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트레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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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리트레아의 역사는 선사 시대부터 시작하여, 호모 에렉투스와 호모 사피엔스 사이의 연결 고리를 보여주는 유인원 화석이 발견되었고, 홍해 연안은 초기 인류의 이동 경로로 추정된다. 고대에는 오나 문화, 가쉬 그룹, 다마트 왕국 등이 존재했으며, 특히 악숨 왕국은 에리트레아와 에티오피아 북부를 중심으로 번성하며 기독교를 수용하고 석비 건축 등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다. 중세 시대에는 베자족, 벨루족, 아가우족, 사호족 등 다양한 민족이 유입되었고, 이슬람교가 전파되었으며, 에티오피아의 자그웨 왕조와 솔로몬 왕조의 영향 아래 놓였다. 16세기부터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와 아달 술탄국의 침략을 겪었으며, 이후 이탈리아의 식민 지배를 받으면서 오늘날의 국경선이 확립되었다. 이탈리아 식민 시대에는 사회 기반 시설이 건설되고 산업화가 진행되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연합군의 점령으로 중단되었다. 독립 투쟁은 1958년 에리트레아 해방 운동(ELM)의 결성을 시작으로, 에리트레아 해방 전선(ELF), 에리트레아 인민 해방 전선(EPLF) 등의 무장 투쟁을 거쳐 1993년 독립을 쟁취했다. 독립 이후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 대통령의 권위주의 통치하에 놓여 있으며, 에티오피아와의 국경 분쟁, 주변국과의 관계, 경제적 어려움 등 다양한 문제에 직면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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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리트레아의 역사 - 아둘리스
아둘리스는 에리트레아에 위치한 악숨 왕국의 주요 무역 중심지였으며, 상아, 가죽, 노예 등을 수출하는 중요한 항구 도시로서 로마 시대부터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졌으나 무슬림 세력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쇠퇴했고,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그 역사와 무역 활동이 밝혀지고 있다. - 에리트레아의 역사 - 악숨 왕국
악숨 왕국은 기원전 1000년경 에티오피아 고원에 세워져 국제 무역과 군사력을 통해 번성하고 기독교를 국교로 삼았으나, 이슬람의 부상과 무역로 변화 등으로 쇠퇴하여 11세기 또는 12세기에 멸망한 고대 왕국이다.
에리트레아의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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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개요 | |
명칭 유래 | 고대 그리스어 "Ἐρυθραία" (에리트라이아)에서 유래했으며, "붉은 땅"을 의미함. e)ruqro/s |
선사 시대 | |
주요 사건 | 푼트국: 기원전 2500년 ~ 980년경 다못 왕국: 기원전 980년 ~ 400년경 악숨 왕국: 기원전 150년 ~ 서기 960년 달라크 술탄국: 960년 ~ 1557년 자그웨 왕조: 1137년 ~ 1270년경 에티오피아 제국: 1270년 ~ 1974년 단칼리 술탄국: 13세기 후반 ~ 18세기 아우사 술탄국: 1734년 ~ 1936년 |
식민 시대 | |
주요 사건 | 하베쉬 에얄레트: 1554년 ~ 1872년 이탈리아령 에리트레아: 1882년 ~ 1936년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 에리트레아 주: 1936년 ~ 1941년 동아프리카 전역 (제2차 세계 대전): 1940년 ~ 1941년 영국 군정: 1941년 ~ 1952년 |
독립 이후 | |
주요 사건 | 에티오피아 내 자치: 1952년 ~ 1962년 에리트레아 독립 전쟁: 1961년 ~ 1991년 에리트레아 주로 합병: 1962년 ~ 1993년 에티오피아 내전: 1974년 ~ 1991년 |
에리트레아 국가 | |
주요 사건 | 1990년대 에리트레아 에리트레아-에티오피아 전쟁: 1998년 ~ 2000년 2000년대 에리트레아 2010년대 에리트레아 |
2. 선사 시대
에리트레아 부야에서는 호모 에렉투스와 고대 호모 사피엔스 사이의 연결 고리를 보여주는 가장 오래된 유인원 중 하나가 에리트레아와 이탈리아 과학자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100만 년 이상 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발견은 인류와 최초의 해부학적으로 현생인류 사이의 연관성을 제공한다.[97][2] 에리트레아의 다나킬 저지대는 인간 진화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여겨지며, 호모 에렉투스 호미니드에서 해부학적으로 현생 인류에 이르기까지 진화의 다른 흔적을 포함할 수도 있다.[98][3]
마지막 간빙기 동안, 에리트레아의 홍해 해안은 초기 해부학적으로 현대인들에 의해 점령되었다.[99][4] 일부 학자들은 이 지역이 고대 인류가 구세계의 나머지 지역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사용되었다고 제안하는 아프리카에서 나가는 길에 있었다고 믿고 있다.[100][5] 1999년, 에리트레아, 캐나다, 미국, 네덜란드, 프랑스 과학자들로 구성된 에리트레아 연구 프로젝트 팀은 홍해 연안을 따라 마사와 남쪽의 줄라 만 근처에서 125,000년 이상 된 석기와 흑요석이 있는 구석기 시대 유적을 발견했다. 이 도구들은 초기 인류가 조개와 굴과 같은 해양 자원을 수확하기 위해 사용한 것으로 여겨진다.[101][6]
언어학자들에 따르면, 최초의 아프리카아시아어족을 사용하는 인구들은 신석기 시대에 나일강에 있는 가족이 제안한 우르헤마트(원래의 고향)에서 이 지역에 도착했다.[102][103][7] 다른 학자들은 아프리카아시아어족이 뿔 지역에서 발달하여 화자들이 뿔 지역에서 흩어졌다고 주장한다.[104][9]
2. 1. 인류의 기원
에리트레아 부야에서는 호모 에렉투스와 고대 호모 사피엔스 사이의 연결 고리를 보여주는 가장 오래된 유인원 중 하나가 발견되었다.[97][2] 100만 년 이상 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유인원은 인류와 최초의 해부학적 현생인류 사이의 연관성을 제공한다.[97] 에리트레아의 다나킬 저지대는 인간 진화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여겨지며, 호모 에렉투스에서 현생 인류로 이어지는 진화의 흔적을 포함할 수 있다.[98][3]마지막 간빙기 동안, 에리트레아의 홍해 연안은 초기 해부학적으로 현대인들이 점령했다.[99][4] 일부 학자들은 이 지역이 고대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나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경로였다고 추정한다.[100][5] 1999년, 마사와 남쪽 줄라 만 근처 홍해 연안에서 125,000년 이상 된 석기와 흑요석이 있는 구석기 시대 유적이 발견되었다.[101][6] 이 도구들은 초기 인류가 해양 자원을 채취하는 데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101][6]
언어학자들에 따르면, 최초의 아프리카아시아어족 사용 인구는 신석기 시대에 나일강 유역의 기원지에서 이 지역에 도착했다.[102][103][7][8] 다른 학자들은 아프리카아시아어족이 아프리카의 뿔 지역에서 발달하여 화자들이 흩어졌다고 주장한다.[104][9]
2. 2. 초기 정착
에리트레아 부야에서는 호모 에렉투스와 고대 호모 사피엔스 사이의 연결 고리를 보여주는 가장 오래된 유인원 중 하나가 에리트레아와 이탈리아 과학자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100만 년 이상 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발견은 인류와 최초의 해부학적으로 현생인류 사이의 연관성을 제공한다.[97][2] 에리트레아의 다나킬 저지대는 인간 진화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여겨지며, 호모 에렉투스 호미니드에서 해부학적으로 현생 인류에 이르기까지 진화의 다른 흔적을 포함할 수도 있다.[98][3]마지막 간빙기 동안, 에리트레아의 홍해 연안은 초기 해부학적으로 현대인들에 의해 점령되었다.[99][4] 일부 학자들은 이 지역이 고대 인류가 구세계의 나머지 지역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사용되었다고 제안하는 아프리카에서 나가는 길에 있었다고 믿고 있다.[100][5] 1999년, 에리트레아, 캐나다, 미국, 네덜란드, 프랑스 과학자들로 구성된 에리트레아 연구 프로젝트 팀은 홍해 연안을 따라 마사와 남쪽의 줄라 만 근처에서 125,000년 이상 된 석기와 흑요석이 있는 구석기 시대 유적을 발견했다. 이 도구들은 초기 인류가 조개와 굴과 같은 해양 자원을 수확하기 위해 사용한 것으로 여겨진다.[101][6]
언어학자들에 따르면, 최초의 아프리카아시아어족을 사용하는 인구들은 신석기 시대에 나일강에 있는 가족이 제안한 우르헤마트(원래의 고향)에서 이 지역에 도착했다.[102][103][7] 다른 학자들은 아프리카아시아어족이 뿔 지역에서 발달하여 화자들이 뿔 지역에서 흩어졌다고 주장한다.[104][9]
3. 고대
3. 1. 오나 문화
셈벨에서의 발굴을 통해 아스마라 지역에서 고대 악숨 왕국 이전의 문명인 오나 도시 문화의 증거가 발견되었다.[10] 오나 문화는 뿔 지역에서 가장 초기의 목축 및 농업 공동체 중 하나였던 것으로 여겨지며, 유적지의 유물들은 기원전 800년에서 기원전 400년 사이로 추정된다.[10] 이는 에리트레아와 에티오피아 고지대에 있던 다른 악숨 이전 정착지와 동시대에 존재했음을 나타낸다.[10]오나 문화는 고대 푼트와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있다.[11] 아멘호테프 2세 치세에 해당하는 이집트 테베의 한 무덤에는 오나 사람들이 만든 것과 유사한 긴 목 항아리가 푼트에서 온 배의 화물로 묘사되어 있다.[11]
3. 2. 가쉬 그룹
에리트레아 중부 아고르다와 그 인근에서 발굴된 유적은 가쉬 그룹으로 알려진 고대 악숨 이전 문명의 유물을 제공했다.[12] C-그룹(테메후) 유목 문화와 관련된 도자기가 발견되었으며, 이 문화는 기원전 2500년에서 1500년 사이에 나일강 계곡에 거주했다.[13] 같은 시기에 나일강 계곡에서 번성했던 또 다른 공동체인 케르마 문화와 유사한 조각들도 가쉬 그룹에 속하는 바르카 계곡의 다른 지역 고고학 유적지에서 발견되었다.[12] 페터 베렌스(Peter Behrens, 1981)와 마리안 베하우스-게르스트(Marianne Bechaus-Gerst, 2000)에 따르면, 언어학적 증거는 C-그룹과 케르마 사람들이 각각 아프리카아시아어족의 베르베르어와 쿠시어파를 사용했음을 나타낸다.[14][15]3. 3. 다마트 왕국
다마트(D'mt)는 에리트레아 대부분과 에티오피아 북부 변방을 아우르는 왕국으로, 기원전 8세기와 7세기에 존재했다. 거대한 사원 단지가 있는 것으로 보아 수도는 아마도 예하였을 것이다.[16] 코하이토는 종종 ''홍해 주변 항해기''(Periplus of the Erythraean Sea)에서 도시 ''콜로에''로 식별되며, 마타라 또한 에리트레아 남부의 중요한 고대 다마트 왕국 도시였다. 에리트레아의 고대 도시는 많이 존재한다.이 왕국은 관개 시설을 개발하고, 쟁기를 사용했으며, 수수를 재배하고, 철 도구와 무기를 만들었다. 기원전 5세기에 다마트가 멸망한 후, 이 고원은 소규모의 후계 왕국들이 지배하게 되었고, 기원 1세기 동안 이들 중 하나인 악숨 왕국이 부상하여 이 지역을 재통일할 수 있었다.[17]

3. 4. 악숨 왕국
악숨 왕국은 에리트레아와 에티오피아 북부를 중심으로 한 무역 제국이었다.[18] 기원전 4세기 경의 초기 악숨 시대부터 서기 1세기까지 두각을 나타내며 약 서기 100년부터 940년까지 존속했다. 페르시아의 종교적 인물 마니는 악숨을 로마, 페르시아, 중국과 함께 그의 시대의 4대 강국 중 하나로 꼽았다.악숨인들은 기독교 이전 시대에 종교적 목적으로 사용된 여러 개의 큰 석비를 세웠다. 이 화강암 기둥 중 하나는 높이가 90피트(약 27미터)로 세계에서 가장 큰 구조물이다.[25] 에자나 치세 하에 악숨은 기독교를 채택했다.[26]

4세기의 데브레 시나 수도원은 에리트레아에서 기록된 최초의 기독교 예배 장소이자, 에리트레아 정교회에서 준비된 최초의 성찬례 장소이다. 3세기에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되어 아프리카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수도원 중 하나로 여겨진다. 데브레 비젠 수도원은 1350년대에 에리트레아의 네파시트 마을 근처에 지어졌다.

악숨 왕국의 기원은 불분명하지만, 전문가들은 이에 대한 추측을 제시해 왔다. 최초의 알려진 왕을 누구로 봐야 하는지도 논쟁의 대상이다. 카를로 콘티 로시니는 《홍해 연안 항해기》에 언급된 악숨의 조스칼레스를 에티오피아 왕 목록에 언급된 자 하클레와 동일 인물로 간주했다.[19] 반면, G.W.B. 헌팅포드는 조스칼레스가 아둘리스에 권한이 국한된 부왕일 뿐이며, 콘티 로시니의 동일시는 근거가 없다고 주장했다.[20]
중세 시대의 《악숨의 책》(Liber Axumae)에 따르면 악숨의 첫 번째 수도인 마자베르는 쿠시의 아들 이티오피스가 건설했다.[21] 수도는 나중에 에티오피아 북부의 악숨으로 옮겨졌다. 이 왕국은 4세기 초부터 "악숨"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23][24]
이 왕국은 《홍해 연안 항해기》에 고대 세계 전역으로 수출된 상아의 중요한 시장으로 언급되어 있다. 당시 악숨은 아둘리스 항구를 다스린 조스칼레스가 통치했다.[29] 악숨 통치자들은 자체 악숨 통화를 주조하여 무역을 촉진했다.
악숨은 쇠퇴해가는 쿠시 왕국에 대한 패권을 확립하고 아라비아 반도의 왕국 정치에 정기적으로 참여했으며, 히미야르 왕국의 정복으로 이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확장했다. 남아라비아에서 발견된 비문에는 "하바샤 [즉, 아비시니아]와 악숨의 ''나가시''"로 묘사된 GDRT에 대한 승리를 기념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3세기 초경 GDRT의 전성기를 나타내는 비문이 있는 청동 홀 또는 지팡이가 아츠비 데라에서 발견되었다. 왕의 초상화가 있는 동전은 3세기 말에 엔두비스 왕 치세 하에 주조되기 시작했다.
에자나가 수단의 메로에에 있는 쿠시 왕국으로 보낸 원정은 후자의 정치체의 멸망을 초래했을 수도 있지만, 그 이전에 왕국이 쇠퇴기에 접어들었다는 증거도 있다. 예멘에 대한 악숨의 통제 정도는 불확실하지만, "사바와 살헨, 히미야르와 드-레이단"의 왕(모두 현대 예멘)을 포함하는 그의 칭호와 "''하바샤''" 또는 "하바시"의 왕이라고 새겨진 금 악숨 동전은 악숨이 이 지역에서 다소의 법적 또는 실제적 입지를 유지했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30]
615년, 무함마드의 생애 동안, 악숨 왕 사하마는 박해를 피해 도망온 초기 무슬림들을 메카에서 피난처를 제공했다.[27] 이 여정은 이슬람 역사에서 제1차 히즈라로 알려져 있다.
악숨 왕국에 대한 세부 사항은 이 시점 이후 더욱 희소해진다. 동전을 주조한 마지막 왕은 아르마이며, 그의 주화는 614년 예루살렘의 페르시아 정복을 언급한다. 스튜어트 먼로-헤이는 악숨이 사하마의 통치 시대에 수도로서 버려졌다고 믿는다.[27] 그러나 코비시차노프는 악숨 왕국이 적어도 702년까지 아라비아 항구에 대한 패권을 유지했다고 주장한다.[31]
4. 중세
7세기 말부터 악숨 왕국의 쇠퇴와 함께 고원을 포함한 에리트레아의 광대한 지역은 이교도인 베자족에게 점령되었고, 이들은 바클린, 자린, 카타와 같은 여러 왕국을 건설했다.[32] 베자족의 지배는 13세기에 쇠퇴했다.[33] 그 후 베자족은 남쪽에서 온 아비시니아 정착민에 의해 고원에서 쫓겨났다.[33] 또 다른 민족인 벨루는 베자족과 비슷한 환경에서 기원했다. 그들은 12세기에 처음 등장하여 16세기까지 에리트레아 북서부 지역을 지배했다.[34] 1270년, 자그웨 왕국이 멸망한 후 많은 아가우가 현재 에리트레아로 도망쳤다. 대부분은 빌렌을 제외하고 현지 티그리냐 문화에 동화되었다.[35] 악숨의 몰락 이후 도착한 또 다른 민족은 쿠시어를 사용하는 사호로, 14세기까지 고원에 정착했다.[36]
한편 에리트레아는 매우 느리지만 꾸준히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무슬림은 이미 제1차 히즈라 동안인 613/615년에 에리트레아에 도달했다. 702년에 무슬림 여행객이 달락 섬에 들어섰다. 1060년, 예멘 왕조가 달락으로 도망쳐 거의 500년 동안 지속될 달락 술탄국을 선포했다. 이 술탄국은 또한 항구 도시 마사와에 대한 주권을 가지고 있었다.[37] 마사와에는 15세기에 건립된 셰이크 하나피 모스크가 있다.
12세기부터 에티오피아의 자그웨 왕조와 에티오피아 제국의 솔로몬 왕조가 에리트레아의 고원 전체와 홍해 연안을 지배했다.[38][39] 이전에는 이 지역을 ''마이켈레 바르''("바다/강 사이"라는 뜻으로, 홍해와 마레브강 사이의 땅)라고 불렀지만, 자라 야코브 황제 통치 기간 동안 메드리 바흐리(티그리냐어로 "바다의 땅")의 영토로 변경되었다.[40][41] 메드리 바흐리의 수도는 데바르와에 있었고,[42] 주요 지역은 하마시엔, 세라에, 아켈레 구자이였다.
홍해 연안은 전략적, 상업적 중요성 때문에 많은 세력의 경쟁 대상이었다. 16세기에는 오스만 제국이 다흐라크 제도와 마사와를 점령했고, 아달 술탄국의 아흐마드 그라냐가 에리트레아를 침략했다. 아달족이 축출된 후, 오스만 제국은 에리트레아의 해안 지역을 더 많이 점령했다.[43][44] 오스만 제국은 수 세기 동안 이 지역 대부분에 대한 통제력을 약하게 유지하다가 1865년에 이집트가 마사와를 획득했다. 이집트는 내륙 고원으로 진격했지만, 1876년 이집트-에티오피아 전쟁에서 패배했다.[38]
에리트레아 남부에서는 아우사 술탄국(아파르 술탄국)이 이전의 아우사 이맘국을 계승했다. 아우사 이맘국은 1577년 무함마드 자사가 수도를 하르에서 아사이타로 옮기면서 아달 술탄국이 분열되면서 생겨났다. 1672년 이후 아우사 술탄국은 쇠퇴했다.[45] 1734년, 아파르족 지도자 케다푸가 권력을 잡고 무다이토 왕조를 세웠다.[46][47]
16세기에는 오스만 제국이 다흐라크 제도와 마사와를 점령했다.[43][44] 같은 시기 에리트레아는 아달 술탄국의 무슬림 지도자 아흐마드 그라냐의 침략을 받았다. 아달족이 축출된 후, 오스만 제국은 에리트레아의 해안 지역을 더 많이 점령했다.[43][44] 오스만 제국은 그 후 수 세기 동안 이 지역 대부분에 대한 통제력을 약하게 유지하다가 1865년에 이집트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마사와를 획득했다.[38] 그들은 그곳에서 내륙 고원으로 진격했지만, 1876년 이집트-에티오피아 전쟁에서 이집트가 패배했다.[38]
4. 1. 이슬람의 유입
7세기 말부터 악숨 왕국의 쇠퇴와 함께 고원을 포함한 에리트레아의 광대한 지역은 이교도인 베자족에게 점령되었고, 이들은 바클린, 자린, 카타와 같은 여러 왕국을 건설했다.[32] 베자족의 지배는 13세기에 쇠퇴했다.[33] 그 후 베자족은 남쪽에서 온 아비시니아 정착민에 의해 고원에서 쫓겨났다.[33] 또 다른 민족인 벨루는 베자족과 비슷한 환경에서 기원했다. 그들은 12세기에 처음 등장하여 16세기까지 에리트레아 북서부 지역을 지배했다.[34] 1270년, 자그웨 왕국이 멸망한 후 많은 아가우가 현재 에리트레아로 도망쳤다. 대부분은 빌렌을 제외하고 현지 티그리냐 문화에 동화되었다.[35] 악숨의 몰락 이후 도착한 또 다른 민족은 쿠시어를 사용하는 사호로, 14세기까지 고원에 정착했다.[36]한편 에리트레아는 매우 느리지만 꾸준히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무슬림은 이미 제1차 히즈라 동안인 613/615년에 에리트레아에 도달했다. 702년에 무슬림 여행객이 달락 섬에 들어섰다. 1060년, 예멘 왕조가 달락으로 도망쳐 거의 500년 동안 지속될 달락 술탄국을 선포했다. 이 술탄국은 또한 항구 도시 마사와에 대한 주권을 가지고 있었다.[37] 마사와에는 15세기에 건립된 셰이크 하나피 모스크가 있다.
4. 2. 에티오피아의 영향
12세기부터 에티오피아의 자그웨 왕조와 에티오피아 제국의 솔로몬 왕조가 에리트레아의 고원 전체와 홍해 연안을 지배했다.[38][39] 이전에는 이 지역을 ''마이켈레 바르''("바다/강 사이"라는 뜻으로, 홍해와 마레브강 사이의 땅)라고 불렀지만, 자라 야코브 황제 통치 기간 동안 메드리 바흐리(티그리냐어로 "바다의 땅")의 영토로 변경되었다.[40][41] 메드리 바흐리의 수도는 데바르와에 있었고,[42] 주요 지역은 하마시엔, 세라에, 아켈레 구자이였다.홍해 연안은 전략적, 상업적 중요성 때문에 많은 세력의 경쟁 대상이었다. 16세기에는 오스만 제국이 다흐라크 제도와 마사와를 점령했고, 아달 술탄국의 아흐마드 그라냐가 에리트레아를 침략했다. 아달족이 축출된 후, 오스만 제국은 에리트레아의 해안 지역을 더 많이 점령했다.[43][44] 오스만 제국은 수 세기 동안 이 지역 대부분에 대한 통제력을 약하게 유지하다가 1865년에 이집트가 마사와를 획득했다. 이집트는 내륙 고원으로 진격했지만, 1876년 이집트-에티오피아 전쟁에서 패배했다.[38]
에리트레아 남부에서는 아우사 술탄국(아파르 술탄국)이 이전의 아우사 이맘국을 계승했다. 아우사 이맘국은 1577년 무함마드 자사가 수도를 하르에서 아사이타로 옮기면서 아달 술탄국이 분열되면서 생겨났다. 1672년 이후 아우사 술탄국은 쇠퇴했다.[45] 1734년, 아파르족 지도자 케다푸가 권력을 잡고 무다이토 왕조를 세웠다.[46][47]
4. 3. 오스만 제국의 진출
16세기에는 오스만 제국이 다흐라크 제도와 마사와를 점령했다.[43][44] 같은 시기 에리트레아는 아달 술탄국의 무슬림 지도자 아흐마드 그라냐의 침략을 받았다. 아달족이 축출된 후, 오스만 제국은 에리트레아의 해안 지역을 더 많이 점령했다.[43][44] 오스만 제국은 그 후 수 세기 동안 이 지역 대부분에 대한 통제력을 약하게 유지하다가 1865년에 이집트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마사와를 획득했다.[38] 그들은 그곳에서 내륙 고원으로 진격했지만, 1876년 이집트-에티오피아 전쟁에서 이집트가 패배했다.[38]5. 이탈리아 식민 시대
오늘날 에리트레아 국가의 경계는 아프리카 분할 기간 동안 설정되었다. 1869년[105] 또는 1870년에 라헤이타의 술탄은 아사브 만을 둘러싼 땅을 루바티노 해운 회사에 팔았다.[106] 이 지역은 수에즈 운하를 통해 도입된 항로를 따라 석탄 공급소 역할을 했다. 이 지역은 오스만 제국의 하베셰 에야레트의 일부가 될 뻔했지만, 에리트레아 사람들의 저항으로 철수했다.[107] 최초의 이탈리아 정착민들은 1880년에 도착했다.[106]
이후 이집트인들이 마흐디 반란 기간 동안 수단에서 퇴각하면서, 영국은 이집트인들이 에티오피아를 통해 퇴각하는 것을 중재했고, 그 대가로 황제가 터키인 및 이집트인과 분쟁을 겪었던 저지대 지역 점령을 허용했다. 에티오피아의 요하네스 4세는 마사와가 이 지역에 포함되었다고 믿었지만, 영국은 이 항구를 이탈리아인들에게 넘겨주었고, 이탈리아인들은 이미 식민지화된 아사브 항구와 연합하여 해안 이탈리아 소유지를 형성했다. 1889년 요하네스 4세 황제 사후, 이탈리아는 북부 에티오피아의 혼란을 틈타 고지대를 점령하고 에리트레아로 알려진 새로운 식민지를 설립하여 메넬리크 2세의 인정을 받았다.
갈라바트 전투에서 에티오피아 황제 요하네스 4세가 사망한 후, 오레스테 바라티에리 장군은 에리트레아 해안을 따라 고지대를 점령했고, 이탈리아는 이탈리아 왕국(1861–1946)의 식민지인 이탈리아령 에리트레아를 선포했다. 같은 해에 서명된 우찰레 조약에서 쇼아의 메넬리크 2세는 보고스, 하마시엔, 아켈레 구자이, 세라이의 라이벌 영토에 대한 이탈리아 점령을 인정하는 대가로 재정 지원과 유럽 무기 및 탄약에 대한 지속적인 접근을 보장받았다.[51]
1888년 이탈리아 행정부는 식민지에서 첫 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에리트레아 철도는 1888년 사아티까지 완공되었고,[52] 1911년에는 고지대 아스마라에 도달했다.[53] 아스마라-마사와 케이블카는 1937년에 개통되었을 때 세계에서 가장 긴 케이블카였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전쟁 배상으로 영국에 의해 해체되었다. 식민 당국은 주요 사회 기반 시설 외에도 농업 부문에 상당한 투자를 했다. 또한 아스마라와 마사와에 도시 편의 시설을 제공하고 많은 에리트레아인을 공무, 특히 경찰 및 공공 사업 부서에 고용했다.[54]
이탈리아령 에리트레아 행정부는 단추, 식용유, 파스타, 건축 자재, 육류 포장, 담배, 가죽 및 기타 생활 필수품을 생산하는 여러 공장을 열었다. 1939년에는 약 2,198개의 공장이 있었고 대부분의 직원은 에리트레아 시민이었다. 산업 설립은 도시에 거주하는 이탈리아인과 에리트레아인의 수를 증가시켰다. 영토에 거주하는 이탈리아인의 수는 5년 만에 4,600명에서 75,000명으로 증가했고, 에리트레아인이 산업, 무역 및 과일 농장에 참여하면서 국가 전역으로 확대되었으며, 일부 농장은 에리트레아인이 소유했다.[55]
1922년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탈리아에서 권력을 잡으면서 이탈리아령 에리트레아의 식민 정부에 변화가 일어났다. 1936년 5월 이탈리아 제국 선언 후, 이탈리아령 에리트레아(북부 에티오피아 지역 포함)와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는 새로 정복한 에티오피아와 새로운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 행정 구역에 합병되었다. 에리트레아는 이탈리아 정부에 의해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의 산업 중심지로 선택되었다. 에리트레아인의 혁명 투쟁 이후 이탈리아인들은 에리트레아를 떠났다.[56] 이탈리아는 에리트레아에 에리트레아의 로마 가톨릭교의 발전을 가져왔으며, 1940년까지 영토 인구의 거의 3분의 1이 가톨릭 신자였다.
이탈리아 아스마라는 대규모 이탈리아인 공동체가 거주하며 이탈리아 건축 양식을 갖추게 되었다. 아스마라 대통령궁은 1897년 건설된 첫 건물 중 하나이다.[57] 오늘날 아스마라는 아르 데코 시네마 임페로, "큐비스트" 아프리카 펜션, 정교회 대성당, 오페라 하우스, 미래주의 피아트 타글리에로 빌딩, 신 로마네스크 아스마라 성모 로사리오 교회, 신고전주의 총독 궁전 등 20세기 초 이탈리아 건축물로 유명하다.[58] 1939년 아스마라 인구 98,000명 중 53,000명이 이탈리아인이었다.[59]
제2차 세계 대전 발발로 에리트레아 산업화는 중단되었고, 1941년 연합군 점령 과정에서 인프라와 산업 지역이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에티오피아에서의 이탈리아 게릴라전은 1943년 이탈리아 휴전까지 에리트레아 식민지 군대의 지원을 받았다. 이탈리아 에리트레아인들은 에티오피아 합병을 반대하며, 빈센초 디 메글리오 박사의 ''샤라 이탈리아당''을 1947년 설립, 에리트레아 독립을 추구했다.
5. 1. 식민지 설립
오늘날 에리트레아 국가의 경계는 아프리카 분할 기간 동안 설정되었다. 1869년[105] 또는 1870년에 라헤이타의 술탄은 아사브 만을 둘러싼 땅을 루바티노 해운 회사에 팔았다.[106] 이 지역은 수에즈 운하를 통해 도입된 항로를 따라 석탄 공급소 역할을 했다. 이 지역은 오스만 제국의 하베셰 에야레트의 일부가 될 뻔했지만, 에리트레아 사람들의 저항으로 철수했다.[107] 최초의 이탈리아 정착민들은 1880년에 도착했다.[106]이후 이집트인들이 마흐디 반란 기간 동안 수단에서 퇴각하면서, 영국은 이집트인들이 에티오피아를 통해 퇴각하는 것을 중재했고, 그 대가로 황제가 터키인 및 이집트인과 분쟁을 겪었던 저지대 지역 점령을 허용했다. 에티오피아의 요하네스 4세는 마사와가 이 지역에 포함되었다고 믿었지만, 영국은 이 항구를 이탈리아인들에게 넘겨주었고, 이탈리아인들은 이미 식민지화된 아사브 항구와 연합하여 해안 이탈리아 소유지를 형성했다. 1889년 요하네스 4세 황제 사후, 이탈리아는 북부 에티오피아의 혼란을 틈타 고지대를 점령하고 에리트레아로 알려진 새로운 식민지를 설립하여 메넬리크 2세의 인정을 받았다.
갈라바트 전투에서 에티오피아 황제 요하네스 4세가 사망한 후, 오레스테 바라티에리 장군은 에리트레아 해안을 따라 고지대를 점령했고, 이탈리아는 이탈리아 왕국(1861–1946)의 식민지인 이탈리아령 에리트레아를 선포했다. 같은 해에 서명된 우찰레 조약에서 쇼아의 메넬리크 2세는 보고스, 하마시엔, 아켈레 구자이, 세라이의 라이벌 영토에 대한 이탈리아 점령을 인정하는 대가로 재정 지원과 유럽 무기 및 탄약에 대한 지속적인 접근을 보장받았다.[51]
1888년 이탈리아 행정부는 식민지에서 첫 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에리트레아 철도는 1888년 사아티까지 완공되었고,[52] 1911년에는 고지대 아스마라에 도달했다.[53] 아스마라-마사와 케이블카는 1937년에 개통되었을 때 세계에서 가장 긴 케이블카였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전쟁 배상으로 영국에 의해 해체되었다. 식민 당국은 주요 사회 기반 시설 외에도 농업 부문에 상당한 투자를 했다. 또한 아스마라와 마사와에 도시 편의 시설을 제공하고 많은 에리트레아인을 공무, 특히 경찰 및 공공 사업 부서에 고용했다.[54]
이탈리아령 에리트레아 행정부는 단추, 식용유, 파스타, 건축 자재, 육류 포장, 담배, 가죽 및 기타 생활 필수품을 생산하는 여러 공장을 열었다. 1939년에는 약 2,198개의 공장이 있었고 대부분의 직원은 에리트레아 시민이었다. 산업 설립은 도시에 거주하는 이탈리아인과 에리트레아인의 수를 증가시켰다. 영토에 거주하는 이탈리아인의 수는 5년 만에 4,600명에서 75,000명으로 증가했고, 에리트레아인이 산업, 무역 및 과일 농장에 참여하면서 국가 전역으로 확대되었으며, 일부 농장은 에리트레아인이 소유했다.[55]
1922년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탈리아에서 권력을 잡으면서 이탈리아령 에리트레아의 식민 정부에 변화가 일어났다. 1936년 5월 이탈리아 제국 선언 후, 이탈리아령 에리트레아(북부 에티오피아 지역 포함)와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는 새로 정복한 에티오피아와 새로운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 행정 구역에 합병되었다. 에리트레아는 이탈리아 정부에 의해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의 산업 중심지로 선택되었다. 에리트레아인의 혁명 투쟁 이후 이탈리아인들은 에리트레아를 떠났다.[56] 이탈리아는 에리트레아에 에리트레아의 로마 가톨릭교의 발전을 가져왔으며, 1940년까지 영토 인구의 거의 3분의 1이 가톨릭 신자였다.
5. 2. 식민 통치와 근대화
아프리카 분할 동안 오늘날 에리트레아의 국경이 확립되었다. 1869년[48] 또는 1870년에 라헤이타의 술탄이 아사브 만 주변의 토지를 루바티노 해운 회사에 매각하면서[49] 이 지역은 수에즈 운하 개통으로 생긴 해운 항로를 따라 석탄 공급소 역할을 하게 되었다.[49] 1880년 최초의 이탈리아 정착민이 도착했다.[49] 마흐디 반란 동안 이집트가 수단에서 후퇴하고 영국이 중재하여 에티오피아가 저지대를 점령하도록 허용하면서, 영국은 항구를 이탈리아에 넘겨주었다. 이탈리아는 1889년 에티오피아의 요하네스 4세 사후 혼란을 틈타 고지대를 점령, 에리트레아 식민지를 설립하고 메넬리크 2세의 인정을 받았다.갈라바트 전투에서 에티오피아 황제 요하네스 4세가 사망한 후, 오레스테 바라티에리 장군은 에리트레아 해안을 따라 고지대를 점령했고, 이탈리아는 이탈리아 왕국(1861–1946)의 식민지인 이탈리아령 에리트레아를 선포했다. 우찰레 조약을 통해 메넬리크 2세는 보고스, 하마시엔, 아켈레 구자이, 세라이 지역에 대한 이탈리아 점령을 인정하는 대가로 재정 지원과 유럽 무기 및 탄약에 대한 접근을 보장받았다.[51]
1888년 이탈리아는 에리트레아 철도 건설 등 개발 프로젝트를 시작, 1911년 아스마라까지 연결했다.[53] 1937년 개통된 아스마라-마사와 케이블카는 당시 세계 최장이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전쟁 배상으로 영국에 의해 해체되었다. 식민 당국은 농업 투자, 도시 편의 시설 제공, 에리트레아인 공무 고용 등 사회 기반 시설 확충에 힘썼다.[54] 수천 명의 에리트레아인이 군대에 입대하여 이탈리아-터키 전쟁,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등에 참전했다.
이탈리아령 에리트레아 행정부는 단추, 식용유, 파스타, 건축 자재, 육류 포장, 담배, 가죽 등 다양한 공장을 설립했다. 1939년에는 약 2,198개의 공장이 있었고, 대부분 에리트레아 시민이 고용되었다. 산업 설립은 도시 거주 이탈리아인과 에리트레아인 수 증가를 가져왔다. 영토 내 이탈리아인 수는 5년 만에 4,600명에서 75,000명으로 증가했고, 에리트레아인들은 산업, 무역, 과일 농장 등에 참여했다.[55]
1922년 베니토 무솔리니 집권 후, 1936년 이탈리아 제국이 선언되면서 이탈리아령 에리트레아는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 에티오피아와 함께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로 통합되었다. 에리트레아는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의 산업 중심지로 선택되었다.[56] 이탈리아는 에리트레아에 에리트레아의 로마 가톨릭교를 발전시켰고, 1940년까지 인구의 약 3분의 1이 가톨릭 신자였다.
이탈리아 아스마라는 대규모 이탈리아인 공동체가 거주하며 이탈리아 건축 양식을 갖추게 되었다. 아스마라 대통령궁은 1897년 건설된 첫 건물 중 하나이다.[57] 오늘날 아스마라는 아르 데코 시네마 임페로, "큐비스트" 아프리카 펜션, 정교회 대성당, 오페라 하우스, 미래주의 피아트 타글리에로 빌딩, 신 로마네스크 아스마라 성모 로사리오 교회, 신고전주의 총독 궁전 등 20세기 초 이탈리아 건축물로 유명하다.[58] 1939년 아스마라 인구 98,000명 중 53,000명이 이탈리아인이었다.[59]
제2차 세계 대전 발발로 에리트레아 산업화는 중단되었고, 1941년 연합군 점령 과정에서 인프라와 산업 지역이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에티오피아에서의 이탈리아 게릴라전은 1943년 이탈리아 휴전까지 에리트레아 식민지 군대의 지원을 받았다. 이탈리아 에리트레아인들은 에티오피아 합병을 반대하며, 빈센초 디 메글리오 박사의 ''샤라 이탈리아당''을 1947년 설립, 에리트레아 독립을 추구했다.
5. 3. 이탈리아 제국의 확장
1869년[48] 또는 1870년에 라헤이타의 술탄이 아사브 만 주변의 토지를 루바티노 해운 회사에 매각하면서[49] 오늘날 에리트레아 국가의 경계가 확립되기 시작했다. 이 지역은 수에즈 운하 개통으로 생긴 해운 항로를 따라 석탄 공급소 역할을 했다.[49] 오스만 제국의 하베시 에야레트가 이 지역을 차지하려 했으나, 에리트레아인들의 저항으로 실패하고 철수하였다.[50] 1880년에 최초의 이탈리아 정착민이 도착했다.[49]마흐디 반란으로 이집트가 수단에서 후퇴하고, 영국이 이집트의 에티오피아를 통한 후퇴를 중재하면서, 에티오피아의 요하네스 4세는 저지대 점령을 허용받았다. 요하네스 4세는 이것이 마사와를 포함한다고 믿었지만, 영국은 항구를 이탈리아에게 넘겨주었고, 이탈리아는 이미 식민지화된 아세브와 통합하여 해안 이탈리아 소유지를 형성했다. 1889년 요하네스 4세 황제의 죽음 이후, 이탈리아는 북부 에티오피아의 혼란을 틈타 고지대를 점령하고 에리트레아라는 새로운 식민지를 설립, 메넬리크 2세의 인정을 받았다.
갈라바트 전투에서 에티오피아 황제 요하네스 4세가 사망한 후, 오레스테 바라티에리 장군은 에리트레아 해안을 따라 고지대를 점령했고, 이탈리아 왕국(1861–1946)의 식민지인 이탈리아령 에리트레아를 선포했다. 메넬리크 2세는 우찰레 조약을 통해 보고스, 하마시엔, 아켈레 구자이, 세라이 지역에 대한 이탈리아 점령을 인정하고, 재정 지원과 유럽 무기 및 탄약에 대한 지속적인 접근을 보장받았다.[51]
1888년 이탈리아는 에리트레아 철도 건설을 시작하여 1888년에 사아티까지,[52] 1911년에는 고지대의 아스마라까지 완공했다.[53] 1937년에 개통된 아스마라-마사와 케이블카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긴 케이블카였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전쟁 배상으로 영국에 의해 해체되었다. 식민 당국은 농업 부문에 투자하고, 아스마라와 마사와에 도시 편의 시설을 제공했으며, 많은 에리트레아인을 공무, 특히 경찰 및 공공 사업 부서에 고용했다.[54]
이탈리아령 에리트레아 행정부는 단추, 식용유, 파스타, 건축 자재, 육류 포장, 담배, 가죽 및 기타 생활 필수품을 생산하는 여러 공장을 열었다. 1939년에는 약 2,198개의 공장이 있었고, 대부분의 직원은 에리트레아 시민이었다. 산업 설립으로 도시 거주 이탈리아인과 에리트레아인의 수가 증가했다. 영토 내 이탈리아인 수는 5년 만에 4,600명에서 75,000명으로 증가했고, 에리트레아인들은 산업, 무역, 과일 농장에 참여했다.[55]
1922년 베니토 무솔리니 집권 이후, 1936년 이탈리아 제국이 선언되면서 이탈리아령 에리트레아는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 에티오피아와 함께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로 합병되었다. 에리트레아는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의 산업 중심지로 선택되었다.[56] 이탈리아는 에리트레아에 에리트레아의 로마 가톨릭교를 발전시켰고, 1940년에는 인구의 거의 3분의 1이 가톨릭 신자였다.
6. 독립 투쟁
에티오피아의 에리트레아 병합에 대한 무력 저항은 1958년 에리트레아 해방 운동(ELM, , )의 창설과 함께 시작되었다.[66] 이 단체는 주로 학생, 지식인, 도시 임금 노동자로 구성되었으며, 하미드 이드리스 아와테의 지도 아래 에티오피아 제국의 중앙집권화 정책에 저항하는 비밀 정치 활동을 했다.[66] 그러나 1962년 ELM은 제국 당국에 의해 발각되어 파괴되었다.[66]
1960년 카이로에 망명한 에리트레아인들은 에리트레아 해방 전선(ELF)을 창설했다.[66] ELM과 달리 ELF는 처음부터 에리트레아 독립을 위한 무장 투쟁을 목표로 했다.[66] ELF는 주로 에리트레아 서부 저지대 출신 무슬림으로 구성되었으며, 시리아와 이라크 등 아랍 국가들의 군사적, 재정적 지원을 받았다.[66]
1961년 ELF는 군사 작전을 시작했고, 1962년 에리트레아 의회가 해산되고 에티오피아가 에리트레아를 강제 합병하자 활동을 강화했다.[66] 1967년까지 ELF는 에리트레아 북부와 서부, 마사와 항구 도시 주변에서 상당한 지지를 얻었다.[66]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에리트레아 주민들에게 동등한 대우를 약속하며 불안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제국 비밀 경찰은 정보망을 구축하고 실종, 협박, 암살을 자행하며 저명한 정치 인물들을 망명으로 몰아넣었다.[66] 제국 경찰은 학생 시위대에 실탄을 발사해 많은 젊은이들을 살해했고, 제국군은 1974년 데르그에 의해 황제가 축출될 때까지 학살을 자행했다.[66]
1971년, ELF의 활동이 위협적인 수준에 이르자 황제는 에리트레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에티오피아 군대의 절반 가량을 배치했다.[66] 전략과 전술에 대한 내부 분쟁으로 1972년 에리트레아 인민 해방 전선(EPLF)이 창설되었다.[66] 이 다민족 운동은 티그리냐어를 사용하는 좌익 기독교 반체제 인사들이 주도했으며, 1972년부터 1974년까지 ELF와 EPLF 간에 산발적인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66] 1970년대 후반, EPLF는 에티오피아 정부에 맞서는 주요 무장 단체가 되었고, 이사야스 아페웨르키가 지도자로 부상했다.[66]
1977년 EPLF는 에티오피아군을 몰아낼 준비가 된 듯 보였으나, 소련의 무기 지원으로 에티오피아군이 주도권을 되찾았다.[66] 1978년부터 1986년까지 데르그는 8번의 주요 공세를 펼쳤지만 실패했다.[66] 1988년 EPLF는 아파벳을 점령하여 에티오피아군 3분의 1을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고, 에티오피아군을 에리트레아 서부 저지대에서 철수시켰다.[66] 한편, 에티오피아 전역에서 다른 반체제 운동들이 진전되고 있었고, 1980년대 말 소련은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에게 국방 및 협력 협정 갱신 불가 방침을 통보했다.[66] 소련의 지원 중단으로 에티오피아군 사기가 저하되자, EPLF는 다른 에티오피아 반군과 함께 진격했다.[66]
미국은 1991년 멩기스투 정권 붕괴 직전 평화 회담을 중재했다.[67] 멩기스투는 짐바브웨로 망명했고, EPLF는 에리트레아를 장악했다.[67] 미국은 런던 회담을 주재하여 전쟁 종식을 공식화했고, 에티오피아 과도 정부는 에리트레아 독립 국민 투표를 인정했다.[68] EPLF는 마르크스주의를 포기하고 민주 정부와 자유 시장 경제 수립 의지를 표명했으며, 미국은 민주주의와 인권 진전을 조건으로 지원을 약속했다.[68]
1991년 5월, EPLF는 에리트레아 임시 정부(PGE)를 설립하고, 이사야스 아페웨르키를 수장으로 임명했다.[68] 1993년 4월 23일부터 25일까지 국민 투표가 실시되었고, 99.83%의 찬성으로 독립이 가결되었다.[68] 1993년 4월 27일, 에리트레아는 독립 국가로 선포되었고, EPLF는 민주주의 정의 전선(PFDJ)으로 재편되었다.[68]
6. 1. 에리트레아 해방 운동 (ELM)
1958년 학생, 지식인, 도시 임금 노동자들이 주축이 된 에리트레아 해방 운동(ELM)이 설립되면서 에티오피아의 에리트레아 병합에 대한 저항이 시작되었다.[108] 에리트레아의 하미드 이드리스 아와테가 이끄는 ELM은 에티오피아 제국의 중앙집권화 정책에 저항하기 위한 비밀 정치 활동을 했다. 그러나 1962년 ELM은 제국 당국에 의해 발견되고 파괴되었다.[66]1960년 카이로의 에리트레아 망명자들은 에리트레아 해방전선(ELF)을 창설했다. ELF는 처음부터 에리트레아 독립을 위해 무장 투쟁을 수행하는 데 전념했다. ELF는 주로 영토의 서쪽 가장자리에 있는 시골 저지대 출신의 에리트레아 무슬림들로 구성되었다. 1961년 ELF의 정치적 성격은 모호했지만 시리아와 이라크와 같은 급진적인 아랍 국가들은 에리트레아를 에티오피아의 억압과 제국주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무슬림 지역으로 보았다. 따라서 이 두 나라는 ELF에 군사적, 재정적 지원을 제공했다.[66]
ELF는 1961년 군사 작전을 시작했고 1962년 연방의 해체에 대응하여 활동을 강화했다. 1967년까지 ELF는 특히 에리트레아의 북쪽과 서쪽, 항구 도시 마사와 주변의 농민들 사이에서 상당한 지지를 얻었다. 하일레 셀라시에는 에리트레아를 방문하여 주민들이 새로운 협정 하에서 동등한 대우를 받을 것이라고 보장함으로써 증가하는 불안을 진정시키려고 시도했다. 그는 1967년 초 에리트레아의 반대자가 될 사람들을 공동으로 선택하기를 희망하여 주로 기독교의 고지인들에게 사무실, 돈, 작위를 나누어 주었지만, 에티오피아의 비밀경찰은 또한 에리트레아에 광범위한 정보원 네트워크를 설치하고 여러 명의 저명한 사람들을 이끌며 실종, 협박, 암살을 수행했다. 정계 인사들을 귀양 보내다[66] 제국 경찰은 이 시기 아스마라에서 학생들의 시위가 벌어지는 동안 수십 명의 젊은이들을 실탄으로 살해했다. 제국군은 또한 1974년 데르그에 의해 황제가 축출될 때까지 적극적으로 학살을 자행했다.[66]
1971년까지 ELF의 활동은 황제가 에리트레아에 계엄령을 선포한 것으로 충분했다. 그는 에티오피아 군대의 약 절반을 전투를 진압하기 위해 배치했다. 전략과 전술에 대한 내부 분쟁은 결국 ELF의 분열과 1972년 에리트레아 인민해방전선(EPLF)의 창설로 이어졌다. 이 다민족 운동의 지도력은 에리트레아의 주요 언어인 티그리냐어를 사용하는 좌파, 기독교 반체제 인사들에 의해 지배되었다. 1972년부터 1974년까지 에티오피아군과 교전하면서도 산발적인 무력 충돌이 이어졌다. 1970년대 후반, EPLF는 에티오피아 정부에 맞서 싸우는 에리트레아의 지배적인 무장 단체가 되었고,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가 그 지도자로 부상했다. 에티오피아와 싸우는 데 사용된 많은 물질들은 군대에서 포획되었다.[66]
1977년까지 EPLF는 에티오피아인들을 에리트레아에서 몰아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같은 해 소련군이 에티오피아로 대규모 무기를 공수하면서 에티오피아군은 주도권을 되찾았고 EPLF는 덤불로 후퇴했다. 1978년과 1986년 사이에 데르그는 독립운동에 대한 8개의 주요 공세를 시작했다. 1988년 EPLF는 에티오피아군의 사령부인 아파벳을 점령하여 에티오피아군의 약 3분의 1을 작전에서 벗어나게 하였고 에티오피아군은 에리트레아 서부 저지대의 주둔지에서 철수하게 하였다. EPLF 전투기들은 에리트레아의 두 번째로 큰 도시인 케렌 근처로 이동했다. 한편, 다른 반체제 운동들은 에티오피아 전역에서 진전을 보이고 있었다. 1980년대 말, 소련은 멩기스투에게 국방 및 협력 협정을 갱신하지 않을 것이라고 통보했다. 소련군의 지원과 보급품이 철수하면서 에티오피아군의 사기는 곤두박질쳤고, EPLF는 다른 에티오피아 반군과 함께 에티오피아 진지로 진격하기 시작했다.[66]
6. 2. 에리트레아 해방 전선 (ELF)
1958년 학생, 지식인, 도시 임금 노동자들이 주축이 된 에리트레아 해방 운동(ELM)이 설립되면서 에티오피아의 에리트레아 병합에 대한 저항이 시작되었다.[108][66] 하미드 이드리스 아와테가 이끄는 ELM은 에티오피아 제국의 중앙집권화 정책에 저항하기 위한 비밀 정치 활동을 했다. 그러나 1962년 ELM은 제국 당국에 의해 발견되고 파괴되었다.1960년 카이로의 에리트레아 망명자들은 에리트레아 해방전선(ELF)을 창설했다. ELM과 대조적으로, ELF는 처음부터 에리트레아 독립을 위해 무장 투쟁을 수행하는 데 전념했다. ELF는 주로 영토의 서쪽 가장자리에 있는 시골 저지대 출신의 에리트레아 무슬림들로 구성되었다. 1961년 ELF의 정치적 성격은 모호했지만 시리아와 이라크와 같은 급진적인 아랍 국가들은 에리트레아를 에티오피아의 억압과 제국주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무슬림 지역으로 보았다. 따라서 이 두 나라는 ELF에 군사적, 재정적 지원을 제공했다.[108][66]
ELF는 1961년 군사 작전을 시작했고 1962년 연방의 해체에 대응하여 활동을 강화했다. 1967년까지 ELF는 특히 에리트레아의 북쪽과 서쪽, 항구 도시 마사와 주변의 농민들 사이에서 상당한 지지를 얻었다. 하일레 셀라시에는 에리트레아를 방문하여 주민들이 새로운 협정 하에서 동등한 대우를 받을 것이라고 보장함으로써 증가하는 불안을 진정시키려고 시도했다. 그는 1967년 초 에리트레아의 반대자가 될 사람들을 공동으로 선택하기를 희망하여 주로 기독교의 고지인들에게 사무실, 돈, 작위를 나누어 주었지만, 에티오피아의 비밀경찰은 또한 에리트레아에 광범위한 정보원 네트워크를 설치하고 여러 명의 저명한 정계 인사들을 실종, 협박, 암살을 통해 귀양 보냈다. 제국 경찰은 이 시기 아스마라에서 학생들의 시위가 벌어지는 동안 수십 명의 젊은이들을 실탄으로 살해했다. 제국군은 또한 1974년 데르그에 의해 황제가 축출될 때까지 적극적으로 학살을 자행했다.[108][66]
1971년까지 ELF의 활동은 황제가 에리트레아에 계엄령을 선포한 것으로 충분했다. 그는 에티오피아 군대의 약 절반을 전투를 진압하기 위해 배치했다. 전략과 전술에 대한 내부 분쟁은 결국 ELF의 분열과 1972년 에리트레아 인민해방전선(EPLF)의 창설로 이어졌다.[108][66]
6. 3. 에리트레아 인민 해방 전선 (EPLF)
1971년 에리트레아 해방전선(ELF)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에리트레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에티오피아 군대의 절반 가량을 투입하여 진압을 시도했다.[66] ELF 내부의 전략 및 전술 분쟁은 1972년 에리트레아 인민 해방 전선(EPLF)의 창설로 이어졌다.[66] EPLF는 티그리냐어를 사용하는 좌파 기독교 반체제 인사들이 주도하는 다민족 운동이었다.[66] 1972년부터 1974년까지 ELF와 EPLF는 에티오피아군과의 전투와는 별개로 산발적인 무력 충돌을 벌였다.[66] 1970년대 후반, EPLF는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의 지도 하에 에티오피아에 맞서는 주도적인 에리트레아 무장 단체로 성장했다.[66]
1977년, EPLF는 에티오피아군을 에리트레아에서 몰아낼 준비가 된 듯 보였다.[66] 그러나 소련이 에티오피아에 대규모 무기를 지원하면서 에티오피아군이 주도권을 되찾았고, EPLF는 후퇴해야 했다.[66] 1978년부터 1986년까지 데르그는 독립운동에 맞서 8차례의 주요 공세를 펼쳤으나 실패했다.[66] 1988년, EPLF는 아파벳을 점령하여 에티오피아군의 상당수를 무력화시키고 에티오피아군을 에리트레아 서부 저지대에서 철수시켰다.[66] 이후 EPLF는 케렌 인근으로 이동했다.[66] 한편, 에티오피아 전역에서 다른 반체제 운동들이 진전하면서, 1980년대 말 소련은 멩기스투에게 군사 지원 중단을 통보했다.[66] 소련의 지원 중단으로 에티오피아군의 사기가 저하되자, EPLF는 다른 에티오피아 반군 세력과 함께 에티오피아군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다.[66] 1980년 상설 인민 법정은 에리트레아 국민의 자기 결정권이 분리주의를 의미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108]
6. 4. 독립 쟁취
에리트레아가 에티오피아에 병합되는 것에 대한 무력 저항은 1958년 에리트레아 해방 운동(ELM)의 창설과 함께 시작되었다.[66] 이 단체는 주로 학생, 지식인, 도시 임금 노동자로 구성되었으며, 하미드 이드리스 아와테의 지도 아래 에티오피아 제국의 중앙집권화 정책에 저항하는 비밀 정치 활동을 했다.[66] 그러나 1962년 ELM은 제국 당국에 의해 발각되어 파괴되었다.[66]1960년 카이로에 망명한 에리트레아인들은 에리트레아 해방 전선(ELF)을 창설했다.[66] ELM과 달리 ELF는 처음부터 에리트레아 독립을 위한 무장 투쟁을 목표로 했다.[66] ELF는 주로 에리트레아 서부 저지대 출신 무슬림으로 구성되었으며, 시리아와 이라크 등 아랍 국가들의 군사적, 재정적 지원을 받았다.[66]
1961년 ELF는 군사 작전을 시작했고, 1962년 에리트레아 의회가 해산되고 에티오피아가 에리트레아를 강제 합병하자 활동을 강화했다.[66] 1967년까지 ELF는 에리트레아 북부와 서부, 마사와 항구 도시 주변에서 상당한 지지를 얻었다.[66]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에리트레아 주민들에게 동등한 대우를 약속하며 불안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제국 비밀 경찰은 정보망을 구축하고 실종, 협박, 암살을 자행하며 저명한 정치 인물들을 망명으로 몰아넣었다.[66] 제국 경찰은 학생 시위대에 실탄을 발사해 많은 젊은이들을 살해했고, 제국군은 1974년 데르그에 의해 황제가 축출될 때까지 학살을 자행했다.[66]
1971년, ELF의 활동이 위협적인 수준에 이르자 황제는 에리트레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에티오피아 군대의 절반 가량을 배치했다.[66] 전략과 전술에 대한 내부 분쟁으로 1972년 에리트레아 인민 해방 전선(EPLF)이 창설되었다.[66] 이 다민족 운동은 티그리냐어를 사용하는 좌익 기독교 반체제 인사들이 주도했으며, 1972년부터 1974년까지 ELF와 EPLF 간에 산발적인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66] 1970년대 후반, EPLF는 에티오피아 정부에 맞서는 주요 무장 단체가 되었고, 이사야스 아페웨르키가 지도자로 부상했다.[66]
1977년 EPLF는 에티오피아군을 몰아낼 준비가 된 듯 보였으나, 소련의 무기 지원으로 에티오피아군이 주도권을 되찾았다.[66] 1978년부터 1986년까지 데르그는 8번의 주요 공세를 펼쳤지만 실패했다.[66] 1988년 EPLF는 아파벳을 점령하여 에티오피아군 3분의 1을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고, 에티오피아군을 에리트레아 서부 저지대에서 철수시켰다.[66] 한편, 에티오피아 전역에서 다른 반체제 운동들이 진전되고 있었고, 1980년대 말 소련은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에게 국방 및 협력 협정 갱신 불가 방침을 통보했다.[66] 소련의 지원 중단으로 에티오피아군 사기가 저하되자, EPLF는 다른 에티오피아 반군과 함께 진격했다.[66]
미국은 1991년 멩기스투 정권 붕괴 직전 평화 회담을 중재했다.[67] 멩기스투는 짐바브웨로 망명했고, EPLF는 에리트레아를 장악했다.[67] 미국은 런던 회담을 주재하여 전쟁 종식을 공식화했고, 에티오피아 과도 정부는 에리트레아 독립 국민 투표를 인정했다.[68] EPLF는 마르크스주의를 포기하고 민주 정부와 자유 시장 경제 수립 의지를 표명했으며, 미국은 민주주의와 인권 진전을 조건으로 지원을 약속했다.[68]
1991년 5월, EPLF는 에리트레아 임시 정부(PGE)를 설립하고, 이사야스 아페웨르키를 수장으로 임명했다.[68] 1993년 4월 23일부터 25일까지 국민 투표가 실시되었고, 99.83%의 찬성으로 독립이 가결되었다.[68] 1993년 4월 27일, 에리트레아는 독립 국가로 선포되었고, EPLF는 민주주의 정의 전선(PFDJ)으로 재편되었다.[68]
7. 독립 이후
에리트레아의 초대 대통령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는 1993년 이래로 에리트레아를 권위적으로 통치하고 있다. 민주정의인민전선은 유일한 합법 정당이다.[109]
1996년 7월 에리트레아 헌법이 비준되었으나 아직 시행되지 않았다.
1998년, 바드메 마을을 둘러싼 에티오피아와의 국경 분쟁은 에티오피아-에리트레아 전쟁으로 이어졌고, 이로 인해 양국 군인 수천 명이 사망했다. 에리트레아는 대규모 인구 이동, 경제 개발 감소, 아프리카에서 가장 심각한 지뢰 문제 중 하나를 포함하여 상당한 경제적, 사회적 스트레스를 받았다.
국경 전쟁은 2000년 알제 협정의 체결로 끝났다. 협정의 조건 중에는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에 유엔 사절단(UNMEE)으로 알려진 유엔 평화유지 활동을 설립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유엔은 에리트레아 내에 25km의 비무장 완충지대로 구성된 임시 안보구역을 설정했으며, 두 국가 사이의 분쟁 중인 국경의 길이를 따라 이어져 유엔군에 의해 순찰되었다. 에티오피아는 1998년 5월에 적대 행위가 발생하기 전의 위치로 철수하기로 되어 있었다. 알제 협정은 에리트레아와 에티오피아 사이의 분쟁 지역을 에리트레아-에티오피아 국경 위원회(EEBC)로 알려진 독립적인 유엔 산하 기구의 지정에 의해 최종적으로 경계선을 정할 것을 요구했다. 이번 평화협정은 국경위원회의 판결 이행과 함께 마무리돼 평화유지 임무도 종료된다. 광범위한 연구 끝에 위원회는 2002년 4월 최종 국경 판결을 발표하여 양측에 일부 영토를 부여했지만, 바드메(분쟁의 발화점)는 에리트레아에 수여되었다. 위원회의 결정은 에티오피아에 의해 거부되었다. 국경 문제는 에티오피아가 바드메를 포함한 분쟁 지역에서 군대를 철수시키기를 거부하는 등 여전히 논쟁 중이며, "어려운" 평화가 유지되고 있다.
UNMEE의 임무는 연료 공급 중단 이후 군대를 유지하는 데 심각한 어려움을 겪은 후 2008년 7월 공식적으로 중단되었다.
또한 에리트레아와 지부티의 국교는 1998년 에티오피아와의 국경전쟁 때 지부티와의 친밀한 관계를 둘러싼 분쟁으로 잠시 단절되었다가 2000년에 복구되어 정상화되었다. 국경 분쟁이 재개되면서 관계가 다시 긴장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에리트레아와 예멘은 1996년부터 1998년까지 하니시 제도와 해상 국경을 둘러싸고 국경 분쟁을 벌였으며, 2000년 헤이그의 상설중재법원에 의해 해결되었다.
에리트레아는 의료 서비스를 향상시켰고, 건강, 특히 어린이 건강에 대한 밀레니엄 개발 목표(MDG)를 달성하기 위해 궤도에 올랐다.[110] 출생 시 기대 수명은 1960년 39.1세에서 2008년 59.5세로 증가했다. 모자 사망률은 극적으로 감소하고 의료 인프라는 확장되었다.[110]
면역과 어린이 영양은 학교와 다분야 접근법으로 긴밀하게 협력함으로써 해결되었다. 홍역 예방 접종을 받은 어린이의 수는 1995년 40.7%에서 2002년 78.5%로 7년 만에 거의 두 배가 되었고 저체중 어린이의 유병률은 1995년에서 2002년까지 12% 감소했다(심각한 저체중 유병률은 28%).[110] 보건부의 국가 말라리아 보호 유닛은 1998년과 2006년 사이에 말라리아 사망률이 85%, 사례 수가 92% 감소했다고 등록했다.[110] 에리트레아 정부는 여성 성기 절제(FGM)이 고통스럽고 여성을 생명을 위협하는 건강 문제의 위험에 처하게 한다면서 이를 금지했다.[111][110] 말라리아와 결핵은 흔하다.[112] 15세에서 49세 사이의 HIV 유병률은 2%를 넘는다.[112]
에티오피아와의 교착 상태에 빠진 평화 과정에 대한 좌절감 때문에, 에리트레아의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 대통령은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와 코피 아난 사무총장에게 일련의 11개의 편지를 썼다. 알제 협정에도 불구하고, 에티오피아와의 긴장된 관계는 계속되었고 지역의 불안정으로 이어졌다. 그의 정부는 또한 소말리아의 반란군을 무장시키고 자금을 대는 혐의로 비난을 받았다. 미국은 에리트레아를 "테러 지원국"으로 지정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113][114]
2007년 12월, 약 4,000명의 에리트레아군이 '비무장지대'에 남았고, 국경을 따라 120,000명이 추가되었다. 에티오피아는 10만 명의 병력을 주둔시켰다.
2012년 9월, 이스라엘의 《하아레츠》 신문은 에리트레아에 대한 폭로 기사를 실었다. 이스라엘에는 40,000명 이상의 에리트레아 난민들이 있다. 국경 없는 기자회는 2007년부터 에리트레아를 표현의 자유에서 북한보다 더 낮은 최하위로 평가했다.[115]
2013년 에리트레아 군대 반란은 2013년 1월 21일에 발생했으며, 수도 아스마라에 주둔한 약 100~200명의 에리트레아군이 잠시 국영 방송국인 에리TV의 본부를 점거하고 개혁과 정치범 석방을 요구하는 메시지를 방송했다.[116] 2013년 2월 10일,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 대통령은 반란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117]
2018년 9월,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 대통령과 에티오피아의 아비 아머드 총리는 양국 간의 역사적인 평화 협정에 서명했다.[118]
7. 1. 정치 체제
에리트레아의 초대 대통령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는 1993년 에리트레아 독립 국민 투표를 통해 독립한 이래로 에리트레아를 통치하고 있다.[109] 민주정의인민전선은 유일한 합법 정당이다.[109] 1996년 7월 에리트레아 헌법이 비준되었으나 아직 시행되지 않고 있다.[69]1991년 5월, 에리트레아 인민해방전선(EPLF)은 에리트레아 임시정부(PGE)를 수립하고,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를 PGE의 수장으로, EPLF 중앙 위원회를 입법 기관으로 삼았다. 1993년 4월 23일부터 25일까지 UN 감시 하에 실시된 국민 투표에서 에리트레아인들은 99.83%의 압도적인 지지로 독립을 선택했다. 1993년 4월 27일 에리트레아는 독립 국가로 선포되었고, 정부 개편을 통해 국민 의회는 EPLF 및 비EPLF 구성원을 포함하도록 확대되었다. 의회는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를 대통령으로 선출했으며, EPLF는 민주주의 정의 전선(PFDJ)이라는 정당으로 재편되었다.[68]
1998년 바드메 마을을 둘러싼 에티오피아와의 국경 분쟁은 에티오피아-에리트레아 전쟁으로 이어졌고, 양국에서 수천 명의 군인이 사망했다.[69] 이 전쟁으로 에리트레아는 대규모 인구 이동, 경제 개발 감소, 심각한 지뢰 문제 등 경제적, 사회적 어려움을 겪었다.[69] 2000년 알제 협정 체결로 전쟁은 종식되었고, 에티오피아-에리트레아 유엔 평화 유지 임무(UNMEE)가 설립되어 4,000명 이상의 유엔 평화 유지군이 배치되었다. 유엔은 에리트레아 내에 25km 길이의 비무장 지대를 설치하고, 에티오피아는 1998년 5월 이전 위치로 철수하기로 합의했다. 알제 협정은 에리트레아-에티오피아 국경 위원회(EEBC)를 통해 분쟁 지역의 국경을 최종 확정하도록 요구했다.[69] 2002년 4월, 위원회는 바드메를 에리트레아에 귀속시키는 최종 국경 판결을 발표했지만, 에티오피아는 이를 거부했다. 국경 문제는 여전히 분쟁 중이며, 에티오피아는 바드메를 포함한 분쟁 지역에서 군대 철수를 거부하고 있다.[69] UNMEE 임무는 2008년 7월 공식적으로 중단되었다.[69]
에리트레아는 지부티, 예멘과도 국경 분쟁을 겪었으나, 상설중재재판소 등을 통해 해결되었다.[69]
에리트레아는 보건 분야에서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다. 출생 시 기대 수명이 증가하고, 모성 및 아동 사망률이 감소했으며, 예방 접종률 증가와 말라리아, 결핵 등 질병 관리에도 성과를 보였다.[70] 에리트레아 정부는 여성 할례를 금지했다.[71][70]
에티오피아와의 평화 과정 교착, 소말리아 반군 지원 혐의 등으로 에리트레아는 국제 사회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73][74] 미국은 에리트레아를 "테러 지원 국가"로 지정하는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73][74] 2013년에는 군대 반란이 발생하기도 했다.[77] 2018년 9월,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 대통령과 에티오피아 총리는 양국 간의 평화 협정에 서명했다.[79]
7. 2. 에티오피아와의 관계
에리트레아는 1993년 에티오피아로부터 독립한 이후, 민주정의인민전선과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 대통령의 권위주의 통치하에 놓여있다.[109] 1996년에 헌법이 비준되었으나 시행되지 않고 있다.[109]1998년에는 바드메 지역을 둘러싼 국경 분쟁이 에티오피아-에리트레아 전쟁으로 비화되었다.[109] 이 전쟁으로 양국 군인 수천 명이 사망하고, 에리트레아는 인구 이동, 경제 개발 감소, 심각한 지뢰 문제 등 경제적, 사회적 어려움을 겪었다.[109]
2000년 알제 협정 체결로 전쟁은 종식되었고, 유엔 에티오피아-에리트레아 임무단(UNMEE)이 설치되어 25km의 비무장 완충지대를 감시했다.[109] 협정은 에리트레아-에티오피아 국경 위원회(EEBC)를 통해 분쟁 지역의 경계를 확정하도록 요구했고, 2002년 4월 위원회는 바드메를 에리트레아에 귀속시키는 판결을 내렸다.[109] 그러나 에티오피아는 이 판결을 거부하고 군대 철수를 거부하여 "어려운" 평화가 유지되었다.[109] UNMEE는 2008년 7월 연료 공급 중단으로 임무를 종료했다.[109]
에리트레아는 지부티, 예멘과도 국경 분쟁을 겪었다.[109] 지부티와는 1998년 에티오피아와의 전쟁 중 관계가 단절되었다가 2000년에 복원되었으나, 국경 분쟁으로 다시 긴장이 고조되었다.[109] 예멘과는 1996년부터 1998년까지 하니시 제도와 해상 국경을 두고 분쟁을 벌였으며, 2000년 상설중재법원의 판결로 해결되었다.[109]
에티오피아와의 평화 과정이 교착 상태에 빠지면서,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 대통령은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와 코피 아난 사무총장에게 여러 차례 서한을 보냈다.[109] 에티오피아와의 긴장은 지역 불안정으로 이어졌고, 에리트레아 정부는 소말리아 반군 지원 혐의로 비난받았다.[109] 미국은 에리트레아를 "테러 지원국"으로 지정하는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113][114]
2007년 12월, 약 4,000명의 에리트레아군이 비무장지대에 주둔했고, 국경에는 12만 명이 추가 배치되었다.[109] 에티오피아도 10만 명의 병력을 주둔시켰다.[109]
2008년 1월, 유엔은 에티오피아-에리트레아 국경의 평화 유지군 임무를 6개월 연장했다.[86]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에리트레아에 연료 제한 해제를 요구했으나, 에리트레아는 거부했다.[86] 2008년 2월, 유엔은 연료 부족으로 평화 유지군을 철수하기 시작했고, 4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새로운 전쟁 가능성을 경고했다.[86] 2008년 5월, 에리트레아는 유엔에 평화 유지 임무 종료를 요청했다.[86]
지부티-에리트레아 국경 분쟁과 관련하여, 2008년 4월 지부티는 에리트레아군이 라스 두메이라 국경 지역에 참호를 파고 지부티 영토를 침투했다고 비난했다.[87] 2008년 6월에는 양국 군대 간 교전이 발생했다.[88] 2009년 12월,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에리트레아에 제재를 가했다.[89] 2010년 6월, 지부티와 에리트레아는 카타르에 중재를 의뢰하기로 합의했다.[91] 2017년 6월, 카타르는 평화 유지군을 철수시켰고, 지부티는 에리트레아가 두메이라 섬을 점령했다고 비난했다.[92]
소말리아 남부와 관련하여, 2009년 12월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에리트레아가 소말리아 민병대에 무기를 제공한다는 혐의로 제재를 가했다.[93][94] 그러나 2012년 7월, 유엔 감시단은 직접적인 지원 증거를 찾지 못했다고 보고했다.[95]
2018년 9월,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 대통령과 에티오피아의 아비 아머드 총리는 양국 간의 역사적인 평화 협정에 서명했다.[118]
2020년 11월 이후, 에리트레아는 티그라이 전쟁에 연루되었다.[109]
7. 3. 주변국과의 관계
에리트레아의 초대 대통령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는 1993년 독립 이후 에리트레아를 권위적으로 통치하고 있으며, 민주정의인민전선이 유일한 합법 정당이다.[109]1998년, 바드메 마을을 둘러싼 에티오피아와의 국경 분쟁은 에티오피아-에리트레아 전쟁으로 이어졌고, 양국 군인 수천 명이 사망했다.[86] 에리트레아는 대규모 인구 이동, 경제 개발 감소, 심각한 지뢰 문제 등 상당한 경제적, 사회적 스트레스를 겪었다. 전쟁은 2000년 알제 협정 체결로 종결되었으며,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에 유엔 사절단(UNMEE)이 설립되어 25km의 비무장 완충지대인 임시 안보구역을 순찰했다. 에리트레아-에티오피아 국경 위원회(EEBC)는 2002년 4월 최종 국경 판결을 발표, 바드메를 에리트레아에 귀속시켰으나 에티오피아는 이를 거부했다.[86] 에티오피아가 바드메를 포함한 분쟁 지역에서 군대 철수를 거부하면서 국경 문제는 여전히 논쟁 중이며, UNMEE의 임무는 2008년 7월 공식적으로 중단되었다.[86]
에리트레아와 지부티의 국교는 1998년 에티오피아와의 국경 전쟁 때 지부티와의 친밀한 관계를 둘러싼 분쟁으로 잠시 단절되었다가 2000년에 복구되어 정상화되었으나, 국경 분쟁이 재개되면서 관계가 다시 긴장되고 있다. 예멘과는 1996년부터 1998년까지 하니시 제도와 해상 국경을 둘러싸고 국경 분쟁을 벌였으며, 2000년 헤이그의 상설중재법원에 의해 해결되었다.
2007년 9월, 노르웨이의 킬 마그네 본데비크 아프리카의 뿔에 대한 유엔 특별 대사는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 간의 국경 분쟁으로 전쟁이 재개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86] 2008년 1월,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에티오피아-에리트레아 국경에 주둔한 평화 유지군의 임무를 6개월 연장했고, 에리트레아는 병력이 국경을 떠나야 한다며 거부했다.[86] 2008년 4월, 유엔 사무총장 반기문은 평화 유지 임무가 완전히 철수될 경우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 간의 새로운 전쟁 가능성을 경고했다.[86]
지부티-에리트레아 국경 분쟁과 관련하여, 2008년 4월 지부티는 에리트레아군이 분쟁 중인 라스 두메이라 국경 지역에 참호를 파고 지부티 영토를 침투했다고 비난했고, 에리트레아는 이를 부인했다.[87] 2008년 6월, 양국 군 간에 교전이 발생했다.[88] 2009년 12월,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에리트레아에 제재를 가했다.[89] 2010년 6월, 지부티와 에리트레아는 분쟁을 카타르에 중재를 의뢰하기로 합의했다.[91] 2017년 6월, 2017년 카타르 외교 위기 이후 카타르가 평화 유지군을 철수시키자, 지부티는 에리트레아가 본토 언덕과 두메이라 섬을 재점령했다고 비난했다.[92]
소말리아 남부와 관련하여, 2009년 12월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에리트레아가 소말리아 남부 분쟁 지역의 민병대 그룹에 무기를 제공하고 재정적 지원을 제공한다는 혐의로 제재를 가했다.[93][94] 2012년 7월 16일, 유엔 감시단은 "지난 1년간 민병대 그룹에 대한 에리트레아의 직접적인 지원 증거를 찾지 못했다"고 보고했다.[95]
2020년 11월 이후, 에리트레아는 티그라이 전쟁에 연루되었다(티그라이 전쟁에서의 에리트레아의 역할 참조).
7. 4. 경제 및 사회 발전
에리트레아의 초대 대통령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는 1993년 이래로 에리트레아를 권위적으로 통치하고 있으며, 민주정의인민전선은 유일한 합법 정당이다.[109] 1996년 7월 에리트레아 헌법이 비준되었으나 아직 시행되지 않았다.1998년, 바드메 마을을 둘러싼 에티오피아와의 국경 분쟁은 에티오피아-에리트레아 전쟁으로 이어졌다.[69] 이 전쟁으로 양국 군인 수천 명이 사망했고, 에리트레아는 대규모 인구 이동, 경제 개발 감소, 아프리카에서 가장 심각한 지뢰 문제 중 하나를 포함하여 상당한 경제적, 사회적 스트레스를 받았다.
2000년 알제 협정의 체결로 국경 전쟁은 종식되었지만, 에티오피아가 에리트레아-에티오피아 국경 위원회(EEBC)의 판결을 거부하면서 분쟁은 계속되었다.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에 유엔 사절단(UNMEE)의 임무는 2008년 7월 공식적으로 중단되었다.[75]
에리트레아는 지부티, 예멘과도 국경 분쟁을 겪었으나, 상설중재법원을 통해 해결되었다.
에리트레아는 의료 서비스를 향상시켰고, 건강, 특히 어린이 건강에 대한 새천년 개발 목표(MDG)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했다.[110] 출생 시 기대 수명은 1960년 39.1세에서 2008년 59.5세로 증가했고, 모자 사망률은 극적으로 감소했으며, 의료 인프라는 확장되었다.[110] 홍역 예방 접종을 받은 어린이의 수는 1995년 40.7%에서 2002년 78.5%로 증가했고, 저체중 어린이 유병률은 감소했다.[110] 말라리아 사망률과 사례 수도 크게 감소했다.[110] 에리트레아 정부는 여성 성기 절제(FGM)을 금지했다.[111][110] 그러나 말라리아와 결핵은 여전히 흔하며, 15세에서 49세 사이의 HIV 유병률은 2%를 넘는다.[112]
에티오피아와의 교착 상태는 지역 불안정으로 이어졌고, 미국은 에리트레아를 "테러 지원국"으로 지정하는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113][114] 2013년에는 에리트레아 육군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116] 2018년 9월,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 대통령과 에티오피아의 아비 아머드 총리는 양국 간의 역사적인 평화 협정에 서명했다.[118]
7. 5. 국제 관계
에리트레아의 초대 대통령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는 1993년 독립 이후 에리트레아를 통치하고 있으며, 민주정의인민전선이 유일한 합법 정당이다.[109] 1996년 에리트레아 헌법이 비준되었으나 아직 시행되지 않고 있다.1998년, 바드메 마을을 둘러싼 에티오피아와의 국경 분쟁은 에티오피아-에리트레아 전쟁으로 이어졌다.[69] 이 전쟁으로 양국 군인 수천 명이 사망했고, 에리트레아는 대규모 인구 이동, 경제 개발 감소, 심각한 지뢰 문제 등 상당한 경제적, 사회적 어려움을 겪었다. 전쟁은 2000년 알제 협정의 체결로 종식되었으며,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에 유엔 사절단(UNMEE)이 설립되어 25km의 비무장 완충지대인 임시 안보구역을 순찰했다. 알제 협정은 에리트레아-에티오피아 국경 위원회(EEBC)를 통해 분쟁 지역의 국경선을 확정하도록 요구했고, 2002년 4월 위원회는 바드메를 에리트레아에 귀속시키는 최종 판결을 발표했다. 그러나 에티오피아는 위원회의 결정을 거부하고 바드메를 포함한 분쟁 지역에서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아 "어려운" 평화가 유지되고 있다.[69] UNMEE의 임무는 2008년 7월 공식적으로 중단되었다.[69]
에리트레아는 지부티와 1998년 에티오피아와의 국경 전쟁 당시 지부티가 에티오피아와 긴밀한 관계를 맺은 것에 대한 분쟁으로 외교 관계가 잠시 단절되었다가 2000년에 복원되었으나, 국경 분쟁이 재개되면서 관계가 다시 긴장되었다. 예멘과는 1996년부터 1998년까지 하니시 제도와 해상 국경을 둘러싸고 분쟁을 벌였으며, 2000년 헤이그의 상설중재법원에 의해 해결되었다.[69]
에리트레아는 의료 서비스를 향상시켜 밀레니엄 개발 목표(MDG)를 달성하기 위한 궤도에 올랐다.[110] 출생 시 기대 수명은 증가하고 모자 사망률은 감소했으며, 의료 인프라가 확장되었다.[110] 홍역 예방 접종률이 증가하고 저체중 어린이 유병률이 감소했으며, 말라리아 사망률과 발병률이 크게 감소했다.[110] 에리트레아 정부는 여성 성기 절제(FGM)를 금지했다.[111][110]
에티오피아와의 교착 상태에 빠진 평화 과정에 대한 좌절감으로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 대통령은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와 코피 아난 사무총장에게 일련의 편지를 보냈다.[69] 에티오피아와의 긴장된 관계는 계속되었고, 에리트레아 정부는 소말리아 반군 지원 혐의로 비난을 받았다.[69] 미국은 에리트레아를 "테러 지원국"으로 지정하는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113][114] 2007년 12월, 에리트레아와 에티오피아는 국경에 상당한 군대를 주둔시켰다.[75]
2012년 9월, 이스라엘의 하아레츠 신문은 에리트레아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76] 이스라엘에는 4만 명 이상의 에리트레아 난민이 있으며, 국경 없는 기자회는 에리트레아를 표현의 자유에서 최하위로 평가했다.[76] 2013년에는 에리트레아 군대 반란이 발생하여 군인들이 방송국을 점령하고 개혁과 정치범 석방을 요구하는 메시지를 방송하기도 했다.[77] 2018년 9월,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 대통령과 에티오피아의 아비 아머드 총리는 양국 간의 역사적인 평화 협정에 서명했다.[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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