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제 히로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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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제 히로유키는 일본의 전 야구 선수로, 외야수로 활약했다. 킨키 대학을 졸업하고 2008년 오릭스 버팔로스에 입단하여 2009년까지 선수 생활을 했다. 2008년에는 3할에 가까운 타율과 빠른 발을 바탕으로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2009년에도 규정 타석을 채우지 못했지만 3할대 타율을 기록했다. 2010년 2월 5일, 오키나와현 미야코지마시의 호텔에서 추락사한 채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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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제 히로유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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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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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오제 히로유키 |
출생일 | 1985년 9월 2일 |
사망일 | 2010년 2월 5일 (향년 24세) |
출생지 | 오사카부다이토시 |
사망지 | 오키나와현미야코지마시 |
신장 | 180cm |
체중 | 73kg |
포지션 | 외야수 |
타석 | 좌타 |
투구 | 우투 |
프로 경력 | |
드래프트 | - 대학생/사회인 드래프트 3라운드 |
소속팀 | 오릭스 버펄로스 (2008년 ~ 2010년) |
NPB 경력 | |
첫 출장 | 2008년 7월 15일 |
마지막 출장 | 2009년 10월 9일 |
타율 | 0.287 |
도루 | 14 |
타점 | 30 |
안타 | 94 |
고등학교 | |
고등학교 | 진세이가쿠엔 고등학교 |
대학교 | |
대학교 | 긴키 대학 체육회 경식 야구부 |
2. 선수 경력
2008년 웨스턴 리그에서 3할 이상의 타율을 기록한 오제 히로유키는 7월 15일에 처음으로 1군에 승격되었다. 같은 날 지바 롯데 마린즈와의 경기에서 선발 출장하여 고바야시 히로유키를 상대로 프로 첫 안타(유격수 내야 안타)와 첫 도루를 기록했다. 다음 날에는 프로 첫 타점을 올렸다. 7월 19일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와의 경기에서 다다노 가즈히토를 상대로 주자 일소 적시 2루타를 날려 승리에 기여했고, 경기 후 승리 투수였던 야마모토 쇼고와 함께 프로 입단 후 처음으로 승리 인터뷰를 했다. 이후 주로 9번·좌익수로 선발 출장하여 8월 5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의 경기에서 쿠메 유키를 상대로 프로 데뷔 첫 홈런을 기록했고, 8월 27일 소프트뱅크전에서는 마하라 타카히로를 상대로 결승 번트를 성공시켰다. 한때 3할을 유지했던 타율은 9월 중순을 기점으로 떨어졌지만, 9월 29일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는 연장 10회 초에 오누마 코지를 상대로 다시 결승 번트를 성공시켜 이 경기의 승리로 팀은 9년 만에 A클래스에 진입했다.
이후, 닛폰햄과의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는 제1차전에 8번·좌익수로 출전하여 팀은 패했지만 다르빗슈 유를 상대로 팀에서 유일하게 맹타상을 기록했다. 다음 제2차전은 상대 선발이 좌완인 후지이 슈고였기 때문에 선발에서 제외되었지만, 최종회에 대타로 출전하여 마이클 나카무라로부터 볼넷을 얻었다. 최종적으로 58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262, 출루율 .342, 팀 3위인 7도루를 기록하는 등, 장점인 준족과 정교한 타격을 살려 일정한 성적을 거두었다. 오프에는 결혼을 발표했다[7]。
2009년에는 개막 전에 스카이마크 스타디움에서 이치로와 함께 개인 훈련을 했다. 시즌 초반에는 오무라 나오유키의 입단과 타피 로즈의 외야 수비 복귀로 출장 기회가 적었고, 본인도 타격 부진에 빠져 타율도 1할 초반에 머물렀다. 그러나 6월에 준 레귤러를 획득하면서 6월에는 .275, 7월에는 .317, 8월에는 .362, 9월에는 .417로 시즌 후반으로 갈수록 타율을 급격히 끌어올렸으며, 7월 16일 롯데전에서는 와타나베 슌스케로부터 역전 결승타가 되는 프로 데뷔 첫 3루타를 기록했다. 최종적으로, 규정 타석 미달이었지만 타율 .303의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 공식전에서의 현역 마지막 출장은 10월 9일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전이었고, 2번·좌익수로 선발 출장했다. 3번째 타석에서 후지와라 히로미치를 상대로 안타를 기록했지만, 마지막 타석이었던 8회 4번째 타석에서는 같은 후지와라를 상대로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났다. 오프에는 피닉스 리그에 파견되었다[9]。
2. 1. 프로 입단 전
어린 시절부터 보이스 리그의 "고노이케 오션"에 소속되어 전국 대회 출전은 없었지만 마지막 학년 때는 대회 타율이 5할을 넘는 활약을 보였다. 진세이 학원 고등학교에서는 2학년 때 제74회 선발 고등학교 야구 대회에 출전하여, 준준결승에서 미야모토 켄을 보유한 간사이 고교에 패했지만 8강 진출에 기여했다. 간사이 학생 야구 연맹 소속의 킨키 대학에 진학한 후 1학년 때부터 벤치에 들어가 2학년 때는 제34회 미일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 일본 대표에, 3학년 때는 제35회 미일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 일본 대표로 선출되었다. 리그전 통산 72경기 출장, 297 타수 104 안타, 타율 .350, 1 홈런, 17 타점을 기록했다. 4학년 가을 리그에서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고, 수위 타자를 2회, 베스트 나인을 3회 수상했다. 킨키 대학에서는 3학번 선배로 후지타 카즈야가, 2학번 후배로 아라키 타카히로와 후지카와 슌스케 (한신 입단 후 등록명은 '슌스케')가 있었다.대학 1학년 때 가장 응원해 주던 어머니를 잃고, 그 충격으로 한때 야구를 그만두려고까지 생각했지만, 킨키 대학 야구부 감독 에노모토 야스시의 강력한 설득에 "프로에 들어가 훌륭한 묘를 만들어 드리고 싶습니다"라며 마음을 돌렸다.[6]
2. 2. 프로 입단 후
2008년 웨스턴 리그에서 3할 이상의 타율을 기록했고, 7월 15일에 처음으로 1군에 승격되었다. 같은 날 지바 롯데 마린즈와의 경기에서 선발 출장하여 프로 첫 타석에서 고바야시 히로유키를 상대로 프로 첫 안타(유격수 내야 안타)와 첫 도루를 기록했다. 다음 날에는 프로 첫 타점을 올렸다. 7월 19일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와의 경기에서 다다노 가즈히토를 상대로 주자 일소 적시 2루타를 날려 승리에 기여했고, 경기 후 승리 투수였던 야마모토 쇼고와 함께 프로 입단 후 처음으로 승리 인터뷰를 했다. 이후 주로 9번·좌익수로 선발 출장하여 8월 5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의 경기에서 쿠메 유키를 상대로 프로 데뷔 첫 홈런을 기록했고, 8월 27일 소프트뱅크전에서는 마하라 타카히로를 상대로 결승 번트를 성공시켰다. 한때 3할을 유지했던 타율은 9월 중순을 기점으로 떨어졌지만, 9월 29일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는 연장 10회 초에 오누마 코지를 상대로 다시 결승 번트를 성공시켜 이 경기의 승리로 팀은 9년 만에 A클래스에 진입했다. 이후, 닛폰햄과의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는 제1차전에 8번·좌익수로 출전하여 팀은 패했지만 다르빗슈 유를 상대로 팀에서 유일하게 맹타상을 기록했다. 다음 제2차전은 상대 선발이 좌완인 후지이 슈고였기 때문에 선발에서 제외되었지만, 최종회에 대타로 출전하여 마이클 나카무라로부터 볼넷을 얻었다. 최종적으로 58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262, 출루율 .342, 팀 3위인 7도루를 기록하는 등, 장점인 준족과 정교한 타격을 살려 일정한 성적을 거두었다. 오프에는 결혼을 발표했다[7]。2009년에는 개막 전에 스카이마크 스타디움에서 이치로와 함께 개인 훈련을 했다. 시즌 초반에는 오무라 나오유키의 입단과 타피 로즈의 외야 수비 복귀로 출장 기회가 적었고, 본인도 타격 부진에 빠져 타율도 1할 초반에 머물렀다. 그러나 6월에 준 레귤러를 획득하면서 6월에는 .275, 7월에는 .317, 8월에는 .362, 9월에는 .417로 시즌 후반으로 갈수록 타율을 급격히 끌어올렸으며, 7월 16일 롯데전에서는 와타나베 슌스케로부터 역전 결승타가 되는 프로 데뷔 첫 3루타를 기록했다. 최종적으로, 규정 타석 미달이었지만 타율 .303의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 공식전에서의 현역 마지막 출장은 10월 9일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전이었고, 2번·좌익수로 선발 출장했다. 3번째 타석에서 후지와라 히로미치를 상대로 안타를 기록했지만, 마지막 타석이었던 8회 4번째 타석에서는 같은 후지와라를 상대로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났다. 오프에는 피닉스 리그에 파견되었다[9]。
3. 갑작스러운 죽음
小瀬 浩之|오제 히로유키일본어는 2010년 2월 5일, 춘계 캠프 중 오키나와현 미야코지마시의 호텔 10층 객실에서 2층 옥상으로 추락사한 채 발견되었다. 경찰은 자살과 사고 양면으로 수사했지만[4][5], 2월 7일 오릭스 구단 본부장은 "사건성이 없고, 사인이나 유서 유무에 대해서도 경찰로부터 보고가 없었다"고 말하며, 구단 차원에서 더 이상 조사는 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10]。
오릭스의 오카다 아키노부 감독은 "어제까지 그라운드에서 함께 야구를 하고 있었다. 그런 일은 생각할 수 없다!"라고 오제의 죽음에 대해 언급했다[11]。 하지만 사망 전날 훈련실에서는 기운이 없었고,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는 머리부터 수건을 뒤집어쓰고 좌석에 몸을 묻고 있는 모습이 목격되었다[12]。 또한, 같은 해 팀 동료에게 자살을 암시하는 말을 했고, 사망하기 전에 "감사했습니다"라는 메일을 몇 명의 선수에게 보냈다는 보도가 있었다[13]。 오제의 모교인 긴다이 대학 야구부의 에노모토 감독도 "충격적입니다. 대학에 자율 훈련을 왔을 때 '올해는 해내겠습니다!'라고 말했는데…. 그렇게 아픔을 타고 무서워하는 녀석이 왜…."라고 눈물로 말했다. 긴다이 대학 야구부에서는 오제의 대학 시절 등번호인 "7"을 1년간 결번 조치했다[14]。 참고로, 오제가 오릭스에서 착용했던 등번호 "41"은 사노 코다이가 2020년에 착용하기까지 10년간 결번 상태였다[15]。
다르빗슈 유, 사이토 카즈미 등 타 구단 선수들도 각자의 블로그에서 오제의 죽음을 애도했다[16][17]。
시즌 개막 직전의 사망에 따라, 2010년도 선수 명감에는 오제의 데이터가 제외된 채로 발매되었다. 그러나 너무나 갑작스러운 죽음이었기 때문에, 오제가 사망한 직후인 2월 8일 발매된 "주간 베이스볼 2월 25일호 증간 2010 프로 야구 전체 선수 사진 명감"에는 오제의 데이터가 기재되어 있었고, "2010 스포니치 프로 야구 선수 명감"처럼 본문에서는 삭제되었지만 색인에는 오제의 이름이 남아 있는 사례도 있었다.
오제의 죽음을 받아들인 오릭스는 외야수가 부족해졌고, 급하게 세이부의 아카타 쇼고를 트레이드로 영입했다[18]。
4. 선수로서의 특징
1년 차에는 빠른 카운트에서 높은 타율을 기록한 반면, 2스트라이크에 몰렸을 때와 좌완 투수를 상대로는 1할대 타율을 기록하며 과제를 남겼지만, 2년 차에는 초구 타율 .359, 2스트라이크 이후 타율도 .284로 안정감을 보였다. 우완 투수에 강한 반면 좌완 투수를 어려워하여 (2009년은 우완 투수에게 .325, 좌완 투수에게 .211)[19], 그 때문에 2009년에는 좌완 투수 킬러인 시모야마 신지와 병용되었다.
준족과 정교한 타격, 강견의 외야수라는 플레이 스타일, 넓은 각도로 타구를 보내는 뛰어난 배트 컨트롤, 이치로가 과거 소속했던 구단이라는 공통점이 많아 생전부터 일각에서는 "이치로 2세"라고 칭해졌다. 과거 함께 플레이했던 기요하라 가즈히로로부터도 "타격 센스가 좋다. 이치로가 처음 나왔을 때랑 비슷하다"라는 평가를 받았다[19]。
2008년 12월 6일에 열린 오릭스 OB 총회에 현역 선수 중 유일하게 참석하여 후쿠모토 유타카에게 기술적인 조언을 구했는데 "플레이가 좋네"라는 평가를 받았다.
5. 인물
경기 후 히어로 인터뷰 등에서는 유쾌한 모습을 보여주며, 독특한 발언을 연발했다. 알렉스 카브레라가 뒤에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갑자기 구레나룻을 잡아당겨져 "아얏!" 하고 외쳐 팀 동료들에게 큰 웃음을 사기도 했다. 오릭스 선수들 사이에서는 놀림받는 캐릭터로 자주 등장했다. 특히 나이가 비슷한 오히키 케이지, 사카구치 토모타카와 사이가 좋았고, 팬 감사제에서는 3명이 수치심을 패러디한 "Bs 수치심"을 결성하여 춤을 선보였다. 오히키는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로 이적한 2015년에 프로 야구 인생 최초의 리그 우승을 경험했는데, 그 당시 맥주 뿌리기에 오제의 유니폼을 입고 참여했다.[20]
이치로와 함께 자율 훈련을 했을 때에는 "사랑스러운 캐릭터. 나는 조금 좋아하는 타입. 어떤 무대에서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능글맞기도 했고"라고 평가받았으며, "호제"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성실하고 섬세한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6. 상세 정보
오제 히로유키의 주요 기록과 등번호는 다음과 같다.
- 첫 출장·첫 선발 출장: 2008년 7월 15일, 대 지바 롯데 마린스 12차전 (지바 마린 스타디움), 9번·좌익수로 선발 출장[8]
- 첫 타석·첫 안타: 같은 날, 3회 초에 고바야시 히로유키로부터 유격 내야 안타[8]
- 첫 도루: 같은 날, 5회 초에 2루 도루 (투수: 고바야시 히로유키, 포수: 사토자키 토모야)[8]
- 첫 타점: 2008년 7월 16일, 대 지바 롯데 마린스 13차전 (지바 마린 스타디움), 3회 초에 시미즈 나오유키로부터 중견수 희생 플라이[8]
- 첫 홈런: 2008년 8월 5일, 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17차전 (스카이 마크 스타디움), 8회 말에 구메 유키로부터 우월 투런[8]
2008년부터 2010년 2월 5일까지 등번호 41번을 사용했다.[1]
6. 1. 연도별 타격 성적
연도 | 팀 | 경기 | 타석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루타 | 타점 | 도루 | 도루자 | 희생번트 | 희생플라이 | 볼넷 | 고의4구 | 사구 | 삼진 | 병살타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
2008영어 | 오릭스 | 58 | 156 | 130 | 15 | 34 | 8 | 0 | 1 | 45 | 19 | 7 | 3 | 7 | 2 | 16 | 0 | 1 | 31 | 1 | .262 | .342 | .346 | .688 |
2009영어 | 78 | 216 | 198 | 24 | 60 | 9 | 1 | 0 | 71 | 11 | 7 | 3 | 4 | 3 | 11 | 0 | 0 | 40 | 0 | .303 | .335 | .359 | .693 | |
통산: 2년 | 136 | 372 | 328 | 39 | 94 | 17 | 1 | 1 | 116 | 30 | 14 | 6 | 11 | 5 | 27 | 0 | 1 | 71 | 1 | .287 | .338 | .354 | .69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