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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계 캐나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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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프리카계 캐나다인은 캐나다에 거주하는 아프리카 출신 또는 아프리카 혈통의 사람들을 통칭한다. 캐나다에서 흑인의 역사는 16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초기에는 자유인, 노예, 군인 등으로 캐나다에 정착했다. 노예제는 17세기와 18세기에 걸쳐 존재했으며, 영국령으로 편입된 후에도 지속되다가 1833년 대영 제국 전역에서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흑인들은 19세기 지하 철도를 통해 미국에서 캐나다로 도피했으며, 20세기 초에는 오클라호마 등지에서 인종 차별을 피해 이주해왔다. 2021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아프리카계 캐나다인은 전체 인구의 4.3%를 차지하며, 온타리오, 퀘벡, 앨버타 등지에 주로 거주한다. 흑인들은 독자적인 문화와 종교를 형성했으며, 흑인 교회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흑인들은 정치, 문화, 스포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캐나다 사회에 기여해왔지만, 인종 차별과 경제적 불평등 등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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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계 캐나다인
개요
인구 조사 구역별 흑인 캐나다인 비율
인구 조사 구역별 흑인 캐나다인 비율
총 인구 (2021년)1,547,870명 (캐나다 전체 인구의 4.26%)
카리브해계 캐나다인749,155명 (캐나다 전체 인구의 2.2%)
주요 거주 지역토론토, 몬트리올, 브램턴, 에이잭스, 에드먼턴, 캘거리, 오타와
지역별 인구
온타리오주768,740명 (5.5%)
퀘벡주422,405명 (5.1%)
앨버타주177,940명 (4.3%)
브리티시 컬럼비아주61,760명 (1.3%)
매니토바주46,485명 (3.6%)
노바스코샤주28,220명 (3.0%)
언어
사용 언어캐나다 영어, 캐나다 프랑스어, 아프리카 노바스코샤 영어, 카리브 영어, 아이티 크레올어, 아프리카 언어
종교
종교 분포기독교 69.1%, 이슬람교 11.9%, 무종교 18.2%, 기타 종교 0.8%
관련 민족
관련 민족아프리카 노바스코샤인, 흑인 온타리오인, 아프리카계 미국인, 아프로-카리브해인, 아프리카인 (디아스포라)

2. 역사

마리 조제프 앙젤리크의 허구적 묘사가 담긴 벽화


캐나다에 들어온 것으로 기록된 최초의 흑인은 1606년 포트 로열(아카디아)로 향하는 ''조나스''호에 탑승한 이름 없는 흑인 남성이었다.[38][39] 그는 포트 로열이나 항해 중에 괴혈병으로 사망했다. 캐나다로 알려진 땅을 밟은 최초의 흑인은 마티유 다 코스타라는 자유인이었다. 항해사 사무엘 드 샹플랭과 함께 여행한 다 코스타는 1603년에서 1608년 사이에 프랑스 탐험가 피에르 뒤구아, 쓔르 드 몽의 통역관으로 노바스코샤에 도착했다.[40][39] 캐나다가 될 지역에 살았던 최초의 흑인으로 알려진 사람은 마다가스카르 출신의 노예 남성 올리비에 르 즈네로, 그는 일부 말레이 조상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처음에 키르케 형제 중 한 명, 아마도 데이비드 키르케에게 갔고, 그 후 어린 아이였을 때 프랑스 서기에게 팔렸고, 나중에는 샹플랭의 친구인 기욤 쿠이야르에게 주어졌다. 르 즈네는 1654년 사망하기 전에 풀려난 것으로 보이며, 그의 사망 증명서에는 그를 노예가 아닌 ''가정부''로 기록하고 있다.[39]

흑인들은 집단적으로 여러 차례 캐나다에 도착했다. 이들 중 첫 번째는 프랑스 육군과 해군에서 복무하는 자유인으로 왔지만, 일부는 노예이거나 고용 계약자였다. 17세기와 18세기에 약 1,000명의 노예가 뉴프랑스에 끌려왔다.[41] 영국의 정복(1759 ~ 60) 때까지 그때부터 뉴잉글랜드와 서인도 제도에서 데려온 대략 1000명의 흑인들이 뉴프랑스에서 노예로 만들어졌다. 1759년으로 봐서 지방의 기록들은 1132명의 아프리카 혈통을 포함하여 뉴프랑스에 총 3604명의 노예들이 있어왔다. 노예들의 대부분은 몬트리올에 혹은 그 근처에 살았다. 단 하나의 수확고, 다량의 생산과 한 떼 노동에 의지한 경제들에 번영시킨 노예 제도는 이 식민지들 중에 강하게 발달시키지 않았으나 영국의 통치 아래에서 새로운 생활이 주어졌다.[41]

뉴 프랑스에 있는 노예화된 아프리카인들의 대다수는 가사 노동을 수행했으며, 부유한 소유주들의 위신을 과시하기 위해 뉴 프랑스로 데려왔다. 이들은 "노예"를 소유하는 것을 자신의 지위와 부를 과시하는 방법으로 여겼다.[42] 뉴 프랑스로 데려온 노예화된 아프리카인들의 대다수는 여성 가사 노예였으며, 주인(노예 소유주)에게 강간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들은 노예화된 여성과 소녀들을 문자 그대로 성 노예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42] 밭이나 광산 대신 집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노예화된 아프리카인들은 원주민 노예보다 평균 25.2년으로 더 오래 사는 경향이 있었다(원주민은 17.7년).[39] 서인도 제도에 있는 프랑스 식민지에서와 마찬가지로, 뉴 프랑스의 노예 제도는 1685년 루이 14세가 발행한 Code Noir ("흑인 법전")에 의해 규율되었으며, 이 법전은 가톨릭 신자만 노예를 소유할 수 있고, 모든 노예는 구매 시 로마 가톨릭교로 개종해야 하며, 노예 결혼을 법적으로 인정하고, 14세 미만의 노예 자녀를 판매하는 것을 금지했다.[42] 흑인 노예는 종교 의식에서 증인으로 봉사하고, 자유인에 대한 법적 불만을 제기하고, 배심원에 의해 재판을 받을 수도 있었다.[39]

1725년 뉴 프랑스에 도착한 마리 조제프 앙젤리크는 1734년 4월 10일 몬트리올 대부분을 불태운 방화 혐의로 기소되어 처형되었다.[42] 앙젤리크는 고문을 받으면서 도주할 수 있도록 방화했다고 자백했는데, 그녀는 주인(노예 소유주)이 그녀를 서인도 제도의 설탕 농장 소유주에게 팔려고 했기 때문에, 그녀는 백인 하인인 클로드 티보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42] 이 자백이 진실인지 여부는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계속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현재 기니인 마리 마르그리트 로즈는 1736년 약 19세에 노예로 팔려 일 로얄(현대 케이프브레턴섬)의 루이스부르에 도착했으며, 같은 해 루이스부르에 주둔한 프랑스 해군 장교인 장 크리소스톰 로피노의 재산이 되었고, 그는 1738년 그녀에게서 아들을 낳았다.[42] 1755년에 그녀는 풀려났고, 로마 가톨릭교로 개종한 후 장-밥티스트 로랑이라는 이름을 가진 미크마크 인디언과 결혼했다.[42] 뛰어난 요리사였던 로즈는 일 로얄에서 가장 성공적인 사업가가 되어 섬 전체에서 음식과 브랜디의 품질로 유명한 선술집을 열었다.[42] 그녀가 1757년에 사망했을 때, 그녀의 유언장과 소지품 목록에는 프랑스에서 수입된 값비싼 의류가 있었고, 18세기 서아프리카의 다른 많은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밝은 색상의 드레스를 좋아했다는 것이 나타났다.[42]

1763년 뉴 프랑스가 영국에 할양되었을 때, 프랑스 식민지 주민들은 자신의 인간 재산을 유지할 수 있다는 보장을 받았다. 1790년, 영국은 이민을 장려하기 위해 "흑인, 가정용 가구, 농기구 또는 의류"의 자유 수입 권리를 법에 포함시켰다. 비록 노예화된 아프리카인들은 더 이상 캐나다에서 합법적으로 사고 팔 수 없었지만, 그 관행은 여전히 합법적이었지만 점점 더 인기가 없어지고 지역 신문에 반대하는 내용이 쓰여졌다. 1829년, 미국 국무장관이 노예의 캐나다 탈출을 도운 죄로 폴 발라드를 미국으로 인도해 줄 것을 요청했을 때, 로어캐나다 행정 위원회는 "노예 제도는 캐나다 법에 의해 인정되지 않는다. [...] 따라서 폭력에 의해 데려왔든, 스스로 들어왔든, 이 지역에 들어오는 모든 노예는 즉시 자유롭게 된다."라고 답변했다.[39] 영국은 1833년 대영 제국 전역에서 노예 제도를 공식적으로 폐지했다.

뉴 프랑스와 로어캐나다 출신의 흑인 노예의 후손은 백인으로 보이는 프랑스계 캐나다인이다.[43][44][45] 그들의 성씨는 카르보노, 샤레, 존슨, 라플뢰르, 르미르, 레파지, 마로이스, 파라디스 등이다.[46]

|thumb|left|나무를 자르는 노바스코샤의 흑인 왕당파 (1788년)]]

왕당파들은 자신들과 함께 대략 2000명의 흑인 노예들을 영국령 북아메리카로 데려왔으나 영국으로 충성을 통하여 자신들의 자유를 이긴 3500명의 자유 흑인들이 동시에 이동하여 노바스코샤와 뉴브런즈윅에 정착하였다. 2개의 10년간 이내에 노예 제도는 사실상 왕당파들 중에 사라졌다.

1793년 어퍼 캐나다는 노예 제도의 폐지를 위하여 법률을 제정한 단 하나의 식민지가 되었다. 새로운 수입들의 전망이 없이 노예 제도는 착실하게 쇠퇴하였다. 1800년으로 봐서 영국령 북아메리카의 다른 일부에서 법원들은 1816년 만큼 도망 노예를 위한 광고가 〈로열 가제트〉에 나왔어도 노예 제도의 확장을 효과적으로 제한시켰다. 1833년 8월 28일 영국 의회는 영국령 북아메리카 식진지들의 전부에서 노예 제도를 폐지하는 법률을 통과시켜 1834년 8월 1일 실시되었다.

|thumb|right|조시아 헨슨 (1789 ~ 1883). 도망 노예였던 그는 캐나다에서 전 노예들을 위한 정착지와 학교를 설립하고, 목사가 되었다.]]

1796년 영국령 북아메리카로 흑인들의 이동은 자메이카의 스페인과 후에 영국의 통치자들로부터 탈출한 흑인 노예들의 후손들인 자메이카의 산속의 흑인들의 단체를 포함하였다. 그러고나서 1813년과 1816년 사이에 미영 전쟁이 일어난 동안에 영국의 방향들 뒤로 피난처를 추구해 온 2000명의 노예들이 노바스코샤로 데려가졌다. 자주적으로 캐나다에 도착한 미국 흑인들의 대다수는 지하 철도로 알려진 비밀적 항로의 망상 조직을 이용하였다.

미국 남북 전쟁의 시기로 봐서 3000명 가량의 도망 노예들이 캐나다로 자신들의 길을 찾은 것이 측량되었다. 이것은 자신들의 고향 땅에서 법률에 의하여 강요된 인종 차별을 탈출하는 데 추구한 1850년대에 캘리포니아주에서 밴쿠버섬으로 이동한 대략 800명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포함하였다.

|thumb|400px|left|1920년 퀸스 공원에서 온타리오주의 지사 어니스트 찰스 드루리와 포즈한 캐나다의 흑인들]]

미국의 법적인 사회적 불평등의 이유로 미국 흑인들의 작은 단체들이 지속적으로 캐나다로 이주하여 들어간 이유에 불구하고 1865년 미국에서 노예 제도의 종말과 함께 많은 수천명의 아프리카계 캐나다인들이 미국으로 돌아갔다. 오클라호마주로부터 1000명 이상의 흑인들이 캐나다의 프레리, 특히 앨버타주로 이주하였다. 캐나다에서 흑인 인구는 실질상 증가하지 않았지만 1960년대까지 이민법에서 변화들이 비백인 이민들에 성향을 옮기고, 자격이 있는 서인도 제도와 아프리카인들의 다수를 캐나다로 들어오는 데 허락하였다. 흑인들의 이 주요 유입은 거대하게 해운상들(1950년1995년 사이에 대략 3000명의 서인도 제도에서 온 이민들과 아프리카에서 온 15000명 이상이 있었다)을 제외한 모든 캐나다의 지방에 원래의 흑인 인구보다 수적으로 우세하였다.

캐나다 내 흑인의 존재는 대부분 자발적인 이민에 뿌리를 두고 있다.[31] 노바스코샤의 흑인 왕당파 후손, 지하철도의 종착지로서 캐나다를 자유의 약속으로 여긴 전 미국의 노예 후손, 그리고 카리브해나 아프리카에서 온 더 최근의 이민자들 사이의 개인적, 문화적 상호 관계를 복잡하게 만드는 다양한 역학 관계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집단을 하나로 묶는 공통 요소는 그들이나 그들의 조상이 자발적으로 캐나다에 정착하기로 적극적으로 선택했다는 것이다.[31]

1813년에서 1815년 사이에 흑인들의 다음 주요 이주가 발생했다. 주로 체서피크 만과 조지아주 시 아일랜드에서 온 1812년 전쟁 난민들은 미국을 탈출하여 해먼즈 플레인스, 비치빌, 루커스빌, 노스 프레스턴, 이스트 프레스턴, 아프리빌 및 엘름 힐에 정착했다. 1814년 4월 영국 부제독 알렉산더 코크레인의 흑인 자유와 정착에 관한 선언은 1818년까지 약 3,500명의 흑인 미국인의 탈출로 이어졌다.[65] 난민들의 정착은 처음에는 번영하는 농업 공동체를 만드는 수단으로 여겨졌지만, 전쟁 이후의 열악한 경제 상황과 난민들에게 불모지를 할당한 것이 경제적 어려움을 야기했다.[65] 초기 몇 년 동안 사회 통합은 어려웠는데, 이는 해양 지역에 노예로 묶인 아프리카인들이 널리 퍼지면서 새로 자유화된 흑인 캐나다인들이 노예와 같은 수준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65] 정치적으로 노바스코샤와 어퍼 캐나다의 흑인 로열리스트 공동체는 역사가 제임스 워커가 "영국에 대한 강한 충성의 전통"이라고 칭한 특징을 보였는데, 이는 영국이 그들에게 자유를 부여했기 때문이며, 캐나다 흑인들은 민병대에서, 특히 1812년 전쟁 동안 어퍼 캐나다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는데, 이는 미국의 승리 가능성이 그들의 재노예화 가능성을 의미했기 때문이다.[41] 군사적으로, 약 1744년 세네갈에서 태어나 현재의 세인트 캐서린스 근처에 정착한 흑인 로열리스트는 영국의 전쟁 노력을 지원하기 위해 유색인 부대를 조직할 것을 제안했다. 이 제안은 거부되었지만, 한 백인 장교가 소규모 흑인 부대를 조직했다.[48] 이 "유색인 부대"는 퀸스턴 하이츠와 포트 조지 포위 공격에서 싸웠으며, 침략하는 미국 군대로부터 캐나다가 될 지역을 방어했다.[48] 미국에서 온 많은 난민들은 이후 전쟁 중 군사적 문제뿐만 아니라 자유화된 아프리카인들을 사용하여 노예가 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추가적인 해방을 돕는 데에도 뚜렷한 활약을 보였다.[65]

미국과는 달리 캐나다에는 연방 정부 차원에서 "짐 크로우" 법이 없었고, 교육 분야를 제외하면 주 정부 차원에서도 그러한 법이 없었다.[42] 대신, 인종 차별은 지역 교육 위원회 위원, 사업가, 부동산 중개인, 노조 지도자, 집주인들의 편견에 의존했다.[42] 1850년의 보통학교법은 캐나다 서부에서, 1865년의 교육법은 노바스코샤에서 인종 차별을 강요했지만, 두 경우 모두 학교 위원회는 차별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상당한 재량을 부여받았다.[42] 핼리팩스 교육 위원회는 1865년에 인종 차별을 시행했지만, 1883년에는 핼리팩스 북부의 흑인 학교가 폐쇄된 후 중산층 흑인 핼리팩스 공동체가 학교 위원회에 청원하여 자녀들이 백인 아이들과 함께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었다.[42] 그러나 1814년 체서피크 만에서 작전 중이던 왕립 해군 군함으로 탈출한 미국 노예의 후손들로 구성된 핼리팩스의 아프리크빌 지역에 1848년경 흑인 공동체가 등장하면서, 대부분의 흑인 핼리팩스 아이들에게 사실상의 인종 차별이 발생했다.[42]

|thumb|300px|아프리크빌 교회 (1849년 설립), 정부의 아프리크빌 사과의 일환으로 2011년에 재건축됨

아프리크빌은 1860년대까지 자체 학교, 잡화점, 우체국, 그리고 대부분의 주민이 다니는 아프리카 연합 침례 교회를 갖춘 "결속력 있고 자급자족하는 공동체"로 묘사되었다.[42] 19세기 말의 흑인 캐나다 공동체는 강한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노바스코샤와 온타리오의 흑인 공동체 지도자들은 종종 자원하여 교사로 활동했다.[42] 노바스코샤와 온타리오의 흑인 학교 예산이 백인 학교 예산보다 열악했지만, 교사로 활동하는 흑인 공동체 지도자들의 노력은 흑인 아이들이 최소한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하는 "지지적이고 배려하는 환경"을 제공했다.[42] 아프리카 유산에 대한 자부심의 표시로, 흑인 핼리팩스인들의 주요 회의실은 아프리카 국가가 "아프리카 분할" 기간 동안 유럽 국가를 물리친 유일한 사례인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1895-1896)에서 이탈리아를 격파한 에티오피아의 메넬리크 2세 황제의 이름을 따서 메넬리크 홀로 명명되었다.[42]

2. 1. 초기 역사 (17세기 ~ 18세기)



캐나다에 들어온 것으로 기록된 최초의 흑인은 1606년 포트 로열(아카디아)로 향하는 ''조나스''호에 탑승한 이름 없는 흑인 남성이었다.[38][39] 그는 포트 로열이나 항해 중에 괴혈병으로 사망했다. 캐나다로 알려진 땅을 밟은 최초의 흑인은 마티유 다 코스타라는 자유인이었다. 항해사 사무엘 드 샹플랭과 함께 여행한 다 코스타는 1603년에서 1608년 사이에 프랑스 탐험가 피에르 뒤구아, 쓔르 드 몽의 통역관으로 노바스코샤에 도착했다.[40][39] 캐나다가 될 지역에 살았던 최초의 흑인으로 알려진 사람은 마다가스카르 출신의 노예 남성 올리비에 르 즈네로, 그는 일부 말레이 조상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처음에 키르케 형제 중 한 명, 아마도 데이비드 키르케에게 갔고, 그 후 어린 아이였을 때 프랑스 서기에게 팔렸고, 나중에는 샹플랭의 친구인 기욤 쿠이야르에게 주어졌다. 르 즈네는 1654년 사망하기 전에 풀려난 것으로 보이며, 그의 사망 증명서에는 그를 노예가 아닌 ''가정부''로 기록하고 있다.[39]

흑인들은 집단적으로 여러 차례 캐나다에 도착했다. 이들 중 첫 번째는 프랑스 육군과 해군에서 복무하는 자유인으로 왔지만, 일부는 노예이거나 고용 계약자였다. 17세기와 18세기에 약 1,000명의 노예가 뉴프랑스에 끌려왔다.[41] 1759년 ~ 1760년 영국이 뉴 프랑스를 정복할 당시, 약 3,604명의 노예가 뉴 프랑스에 있었는데, 이 중 1,132명이 흑인이었고 나머지는 원주민이었다.[41] 노예의 대다수는 뉴 프랑스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수익성 높은 모피 거래의 중심지인 몬트리올에 살았다.[41]

뉴 프랑스에 있는 노예화된 아프리카인들의 대다수는 가사 노동을 수행했으며, 부유한 소유주들의 위신을 과시하기 위해 뉴 프랑스로 데려왔다. 이들은 "노예"를 소유하는 것을 자신의 지위와 부를 과시하는 방법으로 여겼다.[42] 뉴 프랑스로 데려온 노예화된 아프리카인들의 대다수는 여성 가사 노예였으며, 주인(노예 소유주)에게 강간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들은 노예화된 여성과 소녀들을 문자 그대로 성 노예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42] 밭이나 광산 대신 집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노예화된 아프리카인들은 원주민 노예보다 평균 25.2년으로 더 오래 사는 경향이 있었다(원주민은 17.7년).[39] 서인도 제도에 있는 프랑스 식민지에서와 마찬가지로, 뉴 프랑스의 노예 제도는 1685년 루이 14세가 발행한 Code Noir ("흑인 법전")에 의해 규율되었으며, 이 법전은 가톨릭 신자만 노예를 소유할 수 있고, 모든 노예는 구매 시 로마 가톨릭교로 개종해야 하며, 노예 결혼을 법적으로 인정하고, 14세 미만의 노예 자녀를 판매하는 것을 금지했다.[42] 흑인 노예는 종교 의식에서 증인으로 봉사하고, 자유인에 대한 법적 불만을 제기하고, 배심원에 의해 재판을 받을 수도 있었다.[39]

1725년 뉴 프랑스에 도착한 마리 조제프 앙젤리크는 1734년 4월 10일 몬트리올 대부분을 불태운 방화 혐의로 기소되어 처형되었다.[42] 앙젤리크는 고문을 받으면서 도주할 수 있도록 방화했다고 자백했는데, 그녀는 주인(노예 소유주)이 그녀를 서인도 제도의 설탕 농장 소유주에게 팔려고 했기 때문에, 그녀는 백인 하인인 클로드 티보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42] 이 자백이 진실인지 여부는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계속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현재 기니인 마리 마르그리트 로즈는 1736년 약 19세에 노예로 팔려 일 로얄(현대 케이프브레턴섬)의 루이스부르에 도착했으며, 같은 해 루이스부르에 주둔한 프랑스 해군 장교인 장 크리소스톰 로피노의 재산이 되었고, 그는 1738년 그녀에게서 아들을 낳았다.[42] 1755년에 그녀는 풀려났고, 로마 가톨릭교로 개종한 후 장-밥티스트 로랑이라는 이름을 가진 미크마크 인디언과 결혼했다.[42] 뛰어난 요리사였던 로즈는 일 로얄에서 가장 성공적인 사업가가 되어 섬 전체에서 음식과 브랜디의 품질로 유명한 선술집을 열었다.[42] 그녀가 1757년에 사망했을 때, 그녀의 유언장과 소지품 목록에는 프랑스에서 수입된 값비싼 의류가 있었고, 18세기 서아프리카의 다른 많은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밝은 색상의 드레스를 좋아했다는 것이 나타났다.[42]

1763년 뉴 프랑스가 영국에 할양되었을 때, 프랑스 식민지 주민들은 자신의 인간 재산을 유지할 수 있다는 보장을 받았다. 1790년, 영국은 이민을 장려하기 위해 "흑인, 가정용 가구, 농기구 또는 의류"의 자유 수입 권리를 법에 포함시켰다. 비록 노예화된 아프리카인들은 더 이상 캐나다에서 합법적으로 사고 팔 수 없었지만, 그 관행은 여전히 합법적이었지만 점점 더 인기가 없어지고 지역 신문에 반대하는 내용이 쓰여졌다. 1829년, 미국 국무장관이 노예의 캐나다 탈출을 도운 죄로 폴 발라드를 미국으로 인도해 줄 것을 요청했을 때, 로어캐나다 행정 위원회는 "노예 제도는 캐나다 법에 의해 인정되지 않는다. [...] 따라서 폭력에 의해 데려왔든, 스스로 들어왔든, 이 지역에 들어오는 모든 노예는 즉시 자유롭게 된다."라고 답변했다.[39] 영국은 1833년 대영 제국 전역에서 노예 제도를 공식적으로 폐지했다.

뉴 프랑스와 로어캐나다 출신의 흑인 노예의 후손은 백인으로 보이는 프랑스계 캐나다인이다.[43][44][45] 그들의 성씨는 카르보노, 샤레, 존슨, 라플뢰르, 르미르, 레파지, 마로이스, 파라디스 등이다.[46]

2. 1. 1. 뉴프랑스 시대의 노예제



캐나다에 들어온 것으로 기록된 최초의 흑인은 1606년 포트 로열 (아카디아)로 향하는 ''조나스''호에 탑승한 이름 없는 흑인 남성이었다.[38][39] 그는 포트 로열이나 항해 중에 괴혈병으로 사망했다. 캐나다로 알려진 땅을 밟은 최초의 흑인은 마티유 다 코스타라는 자유인이었다. 항해사 사무엘 드 샹플랭과 함께 여행한 다 코스타는 1603년에서 1608년 사이에 프랑스 탐험가 피에르 뒤구아, 쓔르 드 몽의 통역관으로 노바스코샤에 도착했다.[40][39] 캐나다가 될 지역에 살았던 최초의 흑인으로 알려진 사람은 마다가스카르 출신의 노예 남성 올리비에 르 즈네로, 그는 일부 말레이 조상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처음에 키르케 형제 중 한 명, 아마도 데이비드 키르케에게 갔고, 그 후 어린 아이였을 때 프랑스 서기에게 팔렸고, 나중에는 샹플랭의 친구인 기욤 쿠이야르에게 주어졌다. 르 즈네는 1654년 사망하기 전에 풀려난 것으로 보이며, 그의 사망 증명서에는 그를 노예가 아닌 ''가정부''로 기록하고 있다.[39]

흑인들은 집단적으로 여러 차례 캐나다에 도착했다. 이들 중 첫 번째는 프랑스 육군과 해군에서 복무하는 자유인으로 왔지만, 일부는 노예이거나 고용 계약자였다. 17세기와 18세기에 약 1,000명의 노예가 뉴 프랑스에 끌려왔다.[41] 1759-1760년 영국이 뉴 프랑스를 정복할 당시, 약 3,604명의 노예가 뉴 프랑스에 있었는데, 이 중 1,132명이 흑인이었고 나머지는 원주민이었다.[41] 노예의 대다수는 뉴 프랑스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수익성 높은 모피 거래의 중심지인 몬트리올에 살았다.[41]

뉴 프랑스에 있는 노예화된 아프리카인들의 대다수는 가사 노동을 수행했으며, 부유한 소유주들의 위신을 과시하기 위해 뉴 프랑스로 데려왔다. 이들은 "노예"를 소유하는 것을 자신의 지위와 부를 과시하는 방법으로 여겼다.[42] 뉴 프랑스로 데려온 노예화된 아프리카인들의 대다수는 여성 가사 노예였으며, 주인(노예 소유주)에게 강간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들은 노예화된 여성과 소녀들을 문자 그대로 성 노예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42] 밭이나 광산 대신 집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노예화된 아프리카인들은 원주민 노예보다 평균 25.2년으로 더 오래 사는 경향이 있었다(원주민은 17.7년).[39] 서인도 제도에 있는 프랑스 식민지에서와 마찬가지로, 뉴 프랑스의 노예 제도는 1685년 루이 14세가 발행한 Code Noir ("흑인 법전")에 의해 규율되었으며, 이 법전은 가톨릭 신자만 노예를 소유할 수 있고, 모든 노예는 구매 시 로마 가톨릭교로 개종해야 하며, 노예 결혼을 법적으로 인정하고, 14세 미만의 노예 자녀를 판매하는 것을 금지했다.[42] 흑인 노예는 종교 의식에서 증인으로 봉사하고, 자유인에 대한 법적 불만을 제기하고, 배심원에 의해 재판을 받을 수도 있었다.[39]

1725년 뉴 프랑스에 도착한 마리 조제프 앙젤리크는 1734년 4월 10일 몬트리올 대부분을 불태운 방화 혐의로 기소되어 처형되었다.[42] 앙젤리크는 고문을 받으면서 도주할 수 있도록 방화했다고 자백했는데, 그녀는 주인(노예 소유주)이 그녀를 서인도 제도의 설탕 농장 소유주에게 팔려고 했기 때문에, 그녀는 백인 하인인 클로드 티보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42] 이 자백이 진실인지 여부는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계속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현재 기니인 마리 마르그리트 로즈는 1736년 약 19세에 노예로 팔려 일 로얄(현대 케이프브레턴섬)의 루이스부르에 도착했으며, 같은 해 루이스부르에 주둔한 프랑스 해군 장교인 장 크리소스톰 로피노의 재산이 되었고, 그는 1738년 그녀에게서 아들을 낳았다.[42] 1755년에 그녀는 풀려났고, 로마 가톨릭교로 개종한 후 장-밥티스트 로랑이라는 이름을 가진 미크마크 인디언과 결혼했다.[42] 뛰어난 요리사였던 로즈는 일 로얄에서 가장 성공적인 사업가가 되어 섬 전체에서 음식과 브랜디의 품질로 유명한 선술집을 열었다.[42] 그녀가 1757년에 사망했을 때, 그녀의 유언장과 소지품 목록에는 프랑스에서 수입된 값비싼 의류가 있었고, 18세기 서아프리카의 다른 많은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밝은 색상의 드레스를 좋아했다는 것이 나타났다.[42]

2. 1. 2. 영국 통치 하의 노예제



캐나다에 들어온 것으로 기록된 최초의 흑인은 1606년 포트 로열 (아카디아)로 향하는 ''조나스''호에 탑승한 이름 없는 흑인 남성이었다.[38][39] 그는 포트 로열이나 항해 중에 괴혈병으로 사망했다. 캐나다로 알려진 땅을 밟은 최초의 흑인은 마티유 다 코스타라는 자유인이었다. 항해사 사무엘 드 샹플랭과 함께 여행한 다 코스타는 1603년에서 1608년 사이에 프랑스 탐험가 피에르 뒤구아, 쓔르 드 몽의 통역관으로 노바스코샤에 도착했다.[40][39] 캐나다가 될 지역에 살았던 최초의 흑인으로 알려진 사람은 마다가스카르 출신의 노예 남성 올리비에 르 즈네로, 그는 일부 말레이 조상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처음에 키르케 형제 중 한 명, 아마도 데이비드 키르케에게 갔고, 그 후 어린 아이였을 때 프랑스 서기에게 팔렸고, 나중에는 샹플랭의 친구인 기욤 쿠이야르에게 주어졌다. 르 즈네는 1654년 사망하기 전에 풀려난 것으로 보이며, 그의 사망 증명서에는 그를 노예가 아닌 ''가정부''로 기록하고 있다.[39]

흑인들은 집단적으로 여러 차례 캐나다에 도착했다. 이들 중 첫 번째는 프랑스 육군과 해군에서 복무하는 자유인으로 왔지만, 일부는 노예이거나 고용 계약자였다. 17세기와 18세기에 약 1,000명의 노예가 뉴 프랑스에 끌려왔다.[41] 1759-1760년 영국이 뉴 프랑스를 정복할 당시, 약 3,604명의 노예가 뉴 프랑스에 있었는데, 이 중 1,132명이 흑인이었고 나머지는 원주민이었다.[41] 노예의 대다수는 뉴 프랑스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수익성 높은 모피 거래의 중심지인 몬트리올에 살았다.[41]

뉴 프랑스에 있는 노예화된 아프리카인들의 대다수는 가사 노동을 수행했으며, 부유한 소유주들의 위신을 과시하기 위해 뉴 프랑스로 데려왔다. 이들은 "노예"를 소유하는 것을 자신의 지위와 부를 과시하는 방법으로 여겼다.[42] 뉴 프랑스로 데려온 노예화된 아프리카인들의 대다수는 여성 가사 노예였으며, 주인(노예 소유주)에게 강간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들은 노예화된 여성과 소녀들을 문자 그대로 성 노예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42] 밭이나 광산 대신 집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노예화된 아프리카인들은 원주민 노예보다 평균 25.2년으로 더 오래 사는 경향이 있었다(원주민은 17.7년).[39] 서인도 제도에 있는 프랑스 식민지에서와 마찬가지로, 뉴 프랑스의 노예 제도는 1685년 루이 14세가 발행한 Code Noir ("흑인 법전")에 의해 규율되었으며, 이 법전은 가톨릭 신자만 노예를 소유할 수 있고, 모든 노예는 구매 시 로마 가톨릭교로 개종해야 하며, 노예 결혼을 법적으로 인정하고, 14세 미만의 노예 자녀를 판매하는 것을 금지했다.[42] 흑인 노예는 종교 의식에서 증인으로 봉사하고, 자유인에 대한 법적 불만을 제기하고, 배심원에 의해 재판을 받을 수도 있었다.[39]

1725년 뉴 프랑스에 도착한 마리 조제프 앙젤리크는 1734년 4월 10일 몬트리올 대부분을 불태운 방화 혐의로 기소되어 처형되었다.[42] 앙젤리크는 고문을 받으면서 도주할 수 있도록 방화했다고 자백했는데, 그녀는 주인(노예 소유주)이 그녀를 서인도 제도의 설탕 농장 소유주에게 팔려고 했기 때문에, 그녀는 백인 하인인 클로드 티보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42] 이 자백이 진실인지 여부는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계속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현재 기니인 마리 마르그리트 로즈는 1736년 약 19세에 노예로 팔려 일 로얄(현대 케이프브레턴섬)의 루이스부르에 도착했으며, 같은 해 루이스부르에 주둔한 프랑스 해군 장교인 장 크리소스톰 로피노의 재산이 되었고, 그는 1738년 그녀에게서 아들을 낳았다.[42] 1755년에 그녀는 풀려났고, 로마 가톨릭교로 개종한 후 장-밥티스트 로랑이라는 이름을 가진 미크마크 인디언과 결혼했다.[42] 뛰어난 요리사였던 로즈는 일 로얄에서 가장 성공적인 사업가가 되어 섬 전체에서 음식과 브랜디의 품질로 유명한 선술집을 열었다.[42] 그녀가 1757년에 사망했을 때, 그녀의 유언장과 소지품 목록에는 프랑스에서 수입된 값비싼 의류가 있었고, 18세기 서아프리카의 다른 많은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밝은 색상의 드레스를 좋아했다는 것이 나타났다.[42]

1763년 뉴 프랑스가 영국에 할양되었을 때, 프랑스 식민지 주민들은 자신의 인간 재산을 유지할 수 있다는 보장을 받았다. 1790년, 영국은 이민을 장려하기 위해 "흑인, 가정용 가구, 농기구 또는 의류"의 자유 수입 권리를 법에 포함시켰다. 비록 노예화된 아프리카인들은 더 이상 캐나다에서 합법적으로 사고 팔 수 없었지만, 그 관행은 여전히 합법적이었지만 점점 더 인기가 없어지고 지역 신문에 반대하는 내용이 쓰여졌다. 1829년, 미국 국무장관이 노예의 캐나다 탈출을 도운 죄로 폴 발라드를 미국으로 인도해 줄 것을 요청했을 때, 로어캐나다 행정 위원회는 "노예 제도는 캐나다 법에 의해 인정되지 않는다. [...] 따라서 폭력에 의해 데려왔든, 스스로 들어왔든, 이 지역에 들어오는 모든 노예는 즉시 자유롭게 된다."라고 답변했다.[39] 영국은 1833년 대영 제국 전역에서 노예 제도를 공식적으로 폐지했다.

뉴 프랑스와 로어캐나다 출신의 흑인 노예의 후손은 백인으로 보이는 프랑스계 캐나다인이다.[43][44][45] 그들의 성씨는 카르보노, 샤레, 존슨, 라플뢰르, 르미르, 레파지, 마로이스, 파라디스 등이다.[46]

2. 2. 흑인 왕당파와 노예제 폐지 운동 (18세기 후반 ~ 19세기 초)

미국 독립 전쟁 당시 북미의 영국 식민지 주민들은 자신의 미래가 어디에 있는지 결정해야 했다. 13개 식민지에서 영국 왕실에 충성하는 사람들은 유나이티드 제국 로열리스트라고 불렸으며 북쪽으로 이동했다. 많은 백인 미국인 로열리스트들은 1,500명에서 2,500명에 달하는 노예화된 아프리카인들을 데려왔다.[47] 전쟁 중 영국은 반군 주인을 떠나 그들을 위해 일하는 노예화된 아프리카인들에게 자유와 토지를 약속했다. 이는 던모어 백작의 선언을 통해 버지니아에서 발표되었다. 노예화된 아프리카인들은 또한 뉴욕시와 찰스턴의 영국군으로 탈출했으며, 전쟁 후 수천 명을 대피시켰다. 그들은 3,000명을 노바스코샤로 이송했다.[48][49]

앤더슨 러핀 애보트, 최초의 흑인 캐나다 의사 면허 취득자로, 미국 남북 전쟁에 참전했으며, 에이브러햄 링컨의 임종을 지켰다.


후자의 집단은 주로 상인과 노동자로 구성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셸번 근처의 비치타운에 정착했다. 일부는 뉴브런즈윅에 정착했다. 두 집단 모두 여전히 노예화된 아프리카인들을 소유한 백인 정착민들과 유력한 토지 소유주들의 차별적 대우를 받았다. 난민 중 일부는 전쟁 전에 자유 흑인이었으며, 평등에 대한 영국의 약속을 믿고 다른 난민들과 함께 노바스코샤로 도망쳤다. 새로운 난민들의 압력으로 세인트존시는 1785년 헌장을 개정하여 아프리카계 사람들이 무역을 하거나, 상품을 판매하거나, 항구에서 어업을 하거나, 자유 시민이 되는 것을 특별히 배제했다. 이러한 조항은 1870년까지 유지되었지만, 그 무렵에는 대부분 무시되었다.[50]

1782년, 북미 최초의 인종 폭동이 셸번에서 발생했다. 백인 참전 용사들이 이전 군인들이 자신들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일을 하고 있던 아프리카계 미국인 정착민들을 공격했다. 영국 정부의 정착 지원 실패, 혹독한 날씨, 백인 식민지 주민들의 차별로 인해 1792년 1월 15일 1,192명의 흑인 로열리스트 남녀와 아이들이 노바스코샤를 떠나 서아프리카로 향했다. 그들은 현재 시에라리온에 정착했으며, 그곳에서 프리타운의 원주민이 되었다. 그들은 잉글랜드에서 온 흑인 빈민과 같은 다른 자유 이주민 집단과 함께 현재의 시에라리온 크리올족이 되었으며, 이는 "크리오"라고도 알려져 있다.

노예화된 아프리카인과 자유 흑인 인구를 구별하지 못해 추정하기 어렵지만, 1784년경 몬트리올에는 약 40명의 노예화된 아프리카인이 있었고, 퀘벡 자치령에는 약 304명의 노예화된 아프리카인이 있었다고 추정된다.[51] 1799년에는 주요 기록에 흑인 캐나다인에 관한 75건의 항목이 기록되었으며, 이는 1809년까지 두 배로 증가했다.[51]

노예 폐지론자 제임스 드럼몬드 맥그리거를 기리는 노바스코샤 피크투의 기념비. 그는 흑인 노바스코샤인 노예 해방을 도왔다.


캐나다의 기후는 미국 남부와 카리브해에서 행해지는 농장 농업과는 달리 1년 내내 아프리카 노예를 유지하는 것이 비경제적이었다.[56] 식민지 경제 내에서 노예제는 점점 드물어졌다. 예를 들어, 강력한 모호크 지도자 조셉 브랜트는 소피아 버튼 풀리라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사서 노예로 삼아 약 12년 동안 보유하다가 100달러에 팔았다.[57][58]

1772년, 미국 독립 혁명 전에 영국은 영국 제도에서 노예 무역을 불법화했고, 1778년 스코틀랜드에서는 ''나이트 대 웨더번'' 판결이 이어졌다.[47] 이 판결은 다시 노바스코샤 식민지에 영향을 미쳤다. 1788년, 피크투 출신의 노예 폐지론자 제임스 드럼몬드 맥그리거는 캐나다에서 최초의 반노예제 문서를 출판하고, 노예의 자유를 사들이기 시작했으며, 노예를 소유한 장로교 교회 동료들을 꾸짖었다.[59]

1790년, 노바스코샤의 의회 의원인 존 버비지는 자신이 노예로 삼았던 아프리카인들을 해방시키고, 그들에게 옷 두 벌을 주고 그들이 읽을 수 있도록 준비했다.[47] 리처드 존 유니에케의 주도하에 1787년, 1789년, 그리고 1808년 1월 11일에 노바스코샤 입법부는 노예제를 합법화하는 것을 거부했다.[60][61] 토마스 앤드루 루미스덴 스트레인지(1790–1796)와 샘슨 살터 블로워스(1797–1832) 두 명의 대법원장은 노바스코샤에서 노예 소유주로부터 노예가 된 아프리카인들을 해방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62][63] 이 판사들은 식민지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1793년, 어퍼캐나다의 초대 부총독인 존 그레이브스 심코는 노예제를 폐지하려 했다. 같은 해, 새로운 입법부는 대영 제국에서 노예제를 제한한 최초의 기관이 되어, 기존의 소유권을 확인했지만, 그 이후 노예 여성 또는 소녀에게서 태어난 모든 사람은 25세에 해방되도록 허용했다.[64] 1800년까지 다른 영국령 북아메리카 식민지에서는 노예제가 거의 폐지되었다. 1807년 노예 무역 금지법은 1807년에 대영 제국 내의 노예 무역을 불법화했고, 1833년 노예제 폐지법은 식민지에서 노예 소유를 완전히 불법화했다(인도 제외). 이로 인해 캐나다는 보스턴 킹 목사처럼 미국에서 노예 제도를 피해 온 많은 아프리카계 난민들에게 매력적인 목적지가 되었다.

2. 2. 1. 흑인 왕당파의 이주

미국 독립 전쟁 당시 북미의 영국 식민지 주민들은 자신의 미래가 어디에 있는지 결정해야 했다. 13개 식민지에서 영국 왕실에 충성하는 사람들은 유나이티드 제국 로열리스트라고 불렸으며 북쪽으로 이동했다. 많은 백인 미국인 로열리스트들은 1,500명에서 2,500명에 달하는 노예화된 아프리카인들을 데려왔다.[47] 전쟁 중 영국은 반군 주인을 떠나 그들을 위해 일하는 노예화된 아프리카인들에게 자유와 토지를 약속했다. 이는 던모어 백작의 선언을 통해 버지니아에서 발표되었다. 노예화된 아프리카인들은 또한 뉴욕시와 찰스턴의 영국군으로 탈출했으며, 전쟁 후 수천 명을 대피시켰다. 그들은 3,000명을 노바스코샤로 이송했다.[48][49]

후자의 집단은 주로 상인과 노동자로 구성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셸번 근처의 비치타운에 정착했다. 일부는 뉴브런즈윅에 정착했다. 두 집단 모두 여전히 노예화된 아프리카인들을 소유한 백인 정착민들과 유력한 토지 소유주들의 차별적 대우를 받았다. 난민 중 일부는 전쟁 전에 자유 흑인이었으며, 평등에 대한 영국의 약속을 믿고 다른 난민들과 함께 노바스코샤로 도망쳤다. 새로운 난민들의 압력으로 세인트존시는 1785년 헌장을 개정하여 아프리카계 사람들이 무역을 하거나, 상품을 판매하거나, 항구에서 어업을 하거나, 자유 시민이 되는 것을 특별히 배제했다. 이러한 조항은 1870년까지 유지되었지만, 그 무렵에는 대부분 무시되었다.[50]

1782년, 북미 최초의 인종 폭동이 셸번에서 발생했다. 백인 참전 용사들이 이전 군인들이 자신들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일을 하고 있던 아프리카계 미국인 정착민들을 공격했다. 영국 정부의 정착 지원 실패, 혹독한 날씨, 백인 식민지 주민들의 차별로 인해 1792년 1월 15일 1,192명의 흑인 로열리스트 남녀와 아이들이 노바스코샤를 떠나 서아프리카로 향했다. 그들은 현재 시에라리온에 정착했으며, 그곳에서 프리타운의 원주민이 되었다. 그들은 잉글랜드에서 온 흑인 빈민과 같은 다른 자유 이주민 집단과 함께 현재의 시에라리온 크리올족이 되었으며, 이는 "크리오"라고도 알려져 있다.

노예화된 아프리카인과 자유 흑인 인구를 구별하지 못해 추정하기 어렵지만, 1784년경 몬트리올에는 약 40명의 노예화된 아프리카인이 있었고, 퀘벡 자치령에는 약 304명의 노예화된 아프리카인이 있었다고 추정된다.[51] 1799년에는 주요 기록에 흑인 캐나다인에 관한 75건의 항목이 기록되었으며, 이는 1809년까지 두 배로 증가했다.[51]

2. 2. 2. 노예제 폐지 운동의 전개



캐나다의 기후는 미국 남부와 카리브해에서 행해지는 농장 농업과는 달리 1년 내내 아프리카 노예를 유지하는 것이 비경제적이었다.[56] 식민지 경제 내에서 노예제는 점점 드물어졌다. 예를 들어, 강력한 모호크 지도자 조셉 브랜트는 소피아 버튼 풀리라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사서 노예로 삼아 약 12년 동안 보유하다가 100달러에 팔았다.[57][58]

1772년, 미국 독립 혁명 전에 영국은 영국 제도에서 노예 무역을 불법화했고, 1778년 스코틀랜드에서는 ''나이트 대 웨더번'' 판결이 이어졌다.[47] 이 판결은 다시 노바스코샤 식민지에 영향을 미쳤다. 1788년, 피크투 출신의 노예 폐지론자 제임스 드럼몬드 맥그리거는 캐나다에서 최초의 반노예제 문서를 출판하고, 노예의 자유를 사들이기 시작했으며, 노예를 소유한 장로교 교회 동료들을 꾸짖었다.[59]

1790년, 노바스코샤의 의회 의원인 존 버비지는 자신이 노예로 삼았던 아프리카인들을 해방시키고, 그들에게 옷 두 벌을 주고 그들이 읽을 수 있도록 준비했다.[47] 리처드 존 유니에케의 주도하에 1787년, 1789년, 그리고 1808년 1월 11일에 노바스코샤 입법부는 노예제를 합법화하는 것을 거부했다.[60][61] 토마스 앤드루 루미스덴 스트레인지(1790–1796)와 샘슨 살터 블로워스(1797–1832) 두 명의 대법원장은 노바스코샤에서 노예 소유주로부터 노예가 된 아프리카인들을 해방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62][63] 이 판사들은 식민지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1793년, 어퍼캐나다의 초대 부총독인 존 그레이브스 심코는 노예제를 폐지하려 했다. 같은 해, 새로운 입법부는 대영 제국에서 노예제를 제한한 최초의 기관이 되어, 기존의 소유권을 확인했지만, 그 이후 노예 여성 또는 소녀에게서 태어난 모든 사람은 25세에 해방되도록 허용했다.[64] 1800년까지 다른 영국령 북아메리카 식민지에서는 노예제가 거의 폐지되었다. 1807년 노예 무역 금지법은 1807년에 대영 제국 내의 노예 무역을 불법화했고, 1833년 노예제 폐지법은 식민지에서 노예 소유를 완전히 불법화했다(인도 제외). 이로 인해 캐나다는 보스턴 킹 목사처럼 미국에서 노예 제도를 피해 온 많은 아프리카계 난민들에게 매력적인 목적지가 되었다.

2. 3. 지하철도와 흑인 정착촌 형성 (19세기 중반)

많은 흑인 캐나다인들은 노바스코샤 주[49] 및 남부 온타리오 주에 거주하며, 그 조상은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를 이용해 미국에서 캐나다로 도피하여 피난처와 자유를 찾았던 아프리카계 미국인 노예들이다. 1820년대 후반부터 영국이 1833년에 노예제를 금지하고 미국 남북 전쟁이 1861년에 시작될 때까지,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는 수만 명의 도망 노예들을 캐나다로 데려왔다. 1819년, 어퍼캐나다의 법무 장관이었던 존 로빈슨 경은 "영국 법에 의해 보호되는 가장 중요한 시민적 권리는 신체의 자유이므로…흑인들은 어퍼캐나다에 거주함으로써 신체의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으며, 그들의 권리를 침해하려는 어떠한 시도에도 법원에서 저항할 것이다"라고 판결했다.[66] 1819년 로빈슨의 판결 이후, 어퍼캐나다의 판사들은 "모든 사람은 영국 땅에 도달하면 자유다"라는 이유로 어퍼캐나다로 도망친 노예들의 미국 송환 요청을 거부했다.[66] 아프리카계 미국인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노래 중 하나인 ''자유의 노래''에는 다음과 같은 가사가 있었다. "나는 캐나다로 가는 길, 차갑고 멀리 떨어진 땅으로, 노예제의 끔찍한 결과,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안녕, 옛 주인님, 나를 따라오지 마세요, 나는 캐나다로 가는 길, 흑인들이 자유로운 곳으로!".[66]

1850년, 미국 의회는 도망 노예법을 통과시켰는데, 이 법은 현상금 사냥꾼들에게 미국 내 어디에서든 도망 노예를 다시 체포할 권리를 부여하고, 모든 연방, 주, 지방 법 집행 기관에게 현상금 사냥꾼들과 협력하여 도망 노예를 체포하도록 명령했다.[66] 도망 노예법은 도망 노예 혐의를 받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도망 노예가 아니라는 법정 증언권과 같은 어떠한 법적 권리도 박탈했기 때문에, 자유인들이 거리에 납치되어 노예로 팔려가는 사건이 흔하게 발생했다.[66] 1850년대 미국의 사법 시스템은 흑인들에게 적대적이었고, 그들의 권리를 옹호하려는 의지가 거의 없었다. 1857년, ''드레드 스콧 대 샌퍼드'' 판결에서 미국 대법원은 흑인 미국인들은 어떤 조건에서도 미국 시민이 아니며, 될 수도 없다고 판결했는데, 이는 북부 주에서 노예제를 금지하는 법률이 위헌이라는 것을 시사하는 것처럼 보였다.

도망 노예법과 미국에서 노예제를 확대하려는 법적 판결의 결과로, 미국에 살고 있던 많은 자유 흑인들은 캐나다로 피난처를 찾는 것을 선택했고, 1850년 한 신문은 피츠버그 호텔에서 일하는 흑인들이 캐나다로 가기 전에 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고 언급하며, 그들은 "...붙잡히느니 차라리 죽겠다"라고 결심했다고 보도했다.[66] 1852년 6월 17일자 ''토론토 콜로니스트'' 신문은 온타리오 호수의 미국 쪽에서 토론토 항구로 들어오는 거의 모든 배나 보트가 도망 노예를 싣고 오는 것처럼 보인다고 보도했다.[66]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의 가장 활동적인 "지휘자" 중 한 명은 "검은 모세"로 불린 해리엇 터브먼이었는데, 그녀는 11번의 여행을 통해 약 300명의 도망 노예를 캐나다로 데려왔고, 그들 대부분은 세인트캐서린스에 정착했다.[66] 터브먼은 그녀의 "승객"들을 숲과 늪을 통해 밤에 여행하도록 안내했는데(낮에 여행하는 것은 너무 위험했음), 나침반으로 북극성을 사용하고, 흐린 밤에는 나무에 이끼가 어느 쪽에 났는지를 보고 캐나다로 가는 가장 좋은 길을 찾았다.[66]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에서의 이러한 여행은 터브먼과 그녀의 "승객"들이 현상금 사냥꾼과 법 집행 기관 모두를 피해야 했고, 황야를 여행하면서 며칠 동안 음식을 먹지 못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많은 고난과 고통을 수반했다. 항상 북극성을 따라갔다.[66] 터브먼은 보통 뉴욕주 로체스터로 가서 프레데릭 더글러스가 도망 노예들을 보호했고,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캐나다로 건너갔다.[66] 도망 노예법에 따라 현상금 사냥꾼들과 협력해야 했던 미국 세관과 달리, 국경의 캐나다 측 세관 당국은 훨씬 더 협조적이었고, 터브먼이 그녀의 "승객"들과 함께 캐나다로 들어갈 때 "눈을 감았다".[66]

|thumb|200px|새뮤얼 링골드 워드 목사, c.1855. 워드는 1851년 도망 노예를 캐나다로 탈출하도록 도운 혐의로 도망 노예법 위반 혐의를 피하기 위해 캐나다 서부로 도망가야 했다.]]

1854년 6월 한 주 동안, 23명의 도망 노예가 미국 국경 순찰대를 피해 디트로이트 강을 건너 윈저에서 자유를 얻었고, 43명의 자유인들도 현상금 사냥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윈저로 건너왔다.[66] 미국 태생의 캐나다 사회학자 다니엘 G. 힐은 1854년 6월 이 주가 캐나다로의 흑인 대이동의 전형적인 예인 것으로 보인다고 썼다.[66] 여론은 도망 노예의 편에 서고 노예 상인들에게 반대하는 경향이 있었다. 1851년 2월 26일, 토론토 지부의 반노예제 협회가 설립되었는데, ''글로브'' 신문은 이를 "토론토에서 우리가 본 가장 크고 열정적인 모임"이라고 묘사하며 다음과 같은 결의안을 발표했다. "노예제는 인류의 법에 대한 분노이며, 그 지속적인 관행은 그 소멸을 위한 최선을 다해야 한다".[66] 같은 모임에서 회원들은 "우리 땅으로 도망치는 노예제의 많은 '집 없는' 피해자들을 돕기로" 약속했다.[66] 메릴랜드에서 노예로 태어난 회중 교회의 목사 새뮤얼 링골드 워드는 캐나다 서부(현대 온타리오)에 대해 이렇게 썼다. "토론토는 여러 면에서 다소 독특하며, 노예제 반대는 내가 아는 시라큐스를 제외하고 그 어느 도시보다 인기가 있습니다…나는 보건, 마컴, 피커링 및 뉴마켓 마을에서 좋은 청중을 얻었습니다. 노예제 반대 감정은 이 모든 곳에서 퍼지고 증가하고 있습니다. 대중의 마음은 문자 그대로 진리를 갈망하고, 정직한 청취자와 열성적인 질문자들은 여러 마일을 여행하고, 우리 시골 예배당에 몰려들고, 빛을 간절하고 참을성 있게 찾으면서 몇 시간을 머물 것입니다".[66] 워드 자신은 제리 구조에 연루되어 1851년 캐나다 서부로 도망쳐야 했고, 이로 인해 도망 노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다. 도망 노예에 대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1867년 온타리오주가 된 캐나다 서부의 흑인들은 분리된 학교에 갇혔다.[41]

흑인을 노예로 팔기 위해 캐나다로 넘어온 미국 현상금 사냥꾼들은 당국에 체포될 경우 납치 혐의로 기소되었다.[66] 1857년, 두 명의 미국 현상금 사냥꾼 T.G. 제임스와 존 웰스가 채텀에 거주하는 20세의 도망 노예 조셉 알렉산더를 납치하려 했으나, 알렉산더를 만나기 위해 그곳에 간 후 채텀의 로열 익스체인지 호텔을 떠나던 현상금 사냥꾼들을 흑인들이 에워싸면서 실패했다.[66] 현상금 사냥꾼 중 한 명에게서 알렉산더의 전 주인으로부터 온 편지가 발견되었는데, 그 편지에는 그를 "건방진" 성격의 노예로 묘사하며, 주인의 마차를 부수고 도망치기 전에 그의 말 한 쌍을 풀어주었고, 알렉산더를 다시 잡아다 거세하고 싶어한다고 덧붙였다.[66] 거세는 남성 도망 노예에 대한 일반적인 처벌이었다. 알렉산더는 대치 상황을 지켜보던 구경꾼들에게 연설을 하면서, 뉴올리언스의 "노예 수용소"에서의 삶이 극도로 비인간적이라고 비난하고 노예로 사는 것보다 죽는 편이 낫다고 말했다.[66] 알렉산더는 "노예 수용소"에서의 삶을 노예들을 완전히 굴복시키는 상태로 만들기 위해 고안된 매일의 채찍질, 구타, 강간의 체제라고 묘사했다. 대치는 알렉산더가 풀려나고 군중이 웰스와 제임스를 철도역으로 행진하면서 채텀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경고하면서 끝났다.[66]

2. 3. 1. 지하철도를 통한 탈출

흑인 캐나다인 중 상당수는 노바스코샤 주[49] 및 남부 온타리오 주에 거주하며, 조상이 미국에서 캐나다로 도피하여 피난처와 자유를 찾았던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를 이용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노예들에게서 비롯되었다. 1820년대 후반부터 영국이 1833년에 노예제를 금지하고 미국 남북 전쟁이 1861년에 시작될 때까지,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는 수만 명의 도망 노예들을 캐나다로 데려왔다. 1819년, 존 로빈슨 경은 어퍼캐나다의 법무 장관이었는데, 그는 "영국 법에 의해 보호되는 가장 중요한 시민적 권리는 신체의 자유이므로…흑인들은 어퍼캐나다에 거주함으로써 신체의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으며, 그들의 권리를 침해하려는 어떠한 시도에도 법원에서 저항할 것이다"라고 판결했다.[66] 1819년 로빈슨의 판결 이후, 어퍼캐나다의 판사들은 "모든 사람은 영국 땅에 도달하면 자유다"라는 이유로 어퍼캐나다로 도망친 노예들의 미국 송환 요청을 거부했다.[66] 아프리카계 미국인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노래 중 하나인 ''자유의 노래''에는 다음과 같은 가사가 있었다. "나는 캐나다로 가는 길, 차갑고 멀리 떨어진 땅으로, 노예제의 끔찍한 결과,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안녕, 옛 주인님, 나를 따라오지 마세요, 나는 캐나다로 가는 길, 흑인들이 자유로운 곳으로!".[66]

1850년, 미국 의회는 도망 노예법을 통과시켰는데, 이 법은 현상금 사냥꾼들에게 미국 내 어디에서든 도망 노예를 다시 체포할 권리를 부여하고, 모든 연방, 주, 지방 법 집행 기관에게 현상금 사냥꾼들과 협력하여 도망 노예를 체포하도록 명령했다.[66] 도망 노예법은 도망 노예 혐의를 받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도망 노예가 아니라는 법정 증언권과 같은 어떠한 법적 권리도 박탈했기 때문에, 자유인들이 거리에 납치되어 노예로 팔려가는 사건이 흔하게 발생했다.[66] 1850년대 미국의 사법 시스템은 흑인들에게 적대적이었고, 그들의 권리를 옹호하려는 의지가 거의 없었다. 1857년, ''드레드 스콧 대 샌퍼드'' 판결에서 미국 대법원은 흑인 미국인들은 어떤 조건에서도 미국 시민이 아니며, 될 수도 없다고 판결했는데, 이는 북부 주에서 노예제를 금지하는 법률이 위헌이라는 것을 시사하는 것처럼 보였다.

도망 노예법과 미국에서 노예제를 확대하려는 법적 판결의 결과로, 미국에 살고 있던 많은 자유 흑인들은 캐나다로 피난처를 찾는 것을 선택했고, 1850년 한 신문은 피츠버그 호텔에서 일하는 흑인들이 캐나다로 가기 전에 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고 언급하며, 그들은 "...붙잡히느니 차라리 죽겠다"라고 결심했다고 보도했다.[66] 1852년 6월 17일자 ''토론토 콜로니스트'' 신문은 온타리오 호수의 미국 쪽에서 토론토 항구로 들어오는 거의 모든 배나 보트가 도망 노예를 싣고 오는 것처럼 보인다고 보도했다.[66]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의 가장 활동적인 "지휘자" 중 한 명은 "검은 모세"로 불린 해리엇 터브먼이었는데, 그녀는 11번의 여행을 통해 약 300명의 도망 노예를 캐나다로 데려왔고, 그들 대부분은 세인트 캐서린에 정착했다.[66] 터브먼은 그녀의 "승객"들을 숲과 늪을 통해 밤에 여행하도록 안내했는데(낮에 여행하는 것은 너무 위험했음), 나침반으로 북극성을 사용하고, 흐린 밤에는 나무에 이끼가 어느 쪽에 났는지를 보고 캐나다로 가는 가장 좋은 길을 찾았다.[66]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에서의 이러한 여행은 터브먼과 그녀의 "승객"들이 현상금 사냥꾼과 법 집행 기관 모두를 피해야 했고, 황야를 여행하면서 며칠 동안 음식을 먹지 못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많은 고난과 고통을 수반했다. 항상 북극성을 따라갔다.[66] 터브먼은 보통 뉴욕주 로체스터로 가서 프레데릭 더글러스가 도망 노예들을 보호했고,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캐나다로 건너갔다.[66] 도망 노예법에 따라 현상금 사냥꾼들과 협력해야 했던 미국 세관과 달리, 국경의 캐나다 측 세관 당국은 훨씬 더 협조적이었고, 터브먼이 그녀의 "승객"들과 함께 캐나다로 들어갈 때 "눈을 감았다".[66]

|thumb|200px|새뮤얼 링골드 워드 목사, c.1855. 워드는 1851년 도망 노예를 캐나다로 탈출하도록 도운 혐의로 도망 노예법 위반 혐의를 피하기 위해 캐나다 서부로 도망가야 했다.]]

1854년 6월 한 주 동안, 23명의 도망 노예가 미국 국경 순찰대를 피해 디트로이트 강을 건너 윈저에서 자유를 얻었고, 43명의 자유인들도 현상금 사냥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윈저로 건너왔다.[66] 미국 태생의 캐나다 사회학자 다니엘 G. 힐은 1854년 6월 이 주가 캐나다로의 흑인 대이동의 전형적인 예인 것으로 보인다고 썼다.[66] 여론은 도망 노예의 편에 서고 노예 상인들에게 반대하는 경향이 있었다. 1851년 2월 26일, 토론토 지부의 반노예제 협회가 설립되었는데, ''글로브'' 신문은 이를 "토론토에서 우리가 본 가장 크고 열정적인 모임"이라고 묘사하며 다음과 같은 결의안을 발표했다. "노예제는 인류의 법에 대한 분노이며, 그 지속적인 관행은 그 소멸을 위한 최선을 다해야 한다".[66] 같은 모임에서 회원들은 "우리 땅으로 도망치는 노예제의 많은 '집 없는' 피해자들을 돕기로" 약속했다.[66] 메릴랜드에서 노예로 태어난 회중 교회의 목사 새뮤얼 링골드 워드는 캐나다 서부(현대 온타리오)에 대해 이렇게 썼다. "토론토는 여러 면에서 다소 독특하며, 노예제 반대는 내가 아는 시라큐스를 제외하고 그 어느 도시보다 인기가 있습니다…나는 보건, 마컴, 피커링 및 뉴마켓 마을에서 좋은 청중을 얻었습니다. 노예제 반대 감정은 이 모든 곳에서 퍼지고 증가하고 있습니다. 대중의 마음은 문자 그대로 진리를 갈망하고, 정직한 청취자와 열성적인 질문자들은 여러 마일을 여행하고, 우리 시골 예배당에 몰려들고, 빛을 간절하고 참을성 있게 찾으면서 몇 시간을 머물 것입니다".[66] 워드 자신은 제리 구조에 연루되어 1851년 캐나다 서부로 도망쳐야 했고, 이로 인해 도망 노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다. 도망 노예에 대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1867년 온타리오가 된 캐나다 서부의 흑인들은 분리된 학교에 갇혔다.[41]

흑인을 노예로 팔기 위해 캐나다로 넘어온 미국 현상금 사냥꾼들은 당국에 체포될 경우 납치 혐의로 기소되었다.[66] 1857년, 두 명의 미국 현상금 사냥꾼 T.G. 제임스와 존 웰스가 채텀에 거주하는 20세의 도망 노예 조셉 알렉산더를 납치하려 했으나, 알렉산더를 만나기 위해 그곳에 간 후 채텀의 로열 익스체인지 호텔을 떠나던 현상금 사냥꾼들을 흑인들이 에워싸면서 실패했다.[66] 현상금 사냥꾼 중 한 명에게서 알렉산더의 전 주인으로부터 온 편지가 발견되었는데, 그 편지에는 그를 "건방진" 성격의 노예로 묘사하며, 주인의 마차를 부수고 도망치기 전에 그의 말 한 쌍을 풀어주었고, 알렉산더를 다시 잡아다 거세하고 싶어한다고 덧붙였다.[66] 거세는 남성 도망 노예에 대한 일반적인 처벌이었다. 알렉산더는 대치 상황을 지켜보던 구경꾼들에게 연설을 하면서, 뉴올리언스의 "노예 수용소"에서의 삶이 극도로 비인간적이라고 비난하고 노예로 사는 것보다 죽는 편이 낫다고 말했다.[66] 알렉산더는 "노예 수용소"에서의 삶을 노예들을 완전히 굴복시키는 상태로 만들기 위해 고안된 매일의 채찍질, 구타, 강간의 체제라고 묘사했다. 대치는 알렉산더가 풀려나고 군중이 웰스와 제임스를 철도역으로 행진하면서 채텀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경고하면서 끝났다.[66]

2. 3. 2. 밴쿠버섬으로의 이주

1858년, 밴쿠버 섬의 영국 식민지 총독 제임스 더글러스는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흑인 단체의 질의에 답하여 그의 관할 구역에 정착할 가능성에 대해 답했다. 그들은 캘리포니아 주의회가 흑인에 대한 차별적인 법률을 통과시켜 재산 소유를 금지하고 배지를 착용하도록 요구한 것에 분노했다. 더글러스 총독은 어머니가 카리브해 출신의 흑백 혼혈의 "자유 유색인" 이었기에[77] 호의적으로 답했다. 그해 말, 약 600~800명의 흑인 미국인이 빅토리아로 이주하여 밴쿠버 섬과 솔트스프링섬에 정착했다. 적어도 두 명, 피터 레스터와 미플린 위스타 기브스가 그곳에서 성공적인 상인이 되었다. 후자는 또한 정치에 입문하여 1860년대에 새로 설립된 시의회에 선출되었다.

기브스는 남북 전쟁 이후 노예 제도가 폐지된 후 1860년대 후반에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왔고 아칸소주 리틀록, 주의 수도에 정착했다. 그는 변호사가 되었고 미국 최초의 흑인 판사로 선출되었다. 그는 공화당과 관련된 부유한 사업가가 되었고, 1897년에는 미국 대통령에 의해 마다가스카르 영사로 임명되었다.

2. 4. 20세기 이후의 이민과 사회 변화

20세기 초, 오클라호마, 텍사스 등 미국 남부 주에서 인종 차별을 피해 캐나다로 이주하는 흑인들이 늘어났다. 이들은 대이동의 일환으로 캐나다에 새로운 정착지와 커뮤니티를 건설했으며, 주로 앨버타와 서스캐처원에 블록 정착지를 형성했다.[78] 대표적인 정착지로는 앰버 밸리, 캠시, 정킨스(현재 와일드우드), 키스톤(현재 브레턴), 엘든 타운십 북쪽의 이전 커뮤니티, 메이드스톤, 서스캐처원 등이 있다.[79][80][81]

윌리엄 페이튼 허바드는 1894년부터 1914년까지 토론토 시의원이었다.


하지만, 캐나다를 약속의 땅으로 여겼던 이들은 도착 후 인종 차별을 경험하고 실망하기도 했다.[82]

1913년, 흑인 객실 승무원에 대한 인종 차별적인 행동이 벌어지기 직전에 흑인 침대차 승무원인 네이선 레드몬이 캐나다 온타리오주 토론토로 왔다. 몇 년 동안 돈을 모은 후, 레드몬은 자신의 사업을 시작했는데, 이는 최초의 아프리카계 캐나다인이 소유한 마차 사업이었다. 1937년까지 레드몬의 사업은 요크 타운십에서 두 번째로 큰 트럭 및 마차 사업으로 성장했다. 그의 성공적인 사업은 이글린턴 애비뉴 바로 북쪽 122 벨그라비아 애비뉴에 위치해 있었으며,[83] 오늘날에도 많은 토론토 간행물에서 기억되고 있다.[84]

차별적인 대우에 맞서기 위해, 1917년 흑인 전용 침대차 승무원 조합인 "슬리핑 카 포터스 연합(Order of Sleeping Car Porters)"이 설립되어 철도 노선에서 분리를 종식시키고 동등한 임금과 혜택을 위해 싸웠다.[42]

|thumb|left|1918년 에릭 케닝턴(Eric Kennington)의 작품 ''정복자''는 토론토 출신 제16 캐나다 스코틀랜드 대대를 묘사하고 있다. 가운데 흑인이 대대의 깃발을 들고 있고, 오른쪽에는 하얀 담요를 덮은 또 다른 흑인이 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캐나다 원정군(CEF)에 지원한 흑인들은 처음에는 거부당했지만, 비판에 대한 대응으로 국방부 장관 샘 휴스 경은 1914년 10월 모집 대령들이 흑인 지원자를 자유롭게 수락하거나 거부할 수 있도록 했다.[39] 일부 모집 대령은 모든 흑인 지원자를 거부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들을 받아들였는데, 흑인 남성이 CEF에서 복무할 수 있는 능력은 지역 모집 대령이 얼마나 편견을 갖고 있고/거나 지원자에게 절박했는지에 전적으로 달려 있었다.[39] 공식적으로 1916년부터 흑인 캐나다인은 서부 전선에서 참호를 파는 건설 부대에만 배치되었다.[85] 1916년 7월 5일에 설립된 흑인 전용 CEF 제2 건설 회사 채플린이었던 윌리엄 화이트 목사는 명예 대위로 임명되어 CEF에서 장교 위임을 받은 몇 안 되는 흑인 중 한 명이 되었다.[86] 그러나 캐나다 역사가 르네 샤르트랑은 1918년 에릭 케닝턴의 그림 ''정복자''에서 토론토 지역에서 모집된 제16캐나다 스코틀랜드 대대의 병사들이 프랑스의 폐허를 행진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킬트를 입은 병사 중 한 명이 흑인이라는 사실을 언급하며, 흑인 지원자들이 최전선 보병으로 배치된 경우가 있었다고 주장했다.[87]

흑인 캐나다인을 건설 회사에 제한하는 규칙에도 불구하고 약 2,000명의 흑인 캐나다인이 CEF에서 보병으로 싸웠으며, 제임스 그랜트, 제레미아 존스(Jeremiah Jones), 세이모어 타일러, 로이 펠스, 컬리 크리스찬 등이 화력 속에서 영웅적인 행위로 주목받았다.[86] 제레미아 존스(Jeremiah Jones)는 1916년, 노바스코샤 주 트루로 출신으로, 나이를 속이고 CEF의 제106대대에 입대했다.[88] 존스는 비미 능선에서의 영웅적인 행위로 공로 훈장을 추천받았는데, 그는 독일 기관총 진지를 점령하고 작전 중에 부상을 입었지만, 그것을 받지 못했다.[88] 1917년 후반, 존스는 파스샹달 전투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고 1918년 초에 CEF에서 부상으로 퇴원했다.[88] 2010년, 존스는 비미 능선에서의 행동으로 캐나다군 공로 훈장을 사후에 수여받았다.[88] 세인트 캐서린 출신의 흑인인 제임스 그랜트는 1918년 격렬한 화력 속에서 독일 포병총을 탈취한 공로로 군사 십자 훈장을 받았다.[39]

|thumb|제레미아 존스는 1917년 비미 능선에서 독일 기관총 진지를 점령한 공로로 공로 훈장을 추천받았다.

2. 4. 1. 프레리 지역으로의 이주

20세기에 미국과 캐나다 사이의 이동은 계속되었다. 일부 흑인 캐나다인은 1900년대 초 오클라호마, 텍사스 및 다른 남부 주에서 인종 차별을 피해 시골 남부에서 탈출한 대이동의 일환으로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 새로운 정착지와 커뮤니티를 건설했는데, 종종 블록 정착지로, 1905년 주가 된 직후 앨버타와 서스캐처원에 정착했다.[78] 예시로는 앰버 밸리, 캠시, 정킨스(현재 와일드우드)와 키스톤(현재 브레턴)이 있으며, 엘든 타운십 북쪽의 이전 커뮤니티도 있다. 메이드스톤, 서스캐처원 (예를 들어, 서스캐처원 지방 문화 유산 No. 439: 메이드스톤에서 북쪽으로 30km 떨어진 원래 통나무 스타일의 실로(샬로우) 침례교회와 관련된 묘지 참조)[79][80][81]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캐나다에 도착했을 때 인종 차별을 접하고 실망했는데, 그들은 캐나다를 일종의 약속의 땅으로 여겼었다.[82]

|thumb|윌리엄 페이튼 허바드(William Peyton Hubbard)는 1894년부터 1914년까지 토론토 시의원였다.

1913년, 흑인 객실 승무원에 대한 인종 차별적인 행동이 벌어지기 직전에 흑인 침대차 승무원인 네이선 레드몬이 캐나다 온타리오주 토론토로 왔다. 몇 년 동안 돈을 모은 후, 레드몬은 자신의 사업을 시작했는데, 이는 최초의 아프리카계 캐나다인이 소유한 마차 사업이었다. 1937년까지 레드몬의 사업은 요크 타운십에서 두 번째로 큰 트럭 및 마차 사업으로 성장했다. 그의 성공적인 사업은 이글린턴 애비뉴 바로 북쪽 122 벨그라비아 애비뉴에 위치해 있었으며,[83] 오늘날에도 많은 토론토 간행물에서 기억되고 있다.[84]

차별적인 대우에 맞서기 위해, 1917년 흑인 전용 침대차 승무원 조합인 "슬리핑 카 포터스 연합(Order of Sleeping Car Porters)"이 설립되어 철도 노선에서 분리를 종식시키고 동등한 임금과 혜택을 위해 싸웠다.[42]

제1차 세계 대전 중, 캐나다 원정군(CEF)에 지원한 흑인들은 처음에는 거부당했지만, 비판에 대한 대응으로 국방부 장관 샘 휴스 경은 1914년 10월 모집 대령들이 흑인 지원자를 자유롭게 수락하거나 거부할 수 있도록 했다.[39] 일부 모집 대령은 모든 흑인 지원자를 거부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들을 받아들였는데, 흑인 남성이 CEF에서 복무할 수 있는 능력은 지역 모집 대령이 얼마나 편견을 갖고 있고/거나 지원자에게 절박했는지에 전적으로 달려 있었다.[39] 공식적으로 1916년부터 흑인 캐나다인은 서부 전선에서 참호를 파는 건설 부대에만 배치되었다.[85] 1916년 7월 5일에 설립된 흑인 전용 CEF 제2 건설 회사 채플린이었던 윌리엄 화이트 목사는 명예 대위로 임명되어 CEF에서 장교 위임을 받은 몇 안 되는 흑인 중 한 명이 되었다.[86] 그러나 캐나다 역사가 르네 샤르트랑은 1918년 에릭 케닝턴의 그림 ''정복자''에서 토론토 지역에서 모집된 제16캐나다 스코틀랜드 대대의 병사들이 프랑스의 폐허를 행진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킬트를 입은 병사 중 한 명이 흑인이라는 사실을 언급하며, 흑인 지원자들이 최전선 보병으로 배치된 경우가 있었다고 주장했다.[87]

|thumb|left|1918년 에릭 케닝턴(Eric Kennington)의 작품 ''정복자''는 토론토 출신 제16 캐나다 스코틀랜드 대대를 묘사하고 있다. 가운데 흑인이 대대의 깃발을 들고 있고, 오른쪽에는 하얀 담요를 덮은 또 다른 흑인이 있다.

흑인 캐나다인을 건설 회사에 제한하는 규칙에도 불구하고 약 2,000명의 흑인 캐나다인이 CEF에서 보병으로 싸웠으며, 제임스 그랜트, 제레미아 존스(Jeremiah Jones), 세이모어 타일러, 로이 펠스, 컬리 크리스찬 등이 화력 속에서 영웅적인 행위로 주목받았다.[86] 제레미아 존스(Jeremiah Jones)는 1916년, 노바스코샤 주 트루로 출신으로, 나이를 속이고 CEF의 제106대대에 입대했다.[88] 존스는 비미 능선에서의 영웅적인 행위로 공로 훈장을 추천받았는데, 그는 독일 기관총 진지를 점령하고 작전 중에 부상을 입었지만, 그것을 받지 못했다.[88] 1917년 후반, 존스는 파스샹달 전투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고 1918년 초에 CEF에서 부상으로 퇴원했다.[88] 2010년, 존스는 비미 능선에서의 행동으로 캐나다군 공로 훈장을 사후에 수여받았다.[88] 세인트 캐서린 출신의 흑인인 제임스 그랜트는 1918년 격렬한 화력 속에서 독일 포병총을 탈취한 공로로 군사 십자 훈장을 받았다.[39]

|thumb|제레미아 존스는 1917년 비미 능선에서 독일 기관총 진지를 점령한 공로로 공로 훈장을 추천받았다.

2. 4. 2. 이민법 변화와 새로운 이민 물결

1865년 미국에서 노예 제도가 종식되면서 많은 아프리카계 캐나다인들이 미국으로 돌아갔지만, 미국의 법적인 사회적 불평등 때문에 소규모 흑인 단체들은 지속적으로 캐나다로 이주하였다.[41] 1910년 클리포드 시프턴의 이민 캠페인은 흑인 오클라호마인과 미국 남부의 다른 흑인 농부들이 앨버타주 앰버 밸리와 캐나다의 다른 지역에 정착하려 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1911년 윌프리드 로리에 총리는 흑인 이민자의 캐나다 상륙을 1년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는데, 이는 흑인이 캐나다 기후와 요구 사항에 부적합하다고 간주했기 때문이다.[57]

1920년대에는 케이프 브레턴 제철소에서 일하기 위해 카리브해 출신 흑인들이 도착하여 1899년 앨라배마에서 온 사람들을 대체했다.[89] 캐나다의 많은 철도 포터들은 미국에서 모집되었으며, 미국 남부, 뉴욕시, 워싱턴 D.C.에서 와 몬트리올, 토론토, 위니펙, 밴쿠버의 주요 도시에 정착했다.[90]

1962년까지 캐나다는 이민 제한을 유지하다가 이민법에서 인종 관련 조항을 삭제했다. 1967년 포인트 기반 이민 시스템 도입으로 카리브해 이민이 증가했으며, 특히 흑인 바베이도스인들이 증가했다.[95] 1950년부터 1995년까지 약 30만 명의 서인도 제도 사람들이 캐나다에 정착했다.[41] 해상 주를 제외한 대부분의 흑인 캐나다인은 서인도 제도 출신 이민자의 후손이다.[41] 이후 아프리카에서 온 새로운 이민자들이 점점 더 많이 캐나다로 오고 있다.[27] 1950년부터 1995년까지 약 15만 명의 아프리카인이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41]

1970년 헨리 홀 컴퓨터 건물


1969년 1월 29일, 몬트리올의 서 조지 윌리엄스 대학교에서 백인 생물학 교수가 흑인 학생들의 성적에 편견을 보였다는 의혹에 항의하며 흑인 학생들을 포함한 약 200명의 학생들이 헨리 홀 컴퓨터 건물을 점거하는 서 조지 윌리엄스 사건이 발생했다.[100] 1969년 2월 11일, 경찰 진압대가 건물을 습격하여 폭력 사태가 발생하고 화재로 200만 달러의 피해가 발생했으며, 많은 학생들이 구타당하고 체포되었다.[100] 이 사건은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었으며, 건물 밖 군중들은 "흑인들을 불태워라!"라고 외쳤다.[100] 시위 지도자 로버트 "로지" 더글러스와 앤 쿨스는 유죄 판결을 받았고, 더글러스는 형기를 마친 후 도미니카로 추방되어 총리가 되었으며, 쿨스는 사면 후 1984년 피에르 트뤼도에 의해 상원에 임명되어 최초의 흑인 상원의원이 되었다.[100]

1967년 7월, 카리바나 축제가 서인도 제도 출신 이민자들에 의해 토론토에서 시작되어 북미에서 가장 큰 카리브해 문화 축제 중 하나가 되었다. 1975년에는 온타리오주 앰허스트버그에 앰허스트버그 자유 박물관이 설립되었다.[101] 대서양 캐나다에서는 노바 스코샤 흑인 문화 센터가 노바 스코샤주 체리 브룩에 설립되었다.

3. 인구 구성

캐나다 통계청의 2021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1,547,870명의 캐나다인이 흑인으로 확인되었으며, 이는 전체 캐나다 인구의 4.3%를 차지한다.[18] 이 중 10%는 "백인과 흑인" 혼혈로 정체성을 확인했다.[19] 2021년 흑인 인구가 가장 많은 5개 주는 온타리오, 퀘벡, 앨버타, 브리티시컬럼비아, 매니토바였다.[18]

흑인 인구가 가장 많은 10개의 인구 조사 대도시 지역은 토론토, 몬트리올, 오타와, 에드먼턴, 캘거리, 위니펙, 밴쿠버, 해밀턴, 오샤와, 퀘벡 시였다.[20] 핼리팩스 지역의 프레스턴은 흑인 비율이 69.4%로 가장 높은 지역 사회이며, 미국 혁명 이후 왕실이 흑인 로열리스트에게 토지를 제공한 정착지였다.[21] 앨버타주 남동부의 마을인 브룩스는 흑인 비율이 22.3%로 가장 높은 인구 조사 하위 구역이다. 이곳의 지역 사회는 주로 동아프리카 이민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2011년 인구 조사에서는 945,665명의 흑인 캐나다인이 집계되었으며, 이는 캐나다 인구의 2.9%를 차지했다.[22] 2016년 인구 조사에서 흑인 인구는 총 1,198,540명으로, 이는 국가 인구의 3.5%를 차지했다.[23]

캐나다는 흑인 인구의 주요 출생지이며, 2016년에 흑인 중 40% 이상이 캐나다에서 태어났다. 1981년 이전에 도착한 흑인 이민자들의 절반 이상(56.7%)이 자메이카아이티에서 태어났지만, 2011년에서 2016년 사이에 입국한 흑인 이민자의 주요 출생 국가는 아이티, 나이지리아, 자메이카, 카메룬, 콩고 민주 공화국이었다. 전반적으로 캐나다 흑인 인구는 200개 이상의 민족 또는 문화적 기원을 보고했다.[107]

흑인 캐나다인의 69.1%는 기독교이며, 11.9%는 무슬림, 18.2%는 무종교이다. 이는 전체 캐나다인 중 각각 53.3%, 4.9%, 34.6%와 비교된다.[24] 1세대 흑인 캐나다 이민자 중 74.2%는 기독교, 13.3%는 무슬림, 11.4%는 무종교이다. 흑인 캐나다인의 소수(0.6%)는 흑인과 원주민 또는 메티스 공동체 간의 역사적 혼인을 통해 일부 원주민 유산을 가지고 있다.[25]

다음은 각 주 및 준주별 흑인 캐나다인 수와 인구 비율을 나타낸 표이다.[109]

주 및 준주별 흑인 인구
주/준주2001년 인구 조사% 20012011년 인구 조사% 20112021년 인구 조사% 2021
온타리오411,0903.6%539,2054.3%768,7405.5%
퀘벡152,1952.1%243,6253.2%422,4055.1%
앨버타31,3951.1%74,4352.1%177,9404.3%
브리티시컬럼비아25,4650.7%33,2600.8%61,7601.3%
매니토바12,8201.2%19,6101.7%46,4853.6%
노바스코샤19,2302.1%20,7902.3%28,2203.0%
서스캐처원4,1650.4%7,2550.7%22,5702.0%
뉴브런즈윅3,8500.5%4,8700.7%12,1551.6%
뉴펀들랜드 래브라도8400.2%1,4550.3%3,5900.7%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3700.3%3900.3%1,8151.2%
노스웨스트 준주1750.5%5551.4%1,0602.6%
누나부트650.3%1200.4%5651.5%
유콘1200.4%1000.3%5601.4%
캐나다662,2152.2%945,6652.9%1,547,8704.3%


3. 1. 2021년 인구 조사

캐나다 통계청의 2021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1,547,870명의 캐나다인이 흑인으로 확인되었으며, 이는 전체 캐나다 인구의 4.3%를 차지한다.[18] 이 중 10%는 "백인과 흑인" 혼혈로 정체성을 확인했다.[19] 2021년 흑인 인구가 가장 많은 5개 주는 온타리오, 퀘벡, 앨버타, 브리티시컬럼비아, 매니토바였다.[18]

흑인 인구가 가장 많은 10개의 인구 조사 대도시 지역은 토론토, 몬트리올, 오타와, 에드먼턴, 캘거리, 위니펙, 밴쿠버, 해밀턴, 오샤와, 퀘벡 시였다.[20] 핼리팩스 지역의 프레스턴은 흑인 비율이 69.4%로 가장 높은 지역 사회이며, 미국 혁명 이후 왕실이 흑인 로열리스트에게 토지를 제공한 정착지였다.[21] 앨버타주 남동부의 마을인 브룩스는 흑인 비율이 22.3%로 가장 높은 인구 조사 하위 구역이다. 이곳의 지역 사회는 주로 동아프리카 이민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2011년 인구 조사에서는 945,665명의 흑인 캐나다인이 집계되었으며, 이는 캐나다 인구의 2.9%를 차지했다.[22] 2016년 인구 조사에서 흑인 인구는 총 1,198,540명으로, 이는 국가 인구의 3.5%를 차지했다.[23]

캐나다는 흑인 인구의 주요 출생지이며, 2016년에 흑인 중 40% 이상이 캐나다에서 태어났다. 1981년 이전에 도착한 흑인 이민자들의 절반 이상(56.7%)이 자메이카아이티에서 태어났지만, 2011년에서 2016년 사이에 입국한 흑인 이민자의 주요 출생 국가는 아이티, 나이지리아, 자메이카, 카메룬, 콩고 민주 공화국이었다. 전반적으로 캐나다 흑인 인구는 200개 이상의 민족 또는 문화적 기원을 보고했다.[107]

흑인 캐나다인의 69.1%는 기독교이며, 11.9%는 무슬림, 18.2%는 무종교이다. 이는 전체 캐나다인 중 각각 53.3%, 4.9%, 34.6%와 비교된다.[24] 1세대 흑인 캐나다 이민자 중 74.2%는 기독교, 13.3%는 무슬림, 11.4%는 무종교이다. 흑인 캐나다인의 소수(0.6%)는 흑인과 원주민 또는 메티스 공동체 간의 역사적 혼인을 통해 일부 원주민 유산을 가지고 있다.[25]

다음은 각 주 및 준주별 흑인 캐나다인 수와 인구 비율을 나타낸 표이다.[109]

주 및 준주별 흑인 인구
주/준주2001년 인구 조사% 20012011년 인구 조사% 20112021년 인구 조사% 2021
온타리오411,0903.6%539,2054.3%768,7405.5%
퀘벡152,1952.1%243,6253.2%422,4055.1%
앨버타31,3951.1%74,4352.1%177,9404.3%
브리티시컬럼비아25,4650.7%33,2600.8%61,7601.3%
매니토바12,8201.2%19,6101.7%46,4853.6%
노바스코샤19,2302.1%20,7902.3%28,2203.0%
서스캐처원4,1650.4%7,2550.7%22,5702.0%
뉴브런즈윅3,8500.5%4,8700.7%12,1551.6%
뉴펀들랜드 래브라도8400.2%1,4550.3%3,5900.7%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3700.3%3900.3%1,8151.2%
노스웨스트 준주1750.5%5551.4%1,0602.6%
누나부트650.3%1200.4%5651.5%
유콘1200.4%1000.3%5601.4%
캐나다662,2152.2%945,6652.9%1,547,8704.3%


3. 2. 주요 거주 지역

흑인 왕당파, 산속의 노예들과 해양상에서 난민들의 대부분은 더욱 큰 백인들의 타운들의 변두리에 인종적으로 분리된 공동체들에서 정부의 정책에 의하여 정해졌다.[1] 백인 왕당파들에 의하여 소유된 노예들의 대부분은 퀘벡주의 이스턴타운십으로 데려가졌다.[1] 노바스코샤주핼리팩스, 딕비와 가이스보로와 뉴브런즈윅주의 프레더릭턴은 그들의 아주 가까운 이웃들에 전부의 흑인 정착지들을 가졌다.[1] 온타리오주에서 지하 철도의 도망 노예들도 또한 캐나다의 백인의 편견과 인종 차별과 미국의 납치인들에 대항하는 공통의 후원과 보호의 목적보다 정부 정책의 중요성 만큼 적은 정착지들에서 집중하는 데 향하였다.[1]

토론토에 있는 서인도 제도 이민의 공동체 구역 에글링턴 웨스트


2016년 토론토 인구조사 구역별 흑인 인구 비율 지도


온타리오 주의 흑인 정착지들의 대부분은 윈저, 채덤, 런던, 세인트캐서린스와 해밀턴과 그 주위들을 둘러싸는 지역들에 있었다.[1] 토론토는 흑인들의 구역을 가졌고, 배리, 오언사운드와 겔프 근처에 흑인들의 더 작은 집중 지역들이 있었다.[1] 빅토리아와 솔츠스프링 아일랜드는 19세기 브리티시컬럼비아주에서 흑인 정착자들을 위한 주요 위치들이었다.[1] 20세기에 일찍이 앨버타 주로 이주한 이주자들은 에드먼턴 주위에 몇몇의 시골 정착지들을 설립하였다.[1] 시골의 흑인들이 직업을 찾는 데 도시들로 이동하면서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정착의 양식들이 깨지기 시작하였다.[1] 많은 원래 흑인 정착지들이 유기되거나 숙고적으로 인구가 줄어들었다.[1]

서인도 제도와 아프리카에서 온 새로운 흑인 이민은 압도적으로 도시들로 지도되어 왔다.[1] 아프리카계 캐나다인들은 이제 대부분 도시화된 캐나다의 민족 단체들의 전부들 중에 있다.[1] 캐나다의 백인들의 태도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이래 세대를 변화시켜 왔고, 도시의 흑인들이 아직도 차별을 향해도 인종적으로 분리를 위한 압력들은 더 이상 적용하지 않는다.[1]

많은 흑인 캐나다인들이 통합된 지역 사회에 살고 있지만, 독특한 정착지이자 도시 중심부의 흑인 지배적인 지역으로 알려진 주목할 만한 흑인 커뮤니티도 여러 곳 있다. 캐나다 역사상 가장 역사적으로 기록된 흑인 정착지는 핼리팩스 반도의 노스 엔드에 위치한 애프리빌이다.[110] 밴쿠버의 호건스 앨리 지역은 1970년에 대부분 철거되었다.[110] 윌버포스 콜로니도 역사적으로 흑인 정착지였다. 19세기 중반,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소규모 흑인 미국인 정착민들이 솔트스프링 아일랜드의 최초 거주민이었다. 다른 주목할 만한 흑인 정착지로는 노바스코샤주의 노스 프레스턴, 서니빌, 링컨빌, 트라카디 및 어퍼 빅 트라카디와 온타리오주의 프라이스빌, 샨티 베이, 사우스 벅스턴 및 드레스덴, 서스캐처원주의 메이드스톤/엘든 지역[111]앨버타주의 앰버 밸리 등이 있다. 햄프스테드 교구의 엘름 힐은 뉴브런즈윅주에 남아있는 마지막 흑인 커뮤니티이다.[112]

몬트리올의 리틀 버건디는 캐나다 재즈의 정신적 고향으로 여겨진다. 현재 몬트리올에서는 리틀 버건디와 코트-데-네주-노트르담-드-그라스, 라살, 피에르폰-록스보로, 빌레레이–생-미셸–파르크-엑스텐션 및 몬트리올-노르 구역에 흑인 인구가 많으며, 후자는 많은 아이티 인구를 가지고 있다. 그레이터 몬트리올의 라발, 테르본, 레펜티니 및 샤토게와 같은 여러 도시에도 많은 흑인 인구가 있다.

위니펙에서는 센트럴 파크 지역이 매니토바주에서 흑인 캐나다인의 밀도가 가장 높다.[113] 퀸 메리 파크와 센트럴 맥두갈 지역은 에드먼턴 흑인 커뮤니티의 중심을 형성한다.[114][115]

토론토에서는 많은 흑인들이 도시 중심부에 위치한 세인트 존스 워드에 정착했다.[116][117] 1850년까지 킹 스트리트에는 12개 이상의 흑인 사업체가 있었다.[116] 현대적인 동등물은 이글린턴 애비뉴를 따라 위치한 리틀 자메이카이다.[118] 1826년에 설립된 퍼스트 침례교회는 현재 토론토에서 운영되는 가장 오래된 흑인 기관이다.[119]

제인 앤드 핀치, 렉스데일, 다운스뷰, 말번, 웨스턴, 웨스트 힐, 로렌스 하이츠, 마운트 데니스, 메이플 리프를 포함한 토론토의 여러 도시 지역에도 많은 흑인 캐나다인 커뮤니티가 있다.[120] 브램턴 및 아약스와 같은 토론토 교외 지역에도 상당한 흑인 인구가 있다.[121][122]

2021년 캐나다 인구 조사에 따르면, 전국 평균 흑인 인구 비율은 4.3%(1,547,870명)이다. 주요 도시별 흑인 인구 비율은 다음과 같다.[1]

도시흑인 인구 비율
브룩스22.3%
에드먼턴7.6%
우드 버팔로6.6%
캘거리5.2%
핀레이 강4.4%
브랜든5.4%
위니펙5.0%
옐로나이프4.4%
이칼루이트5.4%
멍크턴5.3%
뉴 글래스고5.5%
디그비4.7%
핼리팩스4.7%
가이즈버러4.6%
Ajax16.8%
Shelburne16.3%
Brampton13.1%
Pickering11.4%
토론토9.6%
Whitby9.1%
Oshawa8.9%
오타와8.5%
Kitchener6.9%
Mississauga6.9%
Windsor5.9%
Southgate5.9%
Milton5.8%
Clarington5.2%
Thorold5.2%
Hamilton5.1%
Gore Bay4.8%
몬트리올-에스트12.2%
몬트리올11.5%
샤토게11.5%
테르본11.0%
생피에르10.5%
푸앵트-데-카스카드10.1%
롱괴유10.0%
르페티니9.9%
가티노9.5%
라발8.9%
부아-데-필리옹8.8%
메르시에8.5%
돌라르-데조모7.1%
브로사르6.5%
보드뢰유-도리옹6.0%
코트 생 뤼크6.0%
릴-페로5.9%
라송시옹5.6%
마스쿠슈5.2%
생-콩스탕4.9%
생트-마르트-쉬르-르-라크4.9%
도르발4.6%
생-야생트4.4%
몽칼름4.4%


4. 사회·문화적 특징

초기의 흑인들은 자신들의 집중된 정착지에서 문화적 특성들을 유지하고 특유한 공동체를 창조하는 기회를 가졌다. 숭배, 음악과 연설의 스타일들, 가족의 구성들과 단체의 전통들은 캐나다에서 생활의 상태들에 따라 발달되었다. 주요 제도적인 성원은 분리된 교회, 보통 침례교와 감리교였으며, 백인 회합들이 흑인들을 동등한 교인으로서 인정하는 것을 거부할 때 창조되었다.

교회들의 영적인 영향은 하루의 생활에 널리 퍼졌고, 교인들의 어휘, 일과와 야망들에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주요 사회적과 정치적 역할을 하였고, 성직자들이 자연적인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되었다. 19세기의 흑인들에 의하여 형성된 많은 협동 단체의 기구들, 공통의 보조 단체들, 금주의 사회들과 만노예주의 단체들은 거의 항상 교회들 중의 하나와 제휴되었다. 20세기에 교회들은 더 큰 교육적 기회와 민권들을 위한 운동을 지도하였다.

노예 제도에서 흑인 여성들은 자신들을 후원하는 데 일을 하는 데 강요되었고, 경제적 상황들은 캐나다에서 이 전통을 영존시켰다. 흑인 여성들은 항상 가족 생활에서 중요한 경제적 역할을 하였고, 결과로서 독립을 경험하였다. 교회들에 의하여 마련된 유일한 동일성과 합친 단체 동일성과 공통적 의지의 강한 의식은 친밀한 공동체 생활과 백인의 차별에 대항하는 구실을 제시하였다.

도시화와 증가하는 속화는 교회와 지방 공동체의 역할을 변화시켰고, 새로운 이민들이 캐나다의 생활의 상태들에 자신들을 적응시켰어도 자신들 소유의 카리브해와 아프리카의 상속 재산을 가져왔다.

4. 1. 종교

초기의 흑인들은 자신들의 집중된 정착지에서 문화적 특성들을 유지하고 특유한 공동체를 창조하는 기회를 가졌다. 숭배, 음악과 연설의 스타일들, 가족의 구성들과 단체의 전통들은 캐나다에서 생활의 상태들에 따라 발달되었다. 주요 제도적인 성원은 분리된 교회, 보통 침례교와 감리교였으며, 백인 회합들이 흑인들을 동등한 교인으로서 인정하는 것을 거부할 때 창조되었다.

교회들의 영적인 영향은 하루의 생활에 널리 퍼졌고, 교인들의 어휘, 일과와 야망들에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주요 사회적과 정치적 역할을 하였고, 성직자들이 자연적인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되었다. 19세기의 흑인들에 의하여 형성된 많은 협동 단체의 기구들, 공통의 보조 단체들, 금주의 사회들과 만노예주의 단체들은 거의 항상 교회들 중의 하나와 제휴되었다. 20세기에 교회들은 더 큰 교육적 기회와 민권들을 위한 운동을 지도하였다.

노예 제도에서 흑인 여성들은 자신들을 후원하는 데 일을 하는 데 강요되었고, 경제적 상황들은 캐나다에서 이 전통을 영존시켰다. 흑인 여성들은 항상 가족 생활에서 중요한 경제적 역할을 하였고, 결과로서 독립을 경험하였다. 교회들에 의하여 마련된 유일한 동일성과 합친 단체 동일성과 공통적 의지의 강한 의식은 친밀한 공동체 생활과 백인의 차별에 대항하는 구실을 제시하였다.

도시화와 증가하는 속화는 교회와 지방 공동체의 역할을 변화시켰고, 새로운 이민들이 캐나다의 생활의 상태들에 자신들을 적응시켰어도 자신들 소유의 카리브해와 아프리카의 상속 재산을 가져왔다.

4. 2. 언어

4. 3. 문화 행사

초기 흑인들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공동체를 형성하며 숭배, 음악, 연설 스타일, 가족 구성 및 단체 전통을 발전시켰다. 백인 교회에서 흑인 교인을 동등하게 인정하지 않아 분리된 침례교와 감리교 교회가 주요 제도적 지원 역할을 했다. 교회는 흑인들의 어휘, 일과, 야망에 영향을 미쳤고, 성직자들은 자연스럽게 공동체 지도자가 되었다. 19세기에는 많은 협동 단체, 공통 보조 단체, 금주 사회, 노예제 폐지 단체들이 교회와 제휴했고, 20세기에는 교회들이 교육 기회 확대와 민권 운동을 이끌었다.

흑인 여성들은 노예 제도에서부터 경제 활동을 강요받았고, 캐나다에서도 이러한 전통이 이어져 가족 생활에서 중요한 경제적 역할을 하며 독립성을 경험했다. 흑인 어린이들은 조부모나 노인 이웃에게 양육되는 경우가 많아 지방 공동체를 통해 가족 같은 관계를 형성했다. 교회는 정체성과 공동체 의식을 제공하며 백인의 차별에 대항하는 역할을 했다.

흑인들은 캐나다 정착 초기부터 영국과 캐나다에 대한 강한 충성심을 보였다. 흑인 왕당파들은 미국 독립 전쟁에서 영국을 위해 싸웠고, 미영 전쟁에서 미군에 맞서 싸운 흑인 민병대는 1837년 반란 진압과 페니아 습격 격퇴에 기여했다. 1860년대에는 흑인 개척자 소총 부대가 밴쿠버섬을 보호하는 유일한 무장 단체였으나,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신병 모집에서 거부당했다가 흑인 군단인 노바 스코샤 제2 구조 대대가 창설되었다.

도시화와 세속화는 교회와 지방 공동체의 역할을 변화시켰고, 새로운 이민자들은 카리브해와 아프리카의 유산을 가져왔다. 캐나다에서 자유를 찾은 사람들의 역사적 가치는 오늘날 흑인의 관례와 태도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캐나다 흑인에 대한 미디어 묘사는 ''Drop the Beat'', ''Lord Have Mercy!'', ''Diggstown'', ''Da Kink in My Hair'' 등의 텔레비전 시리즈를 통해 증가했다. 클레멘트 버고, 서즈 서더랜드, 찰스 오피서의 영화는 흑인 캐나다인을 스크린에 묘사한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문학 분야에서는 조시아 헨슨, 조지 엘리엇 클라크, 로렌스 힐 등 유명 작가들이 있으며, 1990년대와 2000년대에 많은 신예 작가들이 등장했다.

19세기 후반부터 흑인 캐나다인들은 유색인 아이스하키 리그 창설을 시작으로 스포츠 문화에 기여했다.[123] 복서 조지 갓프리는 1883년 월드 유색인 헤비급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 퍼거슨 젠킨스, 그랜트 퓨어, 자롬 이기글라 등은 프로 스포츠 리그에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고, 앤드류 위긴스, RJ 배럿, P. K. 수반 등이 높은 수준의 성공을 거두었다. 해리 제롬, 벤 존슨, 도노반 베일리는 저명한 단거리 선수였으며, 안드레 드 그라스가 현 세대를 이끌고 있다. 존 하워드는 1912년 올림픽에 출전한 최초의 흑인 캐나다인이었다.

가장 크고 유명한 흑인 캐나다 문화 행사는 토론토 캐리비안 카니발 (카리바나)로, 매년 토론토에서 열리는 캐리비안 캐나다 문화 축제이며, 매년 최소 100만 명의 참가자를 유치한다.[124]

토론토에서 열리는 카리바나 축제


이 축제는 아프리카계 및 캐리비안계 캐나다인들의 다양성을 포괄한다.

2021년, 캐나다 정부는 1834년 8월 1일 영국 제국에서 노예 제도가 폐지된 날을 기념하는 해방의 날을 국가 기념일로 지정했다.[125] 흑인 캐나다인들은 이미 수십 년 동안 지역 사회 행사를 통해 해방의 날을 기념해 왔다. 온타리오주 오웬 사운드에서는 1862년부터 해방 축제가 열렸고,[126] 윈저에서 열리는 연례 해방의 날 축제는 도시에서 가장 크고 저명한 문화 행사 중 하나였다.[127] 토론토에서는 "자유 기차" 행사가 열리며, 토론토 교통 위원회 지하철 열차를 타고 유니언 역에서 셰퍼드 웨스트 역까지 이동하며 지하 철도를 기념한다.[128] 2020년부터 CBC Gem은 ''FreeUp! The Emancipation Day Special''을 통해 해방의 날을 기념해 왔다.[129]

흑인 캐나다인들은 캐나다 힙합, 캐나다 블루스, 캐나다 재즈 등 다양한 음악 장르를 개척하며 캐나다 음악에 큰 영향을 미쳤다.[130] 가넷 브룩스, 로버트 나다니엘 데트, 포르티아 화이트, 오스카 피터슨 등은 저명한 음악가였다. 드레이크, 더 위켄드, 대니얼 시저 등은 전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아프리카계 캐나다인 가수 데보라 콕스


아프리카계 캐나다인 음악가 드레이크


많은 아프리카 및 캐리비안계 캐나다인들은 자신들의 문화가 독특하지 않다는 주장을 거부한다.[31] 래퍼 카디널 오피셜은 "BaKardi Slang"에서 토론토의 독특한 흑인 캐나다 슬랭을 선보였다. 90년대 중후반, 자메이카 파토아와 소말리아에서 온 단어들이 토론토 청소년들에 의해 현지 영어에 통합되어 토론토 슬랭이 생겨났다.

흑인 캐나다의 독특한 문화적 산출물의 가시성은 비교적 최근의 현상이며, 문화 창작자들이 주류 캐나다 문화와 아프리카계 미국 문화와 구별되는 자신들만의 문화 공간을 적극적으로 ''창조''하는 과정에 참여하는 방식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31]

로렌스 힐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CBC 텔레비전 미니시리즈 노예의 책은 2015년 1월에 상당한 시청률 성공을 거두었다.[131]

2020년, 흑인 캐나다 배우 샤미어 앤더슨과 스테판 제임스는 더 블랙 아카데미를 설립하여 흑인 캐나다인의 업적을 기리는 상을 수여한다.[132] 이 상은 2022년에 처음 수여되었다.[133]

4. 4. 용어

역사적으로 시골의 흑인 공동체는 인종적 한계에 대항하는 지속적인 시도를 가능하게 했다.[14] 오늘날 흑인 인구의 다양화된 원천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계 캐나다인들은 공통의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14] 인종 차별은 여전히 존재하며, 흑인들은 고용, 숙박 시설, 공공 사업에서 차별을 겪는다.[14] 이러한 공통의 경험은 흑인 신문, 잡지, 공동체 기구들에 의해 육성되고, 문화적 다양성에 의해 풍성해진 흑인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기여한다.

"아프리카계 캐나다인"이라는 용어는 흑인 로열리스트와 미국 독립 전쟁 동안 영국군으로부터 자유를 약속받은 사람들, 도망 노예의 후손인 일부 흑인 캐나다인들이 사용한다.[14] 1970년대부터는 캐나다에서 여러 세대에 걸쳐 조상을 둔 일부 사람들이 스스로를 원주민 흑인 캐나다인으로 식별하면서 구별하기 시작했다.[30] 흑인 노바 스코샤인들은 1700년대까지 캐나다 조상을 추적할 수 있는 별개의 문화 집단으로, "아프리카계 캐나다인"과 "흑인 캐나다인"을 모두 사용한다.[30]

흑인 캐나다인들은 종종 아프리카계 카리브해 조상과 다른 아프리카 뿌리를 가진 사람들 사이를 구분한다. 많은 카리브해 출신 흑인들은 "아프리카계 캐나다인"이라는 용어가 그들의 유산의 독특한 카리브해 측면을 생략한 것이라며 거부하고 대신 "카리브해 캐나다인"으로 스스로를 식별한다.[31] 그러나 카리브해는 다양한 인종 및 민족적 배경을 가진 그룹이 거주하기 때문에 문제가 될 수 있다.[31] 서인도 제도인이라는 용어가 자주 사용되지만, 이 용어는 인종적이라기보다는 문화적 설명에 가깝다.[31]

자메이카계 캐나다인, 아이티계 캐나다인, 가나계 캐나다인과 같은 더 구체적인 국가별 용어도 사용된다.[32] "흑인 캐나다인"에 대한 널리 사용되는 대안은 아프리카계 카리브해 인구, 더 최근의 아프리카 출신, 미국 이민자의 후손, 그리고 흑인 아프리카계 캐나다인 전체 그룹에 대한 포괄적인 용어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32]

아프리카 및 카리브해 공동체를 항상 언급하는 관행이 늘어나고 있다.[33] 예를 들어, 온타리오의 아프리카 및 카리브해 HIV/AIDS 위원회, ''Pride'' 잡지, G98.7 라디오 방송국 등이 있다.[34]

프랑스어에서는 "Noirs canadiens" 또는 "Afro-Canadiens"라는 용어가 사용된다. ''Nègre''(흑인)는 경멸적인 표현으로 간주된다.[35] 로베르 모린 감독의 영화 ''Le Nèg''' 제목은 논란이 되었으며,[35] 2015년 퀘벡 지명 위원회는 "Nègre"를 포함한 지명을 변경했다.[36]

5. 사회 문제

역사적으로 시골의 흑인 공동체는 인종 차별의 영향들을 완화하는 데 기여했으며, 그 보호적인 환경에서 특유의 흑인 관계가 발전하였다. 공동체 생활의 협동적인 힘은 인종적 한계에 대항하는 지속적인 노력을 가능하게 했으나, 전반적인 차별 구조를 파괴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오늘날 흑인 인구의 다양화된 배경은 단일화된 단체의 관계를 형성하는 데 어려움을 주지만, 아프리카계 캐나다인들은 공통된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여론 조사와 인권 위원회 보고에 따르면, 흑인들은 고용, 숙박 시설, 공공 사업에서 여전히 인종 차별을 경험하고 있다.[129] 이는 공통된 경험을 형성하고 공동 대응을 촉진하고 있다. 흑인 신문, 잡지, 공동체 기구들은 흑인 공동체의 발전을 지원하고 있으며, 증가하는 흑인 인구와 문화적 다양성은 현대 캐나다 도시에서 새롭고 확장된 흑인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캐나다 통계청의 민족 다양성 조사(2003년 9월 발표)에 따르면, 1998년부터 2002년까지 5년 동안 흑인이라고 밝힌 응답자의 거의 3분의 1(32%)이 "가끔" 또는 "자주" 어떤 형태의 인종 차별이나 불공정한 대우를 받았다고 보고했다.[135] 세계 가치관 조사의 80개국 설문 조사(2013년)에서 캐나다는 세계에서 가장 인종적으로 관대한 사회 중 하나로 꼽혔다.[134]

197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토론토에서 여러 명의 비무장 흑인 남성이 토론토 경찰청 소속 경찰관에 의해 총에 맞거나 사망했다.[136][137] 이에 대응하여 1988년 흑인 행동 방어 위원회(BADC)가 설립되었다. BADC의 전무 이사인 더들리 로스는 토론토가 북미에서 "가장 살인적인" 경찰력을 가지고 있으며 토론토에서 흑인에 대한 경찰의 편견이 로스앤젤레스보다 심하다고 말했다.[137][138] 1990년, BADC는 온타리오의 특별 수사 부서(SIU)를 설립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으며, SIU는 경찰의 비위 행위를 조사한다.[137][139] 1990년대 초부터 토론토 경찰과 도시 흑인 사회의 관계는 개선되었으며,[137] 2015년에는 마크 손더스 (경찰청장)가 도시 역사상 최초의 흑인 경찰청장이 되었다. 불심 검문은 2016년에도 문제로 남아 있었으며,[140] 임의적인 불심 검문에 대한 제한은 2017년 온타리오에서 시행되었다.[141]

노바스코샤에서는 수년에 걸쳐 흑인 캐나다인에 대한 인종 차별 사건이 발생했다.[142][143][144] 노바스코샤는 인권 옹호와 인종 차별에 대한 싸움을 지속하고 있으며, 그 일환으로 아프리카계 사람들에 대한 인종 차별을 종식시키기 위한 연례 행진을 개최한다.[145][146]

캐나다의 흑인 아이스하키 선수들은 인종 차별 피해를 보고했다.[147][148][149]

5. 1. 인종 차별

영국의 자선 단체들은 1780년대부터 흑인 공동체에 학교를 후원했고, 19세기에는 영국과 미국의 사회들이 온타리오 주에 흑인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했다. 노바스코샤 주와 온타리오 주 정부는 인종적으로 분리된 학교를 만들었지만, 기금 부족과 낮은 교육 수준으로 인해 흑인들의 기회는 제한되었다. 1965년 온타리오 주에 있던 마지막 인종 분리 학교가 폐쇄되었다.

도시화 이후 흑인 어린이들은 통합된 학교에 다니게 되었고, 최근에는 흑인 이민자들의 교육 수준이 높아지면서 상황이 개선되고 있다. 댈하우지 대학교의 변화 프로그램과 같은 특별 프로그램들은 교육 불균형을 해소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시골 흑인 공동체는 인종적 한계에 대응하는 협동적인 힘을 보여주었지만, 전반적인 차별 구조를 극복하지는 못했다.

오늘날 아프리카계 캐나다인들은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인종 차별 문제에 공동으로 대응하고 있다. 여론 조사와 인권 위원회 보고에 따르면, 흑인들은 여전히 고용, 숙박 시설, 공공 사업에서 차별을 받고 있다. 흑인 신문, 잡지, 공동체 기구들은 흑인 공동체의 발전을 돕고 있다.

2020년 6월 5일, 조지 플로이드 살해 사건에 항의하는 "평등을 위한 투쟁" 집회가 앨버타 주의사당에서 열렸으며, 모든 주와 자치령에서 캐나다의 조지 플로이드 시위가 벌어졌다. 2013년 세계 가치관 조사에서 캐나다는 인종적으로 관대한 사회 중 하나로 꼽혔지만,[134] 2003년 캐나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흑인 응답자의 32%가 인종 차별이나 불공정한 대우를 경험했다고 보고했다.[135]

197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토론토 경찰청 경찰관에 의한 비무장 흑인 남성 사망 사건이 여러 건 발생하여,[136][137] 1988년 흑인 행동 방어 위원회(BADC)가 설립되었다.[137] BADC는 경찰의 비위 행위를 조사하는 특별 수사 부서(SIU) 설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137][139] 1990년대 초부터 토론토 경찰과 흑인 사회의 관계는 개선되었고,[137] 2015년 마크 손더스 (경찰청장)가 최초의 흑인 경찰청장이 되었다.[140] 불심 검문은 2016년에도 문제로 남아 있었으며,[140] 2017년 온타리오에서 임의적인 불심 검문에 대한 제한이 시행되었다.[141]

노바스코샤에서는 흑인 캐나다인에 대한 인종 차별 사건이 지속적으로 발생했으며,[142][143][144] 인권 옹호와 인종 차별 반대 운동이 계속되고 있다.[145][146] 캐나다의 흑인 아이스하키 선수들도 인종 차별 피해를 보고했다.[147][148][149]

5. 2. 경제적 불평등

흑인 왕당파, 산속의 노예들과 도망자들은 해운상에서 자신들을 설립하는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들은 농업을 통해 자급자족하기 어려운 작은 대지를 받았고, 이웃 백인들의 타운에서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흑인 개척자들은 고용과 임금에서 차별을 받았으며, 백인들보다 적은 농지 할당과 낮은 임금을 받았다. 빈곤은 초기 흑인들의 경험에서 중요한 부분이었다.

시에라리온에 도착한 해방된 노예들


이러한 상황 때문에, 많은 흑인들이 노바스코샤주뉴브런즈윅주를 떠나 서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으로 이주했다. 1792년에는 거의 1200명의 흑인 왕당파들이 핼리팩스에서 항해하여 프리타운에 새로운 정착지를 세웠다. 1800년에는 5000명 이상의 산속의 노예들이 시에라리온으로 이동했으며, 이들은 흑인 왕당파 정착자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기여했다. 1820년에는 95명의 도망자 흑인들이 트리니다드섬으로 떠났다.

서인도 제도와 노바스코샤의 공무원들이 이주를 장려했지만, 열악한 토지, 혹독한 겨울, 백인 노동자들과의 경쟁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도망자들은 캐나다에 남기로 결정했다. 오늘날 해운상의 흑인들 대부분은 이들의 후손이다.

지하 철도를 통해 온타리오주에 도착한 도망 흑인들은 대부분 빈곤했으며 정부의 토지 지원도 받지 못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의 땅에서 일하거나 그레이트 웨스턴 철도에서 일해야 했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 빅토리아로 이주한 일부 도망자들은 기술과 자원을 가지고 와서 소규모 비지니스를 설립할 수 있었다. 많은 이들은 농장이나 에스퀴몰트에 있는 새로운 부두의 상점에서 일했다. 20세기에 들어설 때까지 대부분의 아프리카계 캐나다인들은 낮은 임금의 서비스 분야나 비숙련 노동에 종사했다.

1991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캐나다의 흑인들은 여전히 백인들보다 낮은 평균 임금을 받았다. 최근 서인도 제도와 아프리카 이민자들은 높은 수준의 기술, 교육,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5. 3. 과잉 수감 문제

흑인 캐나다인은 역사적으로 인구 비율에 비해 높은 수감률을 보여왔다. 1911년, 흑인 캐나다인은 캐나다 인구의 0.22%였지만 수감자 비율은 0.321%로, 백인 캐나다인의 수감률 0.018%보다 높았다. 1931년에는 흑인 캐나다인의 0.385%가 수감되었고, 백인 캐나다인은 0.035%였다.

현대에도 이러한 경향은 지속되고 있다. 2016년 인구 조사에서 흑인 캐나다인은 전국 인구의 3.5%를 차지했지만, 2017년 기준 흑인 수감자는 연방 수감자 인구의 8.6%를 차지했다.

6. 정치

몇몇의 주요 제외들과 캐나다에서 법률은 흑인들의 입법적 동등에 주장되었다. 캐나다 연방이 성립될 때까지 이것은 영국의 법률을 의미하였고, 영국의 보존으로 위임하는 데 흑인들은 보수당 후보들을 성원하는 데 기울였다. 그 이래 흑인들은 모든 정당에서 활동적이었고, 지난 30년 동안 보수당, 자유당과 신민주당의 당원들로서 선출되어 왔다.

흑인들이 직접의 정치적 영향을 미치는 데 크게 충분한 단체들을 형성한 적이 전혀 없어도 몇몇의 개인적인 흑인들은 정치적 정세에 중요한 공헌들을 만들었다. 한 세기의 이상 동안 흑인 지방자치제 의원들과 학교의 이사들이 있었는 데 두드러지게 1860년대 빅토리아 시의회에 의석을 가진 미플린 깁스는 브리티시컬럼비아 주가 연방에 가입하는 데 사절단이었고, 1894년부터 1907년까지 토론토의 시의원, 관리인과 대리 시장을 지낸 윌리엄 페이턴 허바드이다.

레너드 브래스웨이트는 1963년 온타리오 주에서 선출된 주의 입법부에 선출된 최초의 아프리카계 캐나다인이었고, 해밀턴에서 온 링컨 알렉산더는 1968년 첫 흑인 연방 의원이 되었다. 에머리 반스와 로즈메리 브라운은 둘다 1970년대에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의 입법부로 선출되었다. 링컨 알렉산더가 온타리오 주의 부총독이 되고, 앨빈 컬링은 온타리오 주의 내각에 가입하고, 앤 쿨스가 상원으로 임명되고, 윈저의 하워드 맥커디가 하원으로 선출되었을 때 새로운 명예들이 달성되었다.

24대 온타리오 주의 부총독 링컨 알렉산더


1990년 핼리팩스의 도널드 올리버는 상원에 가입하고, 자나다 아칸데는 온타리오 주의 내각 일원이 되어 캐나다에서 내각 등급을 이루는 데 첫 흑인 여성이었다. 1993년 웨인 애덤스는 노바스코샤 주의 내각에 들어갔고, 그해에 연방 선거에서 3명의 흑인 의원들이 선출되었다 - 진 오거스틴, 헤디 프라이와 오비드 잭슨. 밴쿠버에서 온 헤디 프라이는 1996년 내각으로 임명되었다.

7.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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