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네스토 레쿠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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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르네스토 레쿠오나는 쿠바 출신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 1895년 아바나 근교에서 태어났다. 3세에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여 5세에 첫 연주회를 열었고, 11세에 작곡을 시작했다. 1916년 뉴욕에서 미국 데뷔를 했으며, 1924년에는 스페인 순회 공연을 가졌다. 그는 사르수엘라, 영화 음악, 피아노곡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남겼으며, 특히 "시보네이", "말라게냐"와 같은 곡으로 유명하다. 1942년에는 "내 마음속의 언제나"가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레쿠오나는 1960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1963년 사망했으며, 그의 음악은 쿠바 음악을 고전적인 위치로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쿠바의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 - 호르헤 볼레트
호르헤 볼레트는 쿠바 출신의 피아니스트이자 교육자로, 커티스 음악원에서 거장들에게 사사받고 낭만주의 시대 피아노 작품 해석에 뛰어났으며, 카네기 홀 공연과 음반 녹음, 그리고 줄리아드 음악 학교와 인디애나 대학교 교수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 쿠바의 피아노 연주자 - 다마소 페레스 프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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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초 발데스는 쿠바의 피아니스트, 밴드 리더, 작곡가로, 아프로-쿠바 재즈와 라틴 재즈 분야에서 활동하며 여러 차례 그래미상을 수상하고, 아프로-쿠반 메신저스와 함께 공연하며 음악 교육에도 힘쓰고 있다.
에르네스토 레쿠오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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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활동 시기 | |
기타 |
2. 초기 생애
에르네스토 레쿠오나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였다. 1916년 뉴욕 에올리안 홀에서 쿠바 외부 첫 공연을 가졌다.[4] 1918년 루이스 카사스 로메로, 모이세스 시몬스, 하이메 프라츠, 닐로 메넨데스, 비센테 란츠와 협력하여 쿠바 음악과 미국 QRS사가 제작한 거장들의 악보를 복제하는 피아노 악보 제작 공장을 설립, "Rollo Autógrafo"라는 브랜드를 만들었다.
2. 1. 출생 및 가족
에르네스토 레쿠오나는 스페인 왕국 쿠바 아바나 과나바코아에서 쿠바인 어머니와 카나리아 제도 출신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4] 출생 날짜는 자료에 따라 1895년 또는 8월 6일로 불일치가 있다. 다섯 살 때부터 누나이자 저명한 작곡가인 에르네스티나 레쿠오나 이 카사도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신동이었던 그는 11세에 첫 번째 곡을 작곡했다.[5] 이후 카를로스 알프레도 페이렐라데 음악원에서 안토니오 사아베드라와 호아킨 닌에게 배웠다. 17세에 아바나 국립 음악원을 해석상 금메달을 받고 졸업했다.[4]2. 2. 음악 교육
레쿠오나는 3세부터 누나 에르네스티나 레쿠오나에게 피아노를 배웠고, 5세에 피아니스트로서 첫 공개 연주회를 열었다. 신동이었던 그는 11세에 첫 번째 곡을 작곡했다.[1][5] 이후 카를로스 알프레도 페이렐라데 음악원에서 안토니오 사아베드라와 호아킨 닌에게 배웠다. 14세에 하바나 국립음악원에 입학했고, 1913년 17세에 금메달을 획득하고 피아노과를 졸업했다. 이 기간 동안 호아킨 닌에게 작곡을 사사했다.[4]3. 명성
에르네스토 레쿠오나는 600곡이 넘는 작품을 남겼으며, 클래식 음악 외에도 쇼, 리뷰, 뮤지컬, 라디오 방송, 영화 등 상업 음악도 많이 제작했다. 사르수엘라(zarzuela)도 남겼다. 자신의 피아노곡을 포퓰러 음악으로 편곡한 것도 많으며, "시보네이"와 "미풍과 나"는 특히 유명하다. 1942년 "내 마음속의 언제나"는 아카데미상에 노미네이트되었지만, "화이트 크리스마스"에 밀려 수상에는 실패했다.
레쿠오나는 복조를 도입한 작품도 남겼지만, 대체로 19세기 말 프랑스 근대 음악과 스페인 민족주의 음악의 영향을 받은 낭만주의 작곡가였다. 왈츠와 마주르카(mazurka) 등의 살롱풍 소품에서는 카미유 생상스(Camille Saint-Saëns), 가브리엘 포레(Gabriel Fauré), 세실 샤미나드(Cécile Chaminade)의 영향을 볼 수 있다. 카리브 비트와 쿠바 민족 음악의 영향을 받은 피아노 모음곡이 많으며, 이러한 작품에서는 이삭 알베니스(Isaac Albéniz)의 영향이 두드러진다. 또한 리듬 구성에 있어서 러그타임(ragtime)의 영향도 엿보인다.
오랫동안 포퓰러 음악가로만 알려졌지만, 최근 중남미 출신 작곡가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진행되면서 살롱용 피아노 소품을 중심으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스웨덴의 레코드 회사 BIS에서는 레쿠오나 작품의 녹음과 발매가 잇따르기도 했다.
일본에서 스트립 극장이나 자 더 드리프터즈(ザ・ドリフターズ)의 코미디 연출에 사용되어 한때 크게 유행했던 배경음악 "타부(Tabú)"는 레쿠오나의 조카 마르가리타 레쿠오나(Margarita Lecuona)(1910년 - 1981년)가 작곡한 동명의 히트곡(1934년, 1938년, 1941년)이 원곡이다.
3. 1. 초기 활동
1916년 뉴욕 에올리안 홀(Aeolian Hall)에서 미국 데뷔를 했다.[1] 이후 미국에 정착하여, 1930년대에는 "레쿠오나 쿠바 보이스(Lecuona Cuban Boys)"를 이끌고 미국, 중남미, 유럽에서 연주 여행을 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24년 바이올리니스트 마르타 데 라 토레와 함께 스페인으로 첫 순회 공연을 떠났고, 1927년과 1928년에는 파리 플레옐 홀(Salle Pleyel)에서 성공적인 피아노 독주회를 열었는데, 이는 쿠바 음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던 시기와 일치했다.[4] 그의 인기는 남미의 부에노스아이레스, 리우데자네이루, 리마뿐만 아니라 유럽의 파리, 니스, 바르셀로나, 마드리드, 런던의 콘서트홀로 이어졌고, 뉴욕에서도 더 많은 공연을 하게 되었다.[1]녹음 활동도 활발하게 했다. 1946년 멤버 간의 불화와 밴드 해체로 밴드 리더에서 물러나 쿠바로 돌아갔지만, "레쿠오나 쿠반 보이스"는 레쿠오나 사후인 1970년대 중반까지 활동을 계속했으며, 레쿠오나와 밴드 사이에는 편지와 전화를 통해 연락을 유지했다.
3. 2. 국제적 명성
그는 1924년 바이올리니스트 마르타 데 라 토레와 함께 스페인으로 첫 순회 공연을 떠났다. 1927년과 1928년 파리 플레옐 홀(Salle Pleyel)에서 성공적인 피아노 독주회를 가졌는데, 이는 쿠바 음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시기와 일치했다.[4] 그의 인기는 그를 남미의 부에노스아이레스, 리우데자네이루, 리마뿐 아니라 유럽의 파리, 니스, 바르셀로나, 마드리드, 런던의 콘서트홀로 이끌었고, 이어 뉴욕에서 더 많은 공연을 하게 되었다.[1]레쿠오나의 사르수엘라인 ''마리아 라 오(María la O)''는 1930년 3월 1일 아바나에서 초연되었다. 그는 다작의 노래 작곡가이자 무대 및 영화 음악 작곡가였다.[4] 그는 ''쿠바의 연가(The Cuban Love Song)'', ''내 마음속의 언제나'', ''내일 또 만나요'' 등의 영화 음악 일부를 작곡했다.[6] ''코스타리카의 카니발(Carnival in Costa Rica)'' 영화의 모든 음악은 레쿠오나가 작곡했다.[1] 그의 작품은 사르수엘라, 아프로-쿠바와 쿠바 리듬, 모음곡, 그리고 "시보네이"("칸토 시보네이"), "말라게냐", "미풍과 나(The Breeze And I)("안달루시아") 등 아직까지도 유명한 많은 노래들로 구성되어 있다. 1942년 그의 히트곡 "내 마음속의 언제나(Always in my Heart)"("시엠프레 엔 미 코라손(Siempre en mi Corazón)")는 아카데미상 최우수 주제가상 후보에 올랐지만, "화이트 크리스마스"에 밀렸다. 레쿠오나는 교향곡 형식의 거장이었으며, 쿠바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카멜리나 델핀을 포함한 독주자들을 고용하여 에르네스토 레쿠오나 교향악단을 지휘했다. 이 오케스트라는 1943년 10월 10일 카네기홀(Carnegie Hall)에서 쿠바 해방 기념 음악회에서 공연했고, 이 공연에는 레쿠오나의 ''검은 광시곡(Black Rhapsody)''의 세계 초연이 포함되었다. 레쿠오나는 인기 투어 그룹인 레쿠오나 쿠바 보이스(Lecuona Cuban Boys)에 도움과 그의 이름 사용을 허락했지만, 밴드 멤버로서 연주하지는 않았다. 그는 때때로 공연의 첫 번째 순서로 피아노 독주를 하기도 했다.
3. 3. 레쿠오나 쿠바 보이스
레쿠오나는 1930년대에 "레쿠오나 쿠반 보이스(Requena Cuban Boys)"라는 밴드를 이끌고 미국, 중남미, 유럽 등지에서 연주 여행을 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음반 녹음 활동도 활발하게 했다.[1] 1946년, 밴드 멤버 간의 불화로 밴드가 해체되자 밴드 리더 활동을 중단하고 쿠바로 돌아갔다. 하지만 "레쿠오나 쿠반 보이스"는 레쿠오나 사후인 1970년대 중반까지 활동을 계속했으며, 레쿠오나와 밴드는 편지와 전화를 통해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다.[1] 레쿠오나는 레쿠오나 쿠바 보이스(Lecuona Cuban Boys)에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도록 허락하고 지원했지만, 밴드 멤버로 직접 연주하지는 않았다. 다만, 공연의 첫 순서로 피아노 독주를 하기도 했다.3. 4. 작품 활동
1924년 에르네스토 레쿠오나는 바이올리니스트 마르타 데 라 토레와 함께 스페인으로 첫 순회 공연을 떠났다. 1927년과 1928년 파리 플레옐 홀(Salle Pleyel)에서 성공적인 피아노 독주회를 가졌는데, 이는 쿠바 음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시기와 일치했다.[4] 그의 인기는 그를 남미의 부에노스아이레스, 리우데자네이루, 리마뿐 아니라 유럽의 파리, 니스, 바르셀로나, 마드리드, 런던의 콘서트홀로 이끌었고, 이어 뉴욕에서 더 많은 공연을 하게 되었다.[1]1930년 3월 1일, 아바나에서 레쿠오나의 사르수엘라 ''마리아 라 오(María la O)''가 초연되었다. 그는 다작의 노래 작곡가이자 무대 및 영화 음악 작곡가였다.[4] ''쿠바의 연가(The Cuban Love Song)'', ''내 마음속의 언제나'', ''내일 또 만나요'' 등의 영화 음악 일부를 작곡했으며,[6] ''코스타리카의 카니발(Carnival in Costa Rica)'' 영화의 모든 음악은 레쿠오나가 작곡했다.[1] 그의 작품은 사르수엘라, 아프로-쿠바와 쿠바 리듬, 모음곡, 그리고 "시보네이"("칸토 시보네이"), "말라게냐", "미풍과 나(The Breeze And I)("안달루시아") 등 현재까지도 유명한 많은 노래들로 구성되어 있다. 1942년 그의 히트곡 "내 마음속의 언제나(Always in my Heart)"("시엠프레 엔 미 코라손(Siempre en mi Corazón)")는 아카데미상 최우수 주제가상 후보에 올랐지만, "화이트 크리스마스"에 밀렸다. 레쿠오나는 교향곡 형식의 거장이었으며, 쿠바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카멜리나 델핀을 포함한 독주자들을 고용하여 에르네스토 레쿠오나 교향악단을 지휘했다. 1943년 10월 10일 카네기홀(Carnegie Hall)에서 열린 쿠바 해방 기념 음악회에서 이 오케스트라는 레쿠오나의 ''검은 광시곡(Black Rhapsody)''을 세계 초연으로 공연했다. 레쿠오나는 인기 투어 그룹인 레쿠오나 쿠바 보이스(Lecuona Cuban Boys)에 도움과 그의 이름 사용을 허락했지만, 밴드 멤버로서 연주하지는 않았다. 그는 때때로 공연의 첫 번째 순서로 피아노 독주를 하기도 했다.
4. 말년과 유산
1960년, 카스트로 정권에 불만을 품은 레쿠오나는 미국 플로리다주 탬파로 이주하여 여생을 보냈다. 1963년 11월 29일, 카나리아 제도를 여행하던 중 산타크루스데테네리페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7] 뉴욕주 호손의 하늘 문묘지에 안치되었지만, 유언에 따라 쿠바 정권이 변화한 후 유해가 조국으로 송환될 예정이었다. 레쿠오나의 작곡 재능은 조지 거슈윈이 미국에서 한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라틴 아메리카 세계에 영향을 미쳤으며, 쿠바 음악을 고전적인 지위로 끌어올렸다. 사촌인 마르가리타 레쿠오나는 "바발루"를 작곡한 뛰어난 음악가였다. 레쿠오나는 오랫동안 포퓰러 음악 뮤지션으로만 기억되었지만, 최근 중남미 출신 작곡가에 대한 체계적인 관심과 더불어 살롱용 피아노 소품을 중심으로 재평가가 진행되고 있다.
4. 1. 미국 망명
1960년, 카스트로 정권에 불만을 품은 레쿠오나는 미국 플로리다주 탬파로 이주하여 친척인 가수 에스페란사 체디악(Esperanza Chediak)과 함께 살았다. 그는 미국에서 여생을 보냈다.[7] 카나리아 제도를 여행 중이던 1963년 11월 29일, 폐질환 요양을 위해 갔던 산타크루스데테네리페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7] 그는 뉴욕주(New York State) 호손의 하늘 문묘지(Gate of Heaven Cemetery)에 안치되었지만, 그의 유언에 따라 쿠바 정권이 변화한 후 유해가 조국으로 송환될 예정이었다.4. 2. 사망
1960년, 카스트로 정권에 불만을 품은 레쿠오나는 미국 플로리다주 탬파로 이주하여 여생을 보냈다. 1963년 11월 29일, 카나리아 제도를 여행하던 중 산타크루스데테네리페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7] 그는 뉴욕주 호손의 하늘 문묘지에 안치되었지만, 그의 유언에 따라 쿠바 정권이 변화한 후 유해가 조국으로 송환될 예정이었다.4. 3. 영향
레쿠오나의 작곡 재능은 조지 거슈윈이 미국에서 한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라틴 아메리카 세계에 영향을 미쳤으며, 쿠바 음악을 고전적인 지위로 끌어올렸다.[7]에르네스토 레쿠오나와 에르네스티나 레쿠오나의 사촌인 마르가리타 레쿠오나 또한 뛰어난 음악가이자 작곡가였다. 그녀는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미겔리토 발데스에 의해, 미국에서는 데시 아르나스에 의해 유명해진 노래 "바발루"의 작곡가였다.
오랫동안 포퓰러 음악 뮤지션으로만 기억되었지만, 최근 중남미 출신 작곡가에 대한 체계적인 관심으로 살롱용 피아노 소품을 중심으로 재평가가 진행되고 있으며, 특히 스웨덴의 레코드 회사 BIS에서는 한때 레쿠오나 작품의 녹음과 발매가 잇따랐다.
일본에서 스트립 극장이나 자 더 드리프터즈(ザ・ドリフターズ)의 코미디 연출에 사용되어 한때 크게 유행했던 배경음악 "타부(Tabú)"는 레쿠오나의 조카 마르가리타 레쿠오나(1910년 - 1981년)가 작곡한 동명의 히트곡(1934년, 1938년, 1941년)이 원곡이다.
4. 4. 재평가
오랫동안 포퓰러 음악 뮤지션으로만 기억되었지만, 최근 중남미 출신 작곡가에 대한 체계적인 관심과 더불어 살롱용 피아노 소품을 중심으로 재평가가 진행되고 있다. 특히 스웨덴의 레코드 회사 BIS에서는 한때 레쿠오나 작품의 녹음과 발매가 잇따랐다.5. 주요 작품
에르네스토 레쿠오나의 주요 작품은 다음과 같다.
피아노곡 | 왈츠 | 기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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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 피아노곡
- 에스코리아르 앞에서 (Ante El Escorial)
- 아라곤 (Aragón)
- 아라곤풍의 (Aragonesa)
- 그란데 성 프란시스코 (San Francisco El Grande)
- 시보네이 (Siboney)
- 안달루시아 모음곡 (Suite Andalucía)
- * 코르도바 (Córdoba)
- * 안달루시아 (Andalucía)
- * 알람브라 (Alhambra)
- * 집시풍의 노래 (Gitanerías)
- * 과달키비르 (Guadalquivir)
- * 말라게냐 (Malagueña)
- 발렌시아 모라 (Valencia Mora)
- 집시 잠브라 (Zambra Gitana)
5. 2. 왈츠
- 아파시오나도 (Apasionado)
- 크리산테모 (Crisantemo)
- 라 베몰 (La bemol)
- 마라비요소 (Maravilloso)
- 포에티코 (Poético)
- 로만티코 (Romántico)
- 시 마이너 (로코코) (Si menor (Rococó))
- 발스 아술 (Vals Azul)
5. 3. 기타
Ernesto Lecuonaes의 기타 작품은 다음과 같다.아프로쿠반 모음곡 | 아이 비에네 엘 치노 | 알 핀 테 비 |
아모로사 | 안다르 | 아키 에스타 |
아라베스크 | 벨 플라워 | 베닐데 |
부르레스카 | 칸토 델 과히로 | 카히타 데 무시카 |
코모 아룰로 데 팔마스 | 코모 바일라 엘 무네코 | 다메 투 아모르 |
단자 데 로스 냐니고스 | 단자 루쿠미 | 디아리오 데 운 니뇨 |
엘라 이 요 | ¡에차테 파야 마리아! | 엘 바테이 |
엘 미리냐케 | 엘 솜브레로 데 야레이 | 엘 탕기토 데 마마 (또는 A 라 안티과) |
엔 트레스 포르 쿠아트로 | 에레스 투 엘 아모르 | 푸투리스타 |
곤살로, ¡노 바일레스 마스! | 임프롬투 | 정글 드럼 |
라 32 | 라 프리메라 엔 라 프렌테 | 라 컴파르사 |
라 콩가 데 메디아노체 | 라 아바네라 | 라 단자 인터룸피다 |
라 뮬라타 | 라 네그라 루쿠미 | 라 카르데넨세 |
로스 민스트렐스 | 롤라 크루즈 | 롤라 에스타 데 피에스타 |
요라바 엔 수에뇨스 | 마주르카 엔 글리산도 | 멜랑콜리아 |
미엔트라스 요 코미아 마울라바 엘 가토 | 미스 트리스테사스 | 마리아 라 오 |
무네카 데 크리스탈 | 무네키타 | 네그라 메르세 |
네그리타 | ¡노 아블레스 마스! | 노 메 올비데스 |
노 푸에도 콘티고 | 노체 아술 | 오르키데아스 |
펜사바 엔 티 | 폴리치넬라 | ¿포르 케 테 바스? |
프렐루디오 엔 라 노체 | ¡케 리사 메 다! 미 아부엘라 바이바바 아시 | 랩소디아 네그라 |
로사, 라 치나 | 투 세라스 | 트레스 미니아투라스 |
¡이 라 네그라 바이바바! | ¡이 시게 라 요비즈니타! | 요 소이 아시 |
유무리 | 사파테오 이 과히라 | 세나이다 |
6. 기타
ALI PROJECT의 곡에는 에르네스토 레쿠오나의 곡에서 인용한 부분이 많이 나타난다. 다음은 그 예시이다.
음반명 | 곡명 | 인용 부분 |
---|---|---|
신들의 눈 | 인트로 | |
거친 가죽 | 후렴 | |
신풍 | B멜로디, 후렴 | |
설화참회심중 | 인트로 | |
귀제의 검 | 후렴 | |
계관시인 | 후렴 | |
벌거벗은 이브 신세기 | 후렴, 간주 | |
RED WALTZ | 후렴 | |
로열 아카데미 오브 고딕 로리타 | 후렴 | |
테일러 T의 변신담 | B멜로디, 후렴 | |
안구 로망 | A멜로디, 후렴, 간주 | |
어떤 수도사의 고해 | 후렴 | |
탱고 다다 | A멜로디, 후렴 | |
리얼×판타지 | 후렴 | |
월하, 녹우 환상 | C멜로디 | |
자유 연애 | 후렴 | |
소녀를 위한 잔혹 동화 | 후렴 |
참조
[1]
논문
Malaguena - Piano Solo (Foreword)
1928
[2]
서적
Cuban music from A to Z
Duke University, Durham NC; Tumi, Bath
2004
[3]
서적
Música cubana del Areyto a la Nueva Trova
Cubanacan
1981
[4]
서적
The Guinness Encyclopedia of Popular Music
Guinness Publishing
1992
[5]
서적
Caribbean Companion: The A-Z Reference
Macmillan
1992
[6]
서적
A Language of Emotion: What Music Does and How It Works
AuthorHouse
2009
[7]
뉴스
Cuban Composer Is Dead At 68
1963-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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