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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제 (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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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양제는 서진 시대의 인물로, 무예에 능하고 총명하여 사마염의 총신으로 발탁되었다. 그는 오나라 정벌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으며, 혜제 사마충이 즉위한 후 태자태부를 지냈다. 그러나 가남풍이 일으킨 정변에 휘말려 처형당했다.

2. 생애

양제는 홍농군(弘農郡)의 명문 출신으로 양수와는 동족 지간이다. 사촌 형 양병의 딸인 양염이 사마염의 황후였기 때문에 발탁되었고, 왕제 등과 함께 무제의 총신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재능이 있고, 무예에 뛰어났다고 한다.

사마염이 군사에 힘을 쏟게 되자, 유망한 외척을 중용하려 하였고, 양제는 무예에 능했기에 적임자로 여겨졌다. 양제는 형 양요와 함께 심모원려하다고 칭송받았고, 조카 이빈 등과 함께 자주 충언을 했다.

함녕 2년(276년) 10월, 조카 양지가 황후로 세워지자, 양지의 아버지 양준은 권세를 마음대로 휘둘렀다. 동생 양제 또한 은혜를 받게 되었고, 양준·양요와 함께 천하 삼양이라고 불렸다. 양제는 양준의 기반 확립을 위해, 왕제의 사촌 형 왕우를 하동군 태수로 좌천시키고, 제후왕의 세자를 건립하는 등 모략을 펼쳤다고 한다.

함녕 4년(278년), 진남대장군·도독 형주 제군사 두예가 형주에 출진했을 때, 모두가 전송하러 가는 가운데, 양제는 명족의 자부심 때문에 자리를 떠나 문에서 열병을 하고 있었기에 화교에게 꾸짖음을 받았다고 한다.[1]

함녕 5년(279년), 오나라 정벌 때에는 관군장군 대리로서 대도독 가충의 부장으로 임명되어, 상양에 주둔하며 두예 등 여러 군대를 통괄했다.[2] 279년, 관군장군(冠軍將軍)으로서 진의 오 정벌전에 참가, 두예(杜預)의 지휘하에 양양(襄陽)에 주둔하여 각 군을 감독하였으며, 280년 를 평정한 후, 도독형주제군사(都督荊州製軍使)가 되었다.

태강 7년(286년), 도독 형주 제군사에 임명되었고[2],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진남장군·정북장군을 역임했다. 또한, 사마염 말년에는 위장군으로 임명되었다.[3]

태희 원년(290년) 4월, 사마염이 붕어하자, 황태자 사마충이 뒤를 이었다. 사마충이 즉위하였을 때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취임 하였으나, 같은 해 8월, 사마유가 황태자로 세워지자, 양제는 태자태부[3]에 임명되었다. 팔왕의 난(八王之亂)에 휘말려 죽임을 당했다.

양준은 여남왕 사마량을 꺼려하여, 허창으로 출진하도록 명하여 멀리 내쫓으려 했다. 그러나 양제는 사마량을 허창에 보내 병권을 주는 것은 오히려 위험하다고 보고, 조카 하남윤 이빈과 함께 낙양에 머물도록 권했으나, 양준은 듣지 않았다. 양제는 상서좌승 부함에게 "형님께서 대사마(사마량)를 낙양으로 불러들이고 몸을 물러나면 양가도 안전할 텐데요"라고 말하자, 부함은 "종실과 외척은 협력해야 합니다. 대사마를 불러들여 함께 보좌하는 것만으로도 화를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몸을 물러날 필요는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이를 받아들여, 양제는 시중석숭을 파견하여 다시 양준을 설득했으나, 양준은 따르지 않았다.

부함은 양준에게 간언을 반복했기에, 양준에게서 멀어지게 되었다. 양제는 부함에게 편지를 보내 "도를 넘은 직언은 화를 초래할 것이다"라고 전했으나, 부함은 "직언으로 몸을 망치는 것은, 내용이 격정에 차 있거나, 직언으로 명성을 얻거나 울분을 풀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성의와 충심을 가지고 하면, 미움을 받지 않을 것이다"라고 답변했다.

영평 원년(291년) 1월, 혜제의 황후 가남풍은 양준의 권세를 질투하여, 환관 동맹·맹관·이조와 함께 양씨 일파를 주살할 계획을 세웠다. 3월, 가남풍은 초왕 사마위와 결탁하여 정변을 일으키자, 양준은 살해되었고 그의 삼족 및 측근들은 모두 체포되었다. 정변이 진정되고 저녁이 되자, 양제는 동궁으로 소환되었다. 이때, 양제는 배개에게 "나는 어떻게 되는가"라고 묻자, 배개는 "보부(황족의 자제 교육 담당)가 되기 위해 동궁으로 가는 것이다"라고 거짓으로 대답했다.

양제는 병마를 오랫동안 관할했고, 은혜를 베푸는 것을 좋아했으므로, 그의 400명의 부하들은 모두 양제의 목숨을 구하려고 했으나, 탄원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처형되었다. 이를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단지 외척이라는 이유로 중용된 양준과는 달리, 양요와 양제는 각각 자신의 공적으로 입신한 인물로 신망도 두터웠다. 때문에 양준이 교만해져 가는 모습을 보고 우려하여, 종족과의 융화를 촉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 1. 초기 생애와 배경

양제는 홍농군(弘農郡)의 명문 출신으로 양수와는 동족 지간이다. 사촌 형 양병의 딸인 양염이 사마염의 황후였기 때문에 발탁되었고, 왕제 등과 함께 무제의 총신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재능이 있고, 무예에 뛰어났다고 한다.

사마염이 군사에 힘을 쏟게 되자, 유망한 외척을 중용하려 하였고, 양제는 무예에 능했기에 적임자로 여겨졌다. 양제는 형 양요와 함께 심모원려하다고 칭송받았고, 조카 이빈 등과 함께 자주 충언을 했다.

함녕 2년(276년) 10월, 조카 양지가 황후로 세워지자, 양지의 아버지 양준은 권세를 마음대로 휘둘렀다. 동생 양제 또한 은혜를 받게 되었고, 양준·양요와 함께 천하 삼양이라고 불렸다. 양제는 양준의 기반 확립을 위해, 왕제의 사촌 형 왕우를 하동군 태수로 좌천시키고, 제후왕의 세자를 건립하는 등 모략을 펼쳤다고 한다.

함녕 4년(278년), 진남대장군·도독 형주 제군사 두예가 형주에 출진했을 때, 모두가 전송하러 가는 가운데, 양제는 명족의 자부심 때문에 자리를 떠나 문에서 열병을 하고 있었기에 화교에게 꾸짖음을 받았다고 한다.[1]

함녕 5년(279년), 오나라 정벌 때에는 관군장군 대리로서 대도독 가충의 부장으로 임명되어, 상양에 주둔하며 두예 등 여러 군대를 통괄했다.[2] 279년, 관군장군(冠軍將軍)으로서 진의 오 정벌전에 참가, 두예(杜預)의 지휘하에 양양(襄陽)에 주둔하여 각 군을 감독하였으며, 280년 를 평정한 후, 도독형주제군사(都督荊州製軍使)가 되었다.

태강 7년(286년), 도독 형주 제군사에 임명되었고[2],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진남장군·정북장군을 역임했다. 또한, 사마염 말년에는 위장군으로 임명되었다[3]

태희 원년(290년) 4월, 사마염이 붕어하자, 황태자 사마충이 뒤를 이었다. 사마충이 즉위하였을 때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취임 하였으나, 같은 해 8월, 사마유가 황태자로 세워지자, 양제는 태자태부[3]에 임명되었다. 팔왕의 난(八王之亂)에 휘말려 죽임을 당했다.

양준은 여남왕 사마량을 꺼려하여, 허창으로 출진하도록 명하여 멀리 내쫓으려 했다. 그러나 양제는 사마량을 허창에 보내 병권을 주는 것은 오히려 위험하다고 보고, 조카 하남윤 이빈과 함께 낙양에 머물도록 권했으나, 양준은 듣지 않았다. 양제는 상서좌승 부함에게 "형님께서 대사마(사마량)를 낙양으로 불러들이고 몸을 물러나면 양가도 안전할 텐데요"라고 말하자, 부함은 "종실과 외척은 협력해야 합니다. 대사마를 불러들여 함께 보좌하는 것만으로도 화를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몸을 물러날 필요는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이를 받아들여, 양제는 시중석숭을 파견하여 다시 양준을 설득했으나, 양준은 따르지 않았다.

부함은 양준에게 간언을 반복했기에, 양준에게서 멀어지게 되었다. 양제는 부함에게 편지를 보내 "도를 넘은 직언은 화를 초래할 것이다"라고 전했으나, 부함은 "직언으로 몸을 망치는 것은, 내용이 격정에 차 있거나, 직언으로 명성을 얻거나 울분을 풀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성의와 충심을 가지고 하면, 미움을 받지 않을 것이다"라고 답변했다.

영평 원년(291년) 1월, 혜제의 황후 가남풍은 양준의 권세를 질투하여, 환관 동맹·맹관·이조와 함께 양씨 일파를 주살할 계획을 세웠다. 3월, 가남풍은 초왕 사마위와 결탁하여 정변을 일으키자, 양준은 살해되었고 그의 삼족 및 측근들은 모두 체포되었다. 정변이 진정되고 저녁이 되자, 양제는 동궁으로 소환되었다. 이때, 양제는 배개에게 "나는 어떻게 되는가"라고 묻자, 배개는 "보부(황족의 자제 교육 담당)가 되기 위해 동궁으로 가는 것이다"라고 거짓으로 대답했다.

양제는 병마를 오랫동안 관할했고, 은혜를 베푸는 것을 좋아했으므로, 그의 400명의 부하들은 모두 양제의 목숨을 구하려고 했으나, 탄원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처형되었다. 이를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단지 외척이라는 이유로 중용된 양준과는 달리, 양요와 양제는 각각 자신의 공적으로 입신한 인물로 신망도 두터웠다. 때문에 양준이 교만해져 가는 모습을 보고 우려하여, 종족과의 융화를 촉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 2. 무제(武帝) 사마염(司馬炎) 시기

양수(楊脩)와는 동족 지간으로, 279년 관군장군(冠軍將軍)으로서 진의 오 정벌전에 참가했다.[2] 두예(杜預)의 지휘하에 양양(襄陽)에 주둔하여 각 군을 감독하였으며, 280년 (吳)를 평정한 후, 도독형주제군사(都督荊州製軍使)가 되었다.[2]

사촌 형 양병의 딸인 양염이 사마염의 황후였기 때문에 발탁되었고, 왕제 등과 함께 무제의 총신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사마염이 군사에 힘을 쏟게 되자, 유망한 외척을 중용하려 하였고, 양제는 무예에 능했기에 적임자로 여겨졌다. 양제는 형 양요와 함께 심모원려하다고 칭송받았고, 조카 이빈 등과 함께 자주 충언을 했다.

함녕 2년(276년) 10월, 조카 양지가 황후로 세워지자, 양지의 아버지 양준은 권세를 마음대로 휘둘렀다. 동생 양제 또한 은혜를 받게 되었고, 양준·양요와 함께 천하 삼양이라고 불렸다.

함녕 4년(278년), 진남대장군·도독 형주 제군사 두예가 형주에 출진했을 때, 모두가 전송하러 가는 가운데, 양제는 명족의 자부심 때문에 자리를 떠나 문에서 열병을 하고 있었기에 화교에게 꾸짖음을 받았다.[1]

함녕 5년(279년), 오나라 정벌 때에는 관군장군 대리로서 대도독 가충의 부장으로 임명되어, 상양에 주둔하며 두예 등 여러 군대를 통괄했다.[2]

태강 7년(286년), 도독 형주 제군사에 임명되었고,[2]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진남장군·정북장군을 역임했다. 또한, 사마염 말년에는 위장군으로 임명되었다.[3]

태희 원년(290년) 4월, 사마염이 붕어하자, 황태자 사마충이 뒤를 이었다. 양준은 여남왕 사마량을 꺼려 허창으로 출진시키려 했으나, 양제는 조카 하남윤 이빈과 함께 낙양에 머물도록 권했다. 그러나 양준은 듣지 않았다.

2. 3. 혜제(惠帝) 사마충(司馬衷) 시기와 죽음

279년, 관군장군(冠軍將軍)으로서 진의 오 정벌전에 참가, 두예(杜預)의 지휘하에 양양(襄陽)에 주둔하여 각 군을 감독하였으며,280년 (吳)를 평정한 후, 도독형주제군사(都督荊州製軍使)가 되었다.[2] 사마충(司馬衷)이 즉위하였을 때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취임 하였으나,[3] 팔왕의 난(八王之亂)에 휘말려 죽임을 당했다.

태희 원년(290년) 4월, 사마염이 붕어하자, 황태자 사마충이 뒤를 이었다. 같은 해 8월, 사마유가 황태자로 세워지자, 양제는 태자태부(太子太傅)에 임명되었다.[3]

영평 원년(291년) 1월, 혜제의 황후 가남풍은 양준의 권세를 질투하여, 환관 동맹·맹관·이조와 함께 양씨 일파를 주살할 계획을 세웠다. 3월, 가남풍은 초왕 사마위와 결탁하여 정변을 일으키자, 양준은 살해되었고 그의 삼족 및 측근들은 모두 체포되었다. 정변이 진정되고 저녁이 되자, 양제는 동궁으로 소환되었다. 이때, 양제는 배개에게 "나는 어떻게 되는가"라고 묻자, 배개는 "보부(황족의 자제 교육 담당)가 되기 위해 동궁으로 가는 것이다"라고 거짓으로 대답했다.

양제는 병마를 오랫동안 관할했고, 은혜를 베푸는 것을 좋아했으므로, 그의 400명의 부하들은 모두 양제의 목숨을 구하려고 했으나, 탄원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처형되었다. 이를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3. 《삼국지연의》에서의 양제

삼국지연의》에서는 명문가 출신으로 양수와 동족 지간이라는 언급은 없으며, 279년 진의 오 정벌에 참전하여 두예의 지휘하에 양양에 주둔하여 각 군을 감독, 를 평정하였을 때 도독형주제군사가 되었다는 말은 없다.

4. 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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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도
홍농 양씨 가계도


참조

[1] 서적 『世説新話』方正篇
[2] 서적 『晋書』「武帝紀」
[3] 서적 『晋書』「恵帝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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