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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바르트 리츠시미그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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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드바르트 리츠시미그위는 1886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갈리치아 지방에서 태어난 폴란드의 군인이자 화가였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폴란드 군단에서 복무했으며,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에서 폴란드군을 지휘하여 바르샤바 전투 승리에 기여했다. 1935년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사후 폴란드 군부총감에 올라 사실상 폴란드의 실권자가 되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중 폴란드 침공 당시 최고 사령관으로서 독일군에 패배하고 루마니아로 탈출했다. 그는 헝가리를 거쳐 폴란드로 돌아와 지하 저항 운동에 참여하다가 1941년 바르샤바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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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바르트 리츠시미그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Śmigły-Rydz in 1937
1937년의 시미그위-리츠
직함폴란드 원수
별칭아담 자비샤, 타르워프스키
출생일1886년 3월 11일
출생지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브르제자니 (현재 우크라이나, 테르노필 주)
사망일1941년 12월 2일
사망지나치 독일 점령하의 폴란드, 바르샤바
서명Edward Śmigły-Rydz Signature.jpg
경력
소속오스트리아-헝가리 육군 (1910–1911, 1914–1917)
폴란드 군단
폴란드 육군 (1918–1939)
복무 기간1910–1911 (오스트리아-헝가리 육군)
1914-1917 (폴란드 군단)
1918–1939 (폴란드 육군)
최종 계급오스트리아-헝가리 육군 페른리히
폴란드 군단 중령
폴란드 육군 원수
지휘폴란드군 총사령관
참전제1차 세계 대전
라스키 및 아니엘린 전투
워프초베크 전투
코나리 전투
타르워프 전투
코스티우흐노프카 전투
폴란드-우크라이나 전쟁
폴란드-소비에트 전쟁
빌나 공세
다우가프필스 전투
키예프 공세 (1920년)
보리스필 전투
바르샤바 전투 (1920년)
니에멘 강 전투
제2차 세계 대전
폴란드 침공
훈장
정치 경력
직책군부총감
임기 시작1935년 5월 12일
임기 종료1939년 11월 7일
대통령이그나치 모시치츠키
이전유제프 피우수트스키
이후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
개인 정보
배우자마르타 토마스-잘레스카

2. 생애

에드바르트 리츠시미그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갈리치아의 브제자니 (현재는 서부 우크라이나의 베레자니)에서 태어났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부사관이었던 아버지와 그의 아내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13세에 고아가 되었다. 이후 외조부모와 브제자니의 마을 의사 가족에게서 자랐다.[2]

지역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야기엘론 대학교에서 철학과 미술사를 전공했다. 이후 크라쿠프 미술 아카데미, , 뮌헨에서 화가 수업을 받았다. 1910-1911년 빈의 예비 장교 학교에서 군사 훈련을 받았으나, 제국군 임관 제안을 거절하고 1912년 폴란드 준군사 단체 사격 협회를 창립했다. 미술 공부를 마치고 풍경 및 초상화 화가로 인정받았다.

1914년 7월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 징집되었으나, 8월에 폴란드 군단으로 전출되어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의 제1여단에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비스와 지역에서 러시아 제국군에 맞서 싸워 대령으로 승진했다. 1917년 군단 해산 후 폴란드 군사 조직 사령관이 되었고, 가명 '시미글리'를 채택했다. 1918년 10월 루블린 사회주의 정부 국방 장관으로 합류, 준장으로 진급하며 시미글리-리츠라는 이중 성을 사용했다.

1919년~1921년 폴란드-소비에트 전쟁 동안 빌뉴스와 두나부르크를 점령하고 라트비아총사령관으로 라트갈레를 해방시켰다. 키예프를 점령하고 1920년 바르샤바 전투에서 중앙 전선을 지휘, 소련군을 격퇴했다. 전후 육군 감찰관으로 임명되었고, 1926년 5월 쿠데타에 가담, 1929년 동부 방면군 총감이 되었다.

1935년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사망 후 폴란드군 감찰총감에 임명되었다. 이그나치 모시치키 대통령과 권력 분점 협정을 맺어 폴란드의 ''사실상'' 지도자가 되었다. 1936년 폴란드 원수로 진급, "대통령 다음 가는 국가의 두 번째 인물"로 칭송받았다.

1939년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폴란드군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39년 9월 7일, 정부와 함께 바르샤바에서 철수했다. 통신 문제로 지휘에 어려움을 겪었고, 루마니아 교두보 방어 계획을 세웠으나, 1939년 9월 17일 소련군 침공으로 좌절되었다. 1939년 9월 18일 루마니아로 탈출, 억류되었다.

1939년 9월 폴란드 군사적 패배에 대한 책임을 졌다. 1922년 피우수트스키는 리츠시미그위에 대해 "두 국가 간의 전쟁에서 총사령관 역할을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고 평가했다.[3]

루마니아 억류 중 1940년 12월 탈출, 헝가리를 거쳐 1941년 10월 바르샤바로 돌아와 지하 저항 운동에 참여했다. 1941년 12월 2일,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가명 '아담 자비스자'로 포봉키 묘지에 묻혔다가 1994년 본명이 새겨진 묘비가 세워졌다.

2. 1. 초반 생애와 예술 활동

에드바르트 리츠시미그위는 1886년 당시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갈리치아의 브제자니 (현재는 서부 우크라이나의 베레자니)에서 폴란드계 부모에게서 태어났다.[2]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전문 부사관인 아버지와 그의 아내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13세에 고아가 되어 외조부모와 이후 브제자니의 마을 의사 가족에게서 자랐다.

리츠시미그위는 지역 김나지움 (중등학교)을 우등으로 졸업한 후 크라쿠프로 가서 야기엘론 대학교에서 철학과 미술사를 전공했다. 그 후 크라쿠프의 미술 아카데미, , 뮌헨에서 화가 수업을 받았다. 1910년에서 1911년까지 빈의 예비 장교 학교에 다니면서 군사 훈련을 받았으나, 제국군에서 임관 제안을 거절하고 1912년 폴란드 준군사 단체인 사격 협회를 창립했다. 그는 미술 공부를 마쳤고, 교수들과 비평가들로부터 재능 있는 풍경 및 초상화 화가로 평가받았다.

폴란드 군단 장교들과 함께 있는 시미글리-리츠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리츠시미그위는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 징집되었다가 폴란드 군단으로 전출되어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의 폴란드 제1여단에서 동부전선에 참전했다. 그는 비스와강 주변에서 러시아 제국군에 맞서 싸웠으며, 1916년에는 대령으로 승진했다. 전란 중에도 그림에 대한 열정을 잊지 않아, 크라쿠프의 한 갤러리에서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기도 했다.

2. 2.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리츠시미그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 징집되어 동부 전선에 투입되었다. 8월에는 유제프 피우수트스키가 이끄는 폴란드 군단 제1여단으로 전출되어 비스와강 일대에서 러시아 제국군과 여러 전투를 치렀고, 빠르게 승진하여 1916년에는 대령이 되었다.

1917년, 피우수트스키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충성 맹세를 거부하여 폴란드 군단이 해산되고 지휘관들이 투옥될 때, 리츠시미그위는 건강 문제로 풀려나 피우수트스키를 대신해 폴란드 군사 조직 사령관이 되었다. 이때부터 '시미글리'(Śmigły, "민첩한"이라는 뜻)라는 가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918년 10월, 리츠시미그위는 이그나치 다신스키루블린 사회주의 정부에서 국방 장관을 맡았고, 준장으로 진급하면서 시미글리-리츠라는 이중 성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2. 3. 폴란드-소련 전쟁과 전간기

1919년부터 1921년까지 벌어진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에서 리츠시미그위는 볼셰비키에 맞서 폴란드 군대를 지휘하며 여러 전투에서 승리했다. 그는 빌뉴스와 두나부르크를 점령하고, 라트비아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붉은 군대로부터 라트갈레를 해방시켰다. 또한, 붉은 군대의 제12군을 격파하고 키예프를 점령하기도 했다. 1920년 바르샤바 전투에서는 중앙 전선을 지휘하며 소련군의 공격을 막아냈고, 패배한 소련군 부대들의 퇴로를 차단하여 동프로이센으로 후퇴하게 만들어 독일군에 억류되도록 했다.

폴란드-소비에트 전쟁 중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와 리츠시미그위


전쟁이 끝난 후, 리츠시미그위는 빌노 지구의 폴란드 육군 감찰관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바르샤바에서 근무했다.[1] 1926년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의 5월 쿠데타에 가담하여 정권 장악에 기여한 공로로, 1929년 동부 방면군 총감에 임명되었다.[1]

1926년 육군 감찰관 회의에서의 리츠시미그위


1935년 유제프 피우수트스키가 사망하자, 리츠시미그위는 폴란드군 최고 군사 직위인 폴란드군 감찰총감에 임명되었다.[2] 피우수트스키의 사망 이후, 그의 추종자들은 세 파벌로 나뉘었으나, 리츠시미그위는 이그나치 모시치키 대통령과 권력 분점 협정을 맺어 발레리 스와베크 총리를 밀어내고 폴란드의 ''사실상'' 지도자가 되었다.[2]

이그나치 모시치키 대통령으로부터 원수 지휘봉을 받는 리츠시미그위 (1936년 11월 10일, 바르샤바)


1936년 7월 15일, 폴란드 총리는 리츠시미그위를 "대통령 다음 가는 국가의 두 번째 인물"로 칭했으며, 11월 10일에는 폴란드 원수로 진급했다.[2] 1935년부터 1939년까지 리츠시미그위의 통치 기간은 "독재자 없는 독재"로 불리기도 한다.[3]

리츠시미그위 장군 ''(왼쪽)''과 프랑스 장군 모리스 가믈랭 (바르샤바, 1936년 8월)


전쟁 전 우표에 등장하는 리츠시미그위 원수


1936년 선전 포스터에 등장하는 원수

2. 4. 제2차 세계 대전과 죽음

제2차 세계 대전의 신호탄인 폴란드 침공이 발발할 당시 리츠시미그위는 폴란드 원수였다. 폴란드 침공 때 폴란드군이 독일 국방군에게 밀리자, 리츠시미그위 원수의 폴란드군 최고 사령부는 9월 1일에 바르샤바를 버리고 동남부로 후퇴해 9월 6일 브레스트 리토프스크시에 도착했다.[3] 여기서 리츠시미그위 원수는 전군에 대해 비스와 강과 산 강을 넘어 동쪽으로 이동할 것을 명령하고 루마니아 교두보에서의 장기 방어전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소련이 쳐들어오자 이 계획은 무산되었고, 그는 프랑스로 탈출하여 폴란드 서부군 일원으로 참전하였고 바르샤바에도 들어가 폴란드 레지스탕스를 도왔다.[3]

1939년 9월 1일, 폴란드 침공으로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공했고, 스미글리-리츠는 모든 폴란드군의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9월 7일, 그는 대부분의 정부와 함께 공격을 받으면서 바르샤바에서 철수했다. 그 직후, 폴란드의 지휘 체계는 통신 장비 문제로 인해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이는 리츠가 자신의 군대를 효과적으로 지휘하는 능력을 저해했다.[3] 9월 11일 브레스트에서 그는 폴란드 수도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방어하라고 명령했다. 그의 계획에서 바르샤바와 인근 모들린 요새는 폴란드 중부에 위치한 두 개의 요새가 되어 가능한 한 오래 싸우는 동안 폴란드 군대의 주력은 루마니아 교두보를 방어하고 폴란드의 동맹국인 프랑스와 영국이 약속한 반격을 기다리도록 되어 있었다. 스미글리-리츠는 서방 연합국이 그러한 계획이 없었고 폴란드의 멸망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서방의 배신 참조). 이 전략은 1939년 9월 17일 소련군이 동쪽에서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더욱 훼손되었다.[3] 독일과 소련에 맞서 방어를 펼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스미글리-리츠는 그의 부대에 루마니아로 후퇴하고 소련 침략자들과의 싸움에 병력을 낭비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3]

1939년 9월 18일, 소련군과 독일군의 포위를 간신히 피해 루마니아로 탈출한 스미글리-리츠는 억류되었다. 폴란드 정부가 루마니아로 건너가면서 폴란드는 공식적으로 항복해야 하는 상황을 피했고 폴란드 군인들이 나치 독일에 맞서 계속 싸울 수 있게 되었지만, 리츠의 도주는 폴란드군 최고 사령관으로서 그의 입지 때문에 논란을 불러일으켰다.[3]

폴란드군 총사령관으로서 시미그위-리츠는 1939년 9월 폴란드의 군사적 패배에 대한 모든 책임을 졌다. 리츠는 이전의 전쟁에서 소규모 전선에서 매우 유능한 지휘관임을 증명했지만, 대규모 분쟁에서는 경험 많은 전략가는 아니었다. 실제로 1922년, 폴란드 장군들에 대한 평가에서 피우수트스키는 그에 대해 "작전 업무에서 그는 건전한 상식과 끈기 있는 에너지를 보여준다. 나는 그를 모든 사람에게 군대 지휘관으로 추천할 수 있지만, 두 국가 간의 전쟁에서 그가 총사령관 역할을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라고 적었다.[3]

루마니아에서 억류되는 동안 시미그위-리츠는 피우수트스키의 기억에 충실한 장교들로부터 시작된 폴란드 지하 조직을 창설했다. 루마니아에서 그는 10월 27일 총사령관 및 군대 감찰관 직을 사임했다. 이 역할은 프랑스(그리고 1940년 이후에는 영국)에 있던 새로운 망명 폴란드 정부에서 활동하고 있던 블라디슬라프 시코르스키가 맡았다.[3]

시미그위-리츠는 억류 캠프에서 드라고슬라벨레에 있는 전 루마니아 총리의 별장으로 이송되었고, 1940년 12월 10일 그곳에서 탈출하여 헝가리로 불법 입국했다. 그가 헝가리로 도망간 일과 그의 폴란드 귀환 계획에 대한 소문은 그의 라이벌인 시코르스키에게 상당한 불쾌감을 안겨주었는데, 시코르스키는 당시 총리였다. 시코르스키는 1926년 5월 쿠데타 이후 시미그위-리츠와 피우수트스키에 반대해 왔다. 시코르스키는 폴란드 지하 저항 조직인 국가군 (AK)의 지도자인 스테판 그로트-로베키 장군에게 보낸 전보에서 "폴란드 정부는 원수가 폴란드에 체류하는 것을 이 나라에서의 정부 활동을 방해하는 행위로 간주할 것이다. 원수는 가능한 한 빨리 대영 제국의 어떤 국가로든 이동해야 한다"라고 선언했다.[3] 그러나 시미그위-리츠는 1941년 10월 25일 헝가리를 떠나 슬로바키아를 거쳐 폴란드에 도착했다. 10월 30일, 그는 극비리에 바르샤바로 돌아와 일반 지하 군인으로서 저항 운동에 참여했으며, 폴란드 원수로서의 계급을 자발적으로 중단했다. 그는 그로트-로베키와 연락을 취했지만 신분을 숨겼다. 그는 1941년 12월 2일, 바르샤바에 도착한 지 불과 5주 만에 55세의 나이로 심부전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는 가명 "아담 자비스자"로 바르샤바에 묻혔다. 포봉키 묘지에 있는 그의 묘비에는 1991년까지 이 가명이 새겨져 있었다. 원수의 본명이 새겨진 새로운 묘비는 1994년 바르샤바 시민들에 의해 그의 무덤에 놓였다.[3]

3. 유산과 평가

에드바르트 리츠시미그위에 대한 평가는 시대와 관점에 따라 크게 엇갈린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과 폴란드 인민 공화국을 비롯한 동구권 국가들은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들은 리츠시미그위가 1920년 폴란드-소련 전쟁에 참전했고, 1930년대 후반 군사 정부 시절 극좌 세력을 탄압했으며, 1939년 폴란드의 패배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비난했다.[3]

반면, 서방에서는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를 중심으로 한 반(反) 피우수트스키 세력의 영향으로, 리츠시미그위가 1939년에 전장을 탈출했다는 인식이 강했다. 또한 폴란드가 침공당하고 독일과 소련에 의해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적인 상황은 거의 인정받지 못했다.

필립 부작과 복원된 에드바르트 리츠시미그위의 초상화


2016년, 런던의 시코르스키 박물관 기록 보관소에서 리츠시미그위의 크고 상세한 유화 초상화가 발견되었다. 이 그림은 정체불명의 인물에 의해 네 부분으로 접혀 서류 가방에 숨겨진 채, 나치 점령군에게 빼앗기는 것을 피해 영국으로 밀반입되었다. 필립 부작(폴란드 유산 협회의 개인 회원)의 지원으로 복원된 이 그림은 현재 시코르스키 연구소에 전시되어 있다.

4. 수상 및 기념



'''폴란드 훈장'''


  • 백색 독수리 훈장
  • 비르투티 밀리타리 사령관 및 기사 훈장
  • 폴로니아 레스티투타 훈장 대십자, 대장교 및 장교 훈장
  • 4회 용감 십자 훈장, 금색 공로 십자 훈장, 칼이 달린 독립 십자 훈장.


'''외국 훈장'''

훈장국가
루마니아 별 훈장 대십자 훈장루마니아
이탈리아 왕관 훈장 대십자 훈장이탈리아
레지옹 도뇌르 대십자 훈장프랑스
백장미 훈장 대장교 훈장핀란드
백색 독수리 훈장과 성 사바 훈장 대십자 훈장[5]유고슬라비아
헝가리 공로 훈장 대십자 훈장헝가리
욱일장 대십자 훈장일본
라치플레시스 훈장(곰 사냥꾼 훈장) 2등급 기사 훈장[6]라트비아
풀라스키 메달미국
이탈리아 군사 공로 십자 훈장이탈리아



'''명예 칭호'''

리츠시미그위는 바르샤바 대학교, (당시 폴란드 영토였던) 빌뉴스 대학교, 바르샤바 공과대학교의 명예 박사였으며, 여러 폴란드 도시의 명예 시민이기도 했다.

'''헌정'''

마르샤우 에드바르트 시미그위-리츠 공원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폴란드 국회 건물 동쪽에 세워진 바르샤바의 넓은 수목이 우거진 공원이다.[7]

5. 작품


  • 군사 전술 및 이론에 관한 저술
  • 《바요네트 전투》(Walka na bagnety), 르비우 1914
  • 《폴란드 군사 교리》(W sprawie polskiej doktryny), 바르샤바 1924
  • 《기병의 엄호》(Kawaleria w osłonie), 바르샤바 1925
  • 《힘을 잊지 말라 - 명령, 기사, 연설》(Byście o sile nie zapomnieli - Rozkazy, Artykuły, Mowy), 바르샤바 1936
  • 《폴란드-독일 전쟁》(Wojna polsko-niemiecka), 부다페스트 1941
  • 《내 길의 끝을 향하여》(Dążąc do końca swoich dróg), 파리 1947; 런던 1989
  • 피우수트스키의 저서 《1863년 1월 22일》 삽화, 르비우 1920; 크라쿠프(1916)와 바르샤바(1917) 미술 전시회 기고. 그의 그림 대부분은 유실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Edward Śmigły-Rydz : A Political and Military Biography https://digital.lib.[...] 2017-11-18
[2] 문서 ryda
[3] 서적 Inside Europe https://archive.org/[...] Harper & Brothers
[4] 서적 Po klęsce Prószyński i Spółka
[5] 서적 Slava i čast: Odlikovanja među Srbima, Srbi među odlikovanjima Službeni Glasnik
[6] 서적 Latvijas Valsts apbalvojumi un Lāčplēši. Junda
[7] 서적 Warsaw and surroundings Fest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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