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세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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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세충은 수나라 신풍 출신으로, 본래 성은 지씨였으나 조상 대에 성을 바꾸었다. 그는 수 양제 때 강도군승으로 임명되어 군벌들을 진압하고 강도통수로 승진했으며, 우문화급이 양제를 시해하자 양동을 옹립하고 이밀과 싸워 승리한 후 정왕을 자칭하고 개명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이후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여 정나라를 건국했으나, 당 태종에게 패하여 항복했고, 622년 장안에서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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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나라의 태위 - 이밀 (582년)
수나라 말기 양현감의 난에 가담하고 농민 반란 세력을 규합하여 위공을 자칭했던 이밀은 뛰어난 지략과 웅대한 기개를 지녔으나 왕세충에게 패배 후 당에 투항했다가 반란을 꾀하다 살해당했으며, '우각괘서' 고사의 주인공으로도 알려져 있다. - 수나라의 태위 - 당 고조
당 고조 이연은 566년에 태어나 635년에 사망한 당나라의 초대 황제로, 수나라의 혼란을 틈타 반란을 일으켜 당나라를 건국하고 재위 기간 동안 수나라 제도를 복원하며 반란 세력을 진압하다가 아들 이세민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물러났다. - 622년 사망 - 쇼토쿠 태자
쇼토쿠 태자는 일본 아스카 시대의 인물로, 불교 장려, 17조 헌법 제정, 수나라 외교 등 고대 일본 국가 형성에 기여했으며, 여러 일화와 지폐 도안으로 유명하지만, 업적에 대한 논란도 존재한다. - 622년 사망 - 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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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고조 이연의 장남 이건성은 당나라 건국에 기여했으나 동생 이세민과의 권력 투쟁 중 현무문의 변에서 살해당한 후 황태자로 복권된 인물이다. - 수나라의 상서령 - 우문술
우문술은 수나라의 장군이자 정치인으로, 수 문제와 수 양제 시대에 활약하며 수 양제의 즉위에 기여했지만, 고구려 원정 실패와 권력 남용, 부패 등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고, 그의 아들들이 양제를 시해하는 사건으로 더욱 비판받았으나, 수나라 건국과 통일에 기여하고 반란을 진압하는 데 공헌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다.
왕세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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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왕세충(王世充) |
로마자 표기 | Wáng Shìchōng |
출생 | 567년경 |
사망 | 621년 8월경 (향년 54세) |
성 | 왕(王) |
정치 | |
직업 | 군인, 군주, 정치인 |
칭호 | 황제 |
국가 | 정(鄭) |
재위 기간 | 619년 5월 25일 ~ 621년 6월 4일 |
연호 | 개명(開明) (619년 5월 26일 ~ 621년 6월 4일) |
가족 | |
아버지 | 왕수(王收) |
기타 | |
중국어 간체 | 王世充 |
병음 | Wáng Shìchōng |
광운 | 往例切 |
2. 생애
왕세충은 수나라 신풍(新豊) 출신으로, 본래 성은 지(支)씨였다. 그의 할아버지 지퇴누(支頹耨)는 서역 사람이었고, 할머니가 왕(王)씨 성을 가진 남자와 재혼하면서 아버지 지수(支收)가 왕씨로 입적되어 성을 바꾸었다.[4] 왕세충은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특히 병법에 뛰어났으며 법률에도 밝았다고 스스로 말한다.
수 양제 때 강도군승(江都郡丞)으로 임명되어 여러 군벌들을 진압하고 강도통수(江都通守)로 승진하였다.[8][9][10] 개황 연간에는 군공으로 병부 원외랑에 발탁되었고, 대업 연간에는 강도 궁감에 임명되어 양제의 신임을 얻었다.
양현감의 난에 호응하여 거병한 주섭중국어, 관숭중국어을 강남에서 격파하고, 이후에도 여러 군벌들을 잇따라 격파했다. 승리할 때마다 공을 부하들에게 돌리고 전리품을 사졸들에게 나누어 주어 부하들이 기꺼이 그를 위해 일했다.
대업 11년, 돌궐이 양제를 안문에서 포위했을 때,[5][6][7] 왕세충은 강도에서 징발 가능한 모든 사람을 이끌고 안문까지 가서 양제를 구출하려 했다. 양제는 이 소식을 듣고 왕세충을 더욱 신임하게 되었다.
양제의 명으로 낙양에 파견되어 이밀을 토벌했으나, 여러 차례 전투에도 결판이 나지 않았다. 양제는 왕세충을 장군으로 임명하여 다시 진압을 독촉했고, 왕세충은 낙구창을 기습했으나 크게 패하고 이후에는 싸우지 않았다.
대업 14년, 양제가 우문화급에게 살해되자, 낙양에서는 단달, 왕세충, 원문도 등이 월왕 양동을 황제로 옹립했다. 왕세충은 그 공으로 이부상서·정국공이 되었다. 원문도 등은 이밀을 귀순시켜 우문화급을 토벌하게 했지만, 왕세충은 이밀의 귀순에 반발하여 원문도 등을 살해하고 조정의 정사를 장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밀을 격파하고 태위가 되었으며, 곧 상국으로 승진했다.
619년, 양동을 폐하고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정'''(鄭)이라 하고, 연호를 개명으로 고쳐 허난성 북부를 지배했다. 왕세충을 암살하고 다시 양동을 옹립하려 했던 배인기 등을 살해하고, 이후 비슷한 음모를 막기 위해 양동을 살해했다.
왕세충의 통치는 가혹했고, 개명 2년 7월에 당의 이세민이 낙양을 포위했을 때 많은 이들이 당에 항복했다. 하국의 두건덕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나, 호뢰 전투에서 두건덕이 이세민에게 사로잡히자, 왕세충은 당에 항복했다. 622년 평민으로 강등되어 일족과 함께 파촉으로 유배되었으나, 옹주의 관청에서 원수인 정주 자사 독고수덕에게 살해되었다.
2. 1. 출신 배경 및 초기 경력
왕세충은 수나라 신풍(新豊) 출신이다. 본래 성은 지(支)씨였는데, 그의 할아버지 지퇴누(支頹耨)는 서역 사람이었다. 지퇴누 사후 그의 할머니가 왕(王)씨 성을 가진 남자와 재혼하면서, 아버지 지수(支收)가 왕씨로 입적되어 성을 바꾸었다.[4] 왕세충은 스스로 젊었을 때 학문에 힘썼고, 특히 병법을 좋아했으며 법률에도 밝았다고 한다.수 양제 때 강도군승(江都郡丞)으로 임명되어 주섭(朱燮), 관숭(管崇), 맹양(孟讓) 등의 군벌들을 진압하고 강도통수(江都通守)로 승진하였다.[8][9][10] 610년, 양제의 강도(江都, 현대 양저우, 장쑤) 궁궐 감독 관리였던 장형(張衡)이 양제의 미움을 받자, 왕세충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양제가 강도를 자주 방문했기 때문에, 왕세충은 황제를 칭송하고 호화로운 궁궐을 꾸미는 데 능숙하여 황제의 총애를 받았다.[4]
613년, 장군 양현감이 동쪽 수도 낙양 근처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양쯔강 남쪽의 농민 반군 지도자 유원진(劉元進)이 봉기하였다. 양제는 왕세충을 보내 유원진을 격파하고 죽였다. 왕세충은 처음에 유원진의 병사들을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항복한 후 그들을 학살했다.[4]
614년, 반란 지도자 맹랑(孟讓)이 제군 (대략 현대의 지난, 산둥)에서 남쪽으로 진격하여 서의 (盱眙, 현대 화이안, 장쑤)로 진격했다. 왕세충은 맹랑을 기습하여 격파했다. 615년 가을, 양제가 북부 국경의 연문군을 순행할 때, 돌궐 시비칸이 이 지역을 기습 공격, 9월 11일에 그곳을 포위했다.[5][6][7] 왕세충은 강도에서 연문군으로 군대를 출동시켰다. 양제는 왕세충의 충성을 믿고 616년에 그를 강도의 임시 지사로 승진시켰다.
2. 2. 수 양제 시기의 활약
왕세충은 경사(經史)와 병법을 좋아하고, 법률과 점술에 통달했으며, 말솜씨가 좋았다. 개황 연간에 군공으로 병부 원외랑으로 발탁되었다. 대업 연간에는 강도 궁감에 임명되어, 먼 곳의 진귀한 물품을 바치는 등 양제의 신임을 얻었다.양현감의 난에 호응하여 거병한 朱燮|주섭중국어, 管崇|관숭중국어을 강남에서 격파했고, 그 후에도 제군의 孟讓|맹양중국어과 염차의 格謙|격겸중국어, 노명월 등 각지의 크고 작은 세력을 잇따라 격파했다.[4] 승리할 때마다 공적을 부하들의 것으로 돌리고, 전리품을 사졸들에게 나누어 주었기 때문에, 왕세충의 부하들은 그를 위해 기꺼이 일했다.
대업 11년에 돌궐이 양제를 안문에서 포위했을 때,[5][6][7] 왕세충은 강도에서 징발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을 이끌고 안문까지 가서 양제를 구출하려 했다. 군중에서는 머리를 묶지 않고, 얼굴도 씻지 않은 채 끊임없이 울부짖으며, 밤낮으로 갑옷을 입고 풀밭에서 잠을 잤다. 양제는 이 소식을 듣고 왕세충이 자신을 친애한다고 생각하여, 더욱 왕세충을 신임했다.
양제의 명으로 낙양에 파견되어, 낙구창을 점령한 이밀을 토벌했으나 100번을 싸워도 결착이 나지 않았다. 양제는 왕세충을 장군으로 임명하여 다시 진압을 촉구했고, 왕세충은 낙구창을 기습했으나 크게 패했고, 이후에는 싸우지 않았다.
대업 14년, 양제가 우문화급에게 살해되자, 낙양에서는 단달, 왕세충, 원문도 등이 월왕 양동을 황제로 옹립했다. 왕세충은 그 공으로 이부상서·정국공이 되었다. 원문도·노초 등은 이밀을 귀순시켜 우문화급을 토벌하게 했지만, 왕세충은 이밀의 귀순에 반발하여 원문도·노초·곽문의·조장문을 살해하고, 조정의 정사를 마음대로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밀을 격파하고 태위가 되었으며, 곧 상국으로 승진했다.
2. 3. 양동 옹립과 권력 장악
수나라 말기, 양제가 우문화급에게 살해된 후, 618년 낙양에서 단달, 원문도 등과 함께 월왕 양동을 황제로 옹립하였다.[1] 그 공으로 이부상서·정국공이 되었다.[1] 원문도·노초 등은 이밀을 귀순시켜 우문화급을 토벌하게 했지만, 왕세충은 이밀의 귀순에 반발하여 원문도·노초·곽문의·조장문을 살해하고, 조정의 정사를 독단적으로 처리하게 되었다.[1]618년 봄, 양제의 손자인 양동을 뤄양에서 명목상 지휘자로 옹립하고, 왕세충은 이밀에게 대대적인 공격을 가했지만 패배했다. 왕세충은 뤄양으로 후퇴했고 한동안 이밀과 다시 교전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같은 해, 양제가 강도에서 장군 우문화급이 주도한 쿠데타로 살해되었다. 이 소식이 뤄양에 도착하자 왕세충을 포함한 뤄양의 수나라 관리들은 양동을 황제로 선포했다. 왕세충은 심사부(門下省)의 책임자 중 한 명이 되었고 정공(鄭公)으로 봉해졌다. 그와 단달(段達), 원문도(元文都), 황보무일(皇甫無逸), 노초(盧楚), 곽문의(郭文懿), 조창문(趙長文)은 집단 지도부를 형성했고 "7명의 귀족"으로 알려졌다.
왕세충은 자신의 병사들에게 곧 이밀의 함정에 빠질 것이며, 이밀이 그들을 지휘하게 된다면 그에게 저항한 대가로 그들을 학살할 것이라고 말하며 선동하기 시작했다. 원문도는 왕세충이 이런 짓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왕세충을 매복할 계획을 세웠으나, 단달이 왕세충에게 그 음모를 알렸고 왕세충은 먼저 쿠데타를 일으켜 노초를 죽이고 궁궐을 포위했다. 왕세충의 주장에 따라 양동은 원문도를 항복시켰고, 원문도는 양동에게 "만약 제가 아침에 죽으면 폐하도 저녁에 죽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양동은 울었지만 여전히 원문도를 왕세충에게 보냈고 왕세충은 원문도를 처형했다. 왕세충은 그 후 양동을 만나 충성을 맹세하며 자신이 하려는 모든 일은 자신을 구하고 제국을 구하는 것뿐이라고 맹세했다. 양동은 왕세충을 궁궐 안으로 데려가 유태후를 만나게 했고 왕세충은 그녀 앞에서 맹세했다. 이 시점부터 모든 권력은 왕세충의 손에 있었고 양동 자신은 무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밀을 격파하고 태위가 되었으며, 곧 상국으로 승진했다.[1]
2. 4. 정나라 건국과 패망
수 양제 때 강도군승(江都郡丞)으로 임명되어 여러 군벌들을 진압하고 강도통수(江都通守)로 승진했다. 우문화급(宇文化及)이 양제를 시해하자 왕세충은 월왕(越王) 양동을 옹립하여 이밀과 싸워 격파하고는 스스로 정왕(鄭王)으로 칭하고 연호를 개명(開明)이라고 하였다.618년 봄, 양제의 손자 양동 월왕(越王)이 뤄양에서 명목상 지휘를 맡은 후, 왕세충은 이밀에게 대대적인 공격을 가했지만 패배하였다. 같은 해, 양제가 강도에서 장군 우문화급이 주도한 쿠데타로 살해되자, 왕세충을 포함한 뤄양의 수나라 관리들은 양동을 황제로 선포했다. 왕세충은 정공(鄭公)으로 봉해졌고, 다른 6명의 관리와 함께 집단 지도부를 형성했다.
왕세충은 병사들을 선동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노초(盧楚)를 죽이고 궁궐을 포위했다. 왕세충의 주장에 따라 양동은 원문도(元文都)를 항복시켰고, 왕세충은 원문도를 처형했다. 이 시점부터 모든 권력은 왕세충의 손에 있었고 양동은 무력했다.
619년, 왕세충은 아들 왕현응을 태자로, 왕현서를 한왕(漢王)으로 임명했다. 그는 19명의 다른 친척을 제후로 임명하고, 전 황제 양동을 노공(魯公)으로 임명했다. 같은 해 겨울, 왕세충이 하(夏)가 당으로부터 빼앗은 여양(黎陽, 현재의 허비시, 허난성)을 공격한 후, 두건덕은 빈주(殷州, 대략 현재의 신샹시, 허난성)를 공격하여 보복하면서, 두 국가는 적대 관계가 되었다.
얼마 후, 배인기(裴仁基)와 그의 아들 배행엄(裴行儼) 등이 왕세충을 죽이고 양동을 복위시키려는 음모를 꾸몄으나 발각되어 모두 처형되었다. 왕세충의 형제 왕세윤(王世惲)은 왕세충에게 양동을 죽여야 한다고 설득했고, 왕세충은 이에 동의하여 조카 왕인칙(王仁則)과 그의 하인 양백년(梁百年)을 보내 양동에게 독약을 마시게 했다. 양동은 독약을 마셨지만 처음에는 죽지 않았고, 왕세윤은 그를 목 졸라 죽이라고 명령했다.

620년 가을, 당 고조는 아들 이세민에게 군대를 주어 낙양을 공격하게 했고, 왕세충은 방어하고 반격하기 위해 자신의 군대를 준비했다. 왕세충은 이세민과 평화 협정을 맺으려 했지만, 이세민은 거절하고 정나라의 도시들을 공격하거나 항복을 받아 하나씩 점령해 나갔다. 621년 봄, 이세민은 낙양을 포위했다.
왕세충은 두건덕에게 사자를 보내 지원을 요청했고, 두건덕은 이에 동의했다. 이세민은 호로관에서 두건덕을 격파하고 포로로 잡았다. 왕세충은 두건덕과 대화를 나눈 후 눈물을 흘렸다. 그는 포위망을 뚫고 상양으로 도망가려 했으나, 장군들은 그가 하(夏)의 도움에 의존하고 있으며, 두건덕이 포로로 잡힌 지금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지적했다. 그리하여 왕세충은 도시를 나와 이세민에게 항복했다. 이세민은 그의 고위 관리들을 처형했지만, 왕세충 자신과 그의 가족, 그리고 나머지 관리들은 살려주었다.
2. 5. 최후
621년 가을, 당 고조는 왕세충을 사면했지만 평민으로 강등시키고 그의 일족을 현대의 쓰촨성으로 유배 보냈으며, 두건덕은 처형했다.[11]왕세충과 그의 가족들은 유배를 기다리며 수도의 관할구역인 옹주(雍州)의 병영에 구금되었다. 독고수덕은 당 고조가 왕세충을 보고 싶어한다고 주장하며 병영에 들어갈 기회를 엿보았다. 왕세충과 그의 형 왕세윤이 나와 독고수덕을 맞이했고, 독고수덕은 그의 아버지를 복수하기 위해 그들을 처형했다. 당 고조는 독고수덕에게 정주(定州, 오늘날의 바오딩시, 허베이성)의 지위에서 해임하는 것으로 처벌했다. 왕씨 가문의 다른 사람들은 유배되었지만, 도중에 반란을 계획했고 모두 처형되었다.[11]
3.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
아버지 | 왕수(王收) (본명 지수(支收)) |
숙부 | 왕경 |
종형제 | 왕변 |
형 | 왕세사(王世師) |
조카 | 왕태 |
조카 | 왕군도 |
형 | 왕세형 |
조카 | 왕건수 |
형 | 왕세위 |
조카 | 왕홍렬 |
조카 | 왕행본 |
조카 | 왕완 |
형 | 왕세운 |
조카 | 왕인칙 |
조카 | 왕도성 |
조카 | 왕도순 |
조카 | 왕도릉 |
동생 | 왕세변(王世辯) |
아들 | 왕현응 |
아들 | 왕현서 |
아들 | 왕현경(王玄瓊) |
4. 평가
王世充중국어은 악인이었고, 우연히 무능한 군주를 만났다. 황제를 아첨하고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했다. 부하들에게는 자신의 결점을 숨기고 반대를 억누르기 위해 부당한 수사를 사용했다. 마침내 왕위를 찬탈하고 부적절한 행위를 저질렀으며 많은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였다. 자신의 관리를 통제하기 위해 연민을 가장하기도 했다. 그의 부하들은 거의 모두 반역자나 절망적인 사람들이었다. 결국 진왕에게 항복했고, 공개적으로 참수되지 않은 것은 매우 다행이었다.[11]
4. 1. 부정적 평가
이세민은 왕세충과 두건덕을 장안의 당 수도로 데려가 아버지 고조에게 알현시켰다. 고조가 왕세충을 만나 꾸짖자 왕세충은 "신은 마땅히 참수되어야 하지만 진왕이 저를 살려주기로 약속했습니다."라고 말했다. 621년 가을, 고조는 그를 사면했지만 평민으로 강등시키고 그의 일족을 현대의 쓰촨성으로 유배 보냈으며, 두건덕은 처형했다.[11]한편, 왕세충과 그의 가족들은 유배를 기다리며 수도의 관할구역인 옹주(雍州)의 병영에 구금되었다. 독고수덕(獨孤修德)은 고조가 왕세충을 보고 싶어한다고 주장하며 병영에 들어갈 기회를 엿보았다. 왕세충과 그의 형 왕세윤이 나와 독고를 맞이했고, 독고는 그의 아버지를 복수하기 위해 그들을 처형했다. 고조는 독고에게 정주(定州, 오늘날의 바오딩 시, 허베이성)의 지위에서 해임하는 것으로 처벌했다. 왕씨 가문의 다른 사람들은 유배되었지만, 도중에 반란을 계획했고 모두 처형되었다.[11]
수나라 멸망 당시 제국을 통치하려던 모든 경쟁자들 중에서 왕세충은 전통적인 역사가들에게 가장 혐오스러운 인물 중 하나였다. 후진의 역사가이자 ''구당서''의 주 편집자인 유후는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11]
: 왕세충은 악인이었고, 우연히 무능한 군주를 만났다. 그는 황제를 아첨하고,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했다. 그의 부하들에게는 자신의 결점을 숨기고 반대를 억누르기 위해 부당한 수사를 사용했다. 그는 마침내 왕위를 찬탈하고 부적절한 행위를 저질렀으며 많은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였다. 그는 자신의 관리를 통제하기 위해 연민의 거짓 표현을 사용했다. 그의 부하들은 거의 모두 반역자나 절망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는 마침내 진왕에게 항복했고, 공개적으로 참수되지 않은 것은 매우 다행이었다.
5. 왕세충이 등장한 작품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2]
웹사이트
Chinese-Western Calendar Converter
http://db1x.sinica.e[...]
2010-05-22
[3]
서적
Zizhi Tongjian
[4]
서적
Sui Shu
[5]
논문
Xiong
https://books.google[...]
2006
[6]
웹사이트
大業十一年 八月癸酉
http://db1x.sinica.e[...]
2010-05-22
[7]
서적
Zizhi Tongjian
[8]
웹사이트
http://ef.cdpa.nsysu[...]
2007-10-11
[9]
웹사이트
http://ef.cdpa.nsysu[...]
2007-10-11
[10]
서적
資治通鑑
[11]
서적
Jiu Tang S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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