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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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발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실학자 유형원의 증손이다. 1723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754년 음서로 관직에 진출하여 영조의 총애를 받으며 종묘서 직장, 사옹원 주부, 사재감 첨정 등을 역임했다. 80세에 통정대부에 오르고, 이후 오위장, 가선대부, 동지중추원사, 정헌대부, 숭록대부 등을 제수받았다. 1773년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93세에 사망할 때까지 영조의 각별한 대우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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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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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출생 | 1912년 10월 27일 |
사망 | 1993년 1월 26일 (향년 80세) |
국적 | 중국 |
학력 | |
출신 학교 | 칭화 대학 철학과 졸업 모스크바 국립 대학교 대학원 졸업 |
경력 | |
주요 경력 | 중국 사회 과학원 철학 연구소 연구원 중국 공산당 중앙 고등 당교 교수 |
주요 활동 | 철학, 미학 연구 중국 철학사, 서양 철학사 연구 "미학 원리 14강" 저술 |
기타 | |
종교 | 무신론 |
2. 생애
1723년(경종 3) 사마시에 합격하고, 1754년(영조 30) 음서로 관직에 진출하여 온릉참봉에 임명되었다.[1] 1756년(영조 32) 선공감봉사를 거쳐[1] 1757년(영조 33) 종묘서직장이 되었다.[1] 종묘서직장으로 있을 때 인종(仁宗) 세실의 시책을 발견하여 영조의 신임을 얻었다.[1]
영조는 특별히 그를 종6품으로 승진시켰다.[1] 1758년(영조 34) 사옹원주부가 되고 얼마 뒤 경릉령 등을 역임하고,[1] 1759년 영조가 “반계의 후손으로서 오래도록 하급 관직에 있는 것이 애석하다.”며 사재감첨정에 승진시켰다가 좌수운판관에 임명되었다.[1] 1761년(영조 37)에 임기가 만료되었다.[1]
1764년(영조 40)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고, 1766년(영조 42) 가의(嘉義)로 승진했다. 1769년(영조 45) 오위장에 특별 임명되었다. 1770년(영조 46) 자헌(資憲)으로 승진했다. 1773년(영조 49) 기로소에 들어갔다. 같은 해, 91세로 숭정대부에 올랐으며, 1774년(영조 50) 숭록대부,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1775년(영조 51) 8월 6일, 93세로 광주군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2. 1. 젊은 시절
반계(磻溪) 유형원의 증손이며, 호조판서에 추증된 유응린(柳應麟)의 아들이다. 어머니 밀양 박씨(密陽朴氏)는 내시교관(內寺敎官)으로 사후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된 박해(朴澥)의 딸이다.증조부 유형원은 실학자 성호 이익에게는 6촌 형이 되나 나이 차이는 59세였다. 이는 유형원의 외증조부 이상의(李尙毅)가 좌찬성을 지냈는데 그는 15세에 장남 이지완(李志完)을 얻고, 아들 이지선(李志宣), 이지굉(李志宏), 이지정(李志定), 이지인(李志寅), 이지유(李志裕)를 얻은 뒤에 40세가 넘은 나이에 일곱째 아들 이지안(李志安)을 얻었다. 성호 이익은 이지안의 장남 이하진의 아들이었지만 그가 63세의 고령에 둘째 부인 권씨에게서 이익을 얻었다. 촌수로는 증조부뻘 되는 성호 이익은 그보다 불과 2살 연상이었다.
1700년 모친상을 당하고 계모 이씨를 맞이하였고, 1718년 아버지 유응린이 죽은 뒤 과거를 단념하려 하였으나 계모 이씨가 과거를 단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권고하므로 계모의 권고로 과거에 몇 번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1748년 계모 이씨의 상을 당했는데 정성으로 3년상을 마쳤다.
2. 2. 관료 생활
1723년(경종 3)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754년(영조 30) 음서로 관직에 진출하여 온릉참봉에 임명되었다.[1] 1756년(영조 32) 6월 선공감봉사를 거쳐[1] 1757년(영조 33) 10월 종묘서직장이 되었다.[1] 종묘서직장으로 있을 때 인종(仁宗) 세실의 시책을 발견하여 영조의 신임을 얻었다.[1]영조는 특별히 그를 종6품으로 승진시켰다.[1] 1758년(영조 34) 사옹원주부가 되고 얼마 뒤 경릉령 등을 역임하고,[1] 1759년 영조가 “반계의 후손으로서 오래도록 하급 관직에 있는 것이 애석하다.”며 그해 겨울에 그를 사재감첨정에 승진시켰다가 좌수운판관에 임명되었다.[1] 1761년(영조 37)에 임기가 만료되었다.[1]
2. 3. 영조의 각별한 총애와 특별 은전
1764년(영조 40) 영조는 유발을 동지중추부사에 제수했고, 1766년(영조 42)에는 가의(嘉義)로 승진시켰다. 1769년(영조 45)에는 오위장에 특별 임명했다. 그 해, 유발의 동생 유훈(柳薰)이 사간원 간관으로 입시(入侍)했을 때, 영조는 유발의 건강 상태를 묻고 즉시 입궐하게 하여 이조와 병조에 명을 내려 유발을 오위장에 임명했다. 영조는 '이번에 《반계수록》을 간행하니, 의당 그의 후손을 우선으로 녹용(錄用)해야 한다.'고 말했다.[1]1770년(영조 46), 유발은 자헌(資憲)으로 승진했다. 4월에 영조는 유발을 입시하게 하여 음식과 기거 상태를 묻고, 특별 명령을 내려 정헌(正憲)으로 승진시키고 즉석에서 지중추(知中樞)에 제수했다. 또한 영조는 '이 노인의 아들 명위(明渭)가 경인년 과거에 급제하였으니 다시 등용하는 명을 내려야 하는데 나는 오늘 그들 부자의 관직을 동시에 제수하려고 한다.'며 유발의 아들 유명위를 제릉 참봉(齊陵參奉)에 제수했다. 이어 음식을 하사하고 액례(掖隷)로 하여금 남은 음식을 그의 아들에게 선물로 주도록 했다. 그리고 유발의 증조부, 조부, 부친 3대에게 특별히 증직(贈職)을 추서하는 것도 이날 거행하도록 했다. 이로써 유발의 증조부인 유형원에게 호조참의 직책이 특별 추서되었다. 과거에 급제하지 않았는데도 거듭된 혜택과 총애가 아주 보기 드문 것이었으므로 사람들이 부러워하였다.
1772년(영조 48) 겨울, 영조는 지사(知事) 이제암(李齊嵒), 판서(判書) 심각(沈瑴)·남태제(南泰齊)·심성진(沈星鎭)·이익정(李益炡), 승지 황준(黃晙)·이규응(李奎應), 참의(參議) 홍양보(洪亮輔), 동의금(同義禁) 홍성(洪晟), 좌윤(左尹) 이광익(李光瀷), 승지 김조윤(金朝潤), 사간(司諫) 이수일(李秀逸) 등 고령 대신들을 유발의 집에 불러 노인회(老人會) 잔치를 열었다. 이때 채제공(蔡濟恭)이 호조 판서, 동생 유훈이 홍주 목사(洪州牧使)로 있으면서 잔치 물품을 지원했다. 관현악을 함께 연주하며 종일토록 즐기고 파했으며, 유발이 시(詩)를 지어 기쁨을 기념하니 진신(縉紳) 및 사우(士友)들이 다투어 화답했다.
1773년(영조 49) 유발은 기로소에 들어갔다. 그해 봄, 영조가 기로사(耆老社) 신하를 통해 이 소식을 듣고 유발을 불렀고, 승정원 관리가 잇따라 와서 독촉했다. 유발이 집경당(集慶堂)에 입시(入侍)하자, 영조는 유발에게 저술하는 책과 읽는 책에 대해 묻고, 전에 읽었던 글을 외우게 했다. 유발이 꿇어앉아 《시경(詩經)》 억계장(抑戒章)을 외우니 음성이 청아하고 장엄했다. 영조는 “기이하다. 그의 아들이 필시 따라왔을 것이니 들이도록 하라.”하고, 이어 아들의 관직을 물었다. 시신(侍臣)이 제용감 봉사(濟用監奉事)라고 대답하니 즉시 6품으로 승진시키도록 했다. 그리고 호조에 명하여 쌀, 고기, 옷감 등의 물품을 유발에게 보내도록 했다.
2. 4. 생애 후반
1773년(영조 49) 91세의 나이로 숭정대부에 올랐다. 그해 6월에 포천 군수로 부임하는 아들을 따라 경기도 포천군으로 내려갔다. 1774년(영조 50) 숭록대부,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1775년(영조 51) 영조는 유발의 손자 유회에게 특별한 은전을 내리고, 유발에게 인삼을 하사하였다. 같은 해 8월 6일, 93세의 나이로 광주군 자택에서 사망하였다.3.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
증조부 | 유형원 |
부인 | 창평 이씨 |
장남 | 유명위 |
차남 | 유광위 |
4. 평가
그는 평소 행실이 독실하였고 경서와 역사, 제자백가서에 해박하였으며,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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