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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크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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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세크 칸은 15세기 전반 오이라트 부족 연합의 수장으로, 명나라에서는 현의왕 태평으로 불렸다. 몽골 연대기에서는 오이라트의 케레누트 출신으로 기록되었으며, 영락제 치세 동안 명나라와 우호 관계를 맺고 몽골 세력에 대항했다. 그는 1424년 토곤에게 살해당했으며, 아들 네레그가 뒤를 이었으나 세력을 확장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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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크 칸

2. 생애

에세크 칸의 생애는 여러 기록이 엇갈려 명확하지 않다. 몽골 연대기 '시라 토지'에 따르면, 에세크는 오이라트 케레누트 출신으로 오게치 하시하의 아들이며, 초로스의 바트라 승상을 죽이고 그의 아내 삼루 공주를 빼앗았다고 한다.[1]

《몽골원류》에는 '부랴트 에세크'로, 《황금사》에는 오이라트의 칸으로 기록되어 있다. '에세크'는 몽골어로 '태평'을 뜻하며, 명나라에서 '현의왕'으로 봉해진 '태평'과 동일 인물로 여겨진다.[1]

1388년 예스데르(조리크투 칸)를 추대하여 결성된 오이라트 부족 연합은 여러 유목 부족의 연합체였다. 그중 오게치 하시하의 케레누트(후의 토르구트)와 고하이 태위의 초로스(후의 준가르)가 유력했다. 오게치 하시하는 1399년 엘베크 칸을 살해하고 쿤 테무르 칸을 옹립하며 오이라트 내에서 가장 유력해졌다. 그러나 1402년 고하이 태위의 아들 바트라 승상에게 쿤 테무르 칸과 오게치 하시하가 살해되면서 오이라트 내부 대립이 심화되었다.

1403년, 영락제는 즉위 직후 오이라트 수장 마흐무드(바트라 승상), 에세크(타이핑), 바트 보라드에게 사자를 파견했다.[2] 1407년 올제이 테무르가 티무르 제국에서 귀환하여 몽골 고원이 혼란스러워지자, 영락제는 다시 이들에게 사자를 보내 명나라 귀순을 권유했다.[3]

1409년, 영락제는 몽골에 대항하고자 오이라트 수장들에게 왕위를 주며 우호 관계를 맺으려 했다. 마흐무드에게 순녕왕, 에세크(타이핑)에게 현의왕, 바트 보라드에게 안락왕위를 수여했다.[4][5] 영락제는 직접 군을 이끌고 몽골을 친정할 때 오이라트의 협력을 받아 은상을 내렸다.[6][7]

1412년, 오이라트군은 올제이 테무르를 살해하고 대원 울루스의 전국새(하스보 탐가)를 탈취했다. 마흐무드, 타이핑 등은 전국새를 명나라에 바치며 지원을 요청했지만, 영락제는 거부했다.[8] 이후 오이라트는 다르바크 칸을 옹립하며 세력을 확대했고, 명나라와 관계는 악화되었다.

1414년, 울란호쇼 전투에서 명나라군에 패배 후, 에세크(타이핑)는 다르바크 칸 대신 오이라다이 칸을 옹립하여 오이라트 부족 연합을 통솔했다.[11][12] 그는 마흐무드와 달리 명나라와 유화 정책을 추진했고, 명나라는 그를 더 쉬운 상대로 여겼다.[11][12]

1418년부터 1421년까지 타이핑은 명나라와 사신을 주고받으며 우호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13][14][15][17][18] 1419년에는 아들 네레그를 시켜 명나라 사신을 호위하게 했고, 영락제는 그에게 특별한 상을 줬다.[15]

그러나 1424년, 타이핑은 토곤에게 기습당해 살해되었고,[23] 그가 이끌던 유목 집단은 붕괴되었다.[23] 타이핑의 지위는 아들 네레그가 이었지만, 세력을 회복하지 못했고, 이후 오이라트 부족 연합 내에서는 토곤, 에센 부자가 권력을 장악했다.

2. 1. 불분명한 가계

몽골 연대기 중 하나인 '시라 토지'에는 에세크는 '오이라트의 케레누트'의 오게치 하샤의 아들로 태어나 초로스의 바트라 승상을 죽이고 그 아내 삼루 공주를 빼앗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명나라 사료에는 15세기 전반에 '현의왕 태평'이라고 불리는 오이라트 부족 연합의 수장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태평'을 몽골어로 번역하면 '에세크'가 되기 때문에 에세크와 현의왕 태평은 같은 인물로 여겨진다.[1]

《몽골원류》에는 그를 '부랴트 에세크'(布里牙特·額色庫)라는 이름으로 기술했다.《황금사》에 의하면 오이라트의 카안이라고 하여 그가 오이라트 출신이라 한다. 오이라다이는 몽골어로 보다, 분명하다, 명백하다는 뜻이고, '에세크'는 몽골어로 '태평'(太平)을 의미했다. 일설에는 명나라로부터 '현의왕'(賢義王)에 봉해진 '태평'(太平)을 그와 동일인물로 보는 설이 있다.

『시라 토지』에는 에세크는 "오이라트의 케레누트"의 오게치 하샤의 아들로 태어나, 초로스의 바트라 승상을 살해하고, 그 아내인 삼루 공주를 빼앗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몽골원류』는 "오게치 하샤의 아들 에세크"가 달바크 칸의 사후에 "에세크 칸"으로 즉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저자인 사간 세첸이 "삼루 공주를 취한 것"과 "칸으로의 즉위"를 결부시켰기 때문에 발생한 오류로, 실제로 달바크 칸의 사후에 즉위한 것은 오이라다이 칸이었다.

2. 2. 현의왕 태평의 사적

1407년 몽골 고원에서 티무르 제국으로 망명했던 쿠빌라이 가문의 올제이 테무르가 귀환하자, 아르크타이 등이 오루크 테무르 칸을 폐위하고 올제이 테무르를 옹립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몽골 고원의 혼란을 본 영락제는 다시 마흐무드, 타이핀, 바트 보라드 3명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명나라에 귀순할 것을 권유했다.[3]

울란호쇼 전투에서 오이라트 연합군이 명군에게 패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때까지 오이라트 군의 지도적 지위에 있던 마흐무드도 사망했다. 타이핀은 다르바크 칸을 대신해 오이라다이 칸을 옹립함으로써 오이라트 부족 연합을 통솔하는 지위에 섰고, 오게치 하시하 이후 오랫동안 케레누트 집단이 오이라트의 지배 집단이 되었다.[11][12] 타이핀은 마흐무드와 달리 명나라와의 유화 정책을 추진했기 때문에, 명나라 사람들은 마흐무드를 상대할 때보다 타이핀을 상대하기 더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다.[11][12]

1424년 초, 현의왕 타이핀, 안락왕 바트 보라드, 순녕왕 토곤 등이 공동으로 명나라에 사자를 파견했다.[22] 그러나 같은 해 타이핀은 토곤에게 기습당해 살해되었고,[23] 타이핀이 이끌던 유목 집단은 붕괴되어 일부는 명나라 감숙 북방까지 도망쳐 왔다.[23] 타이핀의 지위는 아들 네레그가 이었지만, 아버지처럼 세력을 부흥시키지 못했고, 이윽고 오이라트 부족 연합 내에서는 토곤, 에센 칸 부자가 절대적인 권력을 확립해 나가게 된다.

《시라 토지》에 따르면, 에세크는 "오이라트의 케레누트"의 오게치 하시하의 아들로 태어나, 초로스의 바트라 승상을 살해하고, 그의 아내인 삼루 공주를 빼앗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몽골원류》는 "오게치 하시하의 아들 에세크"가 달바크 칸의 사후에 "에세크 칸"으로 즉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저자인 사간 세첸이 "삼루 공주를 취한 것"과 "칸으로의 즉위"를 결부시켰기 때문에 발생한 오류로, 실제로 달바크 칸의 사후에 즉위한 것은 오이라다이 칸이었다.

명나라 사료에는 15세기 전반에 "현의왕 태평"이라고 불리는 오이라트 부족 연합의 수장이 있었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는데, "태평"을 몽골어로 번역하면 "에세크 Esekü"가 되기 때문에, 에세크와 현의왕 태평은 동일 인물로 여겨진다.[1]

2. 2. 1. 사서 등장

몽골 연대기인 '시라 토지'에 따르면, 에세크는 '오이라트의 케레누트'의 오게치 하시하의 아들로 태어나 쵸로스의 배트라 무상을 죽이고 그의 아내 사물 공주를 빼앗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명나라 사료에는 15세기 전반에 '현의왕 태평'이라 불리는 오이라트 부족 연합의 수장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태평'은 몽골어로 '에세크'로 번역되기 때문에 에세크와 현의왕 태평은 동일 인물로 여겨진다.

《몽골원류》에는 그를 '부랴트 에세크'(布里牙特·額色庫)라는 이름으로 기록했다. 《황금사》에 따르면 오이라트의 카안이라고 하여 그가 오이라트 출신이라고 한다. 오이라다이는 몽골어로 보다, 분명하다, 명백하다는 뜻이고, '에세크'는 몽골어로 '태평'(太平)을 의미했다. 일설에는 명나라로부터 '현의왕'(賢義王)에 봉해진 '태평'(太平)을 그와 동일인물로 보는 설이 있다.

1388년, 예스데르(조리크투 칸)를 추대하여 결성된 돌번 오이라트(오이라트 부족 연합)는 여러 유목 부족의 연합체였으며, 특히 오게치 하시하가 이끄는 케레누트(후의 토르구트)와 고하이 태위가 이끄는 초로스 (후의 준가르)가 유력했다. 오게치 하시하는 1399년에 엘베크 칸을 살해하고 쿤 테무르 칸을 옹립하여 명나라에 "오이라트(와라) 왕"으로 칭하는 등 오이라트 내에서 가장 유력해졌다. 그러나 1402년에는 고하이 태위의 아들 바트라 승상에 의해 쿤 테무르 칸과 오게치 하시하가 살해당하고 오이라트 내부의 대립은 심각해졌다.

바트라 승상(명나라에서의 호칭은 마하무 = 마흐무드)과 에세크(명나라에서의 호칭은 태평 = 타이핀)가 처음 명나라 사료에 등장하는 것은 영락제가 즉위한 직후의 일로, 1403년에 영락제는 마흐무드, 타이핀, 바트 보라드라는 3명의 오이라트 수장에게 사자를 파견했다[2]。마흐무드는 초로스의 지배자 바트라 승상, 타이핀은 케레누트의 지배자 에세크, 바트 보라드는 호이트의 지배자에 각각 해당한다.

2. 2. 2. 영락제와의 협력

1403년 영락제는 즉위 직후 오이라트의 수장 마흐무드, 에세크(명나라에서 타이핑으로 불림), 바트 보라드 3명에게 사자를 파견했다.[2] 마흐무드는 초로스의 지배자 바트라 승상, 타이핑은 케레누트의 지배자 에세크, 바트 보라드는 호이트의 지배자에 해당한다.

1407년, 몽골 고원에서 티무르 제국으로 망명했던 쿠빌라이 가문의 올제이 테무르가 귀환하자, 아르크타이 등이 올크 테무르 칸을 폐위하고 올제이 테무르를 옹립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몽골 고원의 혼란을 본 영락제는 다시 마흐무드, 타이핑, 바트 보라드 3명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명나라에 귀순할 것을 권유했다.[3]

1409년, 영락제는 올제이 테무르를 옹립하여 세력을 확대하는 몽골(타타르)에 대항하기 위해 추복이 이끄는 원정군을 파견하는 한편, 몽골과 대립하는 오이라트의 수장을 책봉했다. 마흐무드에게 순녕왕위를, 타이핑에게 현의왕위를, 바트 보라드에게 안락왕위를 수여하여 우호 관계를 구축하려 했다.[4][5] 추복의 원정군이 올제이 테무르의 몽골군에게 대패하자, 영락제는 직접 군을 이끌고 몽골 친정을 결단했고, 타이핑 등 오이라트 수장도 영락제의 친정에 협력하여 은상을 받았다.[6][7]

영락제의 공격으로 올제이 테무르의 몽골군이 약화되자, 1412년 오이라트군은 올제이 테무르를 살해하고 대원 울루스의 전국새(하스보 탐가)를 탈취했다. 마흐무드, 타이핑 등은 전국새를 헌상하여 명나라의 추가 지원을 요청했지만, 영락제는 이를 오이라트의 자만으로 여겨 거부했다.[8] 이후, 다르바크 칸을 옹립한 오이라트는 세력을 확대하고 명나라와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1414년, 영락제가 다시 군을 이끌고 몽골 고원에 와 다르바크 칸, 마흐무드, 타이핑, 바토 보라드 등이 이끄는 오이라트군을 울란호쇼 전투에서 격파하자, 마흐무드, 타이핑 등은 도망쳤다.[9] 1415년, 타이핑, 마흐무드 등은 사죄의 사자를 명나라에 파견하여 관계 개선에 노력했다.[10]

2. 2. 3. 타이핀의 탈권

1414년, 울란호쇼 전투에서 명나라 영락제가 이끄는 군대에 패배한 후, 타이핀은 다르바크 칸을 대신해 오이라다이 칸을 옹립하여 오이라트 부족 연합을 통솔하는 지위에 올랐다. 이는 오게치 하시하 이후 오랫동안 케레누트 집단이 오이라트의 지배 집단이 되었음을 의미한다.[11][12]

타이핀은 이전의 지도자 마흐무드와 달리 명나라와의 유화 정책을 추진했다. 명나라는 강경 정책을 주도했던 마흐무드보다 타이핀을 상대하기 더 쉬울 것이라고 판단했다.[11][12]

1418년, 타이핀은 현의왕으로서 안락왕 바토 볼라드, 순녕왕 토곤과 함께 명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이때 토곤은 아버지의 순녕왕 지위를 계승하는 것을 인정받았다.[13][14] 1419년에는 명나라 사신 해동이 귀국할 때 아들 네레그에게 호위를 맡겨 무사히 돌아갈 수 있게 했다. 영락제는 이를 가상히 여겨 타이핀 부자에게 특별한 상을 내렸다.[15]

그러나 같은 해, 타이핀이 이끄는 오이라트 군은 아르크타이가 이끄는 몽골 군에게 크게 패했다.[16] 영락제는 아르크타이의 세력 확대를 경계하여 1421년까지 타이핀 등과 사신을 주고받으며 우호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했다.[17][18]

1421년, 타이핀은 하밀국을 침공했지만, 모굴리스탄 칸국의 와이스 칸과의 전투에서 결판을 내지 못하고 사죄 사절을 파견했다.[19][20][21]

1424년 초, 타이핀은 다시 현의왕으로서 안락왕 바토 볼라드, 순녕왕 토곤 등과 함께 명나라에 사신을 보냈으나,[22] 같은 해 토곤의 기습으로 살해당했다.[23] 타이핀이 이끌던 유목 집단은 붕괴되었고, 일부는 명나라 감숙 북방까지 도망쳤다.[23] 타이핀의 지위는 아들 네레그가 이었지만, 아버지처럼 세력을 회복하지 못했고, 이후 오이라트 부족 연합 내에서는 토곤, 에센 부자가 절대적인 권력을 확립하게 된다.

3. 사후

사강 세첸은 우게치 카스하의 아들 에세크와 북원 말기~청나라 초기의 몽골 역사가 에세크를 혼동하였다. 그는 몽골 토르굿 부족의 조상 중 한 명이다.

4. 후손

사강 세첸은 우게치 카스하의 아들 에세크와 그를 혼동하였다. 그는 몽골 토르굿 부족의 조상 중 한 명이다.

에세크(타이핑)의 뒤를 이은 사람은 아들 네레그(몽골어: ᠨᠢᠯᠬ᠎ᠠ|Nirqamn)이며, 명나라는 1419년부터 그 존재를 파악하고 있었다. 1425년에는 토곤, 엔케 등 다른 오이라트 수령들과 함께 사자를 파견했으며[24], 1426년에는 아버지의 왕작(현의왕위)을 승계하는 것을 명나라로부터 인정받았다[25]

오이라트 부족 연합을 구성하는 부족 중 하나인 톨구트부 왕가에는 kayiwang이라는 이름의 인물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현의왕 태평 ken-i-ong이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오게치 하시하-에세크(타이핑)-네레그의 3대가 톨구트부 왕가의 조상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5. 오이라트 케레누트 수령 가계

에세크는 '시라 토지'에 따르면 '오이라트의 케레누트' 출신 오게치 하시하의 아들로, 쵸로스의 배트라 무상을 죽이고 그의 아내 사물 공주를 빼앗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명나라 사료에는 15세기 전반 '현의왕 태평'이라는 오이라트 부족 연합의 수장이 있었는데, '태평'은 몽골어로 '에세크'가 되므로 에세크와 현의왕 태평은 동일 인물로 여겨진다.[1]

《몽골원류》에는 '부랴트 에세크'(布里牙特·額色庫)로, 《황금사》에는 오이라트의 카안으로 기록되어 오이라트 출신임을 알 수 있다. 오이라다이는 몽골어로 보다, 분명하다, 명백하다는 뜻이고, '에세크'는 몽골어로 '태평'(太平)을 의미한다. 일설에는 명나라로부터 '현의왕'(賢義王)에 봉해진 '태평'(太平)을 그와 동일인물로 보는 설이 있다.[1]


  • 오게치 하시하/오이라트 왕 몽케 테무르
  • *'''에세크'''/'''현의왕 타이핀'''
  • **현의왕 네레구

참조

[1] 서적 Buyandelger2000,146-147頁
[2] 서적 『明太宗実録』永楽元年四月壬子「遣鎮撫答哈帖木児等齎勅往瓦剌諭虜酋馬哈木・太平・把禿孛羅」
[3] 서적 『明太宗実録』永楽五年五月丙寅「遣千戸亦剌思那速児丁及舎黒撒答等、使瓦剌。時虜中来降者言、鬼力赤為部下所廃、其衆欲立本雅失里。遂遣亦剌思等齎勅、往諭馬哈木等、以天命有帰及福善禍淫之意。並賜馬哈木・太平・把禿孛羅及其所部撒都剌等金織・文綺、有差」
[4] 서적 『明太宗実録』永楽七年五月乙未「封瓦馬剌哈木為特進金紫光禄大夫順寧王、太平為特進金紫光禄大夫賢義王、把禿孛羅為特進金紫光禄大夫安楽王、仍命所司給賜印誥」
[5] 서적 『明太宗実録』永楽七年六月癸丑「賜瓦剌使臣暖答失等綵幣並襲衣、遣帰命亦剌思等齎印誥賜順寧王馬哈木・賢義王太平・安楽王把禿孛羅与之偕行」
[6] 서적 『明太宗実録』永楽八年三月丙子「遣瓦剌使者帰命指揮保保等護送復賜勅労順寧王馬哈木・賢義王太平・安楽王把禿孛羅、各賜綵幣二十疋」
[7] 서적 『明太宗実録』永楽九年閏十二月己卯「遣指揮孫観保等送瓦剌使臣馬哈麻等、還並賜順寧王馬哈木綵幣金織龍衣金織襲衣馬甲弓矢、賜賢義王太平・安楽王把禿孛羅綵幣……」
[8] 서적 『明太宗実録』永楽十年五月乙酉「瓦剌順寧王馬哈木等遣其知院海答児等、随指揮孫観保来朝。且言、既滅本雅失里、得其伝国璽、欲遣使進献。慮為阿魯台所要請天兵除之。又言、脱脱不花之子今在中国請還之。又言、其部属伯顔阿吉失里等従己多効労力請加賞賚。又言、瓦剌士馬整粛請軍器。上曰、此虜驕矣、狐鼠輩不足与較。命礼部宴賚其使者、而遣之仍命遣使齎勅諭馬哈木・太平・把禿孛羅」
[9] 서적 『明太宗実録』永楽十二年六月戊申「駐蹕忽蘭忽失温。是日、虜寇答里巴・馬哈木・太平・把禿孛羅等率衆、逆我師……餘衆敗走、大軍乗勝追之、度両高山、虜勒餘衆復戦、又敗之、追至土剌河、生擒数十人。馬哈木・太平等脱身遠遁……」
[10] 서적 『明太宗実録』永楽十三年正月丁未「瓦剌順寧王馬哈木・賢義王太平・安楽王把禿孛羅遣使観音奴・塔不哈等、貢馬、謝罪……」
[11] 서적 『明太宗実録』永楽十五年三月丁未「太監海童等使瓦剌還、賢義王太平・安楽王把禿孛羅遣使貢名馬及方物、謝罪」
[12] 서적 『明太宗実録』永楽十五年四月乙丑「車駕次利国監、復遣太監海童使瓦剌指揮柏齢等、副之。先是、海童自瓦剌還言、初瓦剌拒命皆順寧王馬哈木之謀、今馬哈木死、賢義王太平及安楽王把禿孛羅二人一心、其朝貢皆出誠意。至是、復遣海童等齎勅、労太平・把禿孛羅。且賜之綵幣・表裏与其貢使偕行」
[13] 서적 『明太宗実録』永楽十六年三月甲戌「……太監海童指揮柏齢等自瓦剌還、賢義王太平・安楽王把禿孛羅及弟昂克並順寧王馬哈木子脱歓及頭目阿隣帖木児、各遣使奉表、貢馬。脱歓請襲父爵」
[14] 서적 『明太宗実録』永楽十六年四月甲辰「……遣太監海童・右軍都督僉事蘇火耳灰・都指揮程忠等齎勅、賜太平・把禿孛羅及昂克・脱歓等綵幣・表裏、有差……」
[15] 서적 『明太宗実録』永楽十七年五月丙寅「瓦剌賢義王太平・安楽王把禿孛羅・順寧王脱歓使臣辞帰勅、賜太平等綵幣・表裏、有差。先是、太監海童自瓦剌還言、賢義王遣其子捏列骨等、護送中途遇寇。捏列骨率同行答力麻、奮力撃之。寇退走。上聞而嘉之。至是、復遣指揮毛哈剌与其使倶往加賜太平父子及答力麻等綵幣」
[16] 서적 『明太宗実録』永楽十七年十一月己酉「指揮毛哈剌還自瓦剌言、阿魯台襲賢義王太平等大敗之。上曰、阿魯台黠虜与瓦剌相讎久矣。朕嘗遣人諭太平等、令備之不従。朕言、遂至於此。於是、遣千戸脱力禿古等往賜太平・把禿孛羅等綵幣・表裏、且慰問之」
[17] 서적 『明太宗実録』永楽十九年二月「千戸脱力禿右脱力禿古等還自瓦剌、賢義王太平・安楽王把禿孛羅及昂克・賽因孛羅等各遣使、貢馬。命礼部、賜宴」
[18] 서적 『明太宗実録』永楽十九年三月丁亥「瓦剌賢義王太平・安楽王把禿孛羅等使臣辞還、賜鈔幣、有差。復遣太監海童等、齎綵幣表裏往賜之。仍降詔諭其部落諭其部落曰、往年寇辺之罪已在赦前一切不問。自今其頭目人等能攄誠来帰、悉授以官。初瓦剌為阿魯台所敗、其部衆流散、有近我辺境者懼為辺将所執、故下詔安之」
[19] 서적 『明太宗実録』永楽十九年六月庚戌「哈密忠義王免力帖木児言、瓦剌比遣人侵掠其境、遣使齎勅責賢義王太平等、令還所侵掠」
[20] 서적 『明太宗実録』永楽十九年八月壬辰「太監海童・指揮白忠等還自瓦剌言、亦力八里王歪思与賢義王太平搆兵戦、互有勝負。上曰、夷狄豺狼不可信也。勅辺将厳備禦」
[21] 서적 『明太宗実録』永楽二十年十二月甲辰「瓦剌賢義王太平等遣使貢馬、謝侵掠哈密之罪。哈密忠義王免力帖木児等亦遣使献馬、各賜綵幣・表裏」
[22] 서적 『明太宗実録』永楽二十二年二月壬子「瓦剌賢義王太平・安楽王把禿孛羅・順寧王脱歓遣使哈三等、貢馬。賜紵絲・襲衣・金織・文綺・綵絹、有差」
[23] 서적 『明仁宗実録』永楽二十二年十月辛亥「勅甘粛総兵官都督費瓛、近聞、賢義王太平為瓦剌順寧王脱歓所侵害、太平人馬潰散、有逃至甘粛辺境潜住者……」
[24] 서적 『明仁宗実録』洪熙元年正月壬辰「瓦剌安楽王把禿孛羅子亦剌恩及酋長捏列骨・昂克・脱歓・哈剌八丁各貢馬賜綵幣表裏、有差……」
[25] 서적 『明宣宗実録』宣徳元年正月丙午「遣使齎勅、命瓦剌賢義王子捏列骨襲王爵。勅曰、昔我皇祖太皇帝臨御之日、爾父賢義王太平能恭事朝廷、遣使往来有如一家。朕祗奉天命、嗣承宝位恪遵皇祖成憲惟欲天下生霊咸得其所。比聞、爾父已歿。今特遣指揮孫観千戸岳謙等、齎勅命爾襲封賢義王、並賜綵幣・表裏。爾其恪遵朕命篤紹爾父之志撫綏部属俾咸楽其生以永享昇平之福欽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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