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황후 (당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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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황후는 당 고조의 여동생의 손녀로, 당 고종의 황후였다. 명문가 출신으로 아름다운 외모와 온화한 성품을 지녔지만, 후사를 잇지 못했다. 고종의 총애를 받던 소숙비를 견제하기 위해 측천무후를 궁으로 불러들였으나, 오히려 측천무후에게 모함당해 폐위되고 처형당했다. 그녀는 여러 드라마와 영화에서 다뤄지기도 했다.
왕씨는 당 고조 이연의 여동생인 동안공주의 손녀이자, 서위 대장 왕사정의 현손녀였다.[12] 명문가 출신인 왕씨는 할머니 동안공주의 추천으로 이치의 비가 되었으며, 643년 이치가 황태자에 오르자 황태자비가 되었다. 649년 이치가 당 고종으로 즉위하면서 이듬해인 650년 황후로 책봉되었다.
2. 생애
왕씨는 뛰어난 인품을 지녔으나, 혼인 후 몇 년이 지나도록 아이를 낳지 못했다.[13] 당 고종의 총애를 받던 숙비 소씨는 자신의 아들 이소절을 황태자로 세우려 했고, 왕씨는 이를 견제하기 위해 당 태종의 후궁이었던 무측천을 궁으로 불러들였다.[14] 당 태종 사후 비구니가 되어 감업사(感業寺)에 있던 무측천은, 궁을 나가기 전 당 고종과 친밀한 사이였다.[15] 당 고종이 감업사에서 무측천과 재회한 것을 안 왕씨는 무측천을 자신의 시녀로 삼아 당 고종과 숙비 소씨의 사이를 이간질하는 한편 당 고종의 환심을 사려 했다.[16]
무측천은 왕씨의 비위를 맞춰 금세 그녀의 총애를 받게 되었고, 왕씨는 당 고종 앞에서 무측천을 칭찬하여 이윽고 무측천은 소의(昭儀)에 봉해졌다.[17] 그러나 왕씨와 그 일족은 명문가 출신이라는 오만한 태도를 보여 아랫사람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지 않았는데, 무측천은 이러한 점을 이용하여 왕씨의 궁인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었고 왕씨의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하였다.[18]
654년 무측천이 딸을 낳자 아이를 좋아하는 왕씨가 공주를 보러 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무측천은 딸을 죽이고 그 죄를 왕씨에게 덮어씌웠다.[19] 결국 655년 10월 13일, 당 고종은 왕씨를 폐서인하고 무측천을 황후로 세우는 조서를 내렸다.[20] 장손무기, 우지녕, 저수량 등은 반대했지만, 당 고종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 왕씨는 숙비 소씨와 함께 사방이 막혀 밥그릇 하나 들어갈 정도의 방에 감금되었고, 당 고종이 몰래 찾아가 음식을 넣어주기도 했다.[20] 무측천은 이 사실을 알고 왕씨에게 장 100대를 때리고 손발을 잘라 죽였으며,[21] 왕씨의 성을 구렁이를 뜻하는 '蟒'으로 바꾸게 했다.[20]
무측천은 왕 황후와 소숙비를 술 항아리에 가두고 "뼈까지 취하게 하라!"[11]라고 명령했다. 왕 황후는 "폐하 만세, 그리고 '자오이' (昭儀, 무소의가 빈이었을 때의 칭호, 암묵적으로 그녀를 황후로 인정하지 않음)께서 영원히 총애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죽는 것은 제 책임입니다."라고 말하며 죽음을 받아들였지만, 소숙비는 "무소의는 간악한 괴물이다! 내가 고양이로 환생하고 그녀가 쥐로 환생하여 영원히 그녀의 목을 물어뜯게 해다오."라고 무측천을 저주했다. 두 사람은 며칠 동안 고통받다 죽었고, 무측천은 시신의 목을 베었다. 무측천은 소숙비의 저주 때문에 궁궐에서 고양이를 키우는 것을 금지했지만, 왕 황후와 소숙비의 귀신에 시달려 낙양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왕 황후와 소숙비의 성은 무측천이 죽은 후 705년에야 원래대로 복구되었다. 왕 황후의 죽음에 대해서는 당 고종의 승인 하에 교살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2. 1. 가계와 초기 생애
왕씨는 서위 대장군 왕사정의 현손녀이자 당 고조 이연의 여동생인 동안공주의 손녀였다.[12] 명문가 출신이었던 왕씨는 할머니 동안공주의 추천으로 이치의 비가 되었다.[12] 643년 이치가 황태자에 봉해지면서 왕씨 또한 황태자비가 되었다.[12]
왕황후는 병주 (幷州, 대략 오늘날의 타이위안) 출신으로, 아버지 왕인우(王仁佑)는 서위의 대장군이었던 왕사정(王思政)의 아들이었다.[5] 당 태종 재위 기간 동안 왕인우는 낙산현(羅山, 오늘날의 신양)의 현령을 지냈다. 당 태종의 고모인 통안공주(通安公主)는 왕인우의 삼촌인 왕유(王裕)와 결혼했는데,[6] 왕인우의 딸이 아름답고 온화하다는 소식을 듣고, 통안공주는 태종에게 왕씨 부인을 그의 며느리 중 한 명으로 삼을 것을 추천했다. 태종은 이에 동의하여, 그녀를 자신의 아홉 번째 아들인 진왕 이치의 아내이자 빈(嬪)으로 삼았다.
2. 2. 황후 시절
왕씨는 서위대장 왕사정의 현손녀이자 당 고조 이연의 여동생인 동안공주의 손녀였다.[12] 명문가 출신인 왕씨는 할머니 동안공주의 추천으로 이치의 비가 되었고, 643년 이치가 황태자가 되면서 왕씨도 황태자비가 되었다. 649년 이치가 당 고종으로 즉위한 후, 650년 왕씨는 황후가 되었다.[13]
왕씨는 아름다운 외모와 훌륭한 인품을 지녔지만, 혼인 후 몇 년 동안 후사를 잇지 못했다.[13] 당 고종의 총애를 받던 숙비 소씨가 아들 이소절을 황태자로 세우려 하자, 왕씨는 소씨를 견제하기 위해 당 태종의 후궁이었던 무측천을 궁으로 불러들였다.[14] 무측천은 당 태종 사후 비구니가 되어 감업사(感業寺)에 있었으나, 당 고종과 이전부터 친밀한 사이였다.[15] 당 고종이 감업사에서 무측천과 재회한 것을 안 왕씨는 무측천을 시녀로 삼아 당 고종과 숙비 소씨 사이를 이간질하고, 당 고종의 환심을 사려 했다.[16]
무측천은 왕씨의 비위를 맞춰 총애를 얻었고, 왕씨는 당 고종 앞에서 무측천을 칭찬하여 소의(昭儀)에 봉해지게 했다.[17] 그러나 왕씨와 그 일족은 오만한 태도로 평판이 좋지 않았고, 무측천은 이를 이용해 왕씨의 궁인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어 왕씨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18]
654년 무측천이 딸을 낳자, 아이를 좋아하던 왕씨가 공주를 보러 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무측천은 딸을 죽이고 그 죄를 왕씨에게 덮어씌웠다.[19] 결국 655년 10월 13일, 당 고종은 왕씨를 폐서인하고 무측천을 황후로 세우는 조서를 내렸다.[20] 장손무기, 우지녕, 저수량 등은 반대했지만, 당 고종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 왕씨는 숙비 소씨와 함께 감금되었고, 당 고종이 몰래 찾아와 음식을 넣어주기도 했다.[20] 이를 알게 된 무측천은 왕씨에게 장 100대를 때리고 손발을 잘라 죽였으며,[21] 왕씨의 성을 구렁이를 뜻하는 '蟒'으로 바꾸게 했다.[20]
2. 3. 무측천과의 갈등
왕씨는 이치가 황태자였던 시절, 숙비 소씨가 고종의 총애를 받으며 자신의 아들 이소절을 황태자로 세우려고 하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무측천을 궁으로 불러들였다.[14] 무측천은 당 태종의 후궁이었으나, 태종 사후 비구니가 되어 절에 있었다.[15] 왕씨는 당 고종이 무측천과 재회한 사실을 알고, 그녀를 자신의 시녀로 삼아 고종과 소숙비 사이를 이간질하고 고종의 환심을 사려고 했다.[16]
무측천은 왕씨의 비위를 맞춰 그녀의 총애를 얻었고, 왕씨는 고종 앞에서 무측천을 칭찬하여 무측천이 소의에 봉해지도록 했다.[17] 그러나 왕씨와 그 일족은 오만한 태도로 아랫사람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지 않았는데, 무측천은 이 점을 이용하여 왕씨의 궁인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고 왕씨의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했다.[18]
654년, 무측천이 딸을 낳자 왕씨가 공주를 보러 왔는데, 무측천은 자신의 딸을 죽이고 그 죄를 왕씨에게 덮어씌웠다.[19] 결국 654년 10월 13일, 고종은 왕씨를 폐서인하고 무측천을 황후로 세웠다.[20] 장손무기 등은 이에 반대했지만, 고종의 마음을 돌리지는 못했다. 왕씨는 소씨와 함께 사방이 막힌 방에 감금되었고, 고종이 몰래 찾아가 두 사람에게 음식을 넣어주기도 했다.[20] 무측천은 이 사실을 알고 왕씨에게 장 100대를 때리고 손발을 잘라 죽였으며,[21] 왕씨의 성을 '蟒'(구렁이)으로 바꾸게 했다.[20]
2. 4. 폐위와 죽음
왕씨는 서위대장 왕사정의 현손녀이자 당 고조 이연의 여동생인 동안공주의 손녀였다.[12] 명문가 출신이었던 왕씨는 650년 황후가 되었으나, 자식을 낳지 못하고 숙비 소씨의 견제를 받았다.[13],[14] 왕씨는 소씨를 견제하기 위해 당 태종의 후궁이었던 무측천을 궁으로 불러들였고,[14] 무측천은 왕씨의 환심을 사 소의에 봉해졌다.[17] 그러나 무측천은 왕씨의 궁인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어 왕씨를 감시했고,[18] 자신의 딸을 죽이고 왕씨에게 누명을 씌웠다.[19]
654년 10월 13일, 고종은 왕씨를 폐서인하고 무측천을 황후로 세웠다.[20] 장손무기 등은 반대했지만, 고종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 왕씨는 숙비 소씨와 함께 감금되었고, 고종이 몰래 찾아와 음식을 넣어주기도 했다.[20] 이를 알게 된 무측천은 왕씨에게 장 100대를 때리고 손발을 잘라 죽였으며,[21] 왕씨의 성을 구렁이를 뜻하는 '蟒'으로 바꾸게 하였다.[20]
무측천은 왕 황후와 소숙비를 술 항아리에 가두고 "뼈까지 취하게 하라!"[11]라고 명령했다. 왕 황후는 죽음을 받아들였지만, 소숙비는 무측천을 저주했다. 두 사람은 며칠 동안 고통받다 죽었고, 무측천은 시신의 목을 베었다. 무측천은 소숙비의 저주 때문에 궁궐에서 고양이를 키우는 것을 금지했지만, 왕 황후와 소숙비의 귀신에 시달려 낙양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왕 황후와 소숙비의 성은 무측천이 죽은 후 705년에야 원래대로 복구되었다. 왕 황후의 죽음에 대해서는 고종의 승인 하에 교살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3. 왕황후가 등장한 작품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2]
서적
Zizhi Tongjian
655-11-16
[3]
문서
[4]
서적
Zizhi Tongjian
655-11-16
[5]
서적
Xin Tang Shu
[6]
서적
Xin Tang Shu
[7]
서적
Old Book of Tang
649-07-10
[8]
서적
Old Book of Tang
[9]
서적
Bo Yang Edition of Zizhi Tongjian
[10]
서적
Zizhi Tongjian
[11]
웹사이트
唐書 列傳 第一至十
http://ef.cdpa.nsysu[...]
2008-02-19
[12]
서적
중국을 뒤흔든 불멸의 여인들 2
글누림
[13]
서적
여중호걸 무측천
세종서적
[14]
서적
[15]
서적
[16]
서적
[17]
서적
[18]
서적
[19]
서적
중국사 열전 후비
달과소
[20]
서적
여인들의 중국사
김영사
[21]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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