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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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은 1900년 스코틀랜드 귀족의 딸로 태어나, 1923년 요크 공작 앨버트와 결혼했다. 요크 공작 부인으로서 두 딸을 낳았으며, 1936년 시아버지 조지 5세의 사망과 형 에드워드 8세의 퇴위로 남편이 조지 6세로 즉위하면서 왕비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런던을 떠나지 않고 국민과 함께 고난을 겪으며 파시즘에 맞서 싸웠다. 1952년 조지 6세가 사망한 후에는 엘리자베스 왕대비로 불리며 왕실의 어른으로서 공무를 수행했고, 10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대중적인 매력으로 영국 왕실의 인기를 높이는 데 기여했으며, 긍정적 평가와 더불어 일부 비판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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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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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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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영국 왕비 겸 영국 자치령의 왕비 |
통치 기간 | 1936년 12월 11일 – 1952년 2월 6일 |
대관식 | 1937년 5월 12일 |
인도 황후 | 1936년 12월 11일 – 1947년 8월 15일 |
본명 | 엘리자베스 앤절라 마거릿 보즈-라이언 |
출생일 | 1900년 8월 4일 |
출생지 | 히친 또는 런던, 잉글랜드 |
사망일 | 2002년 3월 30일 |
사망 장소 | 로열 로지, 윈저, 버크셔, 잉글랜드 |
매장일 | 2002년 4월 9일 |
매장지 | 성 조지 예배당, 윈저 성 내 조지 6세 기념 예배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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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과 가족 | |
배우자 | 조지 6세 (1923년 4월 26일 결혼, 1952년 2월 6일 사별) |
자녀 | 엘리자베스 2세 마거릿 공주 |
가문 | |
가문 | 보즈-라이언 가문 |
종류 | 귀족 가문 |
아버지 | 제14대 스트라스모어와 킹호른 백작 클로드 보즈-라이언 |
어머니 | 세실리아 캐번디시-벤팅크 |
기타 정보 | |
대학교 총장 | 런던 대학교 총장 던디 대학교 총장 |
2. 생애
엘리자베스는 1900년 8월 4일 클로드 보우스라이언과 세실리아 니나 캐번디시벤팅크 사이의 넷째 딸로 태어났다. 1904년 아버지가 스트래스모어와 킹혼 백작위를 계승하면서, 그녀의 칭호는 '레이디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으로 바뀌었다.
1923년, 엘리자베스는 조지 5세의 차남 요크 공작 앨버트와 결혼했다. 요크 공작 부부는 엘리자베스 여왕과 마거릿 공주 두 딸을 낳았으며, "미소 짓는 공작 부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191]
1936년, 에드워드 8세가 월리스 심슨과의 결혼을 위해 퇴위하면서, 남편 앨버트가 조지 6세로 즉위하여 엘리자베스는 왕비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불굴의 의지로 국민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으며, 아돌프 히틀러는 그녀를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여성"이라고 평가했다.[192]
1952년 남편 조지 6세가 사망하고 장녀 엘리자베스 2세가 즉위하면서, 엘리자베스는 왕대비가 되었다. 이후 "여왕 어머니" 또는 "여왕 마마"로 불리며 영국 왕실의 어른으로서 존경받았다.
엘리자베스 왕대비는 남편과 달리 장수하여 2002년 3월 30일, 101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2. 1. 유년기
엘리자베스 앤절라 마거릿 보우스라이언은 1900년 8월 4일, 스코틀랜드 귀족인 클로드 보우스라이언 경(후에 스트래스모어와 킹혼 백작)과 그의 아내 세실리아 캐번디시벤팅크의 넷째 딸이자 10남매 중 아홉 번째 아이로 태어났다.[269]엘리자베스의 출생지는 불확실하지만, 부모님의 웨스트민스터 자택인 그로스버너 가든스의 벨그레이브 맨션에서 태어났거나 병원으로 가는 마차 안에서 태어났다고 한다.[7] 다른 가능성 있는 장소로는 어머니의 할머니 루이자 스콧의 집인 런던 햄의 포브스 하우스가 있다.[8] 그녀의 출생은 스트래스모어의 영국 시골 저택인 세인트 폴스 월든 베리 근처인 허트퍼드셔 히친에 등록되었으며,[9] 1901년과 1911년 인구 조사에서도 그녀의 출생지로 기록되었다.[10] 그녀는 1900년 9월 23일 그곳 지역 교구 교회인 올 세인츠에서 세례를 받았다.
엘리자베스는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세인트 폴스 월든과 스코틀랜드에 있는 백작 가문의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저택인 글래미스 성에서 보냈다. 그녀는 여덟 살까지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았으며, 필드 스포츠, 조랑말, 개를 좋아했다.[11] 런던에서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크세노폰의 ''아나바시''에서 두 개의 그리스어 단어를 사용하여 에세이를 시작하여 선생님들을 놀라게 했다. 그녀가 가장 잘하는 과목은 문학과 성경이었다. 독일계 유대인 가정교사 Käthe Kübler의 개인 교육을 다시 받은 후, 그녀는 13세에 옥스퍼드 지역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했다.[12]


2. 2. 요크 공작 부인 시절
1923년 4월 26일, 엘리자베스는 국왕 조지 5세의 차남인 요크 공작 앨버트(후일의 조지 6세)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결혼했다. 앨버트는 가족들 사이에서 '버티(Bertie)'라는 애칭으로 불렸으며, 1921년 엘리자베스에게 처음 청혼했으나 거절당했다. 앨버트는 "엘리자베스 이외의 여성과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그의 어머니 메리 왕비도 글래미스 성을 방문하여 엘리자베스를 "버티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처녀"로 인정했다.[17]
결국 엘리자베스는 앨버트의 세 번째 청혼을 받아들였다. 결혼 후 엘리자베스의 공식 호칭은 '''요크 공작 부인 전하'''(Her Royal Highness The Duchess of York)가 되었다.[27] 신혼 여행지는 서리주의 장원인 폴스던 레이시(Polesden Lacey)와 스코틀랜드였다.
1926년 부부는 첫 딸 엘리자베스 공주(가족들 사이에서 '릴리벳(Lilibet)'이라는 애칭으로 불림)를 얻었고, 1930년 둘째 딸 마거릿 로즈 공주를 얻었다.
앨버트는 말더듬증이 있었는데, 엘리자베스는 앨버트가 이를 극복하도록 적극적으로 도왔다. 1925년 10월 이후, 앨버트는 호주인 치료사 라이오넬 로그의 치료를 받았고, 엘리자베스는 앨버트의 말더듬증 개선에 협력했다. 이 이야기는 2010년 영국 영화 킹스 스피치에서 재현되었다.
2. 3. 왕비 즉위
1936년 1월 20일 조지 5세가 사망하면서 그의 장남 에드워드 8세가 즉위하였다. 그러나 에드워드 8세는 미국의 이혼녀 월리스 심프슨과의 결혼 문제로 퇴위하고, 1936년 12월 11일 그의 동생 앨버트가 조지 6세로 즉위하면서 엘리자베스는 왕비가 되었다.[42] 1937년 5월 12일, 조지 6세와 함께 대관식을 거행했다.[42] 엘리자베스의 왕관은 백금과 코이누르 다이아몬드로 장식되었다.[42]퇴위한 에드워드 8세와 월리스 심프슨은 윈저 공작과 공작 부인이 되었으나,[43] 엘리자베스는 심프슨 부인을 '그 여자(that woman)'라고만 불렀고,[44] 심프슨 부인 역시 엘리자베스를 '쿠키(Cookie)'라고 부르며 반목했다.[69]
2. 4.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국왕 조지 6세와 왕비 엘리자베스는 반(反)파시즘의 상징이 되었다.[65] 1939년 9월,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 직후, 적십자사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자금 모금을 위한 서적 ''여왕의 적십자 책'' 출판이 기획되었다. 50명의 작가와 예술가가 참여한 이 책의 표지는 사진가 세실 비턴이 촬영한 엘리자베스의 초상화였으며, 책 판매 수익금은 적십자사에 사용되었다.[66]전쟁이 격화되어도 엘리자베스는 런던을 떠나거나 아이들을 캐나다로 피신시키는 것을 공개적으로 거부했으며, 런던이 독일 공군에 의한 대공습에 시달리는 가운데, 당시 내각의 피난 권고조차 거부했다. 이때 엘리자베스는 "아이들은 나를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국왕 폐하를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국왕 폐하는 런던을 떠나지 않으실 것입니다"라고 말했다.[68] 더욱이, 버킹엄 궁전이 공습의 직격을 받았을 때, "폭격당한 것에 감사합시다. 덕분에 이스트 엔드를 마주할 수 있게 되었어요"라고 말했다.[71]

엘리자베스는 군대, 병원, 공장, 그리고 독일 공군의 폭격 목표가 된 장소, 특히 저소득층이 많은 런던 항만 부근의 이스트 엔드를 여러 번 위문했다. 이러한 장소에 대한 왕비의 방문은 처음에는 반감을 사서 쓰레기를 던지거나 욕설을 듣기도 했다.[69] 이는 전시 중 물자 부족에 시달리는 사람들과 값비싼 옷을 입은 엘리자베스 사이의 괴리가 너무 컸던 것도 한 원인이었다. 이에 대해 엘리자베스는 국민들이 왕비를 만날 때 누구나 최고의 옷을 입고 오기 때문에 자신도 똑같이 했을 뿐이라는 해명을 했다. 결국 노먼 하트넬이 왕비를 위해 부드러운 색상에 검은색을 피하고 "희망의 무지개"를 표현하는 옷을 디자인했다.[70]

국왕 부부는 낮에는 버킹엄 궁전에서 집무를 보았지만, 안전상의 문제와 가족 관계 때문에, 야간에는 약 32.19km 정도 서쪽에 있는 윈저 성에서 아이들과 함께 지냈다. 윈저 성의 직원들 또한 징집되어 남아있는 인원이 적었고, 많은 방들이 사용되지 않은 채 닫혀 있었다.[72] 더욱이 창문 유리는 공습의 폭풍으로 날아가고, 대신 판자가 붙어 있었다.[73]
적국 나치 독일의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는 영국의 사기에 큰 영향을 미치는 엘리자베스를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여성"이라고 평가했다.[75]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이전의 조지 6세와 엘리자베스는 많은 각료 및 국민과 마찬가지로, 독일과의 유화 정책을 추진하는 총리 네빌 체임벌린을 지지했으며, 전 세계를 피폐하게 만든 제1차 세계 대전의 교훈에서, 어떠한 이유로든 전쟁은 피해야 한다고 믿었다.
1940년 5월, 그동안의 대독일 유화 정책이 실패로 돌아가 체임벌린이 총리직에서 물러나자, 조지 6세는 해군 장관 윈스턴 처칠에게 내각 구성을 명령했다. 처음에는 조지 6세는 처칠의 성격과 진심을 의심했지만, 이내 국왕 부부는 모두 처칠을 존경하고 칭찬하게 되었다.[76][77]
2. 5. 왕대비 시절
조지 6세가 사망한 직후, 엘리자베스는 "폐하 여왕 엘리자베스 왕대비 폐하"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왕의 과부에게 주어지는 일반적인 칭호인 "엘리자베스 여왕"이 그녀의 장녀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칭호와 너무 유사했기 때문이다.[88] 대중적으로 그녀는 "여왕 어머니" 또는 "여왕 마마"로 불리게 되었다.[89] 그녀는 남편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아 스코틀랜드로 은퇴했다. 그러나 윈스턴 처칠 영국 수상과의 만남 이후 은퇴를 번복하고 공무를 재개했다.[90] 결국 그녀는 왕대비로서 여왕 시절만큼이나 바쁜 일정을 소화하게 되었다.1953년 메리 왕비가 사망하면서 엘리자베스는 영국 왕실의 최고 어른이 되었다. 1953년 7월, 그녀는 장례식 이후 첫 해외 방문으로, 마거릿 공주와 함께 로디지아 니아살랜드 연방을 방문했다. 그녀는 로디지아 니아살랜드 대학교(현재의 짐바브웨 대학교)의 정초석을 놓았다.[91] 1957년 이 지역을 다시 방문했을 때, 엘리자베스는 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했으며, 의도적으로 다인종을 위한 다른 행사에 참석했다.[92] 1953년부터 1954년까지 딸의 광범위한 영연방 순방 기간 동안 엘리자베스는 국무 고문으로 활동했으며, 손주들인 찰스와 앤을 돌보았다.[93] 1959년 2월, 그녀는 케냐와 우간다를 방문했다.[94][95]

엘리자베스는 스코틀랜드 북부 해안에 있는 외딴 메이 성의 복원을 감독했는데, 매년 8월에는 3주, 10월에는 10일 동안 "모든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용했다.[96] 1949년 아마추어 기수 플리트의 로드 마일드메이에게 영감을 받아 경마, 특히 장애물 경주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98] 그녀는 약 500번의 경주에서 우승한 말을 소유했다. (소문과는 달리) 그녀는 결코 내기를 하지 않았지만, 경주 중계를 런던 거주지인 클래런스 하우스로 직접 연결하여 경주를 볼 수 있었다.[99] 예술품 수집가로서 그녀는 클로드 모네, 어거스터스 존, 카를 파베르제 등의 작품을 구매했다.[100]

과부 시절 동안 엘리자베스는 40번이 넘는 공식 해외 방문을 포함하여 광범위한 여행을 계속했다.[106] 1975년, 그녀는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이란 국왕의 초청으로 이란을 방문했다. 영국 대사와 그의 아내인 앤서니와 쉴라 파슨스는 이란 사람들이 지위나 중요성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말을 거는 그녀의 습관에 당황했으며, 국왕의 수행원들이 이 방문을 통해 일반 사람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도록 배우기를 바랐다고 기록했다.[107] 1976년부터 1984년까지 그녀는 매년 여름 프랑스를 방문했으며,[108] 이는 1963년부터 1992년까지 22번의 유럽 대륙 비공식 여행 중 일부였다.[109]
1982년, 엘리자베스는 생선 가시가 목에 걸려 응급으로 병원에 실려 갔고, 이를 제거하기 위한 수술을 받았다. 열렬한 낚시꾼이었던 그녀는 이후 "연어가 보복했다"라고 침착하게 농담했다.[110] 1986년 8월에는 발모랄 성에서 유사한 사건이 발생하여 애버딘 왕립 병원에서 하룻밤 입원했지만 수술은 필요하지 않았다.[111]
1964년 2월, 엘리자베스는 응급 충수 절제술을 받았고, 이로 인해 1966년까지 호주, 뉴질랜드, 피지를 방문하려던 계획이 연기되었다.[101] 그녀는 왕실 요트 ''브리타니아''를 타고 카리브해 크루즈 여행을 하며 건강을 회복했다.[102] 1966년 12월, 그녀는 결장암 진단을 받은 후 종양 제거 수술을 받았다. 이후 퍼진 소문과는 달리, 그녀는 결장루 수술을 받지 않았다.[103][104] 그녀는 1984년 유방암 진단을 받았고, 유방에서 덩어리를 제거했다. 그녀의 암 투병 사실은 생전에 공개되지 않았다.[105]
1987년, 엘리자베스는 그녀의 조카 두 명인 네리사 보우스-라이언과 캐서린 보우스-라이언이 심각한 학습 장애로 인해 1941년 서리주 레드힐에 있는 로열 얼스우드 병원에 수용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비판을 받았다.[113] 그러나, ''버크 귀족 명감''은 이 자매들을 사망한 것으로 기록했는데, 이는 그들의 어머니인 페넬라(엘리자베스의 올케)가 "서류를 작성하는 데 있어서 '매우 모호'했고, 가족 기록을 올바르게 작성하지 않았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114] 네리사가 1986년에 사망했을 때, 그녀의 묘는 원래 플라스틱 꼬리표와 일련 번호로 표시되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들이 시설에 수용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놀랐다고 말했다.[115]
2. 6. 노년기 및 사망

엘리자베스는 1990년 8월 4일, 90세 생일 기념 퍼레이드[116]와 1995년 전쟁 종식 50주년 기념 행사[117]에 참여했고, 백내장과 엉덩이 관절 수술을 받았다.[117] 1998년에는 엉덩이 부상으로 재수술을 받았다.[118]
2000년 11월, 쇄골 골절로 요양했고,[122] 2001년 8월에는 빈혈로 수혈을 받았으나, 며칠 후 101세 생일 기념 행사에 참석했다.[123][124] 이후 그녀는 마지막 공식 행사들에 참석했다.[125][126][127][128][129]
2001년 12월, 엘리자베스는 낙상으로 골반이 골절되었으나,[130] 2002년 2월 6일 남편 조지 6세 추모식에 참석했다.[130] 2002년 2월 13일, 엘리자베스는 넘어지면서 팔에 상처를 입었지만,[131] 2월 15일 윈저 성에서 열리는 마거릿의 장례식에 참석했다.[132]
2002년 3월 5일, 엘리자베스는 이튼 비글스 오찬에 참석하고 경마를 시청했다.[137]
2002년 3월 30일 15시 15분(그리니치 표준시), 엘리자베스는 윈저의 로열 로지에서 10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임종을 지켰다.[129] 101세 238일로, 그녀는 영국 왕실 최초로 100세 이상 생존한 구성원이었다.[140]
엘리자베스의 관은 웨스트민스터 홀에서 3일 동안 공개되었고, 약 20만 명이 조문했다.[142] 그녀의 손자 4명이 경의를 표하며 경비를 섰다.[143][144]
장례일인 4월 9일,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추모 행사가 열렸다.[145][146] 런던에서는 100만 명 이상이 운구 행렬을 지켜봤다.[147] 그녀는 남편과 딸 마거릿 옆에 안장되었으며, 요청에 따라 무명 용사의 묘에 화환이 놓였다.[148]
3. 유산과 평가
엘리자베스 왕비는 정치적 발언을 거의 하지 않았지만, 1947년 서한에서 클레멘트 애틀리를 "사회주의 낙원을 꿈꾸는" 인물로 묘사하고, 그에게 투표한 사람들을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혼란스러운 불쌍한 사람들"이라고 표현했다.[227] 우드로 와이어트(:en:Woodrow Wyatt)는 그녀를 왕족 중 "가장 보수당에 가깝다"고 평가했지만,[228] 엘리자베스는 후에 와이어트에게 "저는 옛날 노동당을 좋아합니다"라고 말했다.[229] 또한 엘리자베스는 그래프턴 공작 부인 앤 피츠로이(:en:Fortune FitzRoy, Duchess of Grafton)에게 "저는 공산주의자를 사랑합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1947년 남아프리카 방문 당시, 열렬히 환영하던 남성을 적대적인 인물로 오해하여 우산으로 때린 일화가 있다.
3. 1. 긍정적 평가
엘리자베스 왕대비는 개인적 매력과 대중적 인기로 영국 국민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불굴의 의지를 보여주어 국민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톡톡히 해냈으며, 이러한 용기와 리더십은 높이 평가된다.[192] 당시 적국이었던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 총통은 엘리자베스 왕비를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여성"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192]엘리자베스 왕대비는 조지 6세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에도 왕실의 일원으로서, 특히 영국 군주제의 인기를 안정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225]
3. 2. 비판적 평가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왕대비는 대중적으로 높은 인기를 얻어 영국 왕실의 평판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246][247] 그러나 그녀의 생애 동안 여러 비판도 제기되었다.저널리스트 키티 켈리는 엘리자베스가 제2차 세계 대전 중 전시 배급 규정을 지키지 않았다고 주장했다.[246][247] 그러나 이 주장은 공식 기록과 모순된다.[248] 엘리너 루스벨트의 기록에 따르면, 버킹엄 궁전에서는 배급된 식량이 제공되었고 목욕물 사용량도 제한되었다.[249]
켈리는 엘리자베스가 흑인을 인종차별적 용어로 불렀다고도 주장했지만,[246] 이는 콜린 버제스에 의해 강하게 부정되었다.[250] 엘리자베스는 공식적으로 인종 관련 발언을 한 적이 없지만, 로버트 로즈 제임스는 사적인 자리에서 그녀가 인종차별을 혐오하고 아파르트헤이트를 비난했다고 기록했다.[252] 우드로 와이어트는 엘리자베스가 영국 연방 국가들을 "우리와 같다"고 말했다고 기록했지만,[253] 독일인에 대해서는 불신감을 드러냈다고 한다.[254] 그러나 이는 당시 일반적인 시각이었다는 평가도 있다.[255]
1987년에는 엘리자베스의 조카들이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었고, '버크스 피어리지'에 사망한 것으로 기재된 사실이 밝혀져 비난받았다.[256] 엘리자베스는 이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고 반박했다.[257]
4. 가족 관계
아서 채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