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보 (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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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보는 후한 시대의 환관으로, 두태후를 섬기며 조절과 함께 권력을 잡았다. 168년 두무와 진번이 환관 제거를 시도하자 조절과 함께 영제를 피신시키고, 스스로 황문령이 되어 두무 일파를 제거했다. 이후 중상시로 승진했으며, 동맹을 모함하여 죽이는 등 전횡을 일삼았다. 179년 부정으로 발각되어 양구에게 체포되어 고문 끝에 사망했으며, 재산 몰수와 가족 귀양, 시체는 거리에 내걸리는 처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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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보 (후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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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성 | 왕(王) |
이름 | 보(甫) |
자 | 국위(國威) |
작위 | 후(侯) |
봉호 | 계양(桂陽) |
시호 | 정(定) |
생년 | 미상 |
몰년 | 179년 |
시대 | 후한 |
출생지 | 북해군(北海郡) 영릉현(營陵縣) |
사망지 | 옥사(獄死) |
직업 | 환관 |
활동 시기 | 후한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왕흥(王興) |
형제 | 왕길(王吉) |
아들 | 왕진(王進) |
관련 인물 | |
섬긴 황제 | 효환제 · 효영제 |
정적 | 두무, 진번, 이응, 채옹 |
2. 생애
왕보와 조절은 두태후를 섬기며 아첨을 일삼았다. 168년 두태후의 아버지 두무(竇武)와 진번은 이들을 제거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도리어 환관들에게 공격을 받았다. 왕보는 두무와 두소 형제를 잡아 죽이고 중상시로 승진하였다.
171년 영제가 두태후를 뵈러 왔을 때, 왕보는 조절과 함께 동맹을 모함하여 죽게 했다. 이후 왕보와 조절의 권세는 더욱 커졌으나, 179년 양구에 의해 왕보 일당은 제거되고, 왕보는 죽임을 당한 뒤 재산 몰수와 가족들은 귀양을 가는 처벌을 받았다.
2. 1. 권력 장악
조절과 함께 두태후를 섬기며 아첨을 일삼았다. 168년 두태후의 아버지 두무(竇武)와 진번은 이들을 제거하려 했다. 두 사람은 번갈아 태후에게 환관들을 제거할 것을 청했으나 태후가 계속 망설였기 때문에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1]이들의 계획이 환관 측에 알려지자, 선수를 쳐 두무 일파를 공격하기로 했다. 조절이 변란이 일어났다 하여 영제를 피신시킨 사이 왕보는 칼을 빼들고 관리들을 위협하여 스스로 황문령(黃門令)이 되게 하고, 태후를 위협하여 인수를 빼앗은 다음 환관들을 저지하기 위해 궁궐로 들어온 진번을 죽였다. 이후 군사들을 거느리고 나가 두무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외치자 사기가 떨어진 두무의 군사들은 왕보에게 항복하였다. 왕보는 도망치는 두무와 두소(竇紹) 형제를 잡아 죽였다. 이 일로 영제는 왕보를 중상시(中常侍)로 승진시켰다.[1]
2. 2. 전횡과 몰락
171년 영제가 남궁으로 쫓겨나 있던 두태후를 뵈러 왔을 때, 두태후를 섬기던 환관 동맹(董萌)이 두태후를 위해 아뢰어 태후에게 보내는 물품을 늘리게 했다. 이것을 안 왕보와 조절은 동맹이 영제의 생모 동태후를 비방했다고 모함하여 죽게 했다.왕보와 조절의 권세가 커지자 태위(大尉) 단경(段熲) 같은 이는 환관들에게 아첨하기까지 했다. 왕보의 양자 왕길(王吉)이 백성들을 함부로 죽이자, 사예교위(司隸校尉) 양구(陽球)는 환관 세력을 제거하려 했다. 179년 양표가 왕보의 부정을 적발하여 양구에게 알렸다. 양구는 왕보가 집에서 쉬는 것을 틈타 궁궐에 가서 왕보 일당의 죄악을 고하고, 이들을 붙잡아 하옥시킨 후 모진 고문을 가하여 죽였다. 조정에서는 왕보의 재산을 몰수하고 가족들을 귀양 보냈으며, 시체를 잘라 거리에 내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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