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복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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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복형은 몽골 제국 시대의 무장으로, 아버지 유통의 뒤를 이어 몽골 제국에 복무했다. 몽케 칸의 남송 원정에 참전하고, 쿠빌라이 칸 치세에는 아릭 부케와의 내전에서 활약하며 무위군 부도지휘사, 좌익 시위친군 부도지휘사 등을 역임했다. 1274년 원나라의 일본 원정 당시 좌부도원수로서 일본을 침공했으나, 하카타 전투에서 부상당했다. 이후 타이핑루 총관 등을 지내다 1283년에 사망했다.
동평로의 한인 군벌 엄실 휘하 무장 유통의 아들로 태어나 야율초재 밑에서 공부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몽골 제국에 출사하여 몽케 칸의 남송 원정에 참여했으며, 이후 쿠빌라이 칸을 섬겨 그의 친위군인 무위군(시위친군)의 부대장이 되었다. 1260년에는 카라코룸 경비 임무를 수행했고, 1262년 이탄의 난 때는 사재를 털어 군량미를 보충하기도 했다.
2. 생애
1273년 여몽연합군의 제1차 일본 원정(분에이의 역) 당시 정동 좌부도원수(부사령관 격)로 임명되어 군사 4만 명과 전선 900척을 이끌고 참전했다.[1] 하카타에 상륙하여 전투를 벌이던 중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었고, 이는 원정군이 철수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
원정 실패의 책임을 지고 강등되어 제2차 일본 원정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이후 타이핑루 총관, 진국상장군, 화이시도 선위사 도원수 등을 역임했으며, 1283년 봉국상장군에 오른 해에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와 배경
아버지는 행군천호 유통이다. 아버지 유통은 동평로의 4대 한인 군벌 중 한 명인 엄실 휘하의 무장이었으며, 덕주 군민총관을 지냈다.
유복형은 야율초재의 문인이었다. 야율초재의 문집인 『담연거사문집』에는 「대유수청지공니선주보선사」와 「송문인유복형정촉」이라는 글에서 유복형의 이름이 언급된다. 이 글에서 야율초재는 유복형에 대해 "네가 제자가 된 지 20년이나 되었는데 학문을 좋아하지 않고 싸움만 하고 다녔구나"라고 평가했다.
2. 2. 몽골 제국에서의 활약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몽케 칸의 남송 원정에 참여하여, 엄씨의 동평군을 이끌고 공적을 세웠다. 몽케 칸 사후 권력 다툼 과정에서 쿠빌라이 칸은 아릭 부케에 맞서기 위해 한인 군벌의 병력을 자신의 직속 친위군으로 편입하여 무위군(후에 시위친군)을 조직했다. 이때 유복형은 4대 세후 휘하의 유력 무장 중 한 명으로 발탁되어 부대장급 장교로 임명되었다.
중통 원년(1260년)에는 쿠빌라이 칸이 아릭 부케를 물리친 후 카라코룸을 경비하는 임무를 맡았고, 무위군 부도지휘사(부사령관)가 되었다. 중통 3년(1262년) 한인 군벌 이탄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는 부족한 군량미를 보충하기 위해 자신의 재산을 내놓았으며, 이에 쿠빌라이 칸이 포상금을 내렸으나 이를 사양하였다.
지원 2년(1265년)에는 좌익 시위친군 부도지휘사로 임명되었고, 지원 9년(1272년)에는 소용대장군·봉주 등처 경략사 직책을 받았다. 지원 10년(1273년)에는 일본 침공을 위한 원정군의 부사령관 격인 정동 좌부도원수에 임명되었다.
2. 3.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
지원 11년(1274년), 원나라의 일본 1차 침공(분에이의 역) 당시 좌부도원수로서 참전하였다.[1] 『원사』 유복형전에는 그가 군사 4만, 전선 900척을 통솔하여 일본을 정벌했다고 기록되어 있다.[1]
2. 3. 1. 하카타 전투와 부상
지원 11년(1274년), 원의 일본 1차 침공(분에이의 역) 당시 좌부도원수로서 참전했다. 『원사』 유복형전에는 "(유복형은) 정동 좌부도원수로 옮겨, 군사 4만, 전선 900척을 통솔하여 일본을 정벌했다. 왜병 10만과 마주쳐 싸워 이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카타에 상륙한 후 벌어진 모모치하마·메이노하마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다. 원나라 측 기록인 『고려사』에 따르면 날아온 화살에 맞았다고 한다. 반면 일본 측 기록인 『하치만구도훈』에는 쇼니 카게스케가 활을 쏘아 적군 대장을 말에서 떨어뜨렸는데, 이후 잡힌 포로가 그 인물이 대장군 유장공(유복형으로 추정됨)이었다고 증언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 지휘관의 부상으로 원나라 군대는 혼란에 빠져 결국 패주했다.
2. 4. 일본 원정 이후
원나라로 돌아온 후, 1차 일본 원정 패전의 책임을 지고 강등되었다. 이로 인해 두 번째 침공인 홍안의 역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이후, 1278년(지위안 15년)에는 타이핑루 총관, 진국상장군, 화이시도 선위사 도원수로 임명되었고, 1283년(지위안 20년)에는 봉국상장군에 올랐으나 같은 해 3월에 사망했다.
아들로는 류하오, 류쩌, 류리, 류위안, 류회가 있다.
참조
[1]
서적
고려사 권제28 세가권제28 충렬왕 즉위년(1274년) 8월 6일 기유
[2]
서적
고려사 권제104 열전 권제17 제신(諸臣) 김방경
[3]
서적
고려사 권제28 세가제28 충렬왕 원년(1275년) 1월 4일 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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