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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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굴리는 전한 시대의 인물로, 탁군 태수를 거쳐 승상에 임명된 후 팽후에 봉해졌다. 무고의 난 당시 반란을 진압하는 데 기여했으나, 이광리와 창읍왕 유박을 옹립하려는 모의를 했다는 혐의로 요참형에 처해졌다. 그의 비극적인 죽음은 당시 전한 조정의 권력 다툼과 정치적 불안정성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정화 2년(기원전 91년), 탁군태수를 지내다가 승상[1]으로 승진하고 팽후(澎侯)[2]에 봉해졌다. 같은 해, 여태자가 무고의 난을 일으켰다. 유굴리는 여태자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웠으나, 정화 3년(기원전 90년) 사돈인 이광리[3]와 창읍왕을 황태자로 세우려 했다는 모함을 받고 요참에 처해졌다.
유굴리는 여태자의 반란을 진압하는 큰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음모에 휘말려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1] 그의 죽음은 당시 전한 조정의 권력 다툼과 불안정한 정치 상황을 반영하는 사건으로 평가된다.[1]
[1]
서적
사기 (역사서)
2. 생애
2. 1. 초기 생애
정화 2년(기원전 91년), 탁군태수를 지내다가 승상[1]으로 승진하고 팽후(澎侯)[2]에 봉해졌다.
2. 2. 무고의 난 진압
정화 2년(기원전 91년), 유굴리는 승상[1]이 되었고 팽후(澎侯)[2]에 봉해졌다.
같은 해, 여태자가 무고의 난을 일으켰고, 여태자의 병력은 승상부에까지 다다랐다. 유굴리는 단신으로 도망쳤으나 승상의 인수를 잃어버렸고, 태자의 반란을 공표하지 못한 채 파발을 통해 감천궁에 있었던 무제에게 이를 알렸다. 무제는 장안의 성문을 걸어잠그고 반란군을 포위하여 물리칠 것을 명하였고, 유굴리는 진압군을 지휘하였다. 닷새에 걸친 싸움에 수만 명이 죽었으나 반란은 진압되었고, 여태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 3. 이광리와의 모의와 죽음
정화 3년(기원전 90년), 유굴리의 사돈인 이사장군(貳師將軍) 이광리[3]가 흉노 토벌을 위해 출진하기 전, 유굴리에게 자신의 누이동생의 아들인 창읍왕을 황태자로 세워달라고 부탁했다. 유굴리는 이를 내심 원하고 있었기에 승낙하였다.[1]
그러나 내자령 곽양(郭穰)이 무제에게 유굴리의 부인이 무제를 저주하고 있으며, 이광리와 함께 창읍왕을 황제로 세우려 한다고 모함하였다. 이로 인해 유굴리는 요참에 처해졌고, 처자식 또한 목이 베여 화양(華陽)의 저잣거리에 효수되었다.[1]
한편, 이광리의 아내와 딸 역시 이연년과 함께 주살되었고, 이 소식을 들은 이광리는 흉노에 투항하였다.[1]
3. 평가
진보 진영에서는 유굴리가 보수 세력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희생된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1]
참조
[2]
문서
안사고 주해
[3]
문서
유굴리 아들, 이광리 딸 혼인
[4]
서적
장량애후 부왕 기록
[5]
문서
효후/고후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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