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휴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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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윌리엄 휴얼(William Whewell, 1794-1866)은 영국의 과학자, 철학자, 신학자, 과학사학자, 대학 행정가, 건축사학자이다. 랭커스터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수학하며, 광물학 및 윤리철학 교수를 역임했다. 그는 조석 연구를 통해 등조선을 지도화하고, 과학 용어 "과학자"를 만들었으며, 과학의 역사와 철학에 대한 저술을 남겼다. 또한, 건축에도 관심을 가져 고딕 건축에 대한 저술을 남겼고, 트리니티 칼리지에 고딕 양식의 건물을 건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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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휴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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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약칭 (식물학) | |
저자 약칭 (동물학) |
2. 생애
윌리엄 휴얼은 잉글랜드 랭커셔 출신으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장학금을 받고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공부했다. 광물학 교수(1828년-1832년)와 윤리철학 교수(1838년-1855년)를 역임했다. 1820년 왕립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1837년 로열 메달, 1848년 베이커리안 메달을 수상했다.[15]
2. 1. 초기 생애와 교육
윌리엄 휴얼은 랭커셔 랭커스터에서 존 휴얼과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 베니슨 사이에서 태어났다.[6] 그의 아버지는 목수였으며, 아들에게 자신의 직업을 잇기를 바랐다. 그러나 윌리엄은 랭커스터 왕립 문법학교와 헤버샴 문법학교에서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1812년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전시장(장학금의 일종)을 받았다. 그는 일곱 자녀 중 맏이였으며, 세 명의 남동생과 세 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남동생 두 명은 유아기에 사망했고, 다른 한 명은 1812년에 사망했다. 두 여동생은 결혼했으며, 윌리엄은 학생 시절과 교수 시절에 그들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의 어머니는 윌리엄이 13세였던 1807년에 사망했다. 아버지는 윌리엄이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학사 학위를 받은 1816년에 사망했는데, 이는 윌리엄이 중요한 직업적 업적을 달성하기 전이었다.[15]2. 2. 결혼
휴얼은 1841년에 존 마셜의 딸인 코르델리아 마셜과 처음 결혼했다. 결혼한 지 며칠 만에 크리스토퍼 워즈워스의 뒤를 이어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의 학장으로 추천되었다. 코르델리아는 1855년에 사망했다. 1858년 그는 두 번째로 길버트 애플렉 경(Sir Gilbert Affleck, 5th Baronet, 1854년 사망)의 미망인인 에버리나 프랜시스와 결혼했다.[7] 그는 자녀가 없었다.2. 3. 케임브리지 대학교 교수 및 학장
1814년 시 부문에서 총장 금메달을 수상했다.[8] 1816년에는 2등 수석을 차지했고, 1817년에는 케임브리지 유니온 학회 회장이 되었으며, 자신의 대학의 펠로우이자 강사가 되었다.1828년부터 1832년까지 광물학 교수를 역임했고, 1838년부터 1855년까지 나이트브리지 철학 교수(당시 "도덕 신학 및 교리 신학"이라고 불림)를 역임했다.[9][10] 철학 교수 재직 중인 1841년, 휴얼은 크리스토퍼 워즈워스의 뒤를 이어 학장이 되었다.
휴얼은 케임브리지 대학생들이 공부하는 수학 트라이포스의 교육 과정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순수 수학과는 대조적으로 '혼합 수학', 즉 응용 수학, 기술 기하학 및 수리 물리학을 지지했다. 휴얼 시대에 타원 적분과 같은 해석적 주제는 전기, 열 및 자기의 물리적 연구로 대체되었다. 그는 유클리드와 뉴턴을 기반으로 한 수학에 대한 직관적인 기하학적 이해가 가장 적절하다고 믿었다.[11]
2. 4. 사망
윌리엄 휴얼은 1866년 케임브리지에서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사망했다.[12] 그는 캠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 예배당에 묻혔고, 그의 두 부인은 캠브리지 밀로드 묘지에 함께 묻혔다. 그의 두 번째 부인인 에벌린 애플렉을 기리는 창문이 올 세인츠 교회 제대에 설치되었는데, 이는 모리스 앤 코가 제작했다.그의 사후에 아이작 토드헌터가 두 권으로 구성된 그의 저서 목록을 작성했는데, 첫 번째 권은 휴얼이 서신을 교환했던 사람들의 이름 색인이었다.[13][14] 5년 후, 그의 이복 조카인 재닛 메리 더글러스(책 제목에는 스테어 더글러스 부인으로 표기됨)가 휴얼의 삶과 그의 아버지, 자매 및 기타 사람들과 주고받았던 편지들을 엮어 그의 전기를 출판했다.[15]
3. 과학 연구 및 업적
윌리엄 휴얼은 1826년과 1828년에 조지 에어리와 함께 콘월의 돌코스 광산에서 지구의 밀도를 측정하기 위한 실험을 수행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1828년에 ''광물 분류에 관한 에세이(Essay on Mineralogical Classification)''를 출판했으며, 조석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를 수행했다.[16][10]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수학 트라이포스 교육 과정에 영향을 미쳐, 순수 수학이 아닌 응용 수학, 기술 기하학, 수리 물리학을 포함하는 '혼합 수학'을 지지했다. 휴얼 시대에는 타원 적분과 같은 해석적 주제 대신 전기, 열, 자기에 대한 물리적 연구가 이루어졌으며, 그는 유클리드와 뉴턴을 기반으로 한 수학에 대한 직관적인 기하학적 이해가 가장 적절하다고 믿었다.[11]
주요 저서로는 과학 발전을 체계화하려는 두 권의 책인 ''귀납 과학의 역사(History of the Inductive Sciences)''(1837)와 ''그 역사에 기초한 귀납 과학의 철학(The Philosophy of the Inductive Sciences, Founded Upon Their History)''(1840, 1847, 1858–60)이 있다.
3. 1. 광물학
윌리엄 휴얼은 과학에 많은 기여를 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어휘력이 뛰어났다. 그는 당대 여러 과학자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새로운 발견에 맞는 새 용어를 만드는 데 도움을 주었다. 실제로 휴얼은 1833년에 "과학자(scientist)"라는 단어를 직접 만들었다. 이 용어는 1834년 《쿼터리 리뷰(Quarterly Review)》에 익명으로 게재된 메리 소머빌(Mary Somerville)의 《자연과학의 상관관계(On the Connexion of the Physical Sciences)》 서평에서 처음 등장했다.[28] 이전에는 "자연철학자" 또는 "과학의 사람들"이라고 불렀다.3. 2. 조석학
휴얼이 조석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을 때, 뉴턴, 베르누이, 라플라스의 연구를 기반으로 조석을 일으키는 힘을 설명하는 이론은 있었지만, 대륙으로 경계 지어진 바다에서 조석이 실제로 어떻게 전파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했다. 런던과 리버풀과 같은 일부 항구에 대한 조석 관측 자료를 통해 조석표를 만들 수 있었지만, 이러한 표를 만드는 데 사용된 방법과 관측 자체는 철저하게 보호되는 영업 비밀이었다.[17][18]휴얼의 전 학생인 존 러벅은 여러 항구에 대한 최대 25년까지의 기존의 역사적 데이터를 분석하여 이론적 근거를 바탕으로 표를 생성하고, 그 방법론을 발표했다.[17][18] 이 연구는 프랜시스 보퍼트(해군 수로부장)의 지원을 받았으며, 1833년부터 ''해군성 조석표(Admiralty Tide Tables)''의 출판에 기여했다.[19]
휴얼은 러벅의 연구를 기반으로 전 세계의 조석 패턴에 대한 이해를 발전시켜 각 항구에서 장기간의 조석 관측 없이도 많은 지역에 대한 예측을 생성하는 데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를 위해 광범위한 새로운 관측이 필요했는데, 처음에는 비공식적인 네트워크를 통해 얻었고, 나중에는 보퍼트가 해군성에서 가능하게 한 공식 프로젝트를 통해 얻었다. 1834년 6월 영국 전역의 모든 해안 경비대 기지에서 2주 동안 15분마다 조석을 기록했고,[20] 1835년 6월에는 미국,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벨기에, 덴마크, 노르웨이, 네덜란드뿐만 아니라 해군성 측량사, 다른 영국 해군 및 영국 관측자들이 참여하는 국제적인 협력이 이루어졌다. 채널 제도와 같은 섬은 바다를 통한 조석의 진행 상황에 대한 중요한 세부 정보를 추가했다. 해군성은 데이터 분석에 필요한 자원을 제공했고, 해군성 직원의 전문 계산가인 J.F. 데시우가 계산을 담당했다.

휴얼은 그래픽 방법을 광범위하게 사용했으며, 이러한 방법은 결과를 표시하는 방법일 뿐만 아니라 데이터 분석 도구가 되었다. 그는 등조선(러벅이 만든 용어)을 보여주는 여러 지도를 발표했는데, 등조선은 만조가 동시에 발생하는 지점을 연결하는 선이다. 이를 통해 바다를 통한 조석의 진행 상황을 그래픽으로 나타낼 수 있었다. 이를 통해 휴얼은 북해 남부에 조석의 상승이나 하강이 없는 곳이 있어야 한다고 예측했다.[21] 이러한 "무조석 지대"는 현재 팽대점이라고 한다. 1840년, 해군 측량사 윌리엄 휴엣은 휴얼의 예측을 확인했다. 여기에는 그의 배인 HMS ''페어리''를 정박하고 동일한 위치에서 반복적으로 수심을 측정하는 것이 포함되었으며, 해저의 불규칙성과 조류의 영향을 고려하기 위한 예방 조치가 필요했다. 데이터는 약 0.30m 이하의 상승을 보여주었다.[22][23]
휴얼은 20년 동안 조석 연구에 관한 논문 약 20편을 발표했다. 이것은 그의 주요 과학적 업적으로, 그의 주요 저술 중 하나인 ''귀납 과학의 철학(Philosophy of the Inductive Sciences)''의 주제인 과학적 탐구 과정에 대한 그의 이해에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3. 3. 과학 방법론: 귀납법
휴얼은 20년 동안 조석 연구에 관한 논문 약 20편을 발표했는데, 이는 그의 주요 저술 중 하나인 ''귀납 과학의 철학(Philosophy of the Inductive Sciences)''의 주제인 과학적 탐구 과정에 대한 그의 이해에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16][10]그의 가장 잘 알려진 저술은 과학 발전을 체계화하려는 두 권의 방대한 책인 ''귀납 과학의 역사(History of the Inductive Sciences)''(1837)와 ''그 역사에 기초한 귀납 과학의 철학(The Philosophy of the Inductive Sciences, Founded Upon Their History)''(1840, 1847, 1858–60)이다. ''역사''는 고대 이후 각 과학 분야가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추적했고, ''철학''은 이전 저술의 "교훈"으로 간주되어 역사를 통해 보편적인 지식론을 추출하려고 했다.
''귀납 과학의 철학''에서 그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발견 계획을 따르려고 했다. 그는 아이디어("개념 설명")를 조사하고 "사실의 결합"을 통해 이러한 아이디어를 사실과 결합하여 과학을 구성하려고 했다.[10] 이 결합은 "사고의 행위"이며, "결합"을 통해 여러 경험적 사실을 함께 가져와 사실을 통합하고 일반 법칙으로 표현할 수 있게 하는 정신 작용이다.[24] 휴얼은 케플러와 타원 궤도의 발견을 예로 언급한다. 궤도의 점들은 새로운 사실의 발견이 아니라 타원형이라는 ''개념''에 의해 ''결합''되었다. 이러한 개념은 칸트처럼 "타고난" 것이 아니지만, "과학적 사고(역사)의 발전의 산물로 명확성과 명료성으로 전개"된다.[25]
윌리엄 휴얼은 귀납 추론을 다음과 같은 세 단계로 분석했다.
# (기본적인) 개념(예: 공간, 수, 원인 또는 유사성)의 선택
# 그러한 개념의 형성(예: 원, 균일한 힘 등)
# 크기의 결정[10]
이러한 단계에 수량에 적용 가능한 특수한 귀납적 방법들(곡선의 방법, 평균의 방법, 최소 제곱의 방법, 잔차의 방법)과 유사성에 의존하는 특수한 방법들(연속성의 법칙을 통해 전이됨, 예: 등급의 방법과 자연 분류의 방법)이 따른다.[10] ''귀납 과학의 철학''에서 휴얼은 지식의 통합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통합(consilience)"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여기서, 그의 윤리적 교리에서처럼, 휘웰은 당대 영국 경험주의에 대한 반대에서 비롯되었다. 이마누엘 칸트를 따르면서, 그는 존 스튜어트 밀에 반대하여 필연적 진리의 선험적 성격을 주장했고, 개념 구성에 대한 그의 규칙을 통해 밀의 귀납적 방법을 배제했다.[10] 그러나, 로라 제이 스나이더에 따르면, "놀랍게도, 20세기 휘웰의 방법론에 대한 통상적인 견해는 그를 포퍼주의적 틀에서 반귀납주의자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즉 휘웰이 과학적 발견에 대한 '추측과 반증' 견해를 지지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휘웰은 비합리적인 추측으로 발견된 가설이 결과주의적 검증을 통해 확인될 수 있다는 가설-연역적 주장을 명시적으로 거부했다. 휘웰은 새로운 가설이 '사실로부터 수집된다'(귀납적 과학의 철학, 1849, 17)고 설명했다."[26] 요약하자면, 과학적 발견은 부분적으로 경험적이고 부분적으로 합리적인 과정이다. "개념의 발견은 추측도 관찰의 문제도 아니다", 우리는 보는 것 이상을 추론한다.[27]
3. 4. 과학 용어 정립
휴얼은 케임브리지 대학교 학생들이 공부하는 수학 트라이포스의 교육 과정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순수 수학과는 대조적으로 응용 수학, 기술 기하학, 수리 물리학을 포함하는 '혼합 수학'을 지지했다. 휴얼 시대에는 타원 적분과 같은 해석적 주제 대신 전기, 열, 자기에 대한 물리적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는 유클리드와 뉴턴을 기반으로 한 수학에 대한 직관적인 기하학적 이해가 가장 적절하다고 믿었다.[11]4. 철학 및 윤리학
윌리엄 휴얼은 귀납 추론을 다음과 같은 세 단계로 분석했다.[10]
이러한 단계에는 수량에 적용 가능한 특수한 귀납적 방법들이 따른다. 여기에는 곡선의 방법, 평균의 방법, 최소 제곱의 방법, 잔차의 방법, 그리고 유사성에 의존하는 특수한 방법들(연속성의 법칙을 통해 전이됨) 예를 들어 등급의 방법과 자연 분류의 방법이 있다.[10] 휴얼은 '귀납 과학의 철학(Philosophy of the Inductive Sciences)'에서 지식의 통합을 설명하기 위해 "통합(consilience)"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로라 제이 스나이더에 따르면, 20세기 휴얼의 방법론에 대한 통상적인 견해는 그를 포퍼주의적 틀에서 반귀납주의자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는 휴얼이 과학적 발견에 대한 '추측과 반증' 견해를 지지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휴얼은 비합리적인 추측으로 발견된 가설이 결과주의적 검증을 통해 확인될 수 있다는 가설-연역적 주장을 명시적으로 거부했다. 휴얼은 새로운 가설이 '사실로부터 수집된다'(귀납적 과학의 철학, 1849, 17)고 설명했다.[26] 요약하자면, 과학적 발견은 부분적으로 경험적이고 부분적으로 합리적인 과정이다. "개념의 발견은 추측도 관찰의 문제도 아니다"라고 하며, 우리는 보는 것 이상을 추론한다고 하였다.[27]
휴얼은 윤리적 교리에서도 당대 영국 경험주의에 반대했다. 이마누엘 칸트를 따라 존 스튜어트 밀에 반대하여 필연적 진리의 선험적 성격을 주장했고, 개념 구성에 대한 그의 규칙을 통해 밀의 귀납적 방법을 배제했다.[10]

1835년부터 1861년 사이에 휴얼은 도덕 철학 및 정치 철학에 관한 다양한 저술을 발표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저서는 1845년에 출판된 『도덕의 원리(Elements of Morality)』와 『정치(Polity)』이다. 이 저서는 직관주의적 관점에서 쓰였으며, 행동의 원천과 그 대상을 5가지로 구분하고, 인간의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권리(신체의 안전, 재산, 계약, 가족, 정부)와 네 가지 덕목(자애, 정의, 진실, 순결, 질서)을 제시했다.[10]
휴얼의 다른 저서들은 다음과 같다.
- 세 번째 브리지워터 논문(Bridgewater Treatise)인 『천문학과 일반 물리학: 자연 신학과 관련하여(Astronomy and General Physics considered with reference to Natural Theology)』(1833)
- 2권으로 된 논문 『귀납 과학의 철학: 그 역사에 기초하여(The Philosophy of the Inductive Sciences: Founded Upon Their History)』(1840)[31][32]
- 다른 행성에 생명체가 존재할 가능성에 대해 반박한 에세이 『세계의 다양성에 관하여(Of the Plurality of Worlds)』(1853)
- 『영국 독자를 위한 플라톤 대화(Platonic Dialogues for English Readers)』(1850–1861)
- 『영국 도덕 철학사 강의(Lectures on the History of Moral Philosophy in England)』(1852)
- 에세이 『일반적인 자유 교육에 관하여, 특히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주요 연구에 대한 언급과 함께(Of a Liberal Education in General, with particular reference to the Leading Studies of the University of Cambridge)』(1845)
- 중요한 판본이자 축약 번역본인 위고 그로티우스(Hugo Grotius)의 『전쟁과 평화에 관하여(De jure belli ac pacis)』(1853)[33]
- 아이작 배로(Isaac Barrow)의 『수학 저술(Mathematical Works)』(1860)의 판본[34][10]
휴얼은 찰스 다윈이 케임브리지 대학교 재학 중 만났던 교수들 중 한 명이었으며, 다윈이 비글호 항해에서 돌아왔을 때 휴얼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다. 휴얼은 다윈을 런던 지질학회(Geological Society of London)의 서기로 임명하도록 설득했다.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의 표제에는 창조주가 법칙을 세운 자연 신학에 기초한 과학에 대한 휴얼의 『브리지워터 논문』의 인용문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35]
But with regard to the material world, we can at least go so far as this-we can perceive that events are brought about not by insulated interpositions of Divine power, exerted in each particular case, but by the establishment of general laws.영어
> 그러나 물질 세계와 관련하여 우리는 적어도 이 정도까지는 말할 수 있다. 즉, 사건들이 각각의 특정한 경우에 발휘되는 신의 힘의 고립된 개입에 의해 초래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법칙의 확립에 의해 초래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윈은 진화론에 대한 자신의 가설을 세우고 검증하는 과정에서 휴얼의 개념들을 사용했지만, 휴얼 자신은 다윈의 이론 자체를 지지하지 않았다.
휴얼은 진화론의 개념에 대해 반대했다. 그는 먼저 1845년에 이전 저서의 발췌문으로 구성된 새로운 책 『창조주의 징후(Indications of the Creator)』를 출판하여 인기 있는 익명의 진화론 저서 『창조의 자연사의 흔적(Vestiges of the Natural History of Creation)』에 대응했다. 나중에 휴얼은 다윈의 진화론에 반대했다.[36]
5. 건축학
휴얼은 평생 건축 역사에 관심을 가졌으며, 특히 고딕 건축에 관한 저술로 잘 알려져 있다. 1830년 처음 출판된 그의 저서 ''Architectural Notes on German Churches''(독일 교회 건축 노트)에서 휴얼은 독일 고딕 교회에 대한 엄격한 명명법을 확립하고 양식적 발전에 대한 이론을 제시했다.[10] 그는 토마스 릭먼(Thomas Rickman), 로버트 윌리스(Robert Willis)와 함께 건축 저술가들의 "과학적 경향"과 관련되어 있다.
휴얼은 자신의 자원을 사용하여 트리니티 칼리지(케임브리지 대학교)에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두 개의 새로운 건물을 건설하였다. 두 건물은 1860년과 (사후) 1868년에 완공되었으며, 현재는 휴얼 코트(Whewell's Court)(단수형)로 통칭된다.
6. 대학 행정
1841년, 휴얼은 크리스토퍼 워즈워스의 뒤를 이어 트리니티 칼리지 학장이 되었다.[9]
휴얼은 케임브리지 대학교 학생들이 공부하는 수학 트라이포스의 교육 과정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순수 수학과는 대조적으로 '혼합 수학', 즉 응용 수학, 기술 기하학, 수리 물리학을 지지했다. 휴얼 시대에 타원 적분과 같은 해석적 주제는 전기, 열, 자기의 물리적 연구로 대체되었다. 그는 유클리드와 뉴턴을 기반으로 한 수학에 대한 직관적인 기하학적 이해가 가장 적절하다고 믿었다.[11]
7. 저술
윌리엄 휴얼은 1835년부터 1861년 사이에 도덕 철학 및 정치 철학에 관한 다양한 저술을 발표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저서는 1845년에 출판된 『도덕의 원리(Elements of Morality)』와 『정치(Polity)』이다.[10] 이 저서는 직관주의적 관점에서 쓰였으며, 행동의 원천과 그 대상을 5가지로 구분하고, 인간의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권리(신체의 안전, 재산, 계약, 가족, 정부)와 네 가지 덕목(자애, 정의, 진실, 순결, 질서)을 제시했다.[10]
휴얼은 귀납 추론을 다음과 같은 세 단계로 분석했다.
이러한 단계에 수량에 적용 가능한 특수한 귀납적 방법들이 따르는데, 여기에는 곡선의 방법, 평균의 방법, 최소 제곱의 방법, 잔차의 방법, 그리고 유사성에 의존하는 특수한 방법들(연속성의 법칙을 통해 전이됨) 예를 들어 등급의 방법과 자연 분류의 방법이 있다.[10] 휴얼은 '귀납 과학의 철학'(Philosophy of the Inductive Sciences)에서 지식의 통합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통합(consilience)"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휴얼은 또한 진화론의 개념에 대해 반대했다.[36] 그는 1845년에 이전 저서의 발췌문으로 구성된 새로운 책 『창조주의 징후(Indications of the Creator)』를 출판하여 인기 있는 익명의 진화론 저서 『창조의 자연사의 흔적(Vestiges of the Natural History of Creation)』에 대응했고, 나중에 다윈의 진화론에 반대했다."[36]
휴얼의 저작 목록은 다음과 같다.
출판 연도 | 제목 | 비고 |
---|---|---|
1830 | 독일 교회 건축에 관한 기록: 고딕 건축의 기원에 대한 논평 | [https://archive.org/details/whewell-1830-architectural-notes-on-german-churches 1830년 초판] [https://archive.org/details/architecturalnot00whewrich 1835년 신판]. [https://archive.org/details/architecturalnot00whew_0 1842년 제3판]. |
1831 | J. 허셜의 자연철학 연구에 대한 예비 논문 서평 | Quarterly Review영어 45(90):374–407. [https://babel.hathitrust.org/cgi/pt?id=uiug.30112067688009;view=1up;seq=330] |
1833 | [https://archive.org/details/bridgewatertreat03whewuoft 자연 신학과 관련하여 고려된 천문학 및 일반 물리학] | 브리지워터 논문 |
1836 | [https://archive.org/stream/elementarytreati00whew#page/n5/mode/2up 역학 개론] | 초판 1819년, 제5판. |
1837 | [https://catalog.hathitrust.org/Record/009728861 귀납 과학의 역사: 초기부터 현재까지] | 3권, 런던. [https://archive.org/details/historyinductiv24whewgoog 1권], [https://archive.org/details/historyinductiv31whewgoog/page/ 2권], [https://archive.org/details/historyinductiv22whewgoog 3권]. 제2판 1847년 (2권). 제3판 1857년 (2권). 제1 독일어판 1840–41년. |
1837 | [https://catalog.hathitrust.org/Record/001733760 영국 대학교육의 원칙에 관하여] | 런던.[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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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기타 저서들은 다음과 같다.
- 『영국 독자를 위한 플라톤 대화(Platonic Dialogues for English Readers)』(1850–1861)
- 『일반적인 자유 교육에 관하여, 특히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주요 연구에 대한 언급과 함께(Of a Liberal Education in General, with particular reference to the Leading Studies of the University of Cambridge)』(1845)
- 아이작 배로(Isaac Barrow)의 『수학 저술(Mathematical Works)』(1860)의 판본[34]
8. 평가 및 유산
윌리엄 휴얼은 다양한 분야에서 광범위한 업적을 남겼으며, 그의 이름은 여러 곳에서 기념되고 있다. 1847년 미국 예술 과학 아카데미의 명예 외국인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38] 랭커스터 왕립 문법학교의 토론회는 그의 업적을 기려 휴얼 학회(Whewell Society)로 명명되었다.
또한 달에는 그의 이름을 딴 휴얼 크레이터(Whewell)가 존재하며,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에는 휴얼 코트(Whewell's Court)로 알려진 고딕 양식의 건축물들이 있다. 케임브리지 세지윅 지구과학 박물관에는 휴얼 광물 갤러리(Whewell Mineral Gallery)가 있고,[39] 광물 중에는 휘웰라이트(whewellite)도 있다.
8. 1. 과학사 및 과학철학에 대한 영향
휴얼은 20년 동안 조석 연구에 관한 논문 약 20편을 발표했다. 이는 그의 주요 과학적 업적이며, 그의 주요 저술 중 하나인 ''귀납 과학의 철학(Philosophy of the Inductive Sciences)''의 주제인 과학적 탐구 과정에 대한 그의 이해에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16]그의 가장 잘 알려진 저술은 과학 발전을 체계화하려는 두 권의 방대한 책인 ''귀납 과학의 역사(History of the Inductive Sciences)''(1837)와 ''그 역사에 기초한 귀납 과학의 철학(The Philosophy of the Inductive Sciences, Founded Upon Their History)''(1840, 1847, 1858–60)이다. ''역사''는 고대 이후 각 과학 분야가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추적한 반면, 휴얼은 ''철학''을 이전 저술의 "교훈"으로 간주하여 역사를 통해 보편적인 지식론을 추출하려고 했다.
''귀납 과학의 철학''에서 그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발견 계획을 따르려고 했다. 그는 아이디어("개념 설명")를 조사하고 "사실의 결합"을 통해 이러한 아이디어를 사실과 결합하여 과학을 구성하려고 했다.[10] 이 결합은 "사고의 행위"이며, "결합"을 통해 여러 경험적 사실을 함께 가져와 사실을 통합하고 일반 법칙으로 표현할 수 있게 하는 정신 작용이다.[24] 휴얼은 케플러와 타원 궤도의 발견을 예로 언급한다. 궤도의 점들은 새로운 사실의 발견이 아니라 타원형이라는 ''개념''에 의해 ''결합''되었다. 이러한 개념은 칸트처럼 "타고난" 것이 아니지만, "과학적 사고(역사)의 발전의 산물로 명확성과 명료성으로 전개"된다.[25]
이러한 관점에서 휴얼은 당대 영국 경험주의에 반대했다. 이마누엘 칸트를 따르면서, 그는 존 스튜어트 밀에 반대하여 필연적 진리의 선험적 성격을 주장했고, 개념 구성에 대한 그의 규칙을 통해 밀의 귀납적 방법을 배제했다.[10] 그러나 로라 제이 스나이더에 따르면, "놀랍게도 20세기 휴얼의 방법론에 대한 통상적인 견해는 그를 포퍼주의적 틀에서 반귀납주의자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즉 휴얼이 과학적 발견에 대한 '추측과 반증' 견해를 지지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휴얼은 비합리적인 추측으로 발견된 가설이 결과주의적 검증을 통해 확인될 수 있다는 가설-연역적 주장을 명시적으로 거부했다. 휴얼은 새로운 가설이 '사실로부터 수집된다'(귀납적 과학의 철학, 1849, 17)고 설명했다."[26] 요약하자면, 과학적 발견은 부분적으로 경험적이고 부분적으로 합리적인 과정이다. "개념의 발견은 추측도 관찰의 문제도 아니다." 우리는 보는 것 이상을 추론한다.[27]
8. 2. 현대적 의의와 비판
이마누엘 칸트를 따르면서, 윌리엄 휴얼은 존 스튜어트 밀에 반대하여 필연적 진리의 선험적 성격을 주장했고, 개념 구성에 대한 그의 규칙을 통해 밀의 귀납적 방법을 배제했다.[10] 그러나, 로라 제이 스나이더에 따르면, "놀랍게도, 20세기 휴얼의 방법론에 대한 통상적인 견해는 그를 포퍼주의적 틀에서 반귀납주의자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즉 휴얼이 과학적 발견에 대한 '추측과 반증' 견해를 지지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휴얼은 비합리적인 추측으로 발견된 가설이 결과주의적 검증을 통해 확인될 수 있다는 가설-연역적 주장을 명시적으로 거부했다. 휴얼은 새로운 가설이 '사실로부터 수집된다'(귀납적 과학의 철학, 1849, 17)고 설명했다."[26] 요약하자면, 과학적 발견은 부분적으로 경험적이고 부분적으로 합리적인 과정이다. "개념의 발견은 추측도 관찰의 문제도 아니다", 우리는 보는 것 이상을 추론한다.[27]1835년부터 1861년 사이에 휴얼은 도덕 철학 및 정치 철학에 관한 다양한 저술을 발표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저서인 『도덕의 원리(Elements of Morality)』와 『정치(Polity)』는 1845년에 출판되었다. 직관주의적 관점에서 쓰여진 이 저서의 특징은 행동의 원천과 그 대상을 5가지로 구분하고, 인간의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권리(신체의 안전, 재산, 계약, 가족, 정부)와 네 가지 덕목(자애, 정의, 진실, 순결, 질서)을 제시한 것이다.[10]
휴얼은 찰스 다윈이 케임브리지 대학교 재학 중 만났던 교수들 중 한 명이었으며, 다윈이 비글호 항해에서 돌아왔을 때 휴얼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다. 휴얼은 다윈을 런던 지질학회(Geological Society of London)의 서기로 임명하도록 설득했다. 『종의 기원』의 표제에는 창조주가 법칙을 세운 자연 신학에 기초한 과학에 대한 휴얼의 『브리지워터 논문』의 인용문이 실려 있다.[35]
> 그러나 물질 세계와 관련하여 우리는 적어도 이 정도까지는 말할 수 있다. 즉, 사건들이 각각의 특정한 경우에 발휘되는 신의 힘의 고립된 개입에 의해 초래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법칙의 확립에 의해 초래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윈은 진화론에 대한 자신의 가설을 세우고 검증하는 과정에서 휴얼의 개념들을 사용했지만, 휴얼 자신은 다윈의 이론 자체를 지지하지 않았다. 휴얼은 진화론의 개념에 대해 반대했다. 그는 1845년에 이전 저서의 발췌문으로 구성된 새로운 책 『창조주의 징후(Indications of the Creator)』를 출판하여 인기 있는 익명의 진화론 저서 『창조의 자연사의 흔적(Vestiges of the Natural History of Creation)』에 대응했다. 나중에 휴얼은 다윈의 진화론에 반대했다.[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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