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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나리 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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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시나리 친왕은 남북조 시대에 규슈 정서부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1366년경 규슈로 내려와 친왕 선하를 받은 후, 이요의 고노 미치타카의 요청으로 영토 경영에 관여했다. 이후 정서대장군직을 물려받아 히젠 니나후치 전투, 다쿠마바루 전투 등에서 활약했으나, 이마가와 군에게 패하며 정서부를 여러 차례 옮겨야 했다. 1392년 남북조가 합일된 후에도 정서부 재흥을 위해 노력했으나, 1395년경 사망했다. 요시나리 친왕의 묘는 야메시에 있으며, 후정서장군궁으로 불리지만, 그의 휘는 불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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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나리 친왕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요시나리 친왕(良成親王)
다쿠마 전투에서 분전하는 요시나리 친왕의 부조
다쿠마하라 전투에서 분전하는 요시나리 친왕
다른 이름후정서장군궁(後征西将軍宮), 진제이노미야(鎮西宮)
가문/작위해당 정보 없음
출생일미상
출생지셋쓰국스미요시 행궁?
사망일오에이 2년(1395년)?
사망지지쿠고국 야베(矢部) 오소마(大杣)
매장일미상
매장지지쿠고 국 야베 오소마
아버지고무라카미 천황
어머니레이제이노 쓰보네(冷泉局)?
형제자매고무라카미 천황의 제6황자
관직
주요 직책정서장군, 병부경

2. 경력

1366년 무렵, 요시나리 친왕은 어린 나이에 규슈(九州) 정서부로 내려갔다. 1369년에는 이요의 고노 미치나오의 요청으로 영지 경영을 맡았는데, 이는 세토 내해의 동쪽 상경 루트를 확보하기 위한 정서부의 계획이었다고 한다. 1374년 겨울, 숙부 가네요시 친왕으로부터 정서장군 직위를 물려받았다. 이후 요시나리 친왕의 주요 경력은 다음과 같다.

연도사건비고
1376년히젠 고쿠후(오늘날의 사가시)로 출진기쿠치 가가마루와 함께 출진, 이마가와 사다요(료슌) 군대와 대치했으나 전투는 없었음. 아소 씨에게 영지 발급.
1377년히젠 니나후치 전투막부군에 대패, 구마베 성으로 퇴각.
1378년다쿠마바루 전투기쿠치 다케토모와 함께 막부군과 전투, 남조 측의 마지막 승리.
1379년~1381년정서부 천도긴푸 산으로 정서부 이전.
1383년~1385년남조 세력 회복 및 정서부 이전우토 씨와 가와지리 씨의 원조를 받아 우토로 정서부 이전.
1386년~1391년우토, 야시로 함락야시로로 정서부 이전, 이후 이마가와 군과 화친.
1392년남북조 합일남조 멸망, 이후에도 독자적인 연호 사용하며 부흥 꾀함.
1395년고조 요시시게에게 감장 수여오토모 씨 일족 격퇴에 대한 포상.


2. 1. 히젠 니나후치 전투 (1377년)

1376년 여름, 요시나리 친왕은 기쿠치 가가마루(훗날의 다케오키·다케토모)에 옹립되어 히젠 고쿠후(오늘날의 사가시)로 출진하여 막부 측 이마가와 사다요(료슌) 군대와 대치했으나, 전투는 없었다. 그 사이 아소 씨에게 영지를 발급하여 위급 상황에 대비했다. 1377년 1월, 고쿠후 부근 지후·니나후치에서 막부군과 전투를 벌여 대패했다(히젠 니나후치 전투). 기쿠치 군은 많은 전사자를 냈고, 정서부의 쇠퇴가 가속화되었다. 친왕과 기쿠치 가가마루는 지쿠고를 거쳐 구마베 성으로 퇴각했으나, 이마가와 군이 히고까지 추격해왔다.[18][5]

2. 2. 다쿠마바루 전투 (1378년)

덴주 4년/에이와 4년(1378년) 9월, 요시나리 친왕은 기쿠치 다케토모와 함께 다쿠마바루(구마모토시 동부)에서 이마가와 군과 다시 전투를 벌였다(다쿠마바루 전투).[5] 기쿠치 군은 고전하고 다케토모가 부상을 입었지만, 친왕이 직접 진두지휘하여 막부군을 패퇴시켰다.[5] 이 전투는 남조 측이 거둔 마지막 승리였다.

2. 3. 정서부 천도

덴주 5년/고랴쿠 원년(1379년)부터 이마가와 나카아키는 히고의 여러 성을 공격하고, 덴주 6년/고랴쿠 2년(1380년)에는 기쿠치 18 외성으로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전략을 폈다.[19] 고와 원년/에이토쿠 원년(1381년) 6월, 이마가와 나카아키의 야습으로 구마베 성과 센도 성(染土城)이 함락되었다.[19] 요시나리 친왕은 기쿠치 다케오키와 함께 긴푸 산(구마모토 시 가와치노마치타케)으로 정서부를 옮겼다.[19]

고와 3년/에이토쿠 3년(1383년) 4월, 이마가와 측의 사가라 마에요리가 남조 측에 귀순하면서 히고 남부 지역에서 남조 세력이 회복되었다.[19] 겐추 원년/지토쿠 원년(1384년) 무렵, 우토 씨와 가와지리 씨의 원조를 받아 우토(구마모토 현 우토시)로 정서부를 이전하였다.[19]
우토 성터(구마모토현우토시)
겐추 2년/지토쿠 2년(1385년), 시마즈 씨와 사가라 사키요리가 화해하고, 오스미의 네지메 씨도 남조 측에 귀순하면서 규슈 남부의 여러 무사 집안이 이마가와 측에서 이탈했다.[19]

2. 4. 우토, 야시로 함락

겐추 3년/지토쿠 3년(1386년) 여름, 이마가와 료슌은 우토와 가와시리 두 성을 공격하였다. 료슌이 구모다(隈牟田) ・ 아카야마(赤山) 등의 여러 성들을 공격하는 동안, 사가라 사키요리는 다마(球磨) 방면에서 반격하여 정서부의 위기를 구했고, 겐추 4년/지토쿠 4년(1387년) 7월 친왕(병부경친왕兵部卿親王[20])은 그 군공을 포상하였다.

이후 몇 년 동안 양군 사이에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고, 정서부는 짧은 평안을 맞이하였으나, 그 사이에 아소 씨 ・ 나와 씨와의 연합을 굳히고 멀리 지쿠고의 고조 씨와도 연계하며 재흥 기회를 엿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마가와 사다오미가 아버지 료슌의 명으로 남조측 공략을 전적으로 도맡게 되면서, 겐추 7년/메이토쿠 원년(1390년) 9월 히젠 후카보리 씨 등의 원군을 이끌고 우토와 가와시리 두 성을 함락시켰다.[21] 친왕은 다케토모와 함께 나와 아키오키를 의지하여 야시로(八代)로 달아나 다카다(高田, 구마모토현 야시로시 奈良木町宮園)로 정서부를 옮겼다.

그러나 겐추 8년/메이토쿠 2년(1391년) 이마가와 사다오미는 이를 뒤쫓아 남쪽으로 내려와 야시로 지역의 여러 성들에 대한 공략을 개시하였다. 나와 아키오키는 이를 막고 전전하였으나 전황 불리를 감당해내지 못하고, 9월에 친왕은 하는 수 없이 이마가와 군과의 화친을 맺고 야시로성도 함락되기에 이르렀다. 이 무렵 기쿠치 다케토모는 행방을 감추었다.

타카다 고쇼터(구마모토현 야시로시)

2. 5. 남북조 합일의 종언

야시로 함락 이후 남은 남조 측 근거지는 후쿠오카현 야메시 야베 촌의 야베뿐이었다. 겐추 9년/메이토쿠 3년(1392년) 10월, 남북조 합일(메이토쿠 화약)이 성립되어 고카메야마 천황고코마쓰 천황에게 삼종신기를 넘겨주고 남조가 멸망했다.[23] 친왕은 이후로도 독자적인 연호(겐추)를 사용하며 부흥을 꾀했다.[23]

겐추 12년/오에이 2년(1395년) 10월, 야베로 쳐들어온 오토모 씨 일족을 격퇴한 고조 요시시게에게 친왕이 직접 감장을 보냈다.[24] 친왕은 야베 오소마 땅에 은거하다가 30대 중반의 나이로 서거한 것으로 추정된다.[15]

3. 묘소

요시나리 친왕의 묘는 야메 시 야베 촌(矢部村)의 北矢部字 오소바(御側)에 있는 어령사적(御霊舎跡)이라는 전승이 있고, 1878년(메이지 11년) 5월에 일본 궁내성에 의해 정식으로 요시나리 친왕의 묘소로 인정되었다. 오소바(御側)는 오소마(大杣)라는 이름의 와전으로 알려져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龍顔峰 ・ 三倉 ・ 王谷尻 ・ 公卿坂 ・ 見参平 등의 소자(小字)가 남아 있다고 한다.

친왕의 기일인 10월 8일에는 해마다 묘소 앞에서 구게우타(公卿唄)나 우라야스노마이(浦安の舞)가 봉납된다.[1]

4. 후정서장군궁에 대한 비정

일반적으로 요시나리 친왕으로 비정되는 후정서장군궁이지만 당대 사료에는 「장군궁」(将軍宮)으로 불리고 있을 뿐 휘를 명기한 확실한 사료는 없다.[17]

후정서장군궁이 누구인가에 대한 비정을 놓고 근세 일본에서는 고무라카미 천황의 제4황자였던 야스나리 친왕(泰成親王)으로 비정하는 것이 주류였는데, 이자와 나가히데(『기쿠치 전기』)를 필두로 야기타 마사나(『신선사적통고』)・후나비키 텟몬・히구치 마사유키(『후정서대장군고』) 및 규슈의 학자들은 이 설을 답습하였다. 이에 대해 요시나리 친왕이 후정서장군궁이라고 주장하는 설을 강하게 피력한 것이 히고(肥後) 구마모토번의 번의(藩医)였던 다나카 모토카쓰였다. 그는 저서 『정서대장군궁보』(征西大将軍宮譜, 『肥後文献叢書6』에 실렸다)에서 야스나리 친왕이 후정서장군궁이라고 하는 설은 그가 다자이노소치를 지냈던 전력에서 추측한 망설일 뿐이며, 『고본제왕계도』(古本帝王系図)에 「진서궁」(鎮西宮)으로써 등장하는 요시나리 친왕이야말로 진정한 후정서장군궁이라 주장하였다. 이 설은 스게 마사토모의 『남산황윤보』(南山皇胤譜)나 후지타 아키라의 『정서장군궁』(征西将軍宮)에서 확정적으로 계승되었으며, 오늘날까지 일본 사학계의 통설로 남아 있다.

메이지 시대의 학자 야시로 구니하루에 따르면 『고본제왕계도』는 겐로쿠 연간의 위작으로 신뢰성이 떨어진다고 하며[26] 나카무라 나오카쓰에 따르면 요시나리를 고무라카미 천황의 황자가 아니라 가네나가 친왕의 적자로 추정하는 견해[27]도 있기는 하지만, 고와 4년(1384년)의 『기쿠치 다케토모 신장』(菊池武朝申状)에 「장군궁어사、정평지칙재、위고대왕어대관」(将軍宮御事、被受正平之勅裁、為故大王御代官)이라는 문구가 있어서, 이를 통하여 장군궁이 고무라카미 천황의 황자라는 것은 확인할 수 있다. 다만 그 휘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료가 남아 있지 않으며 야스나리 이하 다른 고무라카미 천황의 여러 황자들에 대해서도 그들이 규슈로 낙향해 왔다는 자취가 확인되는 자료가 없기 때문에 소거법적으로 기존의 요시나리 친왕설도 통설로써 채용되고 있는 실정이다.[17]

참조

[1] 문서
[2] 문서
[3] 간행물 特別展 八女の名宝 九州歴史資料館 2016
[4] 문서
[5] 문서 菊池古文書
[6] 문서 相良家文書
[7] 문서
[8] 문서 深堀文書
[9] 문서 五條家文書
[10] 서적 南朝遺史 芳文堂 1892
[11] 문서 五條家文書
[12] 서적 西米良村史 西米良村 1973
[13] 서적 長慶天皇御即位の研究 明治書院 1920
[14] 서적 南朝の研究 星野書店 1927
[15] 문서
[16] 문서
[17] 문서
[18] 문서 菊池古文書
[19] 문서 相良家文書
[20] 문서
[21] 문서 深堀文書
[22] 문서 五條家文書
[23] 서적 남조유사 芳文堂 1892
[24] 문서 五條家文書
[25] 서적 西米良村史 西米良村 1973
[26] 서적 長慶天皇御即位の研究 明治書院 1920
[27] 서적 南朝の研究 星野書店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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