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니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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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니마루는 가마쿠라 시대 초기에 제작된 일본도로, 일본 황실 소유의 보물이다. 호조 도키요리가 악몽을 꾼 후 칼로 소귀의 목을 베었다는 전설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여러 권력자들을 거쳐 메이지 시대에 황실 소유가 되었다. 천하오검 중 유일하게 국보 또는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으며, 일반 공개는 드물게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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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니마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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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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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류 | 태도 |
지정 | 어물 |
칼날 길이 | 약 78.2 cm |
휘어짐 | 3.2 cm |
칼 폭 (위) | 1.97 cm |
칼 폭 (아래) | 2.88 cm |
칼 두께 (위) | 0.52 cm |
칼 두께 (아래) | 0.79 cm |
제작 정보 | |
제작 시기 | 가마쿠라 시대 |
도공 | 구니쓰나 |
유파 | 아와타구치파 |
2. 역사
가마쿠라 시대 초기 야마시로국 교노아와타구치파(京粟田口派)의 도공이자 아와타구치 6형제의 막내동생인 구니쓰나(国綱)가 오니마루를 제작하였다. 호조 도키요리(北条時頼)는 밤마다 꿈에 나타나는 작은 도깨비(小鬼)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꿈에 나타난 노인의 조언대로 칼 구니쓰나를 손질하여 세워두자 칼이 넘어져 화로에 새겨진 오니의 목을 잘랐다. 이 사건 이후, 구니쓰나는 「오니마루」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3]
이후 오니마루는 호조 다카토키(北条高時) 사후 닛타 요시사다(新田義貞)를 거쳐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에게 넘어갔다.[3] 아시카가 쇼군가의 보물이 된 오니마루는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에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를 거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전해졌다는 설과, 직접 히데요시에게 주어졌다는 두 가지 설이 있지만, 히데요시의 소유가 되었다는 점은 같다.[3]
오사카 전투 이후 오니마루는 도쿠가와 쇼군가의 소유가 되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 도쿠가와 히데타다(徳川秀忠)와 함께 혼아미 가문에 맡겨졌다.[3] 고미즈노오 천황(後水尾天皇)에게 황태자가 태어난 날 헌상되었으나 황태자가 사망하면서 불길하다는 이유로 다시 혼아미 가문에 돌려보내졌다.[3]
도쿠가와 요시무네(徳川吉宗)는 혼아미 가문에 명해 오니마루를 에도 성으로 가져오게 했다.[3] 메이지 유신 이후 1881년(메이지 14년), 메이지 천황에게 수집되어 어물(御物)이 되었다.[3] 현재는 일본 황실의 소장이다.
천하오검 가운데 유일하게 황실 소유물인 오니마루는 일본의 국보 및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 않다.[3]
2. 1. 제작 배경 및 이름의 유래
가마쿠라 시대 초기 야마시로국 교노아와타구치파(京粟田口派)의 도공이자 아와타구치 6형제의 막내동생인 구니쓰나(国綱)의 작품이다. 칼날 길이는 두 자 다섯 치 여덟 푼(약 78.2cm), 휘어짐은 한 치 한 푼(약 3.2cm)이다. 가마쿠라 시대에 들어서 타치의 도신(刀身)의 휘어짐이 커지고 그때까지의 타치에 현저하던 「고시소리」(腰反り)에서 도신 전체가 균등하게 휘어져 있는 「와소리」(輪反り)로 이행되던 시기의 타치로 선대 또는 후대의 「타치」와 비교해도 큰 소리(휨)을 가지고 있다.[7]타이헤이키(太平記)에 따르면, 가마쿠라 막부의 싯켄 호조 도키요리(北条時頼)가 밤마다 꿈에 나타나는 작은 도깨비(小鬼)에 시달렸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도키요리의 꿈에 노인이 나타나 "나는 타치 구니쓰나이다. 허나 부정한 자의 손에 쥐여져 녹이 슬어버려서 칼집을 벗어날 수가 없다. 서둘러 요괴를 없애고 싶다면 어서 이 녹을 없애 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도키요리는 바로 구니쓰나를 꺼내서 손질해 방에 세워두었는데, 구니쓰나가 갑자기 넘어져 화로에 새겨져 있던 세공된 오니의 목을 잘랐다. 도키요리의 방에 있던 화로의 발은 은으로 만든 오니의 형태였다. 이후 도키요리의 꿈에는 더 이상 작은 도깨비가 나타나지 않았고, 이 사건으로 해서 구니쓰나는 「오니마루」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2. 2. 소유권 변동
호조 도키요리(北条時頼)가 밤마다 꿈에 나타나는 소귀(小鬼)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꿈에 나타난 노인의 조언대로 칼 구니쓰나를 손질하여 세워두자 칼이 넘어져 화로에 새겨진 오니의 목을 자른 사건 이후, 구니쓰나는 「오니마루」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3]이후 오니마루는 호조 다카토키(北条高時)가 자결한 뒤 닛타 요시사다(新田義貞)에게 넘어갔고, 요시사다가 죽은 뒤에는 그의 수급과 함께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에게 보내졌다.[3] 아시카가 쇼군가의 보물이 된 오니마루는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에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를 거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전해졌다는 설과, 직접 히데요시에게 주어졌다는 두 가지 설이 있지만, 히데요시의 소유가 되었다는 점은 같다.[3] 히데요시는 오니마루를 혼아미 코토쿠(本阿弥光徳)에게 맡겼다.
오사카 전투 이후 오니마루는 도쿠가와 쇼군가의 소유가 되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 도쿠가와 히데타다(徳川秀忠)와 함께 혼아미 가문에 맡겨졌다.[3] 고미즈노오 천황(後水尾天皇)에게 황태자가 태어난 날 고쇼(御所)에 헌상되었으나 황태자가 사망하면서 불길하다는 이유로 다시 혼아미 가문에 돌려보내졌다.[3]
도쿠가와 요시무네(徳川吉宗)는 혼아미 가문에 명해 오니마루를 에도 성으로 가져오게 했다.[3] 메이지 유신 이후 혼아미 가문은 오니마루의 소유권에 대해 메이지 신정부에 신고했고, 1881년(메이지 14년) "고미즈노오 천황에게 헌상된 것을 도쿠가와 막부를 통해서 혼아미 가문에게 맡겼던 것"이라는 이유로 메이지 천황에게 수집되어 어물(御物)이 되었다.[3] 현재는 일본 황실의 소장이다.
천하오검 가운데 유일하게 황실 소유물인 오니마루는 일본의 국보 및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 않다.[3]
3. 특징
오니마루는 가마쿠라 시대 초기 야마시로국 교노아와타구치파(京粟田口派)의 도공이자 아와타구치 6형제의 막내동생인 구니쓰나(国綱)의 작품이다. 칼날 길이는 78.2cm, 휨은 3.2cm이다. 가마쿠라 시대에 들어와 태도의 칼날 휨이 커졌으며, 그전의 태도에 현저했던 "허리 휨"에서 칼날 전체가 균등하게 휜 "둥근 휨"("도리이 휨"이라고도 함)으로 이행되던 시기의 태도로, 이전 시대 및 후대의 "태도"와 비교해도 큰 휨을 가지고 있다.[7]
지철(지가네)은 잘 다져지고, 지비(지니에)가 붙어있으며, 지후우츠리(지반영)가 나타난다. 칼날 무늬는 니에데키(비등)이며, 넓은 곧은 칼날 모양의 작은 쵸지 난(정자 난)으로, 허리 칼날을 굽는다. 메쿠기구멍은 1개이며, 구멍 위의 무네(棟, 칼등) 부분에 "구니쓰나"라는 두 글자 명문이 있다.
3. 1. 칼의 형태
가마쿠라 시대 초기 야마시로국 교노아와타구치파(京粟田口派)의 도공으로 아와타구치 6형제의 막내동생인 구니쓰나(国綱)의 작품이다. 칼날 길이는 2 자 5 치 8 푼 (약 78.2cm), 휨은 1치 1푼 (약 3.2cm)이다. 가마쿠라 시대에 들어와 태도의 칼날 휨이 커졌으며, 그전의 태도에 현저했던 "허리 휨"에서 칼날 전체가 균등하게 휜 "둥근 휨"("도리이 휨"이라고도 함)으로 이행되던 시기의 태도로, 이전 시대 및 후대의 "태도"와 비교해도 큰 휨을 가지고 있다.[7]칼집과 칼자루 전체를 갈색의 시보카와(皺革, 주름진 가죽)로 덮고 그 위에 금갈색의 실로 감았으며 날밑을 검게 옻칠한 가죽으로 덮은 「가와즈쓰미타치」(革包太刀) 양식의 고시라에(拵)가 부속되어 있고, 무로마치 시대 초기의 제작으로 추정되고 있다.[8] 이 고시라에의 양식을 특별히 「오니마루코시라에」(鬼丸拵)라고 부르며 「가와즈쓰미타치코시라에」(革包太刀拵)의 대명사이다.
제작 기법은 지철(지가네)이 잘 다져지고, 지비(지니에)가 붙어있으며, 지후우츠리(지반영)가 나타난다. 칼날 무늬는 니에데키(비등)이며, 넓은 곧은 칼날 모양의 작은 쵸지 난(정자 난)으로, 허리 칼날을 굽는다. 메쿠기구멍은 1개이다. 메쿠기 구멍 위의 棟(무네) 부분에 "쿠니츠나"라는 두 글자 명문이 있다.
3. 2. 제작 기법
가마쿠라 시대 초기 야마시로국(교토) 교노아와타구치파(京粟田口派)의 도공이자 아와타구치 6형제의 막내동생인 구니쓰나(国綱)의 작품이다. 칼날 길이는 2자 5치 8푼(약 78.2cm), 휘어짐은 1치 1푼(약 3.2cm)이다. 가마쿠라 시대에 들어서 타치(太刀)의 도신(刀身) 휘어짐이 커지고, 그때까지의 타치에 현저하던 「고시소리」(腰反り)에서 도신 전체가 균등하게 휘어져 있는 「와소리」(輪反り)[7]로 이행되던 시기의 타치로, 이전 시대나 후대의 「타치」와 비교해도 큰 휘어짐을 가지고 있다.칼집과 칼자루 전체를 갈색의 시보카와(皺革, 주름진 가죽)로 덮고 그 위에 금갈색 실로 감았으며, 날밑을 검게 옻칠한 가죽으로 덮은 「가와즈쓰미타치」(革包太刀) 양식의 고시라에(拵)가 부속되어 있다. 이 고시라에는 무로마치 시대 초기의 제작으로 추정된다.[8] 이 고시라에의 양식을 특별히 「오니마루코시라에」(鬼丸拵)라고 부르며, 「가와즈쓰미타치코시라에」(革包太刀拵)의 대명사이다.
제작 기법은 지철(地鉄, 지가네)이 잘 다져지고, 지비(地沸, 지니에)가 붙어있으며, 지후우츠리(地斑映, 지반영)가 나타난다. 칼날 무늬는 니에데키(沸出来, 비등)이며, 넓은 곧은 칼날 모양의 작은 쵸지(丁子, 정자) 난(乱)으로, 허리 칼날을 굽는다. 메쿠기(칼자루를 고정하는 못) 구멍은 1개이다. 메쿠기 구멍 위의 무네(棟, 칼등) 부분에 "구니쓰나(国綱)"라는 두 글자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3. 3. 오니마루코시라에(拵)
칼집과 칼자루 전체를 갈색 시보카와(皺革, 주름진 가죽)로 덮고 그 위에 금갈색 실로 감았으며 날밑을 검게 옻칠한 가죽으로 덮은 가와즈쓰미타치(革包太刀) 양식의 고시라에(拵)가 부속되어 있다. 무로마치 시대 초기의 제작으로 추정된다.[8] 이 고시라에 양식을 특별히 '''오니마루코시라에'''(鬼丸拵)라고 부르며, 가와즈쓰미타치코시라에(革包太刀拵)의 대명사이다.참조
[1]
서적
日本刀大鑑 古刀篇1【図版】
大塚巧藝社
[2]
웹사이트
髭切
https://web.archive.[...]
[3]
웹사이트
天下五剣「鬼丸国綱」 - 刀剣ワールド
https://www.touken-w[...]
2020-01-13
[4]
간행물
W・A・コンプトン博士 日本刀コレクション特別展目録
日本美術刀剣保存協会
1970-09-08
[5]
문서
作風解説は「日本美術名宝展」(東京国立博物館・京都国立博物館、1986年)図録および特別展「日本のかたな」(東京国立博物館、1997)図録による。
[6]
문서
拵の年代は「日本美術名宝展」(東京国立博物館・京都国立博物館、1986年)図録による。
[7]
문서
"「도리이소리」(鳥居反り)라고도 한다."
[8]
문서
고시라에의 연대는 「日本美術名宝展」(東京国立博物館・京都国立博物館、1986年)도록에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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