으로 평가절하와 신프랑 도입을 겪은 후 유로화에 통합되었다. - 프랑스 혁명 - 공화력 3년 헌법
공화력 3년 헌법은 프랑스 혁명기에 제정되어 총재정부의 구성과 운영을 규정하고 양원제 입법부와 집단 행정부를 구성했으나, 제한 선거 도입과 총재 정부의 문제로 나폴레옹 쿠데타로 폐지되었다. - 프랑스 혁명 - 공화력 8년 헌법
공화력 8년 헌법은 나폴레옹의 쿠데타 후 프랑스에 수립된 헌법으로, 나폴레옹을 제1통령으로 하는 통령정부를 통해 행정 권력을 집중시키고, 권한이 축소된 삼원제 입법부와 간접 선거 방식, 그리고 행정부 지원을 위한 국무원 신설을 특징으로 한다.
아시냐 | |
---|---|
개요 | |
종류 | 지폐 |
사용 기간 | 1789년 - 1796년 |
국가 | 프랑스 혁명 |
발행 | |
발행 기관 | 국유 재산 담보 |
첫 발행 | 1789년 |
마지막 발행 | 1796년 |
가치 | |
액면가 | 5 리브르에서 100 리브르 |
가치 하락 원인 | 과도한 발행 |
2. 역사적 배경
아시냐는 프랑스 혁명 기간 중 1789년부터 1796년까지 발행된 지폐이다. 처음에는 가톨릭 교회로부터 몰수하여 국유화한 토지를 담보로 발행되었으나,[1][2] 이후 불태환지폐로 남발되어 경제 혼란을 야기했다. 이는 당시 프랑스 혁명 정부가 직면한 심각한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한 극단적인 조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프랑스 경제에 큰 혼란을 초래했다.
1789년 12월 21일, 4억 리브르 상당의 아시냐가 처음 발행되었는데, 이는 5%의 이자를 가진 채권 형태였다.[6] 이 채권은 국유지 경매를 통해 상환될 예정이었다.[7] 초기 아시냐는 정치적 논란의 대상이었는데, 모리 등 입헌 군주주의자들은 아시냐 발행에 반대하며, 이는 재산의 불법적인 압수에 기반한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미라보는 "적자는 국가의 보물"이라며 아시냐 발행을 옹호했다.
1790년 4월, 아시냐는 법정 통화로 재정의되었다. 이는 혁명으로 인한 유동성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조치였다. 프랑스 왕실 재정 위기는 혁명 이후에도 개선되지 않았고, 네케르가 발행한 공채는 매수자가 없어 실패했다. 재정 부족은 할인 은행(Caisse d'escompte프랑스어)[42]에서 차입하여 메웠으나, 은행권 발행 증가와 금 보유액 감소로 이마저도 불가능해졌다. 네케르는 Caisse d'Escompte에서 차입할 것을 제안했지만, 이 사설 은행을 국립 은행으로 전환하여 잉글랜드 은행과 유사하게 만들려는 그의 계획은 실패했다.[3]
1789년 8월 4일 밤 선언으로 간접세가 폐지되어 세입이 감소했고, 토지 대장 부실로 새로운 세금 징수도 어려웠다. 채무 총액은 42억 6,200만 리브르에 달했고, 이자만 연간 2억 6,200만 리브르였다. 1790년 3월 17일과 4월 17일 법령으로 교회 예배액과 승려 연금이 세출에 추가되었다.
11월 14일, 네케르는 할인 은행을 국립 은행(중앙 은행)으로 전환하고 신 은행권을 발행하려 했으나, 의회는 존 로 시스템의 실패[44]를 이유로 거부했다. 대신 탈레랑의 제안에 따라 국유화된 교회 토지 재산 매각 이익을 담보로 하는 아시냐 발행이 결정되었다.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는 "국가 재산"을 국가에 반환해야 한다고 제안했다.[2]
1789년 12월 19일, 비상 할인 금고가 설립되고, 4억 리브르의 아시냐 지폐가 발행되었다. 이는 200, 300, 1,000 리브르의 토지 채권이었고, 이자는 5%였다. 그러나 매수자가 나타나지 않아 아시냐 유통이 어려웠고, 할인 은행 은행권 가치는 하락했다.
1790년 4월 17일, 두 번째 아시냐가 발행되었다. 이는 300, 1,000 리브르의 고액권이었고, 이자는 3%였다. 토지 교환은 실질적으로 토지 매각과 같았고, 아시냐는 신용을 얻어 유통되기 시작했다. 의회는 이를 부채 상환에 사용하려 했고, 이자 지급은 부채를 남기고 토지 매각을 저해한다고 판단하여 1790년 9월 29일, 무이자 아시냐를 발행하고 발행액을 12억 리브르로 늘렸다.
thumb
아시냐는 원래 지급 완료 후 국고로 돌아가면 불태워질 예정이었으나, 상각 기간이 길어져 전망이 불투명해졌다. 공안위원정부는 경제 통제로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려 했으나, 쿠데타로 정부가 붕괴되자 다시 폭락했다. 총재 정부는 자유주의를 신봉하여 경제 통제를 싫어했고, 강제로 채권을 국민에게 할당해 아시냐를 회수하려 했으나 비난을 받았다. 토지 어음을 발행하여 아시냐를 교환했으나, 이는 부유층에 국유지를 매각하는 것을 의미했고, 바브후의 음모라는 좌파 반란을 일으켰다. 결국 아시냐는 신용 회복 불가능으로 유통이 금지되었고, 프랑스는 다시 정식 통화만 발행했다.
2. 1. 혁명 이전의 재정 상황
프랑스 혁명 이전, 프랑스 왕실은 심각한 재정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41] 과도한 지출과 누적된 부채는 앙시앵 레짐의 고질적인 문제였으며, 여러 차례의 재정 개혁 시도에도 불구하고 해결되지 못했다. 자크 네케르는 재무 장관으로 복귀했지만, 혁명으로 인해 프랑스의 국가 신용이 하락하여 그가 발행한 공채는 매수자가 없었다.[41] 재정은 할인 은행으로부터의 차관에 의존했지만, 이마저도 한계에 달했다.[42]1789년 8월 4일 밤 선언으로 간접세가 폐지되면서 세입은 감소했지만, 새로운 세금 징수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41] 특권 폐지에 따른 보상으로 채무는 더욱 늘어났고, 11월 2일 교회 재산 국유화 및 이후 법령으로 국가의 지출은 더욱 증가했다.[41] 이러한 상황에서 11월 14일 네케르는 할인 은행을 국립 은행으로 전환하고 국가 보증 채권을 발행하려 했으나, 의회는 존 로 시스템의 실패를 떠올리며 이를 거부했다.[44]
결국 의회는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 페리고르의 제안에 따라 국유화된 교회 토지 재산을 담보로 하는 아시냐 지폐를 발행하기로 결정했다.[41] 1789년 12월 19일 비상 할인 금고가 설립되고, 4억 리브르의 아시냐 지폐가 발행되었다.[41] 초기 아시냐는 토지 채권 형태로 발행되었으나, 토지 매각 전망이 불투명하여 유통에 어려움을 겪었다.[41]
1790년 4월 17일, 아시냐는 토지와 교환 가능한 대용 지폐 형태로 재발행되었고, 이는 아시냐의 신용을 높여 유통을 촉진했다.[41] 의회는 아시냐를 부채 상환에 사용하기로 결정하고, 1790년 9월 29일 무이자 아시냐를 발행하여 발행액을 12억 리브르까지 늘렸다.[41] 그러나 아시냐는 원래 국고로 돌아가면 소각될 예정이었지만, 발행이 계속되면서 상각 기간이 길어져 전망이 불투명해졌다.
2. 2. 교회 재산 국유화와 아시냐 발행
아시냐는 프랑스 혁명 기간 중 1789년부터 1796년까지 발행된 지폐이다. 처음에는 가톨릭 교회로부터 몰수하여 국유화한 토지를 담보로 발행되었으나,[1][2] 이후 불태환지폐로 남발되어 경제 혼란을 야기했다.[3][4][5][6]
1789년 12월 21일, 4억 리브르 상당의 아시냐가 처음 발행되었는데, 이는 5%의 이자를 가진 채권 형태였다.[6] 이 채권은 국유지 경매를 통해 상환될 예정이었다.[7] 초기 아시냐는 정치적 논란의 대상이었는데, 모리 등 입헌 군주주의자들은 아시냐 발행에 반대했다.
1790년 4월, 아시냐는 법정 통화로 재정의되었다. 이는 혁명으로 인한 유동성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조치였다. 프랑스 왕실 재정 위기는 혁명 이후에도 개선되지 않았고, 네케르가 발행한 공채는 매수자가 없어 실패했다.[41] 재정 부족은 할인 은행(Caisse d'escompte프랑스어)[42]에서 차입하여 메웠으나, 은행권 발행 증가와 금 보유액 감소로 이마저도 불가능해졌다.
1789년 8월 4일 밤 선언으로 간접세가 폐지되어 세입이 감소했고, 토지 대장 부실로 새로운 세금 징수도 어려웠다. 채무 총액은 42억 6,200만 리브르에 달했고, 이자만 연간 2억 6,200만 리브르였다. 1790년 3월 17일과 4월 17일 법령으로 교회 예배액과 승려 연금이 세출에 추가되었다.
11월 14일, 네케르는 할인 은행을 국립 은행(중앙 은행)으로 전환하고 신 은행권을 발행하려 했으나, 의회는 존 로 시스템의 실패[44]를 이유로 거부했다. 대신 탈레랑의 제안에 따라 국유화된 교회 토지 재산 매각 이익을 담보로 하는 아시냐 발행이 결정되었다.
1789년 12월 19일, 비상 할인 금고가 설립되고, 4억 리브르의 아시냐 지폐가 발행되었다. 이는 200, 300, 1,000 리브르의 토지 채권이었고, 이자는 5%였다. 그러나 매수자가 나타나지 않아 아시냐 유통이 어려웠고, 할인 은행 은행권 가치는 하락했다.
1790년 4월 17일, 두 번째 아시냐가 발행되었다. 이는 300, 1,000 리브르의 고액권이었고, 이자는 3%였다. 토지 교환은 실질적으로 토지 매각과 같았고, 아시냐는 신용을 얻어 유통되기 시작했다. 의회는 이를 부채 상환에 사용하려 했고, 이자 지급은 부채를 남기고 토지 매각을 저해한다고 판단하여 1790년 9월 29일, 무이자 아시냐를 발행하고 발행액을 12억 리브르로 늘렸다.
thumb
아시냐는 원래 지급 완료 후 국고로 돌아가면 불태워질 예정이었으나, 상각 기간이 길어져 전망이 불투명해졌다. 공안위원정부는 경제 통제로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려 했으나, 쿠데타로 정부가 붕괴되자 다시 폭락했다. 총재 정부는 자유주의를 신봉하여 경제 통제를 싫어했고, 강제로 채권을 국민에게 할당해 아시냐를 회수하려 했으나 비난을 받았다. 토지 어음을 발행하여 아시냐를 교환했으나, 이는 부유층에 국유지를 매각하는 것을 의미했고, 바브후의 음모라는 좌파 반란을 일으켰다. 결국 아시냐는 신용 회복 불가능으로 유통이 금지되었고, 프랑스는 다시 정식 통화만 발행했다.
3. 아시냐의 발행과 유통
아시냐(Assignats)는 프랑스 혁명 시기인 1789년부터 1796년까지 제헌 의회가 발행한 지폐(fiat currency)였다.[1] 이는 당초 국가가 몰수한 왕실 재산과 가톨릭 교회 재산을 담보로 발행되었다.[1][2] 9월에는 국고가 비어 있었고,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는 "국가 재산"을 국가에 반환해야 한다고 제안했다.[1][2] 네케르는 Caisse d'Escompte에서 차입하고, 이 은행을 국립 은행으로 전환하려 했으나 실패했다.[3] 일반적인 파산은 확실해 보였다.[4][5]
1789년 12월 21일, 400,000 리브르 상당의 아시냐를 발행하는 첫 번째 법령이 통과되었는데, 이는 5%의 이자율을 가진 부채 증서였으며, "Biens nationaux" 경매를 기반으로 담보되고 상환되었다.[6] 아시냐는 즉시 정치적 논란의 대상이 되었고, 모리 등은 이에 반대했다.
아시냐는 처음에는 국가의 채권자에게 지급되었고, 채권자는 이것을 사용하여 국유지를 구매할 수 있었다. 아시냐는 이 목적을 위해 다른 형태의 화폐보다 우선권을 가졌다.[7]
thumb
원래 채권으로 의도되었던 아시냐는 1790년 4월에 법정 통화 (assignats-monnaie)로 재정의되었다.
3. 1. 초기 아시냐
아시냐(Assignats)는 프랑스 혁명 시기인 1789년부터 1796년까지 제헌 의회가 발행한 지폐(fiat currency)였다.[1] 이는 당초 국가가 몰수한 왕실 재산과 가톨릭 교회 재산을 담보로 발행되었다.[1][2] 9월에는 국고가 비어 있었고,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는 "국가 재산"을 국가에 반환해야 한다고 제안했다.[1][2] 네케르는 Caisse d'Escompte에서 차입하고, 이 은행을 국립 은행으로 전환하려 했으나 실패했다.[3] 일반적인 파산은 확실해 보였다.[4][5]
1789년 12월 21일, 400,000 리브르 상당의 아시냐를 발행하는 첫 번째 법령이 통과되었는데, 이는 5%의 이자율을 가진 부채 증서였으며, "Biens nationaux" 경매를 기반으로 담보되고 상환되었다.[6] 아시냐는 즉시 정치적 논란의 대상이 되었고, 모리 등은 이에 반대했다.
아시냐는 처음에는 국가의 채권자에게 지급되었고, 채권자는 이것을 사용하여 국유지를 구매할 수 있었다. 아시냐는 이 목적을 위해 다른 형태의 화폐보다 우선권을 가졌다.[7]
thumb
원래 채권으로 의도되었던 아시냐는 1790년 4월에 법정 통화 (assignats-monnaie)로 재정의되었다.
3. 2. 아시냐의 법정 통화화
아시냐(Assignats)는 프랑스 혁명 기간인 1789년부터 1796년까지 제헌 의회가 발행한 지폐(fiat currency)였다.[1] 긴급한 파산을 해결하기 위해 승인된 이 지폐는 원래 국가가 소유한 재산, 즉 왕실 재산과 미라보의 제안으로 몰수한 가톨릭 교회의 재산을 담보로 발행되었다.[1][2]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는 "국가 재산"을 국가에 반환해야 한다고 제안했고[2], 네케르는 Caisse d'Escompte에서 차입하여 국립 은행으로 전환하려 했으나 실패했다.[3] 일반적인 파산은 확실해 보였다.[4][5]
1789년 12월 21일, 400,000 리브르 상당의 아시냐를 발행하는 첫 번째 법령이 통과되었으며, 이는 5%의 이자율을 가진 부채 증서로, "Biens nationaux" 경매를 기반으로 담보되고 상환되었다.[6] 아시냐는 즉시 모리, 카잘레스 등 입헌 군주주의자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아시냐는 처음에는 국가의 채권자에게 지급되었고, 채권자들은 이를 사용하여 국유지를 구매할 수 있었다. 아시냐는 이 목적을 위해 다른 형태의 화폐보다 우선권을 가졌다.[7]
thumb
원래 채권으로 의도되었던 아시냐는 1790년 4월, 혁명의 불안정한 상황으로 인한 유동성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법정 통화 (assignats-monnaie)로 재정의되었다.
4. 아시냐의 가치 하락과 경제 혼란
아시냐는 가톨릭 교회로부터 몰수하여 국유화 시킨 가톨릭 교회 재산의 토지를 담보로 발행되었고, 그 후 불태환지폐로 증쇄가 남발되어 신용이 극도로 실추되었으며, 경제적 혼란을 심화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공안위원정부는 경제 통제를 강화함으로써 인플레이션 억제를 시도했고, 일시적으로 성공했지만, 정부가 쿠데타로 붕괴되자 다시 폭락을 시작했다.
계속된 총재 정부는 자유주의를 신봉하는 부르주아를 지지기반으로 했기 때문에 경제를 통제하는 방법을 싫어했고, 강제로 채권을 국민에게 할당해 구입하게 한 아시냐 지폐를 시장에서 회수하려 했지만 이 정책은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계속 토지 어음을 발행하여 1:30의 교환 비율로 아시냐를 교환했는데, 이것은 단지 그런 가격으로 국유지를 부유층에 매각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바브후의 음모라는 좌파의 반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토지 어음도 지폐화되었지만, 그 아시냐와 실가격 비율은 1:400 정도였다. 그러나 정식 통화에 대해서는 토지 어음도 2 ~ 3 프랑의 가치 밖에 되지 않았다.
결국, 아시냐의 신용회복 불가능으로 지폐의 유통이 금지되었다. 프랑스는 다시 정식 통화만 발행했다.
== 아시냐 증발과 인플레이션 ==
에티엔 클라비에르(Étienne Clavière)는 국부(國富)를 나타내고 법정 통화로 기능하는 대규모 아시냐 발행을 로비했다.[8] 1790년 4월 17일, 이 지폐는 법정 통화로 선언되었지만 이자는 3%로 감소했다.[9] 아시냐는 동전 부족을 보충하고 산업과 무역을 부활시킬 것이었다.[10] 아시냐가 지급되면 소각해야 했다.[11] 그러나 아시냐가 유통되기 시작하자마자 그 가치는 5% 감소했다.[12] 피에르 사무엘 뒤 퐁 드 네무르(Pierre Samuel du Pont de Nemours)는 아시냐 발행이 빵 가격을 두 배로 올릴 것이라고 우려했다.[13]
자크 네케르(Jacques Necker)는 8월 27일 국민 의회에서 아시냐가 프랑스를 파산시킬 지폐라고 주장했다.[14] 탈레랑도 로의 계획과 같은 운명을 겪을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그들을 공격했다.[15] 아르망-가스통 카뮈(Armand-Gaston Camus)는 금속 화폐를 훼손하고 물가를 급등시킨 미국의 지폐 경험에서 얻은 교훈이라고 믿는 것을 강조했다.[15] 콩도르세와 피에르 사무엘 뒤 퐁 드 네무르는 아시냐가 은 및 기타 형태의 동전을 몰아내고, 지폐 대비 물가를 상승시켜 상업을 위험하게 제한할 것이라고 주장했다.[16] 이 모든 저술가들은 재무부 증권을 할인 은행을 통해 발행하고, 세금 제도를 개정하고, 대출을 늘리는 것을 선호했다.[16]
1790년 8월 27일, 의회는 19억 아시냐를 추가 발행하기로 결정했으며, 이는 연말까지 모든 행위에 대해 법정 통화가 될 것이고, 누구나 획득하여 일반적인 상거래에 사용할 수 있는 지폐가 될 것이다. 반동적 경향이 의심받던 네케르는 아시냐를 지폐로 전환하는 것에 단호히 반대하며 9월 3일 사임했다.[17] 19억의 대규모의 위험한 발행을 그는 8억으로 줄이는 데 성공했지만, 공격이 그의 사임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18][19] 네케르는 "국가 화폐"를 요구한 그의 가장 강력한 반대자인 미라보 백작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20]
1790년 9월까지, 모든 승인된 아시냐는 정부에 의해 지급되었다. 지폐 지지자들은 아시냐가 토지에 의해 보증되므로, 그 토지를 매각하는 속도와 동일한 속도로 회수하고 소각하는 한 더 많은 지폐를 안전하게 발행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790년 9월 29일, 국민 의회는 8억 리브르를 추가 발행하도록 승인하고 아시냐에 대한 이자를 완전히 폐지했다.[21] 네케르는 배당금을 지급하려는 지폐가 곧 가치가 없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아무도 아시냐를 만들 권리가 없었기 때문에 곧 모두가 그렇게 하기 시작할 것이다.[5] 프랑수아 자비에 마르크 앙투안 드 몽테스키우-페쟁삭(François-Xavier-Marc-Antoine de Montesquiou-Fézensac)은 아시냐 발행을 담당하면서 주식 투기와 탐욕을 두려워했다.[22] 1790년 9월까지, 아시냐는 진정한 유통 지폐가 되었고, 이자 없는 8억 리브르 상당의 지폐가 최초 발행에 추가되었으며, 액면가는 50, 60, 70, 80, 90, 100, 500, 2000 리브르였으며 법정 통화 지위를 가졌다. 소액권은 광범위한 유통을 보장하기 위해 대량으로 생산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경제를 자극했지만 인플레이션 압력도 증가시켰다.[23]
thumb]]
구체제 관직자(판사, 군 계급 등)의 재산에 대한 보상 비용이 혁명의 상속 부채에 더해지면서, 국민 의회는 1790년 9월 추가 아시냐를 발행하는 데 대해 근소한 차이로 투표했으며,[24] 처음에는 8억 프랑이 추가되었다. 1791년 9월까지, 아시냐의 가치는 18–20% 하락했다.[25]
아시냐를 뒷받침하는 재산은 ''국가 재산''(biens nationaux)으로 이름이 변경되었고, 지역 수준 당국에 의해 경매되었다. 1790년 3월 10일, 페티옹의 제안에 따라 교회의 재산 관리가 시로 이관되었다.[26] 이러한 재산의 판매를 통해, 아시냐는 정부 부채의 상당 부분을 성공적으로 상환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토지 판매가 원래 의도였기 때문에, 아시냐는 일상적인 교환 수단으로 잘 작동하지 않는 대액면권(50, 100, 200, 1000 리브르)으로만 발행되었다. 또한, 국민 의회는 아시냐와 (여전히 유통되는) 구체제 동전을 액면가로 교환하도록 결코 의무화하지 않았다. 이미 1790년 가을, 국민 의회 자체는 대액면 아시냐를 소액 동전으로 교환하는 데 7.5%의 수수료를 지불하고 있었다. 1791년 말까지 할인율은 종종 20% 이상이었다.[27] 1792년 2월 1일 아시냐는 거의 50% 하락했다.[28] 애국적인 혁명가들은 아시냐의 가치 하락을 외국 음모로 비난했다. 클라비에르는 국가 연합이 아시냐의 붕괴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스티븐 D. 딜레이(Stephen D. Dillaye)는 영국, 벨기에, 스위스가 통화를 산업적으로 위조했다고 썼다. "런던에는 17개의 제조 시설이 완전히 가동되어 가짜 및 위조 아시냐 생산에 400명의 인력이 투입되었습니다."[33] 1792년 10월 17일, 24억 아시냐가 유통되었다.
프랑스 혁명 전쟁이 발발하고, 군주제가 무너지고, 프랑스 제1 공화국이 선포된 후, 국민공회는 지폐와 동전의 액면가 교환을 의무화했지만, 이 법은 시행될 수 없었다. 대신 아시냐는 계속해서 가치가 하락했다. 1793년 4월 10일, 로베스피에르는 연설에서 뒤무리에와 그의 지지자들이 벨기에에서 아시냐의 유통을 막아 공공 재정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고 뒤무리에를 비난했다.[29]
아시냐 위조는 프랑스 안팎에서 만연했다.[30][31][32] 1793년 8월까지 유통된 아시냐의 양은 50억으로 두 배로 증가했다. 물가 상승과 식량 부족은 9월에 공공의 불안을 악화시켰다. 1793년의 ''최고 가격법''과 같은 법안은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1793년 11월 8일, 아시냐 제조 책임자 :fr:Simon-François Lamarche가 처형되었다. 12월 2일에는 클라비에르가 체포되었고, 일주일 안에 자살했다. 1794년 2월 24일에는 "최고 가격"을 모든 상품으로 확대하면서 혼란만 가중되었다. 교역은 마비되었고 모든 제조업 시설이 문을 닫았다.[7] 1794년 6월까지 발행된 아시냐의 총액은 거의 80억에 달했고, 아시냐는 점점 더 가치를 잃어갔다. 8월에 테르미도르파 국민공회는 "경제적 자유"를 내세워 최고 가격법을 폐지했고, 아시냐는 다음 해에 거의 모든 가치를 잃었다. 아시냐는 1794년 8월에 액면가의 31%에서 11월에는 24%, 2월에는 17%, 1795년 4월에는 8%로 하락했다.[34] 총재정부는 아시냐를 대체하기 위해 토지 증서 형태의 통화인 만다를 발행했지만, 이 역시 빠르게 실패했고 국가는 심각한 할인율로 이를 회수했다. 나폴레옹은 모든 불환 화폐에 반대했다. 1830년대에서 1840년대에 아시냐와 혁명 기간 동안 발행된 다른 지폐들은 수집품이 되었다.
아시냐 지폐 가치 하락 문제는 피에르사뮈엘 뒤퐁 드 뇌무르(Pierre Samuel du Pont de Nemours)[46] 의원 등으로부터 발행 전부터 지적되었다. 그러나 미라보 등은 이러한 우려를 일축했고, 정부는 에퀴 은화와 같은 소액 동전이 즉시 대량으로 필요했기 때문에 정화를 회수하기 위해 오히려 손해를 보면서까지 아시냐와 교환했다. 루이 금화와 아시냐의 거래소는 정부에 의해 상장되었고, '''투기'''가 시작되었다. 프리미엄은 처음에는 6 - 7%였지만, 곧 10%, 15%, 20%로 증가했다. 정부는 정화 회수를 우선시하며 이러한 합법적인 인플레이션을 방치했다. 충분한 강제 통용력은 부여되지 않았기[47] 때문에, 이용자가 선택하면 된다는 정도였지만, 이는 명백히 안일한 판단이었다.
'''유통량 증가'''는 아시냐의 가치를 급격히 하락시켰다. 제헌 의회는 1791년 5월 18일에 6억 리브르, 다음 달에는 5리브르 소액 지폐로 1억 리브르를 추가 발행했고, 바렌 사건 전날인 6월 19일에는 다양한 액면으로 총 4억 8,000리브르를 발행하도록 허가했다. 푀양파가 주도한 입법 의회는 구 체제의 채권 상환에 충실했으며, 청산을 위해 아시냐와 국가 채권이 잇따라 발행되었다. 12월 17일에 3억 리브르, 1792년 4월 30일에 3억 리브르를 증쇄했고, 이 기간 동안 회수된 것은 3억 7,000만 리브르에 불과했다. 게다가 5월 17일에는 9억 8,000리브르를 증쇄했다. 지롱드파 내각의 재무 장관 에티엔 클라비에르[48]는 난발에 제한을 가하고, 발행과 회수의 균형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의회에서 거부당했다.
의회는 잠시 동안 일반 소비자에게 유통되는 소액의 보조 지폐 발행을 주저했지만, 당시 프랑스에서는 증가 일로에 있던 망명으로 인해 해외로 '''정화가 유출'''되었고, 은화나 동화라는 소액 동전이야말로 극도로 부족해졌기에, 소액 아시냐 발행 또한 피할 수 없었다. 지롱드파는 망명 귀족과 왕족의 재산을 몰수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고 귀금속을 압수하려 했지만, 이번에는 국왕의 거부권에 의해 시행되지 못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이미 소액 지폐를 더 증쇄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고액 아시냐와 소액 아시냐 사이에서도 프리미엄이 발생했다.
의회가 소액 아시냐 발행을 주저하는 동안, 대 상인과 은행가들은 의회를 따라 개인적으로 1 수 동전을 주조하거나, 각 은행이 독자적으로 저액의 신용 지폐[49]를 발행하기 시작하여 일반 소비자에게 유통시켰다. 대립하는 지폐의 등장은 그 자체만으로 아시냐의 가치를 떨어뜨렸지만, 상인과 은행가들은 보조 통화나 신용 지폐와의 교환으로 모은 아시냐 자금을 선물 거래 등의 투기 시장에 투입하거나, 가격 상승을 예상한 물자(곡물, 밀가루, 설탕 등)를 사재기하여 창고에 저장했다. 이른바 '''매점 매석꾼'''의 등장이다. 이로 인해 물가는 더욱 치솟았고, 아시냐의 가치는 더욱 하락했다. 폭리를 취한 매점 매석꾼이 있는 한편, 일부 은행과 몇몇 투자자는 이 투기에 실패하여 파산했지만, 그 신용 불안도 아시냐에 영향을 미쳤다. 농민들도 밀을 시장에 내놓아 하락하는 아시냐와 교환하기보다는, 보관하는 쪽을 선택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공급 부족은 물가 상승을 가속화하고, 상호 작용의 '''악순환'''을 낳았다. 아시냐의 하락과 빵 부족은 이것을 받는 임금 노동자 등 상퀼로트에게는 큰 골칫거리였으며, 시장에는 동전 가격과 아시냐 가격의 두 가지 가격표가 곧 등장했다. 아시냐의 하락은 시민 생활에 직접적인 피해를 입히게 되었고, 상퀼로트는 상인에 대한 분노를 키워갔다. 공안 위원회는 에베르파의 압력을 받아 1793년에 일반 최고 가격법을 도입했지만, 이는 가치 하락에 대해서는 효과가 없었다. 아시냐는 미판매 국유지의 수확물을 담보로 했기 때문에, 일반 최고 가격법으로 농산물 가격이 억제되면, 담보 가치가 제한될 뿐만 아니라, 국유지에 매수자가 나타나지 않을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 단계에서 시장에는 35억 리브르 이상의 아시냐가 유통되고 있었다. 1791년 11월 9일에 성립되었지만 그 당시 국왕 거부권으로 시행되지 못했던 망명자 처벌법에 의한 몰수 재산(약 20억 리브르)이 재원으로 사용되었고, 게다가 몰타 기사단의 4억 리브르도 절취되어 예비 자금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혁명 전쟁이 시작되면서 '''군사비'''는 막대한 액수가 되었고, 기대했던 점령지에서의 임시세는 미미했기 때문에, 추가적인 아시냐 증쇄가 필요하게 되었다. 테르미도르 쿠데타가 일어나기까지 약 110억 리브르 이상의 아시냐가 유통되었지만, 이 기간 동안 회수하여 소각할 수 있었던 것은, 1793년에 8억 8,100만 리브르, 1794년에 20억 리브르에 그쳤다.
한편, '''외국의 음모'''도 아시냐 하락을 부추겼다. 칼론은 루이 16세의 신임을 받아 반혁명 운동을 벌였다. 그 책략으로 공장에서 대량의 아시냐 위조 지폐를 만들어 시장에 투입하여 혁명 정부를 붕괴시킬 의도로 살포했다. 이 '''위조 지폐 정책'''은 나중에는 영국에도 계승되었다. 1794년까지는 프랑스 국내에서 위조 지폐가 인쇄되어 반혁명의 자금원이 되었지만, 탄압을 받아, 다음 해부터는 인쇄 장소를 런던으로 옮겼다. 오슈 장군이 저지한 1795년 7월 16일 - 21일의 퀴브롱 상륙 때에는, 이 런던산 수십억의 위조 아시냐가 압수되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무렵에는 가치 하락의 속도가 더 빨라져서, 위조 지폐는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 경제 통제 정책과 실패 ==
프랑스 혁명 전쟁 중, 국민공회는 아시냐의 가치 하락을 막기 위해 여러 경제 통제 정책을 시행했다. 1793년 4월, 로베스피에르는 뒤무리에가 아시냐 유통을 방해했다고 비난했다.[29] 아시냐 위조는 프랑스 안팎에서 만연했으며,[30][31][32] 영국 당국과 협력한 왕당파가 위조에 가담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33]
1793년 8월, 유통된 아시냐의 양은 50억으로 증가했고, 물가 상승과 식량 부족으로 9월에 공공 불안이 심화되자 최고 가격법이 제정되었다. 1793년 11월 8일, 아시냐 제조 책임자 :fr:Simon-François Lamarche가 처형되었고, 1794년 2월 24일에는 "최고 가격"이 모든 상품으로 확대되어 혼란이 가중되었다.[7] 교역은 마비되었고 모든 제조업 시설이 문을 닫았다.[7]
1794년 6월, 발행된 아시냐의 총액은 거의 80억에 달했지만, 아시냐는 계속 가치를 잃었다. 8월, 테르미도르파 국민공회는 최고 가격법을 폐지했고, 아시냐는 다음 해에 거의 모든 가치를 잃었다.[34] 1795년 5월 말, 유통액은 100억을 넘었고, 7월 말에는 140억으로 증가했다.[35] 1796년, 총재정부는 아시냐를 대체하기 위해 만다를 발행했지만 실패했고, 국가는 심각한 할인율로 이를 회수했다. 나폴레옹은 모든 불환 화폐에 반대했다.
재정 문제는 헌법 제정 의회, 입법 의회, 국민 공회, 총재 정부를 거치며 재정 위원회(Comité des Finances프랑스어)에서 논의되었으며, 조제프 캉봉 등이 주도했다.[52] 중간 파벌은 혁명을 지지하는 부르주아지의 대변인이었지만, 부르주아지의 이해관계는 다양하여 대립과 분열이 반복되었다.
입법 의회에서 캉봉 등은 아시냐 남발을 막으려 했으나, 구 특권 계급의 이익을 우선시한 푀양파에 의해 저지되었다. 군사비 증가로 재원이 부족해지자,[53] 캉봉은 1792년 11월 예상 수입과 지출을 공표하며 아시냐 증발을 통한 적자 지출 보전을 주장했다.
8월 10일 사건 이후, 국민 공회는 상퀼로트의 압박으로 아시냐 하락 대책을 요구받았다. 캉봉은 1793년 4월 8일, 강제 유통 등 5가지 방침을 제안했고, 4월 11일 '''강제 유통''' 법안이 가결되었다. 그러나 강제 유통만으로는 아시냐의 신용 회복이 어려웠다.
5월 20일, 라멜은 '''누진 강제 공채'''를 제안했고, 캉봉은 이를 혁명세라 주장하며 찬성했다. 지롱드파는 반대했지만, 원칙만 가결되었다. 지롱드파는 산악파를 억누르려다 실각했고, 파리 코뮌은 강제 공채 징수를 지시했다.
산악파와 평원파는 6월 22일, 누진 강제 공채 과세 최저 한도를 올리는 수정안을 가결했다. 경제 테러가 시작되었고, 파견 의원과 자치 단체 장에게 과세 대상 선정과 과세액 설정 권한이 부여되어 오염과 부정이 확산되었다. 7월, 루이 16세 초상이 인쇄된 구 아시냐의 강제 통용력이 상실되었다.
8월 24일, 캉봉은 주식 회사의 해산을 명령했다. 인플레이션 심화로 앙라제와 에베르파가 대두했지만, 일반 최고 가격법과 강제 징발로 일시적 안정을 찾았다. 11월 26일, '''귀금속 유통 금지'''로 아시냐 강제 유통이 철저해졌고, 국고 편입으로 신용력이 높아져 12월에는 액면가의 절반까지 회복했다. 그러나 강제적 가격 설정과 징발은 장기적으로 물자 부족을 초래했고, 1794년 봄 식량 위기가 재연되었다.
'''테르미도르 반동''' 이후, 국민 공회는 부르주아지 측이 유력해져 상업과 산업의 자유가 부활했지만, 경제 상황은 악화되었다. 12월 24일, 일반 최고 가격법이 철폐되었고, 12월 27일에는 통제 해제가 선언되었다. 1795년 1월 31일, 외국 무역 금지도 철폐되어 물가가 급등했다.
테르미도르파는 1795년 1월, 아시냐 발행을 허가했고, 아시냐 가치는 급락했다. 투기가 성행했고, 3월 말 제르미날의 폭동 직전에는 액면 100리브르의 아시냐 실질 가치가 12리브르 15수였다. 9월에는 3리브르 15수였다.[56] 총재 정부는 인쇄기를 풀가동했고, 발행량이 늘어날수록 감가는 진행되었다. 5월, 유통액은 114억 리브르였고, 연말에는 300억 리브르 이상이었다.
물자 결핍은 아니었지만, 물가 상승, 투기, 매점 매석이 경제를 마비시켰다. 총재 정부기에는 빈민 봉기가 잇따랐고, 군대가 진압했다. 제도는 지롱드파 추방 이전으로 돌아갔고, 산악파는 괴멸했다. 재정 위원회에서는 캉봉이 실각하고, 장 조제프 조아노(Jean Joseph Johannot프랑스어)[57]에게 지도권이 넘어갔다.
== 정치적 불안정과 아시냐 ==
에티엔 클라비에르는 국부를 나타내고 법정 통화로 기능하는 대규모 아시냐 발행을 로비했다.[8] 1790년 4월 17일, 이 지폐는 법정 통화로 선언되었지만 이자는 3%로 감소했다.[9] 아시냐는 동전 부족을 보충하고 산업과 무역을 부활시킬 것이었다.[10] 아시냐가 지급되면 소각해야 했다.[11] 그러나 아시냐가 유통되기 시작하자마자 그 가치는 5% 감소했다.[12]
자크 네케르는 8월 27일 국민 의회에서 아시냐가 프랑스를 파산시킬 지폐라고 주장했다.[14] 아르망-가스통 카뮈는 금속 화폐를 훼손하고 물가를 급등시킨 미국의 지폐 경험에서 얻은 교훈이라고 믿는 것을 강조했다.[15] 콩도르세와 피에르 사무엘 뒤 퐁 드 네무르는 아시냐가 은 및 기타 형태의 동전을 몰아내고, 지폐 대비 물가를 상승시켜 상업을 위험하게 제한할 것이라고 주장했다.[16] 그럼에도 1790년 8월 27일, 의회는 19억 아시냐를 추가 발행하기로 결정했으며, 이는 연말까지 모든 행위에 대해 법정 통화가 될 것이고, 누구나 획득하여 일반적인 상거래에 사용할 수 있는 지폐가 될 것이다. 반동적 경향이 의심받던 네케르는 아시냐를 지폐로 전환하는 것에 단호히 반대하며 9월 3일 사임했다.[17] 1790년 9월까지, 모든 승인된 아시냐는 정부에 의해 지급되었다. 1790년 9월 29일, 국민 의회는 8억 리브르를 추가 발행하도록 승인하고 아시냐에 대한 이자를 완전히 폐지했다.[21]
thumb]]
1790년 9월까지, 아시냐는 진정한 유통 지폐가 되었고, 이자 없는 8억 리브르 상당의 지폐가 최초 발행에 추가되었으며, 액면가는 50, 60, 70, 80, 90, 100, 500, 2000 리브르였으며 법정 통화 지위를 가졌다. 소액권은 광범위한 유통을 보장하기 위해 대량으로 생산되었다.[23] 구체제 관직의 재산에 대한 보상 비용이 혁명의 상속 부채에 더해지면서, 국민 의회는 1790년 9월 추가 아시냐를 발행하는 데 대해 근소한 차이로 투표했다.[24] 1791년 9월까지, 아시냐의 가치는 18–20% 하락했다.[25] 1792년 2월 1일 아시냐는 거의 50% 하락했다.[28]
프랑스 혁명 전쟁이 발발하고, 군주제가 무너지고, 프랑스 제1 공화국이 선포된 후, 국민공회는 지폐와 동전의 액면가 교환을 의무화했지만, 이 법은 시행될 수 없었다. 대신 아시냐는 계속해서 가치가 하락했다. 1793년 8월까지 유통된 아시냐의 양은 50억으로 두 배로 증가했다. 1793년의 ''최고 가격법''과 같은 법안은 물가 상승과 식량 부족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아시냐 위조는 프랑스 안팎에서 만연했다.[30][31][32] 스티븐 D. 딜레이는 영국, 벨기에, 스위스가 통화를 산업적으로 위조했다고 썼다.[33] "런던에는 17개의 제조 시설이 완전히 가동되어 가짜 및 위조 아시냐 생산에 400명의 인력이 투입되었습니다."
thumb에서의 아시냐의 정화(에퀴)와의 교환 비율(1789년 - 1796년)]]
아시냐 지폐는 정화에 비해 가치가 낮다는 문제는 피에르사뮈엘 뒤퐁 드 뇌무르(Pierre Samuel du Pont de Nemours) 의원 등으로부터 발행 전부터 지적되었다.[46] 그러나 미라보 등은 이러한 우려를 일축했고, 정부는 군대나 관료 등의 급여 지급에 에퀴 은화와 같은 소액 동전이 즉시 대량으로 필요했기 때문에 정화를 회수하기 위해 오히려 손해를 보면서까지 아시냐와 교환했다. 루이 금화와 아시냐의 거래소는 정부에 의해 상장되었고, '''투기'''가 시작되었다. 프리미엄은 처음에는 6 - 7%였지만, 곧 10%, 15%, 20%로 증가했다. 정부는 정화 회수를 우선시하며 이러한 합법적인 인플레이션을 방치했다.
'''유통량 증가'''는 아시냐의 가치를 급격히 하락시켰다. 제헌 의회는 1791년 6억 리브르, 다음 달에는 5리브르 소액 지폐로 1억 리브르를 추가 발행했고, 바렌 사건 전날인 6월 19일에는 다양한 액면으로 총 4억 8,000리브르를 발행하도록 허가했다. 푀양파가 주도
4. 1. 아시냐 증발과 인플레이션
에티엔 클라비에르(Étienne Clavière)는 국부(國富)를 나타내고 법정 통화로 기능하는 대규모 아시냐 발행을 로비했다.[8] 1790년 4월 17일, 이 지폐는 법정 통화로 선언되었지만 이자는 3%로 감소했다.[9] 아시냐는 동전 부족을 보충하고 산업과 무역을 부활시킬 것이었다.[10] 아시냐가 지급되면 소각해야 했다.[11] 그러나 아시냐가 유통되기 시작하자마자 그 가치는 5% 감소했다.[12] 뒤 퐁 드 네무르는 아시냐 발행이 빵 가격을 두 배로 올릴 것이라고 우려했다.[13]자크 네케르(Jacques Necker)는 8월 27일 국민 의회에서 아시냐가 프랑스를 파산시킬 지폐라고 주장했다.[14] 탈레랑도 로의 계획과 같은 운명을 겪을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그들을 공격했다.[15] 아르망-가스통 카뮈(Armand-Gaston Camus)는 금속 화폐를 훼손하고 물가를 급등시킨 미국의 지폐 경험에서 얻은 교훈이라고 믿는 것을 강조했다.[15] 콩도르세와 피에르 사무엘 뒤 퐁 드 네무르(Pierre Samuel du Pont de Nemours)는 아시냐가 은 및 기타 형태의 동전을 몰아내고, 지폐 대비 물가를 상승시켜 상업을 위험하게 제한할 것이라고 주장했다.[16] 이 모든 저술가들은 재무부 증권을 할인 은행을 통해 발행하고, 세금 제도를 개정하고, 대출을 늘리는 것을 선호했다.[16]
1790년 8월 27일, 의회는 19억 아시냐를 추가 발행하기로 결정했으며, 이는 연말까지 모든 행위에 대해 법정 통화가 될 것이고, 누구나 획득하여 일반적인 상거래에 사용할 수 있는 지폐가 될 것이다. 반동적 경향이 의심받던 네케르는 아시냐를 지폐로 전환하는 것에 단호히 반대하며 9월 3일 사임했다.[17] 19억의 대규모의 위험한 발행을 그는 8억으로 줄이는 데 성공했지만, 공격이 그의 사임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18][19] 네케르는 "국가 화폐"를 요구한 그의 가장 강력한 반대자인 미라보 백작(Comte de Mirabeau)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20]
1790년 9월까지, 모든 승인된 아시냐는 정부에 의해 지급되었다. 지폐 지지자들은 아시냐가 토지에 의해 보증되므로, 그 토지를 매각하는 속도와 동일한 속도로 회수하고 소각하는 한 더 많은 지폐를 안전하게 발행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790년 9월 29일, 국민 의회는 8억 리브르를 추가 발행하도록 승인하고 아시냐에 대한 이자를 완전히 폐지했다.[21] 네케르는 배당금을 지급하려는 지폐가 곧 가치가 없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아무도 아시냐를 만들 권리가 없었기 때문에 곧 모두가 그렇게 하기 시작할 것이다.[5] 프랑수아 자비에 마르크 앙투안 드 몽테스키우-페쟁삭(François-Xavier-Marc-Antoine de Montesquiou-Fézensac)은 아시냐 발행을 담당하면서 주식 투기와 탐욕을 두려워했다.[22] 1790년 9월까지, 아시냐는 진정한 유통 지폐가 되었고, 이자 없는 8억 리브르 상당의 지폐가 최초 발행에 추가되었으며, 액면가는 50, 60, 70, 80, 90, 100, 500, 2000 리브르였으며 법정 통화 지위를 가졌다. 소액권은 광범위한 유통을 보장하기 위해 대량으로 생산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경제를 자극했지만 인플레이션 압력도 증가시켰다.[23]
thumb]]
구체제 관직자(판사, 군 계급 등)의 재산에 대한 보상 비용이 혁명의 상속 부채에 더해지면서, 국민 의회는 1790년 9월 추가 아시냐를 발행하는 데 대해 근소한 차이로 투표했으며,[24] 처음에는 8억 프랑이 추가되었다. 1791년 9월까지, 아시냐의 가치는 18–20% 하락했다.[25]
아시냐를 뒷받침하는 재산은 ''국가 재산''(biens nationaux)으로 이름이 변경되었고, 지역 수준 당국에 의해 경매되었다. 1790년 3월 10일, 페티옹의 제안에 따라 교회의 재산 관리가 시로 이관되었다.[26] 이러한 재산의 판매를 통해, 아시냐는 정부 부채의 상당 부분을 성공적으로 상환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토지 판매가 원래 의도였기 때문에, 아시냐는 일상적인 교환 수단으로 잘 작동하지 않는 대액면권(50, 100, 200, 1000 리브르)으로만 발행되었다. 또한, 국민 의회는 아시냐와 (여전히 유통되는) 구체제 동전을 액면가로 교환하도록 결코 의무화하지 않았다. 이미 1790년 가을, 국민 의회 자체는 대액면 아시냐를 소액 동전으로 교환하는 데 7.5%의 수수료를 지불하고 있었다. 1791년 말까지 할인율은 종종 20% 이상이었다.[27] 1792년 2월 1일 아시냐는 거의 50% 하락했다.[28] 애국적인 혁명가들은 아시냐의 가치 하락을 외국 음모로 비난했다. 클라비에르는 국가 연합이 아시냐의 붕괴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스티븐 D. 딜레이(Stephen D. Dillaye)는 영국, 벨기에, 스위스가 통화를 산업적으로 위조했다고 썼다. "런던에는 17개의 제조 시설이 완전히 가동되어 가짜 및 위조 아시냐 생산에 400명의 인력이 투입되었습니다."[33] 1792년 10월 17일, 24억 아시냐가 유통되었다.
프랑스 혁명 전쟁이 발발하고, 군주제가 무너지고, 프랑스 제1 공화국이 선포된 후, 국민공회는 지폐와 동전의 액면가 교환을 의무화했지만, 이 법은 시행될 수 없었다. 대신 아시냐는 계속해서 가치가 하락했다. 1793년 4월 10일, 로베스피에르는 연설에서 뒤무리에와 그의 지지자들이 벨기에에서 아시냐의 유통을 막아 공공 재정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고 뒤무리에를 비난했다.[29]
아시냐 위조는 프랑스 안팎에서 만연했다.[30][31][32] 1793년 8월까지 유통된 아시냐의 양은 50억으로 두 배로 증가했다. 물가 상승과 식량 부족은 9월에 공공의 불안을 악화시켰다. 1793년의 ''최고 가격법''과 같은 법안은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1793년 11월 8일, 아시냐 제조 책임자 :fr:Simon-François Lamarche가 처형되었다. 12월 2일에는 클라비에르가 체포되었고, 일주일 안에 자살했다. 1794년 2월 24일에는 "최고 가격"을 모든 상품으로 확대하면서 혼란만 가중되었다. 교역은 마비되었고 모든 제조업 시설이 문을 닫았다.[7] 1794년 6월까지 발행된 아시냐의 총액은 거의 80억에 달했고, 아시냐는 점점 더 가치를 잃어갔다. 8월에 테르미도르파 국민공회는 "경제적 자유"를 내세워 최고 가격법을 폐지했고, 아시냐는 다음 해에 거의 모든 가치를 잃었다. 아시냐는 1794년 8월에 액면가의 31%에서 11월에는 24%, 2월에는 17%, 1795년 4월에는 8%로 하락했다.[34] 총재정부는 아시냐를 대체하기 위해 토지 증서 형태의 통화인 만다를 발행했지만, 이 역시 빠르게 실패했고 국가는 심각한 할인율로 이를 회수했다. 나폴레옹은 모든 형태의 불환 화폐에 반대했다. 1830년대에서 1840년대에 아시냐와 혁명 기간 동안 발행된 다른 지폐들은 수집품이 되었다.
아시냐 지폐 가치 하락 문제는 피에르사뮈엘 뒤퐁 드 뇌무르(Pierre Samuel du Pont de Nemours)[46] 의원 등으로부터 발행 전부터 지적되었다. 그러나 미라보 등은 이러한 우려를 일축했고, 정부는 에퀴 은화와 같은 소액 동전이 즉시 대량으로 필요했기 때문에 정화를 회수하기 위해 오히려 손해를 보면서까지 아시냐와 교환했다. 루이 금화와 아시냐의 거래소는 정부에 의해 상장되었고, '''투기'''가 시작되었다. 프리미엄은 처음에는 6 - 7%였지만, 곧 10%, 15%, 20%로 증가했다. 정부는 정화 회수를 우선시하며 이러한 합법적인 인플레이션을 방치했다. 충분한 강제 통용력은 부여되지 않았기[47] 때문에, 이용자가 선택하면 된다는 정도였지만, 이는 명백히 안일한 판단이었다.
'''유통량 증가'''는 아시냐의 가치를 급격히 하락시켰다. 제헌 의회는 1791년 5월 18일에 6억 리브르, 다음 달에는 5리브르 소액 지폐로 1억 리브르를 추가 발행했고, 바렌 사건 전날인 6월 19일에는 다양한 액면으로 총 4억 8,000리브르를 발행하도록 허가했다. 푀양파가 주도한 입법 의회는 구 체제의 채권 상환에 충실했으며, 청산을 위해 아시냐와 국가 채권이 잇따라 발행되었다. 12월 17일에 3억 리브르, 1792년 4월 30일에 3억 리브르를 증쇄했고, 이 기간 동안 회수된 것은 3억 7,000만 리브르에 불과했다. 게다가 5월 17일에는 9억 8,000리브르를 증쇄했다. 지롱드파 내각의 재무 장관 에티엔 클라비에르[48]는 난발에 제한을 가하고, 발행과 회수의 균형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의회에서 거부당했다.
의회는 잠시 동안 일반 소비자에게 유통되는 소액의 보조 지폐 발행을 주저했지만, 당시 프랑스에서는 증가 일로에 있던 망명으로 인해 해외로 '''정화가 유출'''되었고, 은화나 동화라는 소액 동전이야말로 극도로 부족해졌기에, 소액 아시냐 발행 또한 피할 수 없었다. 지롱드파는 망명 귀족과 왕족의 재산을 몰수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고 귀금속을 압수하려 했지만, 이번에는 국왕의 거부권에 의해 시행되지 못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이미 소액 지폐를 더 증쇄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고액 아시냐와 소액 아시냐 사이에서도 프리미엄이 발생했다.
의회가 소액 아시냐 발행을 주저하는 동안, 대 상인과 은행가들은 의회를 따라 개인적으로 1 수 동전을 주조하거나, 각 은행이 독자적으로 저액의 신용 지폐[49]를 발행하기 시작하여 일반 소비자에게 유통시켰다. 대립하는 지폐의 등장은 그 자체만으로 아시냐의 가치를 떨어뜨렸지만, 상인과 은행가들은 보조 통화나 신용 지폐와의 교환으로 모은 아시냐 자금을 선물 거래 등의 투기 시장에 투입하거나, 가격 상승을 예상한 물자(곡물, 밀가루, 설탕 등)를 사재기하여 창고에 저장했다. 이른바 '''매점 매석꾼'''의 등장이다. 이로 인해 물가는 더욱 치솟았고, 아시냐의 가치는 더욱 하락했다. 폭리를 취한 매점 매석꾼이 있는 한편, 일부 은행과 몇몇 투자자는 이 투기에 실패하여 파산했지만, 그 신용 불안도 아시냐에 영향을 미쳤다. 농민들도 밀을 시장에 내놓아 하락하는 아시냐와 교환하기보다는, 보관하는 쪽을 선택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공급 부족은 물가 상승을 가속화하고, 상호 작용의 '''악순환'''을 낳았다. 아시냐의 하락과 빵 부족은 이것을 받는 임금 노동자 등 상퀼로트에게는 큰 골칫거리였으며, 시장에는 동전 가격과 아시냐 가격의 두 가지 가격표가 곧 등장했다. 아시냐의 하락은 시민 생활에 직접적인 피해를 입히게 되었고, 상퀼로트는 상인에 대한 분노를 키워갔다. 공안 위원회는 에베르파의 압력을 받아 1793년에 일반 최고 가격법을 도입했지만, 이는 가치 하락에 대해서는 효과가 없었다. 아시냐는 미판매 국유지의 수확물을 담보로 했기 때문에, 일반 최고 가격법으로 농산물 가격이 억제되면, 담보 가치가 제한될 뿐만 아니라, 국유지에 매수자가 나타나지 않을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 단계에서 시장에는 35억 리브르 이상의 아시냐가 유통되고 있었다. 1791년 11월 9일에 성립되었지만 그 당시 국왕 거부권으로 시행되지 못했던 망명자 처벌법에 의한 몰수 재산(약 20억 리브르)이 재원으로 사용되었고, 게다가 몰타 기사단의 4억 리브르도 절취되어 예비 자금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혁명 전쟁이 시작되면서 '''군사비'''는 막대한 액수가 되었고, 기대했던 점령지에서의 임시세는 미미했기 때문에, 추가적인 아시냐 증쇄가 필요하게 되었다. 테르미도르 쿠데타가 일어나기까지 약 110억 리브르 이상의 아시냐가 유통되었지만, 이 기간 동안 회수하여 소각할 수 있었던 것은, 1793년에 8억 8,100만 리브르, 1794년에 20억 리브르에 그쳤다.
한편, '''외국의 음모'''도 아시냐 하락을 부추겼다. 칼론은 루이 16세의 신임을 받아 반혁명 운동을 벌였다. 그 책략으로 공장에서 대량의 아시냐 위조 지폐를 만들어 시장에 투입하여 혁명 정부를 붕괴시킬 의도로 살포했다. 이 '''위조 지폐 정책'''은 나중에는 영국에도 계승되었다. 1794년까지는 프랑스 국내에서 위조 지폐가 인쇄되어 반혁명의 자금원이 되었지만, 탄압을 받아, 다음 해부터는 인쇄 장소를 런던으로 옮겼다. 오슈 장군이 저지한 1795년 7월 16일 - 21일의 퀴브롱 상륙 때에는, 이 런던산 수십억의 위조 아시냐가 압수되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무렵에는 가치 하락의 속도가 더 빨라져서, 위조 지폐는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4. 2. 경제 통제 정책과 실패
프랑스 혁명 전쟁 중, 국민공회는 아시냐의 가치 하락을 막기 위해 여러 경제 통제 정책을 시행했다. 1793년 4월, 로베스피에르는 뒤무리에가 아시냐 유통을 방해했다고 비난했다.[29] 아시냐 위조는 프랑스 안팎에서 만연했으며,[30][31][32] 영국 당국과 협력한 왕당파가 위조에 가담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33]1793년 8월, 유통된 아시냐의 양은 50억으로 증가했고, 물가 상승과 식량 부족으로 9월에 공공 불안이 심화되자 최고 가격법이 제정되었다. 1793년 11월 8일, 아시냐 제조 책임자 :fr:Simon-François Lamarche가 처형되었고, 1794년 2월 24일에는 "최고 가격"이 모든 상품으로 확대되어 혼란이 가중되었다.[7] 교역은 마비되었고 모든 제조업 시설이 문을 닫았다.[7]
1794년 6월, 발행된 아시냐의 총액은 거의 80억에 달했지만, 아시냐는 계속 가치를 잃었다. 8월, 테르미도르파 국민공회는 최고 가격법을 폐지했고, 아시냐는 다음 해에 거의 모든 가치를 잃었다.[34] 1795년 5월 말, 유통액은 100억을 넘었고, 7월 말에는 140억으로 증가했다.[35] 1796년, 총재정부는 아시냐를 대체하기 위해 만다를 발행했지만 실패했고, 국가는 심각한 할인율로 이를 회수했다. 나폴레옹은 모든 불환 화폐에 반대했다.
재정 문제는 헌법 제정 의회, 입법 의회, 국민 공회, 총재 정부를 거치며 재정 위원회(Comité des Finances프랑스어)에서 논의되었으며, 조제프 캉봉 등이 주도했다.[52] 중간 파벌은 혁명을 지지하는 부르주아지의 대변인이었지만, 부르주아지의 이해관계는 다양하여 대립과 분열이 반복되었다.
입법 의회에서 캉봉 등은 아시냐 남발을 막으려 했으나, 구 특권 계급의 이익을 우선시한 푀양파에 의해 저지되었다. 군사비 증가로 재원이 부족해지자,[53] 캉봉은 1792년 11월 예상 수입과 지출을 공표하며 아시냐 증발을 통한 적자 지출 보전을 주장했다.
8월 10일 사건 이후, 국민 공회는 상퀼로트의 압박으로 아시냐 하락 대책을 요구받았다. 캉봉은 1793년 4월 8일, 강제 유통 등 5가지 방침을 제안했고, 4월 11일 '''강제 유통''' 법안이 가결되었다. 그러나 강제 유통만으로는 아시냐의 신용 회복이 어려웠다.
5월 20일, 라멜은 '''누진 강제 공채'''를 제안했고, 캉봉은 이를 혁명세라 주장하며 찬성했다. 지롱드파는 반대했지만, 원칙만 가결되었다. 지롱드파는 산악파를 억누르려다 실각했고, 파리 코뮌은 강제 공채 징수를 지시했다.
산악파와 평원파는 6월 22일, 누진 강제 공채 과세 최저 한도를 올리는 수정안을 가결했다. 경제 테러가 시작되었고, 파견 의원과 자치 단체 장에게 과세 대상 선정과 과세액 설정 권한이 부여되어 오염과 부정이 확산되었다. 7월, 루이 16세 초상이 인쇄된 구 아시냐의 강제 통용력이 상실되었다.
8월 24일, 캉봉은 주식 회사의 해산을 명령했다. 인플레이션 심화로 앙라제와 에베르파가 대두했지만, 일반 최고 가격법과 강제 징발로 일시적 안정을 찾았다. 11월 26일, '''귀금속 유통 금지'''로 아시냐 강제 유통이 철저해졌고, 국고 편입으로 신용력이 높아져 12월에는 액면가의 절반까지 회복했다. 그러나 강제적 가격 설정과 징발은 장기적으로 물자 부족을 초래했고, 1794년 봄 식량 위기가 재연되었다.
'''테르미도르 반동''' 이후, 국민 공회는 부르주아지 측이 유력해져 상업과 산업의 자유가 부활했지만, 경제 상황은 악화되었다. 12월 24일, 일반 최고 가격법이 철폐되었고, 12월 27일에는 통제 해제가 선언되었다. 1795년 1월 31일, 외국 무역 금지도 철폐되어 물가가 급등했다.
테르미도르파는 1795년 1월, 아시냐 발행을 허가했고, 아시냐 가치는 급락했다. 투기가 성행했고, 3월 말 제르미날의 폭동 직전에는 액면 100리브르의 아시냐 실질 가치가 12리브르 15수였다. 9월에는 3리브르 15수였다.[56] 총재 정부는 인쇄기를 풀가동했고, 발행량이 늘어날수록 감가는 진행되었다. 5월, 유통액은 114억 리브르였고, 연말에는 300억 리브르 이상이었다.
물자 결핍은 아니었지만, 물가 상승, 투기, 매점 매석이 경제를 마비시켰다. 총재 정부기에는 빈민 봉기가 잇따랐고, 군대가 진압했다. 제도는 지롱드파 추방 이전으로 돌아갔고, 산악파는 괴멸했다. 재정 위원회에서는 캉봉이 실각하고, 장 조제프 조아노(Jean Joseph Johannot프랑스어)[57]에게 지도권이 넘어갔다.
4. 3. 정치적 불안정과 아시냐
에티엔 클라비에르는 국부를 나타내고 법정 통화로 기능하는 대규모 아시냐 발행을 로비했다.[8] 1790년 4월 17일, 이 지폐는 법정 통화로 선언되었지만 이자는 3%로 감소했다.[9] 아시냐는 동전 부족을 보충하고 산업과 무역을 부활시킬 것이었다.[10] 아시냐가 지급되면 소각해야 했다.[11] 그러나 아시냐가 유통되기 시작하자마자 그 가치는 5% 감소했다.[12]자크 네케르는 8월 27일 국민 의회에서 아시냐가 프랑스를 파산시킬 지폐라고 주장했다.[14] 아르망-가스통 카뮈는 금속 화폐를 훼손하고 물가를 급등시킨 미국의 지폐 경험에서 얻은 교훈이라고 믿는 것을 강조했다.[15] 콩도르세와 피에르 사무엘 뒤 퐁 드 네무르는 아시냐가 은 및 기타 형태의 동전을 몰아내고, 지폐 대비 물가를 상승시켜 상업을 위험하게 제한할 것이라고 주장했다.[16] 그럼에도 1790년 8월 27일, 의회는 19억 아시냐를 추가 발행하기로 결정했으며, 이는 연말까지 모든 행위에 대해 법정 통화가 될 것이고, 누구나 획득하여 일반적인 상거래에 사용할 수 있는 지폐가 될 것이다. 반동적 경향이 의심받던 네케르는 아시냐를 지폐로 전환하는 것에 단호히 반대하며 9월 3일 사임했다.[17] 1790년 9월까지, 모든 승인된 아시냐는 정부에 의해 지급되었다. 1790년 9월 29일, 국민 의회는 8억 리브르를 추가 발행하도록 승인하고 아시냐에 대한 이자를 완전히 폐지했다.[21]
thumb]]
1790년 9월까지, 아시냐는 진정한 유통 지폐가 되었고, 이자 없는 8억 리브르 상당의 지폐가 최초 발행에 추가되었으며, 액면가는 50, 60, 70, 80, 90, 100, 500, 2000 리브르였으며 법정 통화 지위를 가졌다. 소액권은 광범위한 유통을 보장하기 위해 대량으로 생산되었다.[23] 구체제 관직의 재산에 대한 보상 비용이 혁명의 상속 부채에 더해지면서, 국민 의회는 1790년 9월 추가 아시냐를 발행하는 데 대해 근소한 차이로 투표했다.[24] 1791년 9월까지, 아시냐의 가치는 18–20% 하락했다.[25] 1792년 2월 1일 아시냐는 거의 50% 하락했다.[28]
프랑스 혁명 전쟁이 발발하고, 군주제가 무너지고, 프랑스 제1 공화국이 선포된 후, 국민공회는 지폐와 동전의 액면가 교환을 의무화했지만, 이 법은 시행될 수 없었다. 대신 아시냐는 계속해서 가치가 하락했다. 1793년 8월까지 유통된 아시냐의 양은 50억으로 두 배로 증가했다. 1793년의 ''최고 가격법''과 같은 법안은 물가 상승과 식량 부족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아시냐 위조는 프랑스 안팎에서 만연했다.[30][31][32] 스티븐 D. 딜레이는 영국, 벨기에, 스위스가 통화를 산업적으로 위조했다고 썼다.[33] "런던에는 17개의 제조 시설이 완전히 가동되어 가짜 및 위조 아시냐 생산에 400명의 인력이 투입되었습니다."
thumb에서의 아시냐의 정화(에퀴)와의 교환 비율(1789년 - 1796년)]]
아시냐 지폐는 정화에 비해 가치가 낮다는 문제는 피에르-사뮈엘 뒤퐁 드 뇌무르(Pierre Samuel du Pont de Nemours) 의원 등으로부터 발행 전부터 지적되었다.[46] 그러나 미라보 등은 이러한 우려를 일축했고, 정부는 군대나 관료 등의 급여 지급에 에퀴 은화와 같은 소액 동전이 즉시 대량으로 필요했기 때문에 정화를 회수하기 위해 오히려 손해를 보면서까지 아시냐와 교환했다. 루이 금화와 아시냐의 거래소는 정부에 의해 상장되었고, '''투기'''가 시작되었다. 프리미엄은 처음에는 6 - 7%였지만, 곧 10%, 15%, 20%로 증가했다. 정부는 정화 회수를 우선시하며 이러한 합법적인 인플레이션을 방치했다.
'''유통량 증가'''는 아시냐의 가치를 급격히 하락시켰다. 제헌 의회는 1791년 6억 리브르, 다음 달에는 5리브르 소액 지폐로 1억 리브르를 추가 발행했고, 바렌 사건 전날인 6월 19일에는 다양한 액면으로 총 4억 8,000리브르를 발행하도록 허가했다. 푀양파가 주도한 입법 의회는 구 체제의 채권 상환에 충실했으며, 청산을 위해 아시냐와 국가 채권이 잇따라 발행되었다.
의회가 소액 아시냐 발행을 주저하는 동안에도 소액 거래는 필요했기에, 대 상인과 은행가들은 의회를 따라 개인적으로 1 수 동전을 주조하거나, 각 은행이 독자적으로 저액의 신용 지폐[49]를 발행하기 시작하여 일반 소비자에게 유통시켰다. 대립하는 지폐의 등장은 그 자체만으로 아시냐의 가치를 떨어뜨렸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 단계에서 시장에는 35억 리브르 이상의 아시냐가 유통되고 있었다. 그러나 혁명 전쟁이 시작되면서 '''군사비'''는 막대한 액수가 되었고, 기대했던 점령지에서의 임시세는 미미했기 때문에, 추가적인 아시냐 증쇄가 필요하게 되었다. 테르미도르 쿠데타가 일어나기까지 약 110억 리브르 이상의 아시냐가 유통되었지만, 이 기간 동안 회수하여 소각할 수 있었던 것은, 1793년에 8억 8,100만 리브르, 1794년에 20억 리브르에 그쳤다.
한편, '''외국의 음모'''도 아시냐 하락을 부추겼다. 코블렌츠로 도망친 망명 귀족 중에 전 재무 총감 칼론이 있었는데, 그는 루이 16세의 신임을 받아 반혁명 운동을 벌였다. 그 책략으로 공장에서 대량의 아시냐 위조 지폐를 만들어 시장에 투입하여 혁명 정부를 붕괴시킬 의도로 살포했다. 이 '''위조 지폐 정책'''은 나중에는 영국에도 계승되었다.
5. 아시냐의 폐지와 그 이후
1795년4월 7일, 국민공회는 종전의 투르 리브르화투르 리브르/Livre tournois프랑스어를 대신하여 십진법을 사용하는 '''프랑'''을 통화 단위로 정했다. 이에 따라, 새로운 아시냐도 액면 표기가 프랑으로 바뀌었지만, 구 지폐도 여전히 유통되었기 때문에, 리브르와 프랑이 혼재되기도 했다.[58] 4월 15일, 주식 시장이 재개되었고, 국채 이자 지급 중단이나, 3,000리브르 이상의 연금 삭감과 같은 정책은 철회되어, 지급이 재개되었다.[58] 4월 26일, 처형된 지롱드파 의원의 유족에게는 연 2,000프랑의 구제금이 지급되었다.[58] 5월 4일, 모든 상업 거래소가 재개되었다.[58] 6월 9일, 혁명 재판소의 판결 및 방토즈 법에 의해 몰수된 피처형자의 재산을 그 상속인에게 반환하는 법령이 통과되었다.[58] 6월 21일, 아시냐를 2/25로 삭감하는 디노미네이션을 단행했다. 100프랑 아시냐가 8프랑 아시냐와 동일하게 취급되었지만, 이는 인플레이션을 추인하는 것이었고, 물가 폭등과 인플레이션은 오히려 더욱 확대되었다.[58] 8월 15일, 프랑 은화를 기축으로 하는 '''은본위제'''가 부활했고, 다시 통화가 표면 경제에서도 유통되기 시작했다.[58]
10월 26일, 총재 정부가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아시냐의 인플레이션은 말기 증세에 달해 있었다. 24프랑의 루이 금화는 거래소에서 시세 가격 2,500프랑 아시냐를 나타냈고, 한 시간마다 그 가격이 갱신되었기 때문에, 4일 후에는 3,400프랑 아시냐가 되었다.[59][60] 총재나 의원, 정부 간부에게의 봉급 현물 지급이 시작되었고, 조세와 소작료도 절반은 현물로 지불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현물을 받을 수 없는 공무원 중에는 생활에 곤궁해지는 자가 나타났고, 생활을 위해 부정과 부패가 횡행하게 되었다.[59][60] 설상가상으로 1795년은 혹독한 겨울로, 18세기 중 가장 낮은 평균 기온을 기록했다. 배급을 받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59][60]
아시냐의 가치가 너무나 하락했기 때문에, 경제는 그 후에도 마비 상태가 계속되었고, 전국에서 항의 파업이 빈번했다. 이는 아시냐의 인쇄 공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국민공회는 마지막 날인 1795년 10월 25일[61]에 장 프랑수아 루벨에 의해 발의된 연대 책임제를 포함한 엄격한 벌칙을 포함하는 새로운 전쟁세 법안(브뤼메르 23일 법)을 통과시켰지만, 총재 정부는 전국적인 반대에 부딪혀 실시할 수 없었으므로, 재원 부족에 빠졌다. 오백인회에서는, 빈곤층을 지지 기반으로 하는 좌파는 혁명 지폐의 재건(아시냐 회수)을 원했고, 다시 공포 정치 시대와 같은 누진세를 제안했지만, 부유층을 지지 기반으로 하는 우파의 반대에 부딪혀 부결되었다. 11월 21일, 어쨌든 무가치한 아시냐로 국유 재산이 더 이상 약탈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국유 재산의 매각이 중단되었다.[61]
12월 6일, 당장의 운용 자금에도 어려움을 겪던 총재 정부는 "재정의 긴급 재건에 관한 총재 정부의 각서"를 오백인회에 제출했다. 여기에 제안된[62] 것은 라멜의 안으로, 6억 프랑의 정화를 만들어내려는 '''강제 채권'''(자본에 대한 누진 과세)이었으며, 초기의 계획에서는 전체 납세자의 5분의 1을 12등급으로 나누어 100프랑에서 1,200프랑을 부담하게 하는 것이었다.[62] 이 강제 채권의 영수증은 다른 모든 세금의 납세 증명으로 간주하며, 앞서 언급한 전쟁세는 시행되지 않고 폐지되었다. 그러나 강제 채권의 수입을 실제로 정부가 손에 넣는 것은 아직 먼 미래였으므로, 그 때까지의 연결 고리로 '''지불 명령서'''(Rescriptions)[63]를 일종의 국고 증권으로 발행하여, 차용했지만, 총재 정부에 대한 불신은 상당했으므로, 이것 또한 눈 깜짝할 사이에 하락했다.[62] 직후에 시작되는 이탈리아 원정에서의 보나파르트 장군의 승리와 이탈리아 제국에 부과한 고액의 금품·미술품 등의 배상금 획득이 총재 정부의 신용을 다소나마 구제했다.
12월 14일, 아시냐의 더 이상의 하락을 막기 위해, 거래소가 약 1년 만에 다시 폐쇄되었다. 12월 23일, 아시냐 지폐의 신규 발행을 중단했다. 12월 27일의 법령에서는, 납세는 세액의 절반을 정화로, 나머지 절반은 1대 100의 비율로 아시냐로 지불하도록 했다.[64] 이는 아시냐의 유통 가격을 법정 가격의 100분의 1로 법적으로 인정한 것을 의미하며, 바뵈프는 『호민관』지상에서 아시냐에 최후의 고별을 고하는 행위라고 격렬하게 비판했지만, 한편으로는 시장 가격보다 약 10배는 높은 환율이었으므로, 고액 납세자에게는 유리한 판결이기도 했다.[64]
국내에서는 여전히 정화가 부족했고, 총재 정부는 새로운 지폐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발행 은행'''(Banques d'émission프랑스어)을 창설하여, 국가가 이 은행에 일정량의 국유 재산을 담보로 제공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발행되는 은행권을 유통시키며, 발행 은행에 매달 국가에 정화로 2,500만 프랑 상당을 변제하게 하는 계획을 내놓았다. 이 법안은 오백인회를 통과했지만, 여러 신문들이 은행가가 국가를 탈취하려 한다고 떠들어 대며 맹렬히 반발했기 때문에, 원로회에서 부결되어 좌절되었다.
한편, 강제 채권의 징수가 시작되자, 다양한 폐해가 발생했다. 이 신세를 부담하는 납세자 명부의 작성은 현(県) 당국에 맡겨졌지만, 공정하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구 자코뱅파에게 과중하게 부담시켰으며, 보수파와 구 왕당파의 부담은 경감되었다.
아시냐는 이미 '''종잇조각이나 다름없었다'''. 총재 정부는 아시냐를 완전히 포기하고, 1796년2월 19일, 방돔 광장에서 더 이상 찍어내지 않을 것을 과시하기 위해 아시냐의 인쇄 동판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소각했다. 그리고 3월 10일에는 아시냐의 폐지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3월 18일, 총재 정부는 신 지폐로 '''만다 테리토리오'''[38]를 새로 발행하여, 아시냐와 교환함으로써 그 회수를 목표로 했지만, 이것 역시 인플레이션을 일으켰고, 토지 경매에서도 사회 문제로 발전했다. 1797년2월 7일, 1년도 채 안 되어 만다 테리토리오는 폐지되었다.
1797년3월 21일부터 지폐의 유통은 법으로 금지되었지만, 총재 정부는 모든 지폐를 잃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아시냐의 폐기를 철저히 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회수를 늦추었다. 4월 4일, 공화국 5년 선거에서 왕당파가 약진했기 때문에, 6월 23일, 우경화된 양원은 국가의 부채를 정리하여, 1791년 1월 1일 이전에 계약된 모든 구 체제의 부채는 전면적으로 변제해야 함을 규정하고, 나머지 부채에 대해서는 각 현의 아시냐 공정 시세에 따라 지급하도록 정했다. 프뤼크티도르 쿠데타로 양원에서 왕당파가 추방된 후, 1797년9월 30일, 재무 장관 라멜[52]이 제창하는 '''공채 3분의 1 정책'''(dette publique d'un tiers)이 채택되었다. 이는 구 체제에서 물려받은 부채의 3분의 1에 대해서는 채권자는 정화로 지급을 받을 수 있지만, 나머지 3분의 2에 대해서는 국유 재산으로 충당하는 것으로 하여 구입용으로, 약속 어음 또는 아시냐, 만다 테리토리오, 지불 명령서, 또는 3분의 2 채권 중 하나로 지급하고, 그 수령을 강제하는 것이었다. 이 결과, 정부 부채는 4분의 1 가까이 감소했고, 한편 채무자도 3분의 1은 정화를 확보할 수 있었으며, 아시냐의 당면한 유통을 견지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네오 자코뱅에게서도 호의적으로 평가되었다.[65] 총재 정부 말기에는, 정화 경제가 되면서 통화 공급량이 급격하게 감소한 결과, 디플레이션이 진행되는 역전 현상이 일어나, 아시냐는 소멸했음에도 시민 생활을 압박했다.
5. 1. 아시냐 폐지 과정
1795년4월 7일, 국민공회는 투르 리브르화를 대체하는 십진법 기반의 '프랑'을 도입했다.[58] 새로운 아시냐는 프랑으로 액면 표기가 변경되었으나, 구 지폐(리브르)도 유통되어 혼란이 발생했다.[58] 주식 시장과 상업 거래소가 재개되고, 국채 이자 지급 중단 등의 정책이 철회되었다.[58] 처형된 지롱드파 의원 유족에게 구제금이 지급되었고, 몰수된 재산은 상속인에게 반환되었다.[58] 6월 21일, 아시냐를 2/25로 삭감하는 디노미네이션이 단행되었으나, 인플레이션을 더욱 심화시켰다.[58] 8월 15일, 은본위제가 부활하여 정화(은화)가 다시 유통되기 시작했다.[58]10월 26일 총재 정부 출범 당시, 아시냐 인플레이션은 극심했다. 24프랑 루이 금화는 2,500프랑 아시냐로 거래되었고, 가격은 시간마다 갱신되었다.[59][60] 공무원 봉급은 현물 지급이 시작되었고, 조세와 소작료도 절반은 현물로 납부하게 되었다. 그러나 현물을 받지 못하는 공무원들은 부정부패를 저지르기도 하였다.[59][60] 연금 생활자들은 극빈 상태에 빠졌고, 1795년 혹독한 겨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59][60]
아시냐 가치 하락으로 경제는 마비되었고, 전국에서 파업이 빈번했다. 국민공회는 장 프랑수아 루벨의 제안으로 엄격한 벌칙을 포함한 새로운 전쟁세 법안을 통과시켰으나, 총재 정부는 반대에 부딪혀 시행하지 못했다.[61] 오백인회에서 좌파는 아시냐 회수를, 우파는 반대했다. 11월 21일, 국유 재산 매각이 중단되었다.[61]
12월 6일, 총재 정부는 "재정의 긴급 재건에 관한 각서"를 제출, 6억 프랑의 정화를 마련하기 위한 강제 채권을 제안했다.[62] 이는 라멜의 안으로, 자본에 대한 누진 과세였다.[62] 강제 채권 영수증은 세금 납세 증명으로 간주되었고, 전쟁세는 폐지되었다.[62] 그러나 강제 채권 수입은 늦어졌고, '''지불 명령서'''(Rescriptions)라는 국고 증권이 발행되었으나, 총재 정부 불신으로 가치가 폭락했다.[63] 이탈리아 원정에서 보나파르트의 승리와 배상금 획득이 총재 정부 신용을 다소 구제했다.
12월 14일, 거래소가 폐쇄되었고, 12월 23일 아시냐 신규 발행이 중단되었다.[64] 12월 27일 법령은 납세를 정화와 아시냐(1대 100 비율)로 지불하도록 했다.[64] 바뵈프는 이를 아시냐에 대한 고별이라고 비판했다.[64]
총재 정부는 '''발행 은행'''(Banques d'émission프랑스어)을 창설하여 은행권 유통을 계획했으나, 원로회에서 부결되었다. 강제 채권 징수는 불공정하게 이루어졌고, 징수 담당자는 협박을 받거나 살해되기도 했다.
아시냐는 '''종잇조각이나 다름없었다'''. 1796년2월 19일, 방돔 광장에서 아시냐 인쇄 동판이 소각되었고, 3월 10일 아시냐 폐지가 선언되었다. 3월 18일, 신 지폐 '''망다 테리토리오'''[38]가 발행되었으나, 역시 인플레이션을 일으켰다. 1797년2월 7일, 망다 테리토리오는 폐지되었다.
1797년3월 21일부터 지폐 유통이 금지되었으나, 총재 정부는 아시냐 회수를 늦추었다. 4월 4일 공화국 5년 선거에서 왕당파가 약진하자, 6월 23일 양원은 국가 부채 정리 방안을 규정했다. 프뤼크티도르 쿠데타 이후, 1797년9월 30일 '''공채 3분의 1 정책'''(dette publique d'un tiers)이 채택되었다.[52] 이는 부채의 3분의 1은 정화로, 나머지는 국유 재산으로 충당하는 방식이었다.[52] 이는 채권자의 불만을 야기했고, 총재 정부를 부르주아가 외면하는 원인이 되었다. 총재 정부 말기에는 디플레이션이 진행되어 시민 생활을 압박했다.
5. 2. 금속 화폐 복귀와 경제 안정
6. 아시냐의 영향과 역사적 의의
아시냐는 가톨릭 교회로부터 몰수하여 국유화 시킨 가톨릭 교회 재산의 토지를 담보로 발행되었고, 그 후 불태환지폐로 증쇄가 남발되어 신용이 극도로 실추되었으며, 경제적 혼란을 심화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공안위원정부는 경제 통제를 강화함으로써 인플레이션 억제를 시도했고, 일시적으로 성공했지만, 정부가 쿠데타로 붕괴되자 다시 폭락을 시작했다.
계속된 총재 정부는 자유주의를 신봉하는 부르주아를 지지기반으로 했기 때문에 경제를 통제하는 방법을 싫어했고, 강제로 채권을 국민에게 할당해 구입하게 한 아시냐 지폐를 시장에서 회수하려 했지만 이 정책은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계속 토지 어음을 발행하여 1:30의 교환 비율로 아시냐를 교환했는데, 이것은 단지 그런 가격으로 국유지를 부유층에 매각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바브후의 음모라는 좌파의 반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토지 어음도 지폐화되었지만, 그 아시냐와 실가격 비율은 1:400 정도였다. 그러나 정식 통화에 대해서는 토지 어음도 2 ~ 3 프랑의 가치 밖에 되지 않았다.
결국, 아시냐의 신용회복 불가능으로 지폐의 유통이 금지되었다. 프랑스는 다시 정식 통화만 발행했다.
「아시냐가 혁명을 파국으로 이끌었는가, 아니면 혁명이 아시냐를 파국으로 이끌었는가」[66] 이것은 오늘날에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 주제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아시냐를 둘러싼 정책은 크고 작게 모든 당파의 실각 원인이 되었으며, 아시냐는 혁명을 상징하는 가장 중심적이고 중요한 과제였다.
원래 구체제의 채무를 상환하기 위한 한정적인 토지 채권이었던 아시냐는, 낙관적인 전망 아래 지폐화되었고, 정화 부족으로 인해 "무한한 양의 지폐"[67]에 재정을 의존하게 되면서, 계획 없는 증쇄, 망명 귀족에 의한 귀금속 반출, 전쟁으로 인해 필수품을 구매하기 위한 정화가 국외로 대량 유출되면서 국내 인플레이션은 통제 불능 상태에 빠졌다. 해상 무역을 지배하는 영국과 은 공급원이었던 스페인이라는 두 강대국과 프랑스가 동시에 전쟁을 시작한 경우는 과거에 거의 없었으므로, 전쟁이 아시냐에 미친 영향은 엄청났지만, 아시냐 덕분에 공화국은 100만 명의 병력을 무장시키고 전황을 역전시킬 수 있었고, 국내에서도 감가된 3 리브르의 일당을 지불함으로써 상퀼로트들에게 혁명 감시를 맡기고 그 추진력으로 삼을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아시냐는 혁명과 그 운명을 강력하게 결합하고 있었다. 중립국과의 교역에서는 사실 거액의 이익이 발생했으므로, 시민들의 빈곤을 도외시한다면, 이러한 점들을 고려했을 때 아시냐의 하락은 부수적인 현상에 불과했다. 라멜이 말한 것처럼 "아시냐는 혁명을 가져오고, 왕위를 뒤엎고, 공화국을 세웠다"[67]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아시냐가 약 10년에 걸쳐 유통된 것은, 여러 통화 제도의 창시자와 수혜자 사이에 개인적 이해관계가 일치했기 때문이며, 그 점에서 그들은 적지 않게 공범 관계에 있었다. 만약 아시냐가 엄청난 이익을 창출하지 못했다면 더 단명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68]
아시냐의 문제는, 지폐가 공화주의의 도구로 여겨졌던 공포 정치의 탈선 이후, 최종적으로 구체제의 채무 해소라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되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막대한 부채를 안고 있던 영국이 지폐를 전국적으로 유통시켜 승리한 것을 고려해 볼 때, 부채의 액수 자체는 거시 경제의 관점에서 반드시 문제는 아니었다. 통령 정부 이후, "프랑-제르미날"이라는 신화폐 제도 하에서, 악화의 회수와 채무 해소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진 결과, 혁명 전후에 발생한 공적 채무 문제는 나폴레옹 체제 하에서 대체로 해소되어 갔다. 제정 시대의 프랑스에서는 거액의 부채를 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독립적인 중앙 은행이 된 프랑스 은행이나 회계 감사원회계 감사원/Cour des comptes프랑스어 등이 정비되어 투명성과 확실한 정부가 실현되면서 (결국에는 전쟁의 패배로 파탄나지만) 오히려 경제는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것은, 그 방증이 될 것이다. 그러나 결과론적으로 말하면, 영국의 안이한 모방에 달려든 것이 파탄의 본질적인 원인이라는 것도 사실이며, 경제 전쟁이라는 점에서 프랑스가 끝내 영국을 이길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6. 1. 경제적 영향
아시냐는 프랑스 경제에 단기적, 장기적으로 영향을 미쳤다.[66] 초기에는 구체제의 채무를 상환하기 위한 토지 채권이었으나, 지폐화되면서 통제 불능의 인플레이션을 야기했다.[67] 망명 귀족의 귀금속 반출과 전쟁으로 인한 필수품 구매를 위한 정화의 국외 유출은 인플레이션을 더욱 심화시켰다. 특히, 해상 무역을 지배하는 영국과 은 공급원이었던 스페인과의 동시 전쟁은 아시냐에 큰 영향을 미쳤다.하지만 아시냐는 100만 명의 병력을 무장시키고, 상퀼로트에게 혁명 감시를 맡기는 등 혁명 추진에 기여하기도 했다.[67] 중립국과의 교역에서 이익이 발생했고, "아시냐는 혁명을 가져오고, 왕위를 뒤엎고, 공화국을 세웠다"는 라멜의 말처럼, 아시냐는 혁명과 운명을 같이 했다.[67]
아시냐는 약 10년간 유통되었는데, 이는 통화 제도의 창시자와 수혜자 간의 이해관계가 일치했기 때문이다. 아시냐가 큰 이익을 창출하지 못했다면 더 빨리 사라졌을 것이다.[68]
아시냐의 문제는 공포 정치 이후, 구체제의 채무 해소라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영국이 막대한 부채에도 불구하고 지폐를 유통시켜 승리한 것을 보면, 부채 액수 자체는 거시 경제학적 관점에서 반드시 문제는 아니었다. 통령 정부 이후, "프랑-제르미날"이라는 신화폐 제도 하에서 악화 회수와 채무 해소가 이루어졌고, 프랑스 제1제정 시대에는 프랑스 은행, 회계 감사원회계 감사원/Cour des comptes프랑스어 등이 정비되어 경제가 비교적 안정되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영국의 정책을 모방한 것이 파탄의 원인이 되었고, 경제 전쟁에서 프랑스가 영국을 이길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6. 2. 사회적 영향
아시냐의 가치 하락은 프랑스 혁명 기간 동안 여러 계층에 걸쳐 광범위한 사회적 영향을 미쳤다.[66] 초기에는 구체제의 채무를 상환하기 위한 토지 채권으로 시작되었으나, 이후 지폐로 발행되면서 가치가 급락했다.[67]제임스 길레이의 풍자화 「프랑스의 자유와 영국의 노예」에서 묘사된 것처럼, 아시냐 가치 하락으로 인한 극심한 인플레이션은 농민, 노동자 등 일반 서민들의 삶을 কঠ폐하게 만들었다.[66] 풀뿌리를 갉아먹으며 굶주림을 견뎌야 했던 상퀼로트와 큰 고기를 먹고 살찐 신사의 대비는 당시의 극심한 빈부격차를 보여준다.
반면, 아시냐 발행과 유통은 여러 통화 제도의 창시자와 수혜자 사이에 개인적 이해관계를 형성하여 이들에게는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주었다.[68] 이들은 아시냐를 통해 이익을 얻었으며, 아시냐의 장기 유통은 이러한 공범 관계에 기반한 것이었다.[68]
아시냐는 혁명을 상징하는 중심 과제였으며, 혁명을 파국으로 이끌었는지, 아니면 혁명이 아시냐를 파국으로 이끌었는지에 대한 논쟁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66] 아시냐는 혁명을 가져오고, 왕위를 뒤엎고, 공화국을 세우는데 기여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67]
그러나 결과적으로 아시냐는 경제 전쟁에서 프랑스가 영국에게 패배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6. 3. 정치적 영향
|thumb|right|280px]]"아시냐가 혁명을 파국으로 이끌었는가, 아니면 혁명이 아시냐를 파국으로 이끌었는가"[66]라는 논쟁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아시냐를 둘러싼 정책은 모든 당파의 실각 원인이 되었으며, 아시냐는 혁명의 가장 중심적인 과제였다.
처음에는 구체제의 채무 상환을 위한 한정적인 토지 채권이었던 아시냐는, 지폐화되면서 "무한한 양의 지폐"[67]에 재정을 의존하게 되었다. 계획 없는 증쇄, 망명 귀족의 귀금속 반출, 전쟁으로 인한 필수품 구매를 위한 정화의 국외 유출로 국내 인플레이션은 통제 불능 상태에 빠졌다. 해상 무역을 지배하는 영국과 은 공급원이었던 스페인과의 전쟁은 아시냐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아시냐 덕분에 공화국은 100만 명의 병력을 무장시키고 전황을 역전시킬 수 있었다. 또한, 감가된 3 리브르의 일당을 지급하여 상퀼로트에게 혁명 감시를 맡기고 그 추진력으로 삼을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아시냐는 혁명과 그 운명을 강력하게 결합하고 있었다. 중립국과의 교역에서 거액의 이익이 발생했으므로, 시민들의 빈곤을 도외시한다면 아시냐의 하락은 부수적인 현상에 불과했다. 라멜은 "아시냐는 혁명을 가져오고, 왕위를 뒤엎고, 공화국을 세웠다"[67]라고 말했다.
아시냐가 약 10년 동안 유통된 것은 여러 통화 제도의 창시자와 수혜자 사이에 개인적 이해관계가 일치했기 때문이며, 그 점에서 그들은 공범 관계에 있었다. 아시냐가 엄청난 이익을 창출하지 못했다면 더 단명했을 것이다.[68]
아시냐 문제는 공포 정치 이후 구체제의 채무 해소라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막대한 부채를 안고 있던 영국이 지폐를 전국적으로 유통시켜 승리한 것을 고려하면, 부채 액수 자체는 거시 경제학 관점에서 반드시 문제는 아니었다. 통령 정부 이후 "프랑-제르미날"이라는 신화폐 제도하에서 악화 회수와 채무 해소가 이루어져 혁명 전후의 공적 채무 문제는 나폴레옹 체제에서 대체로 해소되었다. 프랑스 제1제정에서는 거액의 부채에도 불구하고, 독립적인 중앙 은행인 프랑스 은행과 회계 감사원/Cour des comptes프랑스어 등이 정비되어 투명성과 확실한 정부가 실현되면서 경제는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영국의 안이한 모방에 달려든 것이 파탄의 본질적인 원인이었으며, 경제 전쟁에서 프랑스가 영국을 이길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7. 다른 국가의 유사 사례
7. 1. 러시아
"아시냐(assignat)"라는 용어는 "지폐"를 의미하는 러시아어 단어 "아시냐치야(assignatsia)"와 유사하다. "아시냐치온니 루블"(아시냐 루블)은 1769년부터 1849년 1월 1일까지 러시아에서 사용되었다. 이는 프랑스 혁명과는 관련이 없다.
7. 2. 이탈리아
1798년부터 1799년까지, 혁명 프랑스군은 로마 공화국을 수립했고, 로마 공화국은 ''아시냐''(이탈리아어: ''assegnati'')를 발행했다. 이는 1798년 9월 14일인 법률 23 프뤼크티도르 VI에 의해 발행되었다. 사용된 통화는 오래된 교황령의 통화인 ''파올로'' 또는 ''줄리오''였다. 로마 공화국은 또한 ''바이오코''와 ''스쿠도''로 표시된 동전을 발행했다.8. 한국과의 비교 및 교훈
8. 1. 한국의 화폐 개혁 경험
8. 2. 아시냐의 실패가 주는 교훈
참조
[1]
서적
La grande inflation : La monnaie en France de Louis XVI à Napoléon
[2]
서적
La grande inflation
[3]
서적
La grande inflation
[4]
서적
The French Revolution: An Economic Interpretation
https://books.google[...]
[5]
서적
Stuff and Money in the Time of the French Revolution
https://books.google[...]
[6]
웹사이트
The French Revolution, the Assignats, and the Counterfeiters
https://www.numiscor[...]
[7]
EB1911
Assignats
[8]
간행물
"Commerce, Constitutions, and the Manners of a Nation: Etienne Clavière's Revolutionary Political Economy, 1788–1793"
[9]
서적
The French Revolution: An Economic Interpretation
https://books.google[...]
[10]
서적
The French Revolution: An Economic Interpretation
https://books.google[...]
[11]
서적
The French Revolution: An Economic Interpretation
https://books.google[...]
[12]
논문
The Assignats: A Study in the Finances of the French Revolution
[13]
서적
The Money and the Finances of the French Revolution of 1789: Assignats and Mandats: A True History: Including an Examination of Dr. Andrew D. White's Paper Money Inflation in France
https://archive.org/[...]
[14]
기타
'Contre l'émission de dix-neuf cents millions d'assignats'
Paris
[15]
기타
De l'opinion de M. Camus
Paris
[16]
간행물
"Commerce, Constitutions, and the Manners of a Nation: Etienne Clavière's Revolutionary Political Economy, 1788–1793"
[17]
서적
Considerations on the Principal Events of the French Revolution
https://archive.org/[...]
Baldwin, Cradock, and Joy
[18]
서적
La grande inflation
[19]
서적
Histoire de la révolution française: depuis l'Assemblée des notables ...
https://books.google[...]
[20]
웹사이트
A.D. White (1878) The Assignat
https://aadl.org/nod[...]
[21]
웹사이트
Guide to the French Currency Collection 1791–1796
https://www.lib.uchi[...]
[22]
웹사이트
Opinion de M. de Montesquiou sur les assignats-monnoie...
https://archive.org/[...]
[23]
웹사이트
Tales from the Vault: Money of the French Revolution – the Assignat
https://www.money.or[...]
[24]
서적
Stuff and Money in the Time of the French Revolution
Harvard University Press
[25]
논문
The Assignats: A Study in the Finances of the French Revolution.
[26]
서적
La grande inflation
[27]
서적
Stuff and Money in the Time of the French Revolution
Harvard University Press
[28]
서적
Press in the French Revolution
https://books.google[...]
[29]
기타
Œuvres complètes de Maximilien Robespierre. Speech Robespierre against Brissot and the girondins Delivered to the Convention on 10 April 1793
[30]
논문
The Assignats: A Study in the Finances of the French Revolution
https://www.jstor.or[...]
[31]
서적
The Assignats
Harvard University Press
[32]
서적
Stuff and Money in the Time of the French Revolution
Harvard University Press
[33]
기타
Sir John Swinburne's 1793 Memorandum on the English Forgery of French Assignats at Haughton Castle Paper Mill, Northumberland, in the 1790s
2018-04
[34]
기타
The Thermidorian regime and the Directory 1794–1799
CUP
[35]
기타
FIAT MONEY INFLATION IN FRANCE
[36]
문서
当時のフランスの習慣では、土地のみならずその土地で収穫される作物(税収)の額も担保となる
[37]
서적
[38]
문서
「土地手形」や「土地証券」などとも訳す。単数形ではマンダ・テリトリアル。
[39]
문서
バブーフ派のマレシャルが書いた「平等派の宣言」においてマンダ・テリトリオは悪徳や強欲から生まれたもとして特に激しく非難された
[40]
서적
[41]
서적
[42]
문서
フランス王立銀行のこと。日本の定義では[[金庫 (特殊法人)|金庫]]に相当する民間が出資する特殊法人。もとは[[ルイ15世 (フランス王)|ルイ15世]]時代の財務総監[[ジョン・ロー]]が開設したジェネラール銀行で、その破産によって王立となった。その後、財務総監[[ジャック・テュルゴー|テュルゴー]]に引き継がれる。
[43]
문서
実際に国王夫妻は貴族にも呼びかけて貴金属の国庫への供出や愛国税の導入を行ったが、負債額は桁違いであり、完全に焼け石に水であった
[44]
문서
ラス式法またはロー・システムという。株券を実勢価格とかけ離れて売買する[[バブル経済]]で、開発ブームを煽ったが、この[[ミシシッピ計画|ミシシッピ・バブルの崩壊]]の負債は1791年まで完済しなかった
[45]
문서
当時は[[硬貨]]といえども[[時価]]のため、1790年は24リーヴル相当の金の[[本位貨幣|正貨]]。30スーのプレミアムは6.25%の値上がりを意味した。
[46]
문서
重農主義経済学者で、後に家族はアメリカに亡命し、デュポン財閥の祖となった。アッシニア紙幣の暴落を事前に的確に予想していたが、彼とタレーランの警告は採用されなかった。
[47]
문서
[[1790年]][[4月17日]]の法令によると、国家債務者は国家が国債の償還にアッシニアで支払うことを拒否できなかったが、それ以外の個人は受け取りを拒否できた
[48]
문서
スイス人銀行家。ジロンド派で、2度財務大臣を経験。1790年のアッシニア発行に深く関与。
[49]
문서
このような信用紙幣が全国に蔓延して63種類にも及んだ
[50]
서적
[51]
서적
[52]
문서
第1期公安委員会の委員も兼任した。第2期はカンボンと共に財政委員会の専属となった。テルミドール期に財務大臣。
[53]
서적
[54]
문서
風刺画で、描かれているのはイギリス海岸であるが、フランス人とおぼしき商人が金貨で買い付けを行っている。フランスにとってはこのような貴金属貨幣の流出がインフレを促進し、他方、イギリスにとっては穀物密輸が国内の物価を押し上げた
[55]
서적
[56]
서적
[57]
문서
国民公会議員で、恐怖政治期から財政委員。総裁政府期は五百人会議員および元老会議員。シェイエスらの「89年クラブ」のメンバーで旧フイヤン派。
[58]
문서
フランとリーヴルは1:1.0125、つまり1フランと1リーヴル3[[ドゥニエ]]の比率で交換されることと決まっていたが、ほぼ同じということで、名称もそのまま混同されて用いられた
[59]
문서
1サンチームは、1フランの100分の1を意味するので、この時の減価は1,000分の7になった計算になる
[60]
서적
[61]
문서
この法案はこの日に可決されていたが、総裁政府の二院で承認されて成立したは1795年11月13日で、これが法案の名前となった
[62]
문서
[[共和暦3年憲法|1795年憲法]]では総裁政府には立法権がなかったので、唯一、議案提出権をもつ五百人会に、行政府としての覚書を通牒して立法を提案することしかできなかった。また与党というものもなかったので、総裁は思い通りの議会運営をすることが困難で、議事の停滞は経済状況を悪化させた要因の一つ
[63]
문서
支払命令書または支払請求書。各省が発行した手形で、未納の税収を担保とするもの。
[64]
문서
つまり例えば200フランの税金を、正貨で半分の100フラン払ったとしたら、残り半分はアッシニア紙幣で10,000フラン払えという意味
[65]
서적
[66]
서적
[67]
서적
[68]
서적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