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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준 (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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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준은 서진 시대의 장군으로, 오나라 정벌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으나, 동료 장수 왕혼의 모함으로 인해 억울한 시련을 겪었다. 그는 홍농군 출신으로 학식과 야심을 갖춘 인물로 평가받았으며, 양호의 추천으로 익주자사가 되어 이민족을 귀부시키는 등 치적을 쌓았다. 280년 오나라를 정벌하면서 쇠사슬과 쇠송곳을 제거하는 기지를 발휘, 손호를 항복시키고 중국 통일에 기여했다. 그러나 왕혼의 모함으로 오해를 받아 어려움을 겪었으며, 말년에는 오만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다 286년에 사망했다. 사후 무후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당나라 시대에는 중국 육십사 명장으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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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준 (서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쇠사슬 침강
쇠사슬 침강
이름왕준
원어 이름王濬
사치 (士治)
아명아동 (阿童)
출생206년
출생지링바오, 허난
사망286년 1월 28일 (79세)
묻힌 곳창즈, 산시
배우자서막(徐邈)의 딸
자녀왕거 (王矩)
왕창 (王昌)
직업군사 장군, 정치가
시호무후 (武侯)
작위양양후 (襄陽侯)
경력
광한 태수272년
익주 자사272년 - 279년
용양장군279년 - ?
진군대장군? - 286년
산기상시? - 286년
무군대장군285년 9월 16일 - 286년 1월 28일
섬긴 국가
국가조위
서진
주요 업적
업적오나라 정복

2. 생애 전반기

왕준은 학식이 풍부하고 큰 뜻을 품은 인물이었다고 한다. 양호의 참군을 지냈는데, 양호의 조카 양기(羊曁)가 양호에게 “뜻이 크고 사치하여 일을 전적으로 맡길 수 없다.”고 평하자, 양호는 “왕준은 큰 재주를 지녔고 바라는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답하였다.

272년 장홍(張弘)이 반란을 일으켜 익주자사 황보안(皇甫晏)을 죽이고 거짓 보고를 올렸으나, 왕준이 광한태수로서 이를 진압하고 장홍과 그 삼족을 멸했다. 조정에서는 양호를 관내후(關內侯)에 봉하고 황보안의 뒤를 이어 왕준을 익주자사로 임명했다. 왕준은 자사가 된 후 위엄과 신의를 분명히 하여 많은 이민족들을 귀부시켰다.

왕준은 꿈에서 대들보에 칼 세 자루가 달려 있다가 한 자루가 더 늘어나는 것을 보고, 꿈풀이를 통해 익주를 다스리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이것이 실제로 이루어져 익주자사가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5]

왕준은 현재의 링바오 서쪽에 위치한 허난성 홍농군(弘農郡, 湖縣) 출신으로, 관료 가문에서 태어났다. 잘생긴 외모와 박식함, 그리고 야심으로 유명했다. 허둥군(河東郡, 현재의 산시성 샤 현 주변)의 관청에서 조관(從事)으로 경력을 시작했다.

젊은 시절 경서에 정통하고 용모가 뛰어났지만, 명성을 추구하지 않아 향리의 유력자들에게 평가받지 못했다. 후에 뜻을 바꿔 사예에서 초빙되어 하동 종사가 되었다. 사예교위 서막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

양호의 참군이 되어 양호에게 우대받았다. 양기는 왕준에 대해 "뜻은 크지만 사치스럽고 절의가 없으니, 전임시켜서는 안 됩니다"라고 진언했지만, 양호는 왕준의 재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 익주의 파군태수·광한태수로 승진하여, 현지의 병역을 완화하고 은혜를 베풀어 군민들에게 기쁨을 받았다. 황보안이 장홍의 난으로 살해되자, 대신 자사가 되어 장홍을 주살하고, 만이를 회유하여 다수를 귀속시켰다. 이 공으로 우위장군, 대사농이 되었다. 그러나 양호는 몰래 상표하여 다시 그를 익주 자사로 만들었다. 왕준은 촉한의 옛 신하인 하반을 중용하고, 양호와 연락을 취하며 토벌을 협의했다.

2. 1. 출생과 성장

왕준은 학식이 풍부하고 큰 뜻을 품은 인물이었다고 한다. 양호의 참군을 지냈는데, 양호의 조카 양기(羊曁)가 양호에게 왕준을 두고 “뜻은 크고 사치하여 일을 전적으로 맡길 수 없다.”고 평하자, 양호는 “왕준은 큰 재주를 지녔고 바라는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답하였다.

왕준은 현재의 링바오 서쪽에 위치한 허난성 홍농군(弘農郡, 湖縣) 출신으로, 관료 가문에서 태어났다. 잘생긴 외모와 박식함, 그리고 야심으로 유명했다. 허둥군(河東郡, 현재의 산시성 샤 현 주변)의 관청에서 조관(從事)으로 경력을 시작했다.

대대로 2천 석의 가문 출신으로, 젊은 시절부터 경서에 정통했고 용모가 뛰어났지만, 명성을 추구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향리의 유력자들에게 평가받지 못했다. 후에 뜻을 바꿔 큰 뜻을 품고 사예에서 초빙되어 하동 종사가 되었다. 당시 사예교위는 서막이었는데, 왕준은 서막으로부터 딸을 아내로 맞이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2. 2. 양호와의 만남

왕준은 학식이 풍부하고 뜻이 큰 인물이었다고 한다. 이후 양호의 참군을 지냈는데, 양호의 조카 양기(羊曁)는 양호에게 왕준을 두고 “뜻이 크고 사치하여 일을 전적으로 맡길 수 없다.”고 평했다. 그러나 양호는 “왕준은 큰 재주를 지녔고 바라는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답하였다.[2] 양호는 왕준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익주 파군태수·광한태수로 승진시켰고, 익주(益州, 현재의 쓰촨성과 충칭을 포함)의 자사(刺史)로 추천했다.

2. 3. 익주자사 부임

왕준은 학식이 풍부하고 큰 뜻을 품은 인물이었다고 한다. 양호의 참군으로 있을 때, 양호의 조카 양기(羊曁)는 왕준이 "뜻이 크고 사치하여 일을 전적으로 맡길 수 없다"고 평했지만, 양호는 "왕준은 큰 재주를 지녔고 바라는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답하며 그를 높이 평가했다.

272년, 장홍(張弘)이 반란을 일으켜 익주자사 황보안(皇甫晏)을 죽이고 거짓 보고를 올렸으나, 왕준이 광한(廣漢)태수로서 이를 진압하고 장홍과 그 삼족을 멸했다. 조정에서는 양호를 관내후(關內侯)에 봉하고 황보안의 뒤를 이어 왕준을 익주자사로 임명했다. 왕준은 위엄과 신의를 분명히 하여 많은 이민족들을 귀부시켰다.

이와 관련하여, 왕준이 꿈에서 대들보에 칼 세 자루가 달려 있다가 한 자루가 더 늘어나는 것을 보고, 꿈풀이를 통해 익주를 다스리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이것이 실제로 이루어져 익주자사가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5]

3. 오나라 정벌

사마염오나라를 멸망시킬 뜻을 품고 양호와 오나라 정벌 방안을 의논했다. 양호에게 용양장군(龍驤將軍)을 겸하게 하고 큰 전함을 대대적으로 만들게 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양호가 오나라 정벌을 주장했으나 가충 등의 반대에 부딪혀 성사시키지 못하고 병이 들어 죽었다. 279년 왕준은 직접 상소를 올려 손호가 폭정을 거듭하는 이때 정벌하지 않고 자신이 늙어 죽으면 정벌을 성공시키기 어렵다고 하였다. 두예사마염에게 결단을 촉구한 것도 오나라 정벌 결정에 영향을 주었다.

280년 당빈과 함께 오나라 공격에 나선 왕준은 오나라 단양감(丹陽監) 성기를 상대로 승리했다. 오나라는 장강 바닥에 쇠사슬과 쇠송곳을 깔아 진나라 전함이 강을 타고 내려오는 것을 막으려 했다.

왕준은 큰 뗏목 수십 개를 만들어 쇠송곳이 뗏목에 박힌 채 떠내려가게 하고, 쇠사슬에 불을 붙여 녹여 장애물을 제거했다. 왕준의 군대는 연승하여 오나라 이도감(夷道監) 육안, 도독 손흠, 수군도독 육경 등을 죽였다. 두예손흠을 산 채로 잡아보냈으므로, 왕준이 손흠의 머리를 보낸 것은 웃음거리가 되었다. 사마염두예가 왕준에게 건업 공격을 지시하자, 왕준은 장강을 타고 진격해 나갔다. 오나라 유격장군(遊擊將軍) 장상은 진나라 군사의 기세가 왕성한 것을 보고 싸우지 않고 항복하였다. 왕준의 군사가 건업 석두성(石頭城)에 들어오자 손호는 스스로 묶어 왕준에게 항복했고, 왕준은 손호의 결박을 풀어주고 밧줄과 관을 태워 항복을 받은 다음 낙양으로 보냈다. 이로써 오나라는 멸망하고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3. 1. 오나라 정벌 계획

사마염은 오나라를 멸망시킬 계획을 세우고 양호와 함께 오나라 정벌 방안을 논의했다. 양호에게 용양장군(龍驤將軍)을 겸하게 하고 대규모 전함 건조를 지시했다.[5] 그러나 조정에서는 가충 등의 반대로 양호의 오나라 정벌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고, 양호는 병으로 사망했다. 279년 왕준은 직접 상소를 올려 손호의 폭정을 지적하며 지금이 오나라 정벌의 적기라고 주장했다. 두예 역시 사마염에게 결단을 촉구했고, 마침내 오나라 정벌이 결정되었다.

280년 왕준은 당빈과 함께 오나라 공격에 나섰다. 오나라는 장강 바닥에 쇠사슬과 쇠송곳을 설치하여 진나라 전함의 진격을 막으려 했다. 왕준은 큰 뗏목을 만들어 쇠송곳을 제거하고, 쇠사슬은 불로 녹이는 기지를 발휘했다. 장애물이 제거되자 왕준의 군대는 연승을 거듭하며 오나라의 이도감(夷道監) 육안, 도독 손흠, 수군도독 육경 등을 죽였다. 두예손흠을 생포했기 때문에, 왕준이 손흠의 머리를 보낸 것은 웃음거리가 되었다.[6] 사마염두예의 명령에 따라 장강을 타고 진격한 왕준은 유격장군 장상의 항복을 받았다. 마침내 왕준의 군대가 건업 석두성(石頭城)에 입성하자 손호는 항복했고, 왕준은 손호를 낙양으로 보냈다. 이로써 오나라는 멸망하고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3. 2. 쇠사슬과 쇠송곳 격파

280년 당빈(唐彬)과 함께 오나라 공격에 나선 왕준은 오나라의 단양감(丹陽監) 성기(盛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오나라에서는 진나라의 공격에 대비해 장강 바닥에 쇠사슬과 쇠송곳을 깔아두어 강을 타고 내려오는 진나라의 전함을 가라앉히려 하였다.[5]

이를 알아챈 왕준은 큰 뗏목 수십 개를 만들어 흘려보내 쇠송곳이 뗏목에 박힌 채 떠내려가게 하고, 쇠사슬에 불을 붙여 녹여 장애물을 제거하였다.

3. 3. 건업 함락과 손호 항복

사마염(司馬炎)은 오나라를 멸망시킬 계획을 세우고 양호와 함께 오나라 정벌 방안을 논의했다. 양호에게 용양장군(龍驤將軍)을 겸하게 하고 대규모 전함을 만들게 했다.[5] 그러나 조정에서는 가충(賈充) 등의 반대로 오나라 정벌이 이루어지지 못했고, 양호는 병으로 사망했다. 279년, 왕준은 직접 상소를 올려 손호의 폭정이 계속되는 지금이 오나라를 정벌할 적기이며, 자신이 늙어 죽으면 정벌이 어려워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두예(杜預)도 사마염에게 결단을 촉구하여, 마침내 오나라 정벌이 결정되었다.

280년, 왕준은 당빈(唐彬)과 함께 오나라 공격에 나섰다. 먼저 오나라의 단양감(丹陽監) 성기(盛紀)를 상대로 승리했다. 오나라는 장강 바닥에 쇠사슬과 쇠송곳을 설치하여 진나라 전함의 진격을 막으려 했다.

이를 간파한 왕준은 큰 뗏목 수십 개를 만들어 쇠송곳을 제거하고, 쇠사슬은 불로 녹여 없앴다. 왕준의 군대는 거침없이 진격하여 오나라의 이도감(夷道監) 육안(陸晏), 도독 손흠(孫欽), 수군도독 육경(陸景) 등을 처치했다. 사마염두예의 명령에 따라 장강을 타고 진격한 왕준은 오나라 유격장군(遊擊將軍) 장상(張象)의 항복을 받았다. 마침내 왕준의 군대가 건업 석두성(石頭城)에 입성하자, 손호는 스스로 결박하고 왕준에게 항복했다.[6] 왕준은 손호의 결박을 풀어주고 항복을 받은 뒤 낙양으로 보냈다. 이로써 오나라는 멸망하고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했다.

4. 왕혼과의 갈등과 모함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과정에서 왕혼과 갈등을 겪었다. 왕준은 왕혼의 모함으로 곤경에 처하기도 했지만, 결백함을 주장하고 주변 인물들의 도움으로 누명을 벗었다.

손호가 항복할 당시, 왕준은 왕혼의 제안을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진군하여 손호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 때문에 왕혼은 왕준에게 앙심을 품고 사마염에게 왕준을 모함하는 글을 올렸다. 진나라 조정에서도 왕준을 처벌해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고, 사마염 역시 왕준을 책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왕준은 억울함을 호소했고, 진수 등이 왕준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다. 결국 왕준은 누명을 벗고 보국대장군, 진군대장군 등의 관직에 오르고 양양현후로 책봉되었다. 그럼에도 왕준은 왕혼을 경계하여 그를 만날 때 경비를 삼엄하게 했다.

4. 1. 왕혼의 모함

이전에 손호는 상황이 절망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왕준과 왕혼, 사마주에게 글을 보내 항복하겠다는 뜻을 알렸는데, 왕혼은 왕준이 석두성을 향해 진군할 때 같이 논의하자고 했으나 때마침 순풍이 불어 배를 움직이기 적합했기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왕준에게 앙심을 품었는데, 왕준은 손호를 낙양으로 보낼 때 왕혼의 진영을 거쳐 가도록 했으나 왕혼은 사마염에게 글을 올려 왕준이 자신의 통제를 받지 않았으며 왕준의 부하들이 오나라의 보물을 가져가고 궁전을 불태웠다고 모함하였다.

진나라 조정에서는 사마염에게 왕준을 잡아들여 죄를 심문해야 한다는 글들이 올라왔고, 한때 사마염도 왕혼의 모함을 믿고 왕준을 책망하기도 했다. 왕준의 계속된 해명으로 의혹이 풀리고 논공행상 때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 겸 양양현후(襄陽縣侯)로 책봉되었으나, 세상 사람들은 왕준이 세운 공에 비해 상이 적다고 여겼다. 이후 진수 등이 왕준의 억울함을 알리는 상소를 올린 덕분에 진군대장군(鎭軍大將軍)이 되었다.

왕준은 왕혼에게 모함당했을 때 분노가 쌓여 사마염 앞에서도 이를 감추지 못했고, 또 촉나라를 멸망시키고도 종회의 모함 때문에 죽은 등애처럼 억울한 처지에 놓일 것을 걱정하여 불안해했다. 때문에 왕혼을 꺼려서 왕혼이 찾아왔을 때 경비를 삼엄하게 갖춘 다음에야 만났다.

4. 2. 진수 등의 변호

손호는 상황이 절망적임을 깨닫고 왕준과 왕혼, 사마주에게 항복 의사를 담은 글을 보냈다. 왕혼은 왕준에게 석두성을 향해 진군할 때 함께 논의하자고 제안했으나, 때마침 순풍이 불어 배를 움직이기 좋았기 때문에 왕준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왕혼은 왕준에게 앙심을 품었다. 왕준은 손호를 낙양으로 보낼 때 왕혼의 진영을 거쳐 가도록 했지만, 왕혼은 사마염에게 글을 올려 왕준이 자신의 통제를 받지 않았고, 왕준의 부하들이 오나라의 보물을 가져가고 궁전을 불태웠다고 모함했다.[2]

진나라 조정에서는 사마염에게 왕준을 잡아들여 죄를 심문해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왔고, 한때 사마염도 왕혼의 모함을 믿고 왕준을 책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왕준이 계속 해명하여 의혹이 풀렸고, 논공행상 때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 겸 양양현후(襄陽縣侯)로 책봉되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왕준이 세운 공에 비해 상이 적다고 생각했다. 이후 진수 등이 왕준의 억울함을 알리는 상소를 올린 덕분에 진군대장군(鎭軍大將軍)으로 승진했다.[2]

왕준은 왕혼에게 모함당했을 때 분노가 쌓여 사마염 앞에서도 이를 감추지 못했다. 또한 촉나라를 멸망시키고도 종회의 모함으로 죽은 등애처럼 억울한 처지에 놓일 것을 걱정하여 불안해했다. 이 때문에 왕혼을 꺼려 왕혼이 찾아왔을 때 경비를 삼엄하게 갖춘 다음에야 만났다.

5. 말년과 죽음

왕혼은 왕준이 석두성을 향해 진군할 때 같이 논의하자고 했으나, 때마침 순풍이 불어 배를 움직이기 적합했기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왕준에게 앙심을 품었다. 왕준은 손호를 낙양으로 보낼 때 왕혼의 진영을 거쳐 가도록 했으나, 왕혼은 사마염에게 글을 올려 왕준이 자신의 통제를 받지 않았으며, 왕준의 부하들이 오나라의 보물을 가져가고 궁전을 불태웠다고 모함하였다.[2]

진나라 조정에서는 사마염에게 왕준을 잡아들여 죄를 심문해야 한다는 글들이 올라왔고, 한때 사마염도 왕혼의 모함을 믿고 왕준을 책망하기도 했다. 왕준의 계속된 해명으로 의혹이 풀리고 논공행상 때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 겸 양양현후(襄陽縣侯)로 책봉되었으나, 세상 사람들은 왕준이 세운 공에 비해 상이 적다고 여겼다. 이후 진수 등이 왕준의 억울함을 알리는 상소를 올린 덕분에 진군대장군(鎭軍大將軍)이 되었다.[2]

왕준은 왕혼에게 모함당했을 때 분노가 쌓여 사마염 앞에서도 이를 감추지 못했고, 또 촉나라를 멸망시키고도 종회의 모함 때문에 죽은 등애처럼 억울한 처지에 놓일 것을 걱정하여 불안해했다. 왕혼을 꺼려서 왕혼이 찾아왔을 때 경비를 삼엄하게 갖춘 다음에야 만났다.

284년 12월(윤달) 17일에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무후(武侯)이며, 백곡산(柏谷山)에 묻혔다.[3]

6. 평가 및 유산

왕준은 뛰어난 군사적 재능과 전략으로 서진의 오나라 정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특히, 대규모 전함을 건조하고 쇠사슬과 같은 장애물을 극복하는 혁신적인 전술은 그의 뛰어난 지략을 보여준다. 양호는 일찍이 왕준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그를 중용했으며, 이는 훗날 오나라 정복의 초석이 되었다.[2]

그러나 왕준은 공을 세운 후 오만해져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으며, 다른 장군인 왕혼과의 불화로 인해 정당한 인정을 받지 못하는 등 인간적인 결함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제는 왕준의 공을 인정하여 그를 양양후(襄陽侯)로 봉하고, 사후에는 '무후(武侯)'라는 시호를 내렸다.[3]

왕준의 유산은 군사 전략과 기술 발전에 기여한 점, 그리고 서진 통일에 중요한 역할을 한 점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의 군사적 업적은 나라 때 선정된 중국 육십사 명장(무묘육십사장)에 포함될 정도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7. 가계

왕준은 서묘의 딸과 결혼하여 왕거(王矩)와 왕창(王暢) 두 아들을 두었다. 왕거는 아버지의 작위를 이어받아 양양후(襄陽侯)가 되었고, 왕창은 진(晉) 왕조에서 산기랑(散騎郎)을 지냈다. 왕창의 아들 왕취(王粹)는 진나라 영천공주(潁川公主)와 결혼하여 위군 태수(魏郡太守)를 지냈다.[5]

참조

[1] 서적 Book of Jin
[2] 서적 Jin Shu
[3] 서적 Jin Shu
[4] 간행물 嘉平 (魏) 249
[5] 화양국지 화양국지 276-10
[6] 문서 京師(首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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