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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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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브로인은 659년 네우스트리아의 궁재로 선출된 인물이다. 클로타르 3세 치세에 궁재 에르키노알드의 뒤를 이었으며, 668년에는 비잔틴 제국 황제 콘스탄스 2세에 대항하여 영국인을 습격하는 등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했다. 673년 테우데리크 3세를 옹립했으나, 부르고뉴 귀족들의 반발로 힐데리크 2세에게 궁재 자리를 빼앗기고 룩세이유 수도원에 유폐되었다. 이후 탈출하여 권력을 되찾고, 679년 레오데가르를 처형하며 프랑크 왕국 통일을 시도했으나 680/1년 암살당했다. 그는 권력욕이 강한 인물로 평가받았으며, 레오데가르와의 갈등은 그의 생애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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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로인
기본 정보
이름에브로인
다른 이름Ebroin
직함네우스트리아 궁재
통치 기간658년 - 673년
675년 - 680년
사망680년 또는 681년
아들보보

2. 생애와 경력

피피니드 출신 오스트라시아의 궁재 그리모알드 1세의 쿠데타가 실패한 후, 메로빙거 왕조는 네우스트리아에 머물렀다. 프랑크족 역사서에 따르면, 클로타르 3세 통치 기간 동안 네우스트리아의 궁재 에르키노알드가 사망했고, 659년 프랑크족 평의회는 에브로인을 그의 후임으로 선출했다.[1]

성 엘리지우스의 일대기에는 670년대 중반 기준으로 에브로인에게는 아들 보보 한 명뿐이었으며, 보보는 청소년기에 얻은 질병으로 요양 중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바탕으로 보보는 660년경에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셸의 발틸드 여왕은 아들 클로타르 3세의 섭정으로 활동하다가 에브로인과의 권력 투쟁 이후, 664년 파리 근처의 셸 수도원으로 물러났다.[1]

영국 학자 베다는 668년 에브로인이 로마에서 돌아오는 한 영국인을 매복하여 습격한 사건을 기록했다. 이는 비잔틴 제국 황제 콘스탄스 2세가 시라쿠사에 거주하며 그의 통치에 반하는 동맹을 맺으려 한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 사건은 에브로인이 668년까지 네우스트리아의 실질적인 통치권을 장악했으며, 이론상 "프랑크족"의 통치자였음을 보여준다.

그 후 4년 동안 에브로인이 얼마나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673년 클로타르 3세가 사망했을 때 에브로인은 다시 권력을 잡았다. 그는 다른 귀족들과 상의 없이 테우데리크 3세를 네우스트리아의 왕으로 옹립했다.

에브로인은 네우스트리아와 부르고뉴의 연합을 유지하려 했지만, 부르고뉴 귀족들은 독립을 원했다. 이들은 오텡의 주교 레오데가르와 알자스의 아달리히 공작 아래에서 봉기하여 당시 오스트라시아를 통치하던 테우데리크의 형 힐데리크 2세에게 왕관을 제안했다. 힐데리크는 에브로인을 오스트라시아 궁재 울포알드로 교체했고, 에브로인은 여러 주교들의 중재로 생명은 보존되었으나 삭발당하고 룩세이유 수도원에 유폐되었다.[1] 이후 각 왕국이 자체적인 법률과 관습을 유지하고, 왕국 간에 더 이상의 관료 교류가 없으며, 에브로인과 같은 폭정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한다는 포고령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곧 레오데가르 역시 울포알드와 오스트라시아인들에게 패배하여 673년 룩세이유에 유폐되었다.[2]

675년 힐데리히 2세가 불만을 품은 프랑크족에게 살해되자 테오데리히 3세가 네우스트리아의 왕으로 복위되었고, 레우데시우스가 궁재가 되었다. 에브로인과 레오데가르는 혼란을 틈타 수도원을 떠나 다시 대립했다. 각자 서로 다른 메로빙거 왕을 지원했고, 에브로인은 심지어 가짜 메로빙거 사칭자를 군주로 선포하기까지 했다.[2] 얼마 지나지 않아 에브로인은 레우데시우스를 살해하고 다시 궁재가 되어 레오데가르와 청산해야 할 빚을 갖게 되었다.

675년경, 에브로인은 네우스트리아와 부르고뉴 대부분에 자신의 권위를 다시 확립했고, 샹파뉴 공작과 샬롱과 발랑스의 주교들에게 오텡을 공격하도록 유도했다. 그들은 도시를 침략하여 항복하게 만들었다. 에브로인은 레오데가르의 눈을 뽑게 했고, 힐데리히 2세의 살해가 레오데가르의 사주로 일어났다고 왕을 설득하여 레오데가르를 추가로 체포, 재판, 추방했다. 678년 10월 12일, 에브로인은 그의 적을 끌어내 살해했다.

한편 에브로인은 라옹 근처 부아-뒤-페이 전투에서 오스트라시아인들을 격파하고 프랑스를 네우스트리아의 지배하에 통일했다. 전투 후, 자신의 도시로 돌아온 라옹의 마르탱 공작은 테오데리히와의 협상이라는 구실로 에크리에 속아 넘어가 마르탱과 그의 지지자들은 그 자리에서 살해되었다.[3]

그러나 그의 승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는 681년에 암살당했고, 수많은 적들의 연합 공격의 희생자가 되었다.[2]

684년, 레우데시우스의 고향인 네우스트리아 푸아티에의 앙소알 주교는 부르고뉴의 레오데가르의 일대기를 의뢰했다. 이 일대기는 에브로인을 야망과 권력욕에 사로잡힌 하느님의 적으로 묘사했다. 이 전기적 내용은 교회에서 정경화되어 레오데가르 역시 생 레제로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에브로인의 악명에 대한 이야기는 프레데가르 연대기의 속편을 의뢰한 야심 찬 궁재 가문인 오스트라시아인들에게도 유용했다.

2. 1. 초기 생애

피핀 가문 출신 오스트라시아의 궁재 그리모알드 1세의 쿠데타가 실패한 후, 메로빙거 왕조는 네우스트리아에 머물렀다. 프랑크족 역사서에 따르면, 클로타르 3세 통치 기간 동안 네우스트리아의 궁재 에르키노알드가 사망했다. 659년, 프랑크족 평의회는 에브로인을 그의 후임으로 선출했다.[1]

성 엘리지우스의 일대기에는 670년대 중반 기준으로 에브로인에게는 아들 보보 한 명뿐이었으며, 보보는 청소년기에 얻은 질병으로 요양 중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바탕으로 보보는 660년경에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셸의 발틸드 여왕은 아들 클로타르 3세의 섭정으로 활동했다. 에브로인과의 권력 투쟁 이후, 그녀는 664년 파리 근처의 셸 수도원으로 물러났다.[1]

영국 학자 베다는 668년 에브로인에 관한 일화를 주목했다. 베다는 에브로인이 로마에서 돌아오는 한 영국인을 매복하여 습격했는데, 이는 비잔틴 제국 황제 (콘스탄스 2세, 시라쿠사에 거주)가 그의 통치에 반하는 동맹을 맺으려 한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전한다. 이에 따르면, 에브로인은 668년까지 네우스트리아의 실질적인 통치권을 장악했으며, 이론상 "프랑크족"의 통치자였다.

그 후 4년 동안 에브로인이 얼마나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프랑크족 역사서''는 이때 클로타르가 정신을 차렸을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클로타르가 673년에 사망했을 때 에브로인은 다시 권력을 잡았다. 에브로인은 그 후 다른 귀족들과 상의 없이 또 다른 형제인 테우데리크 3세를 네우스트리아의 왕으로 옹립했다.

에브로인은 네우스트리아와 부르고뉴의 연합을 유지하려 했지만, 부르고뉴의 주요 귀족들은 독립을 원했다. 그들은 오텬의 주교 레오데가르 (또는 ''레제'')와 알자스의 아달리히 공작 아래에서 봉기하여 당시 오스트라시아를 통치하고 있던 테우데리크의 형 힐데리크 2세에게 왕관을 제안했다. 힐데리크는 에브로인을 그의 오스트라시아 궁재 울포알드로 교체했다. 여러 주교들의 중재로 에보인의 생명은 보존되었고, 그는 삭발당하고 룩세이유 수도원에 유폐되었다.[1]

2. 2. 네우스트리아 궁재 (1차)

피피니드 출신 오스트라시아의 궁재 그리모알드 1세의 쿠데타가 실패한 후, 메로빙거 왕가는 네우스트리아에 머물렀다. 프랑크족 역사서에 따르면, 클로타르 3세 통치 기간 동안 네우스트리아의 궁재 에르키노알드가 사망했다. 659년, 프랑크족 평의회는 에브로인을 그의 후임으로 선출했다.[1]

성 엘리지우스의 일대기에는 670년대 중반 기준으로 에브로인에게는 아들 보보 한 명밖에 없었으며, 보보는 청소년기에 얻은 질병으로 요양 중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바탕으로 보보는 660년경에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셸의 발틸드 여왕은 아들 클로타르 3세의 섭정으로 활동했다. 에브로인과의 권력 투쟁 이후, 그녀는 664년 파리 근처의 셸 수도원으로 물러났다.[1]

잉글랜드 학자 베다는 668년 에브로인에 관한 일화를 기록했다. 베다는 에브로인이 로마에서 돌아오는 한 영국인을 매복하여 습격했는데, 이는 비잔틴 제국 황제 (콘스탄스 2세, 시라쿠사에 거주)가 그의 통치에 반하는 동맹을 맺으려 한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전한다. 이에 따르면, 에브로인은 668년까지 네우스트리아의 실질적인 통치권을 장악했으며, 이론상 "프랑크족"의 통치자였다.

그 후 4년 동안 에브로인이 얼마나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프랑크족 역사서''는 이때 클로타르가 정신을 차렸을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클로타르가 673년에 사망했을 때 에브로인은 다시 권력을 잡았다. 에브로인은 그 후 다른 귀족들과 상의 없이 또 다른 형제인 테우데리크 3세를 네우스트리아의 왕으로 옹립했다.

2. 3. 권력 복귀와 갈등

피핀 가문 출신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 그리모알드 1세의 쿠데타가 실패한 후, 메로빙거 왕조는 네우스트리아에 머물렀다. 클로타르 3세 통치 기간인 659년, 프랑크족 평의회는 에르키노알드의 후임으로 에브로인을 선출했다.[1]

성 엘리지우스의 일대기에 따르면, 670년대 중반 에브로인에게는 아들 보보 한 명뿐이었으며, 보보는 청소년기에 얻은 질병으로 요양 중이었다. 보보는 660년경에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셸의 발틸드 여왕은 아들 클로타르 3세의 섭정으로 활동하다 에브로인과의 권력 투쟁 이후 664년 파리 근처의 셸 수도원으로 물러났다.[1]

잉글랜드 학자 베다는 668년 에브로인이 로마에서 돌아오는 한 영국인을 매복하여 습격한 일화를 기록했다. 비잔틴 제국 황제 콘스탄스 2세가 시라쿠사에 거주하며 에브로인의 통치에 반하는 동맹을 맺으려 한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에브로인은 668년까지 네우스트리아의 실질적인 통치권을 장악했으며, 이론상 "프랑크족"의 통치자였다.

이후 4년 동안 에브로인이 얼마나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673년 클로타르가 사망했을 때 에브로인은 다시 권력을 잡았다. 에브로인은 다른 귀족들과 상의 없이 테우데리크 3세를 네우스트리아의 왕으로 옹립했다.

에브로인은 네우스트리아와 부르고뉴의 연합을 유지하려 했지만, 부르고뉴의 주요 귀족들은 독립을 원했다. 오텡의 주교 레오데가르와 알자스의 아달리히 공작 아래 봉기하여 당시 아우스트라시아를 통치하던 테우데리크의 형 힐데리크 2세에게 왕관을 제안했다. 힐데리크는 에브로인을 그의 오스트라시아 궁재 울포알드로 교체했다. 여러 주교들의 중재로 에보인의 생명은 보존되었고, 그는 삭발당하고 룩세이유 수도원에 유폐되었다.[1] 이후 각 왕국이 자체적인 법률과 관습을 유지하고, 왕국 간에 더 이상의 관료 교류가 없으며, 에브로인과 같은 폭정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한다는 포고령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곧 레오데가르 역시 울포알드와 오스트라시아인들에게 패배하여 673년 룩세이유에 유폐되었다.[2]

675년 힐데리히 2세가 불만을 품은 프랑크족에 의해 살해되자 테오데리히 3세가 누스트리아의 왕으로 복위되었고, 레우데시우스가 궁재가 되었다. 에브로인과 레오데가르는 혼란을 틈타 수도원을 떠나 다시 대면하게 되었다. 각자는 서로 다른 메로빙거 왕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에브로인은 심지어 가짜 메로빙거 사칭자를 군주로 선포하기까지 했다.[2] 얼마 지나지 않아 에브로인은 레우데시우스를 살해했고, 다시 궁재가 되어 레오데가르와 청산해야 할 빚을 갖게 되었다.

675년경, 에브로인은 누스트리아와 부르고뉴 대부분에 자신의 권위를 다시 확립했고, 샹파뉴 공작과 샬롱과 발랑스의 주교들에게 오텡을 공격하도록 유도했다. 그들은 도시를 침략하여 항복하게 만들었다. 에브로인은 레오데가르의 눈을 뽑게 했다. 에브로인은 힐데리히의 살해가 레오데가르의 사주로 일어났다고 왕을 설득했고, 그래서 왕은 레오데가르를 추가로 체포, 재판, 추방했다. 678년 10월 12일, 에브로인은 그의 적을 끌어내 살해했다.

한편 에브로인은 라옹 근처 부아-뒤-페이 전투에서 오스트라시아인들을 격파하고 프랑스를 누스트리아의 지배하에 통일했다. 전투 후, 자신의 도시로 돌아온 라옹의 마르탱 공작은 테오데리히와의 협상이라는 구실로 에크리에 속아 넘어갔다. 마르탱과 그의 지지자들은 그 자리에서 살해되었다.[3]

그러나 그의 승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는 681년에 암살당했고, 수많은 적들의 연합 공격의 희생자가 되었다.[2]

684년, 레우데시우스의 고향인 누스트리아의 푸아티에의 앙소알 주교는 부르고뉴의 레오데가르의 일대기를 의뢰했다. 이 일대기는 에브로인을 야망과 권력욕에 사로잡힌 하느님의 적으로 묘사했다. 이 전기적 내용은 교회에서 정경화되어 레오데가르 역시 생 레제로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에브로인의 악명에 대한 이야기는 프레데가르 연대기의 속편을 의뢰한 야심 찬 궁재 가문인 오스트라시아인들에게도 유용했다.

2. 4. 레오데가르와의 대립

피피니드 가문 출신 오스트라시아의 궁재 그리모알드 1세의 쿠데타가 실패한 후, 메로빙거 왕조는 네우스트리아에 머물렀다. 프랑크족 역사서에 따르면, 클로타르 3세 통치 기간 동안 네우스트리아의 궁재 에르키노알드가 사망했다. 659년, 프랑크족 평의회는 에브로인을 그의 후임으로 선출했다.[1]

셸의 발틸드 여왕은 아들 클로타르 3세의 섭정으로 활동했다. 에브로인과의 권력 투쟁 이후, 그녀는 664년 파리 근처의 셸 수도원으로 물러났다.[1]

673년 클로타르가 사망하자 에브로인은 다시 권력을 잡았다. 에브로인은 다른 귀족들과 상의 없이 그의 동생인 테우데리크 3세를 네우스트리아의 왕으로 옹립했다.

에브로인은 네우스트리아와 부르고뉴의 연합을 유지하려 했지만, 부르고뉴의 주요 귀족들은 독립을 원했다. 그들은 오텡의 주교 레오데가르와 알자스의 아달리히 공작 아래에서 봉기하여 당시 오스트라시아를 통치하고 있던 테우데리크의 형 힐데리크 2세에게 왕위를 제안했다. 힐데리크는 에브로인을 그의 오스트라시아 궁재 울포알드로 교체했다. 여러 주교들의 중재로 에브로인의 생명은 보존되었고, 그는 삭발당하고 룩세이유 수도원에 유폐되었다.[1] 그 후 각 왕국이 자체적인 법률과 관습을 유지하고, 왕국 간에 더 이상의 관료 교류가 없으며, 에브로인과 같은 폭정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한다는 포고령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곧 레오데가르 역시 울포알드와 오스트라시아인들에게 패배하여 673년 룩세이유에 유폐되었다.[2]

그 해 폰티에서 힐데리히 2세가 불만을 품은 프랑크족에 의해 살해되자 테우데리히 3세가 네우스트리아의 왕으로 복위되었고, 레우데시우스가 궁재가 되었다. 에브로인과 레오데가르는 혼란을 틈타 수도원을 떠나 곧 다시 대면하게 되었다. 각자는 서로 다른 메로빙거 왕조 왕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에브로인은 심지어 가짜 메로빙거 사칭자를 군주로 선포하기까지 했다.[2] 얼마 지나지 않아 에브로인은 레우데시우스를 살해했고, 다시 궁재가 되어 레오데가르와 청산해야 할 빚을 갖게 되었다.

675년경, 에브로인은 네우스트리아와 부르고뉴 대부분에 자신의 권위를 다시 확립했고, 샹파뉴 공작과 샬롱과 발랑스의 주교들에게 오텡을 공격하도록 유도했다. 그들은 도시를 침략하여 항복하게 만들었다. 에브로인은 레오데가르의 눈을 뽑게 했다. 에브로인은 힐데리히의 살해가 레오데가르의 사주로 일어났다고 왕을 설득했고, 왕은 레오데가르를 추가로 체포, 재판, 추방했다. 678년 10월 12일, 에브로인은 그의 적을 끌어내 살해했다.

2. 5. 통일 노력과 암살

673년, 클로타르 3세가 사망한 후, 에브로인은 그의 막내아들 테우데리크 3세를 왕위에 올리려 했으나 실패하고 궁재 지위를 잃었다. 그러나 675년 킬데리크 2세가 암살되자, 테우데리크 3세가 즉위하고 에브로인도 복귀했다. 그 해 폰디에서 힐데리히 2세가 불만을 품은 프랑크족에 의해 살해되자 테오데리히 3세가 누스트리아의 왕으로 복위되었고, 레우데시우스가 궁재가 되었다. 에브로인과 레오데가르는 혼란을 틈타 수도원을 떠나 곧 다시 대면하게 되었다. 각자는 서로 다른 메로빙거 왕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에브로인은 심지어 가짜 메로빙거 사칭자를 군주로 선포하기까지 했다.[2] 얼마 지나지 않아 에브로인은 레우데시우스를 살해했고, 다시 궁재가 되어 레오데가르와 청산해야 할 빚을 갖게 되었다.

675년경, 에브로인은 누스트리아와 부르고뉴 대부분에 자신의 권위를 다시 확립했고, 샹파뉴 공작과 샬롱쉬르마른과 발랑스의 주교들에게 오텡을 공격하도록 유도했다. 그들은 도시를 침략하여 항복하게 만들었다. 에브로인은 레오데가르의 눈을 뽑게 했다. 에브로인은 힐데리히의 살해가 레오데가르의 사주로 일어났다고 왕을 설득했고, 그래서 왕은 레오데가르를 추가로 체포, 재판, 추방했다. 679년 10월 12일, 에브로인은 그의 적을 끌어내 살해했다.

한편 에브로인은 라옹 근처 부아-뒤-페이 전투에서 오스트라시아인들을 격파하고 프랑스를 누스트리아의 지배하에 통일했다. 전투 후, 자신의 도시로 돌아온 라옹의 마르탱 공작은 테오데리히와의 협상이라는 구실로 에크리에 속아 넘어갔다. 마르탱과 그의 지지자들은 그 자리에서 살해되었다.[3]

그러나 그의 승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는 681년에 암살당했고, 수많은 적들의 연합 공격의 희생자가 되었다.[2]

3. 평가 및 유산

에브로인에 대한 주요 사료는 다음과 같다.

제목저자/편집출판/수록 정보
Liber historiae FrancorumlaB. 크루슈 편집모누멘타 게르마니아 히스토리카 스크립트. 레르. 메로브. 2권
성 레오데가르의 생애(Vita sancti Leodegarii)우르시누스미뉴, 라틴어 교부학, 96권
운문 생애(Vita metrica)(미상)카롤린 시대의 라틴 시인(Poetae Latini aevi Carolini) 3권 (독일 현대사)
《생 레제 이야기》J. B. 피트라파리, 1846
《궁재 에브로인의 역사에 대하여》J. 프리드리히뮌헨 학술원 회보 (1887, 42–61쪽)


3. 1. 사료


  • Liber historiae Francorumla, B. 크루슈 편집, ''모누멘타 게르마니아 히스토리카 스크립트. 레르. 메로브.'' 2권.
  • 우르시누스가 작성한 ''성 레오데가르의 생애''(Vita sancti Leodegarii), 당시 생 마이샹 수도원 수도사(미뉴, ''라틴어 교부학'', 96권).
  • ''운문 생애''(Vita metrica)는 ''카롤린 시대의 라틴 시인''(Poetae Latini aevi Carolini) 3권에 수록(''독일 현대사'').
  • J. B. 피트라, 《생 레제 이야기》(파리, 1846)
  • J. 프리드리히, 《궁재 에브로인의 역사에 대하여》, 뮌헨 학술원 회보 (1887, 42–61쪽)

참조

[1] 서적 The Early Medieval World: From the Fall of Rome to the Time of Charlemagne https://books.google[...] ABC-CLIO 2013
[2] 간행물 Ebroïn
[3] 서적 The Merovingian Kingdoms Longman 1994
[4] 간행물 Ebroï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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