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언 래티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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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언 래티모어는 20세기 중앙아시아 연구의 선구적인 인물로, 중국과 몽골을 중심으로 한 역사, 지리, 문화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00년 워싱턴 D.C.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성장했으며, 옥스퍼드 대학교 입학을 포기하고 중국에서 언론인과 사업가로 활동하며 중국과 중앙아시아에 대한 경험을 쌓았다. 이후 학계로 돌아와 '퍼시픽 어페어스' 편집장, 루스벨트 대통령의 정치 고문 등을 역임하며 중앙아시아 연구를 심화했다. 그는 '내륙아시아적 접근법'과 변경(Frontier) 연구를 통해 이 지역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기여했으나, 매카시즘 시기 공산주의자로 몰려 탄압받기도 했다. 1963년 리즈 대학교에 중국학과를 설립하고 몽골학 연구를 진흥했으며, 1979년 몽골 정부로부터 북극성 훈장을 수여받았다.
래티모어는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부모인 데이비드와 마가렛 래티모어가 중국 대학에서 영어 교사로 재직하고 있던 중국 톈진에서 성장했다. 그의 형제는 시인이자 고전학자이며 번역가인 리치몬드 래티모어였고, 그의 누이 중 한 명은 작가인 엘리너 프랜시스 래티모어였다.
오언 래티모어는 일제강점기 한국에 대한 인식과 한국 독립에 대한 지지, 한국전쟁 전후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에 대한 입장 등을 통해 한국과 관계를 맺었다. 그는 일본 제국의 한국 지배를 강하게 비판하고 한국의 독립을 지지했으며, 1949년에는 미국 국무성에 제출한 극동정책 각서에서 미국이 한국 문제에 지나치게 몰입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 생애
어머니에게 홈스쿨링을 받은 후, 12세에 중국을 떠나 스위스 로잔 근처의 콜레주 클라시크 캉토날에 다녔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으로 보내져 잉글랜드 컴브리아주의 세인트 비스 학교에 입학했다(1915–1919). 그는 문학, 특히 시에 대한 관심을 가졌고 잠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옥스퍼드 대학교 입학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지만, 대학에 다닐 자금이 부족하여 1919년 중국으로 돌아갔다.[46]
그는 처음에 신문사에서 일했고, 그 다음에는 영국의 수입/수출 관련 사업을 했다. 이를 통해 그는 중국을 광범위하게 여행할 기회를 얻었고, 구식 유교 학자와 함께 중국어를 공부할 시간을 가졌다. 그의 상업적인 여행은 또한 그에게 삶과 경제의 현실을 느끼게 해주었다. 전환점은 1925년 초 두 명의 교전 중인 군벌의 세력선을 통과하는 양모 열차의 통과를 협상한 것이었는데, 이 경험으로 그는 이듬해 내몽골을 가로질러 신장의 종착역까지 낙타 무리를 따라가게 되었다.[3]
그의 회사의 경영진은 그의 여행을 지원하는 데 아무런 이점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를 정부 연락관으로 베이징에서 그들과 함께 마지막 1년을 보내도록 보냈다. 원정 출발 전 베이징에서 보낸 이 해에 그는 아내인 엘리너 홀게이트를 만났다. 신혼여행으로 그들은 베이징에서 인도로 여행할 계획을 세웠는데, 그는 육로로, 그녀는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기차로 여행할 계획이었다. 20세기 전반기에는 엄청난 일이었다. 결국 계획이 차질을 빚었고, 그녀는 그를 찾기 위해 2월에 썰매를 타고 약 643.74km를 홀로 여행해야 했다. 그녀는 자신의 여행을 ''투르키스탄 재회''(1934)에서, 그는 ''투르키스탄으로 가는 사막길''(1928)과 ''고 타타리''(1930)에서 묘사했다. 이 여행은 몽골인과 실크로드의 다른 민족과 관련된 모든 문제에 대한 그의 평생 관심의 토대를 마련했다.
1928년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사회 과학 연구 위원회로부터 만주에서의 추가 여행을 위한 연구비를 받았고, 1928/1929 학년도에는 하버드 대학교 학생으로 있었다. 그러나 그는 박사 과정에 등록하지 않고, 하버드-옌칭 연구소와 존 사이먼 구겐하임 기념 재단의 연구비를 받아 1930–1933년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중앙 아시아 여행에 대해 1942년 영국 왕립 지리학회로부터 후원자 메달을 받았다.[4] 1943년에는 미국 철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다.[5]
2. 1. 초기 생애와 교육
워싱턴 D.C.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은 중국 톈진에서 보냈다. 그의 부모 데이비드와 마가렛 래티모어는 중국 대학에서 영어 교사로 일했다. 형제로는 고전 번역가 리치몬드 래티모어가 있었고, 자매로는 아동 작가 엘리너 프랜시스 래티모어가 있었다. 오언 래티모어는 교사인 어머니에게 홈스쿨링을 받은 뒤, 12살에 중국을 떠나 스위스 로잔 근처의 콜레주 클라시크 광토날(College Classique Cantonal)에 입학하였다(1913~1914).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인 1914년 영국으로 가 세인트 비스 학교(St Bees School)에 다녔다(1915–1919). 그곳에서 문학, 특히 시에 관심을 보였으며 잠시 가톨릭으로 개종하기도 하였다. 옥스퍼드 대학교 입학 시험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으나, 1919년 중화민국으로 돌아왔다. 당시 대학에 다닐 충분한 자금이 없었기 때문이다.[46]
2. 2. 중국에서의 경험과 학문적 성장
래티모어는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부모인 데이비드와 마가렛 래티모어가 중국 대학에서 영어 교사로 재직하고 있던 중국 톈진에서 성장했다. 어머니의 가정 교육을 받은 후, 12세에 중국을 떠나 스위스 로잔 근처의 콜레주 클라시크 캉토날에서 공부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후, 영국으로 보내져 잉글랜드 컴브리아주의 세인트 비스 학교에서 공부했다(1915–1919). 옥스퍼드 대학교 입학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지만, 대학에 다닐 자금이 부족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1919년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처음에 신문사에서 일했고, 그 다음에는 영국의 수입/수출 관련 사업을 했다. 이를 통해 그는 중국을 광범위하게 여행할 기회를 얻었고, 구식 유교 학자와 함께 중국어를 공부할 시간을 가졌다. 그의 상업적인 여행은 또한 그에게 삶과 경제의 현실을 느끼게 해주었다. 전환점은 1925년 초 두 명의 교전 중인 군벌의 세력선을 통과하는 양모 열차의 통과를 협상한 것이었는데, 이 경험으로 그는 이듬해 내몽골을 가로질러 신장의 종착역까지 낙타 무리를 따라가게 되었다.[3]
그의 회사의 경영진은 그의 여행을 지원하는 데 아무런 이점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를 정부 연락관으로 베이징에서 그들과 함께 마지막 1년을 보내도록 보냈다. 원정 출발 전 베이징에서 보낸 이 해에 그는 아내인 엘리너 홀게이트를 만났다. 신혼여행으로 그들은 베이징에서 인도로 여행할 계획을 세웠는데, 그는 육로로, 그녀는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기차로 여행할 계획이었다. 20세기 전반기에는 엄청난 일이었다. 결국 계획이 차질을 빚었고, 그녀는 그를 찾기 위해 2월에 썰매를 타고 약 643.74km를 홀로 여행해야 했다. 그녀는 자신의 여행을 ''투르키스탄 재회''(1934)에서, 그는 ''투르키스탄으로 가는 사막길''(1928)과 ''고 타타리''(1930)에서 묘사했다. 이 여행은 몽골인과 실크로드의 다른 민족과 관련된 모든 문제에 대한 그의 평생 관심의 토대를 마련했다.
1928년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사회 과학 연구 위원회로부터 만주에서의 추가 여행을 위한 연구비를 받았고, 1928/1929 학년도에는 하버드 대학교 학생으로 있었다. 그러나 그는 박사 과정에 등록하지 않고, 하버드-옌칭 연구소와 존 사이먼 구겐하임 기념 재단의 연구비를 받아 1930–1933년 중국으로 돌아갔다.
2. 3. 퍼시픽 어페어스와 태평양문제연구소 활동
1934년부터 1941년까지 태평양 문제 연구소(IPR)의 기관지인 '퍼시픽 어페어스(Pacific Affairs)'의 편집장을 맡았다.[6] 래티모어는 '퍼시픽 어페어스'를 다양한 관점과 새로운 아이디어를 담는 논쟁의 장으로 만들고자 노력했다.[6] 펄 벅 등 저명한 학자와 작가들뿐만 아니라 중국 문인, 마르크스주의자들도 기고자로 참여했다.[6]
에드워드 카터 IPR 사무총장은 소련 학자들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래티모어에게 미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모스크바에서 그를 만나야 한다고 주장했다.[6] 래티모어는 소련 방문 비자를 받지 못해 소련에 가본 적은 없었지만, 중앙아시아 연구에 뛰어난 전통을 가진 소련 학자들의 기고를 원했다. 그러나 그는 소련 학자들이 자신을 "학문주의는 햄릿의 광기와 비슷하다"라고 공격하고, 트로츠키주의자로 여겨지는 해럴드 아이작스의 기사를 출판한 것에 대해 비판한 것에 대해 경계했다.[6] 래티모어 부부는 1936년 3월 말, 5살 된 아들과 함께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타고 2주 동안 모스크바에 머물렀다.[6] 소련 관리들은 IPR과 '퍼시픽 어페어스'가 일본에 대한 집단 안보 조치를 지지해야 한다고 냉정하게 요구했고, 래티모어는 '퍼시픽 어페어스'가 일본을 포함한 모든 국가 위원회에 봉사할 의무가 있으며 정치적 편을 들 수 없다고 답했다. 래티모어가 몽골 인민 공화국을 방문하겠다는 요청은 "몽골은 현재 끊임없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으며 상황이 매우 불안정하다"는 이유로 거부되었다.[6] 결국 소련 학자들은 '퍼시픽 어페어스'에 단 한 편의 기사만 보냈다.[6]
2. 4. 제2차 세계 대전과 정치 고문 활동
1941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의 요청으로 장제스의 정치 고문으로 임명되어 중국으로 파견되었다.[23][24] 그는 중국 내 소수민족 문제에 관심을 갖고, 소련의 소수민족 정책을 기반으로 한 문화 자치 정책을 제안했으나, 장제스 측근들에 의해 대부분 무시되었다. 1944년 미국 전쟁 정보국(OWI)의 태평양 방면 작전 부장으로 임명되었다. 헨리 월리스 부통령과 함께 시베리아, 중국, 몽골을 방문했으며, 이 과정에서 소련의 굴라그(강제 수용소)를 방문하기도 했다.
2. 5. 전후 매카시즘 탄압과 학계 복귀
제2차 세계 대전 후, 매카시즘 광풍 속에서 래티모어는 공산주의자로 몰려 탄압받았다. 1950년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은 래티모어를 "미국 극동 정책의 설계자"이자 "소련의 최고 간첩"이라고 비난했다.[81] 루이스 부덴츠는 래티모어가 비밀 공산주의자이며 소련의 외교 정책을 돕는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고 증언했다.[81] 1952년 위증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1955년 연방 판사에 의해 기각되었다.
이러한 탄압으로 인해 래티모어는 존스 홉킨스 대학교에서 강의를 할 수 없게 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1963년 래티모어는 존스 홉킨스 대학교를 떠나 영국의 리즈 대학교로 옮겨 중국학과를 설립하고, 몽골학 연구를 진흥시켰다.
2. 6. 은퇴와 사망
1963년 존스 홉킨스 대학교에서 중국학을 가르치다가 1970년 리즈 대학교에서 명예 교수로 은퇴했다.[78] 1979년에는 몽골 정부로부터 외국인에게 주는 최고 훈장인 북극성 훈장을 받았다.[79] 1989년 미국 로드아일랜드주 프로비던스에서 사망했다.
3. 한국과의 관계
3. 1. 일제 강점기 한국에 대한 인식
오언 래티모어는 일본 제국의 한국 지배를 강하게 비판했다. 1942년 동서방협회 강연에서 "조선은 일본 제국주의 침략사의 가장 추악하고 어두운 면을 보여주는 곳"이라고 발언했다. 그는 일본의 식민 통치가 한국의 민족정신, 문화, 역사 전통을 말살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한 한국인들의 독립 의지를 높이 평가하며, "죽음을 무릅쓰고 다시 자유를 되찾고자 하는 강한 열정과 의지를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43]
3. 2. 한국 독립에 대한 지지
래티모어는 한국 독립을 지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1942년 강연에서 "한국 독립 문제는 먼저 큰 문제(제2차 세계 대전)를 해결한 뒤 결정해야 할 부분"이라고 언급하며,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국의 승리와 일본 제국의 패망이 한국 독립의 전제 조건임을 강조했다. 일본의 '대동아공영' 구호에 맞서, 동맹국들에게 "이번 전쟁은 아시아 인민의 민주와 자유를 위한 전쟁"임을 인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43] [44]
3. 3. 한국전쟁 전후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에 대한 입장
1949년 8월, 래티모어는 미국 국무성에 제출한 극동정책 각서에서 "남한은 미국의 이익 내지 정책에 대하여 자산이기보다 부채"라고 지적하며, 미국이 한국에서 벌어지는 분규에 지나치게 몰입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고 주장했다.[70] 1950년 4월,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 연설에서도 "미국은 한국에서 벌어지는 분규(좌우익 대립)에 지나치게 몰입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고 주장했다.[70] 이러한 주장은 당시 한국의 정치적 혼란과 좌우 대립, 그리고 냉전 초기 미국의 외교 전략 등을 고려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래티모어의 이러한 주장은 당시 주미 한국대사 장면의 반박 성명을 불러일으키는 등 논란을 야기했다.[70]
4. 주요 이론 및 학문적 기여
오언 래티모어는 중국과 그 주변 지역, 특히 유목 사회와 정주 사회의 상호작용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통해 현대 중앙아시아 연구의 기초를 다졌다. 그는 문명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과 환경에 의해 형성되는 과정을 탐구했다.
한 역사학자는 "현대의 역사학자, 인류학자, 고고학자들이 래티모어의 많은 주장을 수정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그의 통찰력에 의존하고 있다. 래티모어가 다루고 있는 모든 주제는 세계 역사학자들에게 계속 영감을 주고 있다."라고 평가했다.[3]
래티모어는 1947년 저서 《중국의 역사 지리에 대한 내륙 아시아적 접근법》에서 인류가 환경에 영향을 미치고 환경에 의해 변화하는 시스템을 탐구했으며, 문명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의해 형성된다고 결론 내렸다. 그는 다음과 같은 패턴을 제시했다.
# 원시 사회는 몇몇 농업 활동을 추구하지만, 많은 한계를 인식하고 있다.
# 성장하고 발전하면서, 사회는 환경을 변화시키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사냥감과 야생 작물의 고갈로 동식물을 가축화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활동을 위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토지를 개간한다.
# 환경이 변화하여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초원이 된다.
# 사회는 이에 반응하여 새로운 사회로서 새로운 기회에 대응한다. 예를 들어, 한때 유목민이었던 사람들은 영구적인 정착지를 건설하고 수렵 채집 사고방식에서 농경 사회 문화로 전환한다.
# 상호 작용 과정은 계속되어 새로운 변형을 제공한다.
4. 1. '내륙아시아적 접근법'
래티모어는 1947년 저서 《중국의 역사 지리학에 대한 내륙 아시아적 접근법》에서 인류가 환경에 영향을 미치고 환경에 의해 변화하는 시스템을 탐구했으며, 문명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의해 형성된다고 결론 내렸다.[38] 그는 다음과 같은 패턴을 제시했다.1. 원시 사회는 몇몇 농업 활동을 추구하지만, 많은 한계를 인식하고 있다.
2. 성장하고 발전하면서, 사회는 환경을 변화시키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사냥감과 야생 작물의 고갈로 동식물을 가축화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활동을 위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토지를 개간한다.
3. 환경이 변화하여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초원이 된다.
4. 사회는 이에 반응하여 새로운 사회로서 새로운 기회에 대응한다. 예를 들어, 한때 유목민이었던 사람들은 영구적인 정착지를 건설하고 수렵 채집 사고방식에서 농경 사회 문화로 전환한다.
5. 상호 작용 과정은 계속되어 새로운 변형을 제공한다.
한 역사학자는 "현대 역사가, 인류학자, 고고학자들은 래티모어의 많은 주장을 수정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그의 통찰력에 의존하고 있다. 래티모어가 다룬 모든 주제는 오늘날에도 세계 역사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라고 평가했다.[38]
4. 2. 유목 사회와 정주 사회의 관계
래티모어는 유목 사회와 정주 사회의 관계를 단순히 대립하는 것이 아닌, 서로 의존하며 역동적으로 발전하는 관계로 보았다. 그는 중국 역사에서 유목 민족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며, 이들 간의 상호작용이 중국 문명의 형성과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관점은 당시 서구 중심의 역사관에서 벗어나, 비서구 사회의 역동성과 복잡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3]그는 저서 《중국 역사지리에 대한 내륙아시아 접근법》(1947년)에서 인류가 환경에 영향을 주고받는 시스템을 탐구하며, "'''문명은 환경에 대한 그 자체의 영향에 의해 형성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다음과 같은 패턴을 제시했다.
# 원시 사회는 농업 활동을 하지만, 한계를 인지한다.
# 사회가 성장하며 주변 환경을 변화시킨다. (예: 동식물 길들이기, 숲 파괴)
# 변화된 환경은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예: 숲 파괴로 인한 초원 형성)
# 사회는 변화에 대응하여 새로운 기회에 반응한다. (예: 유목민의 정착, 수렵-채집 문화에서 농경 사회로 전환)
# 상호적인 과정이 계속되며 서로에게 새로운 변화를 가져온다.
이러한 래티모어의 주장은 현대 역사학자, 인류학자, 고고학자들에 의해 일부 수정되었지만, 여전히 그의 통찰력은 유효하며, 그가 다룬 주제들은 세계 역사학자들에게 계속 영감을 주고 있다.[3]
4. 3. 변경(Frontier) 연구
래티모어는 1947년 저서 《중국 역사지리에 대한 내륙아시아 접근법》에서 '변경(Frontier)' 개념을 통해 인류가 환경에 영향을 미치고 그에 의해 변화되는 시스템을 탐구했다. 그는 문명이 환경에 대한 그 자체의 영향에 의해 형성된다고 보았다. 래티모어는 다음과 같은 패턴을 제시했다.단계 | 내용 |
---|---|
1 | 원시 사회는 농업 활동을 하지만, 많은 한계가 있다. |
2 | 사회가 성장하며 주변 환경을 변화시킨다. 예를 들어, 사냥감과 야생 작물이 줄어들면 동식물을 길들이고(농경이나 목축), 이를 위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숲을 파괴한다. |
3 | 변화된 환경은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숲이 파괴되어 초원이 된다. |
4 | 사회는 이에 대응하여 변화하고, 새로운 기회에 반응한다. 예를 들어, 유목민이 정착지를 건설하고 수렵-채집 문화에서 농경 사회 문화로 전환한다. |
5 | 상호적인 과정은 계속 진행되며 서로에게 새로운 변형을 제공한다. |
5. 비판과 논란
오언 래티모어는 제2차 세계 대전 전후 미국의 대중국 정책 형성에 관여하면서 매카시즘 시기 사상 검증의 표적이 되었다. 1950년 조지프 매카시는 래티모어를 공산주의자로 고발했지만, 오히려 매카시 측이 비판받으며 고발은 기각되었다. 그럼에도 래티모어는 존스 홉킨스 대학교에서 강의를 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영국으로 떠나게 되었다.[65]
래티모어는 소련의 소수민족 정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몽골의 독립을 지지했다.[7]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소련의 팽창주의와 스탈린주의 체제의 억압을 간과했다는 비판을 받았다.[7] 또한, 헨리 월리스 부통령과 함께 소련을 방문했을 때 굴라그(강제 수용소)의 긍정적인 면을 부각하는 글을 써 논란이 되기도 했다.[7]
5. 1. 매카시즘 시기 공산주의자 혐의
1948년 12월 14일, 그리스 아테네 주재 소련 대사관의 전 책임자였던 알렉산드르 바르미네는 연방수사국 요원들에게 "소련의 GRU 국장 옌 카를로비치 베르진(Yan Karlovich Berzin)이 1937년에 래티모어는 소련 요원이라고 알렸다"고 고발했고, 1951년 미국 상원의 상원 내부 보안 분과 위원회(Senate Internal Security Subcommittee)에서 바르미네는 선서를 앞두고 다시 한 번 이를 고발하였다.[62][63][64]1950년 3월, 타이딩 위원회의 간부회의에서,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은 오언 래티모어가 미국 연방정부 또는 미국 국무부에서 소련의 최고 요원으로 암약했었다고 비난했다.[65] 밀러드 타이딩스 상원의원이 위원장을 맡고 있던 이 위원회는 당시 조셉 매카시 의원이 주장하던 "미국 국무부에 소련의 간첩들이 대거 침투해 있다"는 것에 대한 진위를 조사하고 있었다. 이 비난이 언론에 유출되자 매카시는 래티모어가 간첩이라는 비난은 접었지만, 이후 위원회의 공개 회기와 연설에서 래티모어에 대한 공격을 계속했다.
매카시는 래티모어가 '미국 국무부에서 자신의 막강한 권력에 대한 입장에 비추어 볼 때' "미국 극동정책의 '수립자'"였고 "그의 목표가 미국적인 것인지 아니면 소련의 목적과 일치하는 것인지를 물었다"고 말했다. 당시 래티모어는 유엔 문화 사절단으로 아프가니스탄 카불에 있었다. 래티모어는 자신에 대한 혐의를 '헛소리'라고 일축하고 급히 미국으로 돌아와 타이딩스 위원회 앞에서 증언했다.[66]
오언 래티모어에 대한 특정 간첩 행위의 증거가 없고 단지 '래티모어가 심정적 공산주의자였을 것'이라는 빈약한 증거만 가지고 있었던 매카시는, 1950년 4월 반공주의자로 공산당 기관지 《데일리 워커》(Daily Worker)의 전 편집장이었던 루이 부덴츠(Louis F. Budenz)를 설득해 그에게 관련 증언을 하게 했다. 하지만 부덴츠는 오언 래티모어가 공산주의에 충성했다는 혐의에 대해 직접적으로 아는 것이 없었고 FBI와의 광범위한 인터뷰에서 한 번도 그를 공산주의자라고 밝힌 적이 없었다. 더구나 부덴츠는 1947년 미국 국무부 조사관에게 오언 래티모어가 공산주의자임을 시사하는 어떤 사례도 자신은 기억하는 것이 없다고 증언했으며, 1949년 잡지 《콜리어》의 편집자에게도 "어떤 식으로든 공산주의자로 행동한 적이 없다"[67]고 말했다.
그러나 부덴츠는 이번에는 "오언 래티모어는 비밀 공산주의자이기는 하지만 소련의 첩보원은 아니"라며, 그는 소련의 외교 정책을 자주 도왔던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고 증언했다. 부덴츠는 과거 자신이 몸 담았던 공산당 지도부가 그에게 "큰 가치는 그가 소련의 것이 아닌 언어로 소련의 정책을 지지하는데 중점을 둘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68] 타이딩스 위원회의 다수결 보고서는 래티모어에 대한 모든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고, 소수 보고서는 부덴즈의 혐의를 인정했다.
래티모어는 매카시 의원의 우방인 팻 맥캘런(Pat McCarran) 상원 의원이 이끄는 상원 내부 보안 분과 위원회(Senate Internal Security Subcommittee)에 출석해 증언했다. 12일 간의 증언은 매카시의 주장을 지지하는 분과 위원회 위원들과 매카시 의원이 한편이 되어, 오언 래티모어의 반대편에서 맞붙는 함성으로 특징지어졌다. 래티모어는 사흘 만에 성명을 발표했다. 분과 위원회가 래티모어의 증언에 하나하나 시비를 걸면서 잦은 방해로 인해 지연이 발생했다. 그리고 나서 분과 위원회는 IPR의 기록을 가져다 종종 래티모어가 기억하지 못하는 발언까지 끄집어내며 질문하곤 했다. 여기서 부덴즈는 다시 증언에 나섰는데, 이번에는 래티모어가 공산당원이자 소련 요원이라고 주장했다.
분과 위원회는 다른 학자들까지 소환하였다. 니콜라스 포페(Nicholas Poppe)는 러시아 출신 망명자이자 몽골-티베트학 학자였는데, 그는 오언 래티모어를 공산주의자로 몰아가려는 분과 위원회의 소환 요구를 거부했다. 오언 래티모어에게 있어 가장 해로운 증언은 그의 워싱턴 대학교 동료인 조지 테일러(George Taylor)의 지원을 받은 칼 아우구스트 비트포겔(Karl August Wittfogel)에게서 나왔다. 공산당원이었던 비트포겔은 오언 래티모어가 태평양 문제 저널의 주필로 있었을 때, 비트포겔 자신의 공산주의 배경을 래티모어도 알고 있었다고 증언했는데, 이 문제에 대해 서로 뭔가 직접적으로 말을 주고받지는 않았지만, 래티모어는 비트포겔에게 '알고 있다는 듯한 미소'를 띠었다고 증언했던 것이다.
래티모어는 비트포겔이 자신으로 인해 뭔가 엄청난 생각을 했을 것이라고 인정하면서 그에게 보인 웃음이 있었다면 그것은 '비공산주의적인 미소'였다고 말했다. 칼 아우구스트 비트포겔이나 조지 테일러는 오언 래티모어가 세계 공산주의를 최우선 과제로 격파할 필요성을 무시했다며 "자유 진영에 큰 해를 끼쳤다"고 비난했다. 존 K. 페어뱅크는 그의 회고록에서 비트포겔이 그런 증언을 한 것은 그가 강대국들로부터 용납될 수 없다는 이유로 독일을 떠나야 했던 과거 때문에 같은 실수를 두 번 저지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암시했다. 그들은 또한 마르크스주의가 래티모어에 미친 영향은 그가 마르크스 사관에서 종종 언급되는 '봉건'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고, 래티모어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봉건'이라는 단어에 '특허'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반박했다.[69]
1952년, 분과 위원회는 17개월 동안 66명의 증인과 수천 건의 문서를 포함한 연구 및 청문회를 거친 후 226페이지 분량의 만장일치 최종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에는 "오웬 라티모어는 1930년대 초반부터 소련의 음모를 의식적으로 명확하게 표현한 도구였다"며 "최소한 다섯 가지 별개의 문제"에 대해서는 오언 래티모어가 모든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고 적혀 있다. 예를 들면 "증거가... 결론적으로 래티모어가 프레드릭 필드(Frederick V. Field)가 공산주의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이러한 정보를 알게 된 뒤에도 필드와 협력했고, 그는 필드와의 연관성에 대해 소위원회 앞에서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라는 것 등이었다.[71]
1952년 2월 16일, 래티모어는 일곱 가지 혐의와 함께 위증죄로 기소되었다. 여섯 가지 혐의가 래티모어의 증언과 IPR 기록들 사이에 보이는 다양한 차이점들과 관련된 것들이었고, 마지막 일곱 번째는 "오언 래티모어가 의도적으로 분과 위원회를 기만하려 하고 있다"는 고발이었다. 아베 포르타스(Abe Fortas)와 같은 래티모어의 변호사들은 이러한 불일치는 1930년대에 일어났던 불가사의하고 애매한 문제들에 대한 고의적인 질문을 던진 매카시 의원 및 분과 위원회 소속 위원들로 인해 발생했다고 주장했다.[72][73]
3년 만에, 연방 판사 루터 영달(Luther Youngdahl)은 기술적인 이유로 래티모어에 대한 위증 혐의를 기각했다.[75](United States v. Lattimore, 127 F. Supp. 405 (D.D.C. 1955).) 오언 래티모어에게 붙은 혐의들 가운데 네 가지는 무의미하고 판단될 수 없는 것으로 치부되었다. 그가 공산주의에 동조하고 있다는 주장은 그 근거가 너무 모호해서 공평하게 대답할 수 없다는 이유로 부인되었다. 그리고 다른 사항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였고, 배심원들이 유죄를 선고할 것 같지 않은 정치적 판단의 문제들이었다.[76]
전 FBI 요원이었던 윌리엄 C. 설리번(William C. Sullivan)은 1979년 그의 회고록에서 FBI 국장 후버의 가차없는 정보 수집 과정에서도 FBI는 끝내 오언 래티모어의 공산주의자 혐의에 대한 "실질적인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으며, 오언 래티모어에 대한 비난은 "터무니 없다"고 말했다.[77]
5. 2. 소련과 몽골에 대한 입장
래티모어는 소련의 소수민족 정책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며, 이를 중국이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7] 그는 몽골의 독립과 자치를 지지했고, 소련이 몽골의 자치를 지원했다고 보았다.[7] 그러나 이러한 래티모어의 입장은 소련의 팽창주의와 스탈린 체제의 억압적인 성격을 간과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7]5. 3. 굴라그(강제 수용소) 방문 관련 논란
Owen Lattimore영어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헨리 월리스 부통령과 함께 소련을 방문했을 때 굴라그(강제 수용소)를 방문하고, 수용소의 긍정적인 측면을 부각하는 글을 썼다.[7] 이는 당시 소련과의 외교적 관계를 고려한 것이었을 수 있으나, 굴라그의 실상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7]6. 오언 래티모어의 유산
오언 래티모어는 20세기 중앙아시아 연구의 선구자로, 그의 학문적 업적은 현대 중앙아시아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내륙아시아적 접근법'과 변경(Frontier) 연구는 중앙아시아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틀을 제공했다. 유목 사회와 정주 사회의 관계에 대한 그의 통찰은 중국과 중앙아시아 지역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여전히 중요한 관점을 제시한다.[78]
매카시즘 시기 탄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학문적 신념을 굽히지 않고 연구와 저술 활동을 계속했다. 그의 저작들은 여전히 중앙아시아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으며, 그의 학문적 유산은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몽골에서는 그의 업적을 기려, 새로 발견된 공룡 화석에 그의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79]
1979년 그는 서양인으로써는 최초로 몽골 공화국이 외국인에게 주는 최고상인 북극성 훈장을 받았다.[79] 1984년 리즈 대학교는 명예 교수 오언 래티모어에게 문학박사(DLitt) 학위를 수여했다.[78]
1986년 몽골의 수도인 울란바토르에 있는 주립 박물관은 새로 발견된 공룡 화석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79]
2008년 8월 20일부터 21일까지 미국몽골연구센터는 국제몽골학회, 국립외국어대학교와 공동으로 「오웬 래티모어: 내아시아 연구의 과거, 현재, 미래」(Owen Lattimore: The Past, Present, and Future of Inner Asian Studies)라는 주제로 학술회의를 개최하였다.[80]
현대의 역사학자들은 래티모어의 많은 주장을 수정했지만, 여전히 그의 통찰력에 의존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래티모어가 다루고 있는 모든 주제는 세계 역사학자들에게 계속 영감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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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4년(재판): 뉴욕: 고단샤 인터내셔널.
- 1932: [https://archive.org/details/in.ernet.dli.2015.60032 ''만주: 갈등의 요람]''(Manchuria: Cradle of Conflict)'' 뉴욕: 맥밀란. 1935년에 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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