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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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문
양천군(陽川郡)은 현재의 서울특별시 양천구와 강서구 지역에 있었던 과거의 행정 구역이다. 1914년 이전에는 경기도 중서부에 위치한 군이었다. 양천군의 중심지는 현재의 강서구 가양동 일대였다.
역사
- 백제 시대: 제차파의현(齊次巴衣縣)으로 불렸다.
- 통일신라 시대: 757년(경덕왕 16년)에 공암현(孔巖縣)으로 개칭되었고 율진군(栗津郡)의 영현이 되었다.
- 고려 시대: 1018년(현종 9년)에는 수주(樹州, 현재의 부평)의 속현이 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 이름이 바뀌었다. 1310년(충선왕 2년)에 치소가 현재의 강서구 가양동에서 양천구 신정3동 일대의 연의골(延義洞)로 옮겨지면서 양천현(陽川縣)으로 개칭되었고 현령이 파견되었다.
- 조선 시대: 1414년(태종 14년)에 금천현과 통합하여 금양현(衿陽縣)으로 불렸으나 2년 만에 다시 분리되었다. 1895년(고종 32년)에는 23부제 시행으로 현 제도가 폐지되고 군으로 승격되어 인천부 관할 양천군이 되었다. 다음 해 13도제가 실시되면서 경기도 양천군이 되었다.
- 일제 강점기: 1914년 4월 1일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으로 통진군과 함께 김포군에 편입되었다. 이때 양천군 산하의 5개 면은 양동면과 양서면의 2개 면으로 통폐합되었다.
- 해방 이후: 1936년 양동면 양화리가 경성부에 편입되었고, 1963년 서울특별시가 행정구획을 확장하면서 양동면과 양서면 전체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에 편입되어 양동출장소와 양서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67년 양동출장소가 폐지되었다. 1977년 강서구가 신설되었고 1988년 강서구에서 양천구가 분리 신설되었다.
지명 유래
- 제차파의: 백제 시대에 사용된 순우리말을 음차한 것으로 추정된다.
- 공암: 제차파의를 한자로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파의'는 '바위'를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되며, '공'의 의미는 의견이 분분하다. 현재는 '구멍바위'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 양천: 1310년에 공암현이 양천현으로 개칭되었다. '양천'은 '잿바위' 또는 '갯바위'의 의미로 해석된다.
특징
- 양천군은 한강변에 위치하여 수운 교통의 요지였으며, 서울로 연결되는 주요 길목이었다.
- 19세기 말에는 땔나무와 소금 장사가 활발하였다.
- 양천군의 옛 지역은 현재 서울특별시 강서구와 양천구에 해당한다.
참고:양천군 관련 자료는 《대동여지도》, 《양천군읍지》등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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