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 (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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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신은 신나라와 후한 시대의 인물로, 경시제, 광무제 등을 섬겼다. 왕망 집권기에 가문의 원한을 갚기 위해 복수극을 벌였으며, 경시제 휘하에서 분위대장군으로 유망을 격파하여 여남군을 평정하고 여음왕에 봉해졌다. 이후 광무제에게 투항하여 여음후가 되었으나, 초왕 유영의 모반에 연루되어 봉국을 잃었다.
왕망 집권 시절 전한 종실들은 관리들에게 많은 침해를 받았는데, 채양국 부정(釜亭)의 정장이 유신의 종조부이자 경시제의 아버지 유자장(劉子張)을 욕보였다. 유자장은 정장을 죽였고, 십여 년이 지나 정장의 아들이 보복해 경시제의 동생 유건을 죽였다. 유신의 아버지 유현(劉顯)은 빈객을 모아 복수하려 했으나 들통나 관리에게 잡혀 죽었다.[4] 유신은 숙부 유사와 함께 집과 밭을 팔아 진정(陳政) 등 아홉 자객을 사서, 정장의 처와 아들 4명을 죽여 복수하고 함께 망명해 숨었다.[4][1][2] 마침 사면돼 고향으로 돌아왔다.
2. 생애
경시 원년(23년), 유사가 대사도에 임명돼 여남에서 황제를 일컬은 유망을 공격했으나 유망의 장수 장우와 진무에게 격파당했다. 유신은 경시제에게서 분위대장군(奮威大將軍)으로 임명돼 유사를 대신해 유망 공격을 맡았고, 유사는 경시제와 함께 낙양으로 돌아갔다. 이해 10월, 드디어 유망을 격파하고 유망·장우·진무를 죽여 여남군을 평정했다.[5]
경시 2년(24년), 경시제가 제후왕을 봉하면서[5] 여남 평정의 공로로 여남군 여음 땅의 여음왕(汝陰王)으로 봉해졌다. 장병들을 거느리고 강남을 평정하고 예장군에 웅거했다. 그러나 광무제가 즉위할 무렵 계양태수 장륭[3]에게 격파돼, 낙양으로 가서 광무제에게 투항하고 여음후에 봉해졌다.
영평 13년(70년), 초왕 유영의 모반에 연좌돼 봉국을 잃었다.[4] 이 때 관계자는 사형 또는 유배에 처해졌으나, 유신에 대한 처분이 어느 쪽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성명 유신(劉信) 시대 신나라 - 후한 시대 생몰년 〔불상〕 자·별호 〔불상〕 본관·출신지 등 형주남양군채양현 직관 〔충릉군 부장〕?→분위대장군〔경시〕 작위·호 등 여음왕〔경시〕→여음후〔후한〕 진영·소속 등 유연→경시제→광무제 가족·일족 부: 유현 숙부: 유사
2. 1. 가문과 복수
왕망 집권 시절, 전한 종실들은 관리들에게 많은 침해를 받았다. 채양국 부정(釜亭)의 정장이 유신의 종조부이자 경시제의 아버지 유자장(劉子張)을 욕보이자, 유자장은 정장을 죽였다. 십여 년 후, 정장의 아들이 보복하여 경시제의 동생 유건을 죽였다. 유신의 아버지 유현(劉顯)은 빈객을 모아 복수하려 했으나 발각되어 관리에게 잡혀 죽었다.[4] 유신은 숙부 유사와 함께 집과 밭을 팔아 진정(陳政) 등 아홉 자객을 사서 정장의 처와 아들 4명을 죽여 복수하고 함께 망명해 숨었다.[4][2] 마침 사면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4]
성명 | 유신(劉信) |
---|---|
시대 | 신대 - 후한 시대 |
생몰년 | 〔불상〕 |
자·별호 | 〔불상〕 |
본관·출신지 등 | 형주남양군채양현 |
직관 | 〔충릉군 부장〕?→분위대장군〔경시〕 |
작위·호 등 | 여음왕〔경시〕→여음후〔후한〕 |
진영·소속 등 | 유연→경시제→광무제 |
가족·일족 | 부: 유현 숙부: 유사 |
2. 2. 경시제 휘하에서의 활약
왕망 집권 시절, 채양국 부정(釜亭)의 정장이 경시제의 아버지 유자장(劉子張)을 욕보였다. 유자장은 정장을 죽였으나, 십여 년 후 정장의 아들에게 보복당해 경시제의 동생 유건이 살해당했다. 유신의 아버지 유현(劉顯)은 복수를 꾀했으나 발각되어 죽임을 당했다. 유신은 숙부 유사와 함께 가산을 털어 자객을 고용, 정장의 처와 아들 4명을 죽여 복수하고 망명했다가 사면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4]경시 원년(23년), 유사는 대사도에 임명되어 여남에서 황제를 칭한 유망을 공격했으나, 유망의 장수 장우와 진무에게 패했다. 유신은 경시제에게서 분위대장군(奮威大將軍)으로 임명되어 유사를 대신해 유망 공격을 맡았고, 이해 10월 유망을 격파하고 유망·장우·진무를 죽여 여남군을 평정했다.[5]
경시 2년(24년), 경시제가 제후왕을 봉하면서[5] 여남 평정의 공로로 유신은 여음왕(汝陰王)에 봉해졌다.
성명 | 유신(劉信) |
---|---|
시대 | 신대 - 후한 시대 |
생몰년 | 〔불상〕 |
자·별호 | 〔불상〕 |
본관·출신지 등 | 형주남양군채양현 |
직관 | 〔충릉군 부장〕?→분위대장군〔경시〕 |
작위·호 등 | 여음왕〔경시〕→여음후〔후한〕 |
진영·소속 등 | 유연→경시제→광무제 |
가족·일족 | 부: 유현 숙부: 유사 |
2. 3. 여음왕 책봉과 강남 평정
왕망 집권 시절, 전한 종실들은 관리들에게 많은 침해를 받았다. 채양국 부정(釜亭)의 정장이 유신의 종조부이자 경시제의 아버지 유자장(劉子張)을 욕보이자, 유자장은 정장을 죽였다. 십여 년 후, 정장의 아들이 보복하여 경시제의 동생 유건을 살해했다. 유신의 아버지이자 유건의 사촌 형제인 유현(劉顯)은 빈객을 모아 복수하려 했으나 발각되어 관리에게 잡혀 죽었다. 유신은 숙부 유사와 함께 가산과 밭을 팔아 진정(陳政) 등 아홉 자객을 사서 정장의 처와 아들 4명을 죽여 복수하고 함께 망명해 숨었다.[4] 마침 사면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1][2]경시 원년(23년), 유사가 대사도에 임명되어 여남에서 황제를 칭한 유망을 공격했으나, 유망의 장수 장우와 진무에게 격파당했다. 유신은 경시제에게서 분위대장군(奮威大將軍)으로 임명되어 유사를 대신해 유망 공격을 맡았고, 유사는 경시제와 함께 낙양으로 돌아갔다. 이해 10월, 유신은 유망을 격파하고 유망·장우·진무를 죽여 여남군을 평정했다.[5]
경시 2년(24년), 경시제가 제후왕을 봉하면서[5] 여남 평정의 공로로 유신은 여남군 여음 땅의 여음왕(汝陰王)으로 봉해졌다. 장병들을 거느리고 강남을 평정하고 예장군에 웅거했다. 그러나 광무제가 즉위할 무렵 계양태수 장융[3]에게 격파되어 낙양으로 가 광무제에게 투항하고 여음후에 봉해졌다.
영평 13년(70년), 초왕 유영의 모반에 연좌되어 봉국을 잃었다.
성명 | 유신(劉信) |
---|---|
시대 | 신나라 - 후한 시대 |
생몰년 | 〔불상〕 |
자·별호 | 〔불상〕 |
본관·출신지 등 | 형주남양군채양현 |
직관 | 〔충릉군 부장〕?→분위대장군〔경시〕 |
작위·호 등 | 여음왕〔경시〕→여음후〔후한〕 |
진영·소속 등 | 유연→경시제→광무제 |
가족·일족 | 부: 유현 숙부: 유사 |
2. 4. 광무제에게 투항
왕망 집권 시절 전한 종실들이 관리들에게 침해받는 일이 많았는데, 채양국 부정(釜亭)의 정장이 유신의 종조부이자 경시제의 아버지 유자장(劉子張)을 욕했다. 유자장은 정장을 죽였고, 십여 년이 지나 정장의 아들이 보복해 경시제의 동생 유건을 죽였다. 유신의 아버지 유현(劉顯)은 빈객을 모아 복수하려 했으나 들통나 관리에게 잡혀 죽었다. 유신은 숙부 유사와 함께 집과 밭을 팔아 진정(陳政) 등 아홉 자객을 사서, 정장의 처와 아들 4명을 죽여 복수하고 함께 망명해 숨었다.[4] 마침 사면돼 고향으로 돌아왔다.[1][2]경시 원년(23년), 유사가 대사도에 임명돼 여남에서 황제를 일컬은 유망을 공격했으나 유망의 장수 장우와 진무에게 격파당했다. 유신은 경시제에게서 분위대장군(奮威大將軍)으로 임명돼 유사를 대신해 유망 공격을 맡았고, 유사는 경시제와 함께 낙양으로 돌아갔다. 이해 10월, 드디어 유망을 격파하고 유망·장우·진무를 죽여 여남군을 평정했다.[5]
경시 2년(24년), 경시제가 제후왕을 봉하면서[5] 여남 평정의 공로로 여남군 여음 땅의 여음왕(汝陰王)으로 봉해졌다. 장병들을 거느리고 강남을 평정하고 예장군에 웅거했다. 그러나 광무제가 즉위할 무렵에 계양태수 장륭(張隆)에게 격파돼[3], 낙양으로 가서 광무제에게 투항하고 여음후에 봉해졌다.
2. 5. 유영의 모반 연루
왕망 집권 시절, 전한 종실들은 관리들에게 많은 침해를 받았다. 채양국 부정(釜亭)의 정장이 유신의 종조부이자 경시제의 아버지 유자장(劉子張)을 욕보이자, 유자장은 정장을 죽였다. 십여 년 후, 정장의 아들이 보복하여 경시제의 동생 유건을 죽였다. 유신의 아버지 유현(劉顯)은 빈객을 모아 복수하려 했으나 발각되어 관리에게 잡혀 죽었다.[4][1] 유신은 숙부 유사와 함께 가산과 밭을 팔아 진정(陳政) 등 아홉 자객을 사서 정장의 처와 아들 4명을 죽여 복수하고 함께 망명하여 숨었다.[4][2] 마침 사면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경시 원년(23년), 유사가 대사도에 임명되어 여남에서 황제를 칭한 유망을 공격했으나, 유망의 장수 장우와 진무에게 격파당했다. 유신은 경시제에게서 분위대장군(奮威大將軍)으로 임명되어 유사를 대신해 유망 공격을 맡았고, 유사는 경시제와 함께 낙양으로 돌아갔다. 이해 10월, 유망을 격파하고 유망·장우·진무를 죽여 여남군을 평정했다.[5]
경시 2년(24년), 경시제가 제후왕을 봉하면서[5] 여남 평정의 공로로 여음왕(汝陰王)으로 봉해졌다. 장병들을 거느리고 강남을 평정하고 예장군에 주둔했다. 그러나 광무제가 즉위할 무렵 계양태수 장륭[3]에게 격파되어 낙양으로 가 광무제에게 투항하고 여음후에 봉해졌다.
영평 13년(70년), 초왕 유영의 모반에 연좌되어 봉국을 잃었다.[4] 이 때 관계자는 사형 또는 유배에 처해졌으나, 유신에 대한 처분이 어느 쪽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3. 평가
4. 가계
참조
[1]
서적
後漢書 劉賜伝註
[2]
서적
続漢書
[3]
서적
後漢書 岑彭伝
[4]
서적
속한서
[5]
서적
후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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