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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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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양흥은 후한 말기의 인물로, 이각 토벌에 협조하고 동관 전투에 참전했으나 조조에게 패배했다. 이후 좌풍익의 산지에서 저항하다가 하후연과 정혼의 합동 작전으로 사망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한수의 부장으로 등장하여 마초에게 죽임을 당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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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흥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2. 생애

양흥은 198년(건안 3년) 좌풍익 지양현(지금의 산시성 싼위안현) 황백성을 근거지로 활동하던 이각 토벌에 협조하였다.[4] 211년 조조의 한중 기동에 위협을 느껴 마초, 한수관중 세력들과 연합하여 동관으로 진격하였다. 조조는 관중군을 황하 남쪽으로 유인한 후 별동대로 황하 서쪽을 확보하려 하였으나, 양흥은 서황주령에게 5,000여 명으로 강습을 시도했지만 실패하였다.[5] 관중군은 완패하였지만, 양흥은 좌풍익 산지에서 계속 저항하였다.

좌풍익 정혼은 양흥을 따르는 자들이 강요에 의한 것이라 판단하고, 성곽 정비, 상벌을 통한 전투 독려, 투항 유도 등으로 양흥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결국 양흥은 아현(衙縣) 부성(鄜城)으로 후퇴하였으나,[6] 장안에서 온 하후연,[8] 장합,[7] 서황,[5] 주령, 노초 등과 정혼의 합동 작전에 패사하였다.

2. 1. 초기 활동

198년(건안 3년) 좌풍익 지양현(池陽縣, 지금의 산시성 싼위안현)을 본거지로 활동하던 이각 토벌에 양흥과 장횡도 협조하였다.[4] 211년 조조의 한중 기동에 위협을 느껴 마초, 한수 등 다른 관중 세력들과 힘을 합쳐 동관으로 진격하였다. 조조는 관중군을 황하 남쪽으로 유인하고는 야음을 타 별동대로 포판진(蒲坂津)을 건너 황하 서쪽을 확보하려 하였다. 서황주령보병, 기병 4,000명으로 넘어와 해자와 울짱을 설치하고 있기에 5,000여 명으로 강습했으나 몰아내는 데 실패했고[5] 결국 관중군은 완패하였다. 그럼에도 양흥은 좌풍익의 산지를 끼고 여러 해 동안 항거하였다.

들은 심대한 피해를 입고 험준한 곳으로 피하려 하였다. 좌풍익 정혼은 ‘양흥을 따르는 자들은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따르는 자들이니 응당 잘 타일러야지 험준한 곳으로 도망쳐서는 안 된다’며 성곽을 정비하고, 상벌을 분명히 하여 적을 쫓아낸 자는 획득한 것의 7/10을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백성들이 저마다 싸우기를 원해 양흥군은 부녀자와 재물을 많이 빼앗겼다. 처자를 잃은 자들은 정혼에게 투항했고, 그들도 다른 부녀들을 탈취하면 처자를 돌려받을 수 있었기에 싸움에 적극적이었다. 회유 작업도 꾸준하여 양흥의 무리는 와해되었고 남은 이들은 아현(衙縣)의 부성(鄜城)[6]에 모였다. 장안에서 장합,[7] 서황,[5] 주령, 노초 등을 거느리고 있던 하후연[8] 정혼의 합동 작전에 패사하였다.

2. 2. 동관 전투 참전과 패배

198년(건안 3년) 좌풍익 지양현(池陽縣)의 황백성(黃白城, 지금의 산시성 싼위안현)을 본거지로 활동하던 이각을 토벌할 때 양흥과 장횡도 협조하였다.[4] 211년 조조의 한중을 향한 기동에 위협을 느끼고 마초, 한수 등 다른 관중의 세력들과 힘을 합쳐 동관으로 진격하였다. 조조는 관중군을 황하 남쪽으로 유인하고는 야음을 타 별동대로 포판진(蒲坂津)을 건너 황하 서쪽을 확보하려 하였다. 서황주령보병, 기병 4,000명으로 넘어와 한창 해자와 울짱을 설치하고 있기에 5,000여 명으로 강습했으나 몰아내는 데 실패했고[5] 결국 관중군은 완패하였다.

2. 3. 산지에서의 저항과 최후

198년(건안 3년) 좌풍익 지양현(池陽縣)의 황백성(黃白城, 지금의 산시성 싼위안현)을 본거지로 활동하던 이각 토벌에 양흥과 장횡도 협조하였다.[4] 211년 조조의 한중 기동에 위협을 느끼고 마초, 한수 등 다른 관중 세력들과 힘을 합쳐 동관(潼關)으로 진격하였다. 조조는 관중군을 황하 남쪽으로 유인하고는 야음을 틈타 별동대로 포판진(蒲坂津)을 건너 황하 서쪽을 확보하려 하였다. 서황주령보병, 기병 4,000명으로 넘어와 해자와 울짱을 설치하기에 5,000여 명으로 강습했으나 몰아내는 데 실패했고,[5] 결국 관중군은 완패하였다. 그럼에도 양흥은 좌풍익의 산지를 끼고 를 이어 항거하였다.

들은 심대한 피해를 입고 험준한 곳으로 피하려 하였다. 좌풍익 정혼은 ‘양흥을 따르는 자들은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따르는 자들이니 응당 잘 타일러야지 험준한 곳으로 도망쳐서는 안 된다’며 성곽을 정비하고, 상벌을 분명히 하여 적을 쫓아낸 자는 획득한 것의 7/10을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백성들이 저마다 싸우기를 원해 양흥군은 부녀자와 재물을 많이 빼앗겼다. 처자를 잃은 자들은 정혼에게 투항했고, 그들도 다른 부녀들을 탈취하면 처자를 돌려받을 수 있었기에 싸움에 적극적이었다. 회유 작업도 꾸준하여 양흥의 무리는 와해되었고 남은 이들은 아현(衙縣)의 부성(鄜城)[6]에 모였다. 장안에서 장합,[7] 서황,[5] 주령, 노초 등을 거느리고 있던 하후연[8] 정혼의 합동 작전에 패사하였다.

3.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소설삼국지연의》에서 양흥은 한수의 부하 장수 8명 중 한 명으로 등장한다. 마초와 한수가 조조의 이간계에 빠져 불화를 일으키자, 양흥은 한수, 후선, 이감, 마완, 양추 등과 함께 마초 암살을 모의한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마초의 습격을 받아 양흥은 마완과 함께 죽임을 당한다.[1]

참조

[1] 서적 太平御覧
[2] 서적 삼국지
[3] 기타 서황, 정혼, 장합이 종군
[4] 서적 전략 태평어람
[5] 서적 삼국지
[6] 서적 삼국지
[7] 서적 삼국지
[8] 서적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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