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굉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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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원굉도는 1568년(융경 2년)에 태어나 1610년에 사망한 명나라의 문인이다. 그는 향시와 회시에 합격하여 관료 생활을 시작했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사직하고 은둔 생활을 했다. 시, 화도, 저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으며, 특히 동생들과 함께 '공안파'를 형성하여 당시 시단의 주류였던 복고주의에 반대하고 진솔한 감정을 표현하는 '성령설'을 주창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원중랑집』, 『병사』, 『상정』, 『서방합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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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굉도 | |
---|---|
기본 정보 | |
이름 | 원굉도 |
출생 | 1568년 |
사망 | 1610년 |
자 | 중랑(中郎) |
호 | 석공(石公) |
국적 | 명나라 |
직업 | 시인, 문학가, 관리 |
2. 생애
원굉도는 1568년(융경 2년) 형주부 공안현 장안리에서 원사유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592년(만력 20년) 회시에 합격하여 관료 생활을 시작했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사직과 복직을 반복했다. 1610년(만력 38년) 42세로 사망할 때까지 은둔 생활을 하며 『원중랑집』, 『병사』, 『상정』, 『서방합론』 등 다양한 저서를 남겼다. 동생 원중도가 쓴 『중랑선생행상』 등의 전기가 있다.[1]
2. 1. 출생과 성장
1568년(융경 2년), 형주부 공안현 장안리에서 원사유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때 형은 원종도였다. 2년 후 동생 원중도가 태어났다. 1582년(만력 10년) 15세에 향교에 입학하여 학문에 정진함과 동시에 시작 그룹을 결성하여 그 수장이 되었다. 18세 때 동생과 함께 처음으로 향시에 응시하여 낙방했지만, 3년 후 합격했다.2. 2. 관료 생활과 좌절
1568년(융경 2년), 형주부 공안현 장안리에서 원사유의 차남으로 태어났다(이때 형인 원종도는 9세였다). 2년 후 동생 원중도가 태어났다. 1582년(만력 10년) 15세에 향교에 입학하여 학문에 정진함과 동시에 시작 그룹을 결성하여 그 수장이 되었다. 18세 때 동생과 함께 처음으로 향시에 응시하여 낙방했지만, 3년 후 합격했다. 1592년(만력 20년) 25세에 회시에도 합격하여 관료의 길로 나섰다. 잠시 고향으로 돌아간 후 2년 뒤 오현 지현으로 부임하여 업적을 올렸으나, 관직 생활이 적성에 맞지 않아 1596년(만력 24년) 29세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동정호로 향했다. 이듬해 사직이 허가되어 강남을 유람한 후 귀향했다. 이후 심신이 쇠약해져 1610년(만력 38년) 42세로 사망할 때까지 은둔과 재출사를 반복하게 되었다.2. 3. 은둔과 재출사
1568년(융경 2년), 형주부 공안현 장안리에서 원사유의 차남으로 태어났다(이때 형인 원종도는 9세였다). 2년 후 동생 원중도가 태어났다. 1592년(만력 20년) 25세에 회시에 합격하여 관료의 길로 나섰다. 잠시 고향으로 돌아간 후 2년 뒤 오현 지현으로 부임하여 업적을 올렸으나, 관직 생활이 적성에 맞지 않아 1596년(만력 24년) 29세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동정호로 향했다. 이듬해 사직이 허가되어 강남을 유람한 후 귀향했다. 이후 심신이 쇠약해져 1610년(만력 38년) 42세로 사망할 때까지 은둔과 재출사를 반복하게 되었다.이 기간 동안 꾸준히 시를 지어 작품들을 모아 『원중랑집』으로 묶었다. 또한 중랑은 화도에도 뛰어났으며, 꽃꽂이에 관한 책 『병사』를 저술한 것을 시작으로, 즐거운 술 마시는 법을 안내하는 『상정』, 정토 신앙과 선종에 대해 언급한 『서방합론』 등 다양한 저서를 남겼다. 전기(傳記)로는 동생 원중도가 쓴 『중랑선생행상』 등이 있다.
3. 사상과 문학
원굉도는 짧은 문학적 수필 형식인 소품문의 저술가로도 유명했다.[2] 그의 시에는 다음과 같은 작품들이 있다.
'''수도(首都)'''
: 수도의 성벽은 밝게 빛나고,
: 붉은 옷의 관리들이 넓은 거리에서 외친다.
: 머리가 하얀 가난한 학자가 있는데,
: 그의 노새 안장에 시집이 매달려 있다.
: 명함을 쥐고 일자리를 찾아 문을 두드리니,
: 문지기들은 서로 낄낄거린다.
: 열 번 시도하고 열 번 실패하니,
: 거리를 걸으며 그의 얼굴은 초췌해졌다.
: 부자를 섬기는 데에는 항상 두려움이 따르니,
: 당신의 아첨이 충분히 빠르지 않아 유감이다.
: 눈에는 검은 안대가 걸려 있고,
: 반쯤 눈먼 늙은이로다!
'''어떤 이상한 승려(僧侶)'''
: 징집과 세금을 피하려 그의 법의(法衣)를 샀고,
: 이제 그는 화려함 속에서 수석 승려가 되었다.
: 주문을 외우지만 새소리 같고,
: 뒤틀린 잡초처럼 보이는 산스크리트어를 쓴다.
: 그의 탁발승의 그릇으로 정신의 음식을 나누어 주고,
: 그의 자리에 앉아 부처의 램프를 마주한다.
: 만약 당신이 온몸과 영혼을 바치지 않는다면,
: 어떻게 불교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3. 1. 이탁오와의 만남
만력 19년(1591년) 24세 때, 원굉도는 형제와 함께 양명학 좌파로 독자적인 설을 펼치던 유학자 이지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이전부터 형의 영향으로 "성명의 학(인생 철학)"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이탁오의 가르침에 크게 감명을 받아 스승으로 숭배하며 3개월 동안 머물면서 가르침을 받았다. 이듬해와 그 다음 해에도 여러 번 스승을 찾아 가르침을 받았으며, 동생 원중도 역시 자주 스승을 찾아갔다. 이 때문에 삼원의 시풍에는 이탁오의 영향이 크게 느껴진다.[1]3. 2. 성령설과 공안파
스승인 이탁오의 "동심설"과 스승으로부터 물려받은 반골 정신은 삼원의 시풍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당시 시단에서는 성당의 시를 숭상하는 흐름이 유행했고, 왕세정, 이반룡 등 고문사파에 의한 복고주의·의고주의가 대두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교의 전통적인 경서인 사서오경보다 통속 소설인 『수호전』 등을 중시했던 스승 이탁오의 영향을 받은 삼원 형제는 의고주의적인 시에 반항하여 시문은 본래 진정(영성)을 솔직하게 발현해야 하는 것이며, 함부로 성당의 시만을 숭상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고시는 그 뜻을 배우고 반드시 자구에 구애받지 않는다"라고 하여, 자신이 느끼는 대로 시를 지었다. 그 때문에 삼원의 시는 비교적 기교를 배제한 읽기 쉬운 작품이 많다고 한다. 시뿐만 아니라 산문에도 미친 이러한 삼원의 자세는 "성령설"이라고 칭해졌으며, 형제의 출신지에서 "공안파"라고 불리게 되었다.공안파는 당시로서는 너무 혁신적이어서 추종자가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한편 다소 늦게 경릉 출신의 종성, 담원춘 등은 성령설을 존중하면서도 의고주의를 전면 부정하지 않고 어느 정도 받아들인 작풍으로 시를 지어 "경릉파"라고 불렸다. 성령설은 그 후 청대의 원매로 이어지게 된다.
3. 3. 시풍
스승인 이탁오의 "동심설"과 스승으로부터 물려받은 반골 정신은 삼원의 시풍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당시 시단에서는 성당의 시를 숭상하는 흐름이 유행했고, 왕세정, 이반룡 등 고문사파에 의한 복고주의·의고주의가 대두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교의 전통적인 경서인 사서오경보다 통속 소설인 『수호전』 등을 중시했던 스승 이탁오의 영향을 받은 삼원 형제는 의고주의적인 시에 반항하여 시문은 본래 진정(영성)을 솔직하게 발현해야 하는 것이며, 함부로 성당의 시만을 숭상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고시는 그 뜻을 배우고 반드시 자구에 구애받지 않는다"라고 하여, 자신이 느끼는 대로 시를 지었다. 그 때문에 삼원의 시는 비교적 기교를 배제한 읽기 쉬운 작품이 많다고 한다. 시뿐만 아니라 산문에도 미친 이러한 삼원의 자세는 "성령설"이라고 칭해졌으며, 형제의 출신지에서 "공안파"라고 불리게 되었다.[1]공안파는 당시로서는 너무 혁신적이어서 추종자가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한편 다소 늦게 경릉 출신의 종성, 담원춘 등은 성령설을 존중하면서도 의고주의를 전면 부정하지 않고 어느 정도 받아들인 작풍으로 시를 지어 "경릉파"라고 불렸다. 성령설은 그 후 청대의 원매로 이어지게 된다.[1]
3. 4. 산문
그는 또한 짧은 문학적 수필 형식인 소품문의 저술가로도 유명했다.[2]4. 저서
원굉도는 시, 화도, 꽃꽂이, 정토 신앙, 선종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저술 활동을 했다. 대표적인 저서는 다음과 같다.
- 『원중랑집』: 시 작품들을 모아 묶은 책이다.
- 『병사』: 꽃꽂이에 관한 책이다.
- 『상정』: 즐거운 술 마시는 법을 안내하는 책이다.
- 『서방합론』: 정토 신앙과 선종에 대해 언급한 책이다.
원중도의 동생 원중도가 쓴 『중랑선생행상』 등의 전기가 전해진다.
원굉도와 관련된 서적은 다음과 같다.
- 조나단 차베스(Jonathan Chaves) 번역, ''구름의 순례자(Clouds' Pilgrim)'', 뉴욕-도쿄, 1978; 신판 버팔로 뉴욕: 화이트 파인 프레스, 2005.
- 브루스 E. 카펜터(Bruce E. Carpenter), "돌의 신사: 원굉도(Stone Gentleman : Yüan Hung-tao)", ''데즈카야마 대학교 리뷰''(데즈카야마 다이가쿠 론슈), 나라, 일본, 24호, 1979.
- 빅터 H. 메이어(Victor H. Mair) (편집), ''중국 문학의 콜롬비아 역사(The Columbia History of Chinese Literature)'', 뉴욕: 콜롬비아 대학교 출판사, 2001. (아마존 킨들 판)
5. 평가
원굉도는 "돌의 신사"로 불리기도 하였으며, 이에 대한 평가는 데즈카야마 대학교 리뷰에서 찾아볼 수 있다.[1] 또한, ''중국 문학의 콜롬비아 역사''에도 관련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2]
Chaves, Jonathan|차베스, 조나단영어이 번역한 ''구름의 순례자''는 1978년 뉴욕과 도쿄에서 출판되었으며, 2005년에는 화이트 파인 프레스에서 신판이 나왔다.
6. 관련 기록
참조
[1]
서적
Chinese Pure Land Buddhism, Understanding a Tradition of Practice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19
[2]
간행물
"Introduction: The Origins and Impact of Literati Culture"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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