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발 (상산왕)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유발(상산왕)은 전한 시대 상산왕으로, 불효와 부도덕한 행실로 인해 폐위된 인물이다. 그는 아버지의 병환 중 간호를 소홀히 하고, 서형 유탈에게 재물을 나누어주라는 충고를 거부하여 원한을 샀다. 유탈의 고발로 한나라의 조사를 받게 되었으며, 증거를 은폐하고 관리들을 매질하는 등 무례한 행동을 보였다. 결국 폐위되어 방릉으로 유배되었고, 상산국은 폐지되었다. 이후 황제는 유발의 아우들을 왕으로 봉하여 진정왕과 사수왕으로 삼았다.
유발은 전한의 제후왕으로, 상산헌왕 유순의 아들이다. 아버지 유순이 병들었을 때 제대로 간병하지 않았으며, 아버지 사후 서형인 유탈 등 다른 서자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라는 권유를 무시하고 상산국의 왕위를 계승했다.[2]
2. 생애
왕위에 오른 후에는 아버지의 상중에 간음, 음주, 박희(도박의 일종), 격축(공차기 놀이) 등을 즐기고, 죄수들을 마음대로 만나는 등 부도덕하고 방탕한 행동을 일삼았다. 또한, 이러한 행적을 조사하러 온 한나라의 관리 장건의 조사를 방해하고 관리를 매질하는 등 중앙 정부와 갈등을 빚었다.[2]
결국 이러한 불효와 부도덕한 행위, 한나라 조정에 대한 반항적인 태도 등으로 인해 즉위한 지 불과 몇 달 만에 무제에 의해 왕위에서 폐위되었다. 유발과 그의 일가는 방릉으로 유배되었고, 상산국은 폐지되었다.[2] 훗날 무제는 상산국이 폐지된 것을 안타깝게 여겨 유발의 동생인 유평을 진정왕으로, 유상을 사수왕으로 삼아 옛 상산국의 일부 지역을 다스리게 했다.[2]
2. 1. 상산왕 즉위와 불효
어머니 수왕후는 아버지 상산헌왕의 총애를 받지 못했다. 아버지가 병이 깊어지자 총애하던 희첩들이 시중을 들었는데, 이에 질투한 수왕후는 관사로 떠나 버렸다. 유발 자신도 아버지를 간병하지 않았고, 아버지가 먹는 약을 맛보지도 않았으며 병상을 지키지도 않았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자리에 나타났다.[2]
낭(郎)이 찾아와, 아버지에게 아들로 인정받지 못한 서형 유탈과 다른 서자들에게 재물을 나누어 주라고 권했지만, 유발은 이를 듣지 않고 왕위에 올랐다. 이 일로 유탈은 유발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다. 유탈은 한나라에서 파견된 사신에게 유발이 아버지를 제대로 모시지 않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간음, 음주, 박희, 격축을 즐기고, 여자들과 수레를 타고 성을 돌아다니며 시장 구경을 하거나 감옥에 들어가 죄수들을 만나는 등의 행동을 했다고 고발했다.[2]
이에 한나라 조정에서는 대홍려 장건을 보내 사실 여부를 조사하고 관련 증인들을 체포하려 했다. 하지만 유발은 이들을 숨겨주었다. 관리가 증인들을 체포하려 하자, 유발은 사람을 시켜 관리를 매질하고 한나라에서 잡아 가둔 죄수들을 마음대로 풀어주기까지 했다. 담당 관리(유사)는 유발과 수왕후를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한무제에게 청했으나, 무제는 수왕후가 도리에 어긋난 행동을 했고 유발에게는 좋은 스승이 없었다는 이유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유사는 유발을 왕위에서 쫓아내고 일가를 방릉으로 유배 보내라고 다시 청했고, 무제는 이를 승인했다. 결국 유발은 왕위에 오른 지 불과 몇 달 만에 폐위되었고, 상산국은 폐지되었다.[2]
훗날 무제는 상산국이 사라진 것을 안타깝게 여겨, 유발의 두 동생을 왕으로 삼았다. 유평은 옛 상산군의 일부를 받아 아버지 상산헌왕의 제사를 잇는 진정왕이 되었고, 유상은 동해군의 일부를 받아 사수왕이 되었다.[2]
2. 2. 한나라 조정과의 갈등
유발의 어머니 수왕후는 아버지 유순의 총애를 받지 못했다. 유순이 병이 깊어지자 총애하던 희첩들만 시중을 들게 하였고, 이에 질투를 느낀 수왕후는 관사로 떠나버렸다. 유발 또한 아버지에게 올리는 약을 맛보거나 병상을 지키지 않았으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에야 자리에 나타났다.
낭(郎)이라는 직책의 관리가 찾아와, 아버지에게 아들로 인정받지 못한 서형 유탈과 다른 서자들에게 재물을 나누어 주도록 권했으나 유발은 이를 듣지 않고 왕위에 올랐다. 이 일로 유탈은 유발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다. 유탈은 한 조정에서 파견된 사신에게 유발이 아버지를 제대로 모시지 않았으며, 아버지가 죽은 후에는 간음, 음주, 박희(도박의 일종), 격축(공차기 놀이)을 일삼고, 여자들과 수레를 타고 성 주위를 돌며 시장을 구경하고, 감옥에 들어가 죄수들을 만나는 등 방탕한 행동을 했다고 고발했다.
이에 한나라 조정에서는 대행 장건을 보내 사건을 심문하고 관련 증인들을 체포하려 했다. 그러나 유발은 증인들을 숨겨주었다. 한나라 관리가 강제로 체포하려 하자, 유발은 사람을 시켜 관리를 매질하고 한나라에서 잡아 가둔 죄수들을 마음대로 풀어주었다. 유사가 유발과 수왕후를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무제에게 상주했으나, 무제는 수왕후가 도리에 어긋난 행동을 했고 유발에게 좋은 스승이 없었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 유사는 다시 유발을 왕위에서 폐하고 일가를 방릉으로 유배 보내야 한다고 청했고, 무제는 이를 받아들였다. 결국 유발은 왕이 된 지 불과 몇 달 만에 폐위되었고, 상산국은 폐지되었다.
훗날 무제는 상산국을 폐지한 것을 안타깝게 여겨, 유발의 두 동생을 왕으로 삼았다. 유평은 옛 상산군의 일부를 받아 아버지 상산헌왕의 제사를 잇는 진정왕이 되었고, 유상은 동해군의 일부를 받아 사수왕이 되었다.[2]
2. 3. 폐위와 상산국 폐지
어머니 수왕후가 아버지의 총애를 받지 못했다. 아버지가 병이 심해지자 총애하는 희첩들에게 시중을 들게 했는데, 이 때문에 어머니가 질투하여 관사로 떠났고, 유발 자신도 아버지에게 올리는 약을 맛보거나 병상을 지키지 않았으며, 아버지가 죽고 나서야 자리에 나타났다.
낭(郎)이 찾아와 아버지에게 아들로 인정받지 못한 서형 유탈과 다른 서자들에게 재물을 나누어 주도록 권했으나 듣지 않고 왕위에 올랐다. 이 일로 유탈의 원한을 사게 되었고, 유탈은 한나라에서 보낸 사신에게 유발이 아버지를 제대로 모시지 않았으며, 아버지가 죽은 후에는 간음, 음주, 박희(博戲), 격축(擊鞠), 여자들과 수레 타기, 성을 돌며 시장 구경하기, 감옥에 들어가 죄수 만나기 등의 부도덕한 행동을 했다고 고발했다.
한나라에서는 대행 장건을 보내 사건을 심문하고 증인들을 체포하려 했으나, 유발은 이들을 숨겼다. 관리가 체포하려 하자 사람을 보내 매질하고 한나라에서 잡아 가둔 죄수들을 마음대로 풀어주었다. 유사가 유발과 수왕후를 주살해야 한다고 청했지만, 무제는 수왕후가 무도하고 유발에게 좋은 스승이 없었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대신 유사는 유발을 왕위에서 폐하고 일가를 방릉으로 유배 보내라고 건의했고, 무제는 이를 승인했다. 결국 유발은 왕이 된 지 몇 달 만에 폐위되었고, 상산국은 폐지되었다.
나중에 황제가 상산국을 멸한 것을 안타깝게 여겨, 상산왕의 두 아우를 왕으로 봉했다. 유평은 상산군의 일부를 받아 상산헌왕의 가계를 이어 진정국의 왕이 되었고, 유상은 동해군의 일부를 받아 사수국의 왕이 되었다.[2]
2. 4. 이후
서형 유탈이 찾아와 아버지에게 아들로 여겨지지 않은 자신과 다른 서자들에게 재물을 나누어 주도록 권했으나, 유발은 이를 듣지 않고 왕이 되었다. 이 때문에 유탈의 원한을 사게 되었고, 유탈은 한나라에서 보낸 사신에게 새 왕(유발)이 아버지를 제대로 모시지 않았으며, 아버지가 죽자 간음, 음주, 박희, 격축(공놀이), 여자들과 수레 타기, 성 주위를 돌며 시장 구경하기, 감옥에 들어가 죄수 만나기 등의 부적절한 행동을 했다고 고발했다.
한나라에서는 대행 장건을 보내 사실 여부를 심문하고 증인들을 체포하려 했으나, 유발은 이들을 숨겨주었다. 관리가 체포하려 하자 사람을 보내 매로 때리고, 한나라에서 잡아 가둔 죄수들을 마음대로 풀어주었다. 유사가 유발과 어머니 수왕후를 주살하도록 청했지만, 무제는 수왕후가 도리에 어긋나고 유발에게 좋은 스승이 없었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 대신 유사는 유발을 왕위에서 쫓아내고 일가를 방릉으로 유배 보내라고 청했고, 이는 받아들여졌다. 결국 유발은 왕이 된 지 몇 달 만에 폐위되었고, 상산국은 폐지되었다.
나중에 황제(한무제)가 상산국을 없앤 것을 안타깝게 여겨, 상산왕(유순)의 다른 두 아들을 왕으로 봉했다. 유평은 옛 상산군의 일부를 받아 상산헌왕의 제사를 잇는 진정왕이 되었고, 유상은 동해군의 일부를 받아 사수왕이 되었다.[2]
참조
[1]
문서
한서 무제기에서는 이름자를 㪍이라고 한다.
[2]
서적
한서
[3]
문서
여나라가 도중에 제천나라로 이름이 바뀐 것으로, 유명 (제천왕)|유명이 봉해진 진류군|제천나라와는 연관이 없다.
[4]
문서
작위만 추증된 것으로, 봉지는 없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