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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펜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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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펜첼주는 스위스 북동부에 위치한 주로, '수도원장의 영지'를 뜻하는 이름에서 유래했다. 1401년 장크트갈렌 시와 동맹을 맺고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항하며 자치권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을 시작했다. 1513년 스위스 연방에 가입했으며, 1597년 종교 개혁으로 인해 아펜첼아우서로덴주와 아펜첼이너로덴주로 분리되었다. 현재는 두 개의 반 칸톤으로 나뉘어 각자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아펜첼주는 알프스 산맥 북동쪽 자락에 위치하며, 란츠게마인데라는 야외 민회를 통해 정치적 의사 결정을 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2. 역사

아펜첼이라는 이름은 abbatis cella|아바티스 켈라la, 즉 '수도원장의 영지(토지)'에서 유래했다. 이는 이 지역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상트갈렌 수도원을 가리킨다.[2] 11세기 중반까지 상트갈렌 수도원장은 후에 아펜첼이라고 불리게 된 지역에 권력을 확립했으며, 당시에는 철저하게 알레만족의 땅이었다.[2]

1360년경, 방목권, 세금, 십일조 문제로 수도원장과 아펜첼 농민들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다. 양측은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슈바벤 동맹에 가입하려 했다. 1377년, 아펜첼은 콘스탄츠장크트갈렌 시의 지원을 받아 슈바벤 동맹에 가입했다. (장크트갈렌 시는 종종 인접한 상트갈렌 수도원과 대립했다.)[3]

뵈겔린제크 전투


아펜첼인과 수도원장 대리인 간의 갈등이 심해지자, 아펜첼 관리인은 사망자의 옷을 원한다며 시신을 파내라고 요구했다.[4] 이에 아펜첼인들은 봉기를 계획했고, 특정 날짜에 수도원장 영지 전역에서 관리들을 공격하고 몰아냈다. 협상이 실패한 후, 아펜첼과 장크트갈렌은 조약을 맺었지만, 이는 수도원장과 영지 사이의 분열을 의미했다. 1402년, 합스부르크 가문을 두려워한 동맹은 아펜첼을 추방했다. 같은 해, 장크트갈렌은 수도원장과 합의하여 아펜첼은 더 이상 장크트갈렌의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아펜첼은 수도원장에게 대항할 준비가 되었다고 선언하고, 1403년 슈비츠 주와 동맹을 맺었다. 글라루스 주는 지원을 덜 했지만, 아펜첼을 지원하려는 시민에게는 그렇게 하도록 허가했다.[4]

1403년 5월 15일, 동맹군은 슈파이허로 가는 고개에서 뵈겔린제크 마을 밖에서 아펜첼 군대와 만났고, 아펜첼과 연방 군대의 소규모 부대가 동맹 군대를 격파하고 단명한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1405년 6월 17일, 슈토스 고개에서 아펜첼이 또다시 승리한 후, 새로운 주는 계속 확장되었다.[3] 아펜첼은 장크트갈렌 수도원장을 사로잡았고, 이에 대한 대응으로 파문당했다.[4]

1406년 9월 11일, 귀족 협회는 "장크트 욝겐쉴트(Sankt Jörgenschild)"(성 게오르기우스 방패 기사단)라는 기사단을 결성했다.[5] 브레겐츠에서의 패배 이후, 아펜첼은 "분트"를 유지할 수 없었다. 장크트갈렌 시와 슈비츠 주는 공격을 피하기 위해 오스트리아에 돈을 지불했고, "분트"는 1408년 4월 4일 루페르트 왕에 의해 해산되었다.[3]

평화 조약의 일환으로 수도원장은 아펜첼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했지만, 여전히 특정 세금을 받을 의무가 있었다.[4] 1410년까지 이 지역은 평화를 이루지 못했다.[3] 1411년, 아펜첼은 베른 주를 제외한 전체 스위스 연방과 방어 조약을 체결하여 수도원장에 대한 입지를 강화했다. 아펜첼은 연방에 "준회원"으로 가입했으며, 1513년까지 정식 회원이 되지 못했다. 1429년에 또 다른 전투 이후, 아펜첼은 향후 의무에서 자유를 얻었다. 이 조약은 아펜첼이 장크트갈렌 수도원과 맺고 있던 마지막 재정적 관계의 종결을 나타냈으며, 연방과의 더 긴밀한 관계를 위한 움직임이었다.[3]

1522년, 마르틴 루터울리히 츠빙글리의 추종자들이 아펜첼에서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설교하기 시작했다. 초기 개혁가들은 아우서로덴 지역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다.[2] 1523년 요아킴 폰 바트가 사도행전의 개혁 버전을 설교하면서 종교개혁이 공론화되었고,[6] 1524년 4월 24일 란츠게마인데는 칸톤 의회의 종교개혁 지지 결정을 확인했다. 그러나 1525년 재세례파의 활동으로 인해 탄압이 시작되었다.[7]

종교와 외교 정책의 분열로 인해 1597년 칸톤은 평화롭게 아펜첼이너로덴아펜첼아우서로덴 두 개의 주(칸톤)으로 분리되었다. 분할 조건은 루체른, 슈비츠, 니트발덴 (가톨릭 칸톤)과 취리히, 글라루스, 샤프하우젠 (프로테스탄트 칸톤) 대표들이 중재했다.[7] 분리 이후, ''칸톤 아펜첼''이라는 용어는 두 개의 반 칸톤을 모두 지칭하는 데 계속 사용되었지만, 현대에는 사용 빈도가 줄었다. 일반적으로 정치적 맥락에서는 ''die beiden Appenzell''("두 아펜첼")이라고 말하고, 지리적 맥락에서는 이너로덴과 아우서로덴을 통칭할 때 ''Appenzellerland''라고 한다.

2. 1. 초기 역사와 기원

'아펜첼'이라는 이름은 abbatis cella|아바티스 켈라la '수도원장의 영지(즉, 토지)'에서 유래했다. 이는 이 지역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상트갈렌 수도원을 가리킨다.[2] 11세기 중반까지 상트갈렌 수도원장은 후에 아펜첼이라고 불리게 된 지역에 권력을 확립했으며, 당시에는 철저하게 알레만족의 땅이었다.[2]

2. 2. 슈바벤 동맹과의 관계

1360년경, 방목권, 세금, 십일조 문제로 수도원장과 아펜첼 농민들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다. 양측은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슈바벤 동맹에 가입하려 했다. 1377년, 아펜첼은 콘스탄츠장크트갈렌 시의 지원을 받아 슈바벤 동맹에 가입했다(장크트갈렌 시는 종종 인접한 상트갈렌 수도원과 대립했다).[3]

2. 3. 독립과 스위스 연방 가입



아펜첼인과 수도원장 대리인 간의 갈등이 심해지자, 아펜첼 관리인은 사망자의 옷을 원한다며 시신을 파내라고 요구했다.[4] 아펜첼인들은 봉기를 계획했고, 특정 날짜에 수도원장 영지 전역에서 관리들을 공격하고 몰아냈다. 협상이 실패한 후, 아펜첼과 장크트갈렌은 조약을 맺었지만, 이는 수도원장과 영지 사이의 분열을 의미했다. 1402년, 합스부르크 가문을 두려워한 동맹은 아펜첼을 추방했다. 같은 해, 장크트갈렌은 수도원장과 합의하여 아펜첼은 더 이상 장크트갈렌의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아펜첼은 수도원장에게 대항할 준비가 되었다고 선언하고, 1403년 슈비츠 주와 동맹을 맺었다. 글라루스 주는 지원을 덜 했지만, 아펜첼을 지원하려는 시민에게는 그렇게 하도록 허가했다.[4]

1403년 5월 15일, 동맹군은 슈파이허로 가는 고개에서 뵈겔린제크 마을 밖에서 아펜첼 군대와 만났고, 아펜첼과 연방 군대의 소규모 부대가 동맹 군대를 격파하고 단명한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1405년 6월 17일, 슈토스 고개에서 아펜첼이 또다시 승리한 후, 새로운 주는 계속 확장되었다.[3] 아펜첼은 장크트갈렌 수도원장을 사로잡았고, 이에 대한 대응으로 파문당했다.[4]

1406년 9월 11일, 귀족 협회는 "장크트 욝겐쉴트(Sankt Jörgenschild)"(성 게오르기우스 방패 기사단)라는 기사단을 결성했다.[5] 브레겐츠에서의 패배 이후, 아펜첼은 "분트"를 유지할 수 없었다. 장크트갈렌 시와 슈비츠 주는 공격을 피하기 위해 오스트리아에 돈을 지불했고, "분트"는 1408년 4월 4일 루페르트 왕에 의해 해산되었다.[3]

평화 조약의 일환으로 수도원장은 아펜첼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했지만, 여전히 특정 세금을 받을 의무가 있었다.[4] 1410년까지 이 지역은 평화를 이루지 못했다.[3]

1411년, 아펜첼은 베른 주를 제외한 전체 스위스 연방과 방어 조약을 체결하여 수도원장에 대한 입지를 강화했다. 아펜첼은 연방에 "준회원"으로 가입했으며, 1513년까지 정식 회원이 되지 못했다. 1429년에 또 다른 전투 이후, 아펜첼은 향후 의무에서 자유를 얻었다. 이 조약은 아펜첼이 장크트갈렌 수도원과 맺고 있던 마지막 재정적 관계의 종결을 나타냈으며, 연방과의 더 긴밀한 관계를 위한 움직임이었다.[3]

2. 4. 종교 개혁과 칸톤 분리

1522년, 마르틴 루터울리히 츠빙글리의 추종자들이 아펜첼에서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설교하기 시작했다. 초기 개혁가들은 아우서로덴 지역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다.[2] 1523년 요아킴 폰 바트가 사도행전의 개혁 버전을 설교하면서 종교개혁이 공론화되었고,[6] 1524년 4월 24일 란츠게마인데는 칸톤 의회의 종교개혁 지지 결정을 확인했다. 그러나 1525년 재세례파의 활동으로 인해 탄압이 시작되었다.[7]

1525년 4월, 란데스게마인데는 각 교구가 신앙을 선택하되, 종교적 소수자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기로 결정했다. 1529년, 아우서로덴 전체는 종교개혁으로 개종했고, 이너로덴은 가이스를 제외하고는 구교를 유지했다.[7] 1531년 카펠 전투에서 가톨릭의 승리로 아펜첼 칸톤 전체의 개혁 계획은 종식되었다.[7]

카펠 전투 이후, 두 종교는 대체로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 이들은 공동의 상업적 이익, 정치적, 법적 이해, 프랑스와의 동맹 추구, 장크트갈렌에 대한 공동의 반대 등으로 협력했다. 특히 린넨 사건(1535–42, 1579)에서 아펜첼 직조공들은 장크트갈렌의 린넨 산업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느꼈을 때 서로를 지지했다.[7]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와 외교 정책의 분열로 인해 1597년 칸톤은 평화롭게 분리되었다. 분할 조건은 루체른, 슈비츠, 니트발덴 (가톨릭 칸톤)과 취리히, 글라루스, 샤프하우젠 (프로테스탄트 칸톤) 대표들이 중재했다.[7] 분리 이후, ''칸톤 아펜첼''이라는 용어는 두 개의 반 칸톤을 모두 지칭하는 데 계속 사용되었지만, 현대에는 사용 빈도가 줄었다. 일반적으로 정치적 맥락에서는 ''die beiden Appenzell''("두 아펜첼")이라고 말하고, 지리적 맥락에서는 이너로덴과 아우서로덴을 통칭할 때 ''Appenzellerland''라고 한다.

3. 지리

아펜첼 지역은 남쪽의 고산 지대와 북쪽의 구릉 지대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알프슈타인 산맥의 석회암 지대가 펼쳐져 있으며, 최고봉은 젠티스 산(해발 2502m)이다.[2] 젠티스 산에서 흘러나오는 우르나슈 강은 지타 강(수도인 아펜첼에 위치)과 합류하여 투어 강으로 흐른다.[2] 장크트갈렌까지는 가이스 또는 헤리자우를 경유하는 노면 전차가 운행되며, 장크트갈렌에서 트로겐까지, 로르샤흐에서 하이덴까지 노면 전차가 운행된다.[2]

4. 정치

아펜첼 칸톤은 란츠게마인데라는 독특한 직접 민주주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4. 1. 란츠게마인데 (Landsgemeinde)

란츠게마인데는 20세 이상의 모든 시민이 참여하는 야외 민회로, 주요 의사 결정과 공직자 선출을 담당했다.[2] 아펜첼아우서로덴주는 1997년 9월 29일 투표를 통해 란츠게마인데 제도를 폐지했지만,[2] 아펜첼이너로덴주에서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2010년 아우서로덴주에서 이 제도를 재도입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투표 참여자의 70.29%가 반대하여 실패했다.

란츠게마인데는 4월 마지막 일요일에 개최되며, 전통 의식과 함께 진행된다.[2] 각 구성원은 칼을 차고 회의에 나타난다.[2] 이너로덴의 현행 헌법은 주로 1872년부터, 아우서로덴의 헌법은 1876년부터 시작되었다.[2]

란츠게마인데는 최고 입법 기관이며 행정부와 대통령(란다만)을 선출한다.[2] 이너로덴의 행정부는 9명으로 구성된 ''Ständekommission''이며, 아우서로덴에서는 7명으로 구성된 ''Regierungsrat''이다.[2] 각 반 칸톤에는 란츠게마인데를 위한 업무를 준비하는 상임 위원회가 있는데, 이너로덴에서는 ''Grossrat'', 아우서로덴에서는 ''Kantonsrat''으로 불린다.[2]

토지 법과 관습에 대한 가장 오래된 법전(''Landbücher'')은 약 1540년과 1585년부터 시작되었으며,[8] 후자의 원본 필사본은 "은의 책"이라고 불리며 이너로덴에서 매년 란츠게마인데가 시작될 때 사용된다.[2]

두 명의 란다만이 있는데, ''Regierender Landaman''(집행 란다만)과 ''Stillstehender Landamann''(부 란다만)이다. 임기는 2년이며 2년 후에는 서로 교체되지만 매년 유권자에게 확정을 받아야 한다.

5. 현재 분리된 칸톤

1597년 종교 개혁 이후 아펜첼아우서로덴주아펜첼이너로덴주로 분리되었다. 아펜첼아우서로덴주는 개신교를 주로 믿으며 독일어를 사용하고, 트로겐을 정치적 수도로, 헤리자우를 가장 큰 도시로 한다. 아펜첼이너로덴주는 가톨릭을 주로 믿으며 독일어를 사용하고, 아펜첼을 정치적 수도이자 최대 도시로 한다. 두 칸톤은 현재까지도 각자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5. 1. 아펜첼아우서로덴주 (Appenzell Ausserrhoden)

아펜첼아우서로덴주는 독일어를 사용하는 주이며, 주로 개신교를 믿는다. 면적은 242km2이다. 정치적 수도는 트로겐이고, 가장 큰 도시는 헤리자우이다. 면직물, 머슬린, 자수 산업이 발달했다.

5. 2. 아펜첼이너로덴주 (Appenzell Innerrhoden)



아펜첼이너로덴주는 주로 가톨릭을 믿으며, 독일어를 사용한다. 면적은 173km2이다. 정치적 수도이자 최대 도시는 아펜첼이다. 목축업이 발달했으며, 보수적인 성향이 강하다. 전통 의상과 축제 등 오래된 관습을 유지하고 있다.

참조

[1] 간행물 Appenzell (Canton) 2011-10-06
[2] 서적 Appenzell (canton)
[3] 간행물 Appenzell War
[4] 서적 The Historians' History of the World https://books.google[...] Hooper & Jackson
[5] 간행물 Order of St. George's Shield
[6] 서적 The History of Protestantism. Book Eight, "History of Protestantism in Switzerland from A.D. 1516 to its Establishment at Zurich, 1525", Chapter 10: The Spread of Protestantism in Eastern Switzerland https://books.google[...]
[7] 간행물 Appenzell Canton
[8] 웹사이트 Sammlung Schweizerischer Rechtsquellen. XIII. Abteilung: Die Rechtsquellen der Kantone Appenzell. Erster Band: Appenzeller Landbücher. Bearbeitet von Nathalie Büsser mit Registern von Margrit Meyer Kälin. Basel 2009. http://www.ssrq-s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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